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강 - 여자와 용 / 전체녹취

요한계시록 특강 9 - 여자와 용(12장)

본문: 요한계시록 12장 5절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오늘은 요한계시록 12장을 공부하는 시간입니다. 이제 요한계시록이 절반을 넘어서 후반전으로 들어가고 있는데, 오늘 이 12장 말씀은 굉장히 중요한 말씀들이 내포되어 있으므로 아주 주의 깊게 읽어야 할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이 종말의 때를 살아가는 우리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비전과 은총이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1. 하늘에 나타난 여자

도대체 여자는 누구이며 용은 누구입니까? 용은 우리가 많이 들어보았습니다. 용은 사탄을 말하는 것이고, 사탄이 권세를 주어 사탄의 권세를 받은 존재를 짐승이라 했으며, 짐승은 국가 권력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자는 계시록에 지금 처음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이 여자를 우리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 오늘 1절부터 나옵니다.

1-1. 해와 달과 별

1절 말씀입니다.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옷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에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관을 썼더라." 상상이 되십니까? 이런 여자를 본 적이 있으십니까?

해를 옷 입었습니다. 여기서 해라고 하는 것은 하늘의 태양입니다. 태양을 어떻게 옷으로 입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달이 그 발 아래에 있고 열두 별의 관을 쓰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런 여자는 우리가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 보니까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인다"고 했습니다. 이 이적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냐 하면, 우리는 이적을 어떤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 병든 자가 일어나는 것, 앞을 못 보는 자가 앞을 보는 것, 그런 것들을 이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 말하는 이적은 '표시', '사인(sign)' 이런 뜻입니다. 하늘에 한 표시가 나타났는데, 그 여자가 해와 달과 별을 동시에 지니고 나타났습니다.

제가 늘 반복해서 말씀드리는 것인데, 요한계시록의 말씀은 구약에 있는 말씀이 그대로 옮겨져서 종합적으로 집대성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구약에서 해와 달과 별이 한꺼번에 나오는 장면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본 적이 있습니다. 요셉 이야기에서 우리는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창세기 37장 9절입니다.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의 형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자기에게 절했습니다. 우리는 요셉 이야기를 잘 알고 있는데, 요셉의 부모와 요셉의 형들이 자기에게 절하는 것을 지금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요셉은 자기 가족들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가족들이 나중에 자신에게 무릎을 꿇고 자기를 존귀하게 여기며 절하게 되는 사건을 이미 예지적으로 하나님께서 꿈을 통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이 여자가 해와 달과 별의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요셉은 열한 별을 보았습니다. 자기가 빠져 있으니까요. 그런데 여기 지금 이 별은 열두 별의 관을 쓰고 있었습니다. 12라는 수는 계시록에서 완전수라고 했습니다. 12는 하늘의 수와 땅의 수의 곱입니다. 하늘과 땅, 3과 4의 곱이니까 엄청나게 많은 수를 말한다고 했습니다. 14만 4천도 12 곱하기 12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열두 별의 관을 썼다는 것은 요셉의 가족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수를 일단 의미하는 것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동시에 해와 달과 별이 또 한 번 성경에서 한꺼번에 나오는 자리가 있습니다. 언제 나옵니까? 창조 시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해와 달과 별, 일월성신을 같은 날 창조하셨습니다. 몇째 날 창조하셨습니까? 넷째 날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천지창조 순서에 의하면 해와 달과 별을 하나님이 한꺼번에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창조하신 내용을 보면 우리는 한 가지 궁금한 것을 가져야 하는데, 첫날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빛입니다. 빛은 무엇이고 해와 달과 별은 무엇입니까?

빛과 해와 달과 별이 분리되어 따로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같은 것이라면 굳이 하나님이 하루라는 시간을 아깝게 왜 빛과 해와 달과 별을 따로 창조하셨을까요? 사실 이에 대해서는 우리가 창조 시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해석이나 주석은 있을지언정 명확하게 할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첫째 날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빛과 해와 달과 별이 다르다는 것은 이해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해와 달과 별은 빛을 비추는 발광체일 뿐이지 빛 자체가 될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빛은 누구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빛이 되시고 예수님은 빛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많은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해를 섬기고 달을 섬기고 별을 섬깁니다. 왜냐하면 빛이니까요. 그런데 우리는 해와 달과 별을 섬기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빛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해와 달과 별은 영광의 본체는 아니나 영광을 받아서 비추는 발광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1-2. 여자의 정체

제가 이 말씀을 왜 드리느냐 하면, 지금 여기 한 여자가 해를 옷 입고 그 발 아래는 달이 있고 열두 별의 관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여자는 굉장한 여자입니다. 발광체를 한꺼번에 다 몸에 지니고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존귀와 영광을 홀로 받을 분입니까? 그렇지 않은 사람입니까?

영광을 받을 분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영광 그 자체는 아니나 영광을 표현하고 영광을 비추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 땅에서 영광 그 자체는 아니지만 영광을 받아서 비추는 반사체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는 공동체가 어디입니까? 교회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지금 12장 1절에서 말하는 이 여자는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숭배의 대상도 아니고, 교회는 영광 그 자체, 빛 자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마치 해와 달과 별처럼 영광 그 자체이신, 빛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고 빛 대신 주님을 드러내는 공간이지, 우리는 그 성도들이지, 교회 자체가 영광인 것은 아닙니다. 이것을 우리가 잘 기억하고 분별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이 교회는 엄청나게 많은 숫자라고 했습니다. 12 곱하기 12 곱하기 천이라고 할 때 앞의 12는 구약의 교회 성도들, 뒤의 12는 신약의 교회 성도들이라고 했으니까, 열두 별의 관을 썼으니까 지금 이 교회가 얼마나 많은 성도들을 포함하고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 여자는 하나의 교회인 동시에 또한 엄청나게 많은 교회의 성도들, 그리고 교회의 숫자를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1-3. 아이를 낳는 여자

