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조선 선조 임금 시절은 우리나라의 대환란 격변기였습니다. 임진왜란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7년 동안 나라는 초토화되었습니다. 그런데 시절이 인물을 만들어낸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그 시절에 특별하고 탁월한 인물들도 많이 출현했습니다. 충무공 이순신을 비롯하여 서애 유성룡, 율곡 이이 같은 분들이 바로 그 시절을 풍미했던 분들입니다.
그런데 역사에 잘 나타나지는 않지만 이산해라는 분도 있었습니다. 이산해는 11살 때 초시에 장원 급제를 했습니다. 23살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릅니다. 재주가 남달랐고 특별했습니다. 그래서 선조 임금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선조가 그 자리에서 시제를 던지면 시제를 받아서 임금의 마음에 쏙 드는 시를 지어 바칠 정도로 그는 글재주가 아주 총명했습니다. 선조 임금의 사랑을 독차지했고, 결국 이분은 영의정까지 지내게 됩니다.
그런데 후대는 이분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조선 시대 후기에 오면 서원의 시대가 열리는데, 그 당시 나라에 서원이 약 천 개 이상 있었습니다. 서원의 기능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인재 교육을 했고, 또 하나는 조상의 얼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역할을 했습니다. 조선의 위대한 선각자들, 학문이 깊고 뛰어난 분들을 서원에서 한 분씩 정해서 학생들에게 전수하고 가르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조선 시대 후기에 서원 천여 곳 중에 이산해의 업적을 기억하고 가르치는 서원은 단 한 군데도 없었습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그토록 뛰어난 문장가였고, 당대 영의정까지 지냈던 위대한 인물을 왜 후세는 기억하지 않는 것입니까? 조선 시대 인물을 평가한 『명재기언』이라는 책을 보면, 이분에 대한 평가가 짧게 나옵니다. "이산해는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좋았고 지혜로웠고 총명했으나, 간신들의 무리에 휩쓸려서 권력을 쫓아간 사람이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결국 한 사람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당대로서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당대를 지나서 그다음 후대로까지, 세월이 또 다른 세월을 낳아서 시간이 한참 지나야 그분에 대한 입체적이고 종합적인 판단이 이루어지는 법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지금 평가받는 것보다 후대, 또 그다음 후대에 우리를 평가하는 시각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백성들은 과연 누구의 평가를 받아야 할 것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당대의 평가도 물론 중요합니다.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후대의 평가도 중요합니다. 잘 살아간 사람에게 후대가 좋은 평가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눈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보고 계시는가? 당대와 후대의 평가보다 더 추상같고, 더 엄격하며, 더 무섭고 공정한 평가가 바로 하나님의 평가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 말씀을 보면, 시므온이라는 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가 나옵니다. 사람들은 그분을 가치 있게 평가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이분을 대단히 가치 있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오늘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눈과 하나님의 평가를 함께 느껴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의롭고 경건한 사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아버지 요셉은 말씀 중심으로 살아간 인물이었습니다. 이분들은 난지 8일 만에 아들을 할례받게 합니다. 당시 시대적 풍조를 따라서 아들의 이름을 짓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지어 주신 예수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41일째 되는 날 정결 예식을 위해서 성전에 올라갑니다. 그리고 첫아들이니까 하나님께 바칩니다. 번제와 속죄제를 드리는데, 어린 양을 드릴 만한 형편이 되지 못해서 비둘기 두 마리를 가지고 한 마리는 번제로, 한 마리는 속죄제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비록 가난했지만 그 가난이 이들을 성전에 나오는 것을 가로막지 못했습니다.
