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강 / 밤에 밖에서 (2:8-14)

밤에 밖에서 (눅2:8-14)

조선 후기 실학 사상을 대표하는 학자를 꼽으라면 정약용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정약용은 1801년 어린 순조 임금의 섭정을 맡은 정순왕후가 대규모로 천주교를 탄압할 때 거기에 연루되어 귀양살이를 떠납니다. 금방 갔다가 돌아올 줄 알았는데 그 세월이 자그마치 18년 동안이나 이어집니다. 그가 전국 각지로 유배를 다녔는데 그중에 꽤 오래 머물렀던 곳이 경상도의 장기와 전라도의 강진이었습니다. 이 18년의 세월 동안 그분은 우리가 아는 주옥같은 명작들을 많이 남겼습니다.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의 책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책들만 남긴 것이 아닙니다.

약 500여 권의 책을 저술했습니다. 거기에 시와 산문과 수필까지 수없이 많은 글들을 썼습니다. 그분이 남긴 시와 산문, 수필을 보면 유배 생활의 고단함이 묻어나 있고, 중앙의 정치 관료로서 도저히 몰랐던 백성들의 삶과 애환, 그로 인한 미안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후학들도 양성했습니다. 후배 실학자들도 많이 길렀습니다. 황상, 이학래 등의 아주 탁월하고 특별한 제자들을 기르는 데에도 열심이었습니다.

거꾸로 한번 생각해 보면 만약 정약용에게 이 18년의 유배 생활이 없었더라면 이 500여 권의 대단한 저술과 시와 산문들이 지금 우리에게 남아 있었을까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가 18년 동안 먼 길을 돌아왔기 때문에 그가 남긴 위대한 작품들이 오늘 우리에게 귀감이 되고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그는 깊은 밤과 같은 세월을 보냈습니다. 언제 사약을 받으라 할지 모르는 상황도 지냈습니다. 중앙 관료에서 유배로 온 사람에게 사약이 내려지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 깊은 밤의 세월을 매일같이 18년 동안 견디고 또 버티고 이겨냈습니다. 그리고 그는 중심에 있다가 중심을 벗어난 변방의 삶을 오랫동안 살았습니다. 언제나 어릴 때부터 중심이었던 사람이 중심부에서 밀려나서 바깥에서 사는 삶, 그 삶은 결코 쉬운 삶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대로 정약용의 인생은 '밤에 밖에서' 살았던 인생이었습니다.

1. 밤에 밖에서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 말씀을 보면 목자들이 나오는데, 이분들도 역시 깊은 밤을 지냈고 중심에서 밀려난 바깥 생활을 했던 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에게 주의 사자가 찾아가서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복음을 전합니다. 오늘 우리 인생 가운데에도 깊은 밤과 같은 인생을 지내는 분이 있고, 주변에서 항상 끝자락에서 살며 벼랑 끝에 있는 듯한 불안감을 느끼며 중심이 아닌 변방의 삶을 사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오늘 이 말씀이 힘이 되고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가이사 아구스도가 천하의 호적령을 내렸습니다. 절대 권력을 가진 한 사람의 황제가 로마 본토와 식민지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호적을 하라 하니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이런 권력자들의 자기 만족적인 명령에도 역사하시고, 그들의 말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셨다는 것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예외 없는 명령에 만삭의 몸을 이끌고 베들레헴으로 호적하러 갑니다. 긴 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불평하지 않습니다. 원망도 하지 않았습니다. 멀고 먼 길을 계속 뚜벅뚜벅 걸어갑니다. 생명의 떡집 베들레헴을 향하여 한 걸음 한 걸음 발걸음을 옮기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베들레헴에 그들을 환대하는 사람들은 누구도 없었습니다. 배척하는 사람들만 있습니다. 누구도 그들을 맞아주지 않았습니다. 쫓겨나고 또 쫓겨나서 결국 사랑하는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가 구유에 나셨습니다. 구유는 예수님의 겸손의 상징인 동시에 우리에게 생명의 떡과 참된 음료이신 당신의 피를 선물하시는 주님의 삶을 의미하는 상징입니다.

1-1. 목자들의 처지

그렇게 예수님께서 구유에 나셨던 그 밤, 베들레헴 근처에서 양 떼들을 돌보는 목자들이 있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그 지역의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2,000년 전 예수님 시절 목자들의 사회적 지위가 과연 어느 정도였을까요? 그 당시 목자들은 노예, 품꾼과 비슷한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위랄 것도 없었습니다.

