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특강-2: 일곱 교회에 주신 말씀 (2-3장)
요한계시록 2장 10절 말씀입니다.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아멘.
오늘은 요한계시록 두 번째 시간입니다. 계시록 2장과 3장, 일곱 교회에 주시는 말씀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1. 교회의 본질
일곱 교회에 주시는 말씀의 서두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 서두가 왜 중요하냐면, 교회의 본질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가 오늘 2장과 3장에 계속해서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일곱 교회에 주시는 말씀은 한 교회, 한 교회마다 하나의 틀이 있습니다. "어떤 어떤 이가 이르시되"라고 시작하고, 이어서 주시고자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칭찬이 있고 책망이 있고 도전이 있습니다. 그리고 끝에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로 마무리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마지막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고 끝맺습니다.
1-1. 말씀하시는 분
일곱 교회에 말씀하시는 분은 누구이십니까? 각 교회의 첫머리를 살펴보겠습니다.
2장 1절,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 이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듯이, 일곱 별은 교회 사역자들, 교회의 사자들, 교회를 이끌고 인도하는 분들을 말합니다. 일곱 촛대는 교회를 말합니다. 그 일곱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분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 교회에 말씀합니다. 2장 8절,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처음이요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 — 이분도 예수님이십니다.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는 분,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세 번째 교회 12절,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 좌우에 날선 검, 그 입에서 나오는 좌우에 날선 검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말씀을 가지신 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네 번째,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 — 지난 시간에 그 발이 빛난 주석 같다고 말씀드렸는데, 이것은 사탄의 권세를 짓밟는다는 뜻입니다. 이분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3장 1절,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 이분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3장 7절,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 이분도 예수님이십니다.
다윗의 열쇠를 가지셨다는 말씀은 1장에서 살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드렸듯이, 계시록에 있는 말씀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말씀이 아니고 이전 구약에 있는 말씀을 요한이 묵시 가운데 받아서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이것은 이사야 22장 22절과 23절에 있습니다.
"내가 또 다윗의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 못이 단단한 곳에 박힘 같이 그를 견고하게 하리니 그가 그의 아버지 집에 영광의 보좌가 될 것이요"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이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분 아니십니까? 기억하셔야 됩니다.
3장 14절을 보겠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 이분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일곱 교회에 말씀하시는 분은 전부 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일곱 교회는 그 당시 소아시아에 있는 교회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7이라는 수는 완전수라고 말했기 때문에, 앞으로 오고 올 모든 교회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교회에도 누가 말씀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을 꼭 기억하셔야 됩니다.
1-2. 듣는 교회
그런데 이렇게 각 교회에 말씀하시는 것을 서두에 열어놓고, 마지막에 어떻게 또 말씀하고 계십니까?
2장 7절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에베소 교회에 말씀하시고 마지막에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하셨습니다.
11절에도 있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2장 17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렇게 해서 29절, 3장 6절, 3장 13절, 3장 22절까지 보면 똑같은 말이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각 교회마다 "이르시되"와 "들을지어다"가 호응됩니다. 이를 통해 드러난 교회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처음 서두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르시되, 끝에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하셨습니다. 교회의 본질이 무엇이라는 말입니까?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고 우리는 듣는 곳, 이것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이것은 그 당시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고, 오고 오는 모든 교회, 오늘 우리 교회에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셔야 되는 공동체임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고 슬프게도 그리스도 아닌, 그리스도의 말씀이 아닌,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아닌 사람의 말이 너무 많습니다. 사람이 하는 말이 너무 난무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만 증거해야 될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개인의 생각과 개인의 철학과 개인의 사설을 너무 많이 읊어놓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본질을 흐리는 일입니다.
성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성도의 가장 핵심되는 책임은, 교회 공동체에 우리가 일원이 되었다는 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우선 들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우선 들어야 되는데, 듣는 것은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잘 듣고 잘 새겨야 되는데, 듣는 것은 별로 중요치 않고 서로 내 말 좀 들어 달라고, 내가 하는 말에 좀 귀 기울여 달라고 자기 말을 계속해서 쏟아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옳지 않습니다.
성도의 본분은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와는 들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뱀의 말을 들었습니다. 뱀의 말을 듣고 나니까, 그다음에 보니까 선악과를 보니까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그렇게 되어버렸습니다.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거나,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그리스도의 말씀이 아닌 다른 여타 사설에 귀를 기울이게 되면, 우리가 다른 데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고, 결국 그 끝은 죄로 결말납니다. 굉장히 무서운 결과 아닙니까? 주의하셔야 되고 마음에 꼭 새겨야 되는 교회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 쓰면서 똑같은 틀을 가지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르시되,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것을 꼭 새기시고, 말하고 싶을 때 우선 내가 한번 들어보자, 내가 외치고 싶을 때 우선 내가 예수님의 말씀이 뭐라고 하는지 한번 귀 기울여 들어보자, 그런 자세가 나도 살고 교회도 세우는 길입니다.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각 교회에 주신 말씀
이제 본격적으로 각 교회에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 일곱 교회에 칭찬, 책망, 도전 이 세 가지 틀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교회는 칭찬이 없고 책망과 도전만 있는 교회도 있고, 또 어떤 교회는 책망이 없고 칭찬과 도전만 있는 교회도 있습니다. 셋 다 있는 교회도 있습니다.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2-1. 에베소 교회
에베소 교회가 어떤 교회입니까? 에베소 교회는 누가 개척한 교회입니까? 바울이 개척했습니다. 바울이 원래 2차 선교여행 때 에베소를 너무 가고 싶었는데, 성령께서 막아서 유럽으로 갔습니다. 에베소는 소아시아의 상업과 무역의 핵심 중심 도시였습니다. 바울이 생각할 때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면 복음이 아시아 전체로 다 뻗어나가고 번영할 것 같았는데, 성령께서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눈물을 머금고 유럽으로 갔다가 3차 선교여행 때 에베소를 개척합니다.