말씀 중심으로 살아갔던 이 가정이 성전에서 한 특별한 인물을 만납니다. 시므온이었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이분을 우선 평가하기를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의로운 것은 디카이오스(δίκαιος)라는 말을 썼고, 경건한 것은 율라베스(εὐλαβής)라는 말을 썼습니다. 디카이오스와 율라베스라는 말은 하나님과 깊은 관계에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보통 생각할 때 "저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야", "저분은 참 경건해 보여"라고 말할 때는 사람 중심의 시각과 판단이 그 속에 들어 있지 않습니까? 저분의 행동을 보니 참 정의롭다, 저분의 믿음생활 하는 것을 보니 저분은 참 경건한 사람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디카이오스, 율라베스라는 말은 사람이 보는 시각을 넘어선 하나님의 관점으로, 하나님과 그 사람 간의 깊은 관계가 전제되어 있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런 의미를 그 당시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 종교 권력자들은 몰랐습니다. 그들은 의롭고 경건한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노력합니다. 누가복음 18장 11절과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이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즉 사람들과 조금 거리를 두고 서서 기도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형식은 기도를 빌었을지 몰라도 내용은 기도가 아니라 연설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다 듣도록 큰 소리로 자신의 경건과 자신의 삶을 사람들에게 떠들어대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바리새인들은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기도한 자기 자랑은 두 가지였습니다.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는 것을 자랑합니다.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는 것을 자랑했습니다. 금식과 십일조, 이것이 그 당시 사람들의 경건의 지표였고, 자신의 종교적 의로움을 드러내는 수단이었습니다. 이렇게 너무 떠들어대니까 그 당시 사람들이 성전에 가면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기도한다는 소문이 났고, 이 소문이 예수님 교회까지 들어가서 복음서에 기록된 것 아니겠습니까? 그 정도로 그 당시 종교적 열심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의로움과 경건함을 사람들에게 보이고 인정받으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참된 의로움도 경건도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나오는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의롭다 하셨던 그 장면이 있습니다. 창세기 15장 6절을 보면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배경은 이렇습니다. 자녀 문제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던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들판으로 인도해 내시고 하늘의 별을 보여주셨습니다. 너의 자손이 앞으로 저 하늘의 별들처럼 많아질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것을 보시고 하나님은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과정에 아브라함의 행위가 털끝 하나라도 들어간 곳이 있습니까? 아브라함의 행동이 하나님 보실 때 80점짜리, 90점짜리, 100점짜리라고 할 만큼 그의 행동이 하나님의 의로움에 근거가 된 적이 있습니까?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그가 어떤 특별한 행동을 해서 그 행동이 하나님이 달아보시고 이 사람을 의롭다 할까 말까 하시다가 점수를 매겨서 그를 의롭다 한 적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던 그 관계를 하나님은 보시고 아브라함을 의롭다 하신 것입니다.
그 이후에 아브라함의 인생을 보시면 그는 도저히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입을 수 없는 인생입니다.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지 않습니까? 이스마엘을 낳고 나서 13년 동안이나 하나님을 단 한 번도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행위의 의로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행위로서는 하나님 앞에 의로움을 입을 만한 육체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말합니다. 로마서 3장 20절과 28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입을 육체가 단 한 사람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우리의 행위가 불완전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보실 때 100점짜리 행동은 불가능합니다. 역사적으로도 불가능했고, 앞으로 오고 올 인류 가운데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의로움에 도달할 수 있을 만한 행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 경건하다 인정받으려면 하나님과 깊은 관계가 있어야 됩니다. 백 번 지어도 한 번 용서받을 수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 이 관계가 우리의 의로움과 경건함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여기 시므온이라는 분은 그의 행위는 우리가 알 수 없지만, 하나님과 그의 관계가 깊고 깊은 관계임을 우리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 이 말씀에서 디카이오스, 율라베스라는 말씀을 쓰시면서까지 이 사람은 나와 깊은 관계에 있는 사람이라고 보증해 주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2. 성령과 기다림
그다음 이분을 성경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위로가 뜻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700년 전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던 메시아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분에게 메시아 그리스도를 만날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26절을 보십시오.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는 언젠가 네가 죽기 전에는 분명히 그리스도를 볼 것이다. 그 옛날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하셨던 메시아를 네가 죽기 전에는 분명히 볼 것이다. 이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분은 그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이렇게 또 말씀합니다. 25절 끝자락에 보면 성령이 그 위에 계셨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지점이 있습니다. 성령과 기다림은 굉장히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 하나님으로 충만하고 말씀으로 충만한 사람은 잘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중심의 사람은 기다림을 잘합니다.
