옥중서신 (8) -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아 (빌2장)
오늘은 옥중서신 여덟 번째 시간입니다. 에베소서가 끝나고 이제 빌립보서 두 번째 시간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여러 가지 특징이 있었는데, 바울이 2차 선교 여행 때 개척한 교회였습니다. 바울의 2차 선교 여행은 사실 에베소를 향한 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그를 강권적으로 역사하시고 인도하셔서 바울이 에베소로 가지 못하고 유럽으로, 마게도냐로 방향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기대하지도, 예기치도 않은 일이 거기에서 일어납니다.
빌립보 지역은 로마의 위성도시, 로마의 계획도시였기 때문에 거기에 유대인 공동체가 없었고, 그러다 보니 회당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회당이 없다는 것이 오히려 바울에게는 복음 전도를 자기 뜻하는 대로 더 열정적으로 감당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강가에 나가보니 거기 여성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중에 자색 옷감을 파는 사람, 루디아도 있었습니다. 루디아부터 그 교회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그 교회는 여성 성도들이 굉장히 많았던 교회입니다. 그래서 그 교회를 향한 바울의 기도를 보면, 사랑이 풍성해지기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여성들에게는 사랑이 많지 않습니까.
사랑이 풍성해지기를 기도하는데, 그냥 사랑이 많아지고 풍성해지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지식과 총명이 더해져야 사랑이 풍성해진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지극히 선한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게 되고,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게 되며, 그 결과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한다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나는 지금 죽어도 하나님 앞에 가기 때문에 나는 지금 죽어도 오히려 죽는 것이 훨씬 더 나에게는 유익이다. 그런데 내가 살아있는 이유는 너희에게 기쁨이 되고 너희를 성장시키는 것이 너희에게 위로가 되고 도움이 되기 때문에 내가 사는 것이다"라고 자신이 사는 이유도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에게 강한 권면을 하는데,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했습니다.
로마인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옷을 입고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것입니다. 그 권면이 빌립보서 1장의 흐름이었습니다. 이제 2장은 본격적으로, 그렇다면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려면 모델이 있어야 합니다. 그 모델이 누구이겠습니까?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본받으라고 말합니다.
1. 복음에 합당한 공동체
복음에 합당한 공동체는 어떠해야 합니까? 바울의 관심은 항상 교회 공동체였습니다. 빌립보 교회가 복음에 합당한 공동체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1절을 보면,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좋은 말이 다 있습니다. 권면, 위로, 교제, 긍휼, 자비. 좋은 말이 다 있지 않습니까. 교회 안에서 흔히 하는 말들이 여기 다 있습니다. 좋은 말이라고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것들이 이 속에 다 들어있습니다.
교회 안에 이런 것들이 다 있는데, 이런 것들이 있으면 무엇 하겠습니까. 이런 것들을 우리가 있다고 이야기하면 무엇 하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그다음에 이야기하는 것이 없는데 이것을 꼭 갖춰야 복음에 합당한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2절을 보면,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라고 합니다. 복음에 합당한 교회 공동체는 같은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같은 사랑, 한 마음. 그런데 여러분, 이것이 쉬운 일입니까, 어려운 일입니까?
1-1. 같은 사랑의 의미
제가 가끔 주례할 때 이 본문을 가지고 신랑 신부에게 말씀을 전하는데, 여기서 "같은 사랑"이라는 말이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왜 이 말이 중요한가 하면, 가정에서 부부가 많이 싸우지 않습니까. 다투고 싸우고 갈등하고 별것 아닌 것을 가지고 싸우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싸움의 원인을 깊이 들여다보고 성찰해 보면, 자기 주장이 있으니까 싸우는 것입니다. 자기 주장, 남편의 주장, 아내의 주장. 그런데 그 주장들이 서로 부딪칩니다. 부딪치면 불꽃이 튀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것이 싸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싸움이 없으려면 같은 사랑을 가져야 합니다.
신혼부부들이 무척 많이 싸우는데, 맞춰가는 과정이라고 우리는 이해합니다. 그런데 그 맞춰가는 과정을 그냥 내버려 두고, 같은 사랑을 가지도록 도와주지 않으면 나중에 더 큰 문제가 생깁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것이 어떻게 해결되었다고 생각합니까? 한쪽이 포기해버립니다. 그냥 굴종해버립니다. 흡수해버립니다. 그것을 우리는 흡수된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너무 강하니까, 내 남편이, 저 사람이 너무 세니까, 내가 내 주장을 해봐야 싸우기만 하니까. 그래서 30년을 참고 사는 것입니다. 서른에 결혼해서 60까지 참고 살다가, 남편이 은퇴를 딱 하면 "자, 이제 당신의 연금과 내가 지금까지 조금씩 모아 놓은 돈을 내가 받고, 이제 우리는 졸혼합시다. 지금까지 내가 많이 참고 살았으니."