바울이 에베소에 작정하고 왔기 때문에 3년 동안 눈물과 훈계로 교회를 섬겼습니다. 두란노 서원을 세웠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함께 에베소를 열정적으로 길렀습니다. 그랬더니 그 교회가 부흥했고 아주 좋은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이제 칭찬도 있고 책망도 있습니다.
칭찬부터 보겠습니다. 2절과 3절입니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칭찬을 쭉 늘어놓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알다'라는 동사입니다. 2절에도 "알고", 3절에도 "아노라" 반복됩니다. 헬라어 원형을 보면 '알다'라는 동사의 원형이 '에이돈(εἶδον)'입니다. '에이돈'이라는 '알다'라는 동사는 '알다', 영어로 'know' 이런 뜻도 있고 동시에 '보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보다'라는 2차적인 뜻은,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너희들이 이렇게 이렇게 수고한 것을 내가 안다, 아노라"고 말씀하신 것은 "내가 다 지켜보고 있다" 이런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지금까지 수고하고 애쓰고 노력한 모든 것을 안다는 것만 내가 알아도 은혜가 되고 감사하고, 나를 알아주시는구나 하는 마음이 들어서 굉장히 기쁩니다. 그런데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내가 다 보고 있다" 하시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런데 동시에 기쁘면서 동시에 불편한 감정도 있습니다. 혹시 내가 죄 지은 것도, 내가 잘못한 것도, 주님 뜻대로 살지 않은 것도 다 보고 계셨을 텐데, 그런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안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안다"라는 말은 일곱 교회에 계속 반복됩니다. 그냥 아는 게 아니라 보고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주님은 우리의 수고도 보고 계시고, 우리의 죄짓는 모습도 보고 계시고, 잘하는 것도 보고 계시고, 잘 못하는 것도 다 보고 계십니다.
책망을 한번 보겠습니다. 어떤 책망입니까? 4절을 보시면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첫사랑.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복음을 전했을 때, 두란노 서원에서 말씀 공부 열심히 했습니다. 사랑이라고 하면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넘쳐났던 그 첫사랑, 그 첫사랑을 버렸다는 뜻입니다.
5절,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처음 사랑을 버렸는데, 사도 요한이 어떤 처방을 합니까? "처음 행위를 가지라" 그랬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말씀인데, 사랑은 곧 행동으로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너희들이 처음에 복음을 처음 받아들였을 때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표현되었고 이웃을 향한 사랑도 표현되었는데, 이제는 그 행위를 찾아볼 수가 없구나. 말씀을 사랑하는 모습도, 이웃에게 선을 베푸는 모습도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구나. 그러니 어디서부터 떨어졌는지를 깊이 생각해 보고 돌이켜 회개하라. 이것이 기회입니다. 그래서 처음 사랑의 행위를 가져라.
사랑은 절대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행동하는 것입니다. 삶으로 드러나고 표현되고 내 손과 발로 나타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무서운 말씀입니다. 교회의 영광을 이제는 거두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심판의 패턴이 있는데, 제가 주일 설교 시간에도 말씀드렸습니다. 심판의 패턴은 한 번에 절대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회개할 기회를 반드시 주십니다. 지금 여기 에베소 교회에도 "회개하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일곱 교회에 계속해서 반복됩니다. 책망받는 교회마다 "회개하라, 회개하라" 계속 반복됩니다. 기회를 주시고, 그래도 돌이키지 않고 그래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때는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6절을 보니까 또 칭찬하는 것이 섞여 있습니다.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니골라당의 행위가 무엇입니까? 여기에 대해서는 의견이 굉장히 분분합니다. 그런데 좀 이따가 살펴볼 버가모 교회나 두아디라 교회를 보면, 이 니골라당의 교훈은 발람의 교훈과 연결되고 이세벨과 연결됩니다.
발람은 우상 숭배하게 했습니다. 이세벨은 행음하게 했습니다. 음란을 행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이 말은 니골라당의 행위라는 말은 교회 안에 있으면서 우상 숭배와 음행을 조장하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언뜻 생각하면 교회 안에서 무슨 우상 숭배를 조장하고, 교회 안에서 무슨 음행을 조장할 일이 있는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앞으로 살펴보게 될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의 상황이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 있는 일곱 교회는 로마 문화라는 그 문화 위에 서 있는 교회입니다. 세상의 도전이 만만치 않습니다. 세상의 문화가 굉장합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렸습니다. 요한계시록이 쓰여진 역사적 배경은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급격한 핍박 가운데 쓰여졌습니다. AD 81년부터 AD 96년 사이에 황제 숭배 사상이 휘몰아치던 그 시절에, 황제 숭배를 하지 않으면 장사도 할 수 없고, 황제 숭배를 하지 않으면 아이들 학교도 보낼 수 없고, 황제 숭배하지 않으면 그냥 굶어 죽기 딱 좋은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니 교회 안에 "우리가 일단 살고 봐야 되지 않느냐, 그래서 그런 문화적인 행위니까 그냥 가서 황제에게 한번 머리 숙이고 고개 숙이고 엎드리고 오는 것은 우리가 믿음을 저버리는 행위가 아니다" 이렇게 말하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런 자들을 니골라당의 행위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곳에는 발람의 교훈이라고 말했고, 이세벨의 교훈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자들을 에베소 교회는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잘 지켰다는 뜻입니다.
