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선지자 (눅 2:36-40)
중국의 진나라가 멸망한 이후 천하의 패권을 두고 초나라의 항우와 한나라의 유방이 다투었습니다. 결국 한나라의 유방이 천하를 통일합니다. 이 과정에서 유방을 도운 사람들이 대단히 많았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대장군 한신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한신 장군은 마지막 항우와의 전투인 해하 전투에서 사면초가를 기획하고 실행에 옮긴 인물이었습니다. 그 한 사람의 덕분에 천하 통일이 가능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한신 장군의 어린 시절은 참으로 불행했습니다. 고아로 자랐습니다. 먹고 살 길이 없어서 시장 통에서 사람들에게 구걸하며 밥을 얻어먹고, 불량배들에게 맞지 않으려고 두 다리 사이를 기어 지나가야 했던 굴욕의 시간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신 장군에게는 언제나 꿈이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에도, 청년의 시절에도 품고 있던 꿈이 있었습니다. "지금 비록 이렇게 살지만, 내가 잘 준비되면, 잘 준비된 사람이 되면 나중에 좋은 사람을 만나서 쓰임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자기 준비를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누가 그를 불러주지 않아도 마치 부름받은 사람처럼 매순간 성실하게 자기 할 일을 다하며 지냈습니다. 결국 그는 자신을 알아봐 주었던 한나라 유방을 만나지 않습니까? 마침내 주인을 만나서 귀하게 쓰임받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오르내림이 있습니다. 등락이 있습니다. 어려움도 있고 힘든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오르내림의 상황 속에서 일희일비하지 않고 때를 기다리는 지혜입니다. 그러면 시간이 되면, 그 때가 차면 반드시 쓰임받을 날이 옵니다. 세상 사람들도 그렇게 삽니다. 믿음의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에도 견고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에 형통함도 있고, 어려움도 있고, 고난과 환난이 왜 없겠습니까? 그런데 그때마다 낙심하고 좌절하면 우리는 때가 왔을 때, 하나님께서 나를 쓰시고자 할 때 쓰임받을 수가 없습니다. 잘 준비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 말씀을 보면 참으로 구차하고 힘든 인생을 살았던 할머니 한 분을 만납니다. 안나 할머니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분을 선지자라고 했습니다. 84세의 노인을 왜 선지자라고 불렀을까요? 이분이 그만큼 힘들었던, 어려웠던 시간들을 오랜 세월 잘 견뎌내었기 때문입니다. 이분의 삶을 통해서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우리의 믿음을 함께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아셀 지파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아기 예수님이 정결 예식을 위해서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성전에서 시므온 할아버지를 만납니다.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었고,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성령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자기중심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 중심적이었습니다. 이분은 또한 미래에 대한,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는 사람이었고, 천국을 소망했으며, 성령 충만해서 예수님의 사역을 예언했고, 마리아가 그로 인해서 고통받을 것도 말씀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또 한 사람을 만났는데, 이분이 바로 안나 할머니였습니다. 성경은 이분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36절을 보십시오.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참으로 특이한 것은 여기서 안나라는 사람을 소개하면서 지파를 명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실 성경에서 여성의 이름을 소개하는 것도 드문 일이거니와, 이 여성을 소개할 때 그의 아버지 이름과 동시에 지파를 함께 알려 주는 것은 더욱 드문 일입니다. 지난주에 우리가 살펴보았던 시므온 할아버지를 소개할 때 이분은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부친을 소개하지 않습니다. 어떤 지파였는지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안나를 소개할 때는 아셀 지파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의도가 있지 않겠습니까? 아셀 지파임을 밝히는 누가의 의도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면 누가는 왜, 어떤 목적으로 안나의 지파를 밝히고 있는 것일까요? 아셀이라는 사람은 그 옛날 야곱의 열두 아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은 아들을 네 명의 부인에게서 낳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야곱이 가장 사랑했던 여성은 라헬입니다. 그다음은 레아입니다. 레아는 사실 사랑을 받지 못했습니다. 첫 번째 부인이기는 했지만, 자녀를 가장 많이 낳기는 했지만 사랑받지 못했습니다. 두 여인이 경쟁을 하게 됩니다. 라헬은 자기 몸종 빌하를 남편에게 주었고, 레아는 자기 몸종 실바를 남편에게 주었습니다.
