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강 - 하늘에는 / 전체녹취

요한계시록 특강-3 "하늘에는" (4장)

요한계시록 4장 1절입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아멘.

오늘은 요한계시록 세 번째 시간입니다. 시작이 반이라고 했는데 시작하면서 벌써 반을 했고, 이제 절반을 계속 달려가고 있습니다. 벌써 두 번을 끝내고 세 번째 시간입니다. 요한계시록 1장에서 3장까지가 계시록의 서론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계시를 받아서 그 계시의 수신자가 누구인지를 명확하게 하고, 이 계시를 받을 일곱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를 확실하게 표현한 것이 지난 2장과 3장의 내용이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4장부터는 사도 요한이 받았던 묵시 곧 계시,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셨던 환상들을 소상하게 하나하나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 과정들을 면밀하게 하나하나 잘 살펴가는 이유는 건너뛰면 오해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4장의 문을 꼼꼼히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주신 말씀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일곱 교회에 주신 말씀이니까요. 그 일곱 교회는 오고 오는 모든 교회를 포함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함께 받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4장의 주제를 "하늘에는"이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이 하늘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늘을 보면 파랗습니다. 파란 하늘이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했는데, 우주선을 타고 나가는 우주인들이 찍은 사진을 보면 하늘은 캄캄합니다. 우주를 보면 파랗지 않습니다.

그 하늘에 우리는 어떤 개념과 관념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하늘은 천국을 마음에 품고 있습니다. 그냥 물리적인 우주, 물리적인 공간으로서의 하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하늘은 하나님께서 계시고 그리스도께서 그 보좌 우편에서 좌정하고 다스리고 계시는 천국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 4장은 천국에서 일어난 일, 천국에 사도 요한이 환상 중에 이끌려 갔는데 그 천국에 누가 계셨는지, 그리고 그 천국 보좌 주변에 또 어떤 분들이 계셨는지를 하나하나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1. 하늘에 열린 문

1-1. 신적 수동태의 의미

첫 번째 질문부터 보겠습니다. 사도 요한이 보고 들은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조금 전에 1절을 읽었는데요,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열린 문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늘에 열린 문이 열려져 있었습니다. 이 열린 문을 어떻게 표현했느냐 하면, 원문에 보니까 '뜌라 에네오그메네'(θύρα ἠνεῳγμένη)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동사 '아노이고'(ἀνοίγω)라는 동사가 나오는데, 이 동사는 '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열다'라는 '아노이고'가 완료형 분사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처음에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뒤에 진짜 중요한 것은, 이것을 문법적으로 신적 수동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신적 수동태라는 말이 굉장히 중요한데, 왜 중요하냐 하면 사람에 의해서 문이 열렸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이 열어 두셔서 열려진 문이라는 뜻입니다.

'열린 문'이라는 것, 우리말로 봐도 수동이지 않습니까? 내가 연 문이 아니고 열린 문이니까요. 누군가에 의해서 열려졌습니다. 누가 여셨습니까? 하나님이 여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신적 수동태라고 문법적으로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무에게나 문을 열어 주실까요? 아무에게나, 누구에게나, 누구나 "목화고저 틀을 갈래요"라고 손들고 하면 아무에게나 하나님의 문을 여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1-2. 구약의 열린 문

하늘의 문이 열렸다는 이 표현은 창세기에도 나오고 마태복음에도 나옵니다. 창세기 어디에 나옵니까? 하늘의 문이 열렸다는 것, 기억나십니까?

야곱이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이고 외삼촌 라반이 있는 밧단아람으로 도망갔습니다. 한 번도 야곱은 노숙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부모님 집을 떠나서 자본 적이 없습니다. 얼마나 속을 끓였겠습니까? 아버지에게 축복은 받고 싶어서 거짓말은 하고, 어머니와 공모해서 형에게 돌아갈 약속을 자기가 빼앗아서 훔쳐서 축복은 받았는데, 형이 그를 죽이려고 하니까 밧단아람으로 도망가는 중이었습니다.

