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강 - 두 증인과 일곱 번째 나팔 / 전체녹취

요한계시록 특강-8: 두 증인과 일곱 번째 나팔 (11장)

요한계시록 11장 3절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1. 계시록의 전체 흐름

오늘은 요한계시록 여덟 번째 시간입니다. 11장을 함께 공부하게 되었는데, 계시록이 22장까지 있으니 오늘 공부하면 딱 절반을 함께 나누는 셈입니다. 이제 절반 가까이 왔으니 1장부터 지금까지 오는 동안 적어도 큰 대략적인 얼개 정도는 우리가 머릿속에 넣고 있어야 합니다.

1장은 제목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하였습니다. 계시의 말씀을 읽는 자, 그리고 지키는 자, 보는 자, 행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말씀이고, 2장과 3장은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 일곱 교회에 주시는 말씀에서 7이라는 숫자는 계시록에서 상당한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데, 하늘의 수와 땅의 수가 합쳐진 완전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뿐만 아니고 앞으로 올 모든 교회가 7이라는 숫자에 다 담겨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4장부터가 계시록의 본격적인 계시의 말씀인데, 4장은 요한이 하늘에 올라가 보니 하나님의 보좌가 계시고, 보좌 주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있고, 천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5장과 6장을 보면 계시록의 심판 가운데 첫 번째 심판이 나오죠. 첫 번째 심판이 무엇입니까? 일곱 인 심판이 5장과 6장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마지막 일곱 번째 인을 떼실 때 심판은 6장에 나오지 않고, 7장을 건너가서 8장을 시작할 때 나온다고 하였습니다. 그 의미는 하나님께서 심판을 지연시키시고 그 기간 동안 오래 참고 기다리고 돌아오기를 바라고 계심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7장에 가니 십사만 사천의 의미에 대해서 말씀한다고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8장과 9장에 가니 계시록의 심판 스토리 가운데 두 번째 심판인 일곱 나팔 심판이 8장과 9장에 나옵니다. 그런데 그것도 똑같이 일곱 심판 가운데 전부 다 들어 있는 것이 아니고, 마지막 일곱 번째 나팔은 저 뒤쪽에 오늘 우리가 살펴볼 11장, 그것도 한참 뒤에 제일 마지막에 숨겨져 있습니다. 그러면 10장과 11장 그 앞까지는 마지막 일곱 번째 나팔을 불기까지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인내의 사랑이 녹아 있는 것이라고 그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일곱 번째 심판이 오기까지, 일곱 번째 나팔을 불기까지 그냥 기다리는 게 아니잖아요. 하나님은 어떻게 기다리십니까? 10장에 보니 펴놓인 작은 두루마리,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말씀대로 살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의 마음이 10장에 나와 있고, 오늘 11장은 이제 하나님이 증인을 보내십니다. 보다보다 답답해서 두 증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두 증인이 돌아오라 돌아오라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거기에 담겨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계시록을 우리가 절반 정도 지금 살펴보았는데, 계시록이 무서운 책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과 인내와 오래 참음의 책입니까? 후자라고 보셔야 되죠. 심판은 반드시 있는데, 하나님의 심판은 계속해서 지연되고 또 오래 참고 기다리고 바라고 계시는 하나님의 심판의 지연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시는데, 그 심판할 때까지 최선을 다해서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기다림과 사랑의 손길을 우린 계시록을 통해서 읽어내야 합니다.

2. 성전을 측량하라

오늘은 두 증인 이야기가 나오는데 한번 구체적으로 보겠습니다. 첫 번째 질문입니다. 사도 요한에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시며 명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에게 명한 것이 무엇이냐, 1절을 보니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하였습니다. 성경을 읽으실 때는 '나'는 누군지, 말하는 분은 누군지를 적어가면서 보셔야 됩니다. 지팡이 같은 갈대를 줄 때 '나'는 사도 요한이겠죠. 사도 요한에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신 분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시라고 볼 수도 있고, 지난 시간에 맥락에 의하면 힘센 천사라고 볼 수도 있죠. 힘센 천사는 그냥 힘센 천사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면, 사도 요한에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그렇게 보시는 게 훨씬 더 정확합니다.

뭐라고 말씀하셨는가.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라." 측량할 대상이 몇 가지가 있습니까? 세 가지가 나오죠.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성전, 제단,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입니다. 사도 요한에게 세 가지를 측량해보라 하셨습니다. 측량이 뭡니까? 재는 거죠. 자를 가지고 잽니다. 자는 오늘은 이랬다가 내일은 저랬다가 하는 겁니까? 정확한 기준이 있죠. 우리가 자 댄다고 그러잖아요. 절대 변하지 않는 정확한 기준을 가지고 세 가지를 측량하는데, 성전도 제단도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 즉 예배드리는 자들도 측량하라 하셨습니다.