아셀은 레아의 몸종 실바가 낳은 아들입니다. 한번 따져 보십시오. 사랑받지 못하는 레아의 몸종이 낳은 아들입니다. 그러니 열두 명의 아들들 중에 아버지 야곱이 이 아들의 이름이나 한 번 따뜻하게 불러주었겠습니까? 사랑의 눈빛으로 이 아들을 한 번이라도 바라본 적이 있었겠습니까? 항상 아버지 야곱의 입에는, 그의 눈에는 요셉과 베냐민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어린 시절 사랑받지 못하고 천대받던 아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아들을 사랑하셨지만, 아버지는 이 아들을 사랑하지 않았던, 참으로 슬픈 세월을 보냈던 아셀이라는 아들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아들들을 다 불러모읍니다. 아들에게 유언을 남깁니다. 축복을 합니다. 물론 아버지 야곱을 통해서 주시는 축복이지만, 하나님께서 아버지 야곱의 입을 통해서 그들에게 주시는 예언의 말씀이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아셀에게 어떤 말씀이 주어집니까? 창세기 49장 20절을 보십시오.
"아셀에게서 나는 먹을 것은 기름진 것이라 그가 왕의 수라상을 차리리로다"
아마 그 현장에서 아버지의 축복을 듣고 있었던 아셀조차도 얼떨떨했을 것입니다. "아버지하고 나하고 애틋한 게 없는데, 아버지가 평소에 나를 이렇게 사랑한 적이 없는데, 왜 이렇게 좋은 말씀을 해 주실까?" 기름진 것을 먹을 것이라고 했고, 왕의 수라상을 차릴 것이라고 했습니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좋은 말이니 가슴에 담아두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셀 지파에게 주셨던 이 놀라운 복이 시간이 한참 지나서 그의 자손 안나를 통해서 이루어질 줄은 그 당시 아셀은 아마 몰랐을 것입니다.
2. 금식과 기도로
오늘 말씀 36절과 37절을 다시 한번 봅니다.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대략 줄잡아서 이 여인이 스무 살에 시집을 갔다고 생각해 봅시다. 결혼하고 7년 동안 남편과 함께 살았습니다. 그러면 27세에 과부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84세가 되었으니 약 57년 정도 그는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고 기도하며 섬겼던 사람입니다.
2-1. 섬김의 참된 의미
그런데 우리가 37절 말씀에서 한 가지 특이한 지점을 발견해야 합니다. "섬겼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보통 성전에서 섬겼다 하는 것은 무엇을 전제로 합니까? 이 할머니가 성전에서 섬겼다고 하면 제사장들의 식사를 준비해 주시든지, 아니면 성전을 쓸고 닦는 청소를 해 주시든지, 성전에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뒤치다꺼리를 해 주시든지, 그런 등등의 섬김을 우리는 "섬겼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서는 금식과 기도로 섬겼다고 했습니다. 금식과 기도가 섬겼다는 말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어떻게 금식하고 기도하는 것이 섬기는 것과 어울릴 수가 있습니까? 적절하고 어울리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 복음서를 쓴 누가가 잘못 쓴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누가는 대단히 정밀한 사람, 정교한 인물입니다. 의도가 있어서 금식과 기도를 "섬겼다"는 말과 함께 사용한 것입니다. 그러면 "섬기다"는 말이 어떤 뜻입니까? 헬라어 단어에 보면 섬기다는 말이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디아코네오(διακονέω)라는 말이 있습니다. 봉사하다, 사람을 섬기다, 이웃을 돌보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디아코니아 봉사라는 말이 이 동사에서 왔습니다. 그런데 여기는 디아코네오라는 말을 쓰지 않았습니다. 라트레오(λατρεύω)라는 말을 썼습니다. 라트레오라는 말은 하나님을 섬기다, 하나님께 봉사하다, 예배를 드리다라는 뜻입니다. 잘 쓰지 않는 말입니다.
2-2. 금식의 의미
그러면 라트레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어떻게 금식과 기도가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것. 우리는 헌금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 앞에 하나님 기뻐하시는 봉사를 몸으로 하는 것, 이것을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금식과 기도가 하나님을 섬기는 라트레오가 될 수 있는 것입니까?