그런데 이 여자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2절에 보니까 이 여자가, 즉 교회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됨에 아파서 애를 쓰며 부르짖습니다. 저는 남자이니까 아이를 낳아본 적이 없지만, 아이를 낳는 것이 그렇게 힘들다고 합니다. 부르짖고 고통스러울 만큼 힘듭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낳은 아이가 누구입니까? 5절에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했습니다. 누구입니까? 철장, 쇠로 만든 회초리입니다. 쇠로 만든 회초리로 만국을 통치하고 다스릴 남자,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면 지금 여기 이 여자라는 이 여자의 정체성이 보다 더 분명해졌는데, 구약의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교회가 해산하는 고통을 가지고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낳기까지 애쓰고 힘쓴 것입니다. 구약의 수많은 선지자들, 죽어간 수많은 선지자들, 예레미야 같은 분들, 이사야 같은 분들, 핍박받고 찢기고 고문당하고 그렇게 죽어갔던 수많은 제사장들, 예언자들, 이런 구약의 수많은 성도들이 부르짖고 해산하는 고통, 애통하는 고통을 겪으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낳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서 오실 메시아를 구약의 성도들에게 예언하게 하셨습니다.

교회가 아들을 낳았는데,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입니다. 이것은 시편에도 그대로 예고되어 있습니다. 시편 2장 7절을 보시면,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합니다. 시편 2편 9절에 보면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리며 질그릇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합니다. 쇠로 만든 지팡이로, 막대기로 모든 세상의 죄악된 권세를 그리스도께서 다 박살 내시는 것입니다. 악의 권세들을 다 부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면 그렇게 하십니다.

그런데 다시 5절 보시면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고난받고 십자가 지시고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셔서 승천하셨습니다. 이것을 지금 5절 말씀이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1-4. 광야로 피하는 교회

여자는 교회를 말하고,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구약의 교회를 말하고, 교회는 영광의 본질 그 자체는 아니나 영광의 빛인 본체를 받아서 비추는 발광체의 역할을 감당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낳았고, 이 예수 그리스도는 영광 중에 하나님 보좌 위로 올림 받으셨습니다.

이제는 이 아들이 다시 또 다른 이름으로 표현됩니다. 6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그 여자가" — 그 여자는 누구입니까? 교회 아닙니까? 구약의 교회는 신약의 교회로 계승됩니다 — "광야로 도망함에" 광야로 도망갔습니다. 왜 도망갔을까요? 이제 아들은 승천했는데 여자는 왜 도망갔을까요? 아들은 승천했는데, 이제는 핍박이 있으니까 도망가는 것입니다.

광야가 가지는 의미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크게 보면 두 가지 정도인데요. 광야의 첫 번째 의미는 삭막함입니다. 훈련입니다. 고난이 있습니다. 광야에 가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광야는 정말 삭막하고 아무것도 없는 곳입니다. 나와 하나님만 계신 곳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훈련시키기 위해서는 광야를 훈련의 장소로 사용하십니다.

두 번째 의미는 동시에 광야는 가장 안전한 곳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가장 안전한 곳이 광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회를 광야로 피신시키시는 것입니다. 안전하면서 동시에 그곳에서 훈련시키기 가장 좋은 곳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40년 동안 광야에서 훈련시키셨습니다. 40년 동안 하나님이 훈련시키시면서 딱 한 가지만 하나님이 요구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40년 동안 매일 주셨습니다. 매일 주시는 하나님도 고달프시고 받아먹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피곤했을 것입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자주 드렸는데, 하나님도 피곤하시고 받는 사람도 고달픈데 그냥 하나님이 알약 하나 먹이시면 40년 동안 화장실도 안 가도 되고, 귀찮게 주지도 않아도 되고, 거두러 나가지도 않아도 되는데, 그렇게 하시면 됐을 텐데 왜 하나님은 매일 그렇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광야에서 주셔야만 했을까요? 그것은 하늘을 바라보게끔 하기 위함입니다.

먹고사는 문제는 하늘에 달린 것이지 땅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땅을 파고 농사짓고 내가 땀 흘리고 수고하고 내 능력으로 경작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내가 너희에게 먹을 것을 줘야 너희는 먹고 살 수 있다는 것을 하나님이 40년 동안 가르치고 훈련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늘을 봐야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가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40년 동안 훈련시켰는데, 그 훈련이 이제는 몸에 익고 배길 만한데,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어떻게 합니까? 농사짓고 땅을 보고 살면서 한 번에 다 사라져 버립니다. 바알과 아세라에게 무릎 꿇고, 그들에게 무릎 꿇으면 그 신이 잘 먹고 잘 살게끔 해준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그렇게 타락해버립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훈련도 시키시고 안전하게 거하게 하기 위해서 교회를 광야로 피신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얼마 동안 있습니까? 1,260일 동안 있는다고 했습니다. 1,260일.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습니다. 1,260을 30으로 나누면 42가 나옵니다. 42개월입니다. 다니엘서에 의하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한 때는 1년, 두 때는 2년, 반 때는 반 년이니 3년 6개월입니다. 숫자적으로 한 때, 두 때, 반 때, 3년 6개월이 도대체 무슨 의미입니까? 1,260일, 42개월이 얼마간의 기간입니까? 이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고난에는 끝이 있다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고난에는 끝이 있습니다. 교회가 광야에서 훈련받는 그 기간은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조금 더 폭넓게 이야기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초림과 나중에 예수님이 재림하실 그 사이에 있는 교회의 기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십니까? 예수님께서 초림하셨습니다. 2천 년 전에. 장차 재림하실 것입니다.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지만, 그 기간이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1,260일, 42개월, 한 때 두 때 반 때라는 것은 반드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날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기간 동안은 우리가 광야 생활을 걷고 광야 기간을 훈련받는 기간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은 광야 같은 인생입니다. 광야 같은 인생에서 성도가 쌓아놓고 살 수 있습니까? 짐을 가볍게 하고 살아야 합니다. 성도의 정체성은 나그네입니다. 언제 떠나도 미련 남지 않도록 나그네 인생을 사는 것이 성도입니다. 그런데 롯의 아내는 무엇이 그렇게 소돔과 고모라에 쌓아둔 것이 많아서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습니까? 항상 우리는 나그네 인생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고 사셔야 합니다.