그렇게 해서 흡수된 사랑은 언젠가는 터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누가 너무 강하니까 거기에 그냥 숙여주고 포기해버리는 사랑을, 그것을 같은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일단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해결된 것처럼 보이고, 안 싸우니까, 갈등이 없으니까.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교회도 안 싸우면 문제없는 것이겠습니까. 그런데 교회에도 목소리 큰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니, 저 사람하고 괜히 대립해봐야 나만 속상하고 속 시끄러우니까" 하며 포기해버리는 사람이 주변에 많은 것입니다. 그러면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이것이 왜곡되고 왜곡되다가 터져버립니다.
그것을 문제 해결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같은 사랑이라는 것은 누구의 사랑으로 흡수되는 것이 아닙니다. 너의 사랑도 나의 사랑도 고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밑바닥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뒷받침된 사랑, 바탕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전제가 된 사랑입니다. 그러면 흡수된 사랑이 아니지 않습니까. 나도 포기하고 너도 포기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무엇입니까?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희생하고 내어주고 포기하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나도 내 주장을 조금 포기하고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너도 너의 주장을 내려놓고 포기하고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기준이 되어서 희생하고 헌신하고 그 방향을 맞춰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에 합당한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항상 말씀이 중심이 되어야 하고, 그 말씀이 중심이 되어서 그것을 향해서 성도들이 계속 수렴되어서 가는 과정입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이라는 기준이 없으면 목소리 큰 사람에게 흡수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격 급하고 세고 힘 있는 사람에게 흡수됩니다. 그것은 나중에 반드시 문제가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1-2. 겸손의 참된 의미
3절을 보면 복음에 합당한 공동체는 또한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합니다. 겸손이 또 나옵니다. 우리가 여러 번 다루었기 때문에 이미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겸손은 나를 낮추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입니까? 남을 높이는 것입니다.
나를 낮추는 것은 겸양인데, 그것은 유교적이고 도덕적이고 동양적인 의미에서 우리가 겸손이라고 배웠지만, 그것은 얼마든지 위장할 수 있습니다. 포장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남을 높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칭찬하는 것, 남을 적극적으로 칭찬하고 높여주는 것, 그것은 쉽지 않습니다. 제자들도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마가복음 9장 33절, 34절을 보면 제자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니" 예수님이 모르고 물으셨을까요? 알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누가 크냐.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항상 이것이 초미의 관심사였습니다.
"누가 크냐, 누가 크냐." 이것은 겸손이 아니지 않습니까. "누가 크냐"는 관점으로, "누가 더 잘났냐"는 관점으로 접근하다 보면 자기의 장점만 부각시키면 됩니다. 자기가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주님의 일을 하고, 열심히 봉사하고 섬겨서 하나님께 인정받으면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만 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합니까? 내가 두드러지려면 남을 끌어내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제자들이 "누가 크냐?" 서로 쟁론했다는 말은, 흠집을 잡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상대에게 "야, 너는 세리였잖아. 넌 옛날에 돈 세던 세리였잖아. 너는 원래 사람들이 매국노라고 말했잖아." 그러면 "그러는 너는 뭘 배웠는데? 무식한 어부 주제에. 넌 가슴에 칼 가지고 다니는 주제에, 칼부터 치워라."
이런 식으로 사람들이 자꾸 남의 약점을 비방하고 깎아내리고, 자꾸 끌어내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누가 크냐?" 쟁론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공동체가 아닙니다. 상대의 약점을 보고 공격하고, 상대의 약점을 웃음거리로 삼고,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한 사람을 가지고 바보 만들고. 그것은 공동체가 아닙니다. 그래서 여기서 상대를 칭찬하고 높여주는 것, 그것이 겸손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복음에 합당한 교회 공동체입니다.
1-3. 서로의 일을 돌봄
4절을 보면, "각각 자기 일을 돌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고 합니다. 제가 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 모두의 일은 아무의 일도 아니라고. 자기 일을 돌보는 것은 기본입니다. 자기 일하는 것, 교회 공동체에서. 그런데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보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일도. 그러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일만 하면 되지, 다른 사람들의 일까지 내가 왜 돌봐야 하는가."
그런데 여러분, 가정에서 생활을 해보면 너의 일과 나의 일이 딱 떨어집니까?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공동체를 보면, 항상 공통 영역이 있습니다. 교집합이라는 영역이 있습니다. A집합과 B집합이 만나는 교집합. 옛날에 학교 다닐 때 집합 공부할 때 어떻게 했습니까? A집합을 파란색으로 빗금을 치고 B집합을 빨간색으로 빗금을 치면, A와 B집합이 만나는 교집합 자리에는 파란색과 빨간색이 섞입니다.