금식이라는 말은 대단히 폭넓은 단어입니다. 이 금식은 모든 절제를 함께 포함하고 있는 말입니다. 절제하는 것 중에 음식의 절제가 가장 어렵습니다. 우리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하루 세끼를 다 먹고 살아야 합니다. 다이어트 하시는 분들도 일정 기간을 하시는 것이지, 일주일, 한 달 넘게 하루 한 끼만 먹고 살 수 있습니까? 어쨌든 이분이 금식한다는 것은 자신을 절제하고 자신을 복종시켜서 산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음식의 절제, 금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금 폭넓게 생각하면 자신의 성격도 절제하는 것입니다. 화가 날 때가 있습니다. 기분 나쁠 때가 있습니다. 누구와 다툴 때가 있습니다. 그때 내 마음을 절제해야 합니다. 화를 억누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일을 하지 않고, 내 말도 절제하고, 행동도 절제하고 사는 것, 이것을 금식이라는 말로 포괄적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내 생각도 절제하고, 너무 기쁜 것도 절제하고, 너무 화가 나는 것도 절제하고, 언어도 절제하고, 등등의 모든 것들을 다 절제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사실 음식을 먹고 배가 부르면 졸리기만 하지, 하나님 앞에 섬기는 데 있어서 정신이 맑아지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정신 차려서 기도할 때는 금식 기도하는 것 아닙니까? 맑은 정신을 위해서는 내 육신의 정욕을 누르고 금식하고 절제해야 합니다. 그래야 밝은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인생의 모든 것을 절제하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됩니다.
2-3. 기도의 의미
기도가 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까? 일반적으로 수준 낮은 기도는 자기 욕심을 아뢰는 기도입니다. "하나님, 이것 이루어 주십시오. 나 이것 필요합니다"라고 아뢰는 기도입니다. 거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면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원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싶습니다. 하나님 뜻을 알려 주시면 저는 하나님 뜻대로 하겠습니다." 그러면 그 기도는 하나님을 섬기는 기도가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 안나 할머니는 과부 되고 나서 84세가 될 때까지 자신을 절제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밝히려고 노력했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려고 노력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보실 때 진정 나를 섬기는 섬김이라고 여기신 것입니다.
오늘 이 부분에서 우리는 우리의 섬김의 폭을 넓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섬겼다는 것. 지금까지 우리가 교회를 섬기고, 하나님을 섬기고, 성도를 섬기는 것, 이것만 섬기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섬김은 하나님이 원하는 섬김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섬김은 나를 절제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충분히 깨닫고, 그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섬김이 될 줄로 믿습니다. 아멘.
3. 신앙생활과 종교생활
그런데 그 당시 유대인들도 금식도 하고 기도도 했습니다. 지난주에 우리가 살펴본 바처럼 바리새인들이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하지 않습니까?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합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또 그들의 기도는 사람들에게 연설하는 것이지 기도는 아니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경건한 사람입니다"라고 떠들어댄 것입니다. 그들도 기도도 하고 금식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금식은 자기 절제가 아니었습니다. 그 금식은 자기를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라고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배를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를 위하는 것이고 자신을 섬기는 것이지,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는 진정한 섬김이 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이 여인은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하나님 앞에 절제와 기도를 해온 분이었습니다. 38절을 보십시오.
"마침 이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
"그에 대하여 말했다"라고 했습니다. 누구에게요?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들에게입니다. 성전에는 예수님의 부모님과 예수님과 시므온과 안나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성전에 모여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그곳에서 안나 할머니가 어느 젊은 부부의 품에 안겨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이분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던 그 메시아다. 700년 전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던 그분이 지금 바로 내 눈앞에 여기 있도다"라고 말하면서 주변에 수많은 성전에 모여든 사람에게 "이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이분이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우리의 메시아다"라고 고백하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 성전에 수많은 사람들이 이 노파의 말에 귀를 기울였겠습니까? 관심을 가졌을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누구도 이 여인의 말에 귀 담아 듣지 않습니다. 항상 성전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는 여인, 언제나 기도하고 한자리에 앉아서 엎드려 구하는 여인, 이 여인의 안면은 있는데, 이 여인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면서 "이분이 메시아다,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외치는데 누구도 거기에 마음을 쓰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오늘 이 상황을 보고 이 여인 안나를 선지자라고 말했습니다. 신약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선지자입니다. 우리는 신약 성경의 최초의 선지자를 세례 요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고백한 것은 이보다 30년 이후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생활 시작할 때였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제대로 선언하고 사람들에게 알린 최초의 사람은 안나 할머니였습니다.
84세가 되어도 맑은 영혼과 정신으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딱 보고 제대로 분별하고 이분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전할 수 있었던, 선지자의 고백을 할 수 있었던, 이 근본 원인이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요? 바로 금식과 기도로 섬겼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했다는 말입니다.