광야 인생길을 살기 때문에 광야는 집 짓고 살 수 없습니다. 항상 천막 치고 살다가 구름 기둥이 가면 따라가야 되고, 멈추면 또 멈춰야 되고, 오고 가는 것이 내 의지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끌고 다니시면 그냥 끌려가는 것이 광야 인생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지금 광야로 교회를 데리고 나가셨다는 말씀입니다.

1-5. 교회의 정체성

그다음 보십시오. 6절 "1,260일 동안 그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우리가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될 사실이 있습니다. 여기서 '그'는 누구입니까? 아들이라고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하면 예수님은 5절에서 어떻게 되셨습니까?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이미 올라가 버리셨습니다. 승천하셨습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그런데 지금 다시 6절에 보니까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면 거기서 1,260일 동안 그를 양육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여기 '그'는 누구입니까? 성경에서 이것을 우리가 명확하게 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누구지? 도대체 누구더라 이렇게 됩니다. 바로 성도입니다. 교회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그때까지 성도들을 광야에서 양육합니다. 양육의 의미는 뒤에 가면 나오지만 맞춤형 교육입니다.

그러면 교회의 정체성이 무엇입니까? 지금 이 말씀에 의하면 교회의 정체성은 교회가 광야에 있다는 것입니다. 광야교회가 진짜 정체성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땅의 교회는 광야 정체성이 하나도 없습니다. 될 수 있는 대로 크게 짓고,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짓고, 될 수 있는 대로 멋지게 지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될 수 있는 대로 거기에 뿌리를 박고 절대로 움직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광야 정체성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도 가벼워야 합니다. 교회도 천막처럼 접었다 폈다가 아주 기동성이 있어야 합니다. 옛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 성막이 다 천막이었습니다. 정말 보잘것없었습니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전이 언제부터 타락했습니까? 솔로몬 성전부터 타락하지 않았습니까? 너무 멋지게 지어 놓으니까요. 그래서 교회의 정체성은 광야에 있다는 것, 그리고 교회의 정체성은 성도를 양육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2. 하늘에 나타난 용

2-1. 용의 모습

3절입니다.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 아까 1절에 보니까 하늘에 이적이 보였다고 했습니다. 이적이 무엇이라 했습니까? 사인, 표시라 했습니다. 지금 여기 하늘에 또 다른 사인이 있다고 했습니다. 아까 첫 번째 사인, 표시는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교회였습니다. 지금 3절에 또 다른 사인, 표시가 있는데,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계시록에 나오는 용은 무엇입니까? 사탄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동양문화권에서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동양문화권에서 용은 길하고 상서롭고 아주 좋은 의미인데, 여기 지금 유대 묵시문학 전통에서 용은 사탄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 용은 사탄을 의미하는 유대 묵시문학 전통의 상징 체계입니다.

그러면 두 사인이 있었습니다. 두 표시가 있습니다. 하나의 표시는 교회가 있고, 하나의 또 다른 표시는 용이 있고, 그 용은 사탄입니다. 교회와 사탄의 전투와 싸움을 지금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 12장 이야기는 그것입니다.

그런데 용을 보십시오. 용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왕관이 있는데" 일곱이라는 숫자가 거슬립니다. 왜 거슬립니까? 7이 완전수이니까요. 그런데 어떻게 사탄이 완전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불편합니다. 또 뿔은 무엇입니까? 뿔은 존귀와 영광과 권세를 의미합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이 그림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용이 있는데, 우리가 아는 용은 머리가 한 개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용이 머리가 몇 개 있습니까? 머리가 일곱입니다. 그런데 뿔이 열이라 했습니다. 그러면 머리 하나마다 각각 뿔이 다 10개씩 달려 있는지, 아니면 머리 일곱에 다 통틀어서 뿔이 열 개가 달려 있는지 그것은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어쨌든 지금 우리가 거슬리는 것은 이 숫자입니다. 7이라는 숫자. 그리고 뿔이라는 것. 권세와 영광과 존귀를 의미하는 것.

그런데 거슬릴 필요가 하나도 없습니다. 왜 하나도 없느냐 하면, 사탄도 하나님인 척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도 완전해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감쪽같이 속일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앉아 있는 것이 사탄인데 이것을 우리가 왜 불편하게 생각합니까? 사탄이 얼마나 사람을 잘 미혹하는데요. 사탄이 감쪽같이 사람을 속입니다. 사탄도 하나님과 비슷한 흉내를 다 냅니다.

사탄도 병 고치는 능력을 보여주고, 사탄도 방언도 주고, 사탄도 예언하는 능력도 주고, 사람도 살립니다. 무당들 하는 것을 보십시오. 무당들이 다 합니다. 다. 그들이 못하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다 합니다. 옛날에 이집트의 마술사들도 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집트 바로에게 가서 네 지팡이를 던져라 뱀이 될 것이다, 그것을 잡아라 그러면 다시 지팡이가 될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했습니다. 했더니 이집트 마술사들도 다 똑같이 하더라는 것입니다. 당황했을 것입니다. 아마.

