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강 - 새 하늘과 새 땅 / 전체녹취

요한계시록 특강 16: 새 하늘과 새 땅 (21장)

요한계시록 21장 3-4절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아멘.

방금 읽은 말씀은 장례식 때 많이 들었던 말씀입니다.

오늘은 요한계시록 총 열일곱 번의 말씀 가운데 열여섯 번째 시간입니다. 지금까지 계시록을 공부하고 살펴오는 동안, 아마 들을 때는 다 기억이 날 것 같고 "아, 그렇구나" 하고 생각했을 텐데, 듣고 나면 쉽게 잊어버리고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 것 같을 것입니다. 그런데 계시록을 공부하시면서 "이게 두려운 말씀이 아니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극히 오래 참으시고 기다려 주신다는 사랑의 말씀이구나" 하는 한 가지만 마음에 새겼다 하더라도 성공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 어려운 단어인데 우리가 계속 반복했습니다. 스케노오(σκηνόω), 카토이케오(κατοικέω), 카테마이(κάθημαι). 이 정도만 알고 있으면 굉장히 성공하신 것입니다. 오늘도 그 단어가 또 나옵니다.

요한계시록은 이제 끝으로 다가올수록 "이런 말씀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또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면, 계시록은 없던 말씀이 갑자기 툭 튀어나온 게 아니고 구약과 신약에 있는 말씀을 사도 요한이 환상 중에 받아 적은 말씀이라서, 더러 보면 구약에도 있고 또 살펴보면 신약에도 있는 말씀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단들이 이 말씀을 가지고 마치 자기들의 전매특허처럼 함부로 풀 수 없는 말씀입니다. 이 정도만 기억하셔도 아주 공부를 잘 하신 것입니다.

오늘은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주제로 함께 공부해 보려고 합니다.

1. 옛 세상의 통치자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주제를 보면, 새것이 있으면 헌것이 있습니다. 옛날 것이 있고 새것이 있는데, 그러면 그 옛날 하늘과 옛날 땅, 옛날 바다는 누가 다스리던 곳인가 하는 질문을 먼저 하고 있습니다.

1-1. 땅과 바다의 지배자

1절을 보시면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고 합니다. 하늘, 땅, 바다. 옛날 하늘, 땅, 바다 그 가운데 특히 땅과 바다는 우리가 여러 번 살펴보았습니다. 특히 두 짐승 이야기할 때 땅을 정복하고 바다에 한 발을 딛고 있는 짐승들을 보았습니다.

계시록 13장 1절을 보시면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고 합니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완전한 수라고 했습니다. 뿔이 열이라는 것은 대단한 권세를 가진 짐승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땅을 차지하고 땅을 정복하고 있었던 짐승, 곧 짐승이라고 말하는 것은 국가 권력, 로마 황제를 말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옛날 땅, 지나가 버린 옛날 땅을 다스리고 있었던 자는 짐승이었습니다. 이 땅의 세속 권력이었습니다.

바다는 또 누가 다스리고 있었습니까? 계시록 13장 11절을 보니까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어린 양 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을 하더라"고 합니다. 11절이 땅에서 짐승이 올라온다 했으니까 여기는 땅을 다스리던 짐승이고, 아까 13장 1절에서는 바다에서 짐승이 올라온다고 했습니다. 바다를 다스리고 또 땅을 다스리던 짐승들은 과거에 옛날 땅과 옛날 바다의 마치 주인처럼 보였던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사실은 주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1,260일 동안, 마흔두 달 동안, 한 때 두 때 반 때 동안 땅과 바다를 다스릴 권세를 그냥 주신 것입니다. 원래 하늘과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그런 과거의 땅과 바다, 하늘을 다스리던 자들은 짐승들이었다고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1-2. 새 하늘과 새 땅

그러면 새 하늘과 새 땅은 누가 통치하는 곳일까요? 과거에 땅과 바다, 하늘은 짐승들이 다스리던 곳이었다면, 새 하늘과 새 땅은 당연히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곳이 되겠습니다.

2.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

사탄이 통치하던 땅과 바다가 사라진 후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사탄이 통치하던 땅과 바다가 언제 사라졌습니까? 우리가 지난주에 보았습니다. 이 더러운 영 삼 종 세트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중에 최고 악한 영이 용입니다. 계시록의 용은 사탄인데,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었습니다. 짐승은 국가 권력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짐승이라는 국가 권력인 로마 황제를 추종하고 따르고, 로마 황제에 붙어서 거기서 권세를 누리던 더러운 영이 있었는데,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거짓 선지자, 국가 권력인 짐승, 그 배후에 있었던 용. 이들이 다 심판당했습니다. 그들이 싹 다 심판당하고 나니까 이제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된 것입니다.

