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는 알지 못하고 (눅 2:41-47)
아주 옛날 아라비아 사막에는 무거운 짐을 낙타에 싣고 사막을 횡단하는 대상들이 많았습니다. 그 많은 대상들 중에 탁월한 인물, 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는 한 사람이 있었는데 아부하산이라는 분이었습니다. 이분은 참으로 특별한 분이었습니다. 단 한 번도 짐을 싣고 가는 일정에 늦은 적이 없었습니다. 짐을 도둑맞은 적도 없습니다. 사막에서 길을 잃은 적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가 하면, 사막은 모래폭풍이 수시로 불기 때문에 지형이 순식간에 바뀝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을 잃어버리지 않고, 도둑들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도둑맞지 않고, 정해진 시간에 정확하게 물건을 배달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원래부터 이런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던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분은 후천적인 노력을 통해서 이 놀라운 일을 이룬 것입니다. 우선 이 사람은 항상 몸에 별자리 지도를 지니고 다녔습니다. 동서남북을 분간할 수 없을 때 하늘의 별을 보고 지금 내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를 알려주는 별자리 지도가 항상 그의 품 안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늘을 보고 지도를 보고 방향을 잡아갔습니다. 또한 이분은 낙타에 대해서 아주 박식했습니다. 항상 낙타를 본인이 직접 관리했습니다. 낙타가 어느 정도의 물건을 실을 수 있는지 정확히 알았기에 적정한 양의 무게를 싣고 떠났습니다. 낙타의 건강 상태도 세심하게 살폈습니다. 또한 이분은 직접 물과 식량도 챙겼습니다. 비교적 넉넉하게 챙겼습니다.
그런데 무조건 많이 가지고 간다고 좋은 것도 아닙니다. 아주 정확한 양, 그러나 넉넉한 양을 이분은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억력도 좋았습니다. 사막의 지형지물, 바위는 어디에 있고 언덕은 어디에 있는지도 기억하고 있는 분이었습니다. 이렇게 노력했기 때문에 최고의 자리에서 많은 운송료를 받으며 군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최고의 자리에 오래 있다 보니 본인도 스스로 자기가 최고인 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이 사람이 가슴에 별자리 지도를 가지고 다니지 않습니다. 하늘의 별자리는 매일 보는 것인데 내 머릿속에 다 입력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낙타의 상태도, 물과 식량도 본인이 챙기지 않습니다. 종들에게 시킵니다.
그만큼 했으면 이제 너희들도 알 수 있지 않겠느냐 하며 종들에게 맡깁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사막에 들어갔다가 거대한 모래폭풍을 만납니다. 지형지물이 바뀝니다. 그러나 그는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하늘의 별자리가 내 머릿속에 기억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하늘을 봅니다. 그런데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또한 그의 가슴에 별자리 지도도 없습니다. 동서남북을 분간할 수가 없습니다. 머릿속이 아득해집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며 며칠을 그 자리에 서서 기다리는데 낙타가 픽픽 쓰러지기 시작합니다. 낙타에게 과도한 무게를 실은 것입니다. 건강 상태가 좋지 않은 낙타를 끌고 왔습니다. 이제 물과 식량이 바닥나기 시작합니다. 꼼짝없이 죽게 된 상황입니다.
그런데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상인들 일행에게 발견되어 목숨만 건졌습니다. 그의 명성에 큰 흠집이 났습니다. 과거처럼 그에게 일이 많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매너리즘이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지금 잘하고 있다고 10년 뒤도 잘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과거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해서 오늘도 내일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누가 보장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누구도 보장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 말씀을 보면 예수님 가정 이야기입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님 신앙 교육을 아주 잘했습니다. 철저하게 신앙 안에서 길렀는데,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끔찍한 일이 닥칩니다. 상상할 수 없는 일, 절대로 가정에서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을 경험합니다.