출애굽기 7장 10-11절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행하여 아론이 바로와 그의 신하 앞에 지팡이를 던지니 뱀이 된지라 바로도 현인들과 마술사들을 부름에 그 애굽 요술사들도 그들의 요술로 그와 같이 행하되" '그와 같이 행했다'고 했습니다. 사탄도 하나님과 비슷한 흉내를 다 냅니다. 다 합니다. 그러니까 사탄이 지금 하나님 자리에 올라앉아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2-2. 재물의 권세

대표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날 하나님 자리에 똑같이 올라앉아 있는 것이 돈입니다. 돈, 물질입니다. 그것은 예수님 시대 때도 그랬습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을 보십시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두 주인이라 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두 주인이 누구와 누구입니까? 하나님과 재물입니다. 뒤에 가면 나옵니다.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하나님과 재물. 그러면 재물이 이놈이 얼마나 높아져 있습니까? 어디까지? 하나님 자리까지 올라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재물의 권세를 지금 절감하고 삽니다. 돈이 얼마나 위대한지, 이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것이 있습니까? 다 됩니다.

무당들이 하는 것처럼, 돈은 모든 술수를 다 부리고, 우리 모든 마음까지 다 빼앗고, 형제간 사이도 다 멀어지게 만들고, 돈은 우리 건강까지 다 빼앗아가고, 돈이 못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단, 돈이 못하는 것. 딱 한 가지.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줄 수 없을 뿐, 돈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줄 수 있는 하나님 자리에까지 올라가 있습니다. 사탄이 하나님인 척하는 것의 대표적인 것이 돈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재물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되는데, 하나님을 이용해서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성도들의 문제입니다. 사실 우리가 신앙의 변질이라는 것이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잘 믿는 척하는데 돈 벌기 위해서 믿음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기도할 때도 "하나님 돈 좀 벌게 해주세요." 하나님이 디딤돌이 됩니다. 하나님이 자꾸만 돈 벌려고 하는 하나의 건너가야 할 과정이 되어버립니다.

하나님이 목적이 아니고,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해서 물질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하는데,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해서 이 물질을 내가 마음대로 쓰고 내가 마음대로 부릴 수 있어야 하는데, 오히려 돈의 노예가 되어서 하나님을 부리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옛날 용이 일곱 왕관을 쓰고, 머리에 뿔 열 개를 달고, 일곱 머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이것이 왜 이상합니까? 지금도 그런데 하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붉은 용의 모습이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2-3. 용의 공격

그 용이 어떤 짓을 하는지 한번 보십시오. 무서운 일을 합니다. 4절. "그 꼬리가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하늘의 별이 누구입니까? 성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별과 같은 성도입니다. 아름다운 별과 같은 성도입니다.

하늘의 별과 같은 성도. 아까 해, 달, 별 이야기했습니다. 해와 달과 별. 여자가 해, 달, 별의 권세를 가졌다 했습니다. 그러면 여자는 교회입니다. 교회가 빛을 비추는 발광체 역할을 한다 했습니다. 그런데 하늘 별의 3분의 1이 이 사탄의 권세에 속아 가지고, 하나님처럼 하나님 노릇 하고 있는 거짓부리고 있는 사탄에게 속아가지고, 돈의 권세에 속아서 이리저리 끌려다니다 보면, 그 용이 결국 하늘의 권세를 가진 그 용이 성도들의 3분의 1을 땅에 내쳐버립니다. 교인들 중에 3분의 1이 이렇게 그냥 한순간에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무섭지 않으십니까?

그다음 보십시오. 그다음 용이 어떤 짓을 하는지. "용이 즉 사탄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입을 딱 벌리고 서 있습니다. 용이 머리가 일곱 달린 용입니다. 교회가 성도를 믿음으로 낳으려고 하면, 그 믿음으로 낳은 교회 성도를 삼키려고 그 앞에서 입을 쫙 벌리고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입니까.

그래서 교회가 이 세상의 사탄과 싸워 이길 수 있는 능력을 교회가 가지고 있어야 되고, 우리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도의 3분의 1이 하늘의 별이었다가 한순간에 땅에 그냥 내동댕이쳐집니다. 우리 자녀가. 나 자신이.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이 다 이런 지경이 되면 그 슬픔을 우리가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 옛날 헤롯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짓을 한번 보십시오. 마태복음 2장 16절을 보면,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헤롯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이 두 살 아래의 영아 살해 명령을 내렸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이렇게 발버둥쳤던 사탄이 오늘도 교회 안의 믿음의 성도들을 삼키기 위해서, 믿음 있는 성도들을 떨어뜨리기 위해서 애쓰고 힘쓰고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자기가 하나님인 것처럼 모든 권세를 다 줄 것처럼 그러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분별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분별이 필요하고, 나는 과연 정말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는 믿음의 자녀인가? 나 자신의 믿음도 계속해서 돌이키고 또 돌이키고 살펴보셔야 합니다.

2-4. 천상의 전투

이제 하늘에서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7-8절을 보겠습니다.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 미가엘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천사 대장입니다. 천사장 미가엘이 — "용과 더불어 싸울새" 용이 사탄입니다. 하나님의 천사장과 용이 싸웠습니다. 천상의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그들이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이미 이겨두신 싸움이라는 뜻입니다. 갑자기 지금 교회와 용의 싸움을 이야기하다가 천상에서 미가엘과 용의 싸움을 왜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교회들이여! 믿음 생활하는 성도들이여! 두려워하지 말라. 겁내지 말라. 이미 이 싸움은 이겨두신 싸움이다.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 성도들이여!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가운데 있는 너희들이여! 이 계시록의 편지를 받는 교회 성도들이여! 겁내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 이미 이 싸움은 승리한 싸움이다. 이겨두신 싸움인데 너희들은 왜 겁내고 왜 두려워하느냐? 담대해라. 믿음 가지고 전진하고 믿음 가지고 나아가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 이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싸워볼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에이 뭐 그냥 세상이 다 그런데 뭐. 그냥 세상이 그런 거지. 뭐 돈이 최고고, 대충 속이고 대충 속아주고, 대충 그냥 어울려서 이렇게 저렇게 뒹굴다 살면 한순간 그냥 끝나는 거고, 그냥 믿는 자에게 구원 주신다 했으니까 그렇게 살다 가면 되지." 이런 패배주의적인 자세가 교회를 더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교회와 용과의 싸움에서 지는 이유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이길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나가야 합니다. 방법이나 과정이나 절차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신실하게 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쪽에 발 두고 저쪽에 발 두고, 이미 이겨두신 싸움인데 왜 그렇게 이미 지고 들어갑니까? 갑자기 이 맥락에서 천상에서 미가엘과 용과의 싸움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이겨둔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겁내지 말라. 담대하게 싸우고 담대하게 나가라. 그러면 승리할 것이다. 이 말씀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3. 용의 정체

