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중서신 (9) - 부름의 상을 위하여 (빌3장)
오늘은 옥중서신 아홉 번째 시간으로, 빌립보서는 세 번째 시간입니다. 3장 말씀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바울의 옥중서신은 네 권이 있습니다. 에베소서는 교회에 대한 말씀을 전하고, 빌립보서는 기쁨에 대한 말씀을 전합니다. 그런데 빌립보서의 이야기를 보면, 그냥 기쁨이 아니라 상황을 초월한 기쁨을 말합니다. 사실 우리를 포함한 모든 사람은 그 상황 속에 있는 존재입니다. 내가 어떤 상황 가운데 있는가에 따라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고통스럽기도 하고, 아프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지금 로마 감옥에 구류된 상태입니다. 그 상황이 좋지 못합니다. 불편하고 갇혀 있는 상태, 언제 끌려가서 죽을지 모르는 그런 상태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거기서 궁극적인 기쁨을 말하고 있습니다.
1장을 보면 그 기쁨을 표현하면서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실 자기는 여기서 죽는 것이 더 좋다고 합니다. 차라리 여기서 죽어서 하나님 앞에 가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훨씬 더 편한데, 자기가 살아야 할 이유는 성도들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함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 삶의 존재 근거와 이유를 성도들의 믿음의 진보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2장을 보면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설명하는데 빌립보서 2장 5절에서 11절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쭉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라 했는데, 거기서 중요하게 본 것이 종의 형체, 사람의 모양입니다. 마음만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이 진짜 종이 되셨고, 진짜 사람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바울의 삶으로, 또 우리의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세 가지 차원에 대해서도 증거했습니다. 칭의의 차원과 성화의 차원과 영화의 차원입니다. 영화는 내가 죽어서 천국 들어가는 것이고, 칭의와 성화가 오늘 이 땅에서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오늘 3장도 역시 그 맥락 가운데 있습니다. 칭의와 성화라는 그 큰 틀의 맥락 안에서 빌립보서 전체를 기록하고, 달려간다는 등의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빌립보서가 이런 구조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 주 안에서 기뻐하라
1-1. 상황을 초월한 기쁨
첫 번째 질문을 보겠습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권하는 것과 삼가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1절에 보면 "끝으로"라고 했습니다. "끝으로"라고 나오면 '아, 끝나는구나. 좋다. 이제 집에 가도 되겠구나' 하게 됩니다. 그런데 바울이 여기서 "끝으로"라고 해놓고 3장도 제법 길고 4장까지 또 나옵니다. 그래서 여기서 "끝으로"라는 것은 내가 편지를 끝맺겠다는 말이 아니라, 바울이 다른 표현으로 하면 "종말로"라는 뜻입니다. 종말로, 즉 이 세상에 종말이 왔는데 이 종말에는 이것을 정말 조심해야 한다, 이것을 꼭 기억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굉장히 일상적인 말입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 많이 들어보셨습니다. 그런데 "주 안에서"라는 말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이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바울의 상황과 한번 연결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이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옥에 있습니다. 그런데 감옥에 있는 것은 바울의 상황입니다. 감옥에 있으면 기쁩니까, 슬픕니까, 괴롭습니까? 감옥에 안 들어가 봐서 모릅니다. 그런데 상상만 해 봐도, 그냥 생각만 해 봐도, 진짜 감옥을 보기만 해도 우리는 괴롭고 힘듭니다.
그런데 굳이 감옥에 들어가지 않아도 인생 자체가 감옥이라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냥 그 자체가 괴로운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감옥에 있으면서 자기는 "감옥에서 기뻐하라"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사실 조금 더 수준 있게 표현하려면 "나는 지금 감옥에 있는데, 로마에서 구류 상태로 있는데, 나는 지금 여기서 너무 기쁘다. 그러니 너희도 감옥에 있어도 기뻐하라"고 하면 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표현을 쓰지 않고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주 안에서"와 "감옥에서"가 충돌하고 대립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감옥"이라는 것은 자신의 상황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어떨 때는 감옥에 있기도 하고, 어떨 때는 궁궐에 있을 수도 있고, 어떨 때는 저 인생 밑바닥 시궁창에 들어가 있을 수도 있고, 어떨 때는 정말 구름 위를 걸어다니는 것처럼 너무너무 행복하고 즐거울 수도 있습니다. 이런 우리 인생의 상황은 시시각각으로, 매번 지속적으로 계속해서 바뀝니다. 감옥이 어디건 계속 바뀝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감옥에서는 슬퍼하고, 구름 위에서는 기뻐 뛰고, 궁궐에서는 너무너무 행복하고, 돈이 있으면 즐겁고, 돈이 없으면 죽을 맛입니다. 그것이 우리네 인생 아닙니까? 그래서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뛰어넘어서 내가 감옥에 있건 어디에 있건,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여기 두셨기 때문에 내가 여기 있는 것인데, 너희의 궁극적인 신분은 주 안에 있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렸습니다. 칭의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칭의는 신분이라고 했습니다. 성화는 그 신분의 수준에까지 올라가는 수준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칭의를 받은 성도들은 내 상황과 상관없이 늘 기쁜 것입니다. 주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잘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내가 있는 이 주변 사물과 상황만 보는데, 하나님의 사람들은 시선을 더 넓게, 더 높게, 더 크게 봐야 합니다. '아, 나는 주 안에 있구나.'