노숙하면서 잠을 잤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꿈을 꿉니다. 천사가 사닥다리를 넣고 하늘로, 땅으로 왔다 갔다 오르락내리락하고, 그게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그 열린 문 저쪽에 가보니까 하늘의 보좌가 있고 그 보좌에 하나님께서 좌정해 계신 것을 꿈속에서 환상 중에서 보았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하늘의 문이 열렸다는 것을 처음으로 창세기에서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열어 두신 문, 여기 제가 적어 두었습니다. 창세기 28장 17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하나님의 집, 하늘의 문. 야곱이 고백한 것 아닙니까? 자기는 도망자이고 자기는 죄인이고, 아버지도 속이고 형도 속여서 그래서 속절없이 지금 도망가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나타나셔서 하늘에 열린 문을 보여주셨습니다.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리고 나서 고백한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집'이라는 말을 '벧엘'(בֵּית אֵל)이라고 합니다. 원래 그 지명이 루스라는 곳인데, 야곱이 그 놀라운 경험을 하고 자기가 여기를 하나님의 집으로 삼겠다고 해서 벧엘로 부른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 뒤에 나오는 '하늘의 문'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야곱은 어떤 마음을 가졌느냐 하면, "하나님, 제가 앞으로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집을 삼겠습니다. 하나님의 집은 다른 말로 하면 성전 아닙니까? 성전입니다. 제가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만들겠습니다. 제가 어디를 가든지 성전에서 예배드리는 것처럼 하나님께 예배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제가 예배드리는 곳 그 꼭대기에 하늘의 문을 열어주셔서 저에게 책망도 하시고 훈도 내시고 축복도 부어달라고" 야곱은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집', '하늘의 문'이라는 표현을 한 것입니다.

실제로 야곱은 어떤 생각이 있었냐 하면, 한 번도 자기 집을 떠나가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아버지 이삭이 항상 축복하시고 항상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집에만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와서 보니까 이 들판에도 하나님이 계시더라는 것입니다.

"모든 곳이 다 하나님의 전이로구나. 내가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배 드리고 하나님의 집 벧엘을 만들면 하나님은 그곳마다 하늘의 문을 여시고 나에게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부어 주시는구나." 그것을 마음에 새긴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실제로 그렇게 행동했고, 외삼촌 집에 가서도 벧엘의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사랑입니다. 자기에게 벧엘은. 그래서 야곱이 "하나님, 제가 다시 이곳에 돌아와서 하나님의 전을 세우겠습니다" 결단하고 내려갔습니다.

1-3.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

이것이 주는 의미가 상당히 있습니다. 지금 여기 요한계시록 4장이 되기 전에 2장과 3장에서 교회 이야기를 잔뜩 했습니다. 일곱 교회에게요. 이런 교회가 지금 어떤 상황에 있습니까? 악한 황제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압제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너무너무 괴롭고 정말 힘듭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 내가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한다는 것, 그것은 곧 내 목숨을 내놓는 것과 똑같은 일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이 숨어서 지하 카타콤에서 예배 드리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하늘 문을 여실 것입니다. 그곳을 너의 예배의 자리로 삼으면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이 예배드리는 그 공간 위를 하늘의 문을 열어서 마음껏 복 주시고 축복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하늘의 문을 지금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열린 문, 하늘에 열린 문.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여기 성전에만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집에도 계십니다. 우리 가정을 예배드리는 하나님의 집 벧엘로 삼으면 하나님은 우리 가정에서 하늘 문을 여실 것입니다.

아니면 우리가 일터에서 간절하게 기도하고 예배하는 일터로 삼으면 하나님은 우리 일터에서도 하늘에 열린 문을 열어 주시고, 그곳으로 복도 주시고 은혜도 주시고, 때로는 깨닫게 하시고 말씀도 부어 주실 것입니다. 이것은 여기 사도 요한이 본 축복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고, 구약에서부터 흘러 내려오는 그들의 조상 야곱의 때부터 흘러 내려오는 것이 계시록에서 그대로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 하늘에 열린 문을 꼭 붙들고 기억하셔야 됩니다.