2-1. 메타스케노오의 의미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3절과 4절, 아까 우리가 읽었던 것인데요. 3절을 다시 보시면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함께 있으매, 줄 치세요.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또 나옵니다. 또 줄 치시고요.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한 절에 함께 계신다는 말이 세 번이나 반복됩니다.

성경에 똑같은 말씀이 계속 반복된다는 것은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함께 계신다'는 것은 너무너무 중요한 단어입니다. 여기 '계시다'는 말은 '거하다'라는 말인데 우리가 '거하다'라는 말을 세 가지로 공부를 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 거하다.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우리와 함께 임재하신다. 이 '거하다'는 말을 우리는 스케노오(σκηνόω)라고 배웠습니다. 함께 살다, 거하다, 이것이 스케노오입니다.

그런데 여기 '거하다'라는 말, '계신다'라는 말은 스케노오인데 그 앞에 한 단어가 더 붙었습니다. '함께'라는 말이 붙었습니다. '함께'는 헬라어로 '메타'(μετά)라는 말을 쓰는데 영어로 옮기면 'with'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메타스케노오'(μετασκηνόω)라는 말은 '함께 옆에 같이 붙어 있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함께 있다'는 말을 조금 느슨하게 생각합니다. 가족들이 그냥 집에 있으면 함께 있는 것이고, 교회 공동체 성도들이 교회에 모이지 않아도 다른 곳에 있어도 그냥 함께 있는 것인데, 지금 여기 '함께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강한 소유권을 주장하시는 말씀입니다. '너는 내 것'이라는 뜻입니다. 나중에 하나님께서 천국에 우리가 함께 올라가면 그때는 영원히 함께 있겠지만, 지금도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강한 소유권을 주장하시는 말씀이 '메타스케노오'라는 뜻입니다.

그럼 우리가 스케노오라는 말을 지금 다시 복습을 하니까, 하늘에서 영적 임재와 예수 그리스도와 거하는 것을 스케노오라 한다면, 내 멋대로 사는 것은 뭐라고 했습니까? 살긴 사는데 밥 먹고 살고, 자연인으로 살고, 죄짓고 살고, 남들처럼 그냥 다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것을 '카토이케오'(κατοικέω)라고 배웠습니다. 기억이 나시죠? 카토이케오라고 배웠습니다. 다 같이 사는 건데 카토이케오의 삶을 살면 절대로 안 되고 우리는 스케노오의 삶을 살아야 됩니다. 몇 번 반복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사는 것. 한쪽 발은 하나님께 두고 한쪽 발은 세상에 두고 사는 것을 우리는 '카테마이'(κάθημαι)라고 했습니다. 카테마이의 삶도 악한 삶이고 카토이케오의 삶도 악한 삶이고 우리는 스케노오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가 스케노오의 삶을 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메타스케노오 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2-2. 눈물을 닦아주심

이제 사탄이 통치하던 땅과 바다가 사라지면 우리는 하나님과 메타스케노오, 영원히 함께 거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4절에 보면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주신다고 했습니다. 눈물이 우리 눈에서 다 사라집니다. 내가 닦는 게 아니고 누가 닦아주십니까? 하나님께서 닦아주시고 어린 양이 우리 눈에 눈물을 닦아주신다고 했습니다.

눈물 흐를 일이 많습니다. 요즘 세상에 왜 웁니까? 억울해서 울고, 기분 나빠서 울고, 기뻐서 우는 건 있긴 하지만 얼마 되지 않고, 사실 요즘은 우리가 분해서 우는 것도 많고, 억울해서 울고, 원통해서 웁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래서 눈물 흘릴 일이 정말 많습니다. 내 힘으로 안 돼서 울고, 나는 정말 열심히 노력하고 애를 쓰고 수고하는데 안 되는 게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또 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되면 우리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다 닦아주십니다.

