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하여 우리에게 (눅 2:48-52)
과거 우리나라 가정에서는 자녀를 적어도 셋 이상씩 낳아 길렀습니다. 그 아이들이 동네에 나가 함께 뛰어놀고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서로 티격태격하며 싸우기도 하고 그 안에서 질서가 생겨났습니다. 그러므로 아이들의 사회성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많은 아이들이 가정에서도, 동네에서도, 학교에서도 자연스럽게 질서를 배워나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가정에서 자녀를 많이 낳지 않습니다. 주거문화는 아파트문화로 바뀌었습니다. 학원을 보내지 않는 가정은 이제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사회화를 경험하고 사회성을 배울 수 있는 공간이 이전보다 현저히 줄어들었습니다.
이제는 우리 자녀들의 사회성이 문제가 되는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전문가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마치 국어, 영어, 수학을 배워야 하는 것처럼 자녀들의 사회화도, 그들의 사회성도 이제는 익히고 배워야 하는 시대가 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우리 자녀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녀들이 사회성을 누구에게 배우겠습니까? 부모를 통해서 배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부모가 마음을 열고 자녀들과 적극적으로 의사소통하고, 그들을 공감하고, 그들과 갈등을 해결하고, 협력하지 않으면 자녀들의 사회성은 길러지기 어렵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 부모가 자녀를 자기 소유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 소유로 생각하는 순간, 아이들과의 상호 협력과 의사소통과 감정 조절은 의미가 없어집니다. 이미 내 것인데 내가 왜 굳이 힘을 들여가며 자녀들과 감정을 조절하고 의사소통하려 하겠습니까? 그래서 가정의 많은 문제들, 우리 자녀들에게 일어나는 수많은 문제들은 부모가 자기 자녀를 소유물로 생각하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거기에서부터 갈등이 촉발된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 말씀을 보면 요셉과 마리아도 자녀 교육을 훌륭하고 충실하게 잘한 가정입니다. 그런데 은연중에,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 자녀를 소유물로 생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어디 자녀 문제뿐이겠습니까?
우리 주변에 살아가는 모든 것,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이 모든 것들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청지기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야 우리 인생의 많은 문제들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과연 청지기 의식을 가지고 살고 있는지 스스로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소유 의식과 청지기 정신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아버지 요셉은 철저하게 말씀 중심으로 사는 분들이었습니다. 어떤 상황이나 환경보다 하나님 말씀이 그들의 삶의 중심에 서 있었습니다. 매년 유월절이 되면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멀리 예루살렘까지, 자신의 경제적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다녔습니다.
철저하게 자녀를 신앙으로 훈련하고 교육했습니다. 지금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열두 살 되던 해 유월절에 문제가 생깁니다. 아이가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돌아보아도 없습니다. 일행 중에 없었습니다. 뒤돌아 뒤돌아 가보니 성전에서 랍비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듣기도 하시고 묻기도 하시면서 하나님 말씀을 토론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또 얼마나 미웠겠습니까? 얼마나 화가 났겠습니까? 아이를 보고 어머니가 한 말입니다. 48절을 보십시오.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상당히 품위 있는 어머니가 아닙니까?
만약 우리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당장 등짝을 때리고 멱살을 잡고, 하고 싶은 말 있는 말 없는 말, 욕설을 내뱉는 등 이 모든 것을 다 한꺼번에 하는 부모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우리 같으면 있는 감정을 다 쏟아부어서, 화나는 것을 3일 만에 찾은 아들에게 성질대로 다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어머니 마리아는 상당히 품위가 있습니다.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며 너를 찾았노라." 상당히 기품 있는 어머니가 아닙니까?
1-1. “아이야”
그런데 그렇게만 볼 것이 아닙니다. 어머니 마리아가 한 말 속에서 우리는 그분의 진심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이야"라는 말입니다. 보통 '아이'라는 말에 헬라어로 파이디온(παιδίον)이라는 말을 씁니다. 어린아이라는 말의 총칭입니다. 남자아이, 여자아이, 여기서는 가치중립적인 단어입니다.
어린이들을 다 파이디온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파이디온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습니다. 테크논(τέκνον)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아이야"라는 말에 이 테크논이라는 말의 동사 형태가 틱토(τίκτω)인데, 이 말은 산고를 겪다, 어려움을 겪고 출산하다라는 뜻입니다. 즉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내가 너를 죽을 뻔하며 낳았는데,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네가 나에게 이렇게 할 수 있단 말이냐"라는 뜻입니다. "내가 너 배 아파서 낳았는데, 태중에 열 달이나 있었는데, 내가 너 때문에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얼마나 많이 받았는 줄 아느냐.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나에게 이렇게 할 수 있단 말이냐"라는 말이 테크논(τέκνον)이라는 말 속에 그대로 녹아 있습니다.
