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강 /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2:21-24)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눅 2:21-24)

세종대왕은 1418년부터 1450년까지 32년 동안 재위했습니다. 세종대왕이 조선을 다스렸던 32년의 기간은 조선 사회가 혁신에 혁신을 거듭했고, 사회 전반에 걸쳐 새로운 바람이 활기차게 불었던 시기였습니다. 그 가운데 과학기술 분야는 장영실과 함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장영실은 원래 동래현의 관노였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워낙 특별하고 탁월했던지라 세종대왕의 귀에까지 들어갑니다. 그래서 세종대왕이 장영실을 중국에 유학 보냅니다. 유학을 다녀온 장영실을 세종대왕은 세종 5년인 1423년에 면천시켜 줍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자신의 과학기술 분야를 책임지는 사람으로 임명합니다. 물론 전국 방방곡곡에서 반대하는 상소가 빗발쳤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뚫어내고 결국 장영실과 함께 조선의 과학기술을 세워갑니다. 두 사람은 사실 신분에 있어서는 하늘과 땅 차이에 있지 않습니까? 한 분은 조선의 임금이고 한 분은 노비 출신입니다. 그런데 두 분의 공통점이 굉장히 많습니다. 두 사람의 공통점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한 가지만 꼽으라면 두 분 다 기본에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세종대왕은 백성들보다 항상 한 걸음 혹은 두 걸음 앞서가야 된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늘 새벽 4시만 되면 일어났습니다. 책을 읽고 준비하고, 신하들과 함께하는 경연에 빠진 적이 없습니다.

어떤 분야든지 잘 준비해서 경연에 와서 치열하고 열띤 토론을 했습니다. 그 열매를 백성들이 거두었습니다. 장영실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분이 물시계를 만들 때는 물방울 떨어지는 속도를 계산하기 위해서 수천 번, 수만 번이나 똑같은 실험을 계속했습니다. 해시계를 만들 때는 해가 물체를 비추는 그림자를 그리기 위해서 1년 365일 동안 해와 물체만 바라보고 그림을 그린 적도 있습니다. 그만큼 성실했고 기본에 충실한 분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세종대왕이나 장영실이나 모두가 다 천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천재처럼 보일 뿐이지 사실은 기본에 충실한 대단히 성실한 분들임에 틀림없습니다.

기본에 충실한 것이 과연 쉬울까요? 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똑같은 일을 매일같이 지속적으로 계속 반복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내가 다 안다고 생각해야 되는데, 그런데 또 하라고 합니다. 두 번, 세 번 지속적으로 계속 반복하는 일이 지겹기도 하고 피곤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계속 그 일을 반복해 나갑니다. 이 기본을 계속 반복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을 반복하지 않으면 내 몸에 배이지를 않습니다. 계속 반복해야 내 몸에 배이고 내 영혼에 배입니다. 그러면 눈 감고도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기본이 내 몸에 습득이 되면 그다음에 거기서부터 응용할 수 있습니다. 기본이 탄탄하면 거기서 성장하고 발전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본에 충실하지 않으면 성장이 더딥니다. 그것이 불가능해집니다. 우리 믿음 생활, 신앙생활 하시는 분들 그 기초의 토대가 무엇이겠습니까? 두말할 것 없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말씀이 우리 삶의 토대가 되어야 됩니다. 그러면 그 토대가 굳건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것을 굳건하게 하려면 매일 똑같이 하나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그 말씀을 되뇌이고 말씀대로 살아가야 됩니다.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다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다 알지를 못합니다. 여전히 안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 말씀을 보면 요셉과 마리아, 아기 예수님의 가정이 나옵니다.