1-4. 신약의 열린 문

신약에는 마태복음 3장 16절에 이 말씀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3장 16절, 17절 말씀 보시겠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하늘이 열렸습니다. 여기도 언제 하늘이 열렸습니까? 예수님께서 세례 받고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렸습니다. 마태복음 3장 이야기는 굉장히 놀라운데, 성경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동시에 출연하시는 장면이 없습니다. 창조 때 말고는요. 그런데 여기에 삼위일체 하나님이 동시에 출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여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아들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 받고 물에서 올라오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아들 예수님 위에 임하셨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동시에 출연하시는 장면입니다. 이때도 하늘 문이 열렸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유추해볼 수 있는 것은, 언제 하늘 문이 열리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셨습니다. 순종하셔서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인류의 죄를 구속하시기로 작정하시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그 첫 시작으로 세례 받으시고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실 때, 순종하실 때 하나님은 하늘 문을 여시고 만복을 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죄가 없습니다. 죄가 없으니까 세례 받지 않아도 됩니다. 세례는 죄 씻음의 표시 아닙니까? 흘려보냄의 표시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죄가 없으나 세례를 받았습니다. 겸손하게, 그것도 피조물인 인간에게 가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순종과 겸손이 하늘 문을 여는 것입니다. 구약의 야곱이 하늘 문이 열리고 기도한 것, 그리고 예수님께서 세례 받을 때 하늘 문이 열린 것, 이 전승을 따라서 사도 요한이 하늘에 열린 문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1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이리로 올라오라"고 하셨습니다. 이 편지를 받는 일곱 교회에 있는 성도들은 어떤 느낌일까요? "이리로 올라오라"라는 이 말씀이 지금 우리가 읽는 이 느낌하고 완전 다르지 않겠습니까?

그들은 지금 핍박 가운데 있습니다. 압제 가운데 있습니다. 로마 황제가 너무 그들을 괴롭힙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매일같이 사선을 넘나드는 일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이리로 올라오라"라는 말씀을 하셨으니까, 나도 하나님 보좌 앞으로 얼른 올라가고 싶다는 그런 마음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런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이제 그 다음 절을 보겠습니다.

2. 하늘 보좌에 앉으신 분

2-1. 성령에 감동되어

두 번째 문제입니다. 하늘 보좌에 앉으신 분은 누구입니까? 하늘 보좌에 앉으신 분이 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이제 하늘에 올라갔습니다. 이제 상상을 해 보십시오. 우리가 사도 요한이 환상을 보고 하늘에 열린 문이 열려 있고, 하늘에 올라가니까 무엇이 있고 누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2절입니다.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성령에 감동되었더니"라는 이 말은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 말은 "내가 성령 안에 있다"라는 뜻입니다. 즉 이 말은, 내가 지금 쓰는 말은 내 멋대로 쓰는 말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성령의 통제 아래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기록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혹시나 사도 요한이 본 환상과 들은 묵시가 너무나 놀랍고 위대해서 사람들이 "에이, 거짓말이다"라고 할까 봐 사도 요한이 미리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성령에 감동되었다는 이 말은, 내가 성령에 통제되어 있다, 성령께서 나를 강하게 인도하시고 있다고 말씀하시고,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라고 했습니다.

보좌가 나옵니다. 4장과 5장에 이 '보좌'라는 단어를 한번 세어보면 무려 17번이나 나옵니다.

2-2.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

이 보좌에 누가 앉아 계십니까? 그다음 나옵니다.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누가 앉아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앉아 계신 것입니다. 하늘에 열린 문이 있고 그 안에 들어가니까 가운데 보좌가 있습니다. 그 보좌에 앉으신 분은 당연히 하나님 아니겠습니까? 사람이 앉아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보좌에 주인 되시고, 하나님께서 앉아 계신 것입니다.

