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특강 (12) 바벨론과 심판 (17장)
요한계시록 17장 14절 말씀입니다.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오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 아멘. 오늘은 요한계시록 열두 번째 시간입니다. 바벨론에 대해서, 그리고 심판에 대해서 함께 살펴볼 시간입니다. 이제 17장까지 왔으니 22장이 끝인데 거의 끝이 보이는 시점에 도달했습니다.
1. 요한계시록의 전체 흐름
중간에 우리가 지금 어디까지 왔는지 몇 번 살펴본 적이 있는데, 이제 다시 1장부터 지금까지 달려온 길을 한번 짚어보고 넘어가는 것이 필요할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1장을 공부할 때는 1장의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배웠습니다. 2장과 3장은 일곱 교회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게 지금 종말의 때, 묵시의 때에 이런 말씀을 주셨습니다. 견디고 또 견디면 반드시 때가 이르면 좋은 날이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4장에서 이제 본격적으로 사도 요한이 환상을 보는데, 요한이 올라간 하늘이 4장의 내용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세 번에 걸친 거대한 심판이 나오는데, 첫 번째 심판이 일곱 인 심판입니다. 5장과 6장에 나오지요. 일곱 인 심판이 나오고 바로 일곱 나팔이 나오지 않고 중간에 십사만 사천이 한번 나왔습니다. 7장에 여기까지 정리가 되시지요. 그다음에 8장과 9장에 보면 일곱 나팔 심판이 나옵니다. 일곱 나팔 심판은 일곱 번째 나팔 심판이 9장에 나오지 않고 11장 끝에 가서야 나옵니다. 그 이유를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의 마지막까지는 함부로 하지 않으시고 돌아올 자를 또 기다리고 기다리고 인내하시는 과정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10장에 보니까 일곱 번째 나팔을 불기 전 펴놓인 작은 두루마리가 10장이었습니다. 펴놓인 작은 두루마리는 하나님의 말씀이지요. 이 말씀을 붙들고 돌아오면 용서해 주겠다는 뜻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1장에 보면 두 증인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증언하는 두 증인, 모두가 순교한 두 증인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일곱 번째 나팔을 11장에 가서야 불었습니다. 12장의 주제가 여자와 용이었는데, 여자가 누구였습니까? 여자는 교회였습니다. 여자가 아들을 낳았고, 그 아들을 용이 집어삼키려고 계속해서 따라다니는 모습이 12장입니다.
13장과 14장에 보면 두 짐승이 있는데, 한 짐승은 바다에서 올라오고 또 한 짐승은 땅에서 올라옵니다. 바다와 땅은 온 천지를 다스리고 지배하는 권력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십사만 사천이 또 나옵니다. 7장에서 십사만 사천이 나왔고 14장에서 또 나옵니다. 십사만 사천이 요한계시록에 두 번이나 나오는 이유는 중요하기 때문에 반복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대접 심판이 15장과 16장이었습니다. 이것을 이제 우리가 지나온 것인데, 이 지나온 것을 한번 머릿속에서 정리하시고 요한계시록이 1장부터 22장까지의 장 제목이 이렇게 된다는 것을 머릿속에 넣어두고 계시면 요한계시록의 흐름을 충분히 잘 알 수 있습니다. 숲도 보고 나무도 봐야 되니까요.
우리가 한 구절 한 구절 살피느라 전체적인 큰 맥락을 놓칠 수도 있고 흘려보낼 수도 있기 때문에, 그것은 별로 옳지 못합니다. 전체적인 흐름도 보고 중간중간에 나오는 나무도 주의 깊게 보셔야 됩니다.
2. 바벨론의 정체
2-1. 음녀와 바벨론
이제 이런 맥락을 가지고 오늘 17장을 봅니다. 17장을 보시고 교재를 보시면 교재 54쪽이 '바벨론과 심판'이라는 제목입니다. 바벨론은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요? 과거에 바벨론이 있었습니다. 남유다를 멸망시킨 거대한 제국, 느부갓네살이 다스리던 거대한 제국 바벨론이 있었는데, 지금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바벨론은 로마 제국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로마 제국이 바벨론이라고 보여지고 있고, 그 바벨론을 또 다른 이름으로 표현합니다.
첫 번째 질문입니다.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는 누구입니까? 결론부터 말하면 음녀가 곧 바벨론이고 바벨론은 곧 로마 제국입니다. 1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가 받을 심판을 내게 보이리라." 큰 음녀가 어디에 앉아 있습니까? 많은 물 위에 앉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음녀는 바벨론이고 바벨론은 곧 로마 제국이라는 것은 알았는데, 많은 물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많은 물이 무엇일까요? 그것을 17장 15절에서 설명해 줍니다.
15절을 보시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또 천사가 내게 말하되 네가 본 바 음녀가 앉아 있는 물은..." 음녀가 앉아 있는 물은, 이렇게 나왔으니 그 뒤에는 그 물이 무엇인지를 설명할 것 아닙니까? 그 뒤를 보니까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니라." 백성, 무리, 열국, 방언 하면 온 나라입니다. 모든 나라, 많은 무리라고 하는 것은 온 세상, 모든 나라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왜 그것이 맞느냐 하면, 그 당시 로마가 다스리고 있던 식민지가 엄청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많은 식민지, 그 많은 엄청난 영토를 많은 물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음녀가 곧 바벨론이고 바벨론이 곧 로마 제국이었기 때문에, 음녀인 바벨론 곧 로마 제국이 앉아 있는 백성과 방언과 열방과 온 나라, 이 세상 전체, 그들이 다스리고 있는 모든 세상을 다 많은 물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해가 되시지요.