7절, 도전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생명나무의 열매가 무엇입니까? 이것을 우리가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창세기에 있는 에덴동산을 하나님이 닫으시면서 생명나무의 길을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칼로 지키셨는데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했는데 그것을 다시 열어주셨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씀하는 생명나무의 열매는 지속적으로 너희들에게 말씀을 공급하겠다, 풍성한 말씀을 너희들이 먹고 그 말씀 붙들고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라는 뜻으로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2-2. 서머나 교회
이제 에베소 교회를 이렇게 정리하고 서머나 교회를 한번 보겠습니다. 이 서머나 교회는 알고 있어야 될 배경이 있습니다. 지금 터키에 가면 이즈미르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아마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이즈미르라는 도시는 터키에서 세 번째 큰 도시입니다. 이 이즈미르라는 도시는 지금도 터키에서 세 번째 큰 도시지만, 과거에 사도 요한이 편지를 써보낼 이 당시에 여기는 지역의 중심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그 지역 황제 숭배의 핵심 도시였습니다.
황제 숭배의 신전이 곳곳에 있었기 때문에 그 지역 인근 각지에 있는 작은 도시에 있는 사람들이 서머나 지역, 이즈미르에 와서 황제에게 숭배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거기에는 상업이 활발했습니다. 사람들이 모이니까요.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생산이 되고, 거기에 돈이 모이고, 사람들이 모이니까 풍성함이 자꾸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도시가 크다 보니까 유대인들도 있었고, 유대교에서 개종한 그리스도인들도 있었고, 이방인이었다가 예수 믿은 그리스도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있는 이 유대인들이 아주 못된 짓을 많이 했습니다. 어떤 짓을 했느냐? 서머나에 있는 유대인들이 로마 당국에다가 그리스도인들을 고발하는 행동을 굉장히 많이 했습니다.
동족이었던 유대인인데 이 유대인이 개종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이 어디에서 모이고 어디에서 교회 공동체가 있는지를 유대인들이 아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로마 당국에다가 "저 사람들 저기에서 모입니다, 저기에서 모입니다" 이렇게 해서 교회를 초토화시켰습니다. 그런 피해 도시가 서머나였습니다.
로마 당국 입장에서 보면 유대교는 별로 위험한 종교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교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자기들의 신인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소종파라고 그들은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 당국 입장에서 진짜 위험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왜 돌아가셨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명패가 무엇입니까?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 아닙니까? 예수님 스스로가 빌라도의 법정에서 "나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로마 황제가 다스리는 모든 속주의 황제는 단 한 분, 황제밖에 없습니다. 황제밖에 없어야 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했기 때문에 정치적 반역죄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 아닙니까? 그런 예수를 믿는 자들, 위험한 자들인 것입니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을 같은 동족인 유대인들이 고발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배경을 가지고 이 말씀을 보셔야 됩니다. 9절입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환난과 궁핍, 왜 환난과 궁핍이 오겠습니까? 황제 숭배 안 하니까 장사 못하고, 아이들은 학교 못 보내고, 그러니까 환난하고 궁핍이 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 알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안다", '에이돈(εἶδον)'이라는 동사는 "알고 있다" 동시에 "본다"라는 뜻입니다. 주님이 알고 다 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다" — 영적으로 너희가 부요하고 풍성한 자라고 위로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어서 봅니다.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유대인들이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비난하고 고발해서 그들을 끌어가고 죽이게 하는지. 그런데 주님 말씀하십니다. 자칭 유대인이라 말하는 자들의 비방을 내가 다 알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참된 유대인이 아니고 사탄의 회당이다. 내가 버린 자들이다. 너희가 부요한 자다. 주님이 이렇게 위로해 주셨습니다.
도전이 있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책망이 없습니다. 도전이 있습니다. 10절, 아까 우리가 읽었던 말씀입니다.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무슨 말입니까? 이제 고난이 없다는 말씀입니까, 앞으로 고난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고난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사실 우리에게는 굉장히 버거운 말씀입니다.