우리는 이 상황을 보면서 과연 하나님 앞에서 깨어 있는지 우리 스스로를 살피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말씀대로 사는 부모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아버지 요셉이 예수님이 나신 지 41일째 되는 날 성전에 올라가서 정결 예식을 지냅니다. 그곳에서 시므온과 안나를 만났습니다. 그곳에서 그분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예언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갈릴리 나사렛에서 삽니다. 그런데 고향살이가 순탄치 않습니다. 배부르지 않은데 길을 떠난 여인, 결혼하기 전에 임신한 여인을 거둔 남자를 보는 고향 사람들의 입방아와 시선이 곱지 않습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아기 예수님은 잘 자랐습니다. 아이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잘 길러가신 덕분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12살 되었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41절과 42절을 보십시오. "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가" 유대인들은 1년에 세 번씩 성전에 올라가야 되는 관례가 있습니다. '이 절기의 관례'라 하는 것은 성경의 기록 방식입니다.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이 되면 항상 성전에 올라가서 자신의 모습을 보이고 예물을 드리고 예배드리는 것이 그들의 율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어릴 때부터 부모님의 손을 잡고 매년 성전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 당시의 일반적인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로마 압제 시절이었기 때문입니다. 본토에 살지 못하고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디아스포라(διασπορά) 유대인들입니다. 그런데 그들 입장에서는 멀리 타국에 사는데 율법대로 1년에 세 번이나 성전에 올라오는 것이 만만치 않습니다.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그런데 또 본토에 사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당시 사람들의 믿음이 좋지 못했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기록되어 있는데 삶은 그 말씀대로 받쳐주지 못했습니다. 멀리 있다고, 혹은 가난하다고, 혹은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유대인의 명절에도 성전에 올라가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정은 달랐습니다. 해마다 절기가 되면 요셉과 마리아는 아들을 앞장세워서 먼 길을 떠납니다.
이들이 살았던 갈릴리 나사렛과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은 거리가 약 150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습니다. 요셉의 직업이 목수였습니다. 가난한 목수입니다. 걸어서 가야 됩니다. 가는 길, 오는 길, 가서 명절을 지키는 시간까지 따지면 족히 한 달은 일을 못합니다. 입에 풀칠할 방법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리가 멀지만, 가난하지만, 하나님 말씀 성경에 이렇게 하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말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처음부터 그랬습니다. 이 두 사람이 원래부터 하나님 말씀을 중심으로 사는 분들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장 22절과 24절 말씀을 보십시오.
"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모세의 법대로',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세상의 법대로가 아니라, 자신의 형편대로가 아니라, 자신의 처지대로가 아니라 모세의 율법대로, 주의 말씀에 기록된 대로 행동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안에는 고통이 따릅니다. 피곤하기도 합니다. 물질적 어려움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그런 것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1-1. 하나님의 아들도
한 가지 질문이 생기지 않습니까?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다들 그렇게 살지 않는데, 다들 여러 가지 핑계로 누구도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은데, 우리가 그렇게 한다고 누가 알아주는가? 나만 이렇게 산다고 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복을 주시고 일확천금이라도 주시는가? 그런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이 있습니다. 지금 이들의 아들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굳이 이렇게까지 내 아들을 철저하게 신앙 교육시켜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하나님의 아들인데, 수태고지 받을 때 성령으로 잉태된 아들이라고 했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내가 이렇게 신앙 교육을 열심히 하지 않아도 때가 되면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텐데, 시간이 지나면 하나님이 메시아 정체성을 갖게 하실 것이고, 완벽한 신성과 완벽한 인성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실 텐데 내가 왜 굳이 이런 고생을 하면서 내 아들 신앙 교육을 해야 하는가? 이런 질문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의문을 가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질문 앞에서 거꾸로 한번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조차도 이렇게 부모가 철저하게 신앙 교육을 했는데, 그러면 우리는 내가 낳은 내 자식을 어떻게 훈련하고 신앙 교육하고 있는가? 우리 예수님은 태어날 때부터 완벽한 신성과 인성을 가지고 오신 분입니다. 그런데 부모님이 철저하게 말씀으로 양육했습니다. 우리 자녀들은 어떻습니까? 부모의 기질과 성품을 쏙 빼닮았습니다. 부모가 가진 좋은 성품도 있습니다. 좋은 기질도 있습니다. 좋은 달란트와 재능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악한 것도 있습니다. 이것 좀 닮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내 자녀는 이렇게 살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놀랍게도 나쁜 것은 얼마나 그렇게 잘 닮는지 모릅니다. 다 닮아 있습니다. 그들의 말투와 행동과 눈빛까지도, 하는 모든 것이 어쩌면 저렇게 나의 악한 모습과 똑같이 닮아 있는가 싶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신앙으로 훈련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치지 않고 가만히 내버려 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고, 부모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자녀들이 나이가 들어서 어른이 된다면 어떤 인간이 될 것 같습니까?
내가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을 때 내가 그렇게 고생하고 좌충우돌했던 일들이 내 자녀에게 똑같이 일어난다면 끔찍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부모는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신앙 교육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슨 배짱으로, 무슨 용감함으로 우리 자녀들을 신앙 교육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까?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제대로 갈고 닦지 않으면, 그들의 모난 부분을 다듬어 내지 않으면 자녀들이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조차도 이렇게 훈련했다는 이 가정을 보고 오늘 우리가 손 놓고 있는 우리를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 자녀들을 철저하게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치고 훈련해야 합니다.