2-2. 신부와 음녀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읽다 보면 여성분들이 기분 나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왜 하필 나쁜 것은 여자인지, 음녀가 왜 여자인지, 나쁜 남자라고 하지 않고 왜 여자인지,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성경을 오해하기 딱 좋은 말씀입니다. 음녀의 반대 개념이 무엇입니까?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음녀의 반대 개념은 신부입니다. 누구의 신부입니까?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요한계시록에서는 교회를 가리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9절을 보십시오.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어린 양이 누굽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누굽니까? 교회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여성을 비하하는 책이 아닙니다. 음녀, 바벨론, 로마 제국, 이렇게 생각하면 기분 나쁘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책이 아니라, 그 반대 개념으로 보면 가장 존귀하고 가장 순결하고 가장 아름다운 이름을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좋은 것은 말하지 않고 나쁜 것만 가지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을 균형 있게 보는 태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것은, 음녀의 반대 개념은 그리스도의 신부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곧 교회다, 그러면 바벨론이 곧 로마 제국이니까 로마 제국의 반대 개념은 순결한 교회 공동체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3. 바벨론의 악행
3-1. 황제 숭배
이제 두 번째 질문을 봅니다. 큰 음녀 바벨론 곧 로마 제국이 어떤 일을 했느냐. 이것은 우리가 답을 보지 않아도 지금까지 많이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로마 제국이 어떤 짓을 했습니까? 황제 숭배를 강요했습니다. 황제 숭배하지 않으면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이지 않았습니까? 핍박하고, 네로 황제부터 시작해서 도미티아누스 황제까지 지금 이 요한계시록은 도미티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핍박받고 있는 그리스도인 교회 공동체의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유배 중에 환상 가운데 보고, 그들에게 힘내라, 얼마 남지 않아서 마흔두 달이 지나면, 천이백육십 일이 지나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가 지나면 그날이 속히 지나갈 것이다, 힘을 내라고 보내는 편지 아닙니까?
그래서 지금 여기 큰 음녀 바벨론이 하는 짓은 황제 숭배를 한 것입니다. 황제 숭배를 강요하고, 황제 숭배한 자들에게 로마 제국이 준 것이 무엇입니까? 도장을 찍어주었습니다. 이마나 오른 손목에. 그것을 짐승의 표라고 했습니다. 짐승의 표. 그 표를 받으면 매매를 할 수 있게 해준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십사만 사천을 배울 때 배웠습니다. 그리고 장사하는 사람들은 상인 조합인 길드에도 가입할 수 있게 해준다고 했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황제 숭배를 하지 않으면 사회생활이나 공동체 생활을 아예 할 수 없도록 만들어 둔 것입니다.
3-2. 우상 숭배
2절을 보겠습니다. "땅의 임금들도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사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 음행, 음행이 나오지요. 여기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음행은 다른 말로 하면 우상 숭배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음행, 구약에 호세아 선지자가 "너희들이 음행하였도다, 음행하였도다" 하는 모든 음행은 육체적인, 성적인 부조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음행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상 숭배한 것이지요. 전부 다. 여기서 음행도 우상 숭배이니까, 그 우상 숭배는 곧 황제 앞에 엎드리고 절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큰 음녀 바벨론 로마가, 땅의 임금들도 그와 더불어 우상 숭배했고 땅에 사는 자들도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고 했습니다.
4. 세 가지 삶의 방식
여기서 또 중요한, 복습해야 될 단어가 하나 나오는데, 몇 번이고 다루었던 단어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2절에 '땅에 사는 자들', '살다'라는 단어입니다. '살다'라는 단어가 우리말 성경에는 그냥 '살다'입니다.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헬라 원어는 '살다'라는 단어를 세 가지를 썼다고 했습니다.
4-1. 스케노오(σκηνόω)
첫 번째가 기억이 안 나십니까? 여기 나오지요. 예를 들어 놓았습니다. 요한계시록 13장 6절,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비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사는 자들을 비방하더라." 하늘에 사는 것입니다. 하늘에 사는 자들. 공간적으로 하늘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며 영적으로 산다는 것, 그것을 스케노오(σκηνόω)라고 했습니다. 스케노오, 기억나십니까? 이제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배웠으면 이 정도 단어는 입력하고 있어야 됩니다.
'살다'라는 것에 진짜 우리가 살아야 될 가치가 있는 삶은 스케노오의 삶입니다. 스케노오의 삶은 영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영적 임재 가운데 사는 것, 찬양하고 예배드리고 하나님의 아들딸답게 구별되어서 사는 자들입니다. 짐승에게 절하지 않고, 우상 숭배하지 않고, 비록 지하에 카타콤에서 살지만, 배고프고 언제 잡혀서 죽을지 모르지만, 불안한 가운데 살지만, 그러나 내 영에 깨어서 하나님과 소통하고 예배드리고 하나님과 기뻐하며 찬양하며 사는 삶이 스케노오의 삶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우리가 따라가야 할 삶이겠지요.
4-2. 카토이케오(κατοικέω)
그런데 여기 2절에 나오는 "땅에 사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할 때, 여기 '살다'라는 것은 스케노오가 아니겠지요. 음행에 취했다고 했으니까, 우상 숭배했다고 했으니까. 그러면 여기는 카토이케오(κατοικέω)의 삶입니다. 들어보셨습니까? 카토이케오. 스케노오와 카토이케오는 정반대 개념입니다.
카토이케오의 예를 여기 들어놓았습니다. 요한계시록 13장 8절입니다.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이 땅에 사는 자들, 공간적으로 이 땅이 아닙니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사는 자들입니다. 그러면 "절하라" 하면 짐승의 표를 받아라 하면 받고, 왜냐하면 먹고살아야 되니까. 육체적으로 먹고살기 위해서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사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카토이케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으면 흘러가는 대로 사는 삶이 왜 나쁩니까? 사람들은 그렇게 물을지 모릅니다. 내 생명이 제일 중요한데, 내 목숨이 제일 중요한데,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것이 왜 나쁩니까?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보면, 하나님 앞에서 보면, 말씀 앞에서 보면, 육체가 살아있다고 다 사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 주일날 우리가 창세기 말씀 들을 때 배웠습니다. "나의 영이 영원히 너희들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라고 했습니다.