그런데 꼭 기억해야 될 것은 기독교라는 종교는 고난 없이는 절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가짜 기독교의 탈을 쓴 가짜 복음, 거짓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복만 말합니다. 축복만 말합니다. "예수 믿으면 돈 많이 벌고 자손 만대 복 받고 걱정 없이 살 것이고, 천 대 만 대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주실 것이다." 이것만 말하는 자들이 가짜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없이 어떻게 부활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고난 없이 어떻게 우리가 나음을 입습니까? 시편 23편에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함께 하시니까요. 그런데 아예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지 않게 하겠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싫은데 그쪽으로 인도하지 않으면 좋을 텐데, 왜 그쪽으로 인도해 놓고 주의 막대기와 지팡이가 나를 안위하십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복음의 진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고난 후에 영광이 있고, 십자가 후에 부활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서머나 교회에 주시는 말씀, "너희가 지금까지 핍박받고 환난받고 고난받았지만, 그러나 아직까지 장차 받을 고난이 남아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희망도 주십니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여기 십일이라는 말은 숫자 그대로 10일이 아닙니다. 계시록에서 말하는 이 십일이라는 말은 끝이 있다는 뜻입니다. 반드시 끝이 있다. 9일 다음에 10일이 오는 것처럼 반드시 끝날 날이 있다. 그것이 마지막 마감하는 날이 있으니까 견뎌보라는 뜻입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견뎌보라. 그러면 마지막 날에는 생명의 관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도전을 주십니다. 이기는 자는, 11절입니다.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계시록에는 둘째 사망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 왜 둘째 사망을 말할까요? 사람은 한 번 태어납니다. 육체로 어머니 태에서 한 번 태어납니다. 모태에서. 그것이 첫 번째 출생이고, 그다음 예수님이 니고데모를 만나서 하셨던 말씀, 어떻게 해야 된다고요? 거듭나야 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두 번 태어나야 됩니다. 한 번은 무조건 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야 됩니다. 거듭나야 됩니다. 그런데 죽는 것은 한 번만 죽습니다. 흙으로 빚어진 내 육체만 죽습니다.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습니다. 둘째 사망이 무엇입니까? 영원한 형벌, 지옥입니다. 그것을 둘째 사망이라고 계시록이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2 더하기 1의 인생을 사는 것이지, 1과 2의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숫자가 바뀌면 곤란합니다. 한 번 태어나고 두 번 죽고, 그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의 숫자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두 번 태어나고 한 번만 죽습니다. 그런데 그 죽음은 누구나 다 당하는 건너감의 죽음이기 때문에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육체의 옷을 벗는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는, 또 바울은 잠자는 것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다시 깰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런 핍박과 환난과 고난 걱정하지 마라. 기껏해야 너희 육체밖에 죽이지 못한다. 너의 영혼은 내가 꼭 붙잡고 있으니까 염려하지 마라. 그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2-3. 버가모 교회
이제 세 번째 교회를 봅니다. 버가모 교회입니다. 버가모 교회는 또 어떤 교회입니까? 아까 서머나 교회는 황제 숭배의 중심 도시라 그랬습니다. 그런데 버가모 교회는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황제 숭배 더하기 이교도의 신전이 있었습니다. 제우스 신전도 있고, 아프로디테 신전도 있고, 아폴로 신전도 있고,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각종 신들의 신전이 버가모 지역에 빼곡하게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곳에 교회가 있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릴 때부터 그 신전에 가서 제사드리고, 어릴 때부터 그 신전 체험이 일상화되어 있는 사람이 예수 믿고 구원받았습니다. 그런데 쓴 뿌리가 남아있지 않겠습니까? 그 영혼 깊숙한 곳에 불쑥불쑥 이것이 자꾸 올라오는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이 약해지면, 내 상태가 안 좋아지면, 영적 능력이 약해지면, 말씀 붙들고 살다가도 저 사람들이 저렇게 모여서 재미나게 노는 것을 보면 나도 저기 가서 함께 놀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이 버가모 교회의 문제였습니다.
보십시오. 13절, "내가 네 거처를 아노니" — "어디에 산다", 그림이 그려지십니까? 황제 숭배의 중심 도시고 이교도의 신전이 많은 곳.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딱 규정을 해버렸습니다. 거기는 무엇이 있다?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다.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버가모 교회에 순교자가 한 사람이 있었는데, 이 순교자 이름이 안디바였나 봅니다. 안디바에 대해서는 남아있는 기록이 없습니다. 이분이 순교의 본을 보인, 순교의 피가 흐르고 있는 교회가 바로 버가모 교회였습니다. 그 칭찬을 했습니다.
그러나 책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것은 민수기 22장에서 25장까지를 읽어보시면 잘 나오는 말씀입니다. 발락, 모압의 발락이 발람이라는 이 사람을 고용해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의 입을 틀어막아 가지고 저주가 축복이 되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모압의 발락을 부추겨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덫을 놓습니다. 우상 숭배하고 그리고 음행을 범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그곳에서 죄를 짓습니다. 싯딤에 머물면서. 이것이 민수기 25장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범죄입니다.
그런데 이런 발람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이 버가모 교회 안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교회 밖의 적들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교회 밖의 악한 세력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교회 안에 있었습니다.
발람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 이런 사람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성도들을 부추기는 것입니다. "우리 여기서 황제 숭배 안 하고 이교도 숭배 안 하고 있다가 굶어 죽기 딱 좋다, 빨리 나가서 한 번 가서 저들의 축제에 한번 참여하고, 한 번 가서 머리 숙이고 엎드리고 살 길을 도모하자"고 말하는 자들입니다. "그것은 그냥 우리 삶의 문화니까 우리 교회가 받아들이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교회의 세속화를 부추기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우상 숭배하게 하고 음행하게 하는 자들, 이런 자들이 바로 발람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 자들을 이렇게 말합니다. 15절,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아까 에베소 교회 말씀드렸습니다. 니골라당의 교훈, 발람의 교훈, 이것 다 교회 안에 있는 악한 잔재들입니다.
도전을 주십니다. 16절,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회개하라.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참 좋으신 분이라서 한 번에 절대 쳐버리지 않으십니다. 책망할 때 반드시 회개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재미있는 말씀이 나옵니다. 17절,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감추었던 만나는 무엇이고 흰 돌은 무엇입니까?
만나는 우리가 미루어 짐작하면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당시에 광야에서 40년 동안 먹었던 것, 만나는 곧 생명의 말씀, 생명의 양식 아니겠습니까? 생명의 말씀을 너희들에게 계속 공급해 주겠다.