1. 말씀대로 순종한 가정

이 가정은 하나님 말씀인 기본에 성실했습니다. 이 가정을 살펴보고 과연 우리가 말씀에 충실한 사람들인지를 함께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21절을 보십시오. "할례할 팔일이 됨에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잉태하기 전에 천사가 일컬은 바러라." 할례할 팔일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아기가 태어나고 유대인 율법에 의하면 성경 그대로 8일 만에 할례를 했다는 말입니다. 구약의 율법에 그대로 명시되어 있습니다. 남자 아기가 태어나면 8일째 되는 날 할례를 행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가정은 말씀대로 8일 만에 할례를 행합니다. 그리고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고 짓습니다. 이 이름을 누가 지어준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서 수태고지할 때 마리아에게 주신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이 아기의 이름은 하나님께서 주신 이름입니다. 그 당시 문화적으로, 그 당시 관습적으로 우리가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알아보았지만 사실 그 당시에는 아기의 이름을 지을 때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짓거나 그 친족들 중에 유력한 사람, 성공한 사람이 있으면 그분의 이름을 따라서 지었습니다. 그것이 시대적 관행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가정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이미 아기의 이름을 하나님께서 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가정은 그 이름을 예수라고 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이 무엇입니까?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어주신 이름대로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고 짓고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행합니다. 모두가 다 말씀대로 따라서 행한 일들입니다. 22절을 보십시오. "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이제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간 이유는 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때가 찼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레위기 율법에 의하면 산모가 아기를 낳으면 8일 만에 할례를 행합니다. 그때부터 33일이 또 지나야 산혈이 깨끗해진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41일째 되는 날 성전에 올라가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전에 올라가서 두 가지를 해야 됩니다. 예배를 드려야 되는데 하나는 번제를 드립니다. 또 하나는 속죄제를 드립니다.

이것이 구약의 율법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레위기 12장 6절 말씀을 보십시오. "아들이나 딸이나 정결하게 되는 기한이 차면 번제를 위하여 일 년 된 어린 양을 가져가고 속죄제를 위하여 집비둘기 새끼나 산비둘기를 회막 문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산혈이 깨끗하게 되는 날, 정결예식이 끝나는 날 그날 성전에 올라가서 어린 양 한 마리를 가지고 번제를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비둘기를 가지고 가서 속죄제를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 그대로 이제 41일째 되는 날 마리아와 요셉 그리고 아기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서 정결예식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그대로 행하고 있지 않습니까?

1-1. 첫 것을 드림

또 성전에 올라간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처음 태어난 자는 다 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지키고 그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이 가정이 이 가정에 처음 태어난 아기 예수를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 올라간 것입니다. 이것도 부모의 결정과 부모의 결단을 따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에 그대로 기록된 대로 순종한 것입니다. 출애굽기 13장 2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첫 것은 다 내 것이라고 말씀하신 배경이 있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출애굽할 때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이 장자의 죽음입니다. 애굽의 모든 사람들은 다 장자가 죽임을 당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 문설주와 인방에 피를 바르고 그 안에 있었던 자들은 하나님께서 장자의 죽음을 면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때부터 초태생들 즉 장자, 그 가정에 태어난 첫 것은 모두가 다 하나님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의 전통을 따라서 지금 요셉과 마리아는 처음 태어난 아들 예수를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 올라간 것입니다. 21절에서 23절의 말씀을 한번 정리해 봅시다. 너무 깔끔하고 담백하지 않습니까? 요셉과 마리아, 자기 생각이 여기에 들어가 있는 것이 있습니까?

그들은 모두가 다 하나님 말씀 율법에 기록된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8일 만에 할례 행하라고 하니 할례 행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라고 하니 예수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정결예식을 위해서 산혈이 깨끗해지는 41일째 되는 날 성전에 올라가라고 하니 올라갔습니다. 번제와 속죄제를 위해서 예물을 가지고 올라갔습니다. 첫 것은 다 내 것이라고 하셨으니 첫 것, 즉 첫 아들 예수님을 드리기 위해서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여기에 군더더기가 어디에 있습니까? 자기 생각이 어디에 있습니까? 모든 것 다 하나님 말씀대로 그대로 행하고 있는 가정이 바로 요셉과 마리아의 가정입니다. 이것이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대로 그 당시 사회에서 율법대로 행하는 것이 뭐가 그리 대단하냐고요? 대단합니다.