그것이 수학적인 원리입니다. 그러면 이 교집합 자리에는 사람들이 두 배로 와서 일해야 하는 것입니다. A집합에 속한 사람도, B집합에 속한 사람도. 그런데 정말 희한한 것은 수학대로 되지 않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어떻게 됩니까? 아무도 안 하는 것입니다. A집합에 속한 사람은 B가 하겠지, B집합에 속한 사람은 A가 하겠지. 아무도 안 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그래서 모두의 일인데 누구의 일도 아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 아닙니다. 자기 일을 돌볼 뿐더러,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봐서 "저 사람 어떻게 됐대? 우리가 뭘 좀 도와줘야 돼?" 이런 마음이 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오병이어 기적이 일어나기 전이었습니다. 그때 배에서 내린 들녘, 빈들입니다. 사람들이 막 몰려들었습니다. 예수께서 하루 종일 설교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시장하시고 거기 모인 사람들도 배가 고픈데, 제자들이 말합니다. "예수님, 여기는 빈들이고 해가 이미 저물었습니다. 무리를 보내셔서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예수님은 그것을 모르셨겠습니까? 아십니다. 제자들이 돈 없는 것 아시고, 해 떨어진 것 아시고, 빈들인 것 아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상대의 형편을 좀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어찌하든지 어찌하든지 저들의 배고픔을 해결하려고 애쓰는 그 목자의 심정을 좀 가져보라는 것입니다. 나는 말씀 전하는 자로서의 사명이 딱 끝났다고 해서 뒤돌아서서 가버리고, 그 사람들이 먹건 말건 배고프건 말건 그것은 내 알 바 아니다. 이렇게 해버리면 그것을 어떻게 목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좀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이 있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고, 내 할 일은 물론이고 상대의 일도 돌보는 긍휼한 마음을 가져야, 그것이 예수를 따르는 제자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 복음에 합당한 공동체는 그런 공동체입니다. 좀 보여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 곳곳에. 어디에 남의 일이 좀 보이고, "아, 저것 내가 좀 해야 되는데" 하는 것이 보이고, 휴지라도 하나 좀 줍고. 그것이 보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세상보다 못한 공동체입니다.
2.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
이제 그리스도인은 누구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까? 5절을 보면 우리가 오늘 읽었던 구절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아, 품고 싶습니다. 우리도 예수의 마음. 예수의 마음 품기를 원합니다.
2-1. 마음의 훈련
그런데 이 "품다"는 말이 있습니다. 헬라어로 프로네인(φρονεῖν)이라는 말인데, "마음의 훈련을 하다"라는 뜻입니다. 즉 그냥 "품을게요" 해서 품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품도록 훈련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훈련을. 여러분, 훈련한다고 하면 일단 무엇이 필요합니까? 내가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헬스장에 가서 운동을 하는데, 자기 혼자 막 이렇게 하면 잘못된 자세로 무엇을 들다가 다쳐서 3개월 동안 병원비만 더 나가는 분들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가르쳐주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누가 처음에 자세를 잡아주고, 바른 자세를 가지고 가르쳐주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마음의 훈련을 하려면 훈련의 교관이 있습니다. 훈련의 교관, 그리고 본보기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시면서 이 훈련을 하셨습니다. 예수님 마음을 품도록 하는 훈련. 예수님께서 무서운 교관, 엄격한 교관이 되신 적도 있습니다. 마가복음 8장 33절을 보면,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라고 합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무서운 교관이셨습니다.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하실 정도로.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책망도 좀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마음이 좀 있어야 합니다. 항상 우리가 좋은 대우만 받아서는 안 됩니다. 누군가가 책망을 하면 "내가 예수의 마음을 품는 훈련을 받고 있구나" 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 책망받아본 적 있으십니까? 성인이 되고 나서, 길 가다가 술 취한 사람한테 시비 걸리는 것 말고, 정신 나간 사람한테 막 시비 걸리는 것 말고, 어디 목사님한테 불려가서 책망받아본 적 있으십니까?
저도 그런 기억이 잘 없고, 또 요즘 성도들은 그렇게 하면 삐져서 교회 안 나올까 봐, 고객 만족을 위한 교회가 되다 보니까, 고객들 기분 나쁘실까 봐, 어찌하든지 고객들을 잘 섬기고, 어찌하든지 고객들을 잘 모시려다 보니까, 어쨌든 고객들 버릇이 이상하게 들어서, 이제는 책망은커녕 이상하게 되어버렸습니다. 이상하게. 그런데 우리 부모님들이 신앙생활을 하던 그 세대는 목사님들이 막 책망했습니다. 강단에서는 물론이고, 막 주일날 교회에 안 보이면 "집사가 어디 갔느냐"고 불러다가 막 야단치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도 기분 나쁘지 않았습니다.
하나도. 오히려 감사하고 고맙고, 책망받으니까 괜히 뿌듯하고, 막 그랬다고요. 그런데 요즘은 학교 교실에서도 선생님이 학생들을 혼내지 못하는 세상이 되다 보니까. 그런데 그런 시절이 좀 그립지 않으십니까? 책망받고 정신 바짝 차리고 다시 신앙생활 마음 다지던 것. 예수의 마음을 품으려면 훈련하는 교관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도 훈련이 필요합니다. 바른 자세, 믿음의 공동체, 책망받고. 가정에서도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막 책망하셨습니다.