요셉을 보면 분명해집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의 삶을 살다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갔습니다. 거기에서 입지전적으로 꿈을 잘 해석해서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노예로, 죄수로, 또 총리로. 그런데 그것과 상관없이 요셉은 하나님 안에 있었습니다. 그가 총리의 삶을 살면서 거나하게 오만했다는 기록이 성경에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가 노예의 삶을 살면서 보디발 아내의 유혹에 넘어가지도 않았습니다. 누명 쓰고 감옥에 들어가서 그 상황 때문에 '나 혀 깨물고 죽어 버려야지' 이런 적도 없습니다. 그는 그냥 성실하게 자기 삶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궁극적인 소속은 주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세기에서 요셉 이야기는 옷에 대한 모티브가 나옵니다. 그 옷이 여러 번 바뀝니다. 채색 옷, 그다음 노예의 옷, 죄수의 옷, 총리의 옷. 그런데 그 옷과 상관없습니다. 이 사람은 옷과 상관없습니다. 그의 진짜 옷은 예수 그리스도의 세마포, 새 옷을 입은 그리스도의 신부의 옷입니다. 그것이 이 분의 궁극적인 자기 신분이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소속되어 있습니까? 내가 진짜 주 안에 있는가? 이것은 예수 믿는 사람에게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바울이 그냥 얘기했고 우리는 이 말씀을 너무 많이 들었고 너무 많이 읽었는데, "주 안에 있다"는 것은 상황을 초월하라는 것입니다.
1-2. 십자가 아래 있는 삶
또 "주 안에 있다"라는 말에는 십자가 아래 있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주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니,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구약적인 의미, 출애굽의 의미에서 말하면 문설주와 인방에 피 바르고 그 안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 안에 있으면 사망이 지나갑니다. 죽음이 지나갑니다. 그러면 기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죽음을 면했는데, 내 영혼이 죽음을 면했는데, 우리가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주 안에 있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진짜 기쁨은 주 안에서 죽을 생명이 산 생명으로, 죽어서 지옥 갈 영혼이 천국 가는 영혼으로 변모되었다는 것, 그것이 기쁜 것입니다. 상황의 기쁨은 어떻습니까? 무엇인가 있어야 기쁜 것입니다. 손에 쥐어야 기쁜 것입니다. 전부 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신분의 기쁨은 그냥 그 안에 있어서 기쁜 것입니다. 그 안에 있어서 기쁜 것입니다. 칭의의 기쁨을 바울은 이런 식으로 표현했습니다. 이것을 잘 기억하셔야 합니다.
바울은 이 말을 여러 번 한 것 같습니다.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여러 번 말씀한 것 같습니다. 빌립보교회 성도들 모아놓고, 그때 교회를 개척할 때 성도들에게 설교할 때, 성경 공부할 때도 계속 이 말을 전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같은 말을 계속 쓴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중요한 말씀은 계속 들어야 합니다. 중요한 말씀은 계속 우리가 듣고 배우고 깨달아야 합니다.
2. 참된 할례
2-1. 개들을 삼가라
2절을 보시면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고 했습니다. 지나가다가 보면 "개 조심"이라고 간판이 예전에는 많이 있었는데, 이제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여기 지금 "삼가라"라는 말이 세 번이나 반복되어 나옵니다. 보통 이런 식으로 문장을 잘 쓰지 않습니다. 이것은 틀린 문장입니다. 보통 어떻게 씁니까? "개들과 행악하는 자들과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라고 씁니다. 동사를 딱 한 번만 쓰겠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렇게 문장을 명확하게 잘 쓰는 사람이 이것을 삼가라, 삼가라, 삼가라, 세 번 쓴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이 진짜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진짜 삼가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강조하려고 그런 것입니다.
개가 누굴까요? 여기서 동물, 강아지, 개가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향해서 뭐라고 부릅니까? 개라고 부릅니다. 이방인들을 천대하고 무시하면서 그렇게 부릅니다. 그런데 바울이 여기서 거꾸로, 그런 이방인들을 천대하는 율법주의자 유대인들을 향하여 개들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너희가 개다. 하나님께서 택정하신 이방인들을 천대하고 그들을 개라고 부르는 율법주의자 너희들이 바로 개다. 그들을 삼가하라.' 행악하는 자들,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하는 모든 행동이 다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삼가하라.