이제 용의 정체를 설명해 줍니다. 용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사실 정체를 알면 겁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정체를 몰라서 그렇습니다. 이놈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잘 보십시오. 9절 "큰 용이 내쫓기니" — 내쫓겼습니다. 미가엘과의 싸움에서 져 가지고 —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용의 정체 첫 번째, 옛 뱀입니다.

3-1. 옛 뱀

옛 뱀이라 하면 무엇이 생각납니까? 여기서 지금 계시록 기자가 옛 뱀이라고 쓸 때 어떤 느낌을 가지고 썼을까요? 에덴동산에서 하와를 미혹한 뱀입니다. 그것이 옛 뱀입니다.

옛 뱀의 특징이 있습니다. 옛 뱀이 하와를 미혹할 때 두 가지를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첫째, 특기가 있습니다. 옛 뱀의 특기는 말씀을 혼돈스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하셨는데, "결코 죽지 않는다. 절대 죽지 않는다." 물론 그 가운데는 하와의 헷갈림이 큰 몫을 했습니다. 하와가 말씀에 제대로 못 서 있었으니까요. 말씀 위에 제대로 서 있지 못하는 성도들에게 옛 뱀이 들어가서 말씀을 흔들고 미혹하게 하고, 하나님 말씀이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저렇게 만들어버립니다.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는데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만들어버립니다. 그러면 우리가 옛 뱀에게 속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말씀 위에 제대로 서 있어야 합니다. 기본이고 상식입니다. 말씀을 제대로 붙들고 제대로 서 있는 것이 옛 뱀에게 휘둘리지 않는 것입니다. 용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이기려고 하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두 번째 옛 뱀의 특기는 교만을 자극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먹으면 하나님과 같아질 줄 알고 하나님이 못 먹게 한 거야." 그러면 그런 말을 들을 때 하와가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야, 저것을 먹으면 내가 하나님과 같아질 수 있겠구나." 그리고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욕망 때문에 손을 들어서 따 먹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커녕 벌거벗은 것을 깨닫고 부끄러워서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기 벗은 몸을 가리고 이런 야단을 치고 있지 않습니까?

사탄이, 옛 뱀의 특기는 우리를 교만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자꾸 교만하게 만듭니다. 나는 그냥 가만히 있으려고 하는데 나를 교만하게 하는 말들이 자꾸 도처에서 들립니다. 잘하는 줄 압니다. 내가 이만하면 신앙이 좋은 줄 알고, 이만하면 믿음이 좋은 줄 알고, 이만하면 나 괜찮은 사람인 줄 자꾸 알게 됩니다. 자존감은 좋은데, 그러나 교만은 절대적으로 금물입니다. "난 기도도 이만하면 잘하고, 많이 하고, 예배도 잘 드리고, 나처럼 좋은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 하라고, 우리 교회에서 이 정도 믿음 생활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이런 마음이 들면 다 접고 빨리 기도원에 들어가셔야 합니다. "아, 이것이 내가 좀 교만하구나. 이것이 이제 내가 좀 옛 뱀에게 미혹당하고 있구나. 다시 겸손해져야 되겠구나." 사람들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에 가서 자기 성찰을 좀 하셔야 합니다.

옛 뱀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고 말씀을 미혹하게 하는 특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랬습니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고.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매일 말씀을 보니까요. 말씀을 매일 보고 매일 말씀 읽고 매일 말씀 묵상하면, 말씀이 나에게 와서 비수처럼 꽂히는데 견뎌낼 재간이 없습니다. 항상 죄짓는데, 마음으로 죄짓고, 생각으로 죄짓고, 눈빛으로 죄짓고, 행동으로 죄짓고. 그래서 교만해지지 않으려면 말씀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옛 뱀을 이기려면 뒤에 가면 나옵니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는 수밖에 없습니다.

3-2. 온 천하를 꾀는 자

두 번째 용의 정체가 나옵니다.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천하를 꾄다. '꾀다'라는 헬라 단어가 플라나오(πλανάω)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플라나오라는 말은 '길에서 벗어나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길을 이렇게 쭉 가고 있는데, 길에서 이렇게 벗어나게 합니다.

성도가 가야 할 길이 어떤 길입니까? 좁은 길입니까? 넓은 길입니까? 좁은 길입니다. 성도가 가야 할 길이 십자가의 길입니까? 아니면 영광의 길입니까? 십자가의 길입니다.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왜 자꾸 넓은 길로 가고 자꾸 영광의 길을 추구합니까? 그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길을 가지 않고 그 길을 벗어나게 하는 것이 용이 하는 짓입니다. 사탄이 하는 짓입니다. 우리에게 말합니다. "저 사람도 다 넓은 길로 가고, 저 사람도 저렇게 넓은 길로 가고, 저 사람도 영광의 길로 가는데, 너 혼자 왜 자꾸 그렇게 죽을 고생하고 좁은 길을 가려고 하느냐? 너 돌았냐?" 자꾸 그런 마음을 우리에게 주는 것입니다.