2-2. 교관의 모범
이제 그 방법을 보여주십니다. 교관이 먼저 앞서가신 방법입니다. 6절을 보니, "그는"—그는 누구입니까?—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 주어가 중요합니다. 6절의 주어는 예수님.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이것은 우리가 다 외워서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형체, 중요한 단어입니다. 형체—"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모양—"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의 순종, 앞서가신 교관의 모범, 예수의 마음의 본을 딱 보여주는 것이 여기 핵심입니다. 종의 형체, 사람의 모양입니다. 이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지금. 그런데 예수의 마음을 품는데 예수님은 정작 어떻게 하셨는가? 종의 형체를 가지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예수께서 왕의 모양으로 나타나실 수도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나실 수도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왕자의 모습으로, 로마 황제의 모습으로, 백마 타고 딱 나타나실 수 있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서 이야기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진짜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보이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목수의 아들로 오셨습니다.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께서 자라신 곳은 갈릴리 변방입니다. 사람들은 누가 봐도 예수님을 못 배운 사람, 못 가진 사람, 주변인, 변방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종의 형체를 가지셨기 때문에 딱 봐도 촌사람입니다. 딱 봐도 못 배운 사람입니다. 딱 봐도 옷 입은 것이 남루합니다. 딱 봐도 말, 행동하는 것 전부 다 촌스럽습니다. 전부 다 예수님께서 낮아지신 그 낮아지심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요즘 우리는 이 마음을 먹는 것하고 행동하는 것하고 따로 노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겸손해진다, 낮아진다 하면, 교회가 좀 초라해도 되지 않습니까. 안전하기만 하면 교회 본당이 좀 검소해도 되지 않습니까. 목사가 꼭 좋은 차를 탈 필요 없지 않습니까. 안전하게 잘 굴러가면 되지요.
우리가 꼭 비싼 옷을 입을 필요 없지 않습니까. 깨끗한 옷을 입으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의 형체를 싫어합니다. 남들에게 있어 보이고 싶어 하고, 남들에게 좀 있는 것처럼 보이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예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까? 예수의 마음을 품는 것. 마음만 품으면 안 됩니다. 예수의 마음을 훈련하는 것은 종의 형체를 훈련하는 것입니다. 진짜 우리가 종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종의 모습이 되고, 예수께서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시고, 십자가에 죽어버리셨는데, 그러면 우리가 입으로만, 마음으로만 "나는 예수의 마음을 품었어"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훈련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좀 불편해도, 좀 불편하고 힘들어도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냥. 왜?
그것이 은혜가 되니까요. 다른 사람들에게, 공동체에. 종의 형체를 가지는 것. 이것이 생각보다 굉장히 어렵습니다. 생각보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속에는 항상 좀 남들에게 보이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들. 그런데 적당히 해야 합니다. 적당히. 적당히 종의 형체를 가지는 훈련들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 장로님들이 앞치마 입고 주방에서 봉사하는 것, 그것은 보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니, 뭐 마음만 그렇게 먹으면 되지" 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합니다. 보이는 것. 그리고 진짜 비싼 옷을 입지 않고 검소하게 절약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 형체를 가지는 것, 그것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훈련이니까요.
예수님도 그렇게 사셨으니까, 그런 훈련이 너무너무 필요합니다. 그래서 말과 행동이 일치가 되는 것입니다.
2-3. 하나님의 응답
자, 6절에 보니 그가, 예수 그리스도가 그러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하시니까, 예수님이 종의 형체를 가지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고, 죽기까지 복종하시되 십자가에 죽으셨으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가만히 계십니까? 하나님이 가만히 계시지 않습니다.
9절, "이러므로"—이제 주어가 바뀝니다—누가? 하나님이. 그가 종의 형체를 가지고, 그가 사람의 모양이 되고, 그가 낮아지고, 그가 죽고, 그가 십자가에 죽어버리니까,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이것은 누가 하신 것입니까? 하나님이. 그래서 하나님이 하실 일은 이 일입니다. 우리가 할 일, 예수의 마음을 품은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종의 형체를 가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그것이 훈련입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되고, 순종하고, 죽기까지 복종하는 것,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다음 알아서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거꾸로 합니다. 우리가 우리를 높입니다. 내가 나를 높입니다. 좀 알아주면 좋겠고, 내 스스로 나를 칭찬하고, 다른 사람을 통해서 막 칭찬하게 하고, 자기 스스로 높아지려고 하고, 누가 알아달라고 하고, 은근히 기대하고, 더 높은 곳에 올라가려고 하고, 모든 입으로 나를 칭찬하기를 바라고 기대하고. 그러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순서가, 순서가 이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낮아지시니 하나님이 그를 높이셨습니다. 이것은 원리입니다. 성경에 딱 나오는 원리. 그래서 내가 할 일은 예수님을 따라서 이 길 따라가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군림하고 높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 그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는 것인데요. 사실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는 것을 우리는 관념적으로 생각했지, 종의 형체를 가지는 것이라고는 생각을 별로 못 한 것입니다. 그런데 직접 해야 합니다. 그렇게.