그런데 반면 자기 중심적인 사람은 기다리지 못합니다. 내가 정한 시간이 있습니다. 내가 정한 방법이 있습니다. 이 시간이 지나고 이 방법이 아니면 미련 없이 손발을 털고 자리 털고 일어나가 버립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그런 것 신경 쓰지도 않습니다. "나는 이제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제가 이렇게까지 기다렸습니다. 제가 언제 몇 월 며칠 몇 시까지 이것 해야 된다고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 내게 응답하지 않았고 내 기다림에 들어 주지 않았습니다." 자기 시간이 정확합니다. 자기 방식이 분명합니다. 여기에 채워지지 않으면 미련 없이 떠나 버립니다. 심지어 하나님이라도, 신앙이라도 철저하게 자기 중심적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데 이 기도가 내가 원하는 시간에 내 방법대로 이루어지는 적이 잘 있습니까? 자기 중심적인 사람은 그때를 기다리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 성령이 그 위에 계신 사람은 하나님 중심적입니다. 그래서 기다릴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주의 그리스도를 볼 때까지는 너는 죽지 않을 것이다. 분명히 그가 죽기 전에는 그리스도를 보기는 볼 텐데, 그때가 언제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몇 년, 몇 월, 며칠, 몇 시에, 어느 장소에서 어떤 식으로 볼 것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답답한 일입니까? 그냥 마냥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그렇게 기다릴 수 있었던 까닭은 자기 중심적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신앙의 영역뿐만 아니라 인간 관계에서도 똑같습니다. 부모 자식 간의 관계에서, 내 자녀가 조금 모자랍니다. 사회성이 좀 모자라고, 성장하고 발전하기까지 좀 더딥니다. 그러면 부모는 기다리지 않습니까? 부모가 마냥 기다립니다. 온갖 방법과 노력을 다하면서 계속 기다려 줍니다. 그런데 그런 부모들 중에 어떤 부모가 "너 올해까지 이것 제대로 완수하지 못하면 너와 나의 관계는 없던 관계야. 나는 너와의 관계를 모든 것을 청산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부모가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정상적인 부모라면 기다려 줍니다. 왜 그렇습니까? 더 사랑하니까요. 내 자식이고 내가 너무너무 사랑하니까 계속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연인과의 관계에서 누가 더 많이 기다려 줍니까? 더 사랑하는 사람이 기다려 줍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이니까 무작정 기다려 줍니다. 오래오래 기다려 줍니다. 참아 줍니다. 견뎌 줍니다. 사랑이 그 위에 있으니까 기다리고 참아 주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내가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한다면 우리는 기다릴 수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 위에 임하면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 중심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성령이 나와 함께 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시므온이라는 사람은 의롭고 경건한 사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은 사람이요, 성령 충만한 사람으로 자기 중심적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적이었던 사람입니다.
3. 하나님 눈에 발견되는 예배자
그런데 오늘 이 상황을 그림을 조금 크게 한번 보십시오. 상상력을 발휘해 보셔야 됩니다. 헤롯 성전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 이 성전은 아주 화려하게 지었습니다. 특별한 화려함이 있습니다. 대단히 잘 지은 성전입니다. 헤롯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지은 성전입니다. 그래서 평소에도 사람들로 북적입니다. 성전 뜰에 시골에서부터, 다른 나라에서부터 이 성전을 견학하고 보기 위해서 방문한 사람들이 너무너무 많습니다. 성전 안에는 기도하기 위해서 올라온 사람들, 제사 드리기 위해서 짐승을 가지고 온 사람들, 그들을 맞이하고 영접하면서 예배를 인도해 주는 제사장들, 제사장들 옆에서 도와주는 레위인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성전 안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놀라운 사실은 그렇게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하나님께서 보고 계신 사람은 몇 사람입니까? 요셉, 마리아, 그 품에 안긴 아기 예수님, 시므온 할아버지, 우리가 다음 주에 살펴볼 안나 할머니. 