1-2. 타락한 시대의 빛

왜냐하면 그 시대의 윗물들이 다 썩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종교 지도자들, 종교 권력들, 종교 기득권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은 있으나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생활을 하실 때 우리 주님이 성전을 청결하게 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성전 정화 사건입니다. 왜 하셨습니까? 유대인의 율법에 의하면 만 20세 이상의 남자들은 세 번의 명절에 성전에 올라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때마다 예물을 가지고 가야 됩니다. 멀리서 오는 사람들 소나 양이나 짐승을 가지고 올 수가 없기 때문에 예루살렘 안에 가축시장이 있습니다. 그런데 종교 지도자들은 멀리 있는 가축시장 말고 성전 안에 가축시장을 열어줍니다. 물론 자릿세를 받았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하나님이 정하신 거룩한 절기를 이용해 먹은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 안에 비둘기 파는 자들, 돈 바꾸는 자들, 소와 양을 파는 자들이 다 들어와서 판을 치고 있었습니다. 짐승의 소리가 성전 안을 시끄럽게 만듭니다. 그 짐승들이 배설한 오물들이 코를 찌릅니다.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돈 바꾸는 자들은 거기 왜 있었겠습니까? 성전 안에서 유대인의 화폐만 통용시켰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는 이미 망했습니다. 화폐가 없습니다. 로마 화폐가 공용 화폐 아닙니까? 그런데 그들은 여전히 쓰지도 않는 유대인 화폐를 거기에서 쓰라고 합니다. 로마 화폐와 바꿉니다. 환율은 그들이 부르는 것이 값입니다. 그런 식으로 돈벌이를 했습니다. 돈 바꾸는 자들에게도 자릿세를 받고 그 자리를 내어주었습니다. 그만큼 윗물이 썩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에는 내 아버지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되어 있는데, 아버지의 집에서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현실, 아버지의 집에서 돈벌이하고 장사하는 자리만 가득 찬 현실, 이 현실을 우리 주님이 고발하신 것입니다. 그만큼 그 시절이 부패하고 썩어 있었습니다. 그런 시절에 윗물이 다 썩어 있는데, 저 하층민으로 살고 있었던 목수의 가정 요셉과 마리아는 담백하고 깨끗하게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고 지켜내고 있습니다. 이것이 대단한 것 아닙니까? 시대적 분위기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회적 흐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다들 그렇게 살고 있지 않는데 왜 우리 가정만, 왜 나만 이런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가정은 있는 말씀 그대로 순종하고 지켜내고 있습니다.

이보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구약시대, 사사시대를 만납니다. 사사시대의 시대정신이 무엇입니까? 악한 시대정신입니다. 그 시대에 왕이 없으므로 백성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시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왕이 되어야 하는데 말씀대로 살지 않는 시절이 그 시절입니다. 백성들은 다 자기 멋대로 살아갑니다. 타락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하게 여기고 지켜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방 여인 룻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 붙잡고 홀로 된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서 베들레헴까지 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를 봉양하기 위해서 이삭을 주우러 일터로 나갑니다. 말씀대로 살았던 여인 아닙니까? 베들레헴 공동체는 나그네를 박대하지 말고 환대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이방 여인 룻을 껴안아 줍니다.

그들의 공동체 일원으로 받아들여 줍니다. 보아스는 또 어떻습니까? 고엘 제도가 사실 자기에게 손해 되는 것 아닙니까? 이 여인을 내 아내로 맞이하면 자기 재산에 손해가 되고 자기 이름이 지워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아스는 룻과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줍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는 자들, 빛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한나는 또 어떻습니까? 자기 대적 브닌나 때문에 속이 상해서 성전에 가서 뜨겁게 기도합니다. 얼마나 오래 기도했던지 제사장 엘리가 이 여인이 술 취한 줄로 알았습니다. 제사장의 수준이 그 지경이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없었으면 그렇게 오래 기도하는 여인을 처음 본 제사장이 이 여인이 술 취한 줄로 알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시절에도 빛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룻과 베들레헴 사람들과 보아스와 한나 같은 사람들, 예수님 시절에 요셉과 마리아 같은 빛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대는 어떻습니까? 교회의 위상과 권위가 과거 같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보고 손가락질을 합니다. 그것은 다 우리가 자초한 일입니다. 믿음의 백성들이 십자가에 합당한 삶을 살아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가 믿음을 보고 배우고 따를 만한 어른들도 갈수록 사라지고 없어지고 있는 시대입니다. 본받을 만한 사람들, 말씀을 붙들고 지켜가는 사람들이 점점 사라지는 시대, 영적 권위가 무뎌지고 쇠퇴해져 가고 있는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세상이 이러니까, 시대가 이러니까, 다들 그렇게 사니까, 다들 한 발은 세상에 두고 한 발은 말씀 위에 두고 대충대충 얹혀 사니까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됩니까?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기억해야 됩니다. 그 말씀이 우리의 삶에 근거가 되고 기본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말씀 지키고 붙들고 살아가야 될 이유는 바로 이 땅에서의 삶이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가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묻지 않겠습니까? 너 왜 그렇게 살았느냐고. 그런 질문을 받으면 뭐라고 변명하겠습니까? 다들 그렇게 사니까요. 사람들이 그렇게 사니까 이렇게 살아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라고 말한다면 그 변명이 통하겠습니까? 먹히지 않습니다. 통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이런 식으로 악하게 흘러간다 할지라도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야 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사야 40장 8절에서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름다운 꽃과 무성한 풀을 쫓아서 살지 말고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야 됩니다. 거기에 우리의 삶의 목표가 있고 방향이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이런 시절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우직하게 때로는 미련해 보일 정도로 그 말씀을 지켜간 요셉과 마리아의 신앙이 오늘 우리의 믿음 되기를 바랍니다.