그런데 이것을 우리는 천국이라고 생각합니다. 천국에 가면 우리 눈에 흐르는 눈물이 닦이고 다시는 울 일이 없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천국을 잠깐 보여주셨습니다. 공생애 사건이 그 사건입니다. 삼 년 동안 사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신 일들이 천국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왜 보여주셨습니까? 사람들이 천국이 어떤 곳인지 잘 모르니까, 죽어야만 가는 나라인 줄 알고 잘 모르기 때문에 천국을 이상하게 그림을 그린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장차 너희들이 올 천국은 이런 곳이다" 하고 보여주신 것이 공생애 삼 년의 삶이었습니다.

3. 울지 말라 하신 예수님

그중에서 예수님이 우리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신 사건들이 있습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세 가지 사건을 살펴보겠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울지 말라" 하신 사건이 세 번이나 나옵니다.

예수님이 "울지 말라" 하신 이 말씀은 사람이 "울지 말라" 하는 말과는 무엇이 다를까요? 장례식장에 가면 내가 정말 사랑하는 누군가가 가족을 잃었습니다. 거기 가면 "울지 말라"고 위로합니다. 우리도 "울지 마라, 산 사람은 살아야 되니까 밥 먹고 힘내야 된다, 정신 차려야 된다, 정신 바짝 차리고 열심히 살아야 된다"고 위로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하는 "울지 말라"는 얘기는 책임을 질 수 없습니다. 너무 가슴 아프고 너무 슬퍼서 나도 같이 가슴 아프고 같이 울어줄 수는 있지만, 그러나 "울지 말라" 하지만 근원적인 그 눈물의 근원을 닦아줄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닦아줍니까? 사람이 감히 하고 싶어도 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울지 말라" 하시는 말씀은 책임성을 전제로 하는 말씀입니다. "울지 말라" 그 말씀은 그냥 위로하는 말씀이 아니고 "내가 너 눈물의 근원을 해결해 주겠다, 내가 너 흐르고 있는 눈물을 말려주겠다, 걱정하지 말라" 이 말씀입니다.

3-1. 나인 성 과부

하나하나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7장 12-15절을 보면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사건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가슴 아픈 장례입니다. 어머니는 과부인데 어머니가 그 독자 하나만 의지하고 살았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 독자가 죽었습니다. 가슴 아픈 장례입니다. 그래서 그 성에 있는 사람들이 많이 그 장례 행렬을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 여인을 위로하려고.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가서 보니까 불쌍합니다. 예수님도 보니까 얼마나 불쌍하시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그 과부에게 가서 하신 말씀이 이 말씀입니다. "울지 말라" 하시고. "울지 말라" 이 말씀은 이 여인이 그 동네 사람들한테 들은 말씀하고 질이 다른 말씀입니다. 본질적으로 다른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네 아들 살려주겠다"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네 눈에 흐르는 눈물의 근원을 내가 해결해 주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다음에 이렇게 하셨습니다. "가까이 가서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심에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해결해 주셨습니다. "울지 말라" 하시고 근원적인 문제를 책임져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천국에서 일어날 일을 이 땅에서 한번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떤 소망을 가집니까? "그렇구나, 내가 천국에 가면, 하나님을 만나면 이 땅에서 내 눈에 흐르던 눈물의 근원도 해결될 수 있겠구나." 또 한 가지 소망은 "예수님께서 지금 이 땅에서도 내 눈에 흐르는 눈물의 근원을 해결하실 수 있겠구나" 하는 소망이 생깁니다. 천국은 죽어서만 가는 나라가 아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 땅에도 임하는 나라가 천국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 하나님께 기도하실 때 "하나님, 내 눈에 눈물 근원을 해결해 달라"고 기도하셔야 됩니다. "하나님, 내가 사람의 위로로 그치지 않게 하시고 내 눈에 눈물 근원을 죽여서 말려주시고 아예 해결해 주십시오. 주님이 나에게 아예 울지 말라고 말씀 한 번만 해 달라"고 그렇게 기도하셔도 됩니다. 나인 성 과부에게 은혜 베풀어 주셨던 주님이 오늘 나에게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렇게 우리가 간절하게 붙들고 기도하실 수 있습니다.

3-2. 회당장 야이로의 딸

또 한 가지 누가복음 8장에 보면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사건이 나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열두 살입니다. 열두 년 동안 이 딸을 길렀는데 얼마나 예쁘고 얼마나 귀하겠습니까? 외동딸인데요. 그런데 그 딸이 죽게 됐습니다.