딱 다섯 명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마치 이 성전에 다섯 명만 있는 것처럼 다른 사람은 모두가 다 배경 처리되어 버리고, 이 다섯 명만 하나님이 포커싱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이 성전을 채우고 있어도,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어도,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은 이들밖에 없다는 하나님의 뜻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언급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 하나님의 눈에 발견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 우리 하나님께서 입에 올려서 이 사람을 평가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은 이 다섯 분밖에 없습니다. 나머지는 모두가 다 배경입니다. 그렇고 그런 사람들, 성전에 올라와 있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아무런 영향력이 없는 배경 같은 사람들, 그런 사람들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어려운 가운데도 말씀 지키며 살아갔던 젊은 부부입니다. 예수님은 말할 것도 없고, 시므온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은 사람이고, 성령 충만해서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던 사람이고, 안나 할머니는 과부 되고 나서 84세까지 성전을 떠나지 않고 금식하며 주야로 기도하며 지켰던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런 분 이외에 나머지는 하나님의 관심이 아닙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예배드리기 위해서 올라왔습니다. 많은 분들이 주일날 여러 예배에 참여합니다. 우리 교회뿐만 아니라 주일이 되면 이 나라 모든 교회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사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이 보실 때 배경이 아닌, 하나님 눈에 발견되는 다섯 사람 안에 들 수 있다고 자신하십니까? 여기에는 우리가 경쟁심을 가져야 됩니다. 영적 욕심을 가져야 됩니다. 정말 하나님 보실 때 나는 하나님이 나를 배경으로 처리하지 않을 만큼, 하나님이 나를 가치 있게 보실 만큼, 나는 시므온처럼, 안나 할머니처럼, 요셉과 마리아처럼 하나님 보시기에 가치 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다, 당당하게 자신감 있게 말할 수 있어야 됩니다.
우리 스스로 물어보십시오. 우리 스스로에게, 나 자신에게 질문해 보십시오. 나는 과연 하나님의 눈에 발견될 수 있는 예배자인가? 나는 그런 사람인가? 살펴보셔야 됩니다.
거꾸로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 당시 이곳을 가득 채웠던 수많은 사람들의 눈에 시므온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눈에 띄는 사람입니까? 안나 할머니는 눈에 띄는 사람입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있으나 마나 한 사람입니다.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 눈에 보이는 사람은 화려한 옷을 입고 와서 서서 따로 기도하며 "이레에 두 번 십일조를 드립니다. 이레에 두 번 제가 금식 기도를 합니다"라고 외쳐대는 바리새인이 그들의 눈에 발견되는 사람입니다. 금덩이를 가지고 와서 헌금함에 던져 놓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사람들의 눈에 띕니다. 부귀영화와 금은보화를 자랑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사람들의 눈에 발견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사람, 자기 시간을 자기 중심적으로 가지고 가고, 성령에 충만하지 않은 사람, 하나님은 그들에게는 일절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이 다섯 분 외에 지금 이 성전에 없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우리가 경각심을 가지고 기억해야 됩니다. 우리가 수십 년간 예배드렸습니다. 매주일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러 옵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진정한 예배자로 하나님 앞에 내 영과 진리로 나아가고 있는가? 그것을 우리가 매일같이 물어보고, 하나님 앞에 눈에 띄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4. 시므온의 찬송
27절을 보십시오.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 젊은 부부가 아기 하나를 안고 오는데, 이분이 메시아이고 그리스도인 것을 시므온이 어떻게 알아봤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이미 공부했습니다. 성령의 사람은 처음 봐도 그냥 안다고 했습니다. 엘리사벳과 마리아가 만났습니다. 만나자마자 그 형편과 처지를 알고 있지 않습니까? 다윗과 요나단이 처음 만났는데 더욱더 깊이 사랑했다고 했습니다. 성령의 사람이니까요. 하나님께 매여 있고 붙어 있는 사람이고,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사람들, 이분들은 보면 서로 알아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분들은 서로가 서로를 알아봅니다.