3. 구원의 세 차원
이제 중요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구원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이 구원에 대한 이야기는 제가 로마서를 할 때도 이야기했고, 계시록을 할 때도 말씀드렸고, 중요한 이야기니까 자주자주 말씀드립니다. 여기 또 나옵니다.
3-1. 두렵고 떨림으로
12절,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을 얼마나 사랑합니까—"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바울이 떠나서 로마의 구류 상태로 있으니까요—"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이 말씀이 참 어려운 말씀입니다. 사실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구원의 세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첫째가 칭의(稱義)의 차원의 구원이 있고, 두 번째가 성화(聖化)의 차원의 구원이 있고, 세 번째가 영화(榮化)의 차원의 구원이 있습니다. 영화는 천국 가는 것입니다. 그냥 영화롭게 되는 것입니다. 이 육신이, 이 영이 영화롭게 되어서 천국에 딱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땅에서 우리에게 존재하는 두 가지 차원의 구원은 칭의와 성화, 두 가지가 남습니다. 칭의는 신분입니다. 그리고 성화는 수준입니다.
자, 신분이 바뀌어버린 것입니다. 칭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430년 동안 신분이 무엇이었습니까?
노예였습니다. 노예. 그들은 애굽의 종이었습니다. 애굽 바로의 종으로 피라미드 만들고 벽돌 굽고 하던 종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양을 잡아라. 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 안에 들어가서 앉아 있으라. 그러면 죽음의 사자가 지나갈 것이다. 오늘 밤 모든 초태생들은 다 죽임을 당할 것인데, 이 피 값으로 너희는 죽음을 건너가게 될 것이다." 그것이 유월절 아닙니까? 그래서 그 사람들은 그냥 종이었습니다. 노예였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 하나 믿고 피를 바르고 그 안에 덜덜 떨고 있는데, 진짜 죽음의 사자가 지나갔습니다. 그 죽음의 사자가 지나가는 순간 그들은 무엇이 됩니까? 이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는 자녀가 된 것입니다. 신분이. 애굽에 있으니까 종놈들에서 자녀가 된 것입니다.
종에서 자녀로 신분이 바뀐 것입니다. 그런데 애굽에 있으면서 하룻밤 사이에 신분이 딱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내 생활 습관까지 갑자기 수준이 확 올라갑니까? 하나님 자녀의 수준으로 올라가지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수준에 맞는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자, 도련님 이 옷은 안 됩니다. 말씨. 그렇게 욕지거리 쓰시면 안 됩니다. 식사도 그렇게 허겁지겁 손으로 드시면 안 됩니다." 이제 이런 훈련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 믿는 자녀로서의 훈련, 수준을 거기까지 높여가는 과정. 그것이 성화입니다. 그래서 성화는 우리 수준을 높이는 것입니다. 수준을.
신분에 맞는 수준으로 옷을 끊임없이 갈아입는 수준 높이기, 그것이 성화입니다. 자, 그래서 그 성화를 할 때 "너희 구원을 이루라" 이 말은 성화의 삶을 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성화의 삶을 살 때 어떤 자세로 살라 했습니까? "두렵고 떨림으로." 이 "두렵고 떨림"이라는 말에 오해가 좀 있습니다.
자, 구원받지 못할까 봐, 나중에 천국 못 갈까 봐 두려워하고 떨면서 구원을 이루라, 이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을 다른 의미로 바꾸면 "조심스럽게"라는 뜻입니다. 조심스럽게, 겸비하고 조심스럽게. 성화의 삶에는 조심스러움이 필요합니다.
성화가 일어나는 곳이 교회고, 가정이고, 일터입니다. 내가 살아가는 삶의 모든 현장에서 성화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조심스러움이 필요합니다. "아, 내가 이 신분에 맞게 수준이 올라가야 하는데, 내 말이나 내 행동이나 나의 눈빛이나 내가 사귀는 사람이나 혹은 내가 먹는 음식이나 이 모든 것들이 내 신분의 수준에 걸맞는 것일까, 아닐까?"를 조심하라는 말입니다. 막 살면 안 됩니다. 칭의 차원에서 성화로 넘어가는 사람들은 생각나는 대로 막 떠들어도 안 됩니다. 기분 나쁘다고 싸워버리고, 기분 나쁘다고 큰소리 쳐버리고, 기분 나쁘다고 소리 질러버리고 그래도 안 됩니다. 두렵고 떨림이 있어야 합니다. 신분에 맞는 사람.
대통령이나 혹은 국무총리가 항상 구설수에 오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말 때문입니다. 말 때문. 신분에 합당한 말만 하면, 신분에 합당한 행동만 하면, 사람들이 왜 문제 삼겠습니까?
외교 관계에서나 모든 사람들을 만나는 언론과의 자리에서도 그 신분에 맞는 언행을 해주면 존경받습니다. 사람들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두렵고 떨림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 앞에? 하나님 앞에. 나를 종살이하던 나를, 죄의 종 노릇 하던 나를 건져서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신 그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거기에 감격하며,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조심스럽게 살아내는 것입니다.