즉 예배드리지 않는 자들, 하나님과 영적으로 소통하지 않고 함께 관계하지 않는 자들은 다 이미 호흡은 붙어있고 살아있는 것 같으나 이미 죽은 자들입니다. 이 땅에 사는 자들, 카토이케오로 사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이미 육신이 되어버린 자들입니다. 안타깝고 불쌍한 자들이겠지요.
4-3. 카데마이(κάθημαι)
양극단입니다. 하늘의 영적 임재 가운데 사는 스케노오의 삶을 사는 사람들, 땅에서 흘러가는 대로 그냥 사는 카토이케오의 삶을 사는 자들. 그런데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카데마이(κάθημαι)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카데마이. 회색 지대에 사는 사람들, 한쪽 발은 이쪽에, 한쪽 발은 저쪽에.
페이지를 넘겨보면 교재 55쪽에 요한계시록 14장 6절이 나옵니다.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주하는 자들 곧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땅에 거주하는 자들', 여기 '거주하다'라는 말이 카데마이입니다. 카데마이는 이곳도 아니고 저곳도 아니고, 여기서 거해볼까? 아니 여긴 너무 위험해. 그냥 세상에서 흘러가는 대로 짐승의 표 받고 우상 숭배하고 그렇게 목숨 부지하고 살아야겠어. 아, 그런데 내 양심이 또 그것은 허락하지 않아. 이쪽으로 가볼까? 갈팡질팡하는 사람들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편지할 때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의 특징을 어떻게 표현했습니까?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신앙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5절 말씀입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여기서 우리가 스케노오와 카토이케오와 카데마이를 배웠으니까, 차다 뜨겁다를 거기에 한번 대입시켜보면, 뜨거운 것은 무엇입니까? 영적인 열정이 있는 것입니다. 스케노오를 뜨겁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찬 것은 무엇입니까? 완전히 버린 사람들입니다. 이 땅에 사는 사람들. 카토이케오가 그것이겠지요.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의 성도들은 카토이케오도 아니고 스케노오도 아니고,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고 그냥 그렇게 산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복음 전파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요한계시록은 '산다'는 단어를 세 단어로 이렇게 분리해서 사용하고 있는데, "그러면 너는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 자들이냐? 당신은 어떻게 살고 있느냐?" 이 질문을 우리에게 계속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읽을 때 말씀이 우리에게 계속 질문한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됩니다. 그 질문에 대해서 우리는 답을 하셔야 됩니다. 그 답을 하려니까 찔림이 있습니다. 내가 지금 카데마이의 삶을 살고 있는데, 여기도 가고 저기도 가고. 그런데 이제는 결단하고 스케노오의 삶으로 나아가야 되겠다. 그래서 말씀 듣고 나면 마음에 결단이 서고 그 결단이 삶으로 나타나야 되는 것 아닙니까? 지금 이 '살다'라는 단어를 요한계시록에서 세 가지를 우리에게 주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5. 바벨론의 모습
5-1. 화려한 외양
그다음 세 번째 질문입니다. 큰 음녀 바벨론의 모습을 묘사해 보십시오. 큰 음녀 바벨론 로마 제국이라 했습니다. 그 로마 제국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3절,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나'는 누굽니까? 사도 요한이지요. 성령께서 사도 요한을 데리고 환상 가운데 광야로 데려가셨습니다. 거기서 보여주셨습니다. 무엇을 보여주셨습니까? "내가 보니 여자가", 여자는 누구입니까? 구별하셔야 됩니다. 여자가 그냥 교회가 아닙니다. 여기 여자는 큰 음녀, 바벨론 음녀이지요.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짐승은 무엇입니까? 국가 권력입니다. 우리 배웠지요. 용은 사탄이고 짐승은 국가 권력이고,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었다는 말은 사탄이 국가 권력 곧 황제에게 권세를 주었다는 뜻입니다.
여기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다는 것은, 짐승 곧 국가 권력 곧 황제가 붉은 옷을 입었다는 뜻입니다. 황제가 입은 옷이 붉은 옷입니다. 얼마나 비싼 옷일까요? 관직을 나타낼 때 색깔로 나타냅니다. 그래서 여기 황제는 붉은 옷을 가지고 자신의 권위와 능력을 자랑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 짐승의 몸에, 즉 황제의 몸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가득했습니다. 그렇겠지요. 로마 황제의 몸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일곱 머리와 열 뿔은 권세를 말한다고 했습니다.
4절, "그 여자는", 그 여자는 곧 음녀 바벨론 로마 제국이겠지요. "자줏빛과 붉은 빛 옷을 입었어." 고관들은 자색 옷도 입습니다. 그리고 붉은 빛 옷도 입습니다. 아까 로마 황제 곧 짐승이 붉은 옷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곧 큰 음녀 바벨론이 로마이고 로마 제국이 곧 짐승입니다.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 잔을 가졌는데", 여기까지 좋지요. 부럽지요. 좋은 옷을 입고 금은보석으로 자기를 치장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금은보석이 그의 손에 다 들어와 있습니다.
5-2. 내면의 더러움
"그런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그 속을 들여다보니까 가증한 물건으로 더러워서 볼 수 없을 정도의 더러운 것이 거기에 가득했다는 뜻입니다. 속을 들여다볼 수 있어야 되는데, 우리는 항상 겉모습만 봅니다.