세 번째로 구체적으로 또 얘기합니다.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몸을 상해한다는 말은 할례 받는 것입니다. 할례 받는 것, 바울이 여기서 이제 할례를 얘기했는데, 유대 율법주의자들은 할례주의자들입니다. 할례 받아야 구원받는다, 할례 받아야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강조하고 그런 일을 계속 지속적으로 가르쳤습니다. 그것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2-2. 진정한 할례의 의미
왜 그런가 보기 전에, 기쁨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 도대체 얼마나 기뻐하라는 것입니까? 이 "기뻐하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보면 카이로(χαίρω)라는 단어인데요, 많이 들어보셨습니다. 그런데 이 카이로라는 말이 마태복음 2장 10절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2장 10절을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이 그들이 누굽니까? 동방박사들입니다. 동방박사들이 다윗의 별을 본 것입니다. 그 별을 보고 확 따라가서 아기 예수께 경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들이 기뻐할 때 그 기쁨, 카이로(χαίρω)와 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면 동방박사들이 별을 볼 때 그 기쁨이 어땠을까요? 평생 동안 별을 연구하는 사람들입니다. 평생 동안 그 왕의 별, 다윗의 별이 나타나기를 기대하고 그 별을 소망했던 사람들이 진짜 별을 봤습니다. 그때 그 기쁨입니다. 그래서 환희에 찬 기쁨, 궁극의 기쁨, 최상의 기쁨을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 안에 있으면 죽음이 지나가고 생명을 얻었으니, 그 기쁨이야말로 동방박사들이 별을 발견한 그 기쁨, 그리고 아기 예수께 경배하는 그 기쁨, 거기에 비견될 만한 기쁨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 13절 말씀을 보시면 유대 율법주의자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런 자들이 개들이고 행악하는 자들이고 할례 받아야 구원받는다고 가르치는 자들입니다.
그러면 진짜 할례, 참된 할례를 받은 자들이 누굽니까? 여러분, 할례가 무엇입니까? 할례가 살을 끊어내는 것입니다. 누가 제일 먼저 받았습니까? 아브라함과 그 가족들이 제일 먼저 받았습니다. 그런데 할례는 끊어내는 것인데, 이 끊어내는 것의 의미와 상징이 중요합니까? 행위 자체가 중요하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할례를 명하셨습니까? 할례 명령은 창세기 17장에 나옵니다. 그런데 창세기 16장 사건이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이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는 장면입니다. 17장이 시작되면서 하나님이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할례 명령을 내리십니다. 끊어내라는 것입니다. 끊어내는 것은 결단하는 것, 잘라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과거의 잘못된 행위를 끊어내는 것 아닙니까? 그것은 한번 끊어내면 잊어버리니까 살에 새기는 것입니다. 자기 몸에다가, 자기 살에 '나는 죄를 끊어냈다, 나는 과거의 나를 단절했다.' 그것이 할례입니다.
그래서 진짜 할례받은 사람은 달라져야 합니다. 과거의 내가 아닙니다. 진짜 할례받은 사람은 과거의 내가 아니라 새로운 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완전히 거듭나고 완전히 달라지고, 생각부터 사고부터 삶이 완전히 뒤바뀌어진 인생을 사는 자가 진짜 할례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울 시절에 할례를 명하고 할례를 권하는 사람들은 "할례를 받아야 너는 우리 편이야, 너는 할례 받아야 아브라함의 자손이야, 구원받은 자야" 하는 사람들이었으니, 바울이 할례를 금한 것입니다. 그런 식의 할례는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 할례파가 누구냐, 몸의 할례를 받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3절을 보면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라고 했습니다. 여기 "봉사하다"는 라트레이아(λατρεία)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요, 라트레이아라는 말은 "예배드리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예배드리며" 이런 사람이 진짜 할례파라고 합니다.
그런데 반대의 사람도 있습니까? 그러면 예수님께서 예배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셔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는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영으로 예배하는 자의 반대는 무엇입니까? 육으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육으로 사람들이 육으로 예배한다는 뜻은, 예배와 하나님의 은혜를 교환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교환의 가치로, 내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으니, 내가 하나님께 봉사를 했으니, 내가 하나님께 헌금을 드렸으니, 하나님은 나에게 이것을 주십시오 하고 투자의 개념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만큼 봉헌했습니다, 그러니 이것 주십시오 하고 교환의 가치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육으로 드리는 예배요, 이교 신전에서 하는 짓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령으로 예배하라는 말은 영으로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즉 예배의 정신, 구약에 나오는 레위기 율법의 예배의 정신이 무엇입니까? 번제, 다 태워 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고 내가 없어져야 그것이 진짜 예배입니다. 소제, 곡식을 다 빻아서 고운 가루가 될 때까지 계속 찧어서 빻아서 드리는 예배, 이것이 진짜 예배 아닙니까? 그런 예배가 하나님의 성령으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두 번째,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라고 했는데요, 여기 "로"는 헬라어로 엔(ἐν)입니다. 엔(ἐν)은 "안에서"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랑하고, 예수 안에서 자랑한다는 말은, 자랑할 때 항상 예수를 끼어서 자랑하라, 예수를 통해서 자랑하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바울이 그랬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라고 했습니다. 내가 열심히 해서 이렇게 한 것이 아니고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아, 내가 이렇게 건강한 것은 예수께서 나에게 건강을 주셔서 제가 건강합니다. 제가 이렇게 이런 일을 한 것도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를 주셔서 한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말은 쉬운데 쉽지 않습니다. 자주 잊어버리고 잘 안 됩니다.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자랑하고 싶은 못된 욕망들이 있으니까 그것이 잘 안 됩니다.