흰 돌은 무엇입니까? 그 당시에 로마가 다스리고 통치하고 있었던 당시에, 잔칫집에 혹은 국가가 운영하거나 큰 이벤트가 있으면 초대받은 사람들에게 흰 돌을 주었다고 합니다. 돌을 말입니다. 그 돌에 그 사람의 이름을 적어 가지고 초대권을 배부해서 나누어 주었다고 합니다. 그것을 흰 돌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 뒤에 재미있는 말이 나옵니다.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천국 티켓을 준다는 뜻입니다. 너희가 발람의 교훈을 따르지 않고 믿음을 잘 지키고 굳게 살면, 이 땅을 사는 날 동안은 생명 양식 만나를 풍성하게 부어줄 것이고, 그리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천국 티켓을 너희들에게 주겠다.
2-4. 두아디라 교회
네 번째 교회입니다. 두아디라 교회에 주신 말씀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십시오. 두아디라 교회는 무역과 상업이 아주 풍성했던 도시였습니다. 두아디라라는 도시는요. 그런데 여기는 구리 세공업자들이 그렇게 많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옷감 염색하는 염색업자들이 많았습니다.
구리 세공하는 사람들과 염색하는 사람들이 많으면, 동일한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으면 무엇을 형성합니까? 조합을 형성하게 되어 있습니다. 길드라는 폐쇄형 협동조합을 형성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조합에 들어온 사람들이 배타적인 특권을 누리는 것입니다. 들어오지 않는 사람은 그 조합에 들어온 사람들에게 따돌림 당하고, 물건도 그 도시에서 팔아먹을 수 없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것이 있습니다. 옛날 중세시대도 있었고, 이 고대 시대에도 구리 세공업자들과 염색업자들이 길드라는 큰 자기들만의 상업 조합을 만들어서 그것 가지고 배타적인 상업의 독점권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1년에 한 번씩 했던 행사가 있는데, 이 두아디라 시에서는 제우스 신과 아폴로 신을 섬겼습니다. 이방신을 섬기는 제전을 여는데 그리스도인들이 이 조합에 들 수 있습니까, 못 듭니까? 들게 되면 안 할 수 없고, 안 들게 되면 굶어 죽기 딱 좋고, 어떻게 해야 됩니까? 이것이 두아디라 교회에는 큰 고민거리였습니다.
사실 오늘 우리도 신앙생활 하면서 내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서, 먹고사는 것 때문에 잠깐 눈 질끈 감고, 잠깐 내 양심에 하나님도 팔아먹고 살 때가 많이 있지 않습니까? 사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 지금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옛날 2천 년 전 초대 교회 때도 이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도 우리와 같은 고민, 우리보다 훨씬 더 처절한 고민을 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이들은 생명을 걸고 그렇게 살았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칭찬은 아주 짧게 합니다. 19절,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그런데 책망이 아주 많습니다. 책망 보시면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 — 진짜 이 여자 이름이 이세벨이었는지, 너무너무 악해서 구약의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의 이름을 그대로 따 가지고 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세벨이라는 이름에서 우리가 딱 느끼는 감정이 아주 사탄의 느낌이 확 옵니다.
아합의 아내 이세벨이 얼마나 독한 여자입니까? 이세벨이 두로와 시돈의 공주로 북이스라엘에 시집와서 북이스라엘 전체를 바알 우상화시켰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 이세벨이라는 여인이 교회 안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칭 그 여인은 자기 스스로를 선지자라 했습니다. 어떻게 했습니까?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여기 문자 그대로 행음을 했다는 것으로 볼 수도 있고, 우상 숭배를 조장했다는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이세벨이 어떤 논리로 우상 숭배를 조장했을 것 같으십니까? "우리가 먹고 살려면 상업 조합에 구리 세공업자 조합에 가입해야 되고, 우리가 먹고 살려면 염색업자들이 그들의 모임에 가입해야 되는데, 1년에 딱 한 번 아폴로 신에게 제사 지낼 때 그때만 가서 한 번만 눈 딱 감고 고개 숙이고 그리고 우리 먹고 살자. 그래야 우리가 교회 헌금도 하고, 그래야 우리 교회가 부흥할 것 아니냐"고 그런 식으로 사람들을 꾀어서 행음하게 하고 우상 숭배하게 한 것입니다.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그러니까 회개할 기회를 주었는데도 회개하지 않으니까 심판하시는데요, 심판이 세 가지로 나옵니다.
첫째,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 그는 이세벨입니다. 침상에 던진다는 말이 어떤 말입니까? 누워서 못 일어나게 한다는 뜻입니다. 병들어서 죽게 만들겠다는 뜻입니다.
둘째,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 더불어 간음한다, 즉 이세벨의 말을 듣고 아폴로 신전에 가서 고개 숙인 자들, 그런 자들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똑같이 큰 환난을 당하게 하겠다.
셋째, 23절,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 이것은 이세벨의 자녀나 회개하지 않은 아폴로 신전에 고개 숙인 자들의 자녀나 똑같습니다. 그런 자들의 자녀까지 내가 멸절시키겠다. 구체적으로 말씀하시고 아주 무섭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한번 중간 정리를 하고 넘어가야 되겠습니다. 에베소 교회 — 교회 안에 있었던 자들, 니골라당이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버가모 교회 — 교회 안에 있었던 자들, 발람의 교훈을 쫓는 자들. 두아디라 교회 — 교회 안에 있는 자들, 이세벨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
내부의 적이 더 위험한 법입니다. 교회 안에 내부의 적이. 그래서 계시록 2장과 3장 첫 서두에 제가 말씀드린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는 공동체가 되어야지, 발람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이 되어서도 안 되고, 이세벨이라는 여자가 "우리 한 번만 딱 눈 감자"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어도 안 된다는 뜻입니다.