1-2. 말씀이 삶의 토대가 되어야
유대인들에게는 신명기 법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신명기 율법에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신명기 6장 6절과 7절을 보십시오.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부모가 먼저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부모가 하나님의 말씀을 새기고 많이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앉아 있을 때든지 일어날 때든지 누워 있을 때든지 집에 있을 때든지 길 갈 때든지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부지런히 강론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철저하게 하나님 말씀이 우리 자녀의 밑바닥이 되도록 갈고 닦고 가르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토대가 되고 그 위에 집을 지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우리 아이들이 공부를 좀 잘하면 공부가 우선순위가 됩니다. 예체능을 잘하면 예체능이 우선순위가 됩니다. 입시 시절이 되면 우리 자녀들에게 입시가 먼저라고 가르칩니다. 취업 시즌이 되면 취업하는 것이 먼저라고 가르치고, 신앙생활은 다 때가 있으니 알아서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게 믿음 생활이 뒤로 밀리고 뒤로 밀리고, 하나님 말씀 읽는 것이 그다음 순위, 그다음 순위, 가장 꼴찌 후순위가 되면 우리 자녀들은 평생토록 살면서 하나님 말씀의 토대 위에 집을 지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그들의 토대는 무엇이 됩니까?
자신의 경험입니다. 일천한 경험, 그들이 배워온 지식은 얼마나 가벼운 것인지 모릅니다. 금방 흔들립니다. 그래서 그들의 인생에 위기가 왔을 때 반석 위에 집을 짓지 않아서, 모래 위에 지은 집이 되어서 금방 폭삭 무너집니다. 여러분, 우리가 부모로서 믿음 위에 집을 짓도록 말씀을 먼저 가르치는 것이 우선입니다. 어디 자녀 교육뿐이겠습니까? 우리 믿음의 백성들의 직장생활도, 우리의 가정생활도, 우리의 삶도 하나님 말씀이 먼저 토대가 되어야 합니다. 철저하게 하나님 말씀이 토대가 되고 그 위에 우리의 일터가 있고, 그 위에 우리의 가정을 세우고, 그 위에 내 삶을 세워야지 직장도, 일터도, 내 가정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말씀 위에 서 있지 않은 가정은 금방 흔들립니다. 말씀 위에 서 있지 않은 내 직장생활은 내 기분이 변하면 금방 흔들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철저하게 내 삶의 기초가 되고 중심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깨어 살피는 삶
이제 이분들이 유월절을 잘 지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일어난 일입니다. 43절에서 45절을 보십시오.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아이를 키우다 보면 몇 번씩 이런 일을 겪습니다. 공원에 갔는데 잠깐 손을 놓친 사이 아이가 보이지 않습니다. 쇼핑센터에 갔는데 금방 아이가 사라지고 보이지 않습니다. 아득해집니다.
눈앞이 캄캄해집니다. 가슴이 막 뛰기 시작합니다. 그런 정도의 일들은 우리 누구나 자녀를 기르면서 경험해 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지금 이 가정에 일어난 일은 그런 정도의 해프닝으로 그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상황을 하나님의 눈으로, 영적인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익숙함이 주는 맹점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지난 11년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지난 11년 똑같이 예루살렘 성전에 와서 유월절을 지키고 예배드리고 명절 지키고 돌아갔는데, 아이는 항상 동행 중에 있었습니다. 올해도 그런 줄 알았습니다. 하룻길을 가는 동안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사고가 터지지 않습니까? 하룻길을 갔는데 아이가 보이지 않습니다. 하루나 왔는데 일가친척들 중에, 같이 온 사람들 중에도 아이가 보이지 않습니다.