세 번째,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진짜 할례받은 사람은 이 세 가지를 해야 할례받은 사람입니다. 몸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고, 하나님의 성령으로 예배드리고, 예수 안에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것입니다.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말은 바로 뒤에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예레미야 9장 23절, 24절 나오는데요, 볼게요.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여러분, 이것이 너무 이상하지 않으세요? 당연히 지혜로운 자는 지혜를 자랑해야 합니다. 용맹스러운 자는 자기 용기를 자랑해야 합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자기 돈 자랑해야 세상 사람 맛이 납니다. 돈 자랑도 안 하고, 용맹 자랑도 안 하고, 지혜 자랑도 안 하고 어떻게 삽니까? 도대체 무슨 낙으로 살라는 말입니까?
이 말은 지혜나 용맹이나 부귀영화나 물질이나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지혜도 주셨고, 하나님께서 용맹도 주셨고, 하나님께서 부귀영화도 주셨다. 이것을 인정하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내가 지혜가 있어요, 아 내가 공부를 열심히 했구나, 책을 많이 읽었구나, 나는 타고난 재능이 있구나, 지능이 높구나, 나는 용맹스럽고 남보다 힘이 세구나, 나는 돈이 많습니다, 뭐 그런 것을 자랑하기 시작하면 남들을 무시합니다. 나는 이래서 이런 것이 많은데 너는 지금까지 뭐 했냐, 지금까지 살면서 너는 나이가 50이 될 때까지, 70이 될 때까지 도대체 뭘 했길래 그렇게 허덕이고 사냐, 사람들을 차별하게 됩니다.
자기를 자랑하기 시작하면, 이것을 자랑하기 시작하면 그래서 사람을 무시하고 없는 사람을 깔봅니다. 그것이 큰 죄 아닙니까? 차별이 거기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해서 계급을 나누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을 인정하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 나에게 지혜를 주셨네, 저분에게 지혜를 주시지 않았어요, 그러면 내가 가진 지혜로 저분을 도와야 하고, 하나님 나에게 물질을 주셨는데 저분에게 물질을 주지 않았어요, 그러면 나의 물질로 저분을 도와야 하고, 저분은 하나님이 주신 또 다른 재능이 있고 또 다른 그 무엇인가의 달란트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내가 또 도움을 받습니다. 그것이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 하는 것은 굉장한 차이가 있습니다.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구약에서부터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구약에서부터 하셨고 신약도 이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9절을 보시면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육체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자랑할 바가 없다는 말입니다. 31절에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같은 말입니다.
3. 바울의 과거와 현재
3-1. 육체를 신뢰하던 과거
이제 바울이 본격적으로 자기 이야기를 좀 합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바울은 어떤 인간이었습니까? 4절입니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다." 자기는 더욱더 육체를 신뢰할 만한 탁월한 존재라고 하면서 설명을 합니다.
"나는 8일 만에 할례를 받고." 유대인들 아이는 태어나면 8일 만에 무조건 할례를 받습니다. 그날이 대속죄일이든 그날이 어떤 날이든 무조건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그런데 여러분, 베냐민 지파인 것을 바울이 자랑하는데 베냐민 지파가 왜 자랑거리가 될까요?
베냐민 지파인 것이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제일 중요한 이유가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 베냐민만 가나안 땅에서 태어났습니다. 나머지 열한 명, 요셉까지는 다 아람 하란에서 태어났습니다. 베냐민만 가나안에서 태어났습니다.