그럼 여기서 우리가 측량한다는 의미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측량한다는 의미가 뭘까요. 여기서 의미는 달아본다는 의미보다는 보호한다, 지킨다, 내가 책임지겠다 하는 의미가 훨씬 더 강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부모님이 자녀들 방에 줄자를 가지고 들어가서 이쪽 벽도 재고, 천장 높이도 재고, 사이즈도 잽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아, 우리 어머니가, 우리 아버지가 책상을 하나 들여다 주시려는 건가, 침대를 하나 바꿔 주시려는 건가, 그런 마음을 가지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여기에 측량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리고 우리 인생의 성전과 제단과 예배드리는 자를 측량한다는 말은, 내가 너희들을 살피고 돌보고 책임지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 책임지겠다는 게 무작정 책임지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무작정이 아니라 자 대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 하나님의 자 대 안에, 하나님의 측량의 줄자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을 내가 책임지고 돌보겠다는 의미를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하나님의 자 대 안에 들어와 있어야죠. 하나님의 잣대가 뭡니까? 변함없는 하나님의 잣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영원토록 변함없는 하나님의 잣대는 말씀이죠. 사람은 이랬다 저랬다 하고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계속해서 바뀌는 것이 사람인데, 하나님의 말씀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종말의 때에 성전과 성전에서 예배드리는 자들과 제단에서 분향하는 자들을 측량하고 계시고, 그 안에 들어 있는 자들을 하나님은 무조건 책임지고 돌본다는 사실을 기억하시면 우리가 이 종말의 시기를 이겨내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 말씀을 받는 도미티아누스 황제 박해 가운데 살고 있었던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이 편지를 받았을 때 어떤 느낌이었을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구나, 하나님이 나를 측량하고 계시는구나, 책임지고 계시는구나. 그럼 나는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의 말씀 가운데 생명 걸고 이 말씀을 붙들고 지키려고 발버둥치고 노력해야 되겠구나. 그런 마음을 가지지 않겠습니까?

2-1. 성전 바깥 마당

2절을 한번 볼게요. "그런데 성전 바깥 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우리가 여기서 오해하시면 안 되는 것은 성전 바깥 마당은 버린 공간이라고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성전의 조감도를 우리 지난번에 예배학교 때 성전 조감도, 성전의 모형을 다 보셔서 아마 머릿속에 기억하고 계실 텐데, 성전 마당도 성전입니다. 성전 마당도 하나님의 성전이에요. 이방인의 뜰도 있고, 거기에 하나님의 백성들도 오가고, 성전 마당도 성전인데, 이곳은 측량하지 말고 버려 두라, 이방인에게 내버려 두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성전을 지키고 돌보시지만, 그러나 이방인이 성전을 침탈하는 것까지 하나님이 허락하셨다는 뜻입니다. 종말의 때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고난 받고 핍박 받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금 힘들고 어렵게 사는 것까지도 하나님은 부분적으로는 허락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허락하신 고난의 기간이 얼마 동안이냐. 마흔두 달 동안이라 하였습니다.

여기 마흔두 달 동안이라는 기간이 중요한데, 3년 6개월이잖아요. 3년 6개월 동안 딱 지나고 고난이 끝난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42달에 대해서 여러 해석들이 있고, 이단들이 이것 가지고 수없이 말장난을 했기 때문에 사실은 이 기간을 이렇다 저렇다 설명하는 것보다, 이걸 우리가 이해할 때는 하나님께서 주신 고난의 기간이 한정적이라고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훨씬 더 좋습니다. 한계가 있다, 끝이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고난 당하는 것도 허락하셨는데, 하나님의 백성도 고난 당하잖아요. 성전 바깥 뜰이 짓밟히는 것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인데, 그것도 하나님이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허락하신 고난의 기간은 반드시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나는 선하게 살고, 믿음생활 잘하고, 기도생활 하고, 하나님 뜻대로 올곧고 바르게 사는데 왜 나의 인생에는 이렇게 풍파가 그치지 않는가 생각하시는 분들 많잖아요. 그때 기억하셔야 될 것은 우리가 이 믿음을 굳게 지키고 잘 살아가면 반드시 이 고난의 끝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걸 42달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2-2.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그런데 계시록은 구약의 말씀을 가져와서 집대성한 것이라 하였잖아요. 구약에 42달이 있는가. 있습니다. 다니엘서에 있습니다. 다니엘 7장 25절을 보십시오. "그가 장차 지극히 높으신 이를 말로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와 법을 고치고자 할 것이며 성도들은 그의 손에 붙인 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 여기 보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라 하였습니다. 한 때 1년, 두 때 2년, 반 때 반 년입니다. 그래서 이걸 환산하면, 달로 환산하면 42달입니다. 3년 반. 구약에 있는 개념이 그대로 계시록에 가지고 들어온 것입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두 증인의 권세

3절 보겠습니다. 두 번째 질문입니다. 두 증인이 받은 권세가 무엇입니까? 이제 두 증인이 나옵니다. 3절입니다.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여기서 우리가 규명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두 증인은 좀 있다가 정체가 나오는데요, 굵은 베옷과 1260일입니다.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신 분은 누구일까요. 하나님 아니면 예수님이겠죠. 힘센 천사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셨습니다. 어떤 권세를 주셨는가. 굵은 베옷을 입고 예언할 권세를 주셨습니다. 굵은 베옷이 의미하는 바가 뭡니까? 성경 전체의 흐름 가운데 굵은 베옷은 어떤 것을 의미합니까? 회개를 얘기하죠. 어디서 보셨습니까? 이건 이 계시록에 나오는 것은 구약을 통해서 찾아봐야 합니다.

요엘 1장 8절을 보겠습니다. "너희는 처녀가 어렸을 때의 약혼한 남자로 말미암아 굵은 베로 동이고 애곡할지어다." 굵은 베로 동이고 애곡하라 하였죠. 그러면 굵은 베를 입는다는 건 회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통곡해하고 자복하고 회개하는 것. 구약의 상징 가운데 굵은 베옷을 입고 그리고 재를 뒤집어쓰는 것 있잖아요. 재 위에 앉아서 재를 뒤집어쓰는 것. 재와 굵은 베는 회개의 상징입니다.