이것은 창세기 28장에 야곱이 꿈에서 본 벧엘의 환상과 똑같은 것입니다. 천사가 사닥다리에 위로 오르락내리락하고 그 보좌에 하나님께서 계셨다는 것, 야곱이 그것을 본 것 아닙니까? 그것처럼 그때 계신 하나님이 세상의 마지막에 환상을 보여 주시면서 보좌 위에 하나님께서 앉아 계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 당시의 로마 상황하고 비교해서 생각해야 됩니다. 로마인들에게 보좌는 누가 앉아 있는 자리입니까? 황제가 앉는 자리입니다. 로마인들에게 보좌에 앉으실 이는 단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로마 황제밖에 없습니다. 로마 황제를 신격화시켜서 추앙했기 때문에, 신격화시켜서 마치 신처럼 그들은 로마 황제를 떠받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이 본 환상에는 그 보좌에 하나님께서 좌정해 계시다고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편 11편 4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이 구절이요. 여호와는 성전에 계시고 그의 보좌는 하늘에 있다고 했습니다. 보좌가 하늘에 있다는 것은 오늘 이 말씀하고 맥락이 통합니다. 그런데 그는 또 성전에 계신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보좌는 하늘에 계시지만, 하나님의 통치는 성전도 다스리고 계시고 세상 전체도 하나님은 통치하고 다스리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좌가 하늘에 계시다고 해서 하늘만 다스리는 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창조 이후에 간섭하고 다스리고 돌보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철학의 역사를 보면 여러 가지 인간의 이야기들이 많은데, 그 중에 이신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신론을 쉽게 이야기하면 이런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인정합니다. 이 학자들이요. 그런데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고 그냥 던져 놓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돌아가든 말든요.

왜 그런 이야기가 나왔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 천지를 창조하고 지금도 관여하고 다스리고 계신다면 이 세상에 전쟁이 왜 일어나고, 굶어 죽는 사람은 왜 생기며, 사람들 간의 시기와 다툼과 악한 일들은 왜 일어날 것인가? 그래서 하나님은 창조만 하시고 내던져 놓았다, 하나님은 다스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철학 사조 중에 이신론이라는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말입니다. 오늘 이 말씀만 봐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는 하늘에 계시지만 하나님은 성전 안에도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분이고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꼭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2-3. 보좌에 계신 분의 모습

이제 그 다음 페이지를 보시면, 이 하늘 보좌에 계신 분을 사도 요한이 직접 보고 묘사를 해 두었습니다. 3절에서 6절까지인데, 한 절 한 절 보겠습니다. 3절입니다.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보좌 주위에 무지개가 있어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할 때 아름다운 보석으로 표현했습니다. 벽옥, 홍보석, 녹보석으로 표현했습니다. 이것은 변치 않는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을 보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보석은 잘 변하지 않고 영원하며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보석처럼 아름다우시고 영원하신 분이시다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보좌 주위에 무지개가 있다는 것입니다. 무지개가 어디에서 처음 나왔습니까? 노아 때 홍수가 나서 인류 대부분이 심판받고 노아와 그의 가족만 방주에 들어가 구원받았습니다. 그리고 물이 다 빠지고 새 시대가 열렸을 때 하나님께서 무지개로 언약하셨습니다.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언약의 표시로 무지개를 주셨습니다.

그 무지개가 보좌 주위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하신 것을 잊지 않고 기억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맺으신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무지개를 통해 보여주신 것입니다.

4절을 보겠습니다.

"또 보좌 주위에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아 있더라"

보좌 주위에 이십사 보좌가 있고 이십사 장로들이 앉아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장로라고 해서 교회의 직분인 장로님이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여기서 이십사 장로는 구약의 12지파와 신약의 12사도를 합쳐서 24라는 숫자가 나온 것입니다. 구약의 성도들과 신약의 성도들을 대표하는 숫자입니다.

이들이 흰 옷을 입고 금관을 썼다고 했습니다. 흰 옷은 의인의 옷입니다. 이 땅에서 의롭게 살았다는 표시입니다. 금관은 승리자의 면류관입니다. 이 땅에서 싸워 이긴 자들, 믿음의 싸움을 승리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면류관입니다.