자꾸 사탄이 그러면 어떤 마음이 듭니까? 손해 의식이 듭니다. 내가 자꾸 별나게 예수 믿는 것 같고, 내가 자꾸 별나게 신앙생활 하는 것 같고, 나도 한 30년 그렇게 했으니까 그냥 이제 좀 편하게 살고 싶다는 마음이 왜 안 들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진짜 가야 할 길은 좁은 길이라 했고, 십자가의 길이라 했고, 사람들을 섬기는 길이라 했고, 보이지 않는 길이라 했습니다. 그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까지, 하나님께 날아가는 그날까지 미혹당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꾀부리면 안 됩니다. 믿음 생활할 때는.

항상 내가 이 길을 가고 있는 이 길이 사탄에게 미혹받아서, 혹시 내가 좁은 길이 아닌 넓은 길을 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혹시 내가 고난의 길이 아닌 영광의 길을 따라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것을 자꾸 살펴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문제가 많이 생깁니다.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3-3. 참소하는 자

세 번째 용의 정체는 10절을 보십시오.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용의 정체 세 번째, 참소입니다. 밤낮 참소합니다. 참소가 무엇입니까? 일러바친다는 뜻입니다. 법적인 용어로는 고발하다입니다.

사탄의 주특기가 자꾸 고소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자꾸 자극하는 것입니다. "너 그 죄 지었지?" 죄의식을 자꾸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면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사탄이 내 마음속에서 내 죄의식을 자극할 때마다 우리는 기가 팍 죽습니다. "야, 난 옛날에 그랬지. 그래." 그런데 내가 뭐라고. 지금. 그러면서 모든 것이 다 하기 싫은 것입니다. "아, 내가 원래 그런 놈이었지. 내가 그런 인간이었지." 그러면서 사탄이 자꾸 나를 참소합니다. 일하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 일을 감당하지 못하게 하고, 자꾸 무기력증에 빠지게 하고, 하나님과 나 사이를 이간질시킵니다. 나는 구원받은 백성인데 구원 자체도 의심하게 만듭니다. 자꾸만 "밤낮 참소한다"고 했습니다. 밤낮이라는 것은 하루 24시간 기회만 있으면 항상 사탄이 계속 그렇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모든 죄에서 다 용서하시고 기억조차 하지 않겠다고 하셨는데, 사탄이 자꾸 그 기억을 떠올리게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면 그때 무시해야 합니다. 그냥 자꾸 그런 마음이 들면, 나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나를 값 주고 사셨는데, 어디 감히 사탄 마귀 따위가 나를 참소하고 내 과거에 지었던 죄를 자꾸 들추어내고 나를 힘 빠지게 하고 무기력하게 만드느냐, 그것은 기억조차 하지 않는다고 하셨으니까 잊어버려야 합니다. 자꾸 그렇게 노력하고 투쟁해야 합니다. 그런 일이 있을 때 선포하셔야 합니다. 담대하게 나서셔야 합니다.

용의 정체 세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옛 뱀, 에덴동산에서 하와를 미혹했던 뱀. 특기가 무엇이라 했습니까? 말씀을 미혹하게 하고 교만을 부추긴다 했습니다. 진리의 길, 좁은 길, 영광의 십자가의 길을 가지 못하게 그 길에서 빠져나오게 만드는 것, 그것도 사탄이 하는 짓이라 했습니다. 또 사탄은 밤낮 참소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4. 사탄을 이기는 길

그런 사탄의 권세를 이기는 비결이 있습니다. 사탄을 이기는 길이 무엇입니까? 명확하게 이야기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두 가지가 나옵니다. 어린 양의 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 그리고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 보혈과 말씀으로 사탄의 권세를 이길 수 있다고 했습니다.

4-1. 어린 양의 피

옛 뱀이 우리를 미혹해서 말씀을 혼잡스럽게 하고, 우리를 교만하게 만들고, 온 천하를 꾀고, 십자가의 길, 좁은 길을 가지 못하게 만들고, 우리를 밤낮 참소하는 것, 이것을 한 방에 이길 수 있는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만 붙들고 있으면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사탄과의 싸움에서 절대 지지 않습니다.

교회가 강조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교회는 이것만 강조하면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보혈의 능력. 하나님의 말씀. 우리가 이것을 붙들고 있으면 악한 사탄 마귀를 절대로 겁낼 이유가 없습니다. 이 안에 거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어린 양의 피는 내가 구해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그냥 부어주셨습니다. 우리가 그 피 안에 거하기만 하면 됩니다.

4-2. 하나님의 말씀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내가 붙잡아야 합니다. 이것은 내 몫입니다. 말씀을 붙잡는 것은 내 몫입니다. 어린 양의 피는 놀라운 능력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이라면, 말씀을 붙잡는 것은 내 몫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에베소서 6장 17절을 보면, 에베소서 6장 말씀 잘 아십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구원의 투구도 있고, 신발도 있고, 믿음의 방패도 있고 많습니다. 의의 호심경도 있고. 모든 것은 다 호신용 무기인데 오직 한 가지 공격 무기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 곧 성령의 검입니다.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했습니다.

에베소서 6장 17절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여기 '가지라'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헬라어는 똑같은 단어를 용어를 다르게 사용합니다. 데코마이(δέχομαι)라는 단어가 있고 람바노(λαμβάνω)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지금 여기 에베소서 6장 17절에서 말씀하는 '가지다'라는 말씀은 데코마이(δέχομαι)라는 단어를 씁니다. 데코마이는 우리말로 번역하면 '영접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 말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하라"입니다. 영접이 어떤 의미입니까? 내가 취할 것은 취하고 취하기 싫은 것은 그냥 버리고, 이것이 영접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A부터 Z까지 하나님의 말씀은 있는 그대로 다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영접입니다. 영접은 종이 주인을 맞아들이는 자세입니다.