그렇다면 두 증인이 굵은 베옷을 입고 예언한다 하였으니, 회개를 선포하라는 거잖아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 이렇게 말하는 것 듣는 것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걸 듣고 돌이켜서 회개하면 그가 돌이켜서 회복되고 살아날 것인데, 그것 좋아하지 않고 돌이키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이 훨씬 많습니다. 세례 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다" 하였죠. 그때 회개한 사람들도 있었죠. 그런데 회개하지 않는 독사의 자식들도 굉장히 많았습니다. 훨씬 더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복음을 전하실 때도 회개를 계속해서 선포하셨지만, 돌이키지 않는 사람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상상을 해보면, 뒤에 나오지만 두 증인의 마지막 결말이 어떻게 될까요. 회개를 계속해서 얘기하는데 사람들의 마음이 강퍅해서 회개하지 않아요. 가만히 있을까요. 회개를 선포하는 걸 듣는 사람들이 가만히 있잖아요. 두 증인을 잡아서 죽입니다. 결국 이 두 증인은 순교의 피를 흘릴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11장의 어느 위치에 있는가를 아는 것이 중요한데, 마지막 일곱 번째 나팔을 불기 전에 두 증인이 왔잖아요. 그러면 두 증인은 그리스도께서 보내시는 마지막 순교의 피를 흘리는 기회를 주시는 사건이라고 보셔야 됩니다. 이런 사람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예언하고 회개를 계속해서 선포하는데 돌이키지 않으면, 결국은 마지막에 일곱 번째 나팔이 불면 심판밖에 더 있겠습니까?

3-1. 천이백육십 일의 의미

그런데 굵은 베옷을 입고 얼마 동안 예언합니까? 1260일. 1260일이 좀 전에 나왔던 42달하고 똑같죠. 한 달은 30일이라고 계산하면 30 곱하기 42 한번 해보세요. 얼마가 나오는가. 1260일이 딱 나옵니다. 그러면 지금 여기 계시록에 나오는 1260일, 42달이 도대체 무엇을 상징할까 의미할까 하는 것보다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성도의 고난에 끝이 있다고 그렇게 말씀하셨고, 성도가 받는 고난의 기간은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기회의 시간인 거죠.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시는 마지막 기회의 시간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두 증인이 되어서 이 기회의 시간에 복음을 계속해서 전해야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라고 했기 때문에, 그래서 교회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일을 계속해서 해야 되는 거예요. 물질로 할 수 있으면 물질로 복음을 전하고, 우리 입으로 할 수 있으면 입으로 복음을 전하고, 내 발이 가서 할 수 있으면 발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 최선을 다해서 복음을 전해야 되는 기간인 거죠.

마지막 일곱 번째 나팔이 울려서 이 땅의 마지막 심판이 임하기 전까지, 이 기간은 성도에게는 사명의 기간이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기회의 시간이고, 고난 받고 있는 사람에게는 고난을 견디고 또 견디면 하나님께서 고난의 끝을 주실 하나님께서 위로하시는 시간이 이 시간입니다. 이건 각자의 처한 상황과 위치에 따라서 다양하게 다르게 나타나는 시간입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4. 두 증인의 정체

이제 두 증인의 이름이 나옵니다. 세 번째 질문입니다. 두 증인의 다른 이름이 무엇이며, 숫자 2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두 증인의 다른 이름을 성경이 말하고 있거든요. 4절을 보겠습니다. "그들은 이 땅의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자꾸 '둘'이라는 숫자가 나옵니다. 두 감람나무, 두 촛대.

4-1. 두 감람나무

그럼 계시록에서 감람나무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졌겠습니까? 우린 이제 알잖아요. 이건 구약에서 가져온 말씀이라는 걸. 감람나무부터 밝혀야 됩니다. 감람나무가 어디에 있는가. 스가랴 4장 3절인데요, 보겠습니다. "그 등잔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그 기름 그릇 오른쪽에 있고 하나는 그 왼쪽에 있나이다." 자, 더 모르겠죠. 이렇게 얘기하니까. 등잔대라 하였습니다. 등잔대, 어디서 들은 것 같죠. 본 거 같죠. 성전 안에 등대가 있잖아요.

성전의 등불은 꺼지면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죠. 제사장의 책임과 제사장의 의무가 성전의 불 꺼뜨리지 않는 것이 제사장의 아주 중요한 사명이라 했잖아요. 제사장은 항상 성전의 등대에 기름을 계속 공급하고, 그 성전에서 불이 꺼지지 않도록 하고, 성전에 나와서 기도하고, 성도들이 성전에서 기도하는 걸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제사장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엘리 제사장은 그렇지 않았죠. 자기 집에 가서 두 다리 뻗고, 자기 처소에서 주무시고 계시고, 사무엘이 성전에 나와서 어린 사무엘은 기도하고 있었다 하였습니다.

지금 여기 두 등잔대, 그런 등잔대, 등잔대는 성전의 불을 의미하는 거죠. 그런데 등잔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다 하였습니다. 성전에서 불을 밝히는 것, 하나님의 말씀 아닙니까? 말씀은 빛이 되시니까. 그러면 두 감람나무는 말씀을 지키는 증인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곁을 지키는 증인, 하나님의 말씀을 수호하는 증인. 그건 나중에 좀 있다가 밝혀지겠지만, 구체적인 인물일 수도 있고 오늘 우리일 수도 있는 거예요.

우리는 이 종말의 때 하나님의 말씀을 수호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잖아요. 말씀은 어떤 식으로 수호합니까? 내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수호하는 거죠. 이 말씀이 옳다 그르다, 이거 우리가 백날 떠드는 것, 입으로 떠드는 거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내면 나는 말씀을 지키고 수호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잖아요.