3-2. 성령의 도우심
그런데요, 그것을 나더러 "너 혼자 그냥 다 해라"고 하면 할 수 있을까요? 내 힘으로 할 수 있을까요? 못합니다. 성화는 자기의 힘으로 절대 못합니다. 자기 힘으로는 할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을 가는데 "너희끼리 걸어와라. 나는 모세 구름 태워서 간다. 40년 뒤에 보자." 가버리면 올 수 없습니다. 절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화의 과정에서 도우셨습니다.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도우셨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로 도우셨습니다. 그것을 오늘 우리 시대는 성령의 도우심이라고 말합니다. 뒤에 나옵니다. 13절,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너희 안, 무엇입니까? 내 마음속에, 내 영 속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 어떤 하나님? 성령 하나님.
성화의 삶을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 성화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데, 걱정하지 마십시오. 염려하지 마십시오. 성령께서 행하십니다. 성령께서 함께하십니다.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자기의 기쁘신 뜻이 무엇입니까? 성령 하나님의 기쁜 뜻이 무엇입니까? 내 속에 거주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기쁘신 뜻은 이 인간의 수준을 높이는 것입니다. 신분에 맞는 수준에까지 기쁘신 뜻을 높이는 것.
그것이 기쁘신 뜻입니다. 그것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소원이 무엇입니까? 수준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분에 합당한 수준을 갖추는 그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여러분 이 말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성화의 삶을 내 능력으로 살려고 하면 원망과 시비가 생깁니다. 절대 안 됩니다. 성질 나면 성질 내버리고, 기분 나쁘면 드러누워 버리고, 수 틀리면 안 해버리고, 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 원망과 시비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인생이. 그런데 성령의 인도하심에 맡기고 나가면 원망과 시비가 없습니다.
원망과 시비가 희한합니다. 칭의의 차원에서 구원이 임한 사람에게는 성령이 마음속에 내주하십니다.
그러면 그 성령께서 일하시도록 내 마음을 성령께 내어드리고 따라가면 됩니다. 잘 따라가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자기가 하려고 하면 원망과 시비가 생기고, 성령께서 하도록 하면 원망과 시비가 없어집니다.
4. 성령훼방죄의 의미
여기 이제 성령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우리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한번 보고 가겠습니다. 마태복음 12장 31절, 32절, 우리가 좀 이해하기 어려운, 혹은 좀 가끔 논쟁이 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함을 얻지 못하리라."
한마디로 무엇입니까? 성령훼방죄. 죄 중에 용서받지 못하는 죄가 있는데,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 이것을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을 훼방하는 죄가 무엇입니까? 구체적으로 성령을 훼방하는 죄가 무엇입니까, 여러분?
4-1. 성령의 사역
자, 요한복음 16장 8절을 보면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 이렇게 딱 말씀하셨습니다. 한 부분입니다. "그가 와서"—성령님이 와서—"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이 말씀을 예수께서 하셨습니다. 이것이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이것을 방해하면 죄 사함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예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첫째, "죄에 대하여."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임하시면 죄의식이 생깁니다. 죄의식이. "아, 이것은 죄인데. 이렇게 하는 것은 안 되는데. 여기서 선을 조금만 넘어가면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데." 죄에 대한 민감한 반응이 생깁니다. 성령께서 임하시기 전에는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그냥. 그런데 성령께서 임하시고 난 다음에는 죄에 대한 분별력이 생깁니다.
그런데 우리 자녀가 혹은 우리 중에 가까운 누군가가 우리에게 찾아왔습니다. 나에게 "엄마, 아빠, 제가 지금 이런 마음이 생기는데 이건 무슨 마음이에요? 지금 내가 이런 마음이 자꾸 생기는데, 자꾸 죄책감도 생기고, 이것을 해야 할 것 같고, 도와야 할 것 같고, 베풀어야 할 것 같고, 안 하면 자꾸 마음이 불편한데, 이건 무슨 마음이에요?" 그러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성령이 죄에 대해서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그 아이에게, 그 사람에게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야, 하지 마. 너 그것 손해 보는 거야. 미쳤냐? 네가 왜 그래? 세상이 얼마나 악한데, 너 왜 그 아이 도와주려고 하고, 그 사람 도와주려고 해? 그러면 너는 돈 쌓아놓고 사니? 너 용돈 받아서 넌 뭐 먹고 살고, 너 필요한 것은 언제 사고, 저금이나 해라." 그러면 그것이 성령훼방죄입니다. 사람 마음속에 역사하시는 성령께서 활동하시도록 우리가 도와줘야 합니다.