이제 아기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께 찬양하는 시므온의 노래가 나옵니다. 29절에서 32절을 보십시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놓아 주시는도다", 이 종을 놓아 주시는도다. 이 말이 중요합니다. 헬라어로 아폴뤼에이스(ἀπολύεις)라는 말을 썼습니다. 원어 그대로 옮기면 '전역시키다'라는 뜻입니다. 이제 군대 제대하고 옷을 벗는 것입니다. 군생활 2년 하고 3년 한 것이 아닙니다. 평생을 하나님의 십자가 정병으로 살고, 하나님께서 시키신 영적 전투를 평생을 몸 바쳐 다하고, 이제는 제가 전역 신고합니다. 하나님, 이제는 제가 하나님 나라 갈 때가 되었습니다. 이제 제가 옷을 벗습니다라는 전역 신고하는 장면입니다.
4-1. 죽음 앞의 평안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시므온의 영적 진술을 봅니다. 이분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죽음 앞에서 천국을 더 사모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니까요. 내가 경험해 보지 않은 길이니까요. 그리고 간접 경험도 할 수가 없습니다. 죽었다가 돌아온 사람이 없으니 죽음이 무엇인지, 그 너머에 어떤 세계가 있는지 물어볼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직접 경험도 간접 경험도 할 수가 없으니 두렵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홀가분해합니다. "저 이제 전역을 명받았습니다. 이제는 여기에서 고통과 아픔과 어려움을 다 벗고 하나님 나라의 영광으로 서겠습니다. 주여, 나를 이제는 놓아 주십시오"라고 전역 신고하는 이 아름다운 모습이 얼마나 위대한지 모릅니다.
어떻게 이런 삶이 가능할까요? 그것은 평생을 치열하게 살아야 가능한 법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말씀 붙잡고 한 발은 세상에, 한 발은 교회에 두고 살지 않고, 오직 말씀만 붙잡고 사는 인생이 행복하겠습니까? 영적으로는 행복합니다. 그러나 육체적으로는 행복하지 못합니다. 투쟁하며 살아야 됩니다. 가질 것 못 가지고, 먹을 것 못 먹고, 특히 예수님 시절이라면 고난받고 환난받고 살아야 됩니다. 그 생활이 녹록지 않습니다. 피곤합니다. 거짓말하면서 한쪽으로는 딴짓하며 살면서 세상의 낙을 누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이 세상의 삶이 힘들고 피곤하니, 이제는 이 세상의 삶이 아닌 천국에서 영생복락 누리고 싶습니다. "주여, 이제 나를 놓아 주십시오. 하나님 말씀하신 대로 제가 메시아를 만났지 않습니까? 이제 저는 전역하고 싶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서 세상 떠날 때 천국을 소망하며 밝은 얼굴로 떠나기 위해서는 열심히 살아야 됩니다. 미련 없이 살아야 됩니다. 이 땅에서 십자가의 정병으로 영적 전투 잘하고 살아야 됩니다. 세상에 부귀영화 다 누리고, 이 땅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 다 누리고, 뒤로 다른 짓 다 하고, 죄의 낙을 은밀하게 누리고 살다가 세상 떠날 때 천국이 두렵지 않겠습니까? 내가 지옥 갈까? 내가 천국 갈까? 내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어떻게 설까? 그것이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그 두려움 앞에서 우리는 무서워서 벌벌 떨고 설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믿음생활 잘하고, 영적 전투 잘하고 살아가신 분들은 떠날 때 기쁨 가운데 떠날 수 있습니다.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떠남의 자리가 복되어야 하는 이유는 후손들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 어머니가, 우리 아버지가 믿음생활 평생 했는데, 떠남의 모습이 화한 얼굴로 아름다워야 그들의 믿음생활을 우리가 보장해 줄 수 있습니다. 평생 신앙생활 한 사람이 죽음 앞에서 벌벌 떨고 두려워하면 그 자녀들의 믿음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시므온의 믿음, 이 믿음이 오늘 우리의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4-2. 소원을 구하지 않은 믿음
또 한 가지 이분의 찬송을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 될 점은, 놀랍게도 이분은 메시아를 만났는데도 소원을 빌지를 않습니다. 메시아 만났습니다. 주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어떤 소원도 빌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라면 하나님이 약속하셨습니다.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까지는 너는 죽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는 만난다는 말 아닙니까? 그러면 그때부터 소원 100가지 정도를 종이에 적어다가 항상 가슴에 넣고 다니면서, 만나기만 하면 이것 읊어야지, "제가 부귀영화 누리고 무병장수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내 자녀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데 이 아들이 이렇게 되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우리는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빌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분은 그렇게 비는 것이 단 한 가지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딛고 올라가서 창공을 널리널리 비상하려고 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목적이 그리스도가 되어야 되는데, 그리스도가 우리 삶의 디딤돌이 되어서 그리스도를 딛고 내가 높이 날아오르려고 합니다. 그것이 영적 타락입니다. 그런데 이분은 정말 깔끔하고 담백하지 않습니까? 자기 소원 빌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난 것으로 기뻐합니다.