구약에서 믿음의 선진들이 싸워 이겼습니다. 핍박과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켰습니다. 신약에서도 성도들이 로마의 핍박 속에서 순교하면서도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들이 이제 하나님 보좌 주위에 있는 것입니다.

2-4. 번개와 음성과 뇌성

5절을 보겠습니다.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시라"

보좌에서 번개와 뇌성이 나옵니다. 이것은 출애굽기 19장 16절에서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실 때 번개와 뇌성이 있었다는 것과 연결됩니다.

"셋째 날 아침에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매우 크게 들리니 진중에 있는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우레와 번개가 치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백성들이 두려워서 떨며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지 마시고 모세를 통해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 두려운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지금 보좌에 앉아 계신 것입니다. 번개와 뇌성과 음성이 나오는 것은 하나님의 위엄과 거룩하심과 권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2-5. 일곱 등불

그리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이 켜져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시라고 했습니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완전수입니다. 완전하신 성령 하나님을 일곱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성막의 등대를 기억하십시오. 성막 안에 금등대가 있었습니다. 그 등대에 일곱 가지가 있어서 일곱 개의 불을 밝혔습니다. 제사장은 이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항상 기름을 채워야 했습니다. 불이 꺼지면 안 되니까 와서 불이 꺼지지 않았는지 확인하고, 기름이 다 닳아서 불이 갑자기 사그라들면 안 되니까 항상 기름을 채워 놓고 또 채워 놓아야 했습니다.

사무엘상 3장 1절에서 3절을 보겠습니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기는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사무엘이 어린 시절, 엘리가 제사장으로 있던 성막에 가서 섬길 때는 이상이 잘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요즘 말로 하면, 옛날 모세 시절에, 옛날 여호수아 시절에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데 요즘은 하나님이 그렇게 임재하시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2절에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자기 집에서 편안하게 제사장이 주무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3절에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워 있었더라"

그림이 그려지십니까? 엘리는 할아버지입니다. 사무엘은 아이입니다. 아직까지 아주 어린아이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하나님의 등불이 꺼지지 않은 성막에 나와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편안한 자기 방에 가서 잠들지 않고, "하나님의 등불이 꺼지지 않았으니까 이 자리는 성령께서 임재하시는 자리구나, 그래서 내가 여기 와서 간절하게 엎드려 기도해야 되겠구나" 하고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어린 사무엘이요.

그런데 정작 등잔대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기름을 채워 놓아야만 할 엘리는 자기 방에서 편안하게 주무시고 계십니다. 편하게 주무시고 계십니다. 그러니 여호와의 이상이 보이지 않습니다. 당연히 엘리에게 보이겠습니까? 들리겠습니까? 그의 영혼이 깨어 있겠습니까? 육체 눈만 어두워진 것이 아니라 영적인 눈도 어두워지고 영적인 귀도 가리워져 버린 것입니다.

사무엘은 이렇게 성장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어떻게 사용하셨는지, 사무엘상 3장 19절 말씀입니다.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놀라운 말씀 아닙니까?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보통 그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우리가 드린 이 기도가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고 다 듣고 다 응답되게 해달라"고요. 그런데 그것은 사무엘처럼 이렇게 할 때 하나님께 감히 말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무엘처럼 성전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등불이 꺼지지 않는 성령께서 완전하게 임재하시는 이 자리에서 간절하게 엎드려 기도할 때 우리가 감히 하나님께 말씀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조금 불편하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불편하게란 무슨 말이냐 하면, 성전에 오면 불편합니다. 어쨌든 성전에 오면 편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요. 엘리는 자기 처소에 누워서 편안하게 잠들어 계시고, 어린 사무엘은 성전에서 몸을 뒤척이며 뜬잠을 자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완전하신 성령께서 임재하시는 성전에서 말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성전을 사모하는 자이고, 얼마나 성전에서 기도하고 계십니까? 기도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주셨던 은혜, 그 말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 축복을 오늘도 주십니다.