등잔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14절을 보니까요, 스가랴 4장 14절입니다. "이르되 기름 부음 받은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는 자니라 하더라." 기름 부음을 받은 자 둘이라 하였습니다. 스가랴서에 보면 이 두 사람의 이름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누구냐면 제사장 여호수아, 예수아라고도 하죠, 그리고 총독 스룹바벨입니다. 총독은 정치권력을 말하죠. 제사장은 하나님께 기름 부음 받은 영적인 지도자를 의미하잖아요. 정치 지도자와 영적 지도자가 두 감람나무라고 스가랴서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계시록에서 말하는 두 감람나무는 왕 같은 제사장을 의미하는 거죠. 스가랴서는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를 말하고 있지만, 어쨌든 이분들은 예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두 증인이고,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수호하는, 말씀을 지켜 행하는 수호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정체가 이렇게 나왔습니다.

4-2. 두 촛대와 교회

그다음 다시 4절에 보면 두 촛대가 나오죠. 촛대는 뭡니까? 이미 계시록에서 촛대가 나왔죠. 촛대는 교회라 하였습니다. 보겠습니다. 계시록 1장 12절입니다. "몸을 돌이켜 나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일곱 금 촛대. 일곱 교회가 일곱 금 촛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7이라는 숫자는 완전수라 하였기 때문에, 일곱 교회는 오고 올 모든 교회의 숫자를 의미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두 촛대라고 얘기했는데, 두 촛대는 곧 교회를 의미하는 거죠. 교회입니다. 그럼 두 증인,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 이건 하나님의 교회의 증인 되는 사람들이고, 그리고 교회 공동체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죠.

4-3. 숫자 2의 의미

그리고 여기서 '둘'이라는 숫자를 규명해야 되는데, '둘'이라는 숫자는 전체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도 이제 무슨 말인가. 왜 '둘'이 전체의 상징이냐. 요한복음 8장 17절에 한번 볼게요.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언이 참되다 기록되었으니." 두 사람의 증언이 참되다 하였습니다. 율법에 보면 증인을 세울 때 2명을 세우잖아요. 한 사람은 증인을 세우지 않습니다. 그럼 이 말이 뭐냐. 유대인들의 공동체 의식 속에서는 두 사람의 증언이 있으면 이 증언은 참되다고 본 거예요. 그래서 두 사람은 공동체 전체를 상징하는 개념입니다. 두 사람, '둘'이라는 숫자는, 그래서 여기 두 감람나무, 두 촛대는 전체 교회 성도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이렇게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럼 오늘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 우리 교회도 여기에 속하는 거고, 전체 성도라 하였으니 나도 여기에 속하는 것이죠. 종말의 시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감람나무 가운데 하나로 세우시고 나에게 요구를 하시는 것입니다. 등잔대 곁에 너는 서 있는 감람나무다. 말씀을 지키고 말씀을 수호하는 자가 되어라. 그리고 너는 1260일 즉 마흔두 달 동안 아직까지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자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힘써 전하고, 그들이 일곱 번째 나팔이 불려져서 완전히 멸망하는 자리에 들지 않도록 열심히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 전하는 자의 사명을 감당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사명이 명확해지지 않습니까?

5. 두 증인에게 주신 능력

이제 두 증인이 가진 권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명을 주실 때 그냥 주시면 어떻게 나갑니까? 권세를 주셨습니다. 5절과 6절에 나오는데요, "만일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여기서 그들은 누굽니까? 두 증인입니다. "누구든지 두 증인을 해하고자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서 그들의 원수를 삼켜 버릴 것이요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반드시 그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불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영적인 권세를 의미하는 거예요. 영적 능력의 권세입니다.

5-1. 엘리야의 권세

그리고 6절입니다. "그들이 권능을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가 오지 못하게 하고." 누가 생각나요. 엘리야가 생각을 해야 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이만큼 공부하고 이 방금 읽었으면, 열왕기상 17장 1절입니다. "길르앗 디셉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엘리야는 하나님의 사람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지키는, 그야말로 증인이 아닙니까? 그는 등잔불 곁에 서서 말씀을 수호하고 지키는 사람이잖아요. 그러니까 그가 말하지 않으면 비도 내리지 않고 이슬도 내리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불의 권세도 주시고 비의 권세도 주신 거죠. 이건 그냥 허황한 소리다, 공중에 붕 뜬 소리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구약시대 때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이런 권세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5-2. 모세의 권세

그리고 다시 6절을 보시면 "또 권능을 가지고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누가 생각나요. 모세가 생각해야 됩니다. 모세가 물을 피로 변하게 하는 것, 나일강 물이 피로 변했잖아요.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이집트의 10가지 재앙이 일어났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 우리가 이 종말의 때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면 엘리야의 권능도 주시고 모세의 권능도 주신다는 뜻입니다. 불의 능력과 비의 능력을 우리 어떤 사람이든지 성도들에게 다 더하여 주신다는 뜻입니다.

두 감람나무가 증인이라 하였잖아요. 두 촛대가 교회라 하지 않습니까? 교회에도 하나님이 이런 권능과 능력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우리 교회는 약해요, 우리 교회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성도 수도 얼마 없어요, 우리 교회는 능력 있는 사람이 없어요. 그건 천만의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종말의 때에 복음을 전하기로 작정하고,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열심을 다해서 1260일 동안, 마흔두 달 동안 전하기만 하면,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입을 열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모세에게 주신 능력과 엘리야에게 주신 능력을 주신다니까요. 그걸 우리가 믿어야 됩니다. 그거 믿지 못하면 신앙생활 잘 못 하는 것 아닙니까? 그 능력이 오늘 우리에게도 나타나야 되고 교회에도 그 능력이 나타나야 됩니다.