보겠습니다.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함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아이가 죽었고 그 집에 갔습니다. 사람들이 막 울고 통곡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보시니까 딸아이가 죽었습니다. 얼마나 가슴 아픈 장례입니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예수님이 "울지 말라" 하셨으니까 여기서도 예수님이 이 말씀하셨다는 것은 해결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믿어야 됩니다.

"울지 말라" 그다음 "그들이 그 죽은 것을 아는 고로 비웃더라" 사람들은 예수님의 "울지 말라" 하신 말씀의 의미를 모르는 것입니다. 이해를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이르시되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달리다 굼'입니다. "아이야 일어나라, 달리다 굼.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시니" 아이가 살아났습니다. 해결하셨습니다. "울지 말라" 하셨고 해결하셨습니다. 얼마나 위대한 능력입니까?

3-3.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또 한 가지 누가복음 23장 27-28절을 보시면 예수님이 십자가 지고 가시는 길입니다.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예수님이 십자가 지고 골고다 언덕 오르시니까 사람들이 막 울고 따라옵니다. 그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울지 말라" 그러셨습니다.

나를 위하여 왜 "울지 말라" 하셨을까요? "나는 십자가 지고 죽으나 반드시 부활할 것이다. 그래서 너희 지금 눈에 흐르는 눈물의 근원을 내가 말려주고 해결하겠다. 부활해서, 내가 반드시 부활해서 너희의 슬픔을 해결해 주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무엇을 위해서 울라 하셨습니까?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믿음 없는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가복음에서 "울지 말라" 세 번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그 말씀대로 책임지셨지 않습니까? 우리 눈에 눈물을 닦아주셨습니다. 이것이 천국입니다. 그런데 그 천국은 죽어서만 가는 나라가 아니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 구원받은 백성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실 때 요구하셔도 됩니다. "하나님, 나인 성 과부의 눈물을 닦아주신 하나님, 야이로의 딸을 살려주시고 그 가정에 기쁨을 회복시켜 주신 하나님, 부활하셔서 여인들의 눈물을 기쁨으로 바꿔주신 하나님, 오늘 내 눈에도 눈물을 닦아주시고 책임져 달라"고.

3-4. 책임지시는 하나님

성경 말씀에 나오는 우리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말씀은 '책임성'이라는 말씀으로 바꾸어 읽으셔도 됩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 규정이 있습니다. 안식일 규정. 구약 시대 율법에 보면 안식일 규정이 얼마나 많습니까? 안식일 제대로 안 지키면 "내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고 하는 말씀도 있고 안식일에 "네 처소에서 불도 피우지 말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런 생각할 것 아닙니까? 안식일에 그럼 내가 굶어 죽어야 되나? 안식일에 불도 피우지 말라 하면 안식일에는 쫄쫄 굶어야 되나? 사람들은 그런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은 "안식일에 불도 피우지 말라, 내가 너희들 책임진다"는 말씀입니다. 너희들이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면 너희들 육 일 동안 이루어질 모든 생업을 더 축복해서 안식일에 불 피우지 않아도 먹고살 만큼의 생업을 축복해 주겠다. "내가 너희 인생 책임지겠다"는 말씀이 거기에 다 내포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상식과 조금 동떨어진 말씀을 하실 때는 "아, 그렇구나, 책임지겠다는 말씀이구나" 그렇게 받아야 됩니다. 십일조 말씀 있습니다. "십일조를 내 창고에 드려 보라" 그런 말씀 있습니다. 십일조를 내 창고에 드려 보면 하나님이 쌓을 곳이 없도록 축복해 주시겠다. 책임지시겠다는 말씀이잖아요? 이것을 그냥 이렇게 딱딱하게 율법으로 보시면 안 되고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겠다는 말씀으로 바꾸어 읽을 수 있어야 됩니다.

아까 눈물의 근원을 닦아주신다고 그랬습니다. 다시는 사망이 없다고 그랬습니다. 사망은 마지막까지 대적하고 있는 원수인데 그 사망까지도 없어집니다.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는다고 그랬습니다. 슬플 일도 없고, 아플 일도 없고, 그야말로 정말 완전한 천국입니다.