시대가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이 문제입니다. 이 시대는 이상이 희미해서 하나도 들리지 않고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다 사탄이 주는 거짓말입니다. 사람이 문제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도 사무엘처럼 성전 사모하고 간절하게 엎드려 불편하게 자기 몸을 복종시키고 완전하신 성령 앞에 기도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그런 사람이 되면, 하나님이 나에게 왜 이상을 보여주시지 않고 왜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지 않겠습니까?

편해지니까 걱정입니다. 바쁜 일상이 계속 오래가서 교회 오는 길을 잃어버릴까 봐 걱정입니다. 예배당에 1시간 앉아 있는 것이 엉덩이가 들썩거려서 예배 못 드릴까 봐 걱정입니다. 큰 걱정입니다.

진짜로 평일에 예배당은 텅 비어 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와서 기도하고 가시면 됩니다. 얼마든지 와서 기도하시고, 얼마든지 찬양하시고, 얼마든지 하나님께 무릎 꿇고 기도하셔도 됩니다. 그래서 엘리처럼 사시지 말고 사무엘처럼 사셔야 합니다.

3. 보좌 주위의 네 생물

3-1. 네 생물의 정체

6절을 보겠습니다.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들이 가득하더라"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다고 했습니다. 도대체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를 우리가 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이것을 구약에서 가져왔습니다. 에스겔에 그대로 있습니다. 에스겔 1장 22절입니다.

"그 생물의 머리 위에는 수정 같은 궁창의 형상이 있어 두려운 데 그들의 머리 위에 펼쳐져 있고"

궁창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는 수정같이 펼쳐진 아주 맑고 깨끗한 투명한 유리 같이 생긴 바다가 있다는 것으로 우리는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이제 한번 더 정리해 보겠습니다. 사도 요한이 하늘에 열린 문으로 들려 올라갔습니다. 환상을 지금 보고 있습니다. 올라갔더니 가운데 무엇이 있습니까? 보좌가 있고 그 보좌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의 형상을 아름다운 보석의 형상으로 형상화시켰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보좌 좌우에 그 둘레에 24개의 보좌가 또 있습니다. 거기에 이십사 장로들이 있는데, 이것은 딱 24명만 말하는 것이 아니고 구약의 성도들, 신약의 성도들을 다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짜 하나님이심을 확정해 주셨는데, 하나님이 출애굽기 19장에서 말씀하셨던 우레의 소리, 번개, 천둥 같은 소리를 하나님이 다시 발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완전한 일곱의 영, 아직까지 꺼지지 않는 밝게 켠 등불과 함께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보좌 앞에는 수정같이 맑은 바다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환상적입니다. 이런 하늘의 모습을 사도 요한이 그대로 보고 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네 생물 이야기를 6절에서 했습니다.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다고 했는데, 그 보좌 주위에 있는 네 생물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네 생물의 모습과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7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생물 네 마리를 언급했습니다.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것도 역시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에스겔 1장 10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그 얼굴들의 모양은 넷의 앞은 사람의 얼굴이요 넷의 오른쪽은 사자의 얼굴이요 넷의 왼쪽은 소의 얼굴이요 넷의 뒤는 독수리의 얼굴이니"

그대로 나옵니다. 독수리, 소, 사람, 사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유대인의 지혜를 모아 놓은 '미드라쉬'라는 책이 있습니다. 미드라쉬에 보면 네 생물을 미드라쉬에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날아다니는 날짐승 가운데 가장 용맹스럽고 가장 뛰어난 짐승이 독수리이고, 맹수 중에 가장 뛰어나고 가장 무서운 짐승이 사자이고, 그리고 소는 인간에게 가장 유익한 땅에 있는 짐승 중에 소이고, 그리고 사람은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만물의 영장이다. 이렇게 해서 네 생물을 미드라쉬에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말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모든 피조 세계,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이 피조 세계의 생물의 대표가 하나님 보좌 주변에 있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 주권을 말하는 것입니다.

3-2. 네 생물의 찬양

그런데 네 생물이, 즉 하나님의 창조를 입은 모든 네 생물, 이것은 대표입니다. 대표요. 이 땅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생물들, 사람 그리고 모든 동물들의 대표가 무엇을 하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8절과 9절을 보겠습니다.