2. 가난해도 당당한 믿음

24절을 보십시오.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이들이 가지고 나온 제물이 무엇입니까? 비둘기를 가지고 갔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조금 전에 보았습니다. 정결예식을 위해서 성전에 올라올 때 번제를 위해서는 어린 양 한 마리를 속죄제를 위해서는 비둘기를 가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가정은 어린 양이 없습니다. 왜 없었을까요? 가난하니까. 어린 양 한 마리를 가지고 나와서 드릴 만큼의 형편이 되지 않으니까 그래서 이 가정은 어린 양 없이 비둘기 두 마리를 가지고 하나님의 전에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레위기 율법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위한 율법입니다. 레위기 12장 8절을 보십시오. "그 여인이 어린 양을 바치기에 힘이 미치지 못하면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가져다가 하나는 번제물로, 하나는 속죄 제물로 삼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속죄할지니 그가 정결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네가 가난하면 너희가 드릴 형편이 되지 못하면 양 가지고 나오지 않아도 된다, 그냥 비둘기 두 마리만 가지고 나와서 한 마리는 번제로, 한 마리는 속죄 제물로 드려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어린 양 한 마리의 예물 시가가 어느 정도 되었을까요? 기록에 의하면 어린 양 한 마리를 번제로 드리려면 성인 남자의 일주일 치 품삯을 드려야 된다고 했습니다. 한 데나리온이 성인 남자의 하루 품삯이라고 본다면 5데나리온 혹은 6데나리온 정도 되는 금액입니다. 먹지도 않고 쓰지도 않고 그것을 고스란히 일주일 치나 가지고 와야만 되는 돈입니다. 물론 있는 사람들에게는,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은 돈도 아닙니다. 이것은 물질도 아닙니다.

그런데 가난한 목수였던 요셉과 그 가정의 마리아에게는 이것을 드릴 수 있는 형편이 안 됩니다. 드리고 싶어도 이것을 가지고 나와서 하나님께 드리고 싶어도 드릴 수 있는 형편이 안 되는데 하나님께서, 자비로우신 하나님, 참 좋으신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비둘기 두 마리만 가지고 나와도 된다고 하셨기에 그 말씀 붙들고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믿음인지요. 왜냐하면 이 시대가 율법이 무너진 시대 아닙니까? 기득권자들부터 시작해서 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습니다. 그러면 정결예식을 위해서 41일째 되는 날 딱 맞춰 가지고 성전에 올라와서 양과 비둘기를 드리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있었을까요?

그런데 우리는 가난합니다. 성전에 올라가서 자랑할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좋은 옷을 입고 갈 수도 없습니다. 많은 물질을 가지고 갈 수도 없습니다. 기록된 대로 양을 드릴 수도 없습니다. 그럴 바에야 안 가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가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지도 않는데, 말씀을 지키지도 않는데 왜 우리가 굳이 가서 나는 가난합니다. 우리는 가난해서 드릴 것이 없습니다. 이것밖에 없습니다. 라고 우리의 가난을 광고할 일이 있습니까? 차라리 안 가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그런 분위기라면 그 시대에 많은 가난한 자들은 가난 때문에 가지 않습니다.

예수님 시절에 보면 돈 많은 부자들이 성전에 와서 헌금하는 장면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금화를 가지고 옵니다. 엄청난 돈을 가지고 와서 자기의 부를 자랑합니다. 그것을 드리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믿음과 신앙을 자랑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시대를 살고 있는 이 가난한 자들 어떻게 성전에 올라옵니까? 위축되어서. 그런데 이분들은 그런 것 전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자신감이 있습니다. 당당합니다.