4. 두려워하는 자들의 심판

그렇다면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자와 못 들어갈 자가 있지 않겠습니까? 새 예루살렘에 누가 못 들어가는지 한번 보겠습니다. 8절을 보시면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4-1. 두려움의 본질

그렇습니다. 이런 자들은 천국에 못 들어갑니다. 오늘 이 말씀 가운데 '두려워하는 자들'이라는 말에 주목해서 보려고 합니다. 두려워하는 자들이 영어 성경에는 'coward'라고 나와 있습니다. 겁쟁이라는 뜻입니다. 두려워하는 자들이 못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두려워하는 자들이라는 것은 겁쟁이를 말하는 것인데, 뭐가 두려운 것입니까? 무엇 때문에 두려운 겁니까?

사도 요한이 이 말을 기록할 때 당시 상황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지금 시대는 로마 황제 때입니다. 로마 황제 숭배를 하라고 박해를 당하고 있습니다. 많이 죽어나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집하는 것조차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요한이 이 말씀을 기록한 것입니다. "두려워하는 자들은 새 예루살렘에 입장할 수 없다." 그러면 그 두려움이 먹고사는 두려움이겠습니까? 그런 것도 포함이 되겠지만 더 큰 두려움은 신앙 때문에 받는 핍박과 박해입니다. 이 신앙을 지키면 앞으로 나한테 닥칠 일이 막연하게 두려운 것입니다.

황제 숭배 안 한다고 나를 죽이면 어떡하나 황제 숭배 안 한다고 나를 잡아가면 어떡하나. 가족들은 어떡하나. 바로 그 두려움 때문에 황제 숭배에 굴복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두려움 때문에 타협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두려움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내 인생 책임지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불도 피우지 말라고 하셨지만 그 속뜻은 "내가 너희를 책임지겠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두려워하지 말고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겁쟁이가 되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뜻입니다.

4-2. 두려움의 예방

물론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과 똑같이 병렬되어 있기 때문에 "아니, 두려워하면 살인자들하고 똑같이 천국 못 들어가나?"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 있을 겁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이것을 바르게 이해해야 됩니다. 사도 요한은 로마 황제 숭배를 강요당하는 성도들에게 이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지금 말하는 두려움은 단순한 겁쟁이를 말하는 게 아니고, 두려운 마음에 황제 숭배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두려운 마음에 신앙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두려운 마음에 예수님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그 두려움이 결국 어디로 갑니까? 하나님을 저버리게 만들고 우상 숭배자로 만들고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결국 한 뿌리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려움의 뿌리를 아예 없애야 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내 인생 책임지시겠다고 굳게 믿고 하나님이 준비하신 복으로 나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어떤 두려움이 있으십니까?

우리 교회 성도들은 큰 두려움은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시대에 황제 숭배 강요는 없으니까요. 그런데 막연히 먹고사는 것이 두려우십니까? 아이들 교육 문제가 두려우십니까? 아니면 어디 제대로 취직이 될지, 사업이 잘 될지 그런 두려움이 있으신 분도 계시겠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책임지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해서 해결하시면 됩니다. 기도합시다. 사람 찾아가서 "내가 지금 이게 걱정이에요" 이래 봐야 해결 안 됩니다. 사람의 위로로 해결 안 됩니다. 아까 말씀드렸죠? 눈물을 닦아주시는 하나님께 말씀드려야 됩니다. 하나님께 말씀드리면 해결해 주십니다. 예수님이 "울지 말라" 하시고 해결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렇게 붙들고 기도하시면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십시오. 그러면 두려움은 없어지고 우리 마음은 평안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4-3. 평화의 참 의미

평안해지면 이것을 히브리어로 '샬롬'(שָׁלוֹם)이라고 합니다. 샬롬. 샬롬은 평화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인사할 때 샬롬이라고 인사합니다. "평화가 있기를" "여호와 샬롬" 이렇게 인사하는데 그런데 이 샬롬이라는 말은 피 냄새가 나는 단어입니다. 피비린내 나는 단어입니다.

왜 피비린내 나는 단어입니까? 이사야 53장 5절을 보십시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이 말씀 가만히 보십시오. 다시 한번 보여드리겠습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샬롬을 누린다는 말입니다.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나음'은 '라파'(רָפָא)입니다. 여호와 라파, 들어보셨죠? 여기에 샬롬도 나오고 라파도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가 누리는 평화, 우리가 누리는 나음, 곧 치유는 누구 때문입니까? 예수님의 피 흘림 때문에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예수님의 피 흘림 때문에 우리가 나음을 얻은 것입니다. 사실은 내가 피 흘리고 내가 죽어야 되는데 예수님께서 대신 피 흘리시고 예수님께서 대신 죽으셔서 내가 평화를 누리고 내가 나음을 입은 것입니다.