"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하고 그 생물들이 보좌에 앉아 계신 이 곧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릴 때에"

8절과 9절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어떻게 요약할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네 생물들이 무엇을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까? 찬양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이 찬양이 예배입니다. 예배하고 찬양하고 예배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이 예배라고 하면,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설교자의 설교 말씀입니다. 1시간 예배 드리면 제가 설교하는 시간이 거의 30분입니다. 절반입니다. 특히 우리 장로교는 더 그렇습니다. 예배 가운데 가장 많은 부분이 설교 예배입니다.

그런데 여기 설교가 있습니까? 천국에서 드리는 예배에 찬양밖에 없습니다. 천국에는 설교가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계시고 예수님이 계시고 천사들이 있는데, 설교가 왜 필요합니까? 설교는 설교자가 도구가 되고 통로가 되어서 하나님께 받은 계시를 그대로 통로로 전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려주는 것인데, 하나님을 알려줄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이 여기 계시는데요.

천국에는 목사가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천국에 설교가 필요합니까? 목사는 천국 가면 실직자가 됩니다. 할 일이 없으니까요. 천국에는 찬양이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찬양하는 자가요.

그래서 우리가 지금 여러 환경으로 인해 찬양하는 것이 너무 불편하고 힘든데, 혼자 운동하실 때, 둑길 걸으실 때, 그리고 집에서 있을 때도 찬양을 마음껏 꼭 찬양하십시오. 여기가 천국이라고 생각하고요. 음치면 어떻고 박치면 어떻습니까? 내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 자리에 네 생물의 대표로, 사람 대표로 내가 와 있는데요. 24 보좌에 있는 장로들도 다 찬양합니다. 천국에는 찬양이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예배 때 보면 찬양을 잘 안 합니다. 성도님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입만 뻐끔뻐끔, 금붕어처럼. 옆사람에게 내 목소리가 어떻게 들릴까 이게 좀 불편하기도 하고, 그리고 찬양을 잘 안 합니다. 주일 예배 때 찬양을 보통 네 곡 혹은 다섯 곡 정도 하는데, 예배 끝나고 집에 갈 때 목이 쉬어 있어야 됩니다. 열심히 찬양 부르고, 열심히 찬양해서 목청껏 찬양해야 합니다. 그것은 천국 가서 찬양 드릴 연습하는 것이니까요.

교회가 천국의 모형 아닙니까? 열심히 찬양하셔야 합니다. 찬양은 너무너무 아름다운 것이니까요.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찬양 받게 되어 있습니까? 하나님의 피조물 된 인간이요. 동물도 지금 찬양하고 있는데, 독수리도, 사자도, 소도 찬양하고 있는데, 사람이 찬양하지 않고 있으면 우리가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열심히 찬양하셔야 합니다. 찬양대 찬양 듣고 "잘하네, 못하네" 평가하고 그러고 있으면 골로 갑니다.

4. 이십사 장로들의 예배

4-1. 관을 드리며

그다음 세 번째 질문입니다. 보좌 주변에 있는 이십사 장로들은 어떤 말과 행동을 합니까? 이십사 장로들은 장로님이라고 생각하시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의인들, 이 땅에서 고난 이기고 하나님의 보좌 둘레에 앉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 구약의 성도들, 신약의 성도들이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입니다. 10절, 11절입니다.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자기의 관을 드렸습니다. 아까 그 면류관이었습니다. 금관. 그 면류관을 벗어다가 "이것은 제가 쓰고 있을 것이 아닙니다" 하면서 겸손하게 벗어다가 하나님께 올려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24 장로들도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물들만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도 천국에 올라가서 찬양하는 것이 곧 예배이니까요. 찬양 열심히 하셔야 합니다. 열심히 찬양하고 열심히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리고요.