겉모습만 보면 좋은 옷을 입고 다니고, 좋은 차 타고, 멋진 집에 살고, 학벌이 좋고, 권세가 있고, 능력이 있고, 금은보석으로 자기를 치장하고 다니는 분들을 보면 부러워서 죽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리에 있는 사람을 보면 내 아이도, 나는 이미 컸고, 내 자식을 잘 키우고 잘 교육시켜서 최고 엘리트를 만들어서 저런 자리에 세우고 싶다는 욕망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그런데 그 속에 온갖 가증하고 온갖 더러운 것이 다 들어있는 것은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 로마 권력이 겉보기에는 얼마나 대단합니까? 붉은 옷을 입고 자줏빛 옷을 입고 자색 옷을 입고 금은보석으로 자기를 치장하고 다니고, 대단한 권력입니다. 그런데 그 속을 들여다보니까, 하나님께서 그 속을 들여다보시니까 온갖 더러운 것으로 다 치장되어 있더라, 더러워서 볼 수가 없게 되었더라,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5-3. 회칠한 무덤
5절을 보겠습니다. "그의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가증한 것들의 어미가 곧 바벨론 큰 음녀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보면 우리 예수님께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향하여 책망하신 것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뭐라고 책망하셨습니까? 회칠한 무덤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3장 27절을 보십시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유대인들의 무덤은 우리처럼 땅을 파고 묻는 것이 아니고 굴입니다. 굴 안에 시신을 넣고 그리고 이 큰 바위로 굴려서 굴 입구를 막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거기서 냄새가 나옵니다. 아무리 돌로 잘 막아놔도. 그래서 냄새가 나니까 회칠을 한 것입니다. 회칠을 보기 좋게. 그런데 들여다보면, 거기 가까이 가면 시체가 썩어서 나오는 냄새가 코를 찌르고 진동합니다. 왜냐하면 속에서 온갖 더러운 것과 뼈와 살이 썩는 냄새가 그 속에서 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아무리 멋진 회로 칠을 한다 한들 그 속은 다 썩어가고 있다는 것. 예수님께서 유대 종교 지도자, 권력자들을 향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로마 권력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 교회 종교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 예수님께서 "너희는 회칠한 무덤 같도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항상 겉과 속이 일치해야 됩니다. 우리가 겉모습으로 보기에는 거룩해 보이고 좋아 보이고, 저 사람이 꽤 괜찮은 사람처럼 보이고 인자한 것처럼 보이는데, 그런데 집안에서 하는 행실은, 가까운 사람들에게 하는 행실은 엉망진창이고, 자기 속으로 생각하는 것과 계획하는 것이 모든 것이 다 악하다면, 회칠한 무덤 아니겠습니까? 지금 여기에 로마 권력처럼 그 속은 온갖 가증한 것과 더러운 것으로 가득하지 않겠습니까?
바울이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여기 나옵니다. 디모데후서 2장 20절과 21절,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금, 은 아무리 좋은 그릇이 있어도 주인이 볼 때 가장 깨끗한 그릇을 쓰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깨끗한 그릇이 되어야 됩니다. 주인이 보시기에 "나 이 그릇 쓰고 싶다" 할 정도로 자기를 비워서 깨끗하게 만들어 놓아야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팔복을 이야기하실 때 첫 번째 복이 무엇입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은 우리 마음을 깨끗하게 비워내라는 뜻입니다. 온갖 더럽고 온갖 가증한 것으로 너희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지 말고, 그러고서는 그렇지 않은 척하지 말고, 너희 마음을 다 비워내고 깨끗하고 정결하게 하라.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매일같이 우리를 말씀 앞에 세워야지요. 말씀 앞에 나를 세우면 내 추악하고 더러운 것이 보이니까. 그것을 드러낼 것 아닙니까? 매일 나를 깨끗하게 하는 생활, 바울의 언어로 말하면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했습니다. 그런 생활을 해야 그렇게 살아야 깨끗할까 말까 하는데, 한 번도 말씀 앞에 나를 세우지 않으면, 기도하지 않는데, 어떻게 내가 깨끗하게 되겠습니까? 로마 황제, 로마 왕실 욕할 것 없습니다. 우리가 똑같이 그런 사람일 수 있겠지요. 회칠한 무덤 같은 존재일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됩니다.
6. 피에 취한 바벨론
네 번째 질문입니다. 큰 음녀 바벨론이 무엇에 취해 있느냐? 6절을 보십시오. "또 내가 보니 이 여자가", 큰 음녀 바벨론입니다.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 피에 취할 정도가 되면요, 얼마나 그 피를 많이 마셔야 됩니까? 그러니까 로마 황제가, 짐승이, 국가 권력이, 큰 음녀 바벨론이 예수 믿는 사람을 얼마나 많이 죽였다는 이야기입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하고, 황제 숭배하지 않는다고, 짐승의 표 받지 않는다고, 그들을 죽이고 또 죽여서 그 피에 취할 정도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 믿는데 발각이 되었습니다. 그 공동체가 다 끌려나왔습니다. "지금 여기서 배교하면 살려준다. 지금이라도 황제 앞에 무릎을 꿇고 짐승의 표를 받으면 보내준다." "아닙니다. 저는 그럴 수 없습니다. 내 영혼이 구원받았는데, 하나님이 나를 배신하지 않았는데,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배신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하겠습니까?"
그러면 원형 경기장에 던져집니다. 사자의 밥이 됩니다. 맹수의 밥이 됩니다. 그렇게 해서 흘린 피에 로마 권력자들이 그 피에 취하였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얼마나 많이 피를 흘렸는지. 하나님이 이들을 가만히 두시겠습니까? 우리 인생은 그렇게 해서 죽은 인생은 사람 보기에는 불행한 인생처럼 보이나, 어차피 우리 육체는 한 번 죽어 마땅한 인생인데, 영혼은 하나님 앞에 올라가고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서 영원토록 하나님과 그 아들과 함께 왕 노릇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6절 끝에 보면 "내가 그 여자를 보고 놀랍게 여기고 크게 놀랍게 여기니." 여기서 '나'는 누굽니까? 사도 요한입니다. 사도 요한이 보니까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그 로마 권력을 보고 놀랍게 여기고 또 놀랍게 여겼다, 기가 막혔다는 뜻입니다. 대단해서 놀라웠다는 뜻이 아니고 기가 막혔다는 뜻입니다. 그 정도로 많은 피를 흘렸다는 뜻입니다.