2-1. 하나님을 만난 확신

요셉과 마리아가 이렇게 당당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분들은 하나님을 확실하게 만난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주의 사자가 마리아를 찾아왔고 주의 사자가 요셉의 꿈에 현몽했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해서 낳았습니다. 얼마나 자신감이 넘치겠습니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이 자신감, 이 믿음, 그 믿음과 이 자신감과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온 것입니다. 목자들의 노랫소리, 목자들이 천사들의 노랫소리를 듣고 이야기한 그것도 들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전에 나오는 것, 방해하는 세력들이 많습니다. 너 그 꼴로 교회 가 봐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지, 그런 옷을 입고 비둘기 두 마리 들고 성전에 올라가 봐, 뒤돌아서는 너의 뒤통수에다 대고 사람들이 다 손가락질하고 욕할 텐데 양을 가지고 가지 못할 바에는 안 가는 것이 낫다. 사탄은 그런 식으로 계속해서 속삭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를 분리시키는 것이 사탄의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고 올라가지 못할 이유를 수만 가지 이유들을 댑니다.

그런 이유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이 자꾸만 걸립니다. 주저합니다. 나는 가진 것이 없는데, 드릴 것이 없는데, 하나님 앞에 내놓을 것도 없는데, 나는 건강도 이런데, 인간관계도 이런데 등등의 여타의 수많은 이유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오지 못하고 나서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상황을 가지고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로마서 8장 38절과 39절을 보십시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스스로 절대로 끊어내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오는데 그런데 스스로 왜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간다는 말입니까? 나의 가난을 이유로, 나의 영적인 부족함을, 나의 모든 육체적인 부족함을 이유로 스스로 떨어져 나갈 이유가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사탄의 꾀임과 마귀의 속삭임에 넘어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2-2. 주 앞에 나아가는 복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의 백성들은 여타의 여러 가지 이유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나오는 자들입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기본에 충실한 신앙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주의 전에 올라오는 이유, 하나님 앞에 나와서 우리를 보여야 됩니다. 내가 비록 가진 것이 없다 할지라도 그것 가지고 하나님은 결단코 책망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주 앞에 나오기만 하면 우리에게 은혜 주시고 복을 주시고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로 품어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앞에 올라오는 것, 귀한 의미를 우리에게도 설명해 주십니다. 22절을 보십시오. "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지리적으로 예루살렘이 높은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 시절에 보면 예루살렘 성이 높아서 여부스 족속이 그곳에 살고 있어서 그것을 정복하지 못했다는 기록도 있을 만큼 예루살렘 성은 높은 곳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 높이가 높아서 올라갔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 '올라가다'에 아나바이노(ἀναβαίνω)라는 동사를 사용했습니다. 이 동사는 영적인 상승을 의미합니다. 영적 성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본에 충실해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주의 전에 지속적으로 계속해서 올라오면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고 상승한다는 뜻입니다. 머물러 있지 않고 이 모든 여타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믿음 생활하고 주의 성전에 올라오기를 기뻐하는 자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그냥 두지 않으시고 성장하게 하시고 상승하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자리에 갖가지 사연을 가지고 오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 자리에 오시기까지 얼마나 많이 갈등하셨습니까? 나오지 않아야 될 이유, 나오지 못할 이유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자리에 오신 분들,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성장케 하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보여드릴 것이 뭐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어린 양 그런 것 별로 원치 않습니다. 비둘기 그것 가지고 와도 되고 없으면 안 가지고 와도 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믿음이 성장한 것을 보여드려야 됩니다. 우리의 믿음이 올라가고 우리의 믿음이 성숙하고 성장한 것 하나님 그것 받기 원하시고 그것 보기를 원하시는 분임을 기억하시고 앞으로도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 앞에 올라가고 성장하는 믿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시대가 갑니다. 세월의 흐름이 과거 예수님 시절과 같고, 사사시대와 같습니다. 세월이 악하여서 흐름을 따라 흘러가다 보면 우리의 믿음도 말씀에 기초하지 않고 내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할 때가 많습니다. 아버지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살다가 하나님 앞에 서면 변명할 거리가 없다는 것도 이제는 알았습니다. 주여 우리가 세상 탓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흐름을 탓하지 않게 하여 주시고 오직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서서 그 말씀의 기본을 지켜가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갖가지 이유로 우리를 하나님의 전에 올라오지 못하게 막는 악한 사탄의 계략들이 있습니다. 주여 이겨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요셉과 마리아처럼 비록 가난해도 누구도 그런 일을 하지 않아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올라가고 또 올라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고 발전하고 자라는 것을 우리 하나님 앞에 보여드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