교회는 혹시 목회자가 잘못 가르칠 수 있습니다. 혹시 목회자가 자기 욕심에 따라서 성도들을 자기 마음대로 끌고 가려고 할 수 있습니다. 분별할 수 있어야 됩니다. 우리 성도들이 "저것은 우리가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야 되는데, 목사님이 욕심이 좀 지나쳤구나" 분별할 수 있어야 됩니다.
내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 내가 살고 내 자식이 살고 — 여기 지금 자식도 죽는다 그랬습니다 — 내 가정도 살고 내 공동체도 살기 위해서는, 우리는 사람의 말을 들어야 되는 사람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되는 사람입니다. 꼭 기억하셔야 됩니다.
교회 안에 있는 니골라당, 발람의 교훈, 이세벨의 교훈, 굉장히 중요하고 무서운 자들입니다. 문화적으로 교회에 침투합니다. "이 정도는 괜찮다"고, "이 정도는 우리가 타협하고 용납해도 된다"고.
도전을 줍니다. 이 도전에서 아주 중요한 핵심이 나오는데요, 28절 한번 보겠습니다.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회개하고 굳게 지키면 새벽 별을 준다고 그랬습니다. 새벽 별이 무엇입니까? 새벽 별 이러면 아침에 일어나서 일하러 갈 때 새벽 별 봐야 되나? 아침에 일어나는 것 싫은데. 이 새벽 별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6절을 보겠습니다.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예수님이 자기 자신을 가리켜서 무엇이라 하셨습니까? 광명한 새벽 별. 그래서 이 말은 두아디라 교회 안에 있는 이세벨 같은 여자의 꾐을 잘 이기면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너에게 선물이 될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선물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다고 그랬습니다.
2-5. 사데 교회
그다음 사데 교회에 주신 말씀입니다. 사데 교회는 지진을 경험한 교회입니다. AD 70년에 엄청난 대지진이 사데 지역에 임했다고 합니다. 큰 지진이 임하고 나서 로마가 이 도시를 복구했습니다. 그래서 활기가 넘치고 사람 사는 동네가 된 그런 지역입니다.
그런데 여기는 칭찬이 하나도 없습니다. 보십시오. 1절,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사데'라는 이름 자체가 '살았다'는 뜻이 아니고요, 지역 자체가 살아 움직이고 활기찬 지역입니다. 그래서 교인들도 살아 움직이고, 상업이 활발하고 이러니까 교인들도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들이 다 우상 숭배하고 대충대충 타협해서 교회 안에서도 활기가 넘칠 뿐이지, 사실은 영적으로 보면 다 죽은 자들이다. 무섭지 않습니까?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데 하나님 보실 때는 다 죽은 자라니까요. 영이 다 죽은 자들입니다.
3절 보십시오.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복음을 처음 받을 때 어떻게 받고 어떻게 들었는지를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그랬습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에베소 교회에 주셨던 말씀, 첫사랑을 잃어버린 교회 "처음 행위를 가지라" 이 말씀과 똑같은 말씀입니다.
우리가 가끔 "나 옛날에 이러지 않았는데, 요즘은 말씀 읽는 것도 재미없고 기도하는 것도 5분만 기도하면 힘들고" 하십니다. 성도의 침체는 둘 중의 하나입니다. 혹은 두 가지거나. 말씀과 기도. 이 두 가지가 문제가 생기면 영적 침체가 100% 오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은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인 파이프이고, 기도는 우리 인간이 하나님 편으로 올려드리는 영적인 파이프입니다. 이것이 마치 우리 혈관의 순환처럼 잘 조화롭게 순환이 되어야지, 어느 한 군데가 막혀 있으면 영적인 침체가 반드시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말씀의 라인을 점검해 봐야 되고, 기도의 라인을 한번 점검해 보셔야 됩니다. 기도를 회복하는 것은 "언젠간 되겠지?" 이래서는 안 됩니다. 그때는 무엇인가 계기를 마련하셔야 됩니다. 혼자서 일주일이라도 기도를 한번 해보시든가, 새벽이라도 한번 나와 보시든가, 무엇인가 반전하는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해 보셔야 됩니다.
어디서 떨어졌는지 생각하고, 처음 복음을 들었을 때, 처음 내가 제대로 하나님 말씀을 듣고 회개했을 때 그때를 생각하고 돌이켜야 됩니다. 그것이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도전을 줍니다. 그런데 사데 교회에도 남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4절,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망하라는 법은 없습니다. 이 남은 자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구약 시대 때도 내려오는 사상 아닙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타락해도 남은 자가 있었습니다. 엘리야가 그랬습니다. "하나님, 다 돌아서고 저만 남았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아니다. 아직까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고 입 맞추지 아니한 칠천 명이 남아있다."
사데 교회가 다 죽은 것처럼 보였는데 남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는 전부 다 썩어 빠진 것 같고, 다 죽어 문드러진 것 같은데, 기도하는 몇 사람이 남아있습니다. 그 몇 사람이 그루터기가 되어서 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살립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가정의 영적인 최후의 보루다"라는 생각을 하고 살아야 됩니다. "내가 무너지면 다 무너진다"는 생각을 하고 살아야 됩니다. "내가 남은 자다. 다 저렇게 됐는데 에라 모르겠다." 이러면 안 됩니다. 사데 교회에 남은 자 몇 명이 있었습니다.