7. 짐승의 멸망
7-1. 멸망이 핵심
짐승에 대해서, 짐승의 모습은 어떠하며 짐승의 미래는 어떻게 됩니까? 요한계시록의 짐승은 국가 권력이라고 했습니다. 국가 권력은 황제입니다. 황제의 모습은 어떠하며 황제의 미래는 어떻게 되느냐?
7절과 8절입니다. "천사가 이르되 왜 놀랍게 여기느냐 내가 여자와 그가 탄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의 비밀을 네게 이르리라." 짐승의 비밀, 비밀을 알려준다고 했습니다. 8절,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여러분, 이 말씀을 읽으면 어떤 말씀이 가장 중요한 말씀 같습니까? 지금 이 8절 말씀에서 제일 중요한 말씀이 무엇일까요? 사람마다 다를 텐데요. 어떤 분은,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어진 분이 누굴까? 이 짐승이 도대체 누굴까?" 여기에 물음표를 하고 이것을 궁금하게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다. 또 어떤 분은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올 짐승이 누구지?" 이것을 궁금하게 여기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8절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멸망으로 들어가다'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앞에 것은 있었다가 없었다가, 없었다가 있었거나, 무저갱에서부터 올라오거나, 이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놈이 어떤 놈이든지, 그 짐승이 어떤 짐승이든지, 그 황제가 어떤 황제든지, 그 황제는 멸망당한다는 말이 중요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해석할 때 주변부 해석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로 이단들이 그렇습니다. 이단들이 이런 것 보고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어진 자가 누군지 아십니까?" 그리고 막 사람 이름을 막 댑니다. 그런데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멸망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짐승은 곧 멸망한다. 짐승은 국가 권력, 로마 황제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로마 시대보다 훨씬 이후 시대를 살고 있는데, 이미 멸망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저 북한의 김정은 세습 정권과 동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나중에 우리 시대의 후세들이 보면 그들도 역시 멸망해버렸을 것입니다. 당연하지요.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을 얼마나 많이 핍박했습니까? 교회를 얼마나 많이 억압했습니까? 역사는 하나님의 심판의 장이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존재를 펼치시는 하나님 존재의 현장입니다. 그래서 여기 중요한 것은 '멸망으로 들어갈 자', 이 말씀이 중요합니다.
7-2. 일곱 산과 일곱 왕
이어서 봅니다. "땅에 사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놀랍게 여기리라." "지금은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이 누굴까?" 이런 것 궁금하게 여긴다니까요. 물론 이것은 네로 환생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과거에 없었다가 장차 나올 짐승, 네로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 도미티아누스 황제라는 설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네로가 너무너무 악행을 많이 행했기 때문에. 그런데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놈이 네로건, 그놈이 도미티아누스건, 더 악한 황제건, 멸망당할 것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날 하나님 나라를 핍박하고 교회를 억압하고 믿음의 백성들을 억압하는 자들, 반드시 멸망당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성경에 기록하신 말씀입니다. 말씀대로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방점이 '멸망'이라는 단어를 붙들으시면 됩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하니까요.
그다음 56쪽을 보시면,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은 무엇을 말하며 짐승의 결말은 어떻게 됩니까? 산이 나오네요. 산이, 왜 산이 나올까요? 9절 한번 볼게요. "지혜가 여기 있으니 그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요."
여기 일곱 산이 나오는데요, 이것은 로마가 처음 시작될 때 약 1세기경 역사를 좀 아셔야 되는데, 지형을 아셔야 되는데, 지금도 이탈리아 로마에 가면 그 앞을 흐르는 강이 있는데, 티베르강이라고 합니다. 옛날 지명으로는 티베르강, 요즘 지명으로는 테베레강이라고 하는 강이 있습니다. 그 강이 있는데, 강 정면에서 볼 때 왼쪽 편에 보면 7개의 작은 봉우리입니다. 작은 언덕, 그것을 지금 여기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로마 티베르강 유역의 일곱 언덕은 아주 유명해서 그 일곱 언덕마다 이름이 다 있습니다. 그 일곱 이름을 딴 박물관이 다 로마의 곳곳에 다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로마의 지형을 가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다, 이렇게 말하면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은 이것을 로마가, 로마를 가리키는구나, 다 압니다. 전부 다. 이것이 유대 묵시문학 전통에서 이렇게 비유적으로 설명한 것일 뿐, 우리는 지금 해석이 필요하나, 그 당시 사람들은 다 공통적으로 공감하는 내용입니다.
10절, "또 일곱 왕이라." 이제 일곱 왕이 나왔네요. 왕 앞에 7이라는 숫자가 붙었습니다. 그러면 이 왕이 어땠다는 뜻입니까? 완전하다. 7은 완전수라 했습니다. 만약에 일곱 왕이 한꺼번에 있다면 이 일곱 왕의 권세는 대단한 권세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옵니다. "다섯은 망하였고." 다섯이 망해버렸습니다. 이미. 그런데요,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사람들 중에 일곱 왕의 이름까지 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망한 다섯 왕이 누군지를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사람마다 다 다르고 해석하는 자마다 너무너무 해석의 스펙트럼이 넓기 때문에 이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망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일곱 왕 중에 다섯 왕이 망했습니다. 그러면 생각해보십시오. 7이 완전수인데 그중에 다섯 왕이 망해버렸으면 나머지 두 왕 가지고 힘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 왕의 권세가 확 꺾이는 것입니다. 왕의 권위가 확 떨어진 것이지요.