애정이 담긴 말이면서 동시에 강한 소유가 함께 내포되어 있는 말입니다. "넌 내 것인데 어떻게 네가 나에게 이렇게 할 수 있느냐,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할 수 있느냐"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여기에 마리아가 평소에 이 아들을 어떻게 생각했는지가 강하게 드러나지 않습니까? 내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내 것이라고.
그런데 마리아도 알고 있습니다.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수태고지를 받지 않았습니까? 결혼도 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되어 아기를 가졌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아들입니다. 700년 전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던 그 아이입니다. 그러므로 내 소유가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누구보다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마리아입니다.
1-2. 하나님의 기업
그런데 이 마리아도 12년 동안 이 아이를 길러가면서 자기도 모르게 이 아이가 내 것이라고 생각해 버린 것입니다. 은연중에 결정적인 순간에 이 아이에 대한 소유권이 하나님에게 있지 않고 나에게 있다는 말을 해버리지 않습니까? 시편 127편 3절을 보면 "자식은 여호와의 기업"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의 기업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기업입니다. 하나님의 기업인데 왜 나에게 주셨습니까? 내가 청지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를 기르는 청지기로 세우셨습니다. 때가 되어서 하나님의 기업을 나에게 선물로 주시고 잘 키워 달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셨습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 잘 키웠습니다. 하나님께서 뜻하신 바대로 길렀습니다. 하나님 뜻대로 이제는 사용하십시오"하고 내어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자식은 나의 기업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업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몇 세에 낳았는지 알고 있습니다. 백 세에 낳지 않았습니까?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을 때 그의 상태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남자로서의 기력이 다 쇠했습니다.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건강 상태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사라는 또 어떻습니까? 여성으로서의 경수가 끊어진 상태였습니다. 아이를 출산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해서 이삭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누구의 아들입니까? 이 아들은 내 아들이 아니라 그 소유가 분명히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유된 아들이 바로 이삭입니다. 아브라함도 알고 있습니다. 내가 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중에 낳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삭을 마치 내 것처럼, 내 것인 양 그렇게 길렀습니다. 하나님이 가만히 두고 보지 않으십니다. 소유권의 문제를 분명히 하자. 이 아이가 네 것이냐, 내 것이냐. 창세기 22장 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을 비꼬는 말입니다. 내 것인데 마치 너는 너의 아들인 것처럼, 네가 사랑하는 독자인 것처럼 그렇게 살고 있구나. 모리아 산으로 데리고 와라. 소유가 누구에게 있는지 분명히 한번 밝혀보자.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 대한 강력한 경고입니다.
너는 청지기인데 왜 너의 아들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느냐, 너는 청지기로서의 사명을 다하라는 경고의 말씀이었습니다. 여러분, 어디 자식 문제만 우리가 청지기로서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재산과 건강과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인간관계가 다 하나님의 것이고, 우리는 다 그 일을 위임받아서 살고 있는 청지기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태어날 때 우리는 알몸으로 나오지 않습니까? 세상을 떠날 때도 알몸으로, 빈손으로 떠납니다. 그러면 그 가운데,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살아가는 여정 가운데 우리가 부여받고 살아가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터, 하나님이 허락하신 사람들, 하나님이 허락하신 자녀를 우리가 잘 길러가며 함께 섬기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 청지기로서의 사명이 아니겠습니까? 그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고 청지기의 의무가 되어야 합니다.
1-3. 욥의 고백
이것을 가장 잘 표현한 사람이 욥입니다. 욥기 1장 21절과 22절을 보십시오.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자녀를 한순간에 다 잃었습니다. 재산도 한순간에 다 잃었습니다. 가슴이 아픕니다. 눈물이 납니다.
억울합니다. 그런데 욥은 그런 상황에서 이런 고백을 드리고 있습니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라"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 한 번 하지 않았던 사람이 바로 욥이었습니다. 청지기 정신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정말 하나님 것이라고 고백하며 살고 있습니까?
이 교회는 누구의 것입니까? 우리는 머리로는 알고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것이고,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어떨 때는 교회가 마치 목사의 것인 것처럼, 교회가 마치 장로님들의 것인 것처럼, 교회가 마치 이 교회에 가장 오래 다닌 분의 것인 것처럼, 헌금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의 것인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고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교회에 대한 청지기 정신을 철저하게 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하나님의 몸 된 교회의 청지기들입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종들입니다. 목사는 그중에 상머슴입니다. 장로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두가 머슴이고 종들이고 청지기들이지, 소유를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입니다. 종들이 종의 일을 하고 상 받는 것 보셨습니까? 종이 종의 일을 하고 영광받는 것 보셨습니까? 종은 그냥 종일 뿐입니다. 청지기는 그저 성실하게 청지기의 일을 감당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런데 왜 내 것을 자꾸 주장하고 거기에 대한 지분을 주장하는 것입니까? 그것을 주장하는 순간, 그때부터 우리는 집착을 가지게 되고, 그 집착을 이루지 못할 때 불행해집니다.