랍비들은 이 목자들을 가리켜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즉 이 사람들을 부정한 직업군으로 분류했습니다. 만약에 이 사람들이 살인 사건을 목격한다 하더라도, 사회 부조리적인 문제를 본다 하더라도, 이들이 법정에서 하는 진술을 사람들은 믿어 주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목자들은 회당 출입도 제한을 받았습니다. 보다 더 결정적인 것은 이 목자들은 이곳저곳을 양을 데리고 다니면서 목양을 해야 했기 때문에 교육의 기회가 없었습니다.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도 계층을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가 바로 교육인데, 교육을 원천적으로 받을 수가 없으니 신분 상승은 꿈도 꾸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바로 목자들입니다.

이들 목자들의 삶을 가장 잘 표현해 주는 말씀이 8절 말씀에 '밤에 밖에서'라는 말입니다. 물리적인 시간으로서 밤이 아니라, 공간으로서의 밖이 아니라, 이들의 삶은 깊고 깊은 어둠, 밤과 같은 삶이었습니다.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사는 품꾼의 삶 아니었습니까? 젊을 때는 그래도 괜찮습니다. 나이가 들어가고 늙고 병이 들면 이 일을 누구도 자신에게 맡겨 주지를 않습니다. 일거리가 떨어질까 봐,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사는데 내 처자식들을 굶기지 않기 위해서 오늘도 밤에 야영하며 양들을 돌봐야 되는 목자의 처지가 깊은 밤과 같은 인생입니다. 나아질 것도 없는 그런 인생입니다. 바람직하지 않은 인생입니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그 일상 가운데 그들은 교육도 받지 못해서 그냥 이렇게 살다가 늑대에게 물리면 죽을 수도 있는 그런 위험한 인생입니다.

그래서 목자들의 인생은 깊은 밤의 인생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류 사회에 편입될 수도 없었습니다. 주류라고 해 봐야 정치적 중심에 서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회당 공동체 중심에서 자기 자녀들 학교도 보내고, 회당 커뮤니티에서 주류 사회의 사람들과 함께 말 섞고 그들과 함께 교제하며 살고 싶은데, 회당 출입도 제한적이고 더구나 그들의 말을 누구도 믿어 주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밤에 있었고 밖에 소외된 자들로 살고 있습니다.

1-2. 성실한 사명의 자리

그런데 이들에게 여전히 양들은 사명의 자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시던 날 밤, 밤에 밖에서 있던 목자들이 어떤 일을 하고 있었습니까? 자기 양 떼를 지키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좀 엄밀하게 말하면 자기 양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주인이 있는 양들입니다. 그들은 품꾼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주인의 양들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 '지키다'라는 동사 원형이 '필라소'(φυλάσσω)라는 단어를 쓰는데, 지금 여기 '지키더니'라는 말은 동사 원형을 쓰지 않고 분사 형태를 쓰고 있습니다. '필라손테스'(φυλάσσοντες)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이 말은 헬라어에서 분사 형태는 지속적인 동작이 반복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 말은 이분들이 성실하게 매일같이 그 자리에서 양 떼들을 지키고 돌봤다는 뜻입니다. 지키고 경계하고 돌보고, 그 일을 계속해서 매일같이 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성실하게 밤에 밖에서 있는 사람이지만 자기가 해야 되는 일이니까 계속해서 그 일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시는 그 밤도 역시 그랬습니다.

2. 주의 사자의 방문

그런데 그들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9절을 보십시오.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춤에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이들에게 주의 사자가 찾아오셨습니다.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둘러 비추었습니다. 한 번도 이런 일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두려웠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사람을 찾아가시는 장면들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천사들을 보내시는 장면도 봅니다. 그런데 거기에 나오는 기본적인 공통 분모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을 우리 주님이 찾아가시는가?

마태복음 4장 18-19절 말씀을 보십시오.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을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찾기 위해서 갈릴리 해변을 다니셨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께서 찾으신 제자가 두 분이었는데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였습니다. 그들이 어떤 일을 하고 있었습니까? 그물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물고기 잡고 있었습니다. 생업의 현장에서 성실하게 자기 일을 감당하는 자들을 예수님께서 제자로 불렀다는 뜻입니다. 자기 생업의 현장에서 열심히 그물을 던지는 자들이 사람 낚는 일도 잘하기 때문입니다.

세리 마태를 부르실 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마태복음 9장 9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세관에서 열심히 세무 업무를 하고 있는 세무 공무원이었던 세리 마태를 우리 예수님께서 불렀습니다. 일터에서 부른 것입니다.