두 번째, 지파가 땅을 분배받고 나눌 때 남쪽 지방에 유다지파와 베냐민 지파 두 지파가 있었는데, 성전이 세워진 그 자리가 베냐민 지파의 관할 지역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라는 큰 나라의 열두 지파 연합체의 첫 번째 왕이 베냐민 지파 기스의 아들 사울입니다. 그런 자부심이 있습니다. 물론 사울이라는 왕은 망한 왕이지만, 그런데 그런 자부심이 그들에게 계속 흘러오고 있습니다. 모르드개, 에스더 삼촌 모르드개도 베냐민 지파입니다. 그래서 그런 자부심, 베냐민 지파가 사실 별것 아닌 것처럼 제일 막내 지파라 사람들이 무시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이 드러내며 나는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또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이것을 사실 이해하기가 좀 어려운데, 그냥 히브리인이라고 말하면 되지 왜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라고 말하느냐, 그 당시 좀 정황과 관련이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이 두 종류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헬라파 유대인들이 있었고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유대인들이 나라를 잃고 오랫동안 흩어져 살았습니다. 주전 586년도에 바벨론에 의해서 나라를 잃고 나서 그들이 1948년에 지금 전쟁하고 있는 저 땅을 되찾기까지 그들은 오랫동안 나라가 없었습니다. 지금 바울의 시기가 1세기이니, 그러면 한 600년 정도 나라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라가 없으면 유대인들은 자기 혈통상 자기들끼리 결혼하고 자기들끼리 아이 낳고 삽니다. 그들 중에 자기 민족의 언어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있겠습니다. 흩어져서 디아스포라로 살면서 그래서 그 당시에 전 세계 공용어였던 헬라어, 그리스어를 쓰는 사람들을 헬라파 유대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로 치면 미국에 이민을 갔습니다. 미국에 이민을 할아버지 때 갔습니다. 그러면 그 아들, 그 아들, 손자 때쯤 되면 한국말을 전혀 못합니다. 국적이 미국인인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한국말이 이상하고 낯선 것입니다. 못 씁니다. 그냥 피만, 생긴 것만 한국 사람이지 그냥 미국 사람입니다. 그런 식으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중에 헬라파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독하게 히브리어를 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길리기아 다소에서 나왔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터키 남쪽이 자기 고향입니다. 팔레스타인 가나안 땅에서 태어난 것도 아닙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입니다. 그런데 자기 아버지 때부터, 그 윗대부터 지독하게 히브리어를 쓴 것입니다. 자기 민족의 언어를 말입니다. 그것을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자랑스럽습니까? 그 혈통과 그 피에서 내려오는 그 지독함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유대인들 중에도 헬라파 유대인들과 히브리파 유대인들을 딱 놓고 보면 거기서 정통성은 당연히 히브리어를 쓰는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지 않겠습니까? 바울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로마 시민권도 갖고 있었습니다.
또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완벽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 찾기가 힘듭니다. 공부도 잘해서, 또 공부에 재능도 있고 관심도 많아서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웠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입니다.
3-2. 그리스도를 아는 최고의 가치
그런데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그런 사람입니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변화된 모습을 말해보십시오. 중요한 것은 그것입니다. 바울이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베냐민 지파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였는데 그것이 구원을 가져다 줬느냐는 문제입니다. 그것이 진짜 주 안에 있게 해 줬느냐는 것입니다. 자기 조상 때부터 히브리어를 썼던 것과 그가 베냐민 지파였던 것이 그를 구원으로 인도해 줬느냐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바울은 그것을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 만나고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과거에 유익했던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그런 것들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여기 "여기다"는 헬라어로 헤게오마이(ἡγέομαι), "판단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주를 따라가는데 방해가 되는 것입니다. 다 해로 여깁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또 "해로 여긴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아, 이것이 "알다"라는 말이 나오는데요, 그냥 지식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경험하다"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하는 것이 가장 고상하다고 했습니다.
"고상하다"는 우리가 생각하는 고상함, 예쁜 옷 입고 우아하게 서 있는 것, 그런 고상함이 아니라 가장 가치 있고 가장 뛰어나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지금까지는 자기가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또 베냐민 지파요, 바리새인이요,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했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것, 그것이 최고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만나고 주 안에 있으며 구원받고 나니까 그것이 나에게 구원을 주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경험하는 것이 최고의 가치다, 이것을 바울이 드디어 깨달았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가치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이 가치를 가지고 살지 않으면 그것이 세속화입니다. 과거에는 우리나라 선교 초기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최고의 가치였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교회가 세속화되니까, 교회가 세상을 따라가다 보니까, 교회의 최고의 고상함이 예배당을 크게 짓는 것이 되었습니다. 예배당을 멋지게 장식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성도가 많이 모이는 교회를 만드는 것이 되고, 헌금 많이 하는 교회를 만드는 것이 되고, 그것이 가장 고상한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사람들도 그런 교회 출석하는 것이 가장 자부심이 있는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가장 고상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뭐 고상한 것입니까? 그것은 고상하지 않습니다. 돈만 있으면 다 하는 것인데, 은행 가서 돈만 빌리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진짜 고상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그리스도를 경험하는 것, 그리스도를 경험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주 안에서 기쁨을 누리고 사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것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그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우리가 예수 믿는다는 것은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9장 23절을 한번 보십시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지면서 부귀영화를 함께 지고 갈 수 있습니까? 십자가를 지는 것이 어렵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 내 몫의 십자가를 지고 가기가 무겁습니다. 그러면 다른 것을 내려놔야 합니다. 다른 것을 좀 놓고 그리고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 따르려면 좀 포기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포기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포기하기가 싫습니다. 바울이 그랬습니다. 바울이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다음에 "그리스도를 얻고"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얻으려면 대가 지불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대가 지불은 내가 돈을 주고 사는 의미가 아닙니다. 가치 교환의 의미가 아니라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리스도를 얻는 것입니다. 감추인 보화의 비유처럼 가서 자기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자 청년처럼 그것을 하기 싫습니다. 불편합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팔아서 은 30을 얻고 싶지, 가룟 유다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팔아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부인하고 내 생명을 얻고 싶지, 사람들은 반대로 살고 싶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거꾸로 가는 것입니다. 진짜 신앙생활은 대가 지불을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대가 지불, 나는 대가 지불을 얼마나 하고 살고 있는가. 사람들이 참 그것을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되면, 그것이 되면 존경받고 그것이 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4. 성화의 삶
4-1. 칭의와 성화
9절을 보시면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 안에서, 그 안이 무엇입니까? 그가 무엇입니까? 누굽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고 싶은 것입니다. 바울이 자기는 주 안에 있고 싶은 것입니다. 아까 말한 것처럼 감옥 안에, 뭐 이런 것 필요 없습니다. 그냥 주 안에 있고 싶은 것입니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우리는 이것을 지난 시간에 무엇으로 배웠습니까? 칭의라고 배웠습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났을 때 그는 의로운 구석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하신 것입니다. '너는 내가 택한 그릇이다'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의로워진 것입니다. 그때 신분이 확 바뀌었습니다.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이것이 칭의입니다.
