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강 / 빈들에 임한 말씀 (3:1-2)

빈들에 임한 말씀 (눅 3:1-2)

18세기 프랑스 왕실에는 여러 궁정 화가들이 활동했습니다. 그중에 가장 잘 알려진 화가는 프랑수아 부셰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분은 루이 15세의 전속 초상화가였던 궁정화가로서, 루이 15세의 가족들과 일가친척, 그리고 당시 프랑스 왕실에 드나들던 귀족들의 삶을 그림으로 그렸던 대단히 유명한 인물이었습니다. 이 분이 많은 그림을 그렸는데, 그중 대표작이 퐁파두르 부인에 대한 초상화였습니다. '마담 퐁파두르의 초상'이라는 그림인데, 이 그림을 보면 이 여인이 어떤 모습처럼 보입니까? 아름답고 자태가 곱고 굉장히 우아한 모습으로 보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실 퐁파두르 부인은 루이 15세의 정부(情婦)였습니다. 정치를 어지럽게 하고 혼란스럽게 했던 여인입니다. 하지만 이 그림에는 그런 모습이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실 부셰는 미술이라고 하는 것, 그림이라고 하는 것은 아름다운 사람과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현실을 외면했습니다. 현실의 고통과 현실의 아픔, 사람들의 일상과 상황을 외면했던 대표적인 궁정 화가였습니다. 하지만 그 대척점에, 정반대편에 서 있었던 화가도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장 프랑수아 밀레 같은 사람입니다. 이 분이 그린 대표적인 그림이 '이삭 줍는 여인들'이라는 작품입니다. 1857년도 작품인데, 이 그림을 자세히 보면 투박한 농부의 손이 거침없이 느껴지고, 참으로 고단한 현실에 허리를 굽혀 가며 이삭을 줍는 여인들의 농촌 모습이 그려지지 않습니까? 전원적인 아름다움이라기보다는 피곤하고 고단한 일상을 화폭에 담아낸 그림입니다.

사실은 피하고 싶고 외면하고 싶은 현실이지만, 우리의 현실 가운데 이런 모습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사실 이런 모습을 보면 우리 인생은 이원화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궁정의 화려한 삶을 쫓아가는 것처럼, 불나방처럼 먹고살기 위해서, 부귀영화를 위해서, 돈이 있고 명예와 권력이 있는 곳을 향하여 달려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곳에 뭔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또 어떤 사람들은 그 반대편, 낮고 낮은 곳에, 빈들 그 들판에 어딘가에 있을 연약한 자들, 가난한 자들과 함께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1.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해 봐야 됩니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보통 우리가 이렇게 질문하면 "하나님은 화려한 궁전에 계시지 않고 빈들에 계십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대답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습니다. 하나님은 궁전이라고 해서 무조건 터부시하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삶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다윗이 들판에서 목동으로 양을 치고 있을 때 하나님은 함께하셨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서 광야를 전전할 때 함께하셨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어서 왕궁에, 왕좌에 앉아 있을 때도 하나님은 함께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왕궁이라고 함께하지 않고 들판이라고 무조건 함께하는 그런 이분법적인 하나님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진실한가 그렇지 않은가, 그 사람이 하나님을 모실 만한 자격이 되는가 그렇지 않은가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모실 만한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궁전에 있든지 들판에 있든지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은 항상 그분과 함께하시는 분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정반대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빈들에 있는 요한과 함께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요한과 함께하실 수 있었는지,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신 의미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인지, 우리는 세상의 중심을 어디라고 생각하는지,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함께 느끼고 깨닫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2. 권력의 체계와 시대적 정황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 말씀 누가복음 3장 1절의 말씀을 보면 좌표가, 시대적 정황이 정확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있을 때"(눅 3:1)

2-1. 디베료 황제의 통치

이때 시대를 대표하는 사람을 디베료 황제라고 했습니다.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라고 했습니다. 디베료 황제는 누구입니까? 우리가 로마 역사에서 볼 수 있는 티베리우스 황제가 바로 이 사람입니다. 티베리우스 황제의 풀네임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입니다. 이 분의 재위 기간은 서기 14년부터 서기 37년까지입니다. 총 23년을 재위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분이 다스린 지 열다섯 해가 되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대략 서기 28년 혹은 29년 정도 되는 어간, 바로 그때의 일입니다.

사실 티베리우스 황제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려면 이 사람의 선대왕을 알아야 됩니다. 이 분의 선왕은 그의 양아버지였던 아우구스투스 황제입니다. 로마의 팍스 로마나 시대를 열었던 최초의 황제가 바로 아우구스투스 황제 아닙니까?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굉장히 전략적이고 공격적이었습니다. 이 분은 국정 운영을 식민지 개척에 거의 전 생애를 바쳤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습니다. 이 사람은 식민지 운영을 제대로 했고 국토를 넓히는 데 전 생애를 걸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세금을 많이 걷어야 됩니다. 식민지를 운영하려면 속주에도 세금을 많이 부과해야 되었고, 식민지에서 끌고 온 짐승들과 검투사들의 대결도 주선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 사이에는 오락거리를 제공했기 때문에 굉장히 인기가 높았습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자신의 주머니를 털어가는 세금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이 분의 양아들 티베리우스가 황제가 됩니다. 티베리우스는 자신의 선왕과는 정반대의 정치 성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소극적이었습니다. 그리고 보수적으로 국정을 운영했습니다. 식민지 개척을 더 이상 하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벌여 놓았던 사업들을 정리합니다. 세금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그래서 국가 재정이 아주 빠르게 안정을 찾았습니다. 백성들은 좋아했습니다. 세금을 많이 걷어가지 않으니까요. 식민지 속주들에게도 과중한 세금을 더 이상 부과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요구했던 것 딱 한 가지가 있습니다. 속주가 조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속주에 총독을 임명했는데, 총독에게는 한 가지만 요구합니다. 과도한 세금도 필요 없다, 많은 특산물도 필요 없다, 오직 한 가지 독단적으로 어떤 일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항상 황제와 상의하고 일을 하고 전쟁을 벌이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2-2. 본디오 빌라도