그런데 평화를 누려야 될 내가 두려움에 떨고 있으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 억장이 무너지지 않겠습니까? "내가 누구 때문에 죽었는데, 내가 누구 때문에 채찍받고, 내가 누구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죽었는데, 이 사람은 왜 두려워하고, 이 사람은 왜 불안해하고, 왜 겁을 내느냐"고 예수님 억장이 무너지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이것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한국 전쟁 때 얼마나 많은 분이 피를 흘렸습니까? 우리나라 분들만이 아니고 해외에서 온 수많은 유엔군들까지 다 피 흘렸습니다. 그분들의 피 흘림 때문에 우리가 지금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이 평화를 누리는 것에 대한 경각심 없이, 자유 대한민국을 이렇게 보존하고자 하는 경각심 없이, 그냥 살아가는 것은 피 흘린 우리 조상들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그들이 왜 죽었습니까? 이역만리 타국에 유엔군이 와서 왜 죽었습니까? 이 땅에 자유 대한민국을 위해서 그들이 피 흘리지 않았습니까?

하물며 하나님께서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못 박아서 죽게 하셨는데, 그래서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고 샬롬을 주시고 라파를 주셨는데, 우리가 두려워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욕보이는 일입니다. 예수님 가슴 아프게 하고 예수님을 억장 무너지게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먹는 것, 입는 것,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 때문에 절대 두려워하시면 안 됩니다.

두려운 마음이 들 때마다 항상 기도하셔야 됩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이 들 때마다 하나님께 엎드리시고 기도하셔야 됩니다. 그 마음은 처음에 잡아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분별력을 잃어서 눈 감고 다니다가 사고치기 딱 좋습니다. 절대 두려워하는 마음은 가만히 내버려 두시면 안 됩니다. 눈덩이처럼 불어납니다. 엄청나고 거대한 집을 짓습니다. 그 두려움을 초기에 잡아야 됩니다.

5. 새 예루살렘의 실체

두려워하는 자들에 대해서 우리가 공부해 보았습니다. 이제 새 예루살렘입니다. 새 예루살렘이 있으면 헌 예루살렘도 있겠죠. 옛날 예루살렘. 예루살렘은 왜 중요합니까? 성전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진짜 성전이 있습니다. 인간이 지은 돌로 된 교회는 없지만, 하나님이 계시니까 그곳이 성전이 되겠습니다.

5-1. 교회인 새 예루살렘

요한은 새 예루살렘을 어떻게 설명합니까? 2절을 보시면 이렇게 나옵니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무엇이라고요?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했다. 신부는 곧 교회라고 했습니다. 신부가 곧 교회고 교회가 곧 새 예루살렘입니다. 이해가 되시죠?

9절을 보시면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신부가 곧 어린 양의 아내고 이분이 곧 새 예루살렘입니다. 교회. 그렇습니다.

10절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어디에서 내려온다고 했습니까? 하늘에서 내려온다고 했습니다. 하늘에서.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느낌이 어떤 느낌입니까? 순결하고 완전하고 이제는 승리가 다 이루어져서 이제는 완벽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온다. 그런 느낌이시죠?

그런데 이것은 지금 우리가 21장을 공부하고 있는데, 21장은 용도 싸워서 이기고 용도 끝내고 짐승도 처단하고 더러운 영의 거짓 선지자도 다 처단했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싸움도 제대로 벌어지지 않았던 3장 말씀에서 이미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온다고 이미 말씀하신 것이 나옵니다.

5-2. 이미 정해진 승리

3장 12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오죠?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 하늘에서 새 예루살렘이 내려온다고 했습니다.

이미 3장에서 하늘에서 새 예루살렘이 내려온다고 했다는 말은 이미 이 싸움은 이겨놓은 싸움이라는 뜻이었습니다. 3장에서 이미 하늘에서 새 예루살렘이 내려온다고 했는데 21장에 다시 이 얘기가 나옵니다. 그러면 계시록에서 계속 반복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미 이겨두신 싸움을 우리가 확인하고 밟고 나가는 것이다. 이런 뜻입니다.