종이 주인이 밤에 오건 낮에 오건 새벽에 오건, 친구들을 10명을 데리고 오건 100명을 데리고 오건, "아 오늘 영업 끝났습니다. 오지 마세요. 친구들 데리고 오지 마세요" 이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종 된 마음으로 영접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어떤 말씀이든지 영접하고 수용하고 받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고 살아내기로 결단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데코마이(δέχομαι)입니다.

그런데 '가지다'라는 말씀이 람바노(λαμβάνω)라는 뜻도 있습니다. 람바노라는 단어는 영어 단어에 보면 'take'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취하다. 이것은 취사 선택입니다. 취사 선택. 취하고 싶은 것은 취하고 버리고 싶은 것은 버리고, 가지고 싶은 것은 냉큼 가지고 별로 가지고 싶지 않은 것은 쳐내버리고.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태도는 어떻습니까? 데코마이(δέχομαι)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람바노(λαμβάνω)하고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람바노하고 있습니다. 취사 선택하고 있습니다. 복 준다는 말씀, 들어가도 복 받고 나가도 복 받고 들에서도 복 받고 집에서도 복 받고 네 떡 반죽 그릇이 복 받고, 이런 것은 다 취하는데, 좁은 길로 가라, 십자가를 메고 가라, 이것은 눈 딱 감습니다. 그냥 안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하는 자의 자세가 아닙니다.

우리가 사탄의 권세를 이기기 위해서는 위로부터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인 예수 그리스도 보혈의 능력은 우리에게 은혜로 이미 주어진 것이고, 우리가 매 순간 말씀을 붙들고 살아내야 하는데, 이것은 데코마이(δέχομαι)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때론 나에게 좀 버거운 말씀도 있습니다. 때론 내가 이것을 감당하기 어려운 말씀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멘" 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마리아가 "주의 여종이오니 저에게 이루어지이다" 하고 순종한 것처럼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사탄의 권세를 이길 수 있습니다.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5. 하늘에 거함과 땅에 거함

12절입니다. 12절이 아주 중요합니다.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 '거하는 자'에 줄 쳐보십시오 —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여기 생략된 것이 있습니다. '땅과 바다' 그다음에 라임(rhyme)이 안 맞습니다. 성경을 보면 앞에 했던 말을 뒤에 생략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가 한번 넣어서 읽어보겠습니다.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에 거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이러면 라임이 맞습니다. 앞에 '거한다'는 말을 넣었기 때문에 땅과 바다에 거한다는 말을 빼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뺀 단어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러면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한다는 말과 땅과 바다에 거한다는 말이 얼마나 큰 차이입니까?

5-1. 스케노오의 삶

계시록 13장 6절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비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사는 자들을 비방하더라" "하늘에 사는 자들"이라 했습니다. 이것과 아까 우리가 읽었던 12절에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다"라는 말이 똑같은 헬라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스케노오(σκηνόω)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스케노오, 거하다. 이것은 '영적 임재 가운데 살다'라는 뜻입니다. 영적 임재 가운데 살다. 스케노오.

똑같이 사는 것인데 영적 임재 가운데 삽니다. 그러면 우리가 앞에서 11절과 이 '영적 임재 가운데 살다' 스케노오를 연결해 보면, 영적 임재 가운데 사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보혈의 권능 안에서 사는 것과 말씀을 데코마이(δέχομαι)하고 사는 것, 이것이 영적 임재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별다른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은혜 아래 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취사 선택하지 않고 그대로 다 수용하고 사는 것이 스케노오(σκηνόω)하는 삶입니다. 그것이 하늘과 그 가운데 사는 영적 임재의 삶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즐거워하라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행복해하고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5-2. 카토이케오의 삶

그런데 저주받은 영혼도 있습니다. 어떤 자들입니까? 땅과 바다에 사는 자들입니다. 계시록 13장 8절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이 땅에 사는 자들"이라 했습니다.

아까 우리가 다시 12절에 올라가 보면 '땅과 바다는'할 때 생략된 것, '땅과 바다에 거하는 자들' 여기서 '거하다'는 말은 스케노오(σκηνόω)가 아닙니다. 카토이케오(κατοικέω)라는 단어를 씁니다. 카토이케오. 헬라어 어렵습니다. 똑같이 사는 것인데 어떤 것은 스케노오이고 어떤 것은 카토이케오입니다. 여기 카토이케오는 무엇이냐 하면 그냥 밥 먹고 사는 것입니다. 일상생활하는 것입니다. 그냥 자연인들이 일상생활하는 것, 밥 먹고 결혼하고 시집 장가 가고 아이 낳고 그냥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카토이케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산다고 똑같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산다고 다 같은 삶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스케노오(σκηνόω)의 삶을 사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카토이케오(κατοικέω)의 삶을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영적 임재의 삶을 사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그냥 밥 먹고 자연인처럼 카토이케오의 삶을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하나님만 아십니다. 여기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에 누가 스케노오의 삶을 사는지, 누가 카토이케오의 삶을 사는지 목사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나님이 아십니다. 내가 알고, 나와 하나님이 아는 것입니다. 내가 어린 양의 보혈의 피의 능력에 은혜 아래 사는지,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데코마이하고 모든 말씀을 다 영접하고 좁은 길을 걸어가고 사는지, 그렇지 않으면 취사 선택하고 사는지, 그냥 밥 먹고 자연인으로 물질 숭배하고 돈 많이 벌려고 살고 그냥 그렇게 아둥바둥 사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삶을 철저하게 가려내고 구분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스케노오의 삶과 카토이케오의 삶을. 다시 12절을 보십시오. 그런 맥락으로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 즉 하나님의 영적 임재 가운데 스케노오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에 거하는 자들 즉 그냥 먹고 살고 카토이케오하고 사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하더라."