그 당시에는 종교인들이 많았습니다. 성전에 대제사장이 있습니다. 서기관, 바리새인, 율법학자, 사두개인들, 이런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제도권에서 전부 다 일가견 있는 사람들입니다. 성경과 율법 잘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을 직접 만나보고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자들입니다. 예수님을 보고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자들인데, 그들은 왜 그랬을까요? 그들과 이 안나 할머니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안나 할머니는 신앙생활을 한 사람이고, 그들은 종교생활을 한 사람들입니다.
신앙생활은 그냥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입니다. 자기를 절제하는 생활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기도로 제대로 아는 생활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신앙생활을 받기를 원하시고, 그것을 하나님 당신을 섬긴다고 표현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어떤 행위입니까? 그 옛날 아셀 지파에게 예언된 그 말씀, "왕의 수라상을 차리리로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 극진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왕의 수라상을 차려 드리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은 종교인들의 수라상 따위는 받고 싶어 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많은 예물을 가지고, 그들이 많은 열심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드리지만, 그것은 종교적인 열심이지 자기 절제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간절한 기도가 없습니다. 그런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눈앞에 있어도 찾아내지 못하고 발견하지 못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정말 하나님을 섬기는, 왕의 수라상을 차리는 자들인가?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제대로 신앙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인가?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셔야 합니다. 이 여인이 살았던 세월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무려 과부 되고 나서 최소로 잡아도 57년입니다. 84세가 될 때까지 쉬지 않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라트레오라는 동사가 여기 시제가 현재 시제로 쓰였습니다. 과거 시제가 아닙니다. 하고 끝난 것이 아닙니다. 지속적으로 계속해서 하나님을 섬겨 왔다는 말입니다. 쉬지 않고, 끊이지 않고, 자기 절제의 금식과 하나님의 뜻을 아는 기도로 지금껏 하나님을 섬겨 왔다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이 신앙생활이 복됩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신앙생활은 금방 끝납니다. 사람들에게 자신의 경건을 나타내려고 하는 신앙생활은 한시적입니다. 자신의 목적이 채워지고 나면 그것으로 그냥 끝입니다. 그런데 이분은 진실로 하나님을 섬겼던 사람이고, 왕의 수라상을 평생을 차려낸 여인이었습니다. 그 옛날 아셀 지파를 향한 예언이 이 여인을 통해서 그대로 현실이 되지 않습니까?
우리는 얼마나 지속적입니까?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을 제대로 섬겨 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삶을 돌아보시고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 앞에서 진실되고 깨끗하고 바른 믿음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4. 전인적 성장
39절을 보십시오.
"주의 율법을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사렛에 이르니라"
이제 드디어 예수님의 부모님과 예수님이 갈릴리 나사렛에 돌아갔습니다. 길고 긴 여정이었습니다. 만삭의 몸으로 베들레헴에 호적하러 갔습니다. 사람들이 다 거절합니다. 겨우 아기를 낳습니다. 말 구유에 누웠습니다.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습니다. 41일째 되는 날 정결 예식을 위해서 성전에 올라갑니다. 시므온을 만나고 안나 할머니를 만나고 이제 자기 본거지로 가서 정착 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이 생활이 만만치 않습니다. 이 동네 사람들은 마리아가 시집도 가기 전에 배가 불러 왔다는 사실을 다 알고 있습니다. 요셉은 마리아를 그저 바보같이 맞아주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손가락질합니다. 차별의 눈초리를 보냅니다. 뒤에서 이런저런 말들을 쏟아냅니다. 그런 환경에서 이 세 식구가 살아가야만 하는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곳에서 성장한 것입니다. 만만치 않습니다. 힘든 인생을 이 세 식구는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이 어떻게 살았습니까?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성경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40절을 보십시오.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
"자라며 강하여지고"는 육체적인 성장을 의미합니다. "지혜가 충만하였다"는 영적인 성장을 의미합니다. 육체적인 성장과 영적인 성장에 함께 걸려 있는 말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들 예수님의 육체적 성장을 도왔고, 하나님의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를 충만하게 도왔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정말 필요하구나 하는 것을 느낍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그의 육체적 건강과 성장이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생각합니다. 내 건강, 밥 잘 먹고 운동 열심히 하고 약 잘 먹고, 그러면 건강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어제 내가 건강하게 하루 살았다고 해서 오늘 눈 뜰 수 있다는 보장 있습니까? 오늘 내가 건강하게 하루 살았다고 해서 내일 아침도 그렇게 산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누구도 그런 보장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지금까지 건강한 육신으로 살아올 수도 없었고, 앞으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몸을 지탱해 주고 붙잡아 줘야 우리는 살 수 있는 자들입니다. 아멘.