물론 그 가운데 전투가 치열합니다. 사탄의 영을 받은 자들이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치열합니다. 한 때 두 때 반 때, 마흔두 달, 1,260일 사탄에게 내어 준 바 된다고 했습니다. 그 말씀이 또 나옵니다. 계시록 11장 2절입니다. "성전 밖 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마흔두 달 동안 짓밟는다고 했습니다. 이미 그것은 마흔두 달 동안 한시적으로 주신 고난의 기간입니다. 그런데 궁극적인 승리는 누구의 것입니까? 우리의 것입니다. 이미 우리에게 주신 궁극적인 승리가 있다는 뜻입니다. 꼭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5-3.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곳

새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는 말씀은 어떤 의미입니까? 새 예루살렘은 다른 말로 하면 어린 양의 신부, 교회라고 했습니다. 과거의 옛 예루살렘은 인간이 만든 성전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있을 때도 있었고, 떠나 있을 때도 있었고, 한때 있었다가 또 한때 떠났다가 그랬겠죠. 그런데 진짜 올 새 예루살렘, 천국에 있는 완전하고 정말 완벽한 성전은 하나님의 영광이 계신 곳입니다.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11절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 그렇게 했습니다.

이 지상의 교회에 대해서 우리가 한번 생각해 봐야 되는데 지상의 교회, 우리 교회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교회가 100퍼센트 마음에 드십니까? 완벽한 교회입니까? 하나도 문제가 없이 정말 완벽한 교회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 때문이라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내가 완벽하지 않으니까 나 같은 성도가 이 교회 성도로 있기 때문에 완벽할 수가 없습니다.

교회는 이 지상에 있는 교회는 어떤 신학자는 그랬습니다. "지상의 교회는 천국 교회의 그림자 같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말이 꼭 옳다고 생각하는데 그림자에 자기 자신을 한번 비춰보십시오. 어떻게 보입니까? 정오에 밖에 나가서 그림자로 나를, 해로 나를 비춰보면 내 그림자가 어떻게 보입니까? 아주 짧습니다. 내 키보다 너무너무 짧습니다. 왜곡되어 보입니다. 해거름에 햇볕에, 태양에 나를 비춰보십시오.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집니다. 왜곡되어 나타납니다. 그런 것입니다.

교회는 천국의 그림자라고 했는데 천국의 교회 모습을 제대로 비추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천국 교회의 모습을 어떨 때는 아주 짧게, 어떨 때는 아주 왜곡되게 길게. 그런데 아주 정확하게 비칠 때도 있습니다. 하루에 몇 번 정말 얼마 안 되게 내 키와 내 외관과 거의 흡사한 그림자가 보일 때가 있습니다. 해가 어느 시점에 딱 도착할 때쯤 되면, 교회가 신앙생활 하다 보면 "아, 정말 하나님의 교회가 이래야 되는구나" 하는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크게 시험 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교회가 왜 이래?" 하고 생각하면 그것은 한도 끝도 없습니다. 본질적인 것, 가장 중심적인 것,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 살아 숨 쉬는 교회, 그것에 만족하시면 좋겠습니다. 그 외에 부차적인 여러 가지 문제들은 모든 이 땅의 지상의 교회들이 다 가지고 있는 문제들입니다. 사람들끼리 모여서 살다 보니까 일어나는 일들, 해소할 수 없는 일들, 천국의 그림자 같은 일들이니까 어떨 때는 왜곡되어 나타나 보일 때도 있다. 이것을 생각하고 염두에 두시면 좋겠습니다.

5-4. 새 예루살렘의 외관

새 예루살렘의 외관이 어떠한가 보시겠습니까?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계속 반복되는 게 무엇입니까? 열둘이라는 것이 반복됩니다. 그중에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이라. 이것을 일단 줄을 쳐두시고요.

"동쪽에 세 문, 북쪽에 세 문, 남쪽에 세 문, 서쪽에 세 문이니 그 성의 성곽에는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는" 곧 기초석 위에는 "어린 양의 열두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 열둘. 기초석에는 어린 양의 열두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다고 했습니다. 열둘. 지파의 이름은 구약의 성도들을 얘기하고 열두 사도의 이름은 신약의 성도들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십사만 사천 공부할 때 배웠습니다. 12 곱하기 12 곱하기 천. 앞에 12는 구약의 성도들, 뒤에 12는 신약의 성도들, 천은 교회의 정체성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여기 정확하게 나옵니다. 천국 교회에 누가 있습니까? 구약의 성도들이 다 있다는 얘기입니다. 또 천국 교회에 신약의 성도들이 다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만 봐도 십사만 사천이 숫자적으로 그냥 십사만 사천이라고 말하는 저 이단들의 말이 허구라는 것이 또 드러나지 않습니까? 신약과 구약에 있는 수많은 성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 있는 분들이 새 예루살렘에 다 계십니다. 주기철 목사님도 계시고, 손양원 목사님도 계시고, 베드로도 계시고, 바울 선생도 계시고, 우리 아버지도 계시고, 어머니도 계시고, 먼저 가신 우리 교회 권사님도, 장로님도, 집사님도, 성도님도 다 그곳에 계신다는 뜻입니다.