둘째, "의(義)에 대하여"는 무엇입니까? 의로움이 무엇입니까? 자기의 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입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자기 의를 책망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심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옆에서 사람들을 자꾸 부추깁니다. "목사님, 목사님 대단하세요. 장로님 대단하세요. 이만큼 하셨으면, 이만큼 교회를 위해서, 이만큼 무엇을 위해서 하셨으면, 표창도 받아야 되고, 칭찬도 받아야 되고, 사람들 앞에서 박수도 받아야 하는데. 대단하십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성령을 훼방하는 것입니다. 자기 의를 죽이도록 자꾸 알려줘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드러나도록. 성령훼방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셋째, "심판에 대하여." 심판이 무엇입니까? 세상에 종말이 있다는 것입니다. 종말이 온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종말이 있는 것을 믿습니까, 안 믿습니까? 잘 모르겠습니까? 아니, 개인의 종말이 분명히 있습니다. 내가 죽기 전에 예수님께서 공중에 천사장의 호령과 나팔 소리로 구름 타고 오시면 그것이 역사의 종말인 것입니다. 성경에 마지막 날이 반드시 있다고 했습니다. 심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심판 없는 것같이 삽니다. 누군가가 "아이, 진짜 종말이 있을까? 이때까지 2천 년 동안 예수님 안 오셨는데" 하면, "그래, 나도 잘 모르겠어." 왜? 그것이 성령훼방죄입니다.
4-2. 기억나게 하심
성령훼방죄는 별것이 아닙니다. 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기억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다 기억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3년간 겪었던 일들을, 따라다니면서 서기관이 있어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다 공책에 받아 적었겠습니까? 그 게으른 인간들이 안 했습니다. 그런데 성령 받고 나니까, 그가 오시니까 기억이 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 그래서 제자들이 쓰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서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목회자가 성도들에게 성령께서 여러분들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나게 하고 깨우치도록 하며 그렇게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까먹게 하면, 잊어버리게 하고 흐리게 하면, 혼란스럽게 만들면, 그것이 성령훼방죄입니다. 분명하고 명확하고 깨닫게 하고 기억나게 해야 합니다. 성령을 명확하게, 말씀을 명확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다양한 형태의 성령훼방죄가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성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입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여러분 가정의 남편, 부인, 자녀들에게 성령께서 성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입니다. 그것을 방해하시면 안 됩니다.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기억나게 하는 것.
그것을 도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성령의 조력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방해하면 큰일 납니다.
4-3. 빛으로 나타남
그것을 방해하지 않으면 15절,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빛들로 나타나지요. 성화가 쭉 이루어지면 흠 없는 자녀가 되고 빛이 쭉 됩니다.
16절,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 자랑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는 성도들의 성화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성도들의 성화에. 그러니까 그것이 바울의 자랑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떤 한 영혼을 위하여 칭의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화는 우리가 도와줘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막 그 마음에 일하시도록 막 도와줘야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진짜 성화가 되어서 빛들로 나타나고 영광이 되면 그것이 우리의 자랑이 되어야 합니다. 자녀 잘 키워서 돈 많이 벌고 좋은 직장 취직시켜서 그것이 우리의 자랑이 아닙니다. 진짜 우리의 자랑은 그들이 정말 성화가 되어서, 두렵고 떨림으로 성화를 이루어 가서, 그들이 빛들로 나타나게 되면, 그것이 우리의 자랑인 것입니다. 바울이 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기뻐하라, 기뻐하라 계속 나옵니다. 바울이 가장 기쁜 것이 무엇입니까? 지금 이 말씀을 가지고 돌아보면, 우리가 1장에서 보았습니다.
바울이 살아야 할 이유, 그의 존재 이유, 그들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 결국 이것이 2장에 와서는 성화의 삶으로 단어가 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쁜 것입니다. "전제(奠祭)와 같이 다 부어질지라." 또 전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제사드릴 때 마지막에 부어드리는 포도주, 그 포도주가 핏빛입니다. 바울은 전제로 부어진다. 이 말은 내 피를 다 쏟아내는 만큼의 열정과 마지막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5.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
자, 이제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디모데를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는지가 여기 잘 나타납니다. 우리가 지난 주일 설교 때 디모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여기가 가장 잘 나타나는 부분입니다. 볼까요?
5-1. 같은 혼을 지닌 자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디모데를 보내고 싶다는 이야기입니다. 아직 보낸 것은 아닙니다.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바울이 디모데를 얼마나 믿는지 아시겠습니까? 여기 "뜻을 같이하여"라는 말을 밑에 들여다보시면, 헬라어로 이소프쉬코스(ἰσόψυχος)라는 단어를 쓰는데요, "같은 혼을 지닌 이"라는 뜻입니다. 그냥 유비, 관우, 장비가 도원결의한 그런 뜻을 같이 하는 것이 아니고요, 혼이 같다는 말입니다. 혼이. 우리는 흔히 이런 말을 합니다. "영이 통한다. 영이 같다" 이런 말을 쓰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일생의 동역자들이 많았습니다.