"그리고 또 하나는 있고 다른 하나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잠시 동안 머무르리라." 하나는 있고 하나는 아직 없는데 반드시 온다고 합니다. 온들 일곱이 함께 있지 않으니까 그 권세가 세상을 잠깐 통치하는 것처럼 보이나, 일곱 왕처럼 영원하고 아주 강력한 권세는 아닐 것이라는 안도감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11절, "전에 있었다가 지금 없어진 짐승", 전에 있었다가 지금 없어진 짐승 네로 황제이지요. 과거엔 네로가 있었습니다. 지금 죽고 없습니다. "여덟째 왕이니", 이놈이 다시 살아온다는 네로 환생설이 있으니까 그것을 근거로 지금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일곱 중에 속한 자라 그가 멸망으로 들어가리라."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멸망이 중요합니다. 아까 앞에 나왔지요. 다섯 왕이 망하였다. 중요한 것 무엇입니까? 망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결국 왕이 7이건 70이건 700이건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망했고 멸망당한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여기까지 이해가 되시지요?
8. 열 왕과 총독
8-1. 빌라도의 예
이제 나라를 얻지 못한 열 왕이 나옵니다. 나라를 얻지 못한 열 왕. 해석할 것이 너무 많고, 요한계시록이 그냥 보면 아무것도 아닌데 하나하나 이렇게 보면 공부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12절, "네가 보던 열 뿔은 열 왕이니 아직 나라를 얻지 못하였으나." 이것 중요합니다. 열 왕인데, 왕인데, 아직 나라를 얻지 못했습니다. 왕인데 나라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또 다만 짐승과 더불어 임금처럼 한동안 권세를 받으리라." 짐승은 황제라 했지요. 국가 권력이라 했지요. 국가 권력인 황제와 함께 일할 권세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왕인데 아직 권력은 없습니다. 나라는 없습니다.
그러면 이 왕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그 당시에 로마의 정치 체제를 제가 한번 말씀드렸지요. 황제는 어디에 있습니까? 로마 왕궁에 있습니다. 그런데 로마는 식민지가 엄청나게 많습니다. 식민지마다 황제를 대리해서 다스릴 자를 파송했습니다. 그가 누굽니까? 총독입니다. 지금 여기 말하는 열 왕은 총독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총독 한 사람은 압니다. 누구입니까? 빌라도. 그렇지요? 한 사람만 알면 됩니다. 그 빌라도를 염두에 두고 다시 12절을 볼게요. "아직 나라를 얻지 못하였으나." 빌라도가 나라가 있었습니까? 자기 나라 없었습니다. 그렇지요? "다만 짐승과 더불어", 즉 황제와 더불어, "임금처럼 한동안 권세를 받으리라" 그랬지요. 이제 빌라도를 떠올리니까 이것이 이해가 되시지요?
13절, "그들이 한 뜻을 가지고 자기의 능력과 권세를 짐승에게 주더라." 황제를 섬겼더라는 뜻입니다. 빌라도가요. 팔레스타인의 총독으로 와 있으면서 빌라도의 공관을 어디에 지었는지 아세요? 사실 예수님께서 사셨던 그 유대 지역의 핵심 도시가 어디입니까?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이 가장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예루살렘에 헤롯의 왕궁도 있었고, 헤롯이 지은 궁전도 있고, 헤롯이 지어준 성전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인구가 제일 밀집된 곳이 예루살렘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은 내륙에 있습니다. 내륙에 있습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내륙에 있는 것이 싫었습니다. 빌라도의 공관을 해안 도시에 지었습니다. 가이사랴라는 곳에, 지중해변.
나중에 지도를 보시면 지중해변 가이사랴라는 곳에 자기 공관을 만들었습니다. 로마에서 부르면 당장 배 타고 가려고, 한시라도 지체하지 않으려고, 몸은 그곳에 있으나 마음은 어디로 가 있습니까? 항상 로마로 향해 있는 것입니다. 그는 지금 비록 내가 총독으로 여기 파견 나와 다스리지만, 나는 잠재적 왕권을 가질 수 있는 자라는 그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황제에게 충성해서 나도 저 황제 자리에 오르고 싶다는 충성심이 그의 마음에 있습니다.
8-2. 빌라도의 선택
그래서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질문한 것이 딱 한 가지입니다. 유대인들이 빌라도에게 와서 예수님을 얼마나 많이 참소했습니까? 죄목이 수십 가지입니다. 여러 가지를 이야기했는데 하나도 안 들었습니다. 그것 다 필요 없다. 빌라도가 알고 싶은 것은 딱 한 가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왜냐하면 이 나라를 다스리는 정치적인 최고의 왕은 로마 황제이니까, 만약에 예수께서 스스로 왕이라는 것을 인정하면 이것은 반역죄가 되니까. 반역한 사람을 인정한 사람을 살려두는 것은 로마 황제에 대한 충성이 아니니까, 그래서 빌라도가 그 한 가지 질문만 했습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네가 말하였도다, 내가 그니라." 그 한마디로 예수님이 십자가로 가신 것 아닙니까?