5절,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생명책에서 지우지 않고 하나님 앞과 천사들 앞에서 시인한다고 했으니까요.
2-6. 빌라델비아 교회
빌라델비아 교회 한번 보겠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사데에서 아주 가까운 지역입니다. 도시가 작습니다. 크지 않습니다. 지진이라는 것이 큰 도시에 있으면 그 옆 도시까지 여파를 주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데라는 도시는 그나마 큰 도시였기 때문에 로마가 지진 이후에 복구를 해주었고, 빌라델비아는 복구를 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기는 사람이 거의 살지 않았습니다. 많이 살지 못했습니다. 옛날부터 거기서부터 터를 잡고 살았던 사람들만 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거기는 교회도 약했습니다. 아주 연약한 교회. 그런데 약한 교회인데 역설적으로 이 교회가 가장 칭찬받은 교회가 되었습니다.
8절,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하나님 보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주님 보시는 것, 능력 많은 것을 봅니까, 아니면 충성과 진실됨을 봅니까? 능력을 보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은 충성과 진실을 보십니다.
우리는 달란트 다섯 개 받기를 원하는데, 우리 주님은 하나만 받아도 그것 붙들고 열심히 살아내고, 하나님 말씀대로 성실하게 믿음의 분투를 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것이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 교회가 적고 연약하고 작은 능력을 가졌는데 말씀 지키고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어디 가서 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칭찬하셨습니다.
10절 보십시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하나님 말씀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성격이 무엇입니까? 인내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읽으면 이것이 오늘 당장 나한테 이루어지고, 오늘 당장 나에게 주어질 것처럼 흥분합니다. "들어가도 복 받고 나가도 복 받고" 이러면 "하나님 오늘 내가 이 말씀 믿사오니 오늘 당장 나에게 이루어 주옵소서"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인내의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 하나 받기 위해서 25년 믿음의 투쟁을 했습니다. "네 자손이 저 하늘의 별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아브라함 생전에 이루어지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죽어서 하늘나라 보좌 우편에서 지금에서야 믿음의 후손들이 하늘의 별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이루어진 것을 보고 기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래도록 붙들고 잡아야 될 인내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성급합니다. 기한을 정합니다. 오늘 당장 안 되면 박차고 나가버립니다. "예수 이까짓 것 믿지 않는다고, 내가 이렇게 열심히 기도하고, 내가 이렇게 열심히 간구하고, 이렇게 열심히 분투했는데 이루어지지도 않는다니." 그런데 그것은 진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생이 육체로만 끝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육체의 옷을 벗고 나면 영원한 천국 백성 될 것 아닙니까? 천국의 상급을 쌓고 천국의 면류관을 사모하고 살아야지요. 이 땅의 삶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인내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지키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해주겠다. 축복의 말씀입니다.
또 의미 있는 말씀을 하시는데요, 11절,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지금까지 붙잡고 왔던, 능력은 비록 적지만 말씀 붙들고 분투하며 살았던 이것 절대로 놓지 마라. 그러면 면류관을 잡을 것이다.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왜 기둥이라는 표현을 썼을까요? 빌라델비아가 지진 때문에 기둥이 다 무너져 가지고 건물이 다 붕괴됐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이 지은 건물 같은 그런 건물을 짓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믿음을 굳게 지키고 살면 영원토록 흔들리지 않고, 이 땅에 어떤 지진이 와도 결코 무너지지 않는 하나님 성전의 기둥 같은 사람으로 너희를 만들어주겠다.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이렇게 그 당시에 있었던 자연재해와 시대적 상황을 자세히 미루어서 성령께서 사도 요한에게 하신 말씀을 요한이 이렇게 기록해서 보낸 것입니다.
이 편지를 받았던 빌라델비아 교인들의 감격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이것 꼭 붙들고 있으면 지진이 와서 건물이 다 무너져 나갔는데 우리는 영원토록 무너지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되겠구나. 돈이 많아서 하나님 성전에 기둥 되는 것도 아니고, 권세가 있어서 하나님 성전에 기둥 되는 것도 아니고, 우리는 다 가난하고 병들고 연약하고 노인들인데, 믿음 지키고 살면 하나님 성전에 기둥 되게 하시는구나."
얼마나 은혜 되는 말씀입니까? 그래서 교회는 건물이 좋다고 좋은 교회 아니고, 재정이 많다고 좋은 교회 아니고, 성도가 많이 모인다고 좋은 교회 아닙니다. 능력이 작아도 하나님 말씀 굳게 지키고 순전하게 세속에 때묻지 않고 살아가는 교회. 가정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항상 그것을 꼭 기억하고 사셔야 됩니다.
2-7. 라오디게아 교회
일곱 번째 교회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라오디게아 지역은요, 우리가 좀 알고 계셔야 될 것이, 터키를 다룬 세계여행 프로그램 같은 것을 보면 자주 나옵니다. 히에라볼리스라고 들어보셨습니까? 파묵칼레, 온천수가 막 용솟음치는 그 근처에 있습니다. 그리고 또 골로새 근처에 있습니다. 골로새 아시지요?