이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사를 세우실 때 기드온을 부르셨습니다. 그때 기드온이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고 있었습니다. 일하다가 일터에서 하나님이 그를 부르신 것입니다. 지금 여기 목자들은 어디에서 부름받았습니까? '필라손테스'(φυλάσσοντες), 양 떼들을 열심히 지키다가 주의 사자가 그들을 찾아가신 것입니다.

2-1. 하나님이 찾으시는 자

여러분, 이것은 대단히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줍니다. 하나님이 어떤 자를 찾으시는가?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부르시는 자들은 어떤 자들인가? 하나님의 성품 자체가 성실 아닙니까?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지금까지 변함없이 이끌어 오시고 붙들고 계시는 것이 하나님의 성실이신데, 하나님은 함께하기를 원하는 자, 당신과 같은 자들을 택하십니다. 성실하게 자기 자리에서 자기 일을 하는 사람, 상황과 환경을 비관하며 비판하며 언제나 넘어져 있는 자들을 하나님은 찾지 않습니다. 환경과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이 일을 목숨 걸고 감당하는 자들, 그들을 하나님은 찾아오신다는 말입니다.

만약 가정을 한번 해 봅시다. 여기 이 목자들이 "야, 우리가 한 달 동안 여기에 있어 봐도, 이곳에 야영을 해도 늑대 한 마리 본 적이 있느냐? 들짐승 한 마리 우리가 본 적이 없지 않느냐? 그러면 오늘은 문을 다 걸어 잠그고 저 마을에 내려가서 술이나 퍼마시고 실컷 놀다가 오자." 그랬다면, 만약 그랬다면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그날 밤 주의 사자를 만날 수가 없습니다. 주의 사자가 찾아오셔도 목자들이 자리를 비우고 술 마시러 갔는데 주의 사자를 어떻게 만납니까?

주님께서는 이렇게 불현듯 우리 인생을 찾아오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처음 오셨을 때도 그랬고, 예수님의 재림도 역시 그럴 것이고, 우리 인생에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함께 일하자고 손 내밀어 주시는 놀라운 기회도 우리 주님이 이런 식으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 자리에서 성실하게 내가 맡은 일을 감당하고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여전히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필라손테스'(φυλάσσοντες) 하고 있으면 우리 주님이 나를 찾으실 때 우리는 그 손을 붙잡을 수가 있습니다. 변방에 있다고 자기 인생을 비관하고 낙망하는 자, 그런 자들 하나님은 원치 않습니다. 자리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자리가 변방이든, 내 인생이 깊은 밤을 지나든 그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에도 깊은 밤의 인생을 지내는 분들이 있고, 우리 인생들 중에도 변방에 쓰러져 있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시 일어서야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는 그날을 기대하고 소망하면서 오늘도 우리는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성실하게 나가야 됩니다. 아멘. 그러면 주님이 우리 손 붙잡으시고 함께 일하자고 말씀하실 줄로 믿습니다.

2-2. 큰 기쁨의 좋은 소식

10-12절을 보십시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천사가 오셔서 목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아기 예수님, 그리스도가 나셨다. 그가 지금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다. 너희가 그분을 볼 터인데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 될 것이다. '표적', '세메이온'(σημεῖον), 곧 증거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한번 우리가 목자들의 입장에서 냉정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신 것이 목자들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맞습니까? 2,000년 전 이날이 목자들에게 진짜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되려면 적어도 "너희들에게 한 달씩 급여를 지금 줄 테니 휴가 다녀와라. 그냥 집에 가서 이 들판에서 야영하지 말고 가족들과 함께 밤을 보내거라. 좀 쉬었다 와라. 다친 몸도 고치고 아픈 몸도 쉬었다가 한 달 뒤에 보자." 이 정도 되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될 수 있습니다.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의 노후가 걱정되는데 "너의 노후를 위해서 큰 집, 넓은 집을 준비해 두었으니 걱정하지 말고 너는 열심히 일만 하거라." 이 정도 되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태어나신 것과 하루하루 빡빡하게 살아가는 목자들의 인생에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나신 것이 이들에게 왜 기쁜 소식이 됩니까? 객관적으로 보면, 목자들의 시각에서 보면 이건 나랑 아무런 상관없는 일 아닙니까?

그런데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 보면, 믿음의 눈으로 이 상황을 살펴보면 이건 정말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맞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목자들이 똑같기 때문입니다.