그러면 신분이 바뀐 칭의에서 끝나지 않고 그다음에 무엇이 시작됩니까? 성화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수준을 그 신분에 맞기까지 끌어올려야 하니까요. 그래서 10절부터 끝절까지 보겠습니다. 9절까지 칭의를 얘기했고 10절부터 성화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 개념을 가지고 10절을 보셔야 합니다.
4-2. 죽음과 부활에 동참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이제 본받는 것입니다. 성화의 삶을 살아가니까요. 그런데 무엇을 본받느냐 하면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죽으심을 본받는다는 말은 나도 죽겠다는 것 아닙니까? 예수처럼 말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죽어야 부활합니다. 죽어야 부활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진리입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잡고 있는 것, 구원 아닙니까? 구원, 영화의 차원의 구원, 그것을 위해서 달려간다, 성화의 삶을 성실하게 살아간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10절부터 바울이 성화의 삶을 결단하고 그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성화의 삶에서 바울이 중요하게 붙잡은 것이 무엇입니까?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성화는 잘 죽는 것이 성화입니다. 잘 죽어야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자주 얘기했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자기 의를 죽이는 것이 그것이 성화의 삶의 핵심입니다.
자기 의를 죽이는 것. 내 의가 죽으면 그리스도의 의가 나타납니다. 내 의가 죽으면 다른 사람이 좀 숨을 쉽니다. 그런데 가정에서 보세요. 내 의가 살아서 펄떡펄떡 숨쉬고 날뛰고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숨을 잘 못 쉽니다. 내 의가 좀 죽으면 다른 사람들이 얼굴에 화색도 돌고 우리 가족들이 좀 숨을 쉽니다. 모든 공동체가 그런 것 같습니다.
골로새서 1장 24절에 멋진 말씀이 나옵니다. 역시 이것도 바울이 한 말인데,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성도들을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너무너무 멋진 말씀 아닙니까?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있습니까? 그리스도는 고난 다 당하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시고 완벽하게 부활하셨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무엇입니까? 교회입니다. 교회. 왜냐하면 교회의 머리가 누굽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와 나는 한 몸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지금 바울 시대에 핍박받고 있습니다. 지금 바울 시대에 이 교회가요. 그래서 그 고난을, 남은 고난, 교회가 받는 이 고난을 내가 받겠다, 내 육체에 받겠다, 그래서 육체에 받다가 나는 어떻게 되겠다, 죽어 버리겠다, 그러면 부활합니다. 바울이 그 결단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 공동체의 성도들 아닙니까?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가 된 교회의 지체로서 나는 어떤 고난에 동참하고 있습니까? 이 교회가 당하는 고난, 교회가 이 시대의 아픔을 짊어지고 나가야 하는 이 고난, 교회가 함께 하는 일에 나는 지체로서 발가락 하나라도, 혹은 새끼손가락 하나라도 나는 그 지체가 되어서 함께 그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고 감당하고 있는가. 그것이 성화의 삶이라고 했는데, 그것이 성화라고 했는데, 고난은 받고 싶지 않고 영화만 이루고 싶다, 그 말이 안 됩니다. 칭의는 있는데 성화를 건너뛰고 영화로 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화의 삶에서 핵심은 죽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죽음은 교회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힘들 때, 혹은 교회가 한 방향을 향해서 나아갈 때, 그때 헌신하고 그때 수고하고 그때 그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는 자, 하나님은 결단코 잊지 않으십니다. 결단코. 왜냐하면 같이 지체된 자로서 같이 고난 받았기 때문입니다.