부모의 가슴이 방망이질 칩니다. 눈앞이 캄캄해집니다. 어디서부터 도대체 잘못된 것인가? 이 아이가 어디서 떨어진 것인가? 걱정과 염려가 이 부모의 가슴을 쥐어짜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아무 일이 없었다고 해서 앞으로도 아무 일이 없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11년 동안 아무 일이 없었다고 해서 12년, 13년, 앞으로 20년까지 아무 일이 없다고 보장할 수 있습니까? 이 부모들은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습니다. 자녀를 믿음 안에서 철저하게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이만큼 성장한 것을 몰랐습니다. 아들이 영적으로 성장해서 랍비들과 성경을 가지고 토론할 만큼 성장한 것을 몰랐다는 말입니다. 내 자식을 몰랐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항상 깨어서 살펴야 하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내 자녀가 신앙의 성장을 하는지 못하는지를 몰랐습니다. 내 자녀가 악의 길에, 악의 수렁에 빠졌는지도 모르는 부모가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내 자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이들이 어떤 상황을 살아가는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아무 일이 없었다고 해서 앞으로도 별일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미 교만입니다. 우리 가정이 평안했습니다. 결혼하고 20년, 30년 평안했습니다. 그렇다고 40년, 50년이 평안하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살펴야 합니다. 내 아내의 마음을 살피고, 내 남편의 마음을 살피고, 우리 가정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살펴야 하는데 살피지 못하고 제대로 깨어 있지 않으니 이런 문제가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까? 매너리즘이 주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2-1. 초대교회의 교훈
그 옛날 초대교회가 하루아침에 크게 부흥했습니다. 베드로가 한 번 설교하니까 3천 명이 회개하고 세례받았습니다. 또 한 번 설교하니까 5천 명이 회개하고 세례받습니다. 한순간에 교회가 대형교회가 되었습니다. 지도자들도 기도합니다. 제9시 기도 시간을 정해놓고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합니다. 올라가다가 날 때부터 앉은뱅이가 된 사람을 기도해 주어 그를 고치기도 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도 해결하고, 구제 문제도 해결하고, 교회는 든든하게 서 가기 시작합니다. 성도들은 모이면 기도하고, 날마다 떡을 떼며 서로 함께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돈 있는 사람들은 자기 돈을 다 내어놓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습니다. 서로 유무상통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 교회가 얼마나 행복한 교회입니까? 이런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고 싶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너무나 행복해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교회가 초심을 잃어버렸습니다.
교회가 세워지기 전에 우리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성령 받았습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불이 혀같이 갈라지는 것처럼 각 사람에게 임했습니다. 권능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왜 예루살렘에만 머물러 있습니까? 이 자리가 좋기 때문입니다. 3천 명 돌아오고 5천 명 돌아오고, 매 주일 성도가 불어나는 것과 숫자 세는 것이 즐겁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모여서 떡을 떼고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것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어디서 이런 공동체를 만날 수 있겠는가 싶어 행복했기 때문에 그 자리에 머물러 있고 나가지 않습니다. 초심을 잃어버렸습니다.
잘 되고 있는 것 같은데, 사실은 교회가 병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교회를 가만히 두고 보지 않으십니다. 핍박을 주십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순교합니다. 요한의 형제 야고보가 순교합니다. 교회에 피바람이 불고서야 그들이 깨닫습니다. 그렇구나, 우리가 흩어지지 않았구나, 우리가 사명을 잃어버렸구나. 그 사명을 가지고 온 유대로 사마리아로 땅끝으로 전도하러 나갑니다. 빌립 집사님은 사마리아에 갔고, 흩어진 백성들은 안디옥에 가서 교회를 개척하고 바울과 바나바를 파송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초심을 잃어버리면, 잘 된다고, 여기가 너무 좋다고, 우리 가정도 일터도 교회도 너무나 좋다고 머물러 있다 보면 언제 어디서 사건사고가 터질지 모르는 폭탄 같은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나중에 후회해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 말씀을 보십시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닌다고 했습니다. 삼킬 자를 찾으려고 돌아다닙니다. 어떤 자를 삼키겠습니까? 깨어 있지 않은 자, 근신하지 않은 자입니다. 근신하고 깨어 있는 자는 사탄 마귀가 아무리 우리 주변에 많이 있어도 어떻게 하지 못합니다. 삼킬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사탄 마귀에게 삼켜지지 않으려면 우리는 영적으로 각성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11년째 아무 문제가 없었다고 12년째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눈을 켜고 자녀를 찾아야만 했습니다.
출발할 때부터 이 아들이 어디에 있는지 살피고 또 살펴야 했습니다. 우리의 삶에 우리 가정의 문제가 없어도 가정을 살펴보십시오. 내 자녀들의 영적 성장과 성숙을 살펴보십시오. 내가 사업하는 일터를 살펴보십시오. 무엇보다도 내 마음을 살펴보십시오. 내 생각을 살피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그 초심을 가지고 내가 살아가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나를 살피고 깨어 있고 근신해야 우리는 문제에 발목 잡히지 않습니다.
3. 듣고 묻는 삶
이제 부모는 예루살렘까지 갑니다. 그곳에서 아들을 만납니다. 46절과 47절을 보십시오.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런데 또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놀라운 광경입니다. 12살 먹은 아이가 랍비들과 대화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말을 만납니다. '듣기도 하시고 묻기도 하시니'라는 말입니다.