1-4. 어리석은 부자
예수님께서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원래부터 부자였습니다.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기 창고에 곡식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해 농사가 또 잘 되었습니다. 그는 심중에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곳간을 다 헐고 새로 크게 짓고 거기에 곡식을 또 채워야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이렇게 되뇝니다. 누가복음 12장 18절과 19절을 보십시오.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이 사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내 곳간입니다. 내 물건입니다. 내 곡식입니다. 내 영혼입니다. 거기에 청지기 의식이 없습니다. 다 내 것입니다. 전부 다 내 것.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것인 줄 알았습니다. 이 창고에 있는 모든 곡식이 다 내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주인이 따로 있었습니다. 내 영혼은 내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주인이 따로 계셨습니다. 찾으신다고 하니 막을 길이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청지기 정신을 가지고 살지 않으면 갑작스러운 이런 불행을 겪을 때 경황이 없습니다. 감당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청지기 정신을 가지고 제대로 살아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습관적으로 시간이 지나면서 "이것 다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집착과 고집이 생기며, 거기에서부터 내 인생의 불행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정확한 청지기 정신을 가지고 다시 한번 결단하시기를 바랍니다.
2. 영적 독립의 의미
4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상당히 기분 나쁜 말을 아들이 합니다. 사실 부모 같으면 이런 상황이 되면 무조건 아이가 "어머니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비는 것을 기대하는데,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몰랐습니까?" 당황스러운 아들의 대답이 아닙니까? 열두 살 아들의 대답입니다.
그런데 부모가 이 말을 마냥 기분 나쁘게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굉장히 기뻐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왜 그렇습니까?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청지기 정신을 가지고 신앙교육을 철저하게 한 12년의 열매와 결과가 지금 빛을 보는 순간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 아버지를 진실로 내 아버지로 고백하고 깨닫는 순간입니다. 나를 낳아주시고 나를 길러주신 내 육신의 부모 위에 하늘 아버지가 참아버지시다. 저 하늘에 나의 참아버지가 계신다는 정체성의 고백이 지금 예수의 입을 통해서 터져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청지기 정신의 승리입니다. 그 열매입니다.
2-1. 유아세례와 입교
이것이 왜 중요합니까? 우리가 유아세례를 베풉니다. 유아세례는 부모의 신앙 고백입니다. 어린아이가 자기 의지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유아세례의 결단은 부모가 이 아이가 스스로 자기 신앙을 고백할 때까지 내가 책임지겠다는 결단입니다. 부모가 결단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잘 기르고 잘 키워서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게 되면 바로 그것이 입교입니다. 그래서 입교는 이 아이를 축복하는 것도 되지만 부모가 축복받아야 합니다. 고생하셨다고. 그 아이의 사춘기 시절을 다 받아내고 이 아이를 성장시켜서 하늘 아버지를 참아버지로 고백하는 순간, 거기까지 올 때까지 부모님들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애쓰셨습니다, 축복받아 마땅합니다 하고 격려하는 자리가 바로 입교의 자리입니다. 지금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요셉과 마리아는 아들을 정말 잘 길렀습니다.
이제 영적으로 독립시켜도 되는 자리까지 왔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왜 중요합니까? 우리 자녀들이 나이가 스무 살이 되었다고 성인이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아이들이 직업을 가졌다고 이제는 독립할 수 있다는 것도 아닙니다. 시집 장가 갔다고 어른이 된 것이 아닙니다. 보십시오. 결혼하고 시집 장가 가도 문제만 생기면 엄마 아빠 찾아옵니다. 가정에 분쟁만 생기면 그냥 엄마 아빠 찾아옵니다. 경제적인 문제만 생기면 아버지에게 손을 벌립니다, 어머니에게 손을 벌립니다. 이 문제 해결해 달라고 그냥 엎드려 옵니다. 하늘 아버지를 자기 아버지라고 고백했다면, 하나님께 달라고 해야지요. 이제 내 아버지는 늙고 병들어 가고, 내 어머니는 기력이 쇠하여 가는데, 신앙생활 똑바로 하고 영적인 독립이 된 자녀라면 육신의 아버지 어머니에게 기대지 않습니다.