4-3. 뒤를 돌아보지 말라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바울의 자세가 어떠합니까? 13절입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보십시오.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무엇을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한다는 것입니까? 구원입니다. 구원.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뒤에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업적입니다. 자기 업적. 바울이 지금 로마에 구류된 상태로 이 편지를 쓰고 있는데요, 이 편지를 쓰는 시점이 사도행전 28장 이후입니다. 그러면 사도행전 28장까지 올 때까지 바울 이야기가 얼마나 많이 나옵니까? 바울 이야기는 사도행전 9장부터 나옵니다. 그런데 바울이 안디옥 교회에 파송을 받고 1차 선교여행, 사도행전 13장부터 나옵니다. 그러면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28장까지 전부 바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 있는 일은 잊어버린다고 했습니다.
"잊어버린다"가 나옵니다. 무슨 뜻입니까? 무관심하다,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자세가 내가 이전에 했던 나의 업적에는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과거의 무용담에 취해 살지 않습니까? "아, 제가 옛날에 어땠는데요. 제가 옛날에... 지금은 제가 이래도 목사님 제가 한때는... 제가 한때는 소도 잡았고, 제가 한때는..." 그런데 그럴 여가가 없다는 것입니다.
성화의 삶을 사는 사람은 과거의 영화에 빠져서, 과거의 내 자랑에 빠져서 그것을 뒤돌아본다고... 앞을 향해서 지금 나가야 하는데, 성화의 삶을 살기 위해서, 교회의 그리스도의 몸 된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기 위해서 열심히 내가 일하고 또 나가야 하는데, 그러려면 여가가 없는데, 너무너무 바쁜데, 언제 과거를 회상하고 그러고 앉아 있다는 말입니까?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균 수명 늘어나는 것이 별로 좋은 일이 아닙니다. 얼른 빨리 성화에서 끝나고 얼른 빨리 천국 가 버려야지, 뭘 그렇게 백 살까지 자꾸 약 먹어 가면서 그렇게 갑니까?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저 양산 천변도시고속화도로에서 운동하시죠.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합니다. 진짜 우리가 열심히 몸을 가꾸고 보양 먹고 영양제 먹고 밥 먹을 때마다 약 이만큼 틀어놓고 먹는 것, 그것은 전부 다 열심히 일하려고 그러는 것이지 뭐 다른 것이 있겠습니까? 그것 없이 백 살까지 살아봐요. 죄만 짓는 것이지 뭐 하겠어요. 그래가지고 그냥 열심히 성화의 삶을 살기 위해서 앞을 보고 또 나가고 나가고 해야 합니다.
성화의 삶을 사는 공동체는 시끄럽지 않습니다. 교회가 성도들이 모여서, 이 빌립보 교회가 바울이 그것 때문에 이것을 쓰는 것인데, 여인네들이 모여 앉아가지고 자꾸 옛날 얘기나 하고 과거가 이랬니 옛날이 좋았니 어쩌니 저쩌니 이런 얘기 해 봐야 너희들 성화의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려라, 앞을 향해서 계속해서 전진하고 주의 일 하고 열심히 한 걸음 한 걸음 또 나가라. 그래야 교회가 조용합니다.
일하는 교회는 조용합니다. 일하지 않는 교회가 시끄러운 것입니다. 자꾸 공도 계속 앞으로 또 전진하고 또 전진해야지 언제 그것을 자꾸 뒤통수 잡고 있습니까? 빨리빨리 하고 나가야 합니다.
5. 푯대를 향하여
5-1. 달려가는 믿음
그래서 14절 나옵니다. "푯대를 향하여." 푯대가 무엇입니까? 영화입니다. 그냥 천국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푯대, 그것을 향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바울이 급합니다. 성질이 급합니다. 달려가는 것입니다. 달려가는데 뒤에 있는 것을 돌아보다가 달려가다가 넘어집니다. 돌아보면 안 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달려가고 또 달려가고, 전진하고 앞을 향하여 또 나가야 합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이제 누구를 본받아야 합니까? 17절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함께"라는 말을 쓴 이유는 빌립보교회 성도들 모두가 다 나를 본받아 다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얼굴에 철판 깔지 않으면 잘 하기 힘듭니다. 부모가 자식에게도 "나를 본받아라" 하기 얼마나 어려운데요.
그런데 이 말은 그런 것 같습니다. "본받아라" 하는 말은 나는 지금 성화의 삶에서 이렇게 달려가고 있으니 같이 가자, 같이 달려가자, 내가 열심히 지금 달려가고 있으니 우리 함께 가자, 이 말입니다. 가르치는 자가 모범을 보입니다. 그런데 이 바울이 이 교회 개척 목사 아닙니까? 그것을 하지 않고 있으면서 같이 가자 이 말 어떻게 합니까? 같이 가는 것입니다. 전부 다요. 교회는 한 방향을 향해서 계속 같이 달려가는 공동체입니다.