그래서 빌라도는 오직 한 분 로마 황제에게만 충성한 사람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이지요. 만왕의 왕이시고 만주의 주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 눈앞에 있었는데, 그 예수님을 통해서 그가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그 총독의 자리가 뭐라고? 그 자리가 뭐라고? 그가 그것 지키려다가, 로마 황제 한번 해먹으려다가, 황제도 물론 하지도 못하고, 그는 영원한 형벌을 받는 자리로, 지금도 지옥 불에서 아직 죽고 싶어도 죽지도 못하고, 사도신경에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에서 매주일마다 영원히 고통받는 자리, 그 이름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것을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9. 어린 양의 승리
14절을 보시면요. "그들이", 그들은 열 왕들이지요. 총독들.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오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누가 이긴다고요? 어린 양이 총독들, 짐승을 이긴다고 했습니다.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
이것이 14절인데요, 아주 중요한 말씀이라서 한 번 더 반복합니다. 마지막 싸움에서 누가 승리하느냐. 자, 다시 14절 한 번 더 보십시오.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오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그다음 아주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은 줄 치셔야 됩니다.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함께 있는 자들', 이것을 꼭 줄 치셔야 됩니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
예수님께서 짐승과 싸워 이기시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닙니까? 예수님이니까. 예수님께서 열 왕들 즉 총독들과 싸워 이기시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닙니까? 예수님이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어린 양이시니까. 그런데 또 누가 이긴다고 했습니까? "그와 함께 있는 자들,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 여기서 정말 중요한 한 단어가 '함께 있다'라는 단어입니다. 함께 있기만 하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만 하면, 우리도 이길 수 있는 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사탄의 권세를 이기기 위해서 내가 엄청난 능력을 가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탄의 권세를 이기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될까? 내가 오늘도 이 사탄의 권세를 이기기 위해서 나는 어떤 능력을 가져야 될까?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기도 합니다. 병 고침의 은사와 예언하는 은사와 방언하는 은사와 다른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특별한 은사를 가지기를 원합니다. 그런 것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헌금 많이 하고, 교회 봉사 많이 하고, 남들이 하지 않는 일 많이 하고, 내 자식에게는 뭘 주지 않아도 교회는 바리바리 뭘 갖다 주고, 이런 것 하면 사탄의 권세를 이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착각입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사탄의 권세를 이길 수 있는 것은 그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함께 있으면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이 되어서, 함께 있는 자가 승리하고 이길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오해하는 것들 중에 가장 중요하고 많은 것들이 행위 구원에 빠져있는 분들이 정말 많습니다. 뭘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 있잖아요. 해야 된다는 강박이 있습니다. 물론 하는 것 중요하지요. 그런데 실천하고 봉사하고 섬기는 것은 구원받은 감격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일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감격이 있습니다.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 놀라운 은혜를 주셨으니까 뭐라도 하고 싶은 것입니다. 내 몸을 움직여서라도 뭐라도 하고 싶고, 내 주머니에 돈이 있으면 이것이라도 드리고 싶고, 뭐라도 내가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 뜨거움이 마음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그런데 순서가 바뀌어 가지고, "이것을 하면 하나님이 날 예뻐해 주시겠지? 이것을 하면 악한 사탄의 권세에 대항해서 이기게 해 주시겠지? 이것 하면 구원해 주시고 승리하게 해 주시겠지?" 그것은 틀렸다는 말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함께 있는 것입니다.
10. 함께 있음의 능력
10-1. 제자 부르신 목적
함께 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냐. 마가복음 3장 14절, 15절을 보십시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예수님이 제자를 세우신 것입니다. 제자를 세우신 목적이 나옵니다.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똑같은 말이 나오지요. 여기도 줄 치세요. 예수님이 제자를 부르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함께 있게 하려고 부른 것입니다. 함께 있게. 너 나랑 같이 살자. 너 나와 같이 있자. 그것이 예수님이 제자를 부르신 목적입니다.
우리는 생각하지요. 예수님이 제자를 부른 목적이, "저 써먹으려고. 저거 뭔가 쓸모가 있으니까 어디 써먹으려고 내가 제자 불렀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함께 살자고 부르신 것입니다. 딴 데 어디 가지 말고 나랑 함께 살자.
그다음 이제 부차적인 목적이 나오지요.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이것이 1차적인 목적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라." 이런 능력은요, 주님과 함께 있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됩니다. 주님과 함께 있어서 내가 은혜가 되지요.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이 너무 기쁩니다. 그러면 말려도 전도하러 나갑니다. 예수님 만난 사마리아 수가 성의 여인이 어떻습니까? 물동이 버려두고 마을로 내려갔습니다. "내가 메시아를 만났다." 예수님 만나면, 주님과 함께 있기만 하면, 하지 마라 그래도 전도입니다.
"야, 우리 교회 너무 좋은데 한번 와보라고. 한 번만 와서 와보라고." 그런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자연스럽게 귀신을 내쫓는 능력도 생기게 됩니다.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더러운 귀신아 나가라." 그러면 귀신도 나가는 것이지요. 특별한 능력을 내가 가져서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 살기 때문에.
양반 가문의 가풍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몸가짐, 식사, 예절, 습관, 언어. 이런 것은 그 집에서 수십 년 동안 오랫동안 살면서 생긴 나만의 습관입니다. 그것이 곧 자신의 경쟁력이 되고 자신의 능력이 됩니다. 그런 것처럼 예수님과 함께 있다 보면 전도도, 능력도 다 생기는 것입니다.
10-2. 거하는 삶
요한복음 15장 5절을 보시겠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거한다는 말이지요. 거한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한자어로 '살 거(居)'자 아닙니까? 산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사는 것이 쉽습니까? "나 너랑 같이 살고 싶어." 이 말에 속아가지고, 결혼해서 40년째 고생하는 분들 계시잖아요. 다. 살아보니까 저놈의 성질 맞추기도 힘들고, 잠버릇도 못 맞추겠고, 말하는 것 모든 것이 다 거슬리고 불편하고, 사는 것 쉽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이 하나님과 함께 산다, 쉬워 보이지요?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 안에 거해서 산다, 말씀이 나에게 들어와 보세요. 얼마나 거부반응이 일어나는가. 나는 내 멋대로 살았는데 말씀이 들어와서 산다 그러면 나는 말씀대로 살아야 되는데, 힘듭니다. 힘든 것입니다. 시어른 모시고 사는 것 쉽습니까? 쉽지 않습니다. 시어른 모시고 30년 살았다 그러면, 그분은 그냥 인정해야 됩니다. 그냥 시어른 돌아가실 때까지 모셨다, 끝난 것 아닙니까? 그분의 인생은 존귀한 분이지요. 그냥 존경해야 될 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거하는 것, 결코 쉽지 않습니다. 말씀이 내 속에 거하고 내가 주님 안에 거하면, 에녹처럼 300년 동안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다 보면, 당연히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도, 전도하는 능력도, 악한 세력과 사탄의 권세와 짐승과 그 짐승의 수하들인 열 왕들을 물리칠 능력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다른, 남들이 가지지 못한 특별한 능력을 가지려고 애쓰지 마세요. 항상 기도하실 때, "저 주님과 함께 거하기 원합니다. 말씀이 내 속에 거하고, 오늘도 주님과 함께 동행하고, 매 순간마다 주님 가시는 길 나도 따라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세요. 선택에 있어서 주님 실망시키는 선택하지 않게 해달라고, 이미 북쪽으로 가자 하는데 "아닙니다. 저는 남쪽으로 가겠습니다" 이런 일 없도록 해달라고 그렇게 기도하셔야 됩니다. 그러면 당연히 우리는 권능을 가지고 이길 수 있습니다.