듣고 묻는 것, 한 단어로 말하면 무엇입니까? 대화입니다. 대화의 기본이 듣는 것이고 묻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이렇게 축약적으로 요약해 놓은 단어가 없습니다. '듣기도 하시고 묻기도 하시니', 우선 우리 예수님께서 공생애의 삶을 사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듣고 묻지 않았습니까? 우리 예수님은 새벽 미명에 늘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해서 기도합니다. 하나님 앞에 항상 엎드립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했고, 새벽마다 기도하셨고, 십자가에서도 기도하셨고,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 주님은 항상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셨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리고 묻습니다. 하나님과 대화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과만 대화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과도 대화하셨습니다. 먼저 들어주셨습니다. 질문을 받으셨습니다. 특별히 제자들의 질문을 잘 받아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질문을 받지 않습니까?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 말씀하시고 나니까 제자들이 다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있는데, 도마가 묻습니다. "예수님, 저희는 그 길을 모르겠습니다. 어디로 가십니까?" 그때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제자들의 질문을 주님은 한 번도 비난하거나 책망하거나 모른 척하지 않으셨습니다. 다 들어주시고 다 수용해 주셨습니다. 빌립의 질문도 우리 주님은 다 들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하나님과도 듣고 대답하시고, 사람들과도 먼저 듣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예수님의 듣고 대답하는 방법, 듣기도 하시고 묻기도 하시는 이 방식을 잘 배워야 합니다.
3-1.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
우리는 하나님과 어떻게 대화하십니까? 믿음이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하나님의 음성을 먼저 들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들리지 않는다고, 하나님의 음성을 어떻게 들을 수 있느냐고. 다양한 방식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 내 앞에서 읽어주시는 당신의 음성입니다. 설교 들을 때 하나님께서 나에게 깨닫게 하시는 말씀이 하나님이 나에게 들려주시는 음성입니다. 나를 위하여 간절하게 기도해 주시는 분들이 기도하고 나에게 충고하는 그 말씀이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서 나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다양한 형태로 나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을 통해서, 성경을 통해서, 자연을 통해서도 다양하게 말씀합니다. 이것을 우리가 겸허하게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사람들 이야기도 잘 듣고 대답해야 합니다. 믿음이 어린 사람, 신앙이 성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먼저 내가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성숙한 사람들은 불만이 있는 사람, 말 많이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줍니다. 가정에서도 불만이 고조되어 있는 사람 이야기를 잘 듣는 한 사람이 있으면 그 가정에는 평화가 찾아옵니다. 어떤 공동체든지 들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그 공동체는 싸울 일이 없습니다. 먼저 듣고, 듣고 난 다음에 하나하나 풀어가면 됩니다. 되짚어가고, 질문하고, 소리 지르기 시작하고, 감정부터 앞세우기 시작하고, 내가 할 말부터 내세우기 시작하면 그것은 성숙한 인격이 될 수가 없습니다. 순서가 중요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듣기도 하시고 묻기도 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의 사역을 이렇게 요약해서 설명한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 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아들조차도 요셉과 마리아는 철저하게 교육했습니다. 우리 자녀들 믿음의 토대 위에 제대로 세워 가시기 바랍니다. 우리 자녀 교육뿐만 아니라 내 삶의 모든 부분을 하나님 말씀의 토대 위에 굳게 세워 가시기 바랍니다. 처음에 가졌던 그 마음 흔들리지 않고 깨어 있으면서, 잘 되고 있다 할지라도 다시금 깨어서 근신하고 살피는 지혜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인데도 열심히 신앙 교육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토대 위에서 부지런히 가르쳤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도 우리 자녀들을 철저하게 하나님 말씀으로 교육하기를 원합니다. 말씀으로 그들을 가다듬지 않으면 내가 가진 인격과 나의 악한 습관들이 자녀에게 고스란히 물려질 텐데 걱정되고 염려됩니다. 주여, 우리가 하나님 말씀으로 자녀를 기르게 하여 주시고, 하나님 말씀 위에 내 삶과 우리의 모든 것들을 다 올려놓고 집 짓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하나님, 우리 자신들이 깨어서 근신하며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11년째 문제가 없었다고 12년째 잘 된 것이 아닌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 가정과 일터와 우리 교회 공동체 모든 것을 깨어서 지속적으로 살피고 돌이키며 돌아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이 하신 사역처럼 우리가 먼저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사람들의 말도 듣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성숙한 인격으로 믿음 생활 잘해 나가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