푯대를 향해서. 그 푯대가 기껏해야 '우리 교회 천 명 되게 해 주세요, 1,500명 되게 해 주세요, 2천 명 되게 해 주세요' 이런 푯대 말고요. 이런 것, 이런 것 좀 수준 낮지 않습니까? 그런 것 말고요. 이 가을에 뭐 장로님은 다섯 명 전도하고 집사님은 세 명, 장로님 100명 전도하면 왜 안 됩니까? 그런데 그런 것 말고 영화의 삶을 위해서, 보다 더 궁극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함께 달려가는 것입니다. 교회 짓고 큰 교회 만들고 그렇게 달려가는 것 말고요.
정말 영화의 삶을 위해서 우리가 성화의 삶을 계속해서 함께 가자. 바울이 그것을 독려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가니 우리 함께 가보자. 우리는 그 얘기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에게도 가다가 쓰러지면 같이 이렇게 잡아주면 되니까요.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이렇게 달려가는 자들을 눈여겨 보고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5-2. 십자가의 원수
십자가의 원수, 뒤에 나옵니다. 어떤 자들인가? 19절입니다.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즉 십자가의 원수가 어떤 자들인가요? 앞의 말과 비교해서 생각해 보면 뒤돌아보고 성화의 삶 살지 않고 죽치고 앉아 있는 자들입니다. 과거 출애굽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과거 우리가 이집트에서 고기 가마 곁에서 고기 구워 먹을 때가 좋았는데 너희들이 나를 이곳으로 인도해서 우리를 굶어 죽게 하는도다' 이랬던 사람들. 자꾸 뒤돌아보고 자꾸 옛날 타령하는 사람들이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십자가는 머물러 있고 뒤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전진하고 나가는 것입니다. 앞으로 나가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앞으로 계속 나가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로마 사람들은, 로마의 부자들은 먹을 것이 너무 많아가지고 먹고 토하고 먹고 토하고 그것이 일이었습니다. 먹고 토하고 손가락 집어넣어서 또 토하고 또 먹고 토하고. 그러니까 바울이 보니까, 아 우리는 배고파서 굶어 죽겠는데 그러고 노니까, 그러니 그들의 신이 배입니다. 배가 신입니다. 배를 배부르게 하기 위해서, 입을 감각적으로 맛있게 하기 위해서 계속 그것이 신인 것입니다. 그렇게 땅에 목적을 두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 그래서 뒤를 돌아보는 자들은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칭의 받았으면 영화를 바라보고 하늘을 바라보고 계속 달려가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골로새서에서 그랬습니다. 골로새서 3장 1절과 2절을 보시면 바울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즉 구원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 말은 뒤돌아보지 말라는 말입니다. 뒤돌아보지 마라. 과거의 영화에 목매지 말고 앞을 보고 전진하고 또 나가라.
5-3. 하늘의 시민권
그다음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성도가 궁극적으로 소망해야 할 것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그러나" 땅의 것을 생각하는 자들이 이렇게 많지만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그렇습니다. 시민권 따려고 하늘로 가야 합니다. 계속 거기로.
"거기로부터 즉 하늘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주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에서 공중 재림하실 것이니 그것을 기다리니까 그냥 가만히 앉아서 뒤돌아보고 기다릴 수 없으니 우리는 계속 달려가라.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이것이 영화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결론
빌립보서 3장은 9절까지 칭의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구원받기 전 상태, 칭의 받은 상태. 10절부터 끝까지는 성화의 상태인데,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자는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즉 죽어야 하고, 부활해야 하고, 뒤를 보면 안 되고, 푯대를 정하고, 그리스도의 고난을 내 몸에 채우도록 교회를 위하여 헌신하고 봉사하라는 말씀입니다. 잘 살펴보시고 이제 다음 주에는 빌립보서 4장 마지막을 함께 보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바울은 상황에 따라서 이리 기뻐하고 저리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주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주 안에 있는 신분을 가진 자로, 칭의에 속한 자로, 그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 주 안에서 행복해하고 즐거워했습니다. 감옥에 있어서도 그는 당당했으며, 주눅 들지 않았고, 기죽지 않았고, 항상 푯대를 정해놓고 푯대를 향하여 달려갔습니다.
주여,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입은 칭의 받은 사람인데 이제는 성화의 삶을 살아가기 원하오니, 주여 성화의 삶을 우리 교회 공동체 성도들이 함께 손잡고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동참하게 하옵시고, 우리의 목표가 영화이오니, 이 길을 걸어갈 때 그리스도의 몸 된 고난을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울 결단과 용기를 가지고 나아가고 달려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바울처럼 함께 가자고 권할 수 있는 자 되게 하시고, 바울이 앞서 가니 그 뒤따라간 빌립보교회 성도들처럼 우리 모든 성도들이 함께 그 길을 동행하며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결국은 그 몸을 영광의 형체로 변하게 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영화의 자리까지 최선 다하여 매 순간 매 순간 성실하게 걸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