이제는 영적으로 독립하고 성장했다면, 하늘 아버지에게 울고불고 거기서 해결해야 합니다. 거기까지 부모가 길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청지기 정신의 승리입니다. 우리 자녀들을 보십시오. 우리가 정말 자녀교육 제대로 했는가? 우리가 교회교육을 제대로 했는가? 기독교 교육의 목적이 바로 영적인 자립입니다. 영적인 자립은 자기 문제를 하나님과 부둥켜안고 해결하는 자리까지 내보내고 그 자리에 세우는 것이 기독교 교육의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가정은 신앙교육을 제대로 한 것입니다.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정말 이렇게 우리 다음 세대를 길러내고 있습니까? 문제가 생기면 육신의 부모 찾지 않고, 영의 아버지, 하늘 아버지를 찾아서 그 안에서 해결하도록 자녀가 영적인 독립을 이루었는가? 거기까지 우리는 기도하고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2-2. 부모의 역할
그것만 되면 부모는 걱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내 자녀가 인생에 문제가 생겨서 하나님을 찾는데, 이제 부모는 뒤에서 기도만 해주면 됩니다. 이제 부모는 뒤에서 응원만 해주면 됩니다. 힘들더라도 네가 길을 찾아가라.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해결해 나가라. 그것이 육신의 부모가 할 일이 아닙니까? 언제까지 뒤를 다 봐주고, 언제까지 다 뒤치다꺼리 해줍니까? 오늘 예수님의 성장은 열두 살에 하늘 아버지를 자기 아버지로 고백하면서, 이제는 영적으로 성장하여 부모로서 할 일을 다 한 것입니다. 박수받아 마땅하고 축복받아 마땅한 부모의 사명을 다한 것입니다.
5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열두 살에 일어난 일이고, 예수님께서 공생애의 삶을 시작하시던 서른이 될 때까지 18년 동안 자신의 육신의 부모를 순종하며 세우고 받드셨다는 말입니다. 18년 동안. 여러분, 이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질서가 세워졌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하늘 아버지를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는 순간, 질서가 세워져서 내 육신의 부모도 당연히 공경하게 됩니다.
3. 관계의 완성
이것은 성경이 정한 순서입니다. 십계명의 돌판이 두 개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모세에게 주셨을 때 십계명 돌판 두 개를 주셨습니다. 하나에는 제1계명부터 제4계명까지 새겨져 있습니다. 그 제1계명부터 제4계명까지는 다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이 4계명이 적혀 있습니다. 두 번째 돌판, 첫 번째 계명이 무엇입니까? 다섯 번째 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과의 질서가 세워지면 부모 공경은 당연히 되는 것입니다. 거꾸로는 없습니다. 하나님 없이 부모 공경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은 형식으로는 할 수 있어도 마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철저하게 세워진 예수님, 이제는 자신의 육신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를 순종하며 받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자녀교육할 때 효도하라, 부모 공경하라 입 아프게 얘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앙교육이 제대로 되고 스스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고백하게 되면 부모를 공경하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불효자들, 그들 중에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찾아본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 문제가 있기 때문에 부모와의 관계도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서면 당연히 육신의 부모를 순종하며 받들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 그 관계는 또 확장되어 갑니다.
3-1. 수직과 수평의 관계
52절을 보십시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에게 사랑받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당연하다고 하더라도, 사람에게 사랑받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사셨던 곳이 나사렛이었습니다. 예수님 부모님의 고향 마을이 아닙니까? 이 고향 마을 사람들이 마리아와 요셉을 보는 눈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아무리 성령으로 잉태했다고 해도 사람들이 믿지를 않습니다.
결혼하기 전에 이미 마리아의 배가 불렀습니다. 요셉은 그것을 문제 삼지 않고 데리고 와서 같이 삽니다. 같이 결혼해서 살았습니다. 사람들이 입방아를 찧습니다. 손가락질합니다. 그런데 아들 예수가 태어나서 30년 동안 그 마을에서 살면서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많이 노력해야만 했을까요?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감화와 감동을 줘야 사람들의 여론을 바꿀 수 있었겠습니까? 손가락질 하던 사람들, 비난하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조차도 우리 예수님이 사랑받았다는 것은 그분의 삶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본이 되고 기쁨을 주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면 부모와의 관계가 바로 세워지고, 그다음 수평적으로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도 사랑받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수직과 수평을 예수님이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땅에 있는 나와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의 수직의 관계와, 나와 부모와의 관계, 나와 이웃과의 수평의 관계도 완전하게 이루신 공생애 이전의 삶이었습니다. 이 삶은 공생애의 삶에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보십시오. 세로 막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아닙니까? 가로 막대, 나와 이웃의 관계 아닙니까? 예수님은 그 중심에 계셨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예수님의 삶을 통해서 우리 신앙교육의 중심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우리가 과연 청지기 정신을 가지고 살고 있는지 스스로를 돌아보았습니다. 돌아보고 결단한 것이 있다면 그 결단한 대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다 내 것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다 하나님의 것을 빌려서 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 청지기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도록 도우시고, 모든 것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니 하나님께 모든 영광 올려드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세워지면 부모와의 관계도, 이웃과의 관계도 바로 세워진다고 말씀하셨사오니,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선 잘 세워가는 믿음의 백성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