여러분, 이런 사람이 가장 강한 사람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자기 소원을 가지고 아뢰거나 그 소원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 이런 사람이 얼마나 힘 있고 권세 있고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우리도 이런 강한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5. 마리아에 대한 예언
이제 시므온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향하여 예언합니다. 34절 35절 보십시오.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시므온이 마리아를 향하여 예언하는 것, 예수님이 앞으로 어떤 사역을 하실지를 예언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비방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름다운 천국 복음을 설교하셨습니다. 병든 자를 고칩니다. 죽은 자를 살립니다. 귀신을 내쫓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닙니다. 그럴수록 종교 권력자들은 예수님을 탄압합니다. 결국 그를 때려서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제3자가 아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심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할 것이다." 평생 동안 마리아는 고통 가운데 살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아들이 공생애 인생을 사는 날 동안 우리 마리아는 예수님 때문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마리아의 인생을 보십시오. 마리아가 잘못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마리아는 평범한 시골 처녀였습니다. 수태고지를 그대로 순종하고 받아들였습니다. 먼 길을 베들레헴까지 만삭의 몸으로 달려갔습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아기를 낳아서 말구유에 뉘었습니다. 가난에도 불구하고 성전에 말씀 지키기 위해서 올라왔습니다. 거절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하나님 말씀 하나라도 지키지 않은 것이 있습니까? 단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말씀 잘 지켰습니다.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보상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내 믿음생활에 보상받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제가 이만큼 했으니까 내 손에 하나님의 말씀의 보상을, 능력의 보상을, 내 삶의 보상을 주십시오"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그렇게 순수하고 진실하게 섬겼음에도 불구하고 "칼이 너의 마음을 찌를 것이라"는 말씀만 듣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우리는 수용하고 아멘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우리가 걸어가는 이 길에 보상이 없어도 우리는 괜찮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마리아의 보상은 천국 보상으로 주어집니다. 사랑하는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의 영광으로 온 세상을 건지고,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하는 그때 마리아가 완전한 보상을 받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음생활 한다는 것은 꽃길을 걷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신앙생활 잘하면 내 자녀가 복받는다, 이 공식도 틀린 말입니다. 우리 자녀가 믿음생활 성실하게 하면 그들의 인생에 어려운 일이 닥칠 수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믿음생활 제대로 감당한다면 그들이 고난받고 어려움을 겪으면, 그 고통과 고난 때문에 내 가슴이 칼로 찌르듯 하는 고통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견뎌내야 됩니다. 그것을 이겨내야 됩니다. 가치 있는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시므온처럼 사람들은 그를 무시하고 평가하지 않아도 하나님 앞에 제대로 평가받는 사람이 될 수 있기 바랍니다. 마리아처럼 이 고통을 온전히 가치 있는 고통으로 견디고 이겨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시므온처럼 의롭고 경건하여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그가 성령으로 충만하고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때를 분별하고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사람이 된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시므온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천국 소망을 두고 살았던 것처럼 우리도 천국 소망 가지고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이 땅에 있는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 주님을 이용하지 않았던 시므온처럼 우리도 그렇게 순전하게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믿음생활 할 때 내 손에 가진 보상이 없어도,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사는 것 그 자체가 보상임을 깨닫고 주여, 우리가 믿음생활 올곧게 고난을 견디며 걸어가는 자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람의 평가에 주의하지 않도록 도우시고, 오직 하나님의 평가에 나를 세우고, 귀를 열고 마음을 열고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