자, 히에라볼리스는 뜨거운 온천이 나오는 곳이고, 골로새는 차가운 물이 아주 유명한 곳입니다. 그런데 데니즐리라는 곳이 있습니다. 그 근처에 히에라볼리스하고 골로새 근처에 데니즐리라는 곳이 있는데, 라오디게아 지역은 물이 아주 귀한 지역이라서 데니즐리에서 파이프로 물을 공급받았다고 합니다. 데니즐리에도 뜨거운 물이 나왔는데, 그 물이 파이프를 통해서 라오디게아로 오는 동안 다 식어버린 것 아닙니까? 그 식은 물을 마시는 순간 역겨워서 다 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그대로 여기 성경에 기록해 두었습니다. 15절,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골로새의 시원한 물도 아니고, 히에라볼리스 파묵칼레의 뜨거운 온천수도 아니고, 파이프를 타고 오는 동안 다 식어버려서 미지근한 물이로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믿음의 결단력 있게 행동하라는 뜻입니다. 믿음의 결단력 있게.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여기에도 발을 한 발 두고 저기에도 발을 한 발 두고, 세상에도 한 발 두고 교회에도 한 발 두고, 이것은 믿는 것도 아니고 안 믿는 것도 아니고, 그런 식으로 회색지대에서 살지 말라는 뜻입니다. 결단하라, 이런 말입니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너를 다시는 보지 않겠다. 무서운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이렇게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은 이유가 있습니다. 17절,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부자였습니다. 돈이 많은 것입니다. 너무 돈이 많은 것입니다. 상업도 되고 무역도 되고, 그리고 이 교회 성도들이 이세벨 — 아까 말씀드렸던 두아디라 교회 이세벨의 꾀임에 빠졌던 그 교회처럼 — 이쪽에 발 두고 저쪽에 발 두고 있으니까 세상에서 돈 잘 벌 것 아닙니까? 믿음의 순결을 지키지 않고 황제 숭배도 하고 살고 그렇게 사니까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돈이 많은 것입니다. 아쉬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쪽 저쪽 오가면서 신앙생활은 하나의 장식품처럼 문화적인 종교 생활을 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주님 보시기에는 어떻습니까?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주님 보시기엔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런 처방을 내리십니다. 18절, 비꼬는 말씀입니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사서, 사서, 사서" — 세 가지 "사다"라는 말에 동그라미 쳐보십시오. "살 수 있거든? 이것을 한번 사보라"는 말입니다. 너희들 돈 그렇게 많다고 돈 자랑하니까, 살 수 있으면 돈으로 사서 한번 해보라.
무엇을 사라 그랬습니까?
첫째, 불로 연단한 금을 사라. 불로 연단한 금. 순결을 말합니다. "정금같이 나오리라" — 정금같이 나온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고난과 훈련과 연단을 거쳐서 불순물이 다 제거된 금. 너 돈으로 살 수 있으면 그것 한번 사보라. 살 수 있습니까? 그것 하나님께서 주신 고난을 통해서, 믿음의 순결을 지키며 잘 살아내야, 그래야 우리 믿음의 끝에 가서 겨우 얻을까 말까 한 그 금으로 된 것을 어떻게 돈으로 살 수 있습니까?
둘째,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흰 옷이 무엇입니까? 계시록에서 말하는 흰 옷은 정결입니다. 죄 짓지 않는 정결, 순결. 아까 사데 교회 전부 다 영적으로 죽은 자들인데 남은 자들이 있다고 그랬습니다. 흰 옷을 입은 자들이 있다고 그랬습니다. 죄 짓지 않은 순결. 돈으로 살 수 있습니까? 살 수 있으면 그것 한번 사보라는 것입니다. 세마포 같은 흰 옷을 너 돈 자랑하는데 그것으로 한번 사보라.
셋째,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영적 분별력입니다. 영적 분별력. 돈으로 살 수 있으면 한번 해보라.
비꼬는 말씀입니다. 돈 자랑하는 자들. 돈으로 절대 이것들 살 수 없지 않습니까? 억만금을 준다 한들 어떻게 정금 같은 믿음을 살 것이며, 죄 짓지 않는 순결함을 살 것이며, 영적 분별력을 어떻게 사겠습니까? 불가능한 것 아닙니까?
결국 한 가지 길이 있는데, 한 가지 길이 무엇입니까? 회개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회개하는 것.
19절,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여기도 "회개하라"는 말씀 나옵니다. 이런 썩어 빠진 교회에도 그리스도께서, 우리 주님께서 회개할 기회를 주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유명한 말씀이 나옵니다. 20절,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이런 교회에도 돌이키기만 하면 이렇게 복을 준다 그랬습니다.
21절,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보좌에 함께 앉게 해준다 그랬습니다. 이런 교회에도 말입니다.
맺는 말
오늘 이 일곱 교회에 주시는 말씀, 우리 각자가 다 개인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고 우리는 듣는 곳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각각 교회에 주시는 말씀 가운데 우리에게 더 크게 부딪쳐 온 것이 있으면 그것 붙들고 또 회개하고 돌이키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사도 요한이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며 이르기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말씀,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고 우리는 듣는 곳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듣지 않고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듣는 것보다 말하기를 즐겨 했습니다. 주님의 말씀보다 니골라당, 발람의 교훈, 이세벨의 교훈을 즐겨 들었습니다.
주님 용서하여 주옵소서. 세상이 아무리 세속화되고 교회가 아무리 세속화의 물결이 밀려온다 하더라도, 우리는 믿음의 순결을 굳게 지키고 흰 옷을 입은 그리스도의 신부로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심판 날 주님 앞에 당당히 설 수 있도록 주여 우리의 믿음을 주장하여 주시고, 생명의 면류관을 우리들에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