그가 복음을 오래도록 전했기 때문에 그를 거쳐간 사람도 많고, 그가 아낀 사람도 많고, 다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표현을 쓰는 사람은 디모데밖에 없었습니다. "혼이 같다. 나와 혼이 같다." 그런 사람 한 사람 있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 사람 한 사람 있으면. 그런 사람이 가족이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내 남편이면, 나와 혼이 같은 사람이 내 아내라면, 나와 혼이 같은 사람이 내 자녀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나눌 수 있고, 이야기할 수 있고, 같이 울어줄 수 있고, 같이 기뻐할 수 있고, 같은 마음으로 물질을 사용할 수 있고, 같은 마음으로 몸을 쓸 수 있고. 같은 혼을 지닌. 그래서 평생에 이런 동역자 한 사람이면 충분합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같은 혼을 지닌. 여러분, 이런 사람을 달라고 기도도 해야 하고, 나도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같은 혼이라는 것이 세상을 향한 같은 혼을 가지면 곤란하고, 하나님을 향한 성화의 길을 가는 것이 동역자라는 같은 혼을 지닌 것입니다.
디모데.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이것은 누구를 보고 하는 말입니까? 바울을 거쳐간 수많은 사람들. 한때 동역자라고 했던 사람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나중에 보니까, 바울이 지금 로마에 갇혀 있다 보니까, 다 자기 일을 구한 것입니다. 다 자기 일을. 전부 다 자기 유익을 구해서 다 떠나가 버리는 것입니다. 전부 다 자기 유익을 구해서. 디모데만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였다." 그런데 디모데가 그냥 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디모데가.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디모데도 예수의 마음을 품었는데, 예수의 마음을 품도록 훈련받은 것입니다.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다." 바울이 교관이 되었고, 열심히 훈련받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5-2. 에바브로디도의 헌신
그렇다면 에바브로디도는 어떤 사람입니까? 이것은 이제 정리해서 말씀드리면요. 바울이 지금 로마에 구류된 상태인데, 그가 여기에 갇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울에게 영치금을 보내고 쓸 것을 보낸 교회는 빌립보 교회, 단 1교회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그때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정성과 사랑과 물질을 가지고 와서 바울에게 전한 사람이 에바브로디도입니다. 그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너무 먼 길을 온 것입니다.
그 당시에 기차도 없고, 비행기도 없고, 차도 없고, 걸어왔습니다. 그랬더니 병이 나버린 것입니다. 죽을 병. 바울이 얼마나 걱정이 되었겠습니까? 이 사람이 여기서 죽어버리면 무엇이 됩니까, 자기가. 그래서 바울이 열심히 간호하고 열심히 기도해서 그가 나았습니다. 낫자마자 보내는 것입니다. 이제 돌려보낸다. 돌려보내는 편에 이 편지를 써서 보낸 것입니다. 빌립보서 이 편지를.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25절,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 너희 사자. 사자(使者)가 무엇입니까? 보냄을 받은 자. 너희들이 보낸 사자다.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다. 그 말입니다. 빌립보서 4장 18절에 보면 나옵니다.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라고 했습니다. 에바브로디도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준 것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바울은 왜 에바브로디도를 빨리 보내려고 합니까? 26절,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 그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그를 보낸 것은 너희로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라." 보낸 것입니다. 이 편지를 써서. 그래서 빌립보서 2장은 이제 디모데 이야기와 에바브로디도 이야기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결론
2장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는 것. 그런데 그 마음을 본받는다 해놓고, 사실은 종의 형체를 가지라고 했습니다. 형체를 가지는 것. 직접 그 모양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구원에 대한 이야기. 구원은 칭의와 성화와 영화로 이루어지는데, 이 땅에서 우리는 칭의와 성화로 갑니다. 칭의는 하나님이 우리의 신분을 하룻밤에 바꿔주신 것이고, 성화는 그 신분의 수준에 합당한 인생을 두렵고 떨림으로 조심스럽게 이루어가는 과정인데, 나더러 하라고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누가 함께하십니다. 성령께서. 그런 성화의 과정을 함께하시는 성령을 훼방하면 하나님이 가만히 두지 않으십니다. 성령이 일하시는 사역을, 성령의 성화의 사역을 적극적으로 도와야 합니다. 그 말씀을 드렸고, 디모데의 중요한 사역, "혼이 같다", 우리도 그런 동역자가 함께 있으면 좋겠다까지 말씀드렸습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그리스도를 본받게 하옵소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겠다고 늘 기도하지만, 종의 형체를 가지는 것은 싫어하고, 미워하며, 부담스러워하며,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고, 죽기까지 복종하고, 십자가에 죽는 것은 더더욱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먼저 가신 길이라면, 우리가 종의 형체 가지게 하시고, 낮아져서 섬기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께서 그렇게 하셨을 때 그를 지극히 높이신 하나님을 우리가 찬양합니다. 스스로 높아지려 하지 않고, 스스로 낮아지며, 스스로 겸손한 주의 백성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가 성화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내 속에 계신 성령님과 함께 동행하며, 신분에 걸맞는 수준을 갖추게 하여 주옵소서. 두렵고 떨림으로 이 수준에 합당한 인생 살아가도록 도우시고, 부족한 것 채우시고, 성화를 방해하는, 성령을 훼방하는 미련한 자 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