5-5. 새 예루살렘의 측량

새 예루살렘을 측량한 결과가 어떠합니까? 15절을 보시면 "내게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측량하려고 금 갈대자를 가졌더라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길이와 너비가 같은지라 그 갈대자로 그 성을 측량하니 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더라"

만 이천 스다디온. 이것이 오늘날의 규격으로 계산하면 얼마인가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12 곱하기 천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12라는 수가 또 여기 나옵니다. 그리고 "그 성곽을 측량하매 백사십사 규빗이니 사람의 측량 곧 천사의 측량이라" 144 또 나옵니다. 12 곱하기 12. 이것은 12가 3과 4의 곱이니까 완전수라고 말했고, 12와 12가 또 곱해졌다는 말은 이 새 예루살렘에 엄청나게 많은 구원받은 백성들이 그곳에 다 거하고 계신다. 내가 만나고 싶은 분도 그곳에 가면 만날 수 있다. 이런 뜻이 여기에 함의되어 있습니다.

5-6. 새 예루살렘의 보석

새 예루살렘을 이루고 있는 각종 보석을 열거해 보십시오. 18절에서 21절까지를 보면 보석들이 쭉 나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보석이 여기에 다 있습니다. 그리고 21절을 한번 보십시오. 21절을 보시면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각 문마다 한 개의 진주로 되어 있고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열두 진주문 들어보셨죠? 어떤 사람들이 "내가 본 천국" 이래 가지고 "내가 꿈에 천국을 봤는데 그 천국에 가니까 여러 보석들이 있고 열두 진주문이 있더라" 다 이 얘기입니다. 다 여기 21장에 나오는 아주 유명한 보석 얘기인데,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문자 그대로의 보석으로 보시면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이 21장의 천국을 보석으로 기록한 자는 사도 요한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천국의 모습을 보고 자기가 표현할 수 있는 인간의 최고의 표현으로 쓴 것이 이 보석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이 보석과 비교할 수 없는 정말 찬란하고 아름다운 곳인 것이지, 이 보석 정도라고 생각하시면 큰코다칩니다.

인간의 언어로는 형용할 수 없고 인간의 언어로는 더 이상 표현할 수 없는 그 놀라운 천국을 요한이 지금까지 경험한 보석의 이름을 여기다가 다 집대성해 놓은 것이지, 우리가 보고 듣고 본 것이 그것이 다입니다. 우리는 지금 보석 중에 최고의 보석을 다이아몬드밖에 더 말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만약 우리가 이 모습을 봤다면 우리도 이 언어의 한계에 갇힐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천국이 정말 귀하고 아름답고 놀랍고 형언할 수 없는 정말 아름다운 곳이다. 이 정도로 이해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맺는 말

이제 성 안에 없는 것이 무엇이냐, 성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22장 말씀과 함께 읽어야 되기 때문에 오늘 여기까지 하고 다음 시간 마지막 시간에 다루고 끝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계시록 공부하시느라 고생 많으셨고, 다음 주가 마지막 시간이니까 22장 열심히 읽어오시기 바랍니다. 혹시 계시록 공부하시면서 궁금하신 것이 있다면 다음 시간에 종이에 적어오시면 제가 보고 개인적으로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록 진리의 말씀을 보게 하시고 깨닫게 하셨습니다. 저 천국에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천국에 가서 눈물을 닦아주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눈물을 닦아주신 그 천국이 이 땅에 그대로 임한 줄로 믿습니다. 주여,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시옵소서. 천국은 또한 두려워하는 자들의 것이 되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두려움이 있든지 떨치고 해소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천국의 모습을 기대하고 그리며 스케노오의 삶을 살아가는 믿음의 백성으로 승리하며 살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계시록 말씀을 통해서 깨닫고 느끼고 결단한 것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게 하시옵고 끝까지 주의 말씀 사모하며 나아가도록 축복하여 주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