어려운 상황 때문에 교회가 안 되고, 어려운 상황 때문에 교회가 문 닫고, 어려운 상황 때문에 자꾸만 교회가 핑계거리를 찾잖아요. 경제가 어려워서 교회도 어려워지고, 세상이 자꾸 이러니까 전도하는 것도 힘들어지고. 그렇게 핑계거리 찾다 보면 복음은 언제 전하겠습니까? 능력은 언제 나타내겠습니까?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지금 이 시기, 도미티아누스 황제 박해기 AD 81년부터 96년까지의 시기보다 지금 오늘이 어렵습니까? 그렇지 않잖아요. 지금 이 시기보다 우리가 감히 어렵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신앙생활 마음대로 하고, 예배 마음대로 드리고, 내가 원하는 바대로 자유롭게 다 살 수 있는데. 그런데 우리는 너무 핑계거리가 많습니다.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안 되고. 그런데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이런 놀라운 능력을 주신다 하였습니다. 그걸 사모하고 그 능력을 받도록 노력하고 애를 쓰고 발버둥 쳐야 됩니다. 그러면 개인에게도 주시고 교회에게도 이런 능력을 하나님이 반드시 허락해 주십니다.

6. 두 증인의 죽음

그런데 두 증인의 마지막은 어떻게 됩니까? 7절을 보겠습니다. "그들이 그 증언을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무저갱은 뭡니까? 이게 블랙홀이다, 공간적으로 어떤 것이다 그렇게 보지 말라 하였죠. 하나님께서 사탄 마귀를 가두어 두는 곳이다, 이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거기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라 하였습니다. 계시록에서 짐승은 우리가 꼭 기억해야 될 것이 국가권력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사탄이 권세를 준 국가권력, 사탄이 권세를 줘서 국가권력이 사탄의 권세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그 국가권력이 하는 짓이 사탄 마귀의 짓과 똑같은 거예요. 지금 이 당시는 로마 황제인 도미티아누스 황제를 짐승이라고 표현한 것 아닙니까? 이걸 만약 도미티아누스 황제다 라고 말했다면 계시록 편지 주고받다가 걸리면 다 잡혀 죽을 것이니까, 짐승이라고 유대 묵시문학적 전통으로 표현한 것이죠.

"두 증인이 증언을 마칠 때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국가권력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 터인즉." 누가 죽습니까? 두 증인이 죽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볼 때, 아니 불을 내리는 권세도 가지고 있고 비의 권세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왜 죽어? 왜 국가권력과 전쟁해서 왜 죽어? 그런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기억하셔야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잖아요. 창조주이시잖아요. 창조 때 함께 계셨죠.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무력하게 돌아가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마흔두 달 동안, 1260일 동안 수많은 순교자가 일어날 거예요.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동안 사람들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할 겁니다. 왜냐하면 회개를 선포해야 되니까, 굵은 베옷을 입고 예언해야 되니까. 그래서 우리는 직장에서도 미움 받을 수도 있고, 일가친지 친구들 가운데에서도 왕따 당할 수도 있고, 그런 수많은 고통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매장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걸 얘기하는 거죠.

6-1. 수치스러운 죽음

8절입니다.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죽었습니다. 시체가 큰 성으로 가는 길에 있습니다. 한번 상상해 보세요. 끔찍하지 않습니까?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 이 안 가는 게 있습니다. 소돔과 애굽은 그렇다 치세요. 소돔은 악한 곳이잖아요. 애굽은 죄가 관영한 곳이잖아요. 우리가 항상 영적으로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내가 구원받았는데 자꾸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한다고. 애굽의 고기 가마 곁에서 고기 구워 먹고, 부추 먹고, 맛있게 먹고 놀 때가 좋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꾸만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다고. 소돔과 애굽은 죄의 표본입니다. 죄악의 아이콘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신 곳은 어디입니까?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 언덕, 골고다 언덕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소돔과 애굽은 죄악의 도성이라면 예루살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 흘린 도성 아닙니까? 성전이 있는 곳이잖아요. 성전이 있는 곳이잖아요. 그런데 왜 소돔과 애굽과 예루살렘을 동일선상에 놓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건 너무나 당연한 거예요. 성전이 있으면 뭐합니까? 그 도시가 타락했는데. 성전이 있는 곳이면 의미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성전 안에 있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성전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자기 배만 부르게 하고 살고 있는데. 남유다가 망할 때 성전이 망했잖습니까. 성전을 하나님께서 불태워 버리시고 성전에 있는 모든 그릇들을 다 바벨론으로 떼어 가지 않습니까?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않고 허물어 버리지 않습니까? AD 70년에 티투스 장군이 예루살렘을 침략했을 때. 성전이 성전의 기능을 하지 못하면 그 성전은 곧 소돔이 되고 곧 이집트가 되는 것이죠.

말해서 뭐하겠습니까. 우리가 사무엘상 4장을 보면 홉니와 비느하스가 언약궤 끌고 가지고 전쟁한 거 아시잖아요. 홉니와 비느하스가 엘리의 두 아들인데, 이놈들은 예배를 멸시하는 인간들이었습니다. 예배를 멸시하니까 하나님 앞에서 죄가 크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전쟁하러 나갔습니다. 상대가 블레셋.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그때 그들이 생각한 것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셔 오면 전쟁에 이길 것이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언약궤는 빼앗기고 전쟁은 지고,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었던 엘리는 의자에서 넘어져서 목이 부러져서 죽었습니다. 가문이 다 한꺼번에 멸망당하고 나라는 쑥대밭이 됐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에게 의미가 있는 것이지, 하나님의 성 예루살렘, 하나님의 성전이 예배 잘 드리고 하나님의 백성에게만 의미 있는 것이지, 소돔 사는 사람처럼, 이집트 사는 사람들처럼 죄악 가운데 사는 사람들에게 예루살렘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그곳에서 피 흘리신 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교회 안에 있어도 우리가 신앙생활 한다 하고, 가방 들고 교회에 계속 다니고 그러면서도 정말 내가 거듭나지 않는 사람이 안 해도 얼마나 있겠습니까? 우리 중에도 탐욕스럽고 교회 안에 있으나 구원받지 못하고 거듭나지 못했다면, 너무 심각한 것 아닙니까?