마귀가 내려왔습니다. 마귀가 이제 비상입니다. 마귀가 내려왔으니까 큰일입니다. 우리는 그냥 사는 것처럼 살면 안 됩니다. 왜? 하나님의 백성들이니까요. 스케노오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6. 용의 박해와 교회의 피신

6-1. 독수리 날개

용의 박해를 피해 여자는 어디로 갑니까? 13-14절입니다. "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박해하는지라" 여자, 교회입니다. 교회를 박해하는 것입니다. 사탄이 당연히 교회를 박해할 것 아닙니까?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 뱀은 짐승입니다. 짐승의 낯을 피하여 —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받으며" 여기 '양육'이라는 말이 또 나왔습니다. 아까 우리가 교회에 대해 이야기할 때 말씀드렸습니다. 지금 광야에서 양육받는다고 했습니다. 초림과 재림 사이에 이 기간에 있는 것이 교회인데, 교회는 그 기간 동안 양육받는 곳입니다. 교회의 정체성은 광야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광야에서 양육받는 것입니다.

교육과 양육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교육은 가르치는 사람이 일방적으로 던지는 것이 교육입니다. 양육은 무엇입니까? 수요자 입장입니다. 성도들마다 다릅니다. 어떤 분은 빨리빨리 잘 받아들이는 분이 있고, 어떤 분은 굉장히 더딘 분이 있습니다. 더딘데 그런데 천천히 받아들이는데 한 번 받아들이면 오래 가는 분이 있고, 어떤 분은 굉장히 빨리 끓어오르는데 쉽게 식어버리는 분도 있고,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그러면 교회는 일률적으로 교육하면 안 되고, 한 사람 한 사람에 맞게 맞춤형 양육을 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 '양육'이라는 단어가 두 번이나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정체성입니다.

'독수리'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독수리. 교회가 독수리의 날개를 힘입어서 광야로 피해간다고 했습니다. 독수리가 나오면 우리가 찾아봐야 되는 것이 있습니다. 이사야 40장 29-31절입니다. 독수리는 구약적인 의미에서도 그렇고, 여기 계시록에서도 굉장히 우리에게 우호적인 동물로 나옵니다.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구약적인 의미의 독수리를 살펴보았습니다.

6-2. 땅의 도움

이제 뱀이 여자를 공격할 때 누가 여자를 돕습니까? 즉 사탄의 권세를 가진 자가 교회를 공격합니다. 15절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같이 토하여" — 비겁합니다. 뒤에서 공격합니다. 이것이 사탄의 방법입니다. 항상 뒤통수를 칩니다. 교회가 방심하고 있을 때 뒤에서 공격합니다 — "여자를 물에 떠내려가게 하려 하되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

땅이 도와주었습니다. 땅이 교회를 도왔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계시록에서 하늘과 땅을 볼 때 하늘은 하나님의 영역, 땅은 사탄이 다스리는 영역이라고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온 우주만물을 다 통치하고 다스리시는데, 잠깐 동안 땅을 사탄에게 내어준 것일 뿐, 하나님의 통치 영역은 땅과 하늘과 모든 우주까지 함께 편재해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돌보신다는 뜻입니다. 교회가 사탄에게 공격받을 때 하나님은 교회를 책임지고 섬기고 돌보신다는 뜻입니다. 단, 교회가 교회로서의 사명을 다할 때 그렇습니다. 교회가 교회로서의 사명을 다하지 않고, 교회가 성도를 양육하지 않고, 교회가 광야 교회로서의 사명과 본질을 잊어버리면 하나님은 그런 교회를 왜 도우시겠습니까? 망해야 합니다. 당연히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도 다 무너지게 하신 분인데, 교회답지 않은 교회를 하나님이 왜 돌보십니까?

그래서 우리는 다른 것을 생각할 이유가 없습니다. 교회가 교회답기만 하면 됩니다. 성도는 성도답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가정은 하나님의 가정답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지키시고 돌봐주십니다. 어떤 것들을 통해서도 우리를 지키시고 돌봐주십니다.

6-3. 용의 분노

17절 분노한 용이 어떤 일을 꾸밉니까?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 — 누구입니까? 우리입니다. 우리 성도입니다 —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더라."

이제 막 일촉즉발의 상황입니다. 이제 용이 전의를 가다듬고 성도들과 함께 한판 큰 싸움을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런 12장 내용을 보면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정신 바짝 차려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용이 입을 쩍 벌리고 여자가 해산하는 아이를 삼키려고 있는데, 하늘의 별의 3분의 1이 땅에 떨어진다 했는데, 우리가 그런 존재가 되면 되겠습니까? 옛 뱀, 온 천하를 꾀는 뱀, 참소하는 뱀. 이기는 힘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과 말씀밖에 없습니다. 데코마이(δέχομαι)하셔야 하고 스케노오(σκηνόω)하셔야 합니다. 카토이케오(κατοικέω)하시면 큰일 납니다.

오늘 이 말씀을 꼭 기억하시고 한 주간 잘 보내시고, 또 다음 주에는 우리 13장과 14장을 공부할 테니 꼭 읽어오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여자와 용에 대해서 공부하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양육받고 광야 교회의 정체성을 지키며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야로 악한 사탄은 하나님인 척하고 모든 권세를 다 부리며 사탄도 하나님과 비슷한 흉내를 낼 수 있다고 배웠습니다. 주여 우리에게 분별의 영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용의 정체는 옛 뱀이라고 했고, 온 천하를 꾀는 자라고 했고, 우리를 참소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거기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 어린 양의 피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되기를 원합니다. 주여 하나님의 말씀을 취사 선택하지 않도록 도우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데코마이하고 영접하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오늘 우리에게 스케노오의 영성을 허락해 주시고 하나님의 영적 임재 가운데 사는 믿음의 백성이 되도록 우리 모든 주의 백성들을 하나님 은혜 가운데 붙잡아 주시옵소서. 악한 사탄의 권세가 성도의 가정과 교회를 침범치 못하도록 우리가 영적으로 각성하고 분별하고 깨어 있도록 역사하여 주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