3. 밤에 밖에서 오신 예수님

하나하나 살펴봅시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평범한 여인이었습니다. 시골 처녀였습니다. 그런데 수태고지를 받았습니다. 영접했습니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이 순간부터 이 여인의 배가 불러옵니다. 이전까지는 그냥 공동체의 일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이 여인은 밖으로 밀려납니다.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나는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지 부정한 여인이 아닙니다."라고 말해도 그것을 누가 믿어 줍니까? 아무도 믿어 주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손가락질합니다. 사람들은 자꾸만 이 여인을 공동체에서 소외시키고 밀어냅니다. 그때부터 마리아의 인생에는 깊은 밤이 시작됩니다. 밀려났습니다. 밤에 밖에 있는 인생입니다.

요셉도 똑같습니다. 주의 사자가 현몽했습니다. 마리아 데려오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해서 데려왔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뒤에다 대고 수군거립니다. 저 바보 같은 자라고. 사람들이 그때부터 요셉을 정상으로 보지 않습니다. 바보 취급합니다. 지금 그것을 당하고 있지 않습니까? 자기 고향 마을 베들레헴에 왔습니다. 친척과 인척과 지인들의 집을 두드립니다. 그런데 '카탈루마'(κατάλυμα), 객실 방 하나를 내어 주지를 않습니다. 만삭의 몸인 그 아내를 보고도 사람들이 다 배척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들은 경계선 밖에 있습니다.

3-1. 경계선 밖의 예수님

우리 예수님, 경계선 밖에 계신 예수님이 구유에 나신 것 아닙니까? 주류 사회의 일원으로 태어나신 것이 아닙니다. 마리아도 그랬고 요셉도 그랬고, 예수님의 일생은 태중에서부터 그랬고, 예수님의 일생이 이 땅에 태어나셔서 33년의 삶을 사시면서 한 번도 주류 사회, 기득권 세력으로 인정받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의 삶을 사실 때 주님을 영접한 분들은 기껏해야 베다니 마을의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 나병환자 시몬 정도였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다 배척했습니다.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런 예수님과 이 목자들은 너무나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습니까? 밤에 밖에서 있는 분들입니다. 목자들은 지금까지 어느 공동체에든 초대받은 적이 한 번도 없는 자들입니다. 법정의 진술도 거부되고, 그들의 삶의 중심인 회당에도 출입이 제한되고, 랍비들은 이들을 부정한 직업군으로 분류해 버렸고, 어디 가서 그들은 초대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메시아의 탄생에 첫 번째 손님으로 초대받고 있지 않습니까? 처지가 같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처지에 있는 자들을 우리 예수님께서 천사들을 보내셔서 그들을 첫 손님으로 맞이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 예수님께서 이 땅에 로마 황제 아들로 오셨다면, 로마 귀족의 막내로 오셨다면 그건 정말 목자들과 아무런 상관없는 메시아의 탄생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삶이 있고 목자들은 목자들의 삶이 있습니다. 나랑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가장 낮은 곳에, 밤에 밖에서 있는 곳으로 우리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에 우리 예수님의 탄생은 그때뿐만 아니라 지금도 가장 밑바닥 인생을 살고 있는 우리 같은 존재에게도, 밤에 밖에서 인생을 살고 있는 나 같은 존재에게도 예수님의 탄생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됩니다.

3-2.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이유

히브리서 기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히브리서 4장 15-16절을 보십시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아멘.

예수님이 이렇게 밤에 밖에서 계신 분으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은혜의 보좌 앞에 누구든지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만약 우리 중에 예수님은 저기 높은 곳에 계시고 나는 이 낮고 낮은 곳에 있어서 나와 예수님은 질적인 차이가 있어서 나아가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면 그건 예수님을 오해한 것입니다. 목자들조차 예수님께 나아가는 데는 걸림돌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우리 주님 앞에 나갈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고통을 다 알고 체휼하고 계시는 분입니다. 나의 가난도 아시고, 나의 서러움도 아시고, 내 고통도 알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내 눈물과 내 고통의 의미를 몰라 주어도 우리 주님은 변방 벼랑 끝에서 태어나시고 그렇게 평생을 사셨던 분이기 때문에 주님은 모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나와서 그냥 우리가 아뢰면 됩니다. "주님, 제 마음이 이렇습니다. 지금 내 형편이 이렇습니다." 목자들을 초대하신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도 초대하고 계십니다. 그 앞에 우리가 부름받았으니 담대하게 나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4. 하나님께 영광, 땅에는 평화

13-14절을 보십시오.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성탄절 때 우리가 많이 암송한 말씀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과 이유를 가장 분명히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 그건 예수님의 삶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바라고 소망하셨던 일들을 주님께서 완벽하게 이루어내셨습니다. 하나님이 주님께 주신 사명이 무엇입니까? 십자가 사명 아닙니까? 우리 주님은 십자가 사명을 거부하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은 죄 문제 때문에 고통받고 죽음 문제 때문에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모든 인간들을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자유케 하셨습니다. 아멘. 그래서 이것이 우리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너에게 맡겨 준 십자가의 사명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다 이루어내었구나. 고통 가운데 십자가 지고 걸어갔구나."