4-2. 우리 주 하나님

여기서 아주 중요한 한 가지 고백이 나옵니다. 11절 다시 한번 보십시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사도 요한이 누구에게 "우리 주 하나님이여"라고 하는 것을 본 것입니까? 이십사 장로들이 하나님께 "우리 주 하나님이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그 당시 편지를 써서 일곱 교회에 보냈습니다. 그것을 받아 보는 사람들은 가슴이 철렁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 하나님이여"라는 말을 라틴어로 이렇게 씁니다. '도미누스 에트 데우스 노스테르'(Dominus et Deus noster).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도미누스'가 '주'라는 뜻입니다. 주, 주인. '에트'는 '그리고'. '데우스'는 '하나님'. 그러면 무엇입니까? '도미누스 에트 데우스'는 '주 그리고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노스테르'는 '우리의'라는 뜻입니다. 소유격입니다. '우리의'의 '노스테르'가 제일 뒤에 걸립니다. '우리의 주와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자기를 가리켜 말하라고 했습니다. 앞으로 나를 부를 때는 '도미누스 에트 데우스 노스테르'라고 부르라고, 자기를 가리키게 요구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이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쓰면서 이십사 장로들이 천상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향하여 '도미누스 에트 데우스 노스테르'라고 부르고 있으니까, 이것을 편지를 받는 사람들은 깨닫게 됩니다.

"그렇구나. 우리가 진짜 주와 하나님이라고 부를 분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한 분밖에 없구나. 이 땅에서 도미티아누스 황제를 우리가 '도미누스 에트 데우스 노스테르'라고 불러서는 되지도 않는 것이구나. 그렇게 불러서는 우리가 지옥 백성이 될 수밖에 없겠구나." 이것을 깨닫게 하는 말씀입니다.

오늘도 세상의 권세가, 물질이, 여러 가지 복잡한 것들이 우리에게 자기를 주와 하나님이라고 부르게 합니다. 그렇게 고백하고 그렇게 따라가시면 큰일납니다.

우리는 저 하늘에 계신, 지금도 이 땅에서 좌정하고 다스리시고, 지금도 이 성전에 계신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만 "나의 주요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불러야 됩니다. 그것이 그 당시에 목숨을 거는 고백이었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것, 황제에게 고백하지 않고 하나님께 고백했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 나의 주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듣기에는 아주 밋밋한 고백입니다. 이렇게 항상 부르니까요.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시여" 부르니까요. 그런데 이 당시 백성들에게는 자신의 목을 내놓는 고백이었습니다. 이 고백이 오늘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복습도 한두 번 하시고, 그리고 다음 주에는 5장과 6장을 볼 테니까 교재도 좀 보시고 성경도 두어 번 읽고 오시면 좋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통해서 오늘 우리 믿음의 현주소를 깨닫게 하시고, 지금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 보고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천국에 올라간 사랑하는 사도 요한이 하늘에 열린 문을 통해서 하나님을 배웠고, 하나님께서 보석같이 아름다운 분으로, 영원토록 변함없는 분으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주여, 오늘 우리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나의 주요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믿음의 백성들이 되도록 주여 우리의 고백을 축복하여 주옵소서. 이 땅에서 승리한 자, 이 땅에서 투쟁하여 이긴 자만이 24 장로의 반열에 설 수 있다고 말씀하셨으니, 싸워온 구약의 성도들, 신약의 성도들처럼 우리도 그들의 뒤를 따라가서 24 장로의 반열에, 거기에 우리의 자리를 얻게 하여 주옵소서.

이 땅에서 헛되고 헛된 욕망에 무너지지 않도록 도우시고, 물질 쫓아 살다가 망하는 자가 되지 않도록 보호하시며, 사람 좇아 살다가 패망하는 자가 되지 않도록, 주여 우리 정신 차리고 신앙생활하도록 주여 우리의 믿음을 다시 한번 굳세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대로 하늘에 올라가면 찬양하는 것밖에 없다 하셨으니, 이 땅에서 열심히 찬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올려 드리며, 하나님 기뻐하시는 믿음의 백성으로, 찬양하는 존재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

세월이 수상하고 세상이 어지럽고 복잡한 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국 백성 되는 소망을 가지게 하여 주시고, 우리 마음속에 오직 주 하나님 한 분만 붙들고 나아가도록 역사하여 주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