10-3. 끝까지 동행
그런데 이것을 언제까지 해야 됩니까? 주님과 함께 거하는 것을, 함께하는 것을, 예수님 오시는 그날까지 해야지요. 히브리서 13장 7절과 8절,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잠깐 반짝하는 자 믿지 마라, 끝까지 봐라 했지요. 8절,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생명 다하는 그날까지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일관성이 중요합니다. 막 뜨겁게 끓었다가 갑자기 식어가는 냄비 같은 신앙이 되지 말고, 계속해서 뜨거운 신앙, 계속해서 하나님 편에 서서 함께 가는 신앙이 중요합니다.
11. 악의 자중지란
11-1. 스스로 무너지는 악
악의 자중지란이 일어나는데요, 재미있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네가 본 바 이 열 뿔과 짐승은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의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상한 말씀입니다. 왜 이상하냐, 이 열 뿔과 짐승, 국가 권력입니다. 열 왕들입니다. 총독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어떻게 합니까?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음녀가 누구입니까? 바벨론 로마 제국입니다. 열 왕들이 로마 제국과 서로 다툰다는 이야기입니다. 벌거벗게 하고 망하게 하고 그의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른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제가 '악의 자중지란'이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자기들끼리 싸움이 붙어가지고, 가만히 내버려 두어도 자기들끼리 자중지란이 일어나서 자기들끼리 먹고 먹히다가 불타고 끝나버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악이라는 것은요, 우리가 악을 갚으려고, 우리가 악에 대항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는 그냥 주님 안에 있기만 하면, 자기들끼리 막 싸워 가지고 분열하다가 그냥 제 풀에 지치고 그냥 끝나버린다니까요.
누가복음 23장 12절에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했습니다. 헤롯과 빌라도 서로 앙숙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는 그날만 친구가 되었거든요. 그런데 자기들끼리 나중에 막 자중지란이 또 일어납니다.
11-2. 기드온의 승리
사사기 7장 20절에서 22절을 보십시오. 기드온이 미디안 군사를 무찌르는 장면입니다. "세 대가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부수고 왼손에 횃불을 들고 오른손에 나팔을 들어 불며 외쳐 이르되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다 하고 각기 제자리에 서서 그 진영을 에워싸매 그 온 진영의 군사들이 뛰고 부르짖으며 도망하였는데." 22절 중요하지요. "삼백 명이 나팔을 불 때 여호와께서 그 온 진영에서 누구끼리요? 친구끼리 어떻게요? 칼로 치게 하심으로 적군이 도망하여." 이렇게 나옵니다. 쭉쭉. 친구끼리 칼로 친다고 합니다. 친구끼리, 자기들끼리 칼로 찌르고 난리입니다.
원래 기드온이 군사를 모집했을 때 몇 명이 왔습니까? 삼만 이천 명이 왔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랬습니다. 너무 많다, 보내라. 두려워 떠는 자들을 보내라. 그랬더니 이만 이천 명이 돌아갔습니다. 만 명이 남았습니다. 너무 많다. 물을 먹여봤거든요. 물 먹여보니까 우상에게 무릎 꿇었던 흔적이 남아있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다 보냈습니다. 남아있는 자들이 몇 명입니까? 300명입니다. 그들에게 무기도 안 줬습니다. 나팔, 항아리, 횃불. 이것이 다입니다. 횃불 들고 항아리 깨고 나팔 불고 그랬더니, 자기들끼리 칼로 찌르고 다 죽이고 미디안이 전멸한 것입니다. 끝나버렸습니다.
악의 자중지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원수 갚으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애쓰거나 힘쓰거나 할 필요 없습니다.
11-3. 하나님의 섭리
원수는 하나님이 갚으시고 악의 자중지란이 일어나는 것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17절이 말씀합니다. 17절, "이는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그들에게 주사." 하나님 뜻대로 하실 마음을 그들에게 준 것입니다. 짐승과 열 왕들과 음녀 바벨론에게 준 것입니다.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그들의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악의 자중지란도 섭리하신다는 뜻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온 세상을 통치하시고, 자기들끼리 찌르고 자기들끼리 죽이는 것도 하나님이 다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결론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서, 과연 우리는 그러면 카토이케오의 삶을 살아야 되나, 스케노오의 삶을 살아야 되나, 카데마이의 삶을 살아야 되나, 이것도 한번 기억해 보시고,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 하나님과 함께한다는 것, 어린 양과 함께 있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도 깊이 한번 돌아보시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서 바벨론이 심판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산다고 사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기를 원합니다. 스케노오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카토이케오와 카데마이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주여 우리의 완악함을 돌아보게 하옵소서.
주여,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그와 함께 있기를 원하시는데, 우리는 그와 함께 있지 않고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르고 다른 길로 가려고 한 것은 아닌지, 주여 오늘 우리의 연약함과 완악함도 봅니다. 아버지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악은 내버려 두어도 자중지란해서 멸망당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주여 우리가 주 안에 있기만 하면 바벨론도 멸망당하고 열 왕도 스스로 무너짐을 배웠사오니, 하나님의 말씀 붙들고 진리의 길을 온전히 걸어가는 믿음의 백성 되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그 끝에 승리가 있도록 도우시고 승리하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하시는 주님의 놀라운 영광을 함께 누리게 하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