등잔 밑이 어두운 데, 예루살렘 성 안에 있는데 나는 예루살렘 시민이라 하고, 성전 안에 있으면서 나는 제사장이라 했는데 구원받지 못했다면 그걸 나중에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그래서 복음은 교회 안에도 전파돼야 됩니다. 교회 안에도 복음이 들어가야 되고 교회 밖은 물론이고 우리 가족 중에도 살펴봐야 되고, 계속해서 눈여겨 봐야 됩니다. 복음이 전파되도록.

6-2. 장사되지 못한 시체

9절입니다.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보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시체가 길에 깔려 있습니다. 두 증인의 시체가. 아무도 장례 지내주지 않습니다. 사흘 반 동안 장례지내 주지 않는 시체, 이건 유대인들 관념에 의하면 수치요 부끄러움입니다. 유대인들은 날씨가 더우니까 돌아가시면 바로 장사지내고 끝냅니다. 그런데 사흘 반 동안 길에 그냥 팽개쳐져 있습니다. 썩고 냄새나고, 파리떼가 꼬이고, 엉망진창이죠. 새가 달려들고. 아무도 장례 지내주지 않습니다.

시편 79편 3절을 한번 보시면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피를 예루살렘 사방에 물같이 흘렸으나 그들을 매장하는 자가 없었나이다." 시편 기자는 이미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장례지내 주지 않는다는 건 수치거든요. 그런데 역설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 성의 의미. 죽었습니다. 1260일 동안, 마흔두 달 동안 열심히 복음 전하는 사람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 시체를 거두어 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럼 그 성은 어떤 성입니까? 의인 한 사람도 없는 성입니다.

예수님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었잖아요. 의미입니다. 그는 오히려 자기가 하나님의 백성임을 온 천하에 드러냈잖아요.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임을. 그런데 이 성에는 예수님을 장사 지내준 아리마대 사람 요셉 같은 사람도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성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연히 멸절 당하죠. 두 증인이 그렇게 열심히 복음을 전했는데도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7. 성공과 실패의 기준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또 한 가지 생각해 봐야 될 게, 두 증인은 실패한 사역자입니까? 성공한 사역자입니까? 실패했습니까? 성공했습니까? 성공과 실패의 기준을 어떻게 잡습니까? 이 사람은 열심히 복음 전하다가, 속된 말로 말하면 믿지 않는 사람들 말에 의하면 개죽음 당한 거예요. 그냥 아무도 장례지내 주지 않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손가락질 할 거 아닙니까.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아무도 그 시신을 치워주지도 않느냐고.

예레미야를 보세요. 예레미야가 얼마나 열심히 복음 전하고 얼마나 열심히 전도하고 얼마나 열심히 살았겠습니까. 그런데 예레미야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는 목에 칼을 걸고 매맞고, 뺨맞고, 수렁에, 진창에 빠지는, 그 수모와 모욕을 당했거든요. 예레미야가 실패한 선지자입니까, 성공한 선지자입니까? 실패와 성공의 기준이 뭡니까? 성도 많이 모이고, 교회 큰 교회 짓고, 헌금 많이 벗고, 그걸 성공과 실패 기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 인생에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복 주셨다고 말하고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차 타고, 돈 많이 벌고, 헌금 많이 하고, 이걸 성공과 실패의 기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자녀 좋은 직장 취직하고, 좋은 대학 가고, 그건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성공과 실패의 기준은 세상 사람들이 보는 성공과 실패의 기준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됩니다.

두 증인의 모습을 보며 우리가 이런 악한 종말의 시기를 살아가는 데, 과연 나는 하나님 보시기에 성공한 인생을 살고 있는가, 하나님 보실 때 정말 실패한 인생을 살고 있는가. 하나님 앞에 우리가 성공한 인생이 되셔야 됩니다. 사람들은 손가락질하고, 사람들은 너 실패했다 말할지 몰라도, 하나님께서 아니야, 너 성공한 인생이야 말하면 그게 성공한 인생이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되셔야 됩니다. 그런 교회가 돼야 됩니다.

7-1. 두 선지자를 괴롭게 여긴 자들

10절입니다. "이 두 선지자가 땅에 사는 자들을 괴롭게 하므로." 무슨 말일까요. 땅에 사는 자들이 뭡니까? 상징적인 의미죠. 아무리 외쳐도 듣지 않는 자들. 1260일 동안 기회를 줘가지고 열심히 복음 전하고, 열심히 외치고, 마흔두 달 동안 열심히 전도했는데 돌아오지 않는 자들. 그들이 왜 괴롭습니까? 굵은 베옷을 입고 전했으니까. 회개하라 하였으니까. 듣기 싫잖아요. 그 듣기 싫은 소리를 계속 전했잖아요.

그런데 죽었습니다. "이제 땅에 사는 자들이 그들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죽었으니까, 이제 나를 더 이상 괴롭게 할 자 없으니까, 더 이상 나를 귀찮게 할 사람이 없으니까, 자기들끼리 기뻐하고 예물 주고받고 하는 거예요.