우리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나서 제자들을 처음 만나서 하셨던 말씀, 요한복음 20장 19절 말씀을 보시면 그들이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문을 닫고 있었는데 그 자리에 찾아가셔서 우리 주님이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말씀하셨습니다. 그 평강은 죽음을 통과한 자가 주실 수 있는 평강입니다. 이제 너희는 죄의 고통에서 해방되었구나. 이제 너희는 죽음의 고통에서도 자유하게 되었구나. 우리 주님이 주시는 평강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아멘.

4-1. 중간에 막힌 담을 허물다

그러면 이제 우리 주님이 하신 일이 어떻게 땅에서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가 되겠습니까? 평화라고 하는 것은 걸림돌이 없어야 됩니다. 막힘이 없어야 됩니다. 벽이 없어야 됩니다. 장벽이 무너지고 울타리가 다 사라지고 모든 사람들이 차별이 없는 그 자리, 그 자리가 바로 평화의 자리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평화를 주셨다는 것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2-14절을 보십시오.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중간에 막힌 담을 우리 주님이 자기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아서 완전히 다 무너지게 하셨습니다. 아멘.

지금 보십시오. 우리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부터 경계선 밖에 있었던 사람, 누구도 그들을 끌어안아 주지 않고 초대하지 않았던 목자들을 주님이 초대하지 않습니까? 벽이 무너진 것입니다. 울타리가 무너지고 담이 무너진 것입니다. 주님은 경계선을 넓히셔서 목자들을 예수님의 품으로 인도하시고 초대하셨습니다.

예수님 시절에 일곱 귀신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가 있습니다. 그녀는 사람들이 내놓은 여자입니다. 귀신 들린 여자, 그것도 일곱 귀신 들린 여자를 그 동네 사람들이나 가족들이 받아들이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그 여인을 품어 주셨습니다. 귀신을 쫓아내 주시고 예수님의 제자로서 주님 따라다니도록 주님께서 그녀와 함께해 주셨습니다.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 예수님의 제자였던 세리 마태 같은 사람들은 모두 중심이 아닌 주변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담을 허무시고 이 사람들을 안아 주셨습니다.

4-2. 평화를 이루는 자

경계 밖에 있는 사람들, 그들은 어떤 마음을 가질까요? 목자들의 심정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불안합니다.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사는 품꾼들, 주인에게 해고당할까 봐 두렵습니다. 몸이 아파서 일하러 나가지 못할까 봐 두렵습니다.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 돈은 많았지만 사람들에게 항상 소외되고 인정받지 못해서 외로움 가운데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경계 밖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자들을 주님은 당신의 품으로 다 끌어안아 주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주님 앞에 나와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 아니라면 누가 우리를 영접해 줍니까? 주님 아니라면 우리가 주님 앞에서 인정받는 것처럼 세상에서 인정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니까 우리를 안아 주고, 우리를 이해해 주고, 나 같은 죄인된 인간들을 주님께서 품어 주셨지, 사람들의 잣대로 보면 우리는 여전히 밖에, 밤에 있는 자들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를 품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 된 자들로서 우리도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좀 불편하더라도, 좀 귀찮더라도 우리도 담을 허물고 경계의 지경을 계속 넓혀 가야 됩니다. 품을 수 있는 만큼 품어 가고, 넓힐 수 있을 만큼 넓혀 가고, 끌어안을 수 있을 만큼 끌어안고,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뜻과 의를 이루어 가시는 주의 자녀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목자들의 인생은 밤에 밖에서 있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역시 밤에 밖에서 있는 인생으로 이 땅에 오셔서 그들을 초대하셨습니다. 그들의 형편과 처지가 딱하고 밤에 밖에서 있었지만 여전히 그들은 자기 일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주께서 그들을 찾아가시고 주님의 품 안으로 인도하여 주신 것을 기억합니다.

주여, 우리도 이제 경계를 허무는 자들이 되겠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품어 주신 것을 기억하고, 우리도 사람들을 끌어안고 품어안는 하나님의 자녀, 믿음의 백성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그래야 할 때 우리가 주의 뜻을 이루어 가도록 도우시고, 지극히 높은 곳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신 우리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도 땅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를 이루어 가는 주의 자녀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