영적인 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지혜가 충만한 것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영혼도 하나님이 붙잡아 주셔야 우리는 제대로 서고 살아갈 수가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성장을 보면서 전인적인 성장을 봅니다. 육체와 영혼이, 몸과 마음이 어느 한 곳에 치우치지 않고 전인적으로 성장하셨구나 하는 것을 봅니다. 이것을 보면 우리 성도의 성장도 역시 전인적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인적이라 하는 것은 치우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느 한 곳으로 치우치는 것은 전인적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 부분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에베소서 4장 13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이 성장이라면, 그 성장을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믿는 것은 뜨거운 가슴입니다. 아는 것은 차가운 지성, 냉철한 지성입니다. 즉 내 가슴과 머리가 골고루 하나가 되어야 믿음의 성장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우리 성도들 중에 성경 읽는 것 좋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밤이 새도록 성경을 읽어도 하나도 피곤치 않다는 분들도 있습니다. 설교 듣는 것 좋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성경 공부하는 것 좋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나는 기도는 못 하겠다. 나는 전도하는 것은 도무지 할 수가 없다. 내 적성에 맞지 않는다." 그것은 치우친 것입니다. 반대로 기도는 열심히 합니다. 전도도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성경만 펴면 잠이 온다. 하루에 한 장도 읽을 수가 없다. "누군가 나에게 어떤 성경을 가르쳐 주지 않아도 좋으니, 나는 그대로 믿을 테니, 나더러 성경 공부하라고 말씀하지 마십시오." 그런 분들도 있습니다. 이런 분들도 치우친 분들입니다.
가슴만으로 살 수 있습니까? 머리만 가지고 살 수 있습니까? 머리와 가슴이 하나가 되어야 살 수 있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전인적인 성장은 바로 이 두 가지가 하나가 되어야 성장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성장하신 예수님의 사역을 보십시오. 우리 예수님이 설교하실 때 얼마나 쉽게 하셨습니까? 예수님이 몰라서 쉽게 하셨겠습니까? 어려운 말을 할 수 없어서 쉽게 하셨겠습니까? 예수님의 씨 뿌리는 자의 비유, 겨자씨 비유, 누구나 다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쉽게 말씀하신 이유는 백성들을 사랑하는 긍휼의 마음이 뜨겁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맹자들 아닙니까? 어려운 말을 쓰면 다 못 알아듣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쉽고 재미있게 비유를 들어가면서 그들에게 설교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 기도하신 것을 한번 보십시오. 하나님과 단독으로 기도하신 요한복음 17장,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 하나님 앞에 아들로서 기도하는 기도, 어렵습니다. 그 기도를 요한이 옆에서 듣고 받아서 요한복음 17장에 기록해 두었는데, 그것은 누구에게 들려주려고, 보여주려고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아들로서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신적인 기도였습니다. 그래서 매우 어렵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 주기도문,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가 외우고 암송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랑하기 때문에, 뜨거운 긍휼의 마음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렇게 사랑으로 전인적으로 목회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 믿음의 백성들이 안나 할머니의 선지자 됨을 배우기 바랍니다. 아멘. 우리가 어렵고 힘겨운 인생을 살더라도 이 인생에서 하나님 앞에 절제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로 하나님을 잘 섬겨 간다면, 왕의 수라상을 차리는 선지자들이 될 줄로 믿습니다. 아멘. 전인적인 성장이 우리 모든 주의 백성들 한 분 한 분에게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84세의 노인이 신약 성경의 최초의 선지자가 된 것은 그의 신앙생활 때문이었습니다. 아셀 지파를 향한 예언 그대로 이분은 자신을 절제했고, 하나님의 뜻을 아는 기도로 신앙생활 열심히 한 사람이어서 왕의 수라상을 차리는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주여, 우리가 종교생활을 하는 자들이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일시적으로 드러내는 자들이 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진실로 하나님의 수라상을 차려드리는 믿음의 백성들이 되기를 원하오니, 하나님 우리의 믿음을 붙잡아 주시옵소서. 치우치지 않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성장처럼 우리도 전인적으로 성장하기를 원하오니, 우리의 뜨거운 가슴과 냉철한 지성이 하나가 되어서 올바르게 성장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