8. 두 증인의 부활

그런데요, 이제 반전이 일어납니다. 아주 극적인 반전이 일어납니다. 수치는 잠깐입니다. 고난은 잠깐입니다. 영광은 영원합니다. 그다음 볼까요. 두 증인이 죽임 당하고 사흘 반이 지난 후에는 어떻게 됩니까? 시체가 사흘 반 동안 아무도 장례지내 주지 않았다 하였습니다. 땅바닥에 그냥 있습니다. 두 증인이 복음 전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11절입니다. "삼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매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뭐가 생각나요. 에스겔이 생각을 해야 됩니다. 에스겔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성경공부 지금까지 많이 한 것 이것 때문에 그런 거예요. 계시록을 보면 아 내 실력이 어느 정도 되는가 가늠할 수 있습니다.

에스겔 37장 9절과 10절입니다.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죽었던 마른 뼈가 생기가 들어가서 살아나서 큰 군대가 된 거예요.

구약의 에스겔에 있는 얘기잖아요. 에스겔 선지자가 환상 중에 마른 뼈 골짜기에서 본 환상을 그렇게 그대로 기록했고, 이게 지금 두 증인에게도 그대로 일어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결국은 무력해 보이는 죽음을 당했으나 두 증인의 마지막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다시 부활하는 거잖아요. 이건 성도의 영광된 부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8-1. 최후 승리의 약속

종말의 때 두려워하지 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핍박받는 거 겁내지 마라. 열심히 복음 전하고 믿음 생활하고, 너 하나님 앞에서 사는 존재로 살아가라. 1260일 동안, 마흔두 달 동안 그렇게 살아가면 결국 궁극적 승리, 최후 승리는 너의 것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에게 선언하시는 거죠.

이 말씀을 받은 그 당시 도미티아누스 황제 핍박 가운데 사는 사람들도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렇구나, 우리가 지금 당하는 고난은 끝이 있는데, 무력하게 죽음 당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마지막에 나 최후 승리는 하나님의 생기가 나에게 들어와서 부활의 영광의 날을 세워 주시겠구나. 그런 소망을 가지지 않았겠습니까?

기뻐하고 예물 주고받던 자들이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아주 극적인 반전입니다. 12절입니다.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그들이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예수님과 똑같은 거예요.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하였죠. 예수님이 첫 번째 열매가 되면 우리는 몇 번째 열매쯤 될까요. 어쨌든 숫자는 셀 수 없지만 우리는 그다음 그다음 그다음 열매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구름 타고 승천하셨잖아요. 하늘 보좌 우편에서 하나님과 함께 통치하고 다스리고 계시지 않습니까. 지금 이 두 증인들, 예수 그리스도처럼 사람들이 볼 때는 아주 비참한 죽음을 당했지만,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가서 구름 타고 위로 올라가는 거예요. 영광이잖아요.

"그들의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그때 큰 지진이 나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 지진이 났습니다. 성이 무너지고 사람이 죽기 시작합니다. 이제 뭐가 있다는 얘기입니까? 곧 마지막 일곱 번째 나팔 심판이 도래했다, 임박했다, 이런 뜻이죠.

9. 일곱 번째 나팔

계시록은 보면 볼수록 은혜의 책입니다. 심판이 있는데 그 심판을 지연시키시는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사랑이 도처에 계속해서 나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제 일곱 번째 나팔이 불기 전에 14절을 보세요. "둘째 화는 지나갔으니 보라 셋째 화가 속히 이르는도다."

이게 둘째 화는 뭐고 셋째 화는 뭔가 기억나십니까? 8장 13절이 기억나셔야 됩니다. 8장 13절 보십시오. "내가 또 보고 들으니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큰 소리로 이르되 땅에 사는 자들에게 화, 화, 화가 있으리니." 화가 몇 번 반복되어 있습니까? 세 번. 8장 13절에서 화가 세 번 반복돼 있는데, 그때 이미 이전에 나팔이 몇 개까지 불렸습니까? 네 개까지 불렸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독수리가 날아가면서 화, 화, 화가 있을 거라 하였습니다. 화를 세 번 얘기했죠. 그 세 번은 다섯 번째 나팔, 여섯 번째 나팔, 일곱 번째 나팔을 얘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마지막 일곱 번째가 불기 전에 "둘째 화는 지나갔으니 보라 셋째 화가 속히 이르는도다" 하였습니다. 그건 둘째 화인 여섯 번째 나팔이 끝났다는 얘기죠. 이미 이전에. 그리고 이제 셋째 화, 일곱 번째 나팔이 도래했습니다. 9장 12절에 "첫째 화는 지나갔으나 보라 아직도 이후에 화 둘이 이르리로다" 이렇게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9-1. 천국의 도래

이제 일곱 번째 나팔을 볼게요. 드디어 우리가 기다리던 일곱 번째 나팔입니다. 천사가 나팔을 불고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런데 일곱 번째 나팔을 보면요, 아주 복음적입니다. 아주 무시무시하지도 않습니다. 볼까요.

15절입니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이제 천국이 도래한다는 얘기입니다. 천국이 도래하기 전에 심판이 분명히 있겠죠. 천국이 도래한다는 선언을 했습니다.

이제 이렇게 되니까 두 가지가 홍해가 갈라지듯이 쫙 갈라집니다. 일곱 번째 심판이 딱 있으면, 우리가 생각할 때는 일곱 번째 심판에 하늘에서 나는 음성이 있으면, 지금까지 두 증인이 구름 타고 올라가는 것도 봤잖아요. 안 믿는 사람들이 그러면 하나님 앞에 딱 엎드려서 모든 사람이 다 잘못했습니다 회개하고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믿는 사람도 있고 안 믿는 사람도 생겼습니다.

9-2. 이십사 장로의 경배

16절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보좌에 앉아 있던 이십사 장로가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감사하옵나니 예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 천상에는 예배가 있었습니다. 천상에는 이제 일곱 번째 마지막 나팔을 보니까 천상에는 이십사 장로들이 예배드리는 장면입니다.

9-3. 이방들의 분노

그런데 18절 보세요. "이방들이 분노함에." 왜 분노할까요. 왜? 이건 정말 아이러니잖아요. 이방들이 분노하면 안 되죠. 이제 두 증인이 구름 타고, 죽었던 두 증인이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나서 부활해서 구름 타고 올라가는 것도 봤고, 마지막 일곱 번째 나팔이 불려지면 그들이 회개해야 되는데, 사탄에게 발목 잡힌 인간들은 절대로 회개하지 않는 거예요. 이게 굉장히 무서운 것입니다.

창세기 우리가 주일 설교 할 때 계속 듣잖아요. 가인이 하나님이 찾아온 것도 돌이키지 않고, 하나님이 몇 번 기회를 줘도 돌아오지 않잖아요. 우린 그걸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근데 진짜 그래요.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잖아요. 근데 그 말씀에 보면 참 아이러니한 것, 유대인들이 이날부터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하였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돌문을 굴려 놓으니까 거기서 나사로야 나오라 하면 나오는데, 그 죽은 자가 살아나는 걸 보면 사람들이 다 믿을 것 같은데, 그런데 안 믿어요. 지금 천상에서 이런 소리가 나도 이방들이 분노한다니까요. 너무 이상하잖아요. 사탄에 발목 잡힌 인생들이 이런 인생들입니다.

"주의 진노가 내려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작은 자든지 큰 자든지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하더라." 말은 잘합니다. 이때가 지금 멸망시키실 때입니다. 이건 다 알고 있어요. 그런데 돌이키지 않습니다.

9-4. 언약궤가 보이다

19절 보십시오.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언약궤는 원래 어디에 있습니까? 성소와 지성소 가운데 지성소에 있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면서 성소와 지성소의 휘장이 찢어지기 전까지 가장 은밀하다는 곳에 대제사장만 1년에 딱 한 번만 들어갈 수 있는 그곳에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또 번개와 음성들과 우레와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하나님의 말씀은 위험한 거예요. 위험한 거 아니냐. 믿는 자들에게는 복이 되는데요,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위험한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축복도 있고 심판도 있잖아요. 그렇잖아요.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은밀한 곳에 숨겨져 있었던 이유가 뭡니까? 대제사장이 죄 짓고 그 안에 들어가면 죽어 나오는 이유가 뭡니까? 말씀 앞에서 성결해야 되기 때문이거든요. 하나님 말씀이, 하나님 말씀을 붙들고 회개한 자는 살아나는데 그렇지 않은 자는 심판의 오종세트를 당하는 거죠. 다섯 가지가 나오잖아요. 번개, 음성, 우레, 지진, 큰 우박. 이걸로 이제 일곱 번째 나팔의 심판이 끝나는 것입니다.

10. 복음에는 중립이 없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기억해야 될 것, 복음은 중립 지대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 전할 때요, 마치 홍해가 갈라지는 것처럼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딱 갈라져 나왔습니다.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는 복음은 가짜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면 믿는 자가 있고 믿지 않는 자가 있습니다. 그건 이상한 게 아닙니다.

이 종말의 때 다 보여주고, 다 들려주고, 죽은 자가 살아나고, 부활하고, 구름 타고 올라가는 것까지 봐도 믿지 않는 자들이 이렇게 생기는 것 보십시오. 그래서 우리가 복음을 전하면서 낙심하지 말아야 됩니다. 내가 복음 전하면 다 돌아올 것이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돌아오는 사람도 있고, 안 믿는 사람도 있고, 나를 욕하고 핍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려니 해야 됩니다. 원래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 사도 바울도 그랬으니까.

사도행전 17장 4절과 5절을 보시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중에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며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데살로니가에서 있었던 일이거든요.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할 때 적지 않은 사람이 믿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불량배를 동원해서 바울을 잡아서 죽이려고 이런 짓을 했다니까요. 바울이 가는 곳마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항상 이분법적입니다. 흑과 백이 나뉘어집니다. 복음 안에는 회색 지대는 결단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기억하시고, 이제 다음 주부터는 계시록의 후반전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마음에 깊이 새깁니다. 두려운 말씀, 무서운 말씀이 아니라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시고 인내하시고, 지금도 길이 참으시고 돌보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을 기억합니다.

주여, 오늘 우리에게 주신 이 말씀을 기억하게 하시고, 우리가 두 증인 된 자로서 종말의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열심히 복음 전하는 자로 살아가게끔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그 일은 고된 일입니다. 그 일은 환영받지 못하는 일입니다. 때로는 핍박받고, 때로는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매장을 당한다 하더라도 끊임없이 복음 전하는 성도와 교회가 되도록 도우시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의 복음의 사수, 파수꾼이 되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최후 승리 주신다고 말씀하셨사오니 그 최후 승리를 기대하고 소망하며, 오늘도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믿음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두 증인에게는 권세를 주신다 하셨습니다. 비의 권세와 불의 권세 주시고, 엘리야와 모세에게 주셨던 권세도 주신다 말씀하셨사오니, 우리가 그 권세를 사모하며 나아가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