이때 티베리우스가 임명한 사람이 유대 총독 본디오 빌라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빌라도가 왜 예수의 재판을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는지가 명확해집니다.

예수님 재판할 때 어떻게 했습니까? 사람들이 소요가 일어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의 정신적 지주였고 희망이었는데, 예수님이 무기력하게 십자가를 지려고 하니까 사람들이 분노합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합니다. 바라바를 석방하라고 합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신문해 보았을 때 아무런 죄가 없는 것을 알았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석방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풀어 주면 민란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소요 사태가 일어날 것 같습니다. 그것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적어도 빌라도에게는 말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님을 넘겨주고 손을 씻어 버리지 않습니까? "나는 죄가 없다, 나는 무죄하다." 바라바를 석방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준 빌라도입니다. 그런 사연이 있습니다.

2-3. 권력의 위계 구조

그리고 오늘 이 1절 말씀은 권력의 체계를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1절 말씀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있을 때"

권력의 제일 정점, 최고 꼭대기에 로마 황제가 있습니다. 그 아래에 황제가 속주의 총독으로 임명한 본디오 빌라도가 있습니다. 그 아래에 대헤롯의 아들들이 분할하여 다스리고 있는 분봉왕들이 있습니다.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왕이라고 했는데, 아빌레네는 그보다 더 작은 산악도시입니다. 지금 현재 레바논 지역, 헤르몬산 근처에 있는 아주 작은 산악 지역의 작은 왕국입니다. 그곳을 다스리고 있는 사람도 언급해 두었습니다.

철저하게 위계적입니다. 철저하게 권력 지향적이고 중심적입니다. 제일 꼭대기에 로마 황제부터 시작해서 제일 아래에 산악 지역에 있는 작고 작은 왕국의 임금 이름까지 기록해 두었습니다. 사람들이 어디로 모이겠습니까? 저마다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빌레네의 작은 나라의 신하는 내가 헤롯의 신하가 되고 싶다, 조금 더 출세하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헤롯의 신하는 유대 총독의 눈에 들어서 총독의 신하가 되고 싶고, 총독의 신하는 로마 본토에 가서 황제의 신하가 되고 싶은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마다 모두가 권력 지향적입니다. 사람들은 돈이 있는 곳에 모이고 힘이 있고 권력이 있는 곳에 모이고 그 권력을 지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중심의 권력이 힘이 있으면 있을수록, 권력이 가치가 있으면 있을수록 이런 권력 체계는 공고해집니다.

이런 시대에 예수님이 공생애 활동을 시작하십니다. 이런 시대에 세례 요한이 드디어 활동을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시대가 암울한 시대 아닙니까? 오늘 우리 시대도 역시 돈과 권력이 있는 곳에, 그곳에서 어떤 부스러기라도 떨어질까 봐 사람들이 그곳으로 몰려들고 또 모여드는 시대입니다. 이 시대를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3. 안나스와 가야바

그런데 역설적인 일이 벌어집니다. 2절을 보십시오.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눅 3:2)

안나스와 가야바는 대제사장들입니다. 이들은 제사장 중에 최고 위치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위치가 대단히 어색합니다. 왜냐하면 권력자들이 줄을 서 있는 그 끝자락에 이들이 배치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왜 누가는 권력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기록해 두고 그 끝자락에 안나스와 가야바를 기록해 둔 것일까요? 그 당시 영적 지도자였던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가 역시 정치 지향적이고 권력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3-1. 임명직 대제사장

원래 유대인들 율법에 의하면 대제사장은 종신직입니다. 한 사람이 죽어야 또 다른 레위인이 대제사장이 됩니다. 그런데 지금은 두 사람이 대제사장으로 활동하고 있지 않습니까? 원래 유대인 율법에 의하면 레위인들끼리 대제사장을 세워야 됩니다. 그런데 로마는 유대 총독을 통해서 대제사장을 임명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 안나스나 가야바는 유대 총독에 의해서 임명받은 임명직 대제사장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유대 총독 빌라도와 밀접한 관계, 친로마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어야만 됩니다.

실제로 안나스는 서기 6년부터 서기 15년까지 대제사장직을 수행했습니다. 가야바는 서기 18년부터 36년까지 대제사장으로 있었습니다. 안나스가 대제사장이었을 때 그는 그 이후에 그의 아들과 그의 사위들에게 번갈아 가면서 대제사장직을 넘겨줍니다. 가야바도 역시 안나스의 사위였습니다. 그러므로 안나스 가문이 친로마적인 성향을 가지고 대제사장직을 수십 년째 해먹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므로 누가는 이것을 고발하기 위해서 권력의 끝자락에 안나스와 가야바를 넣어 둔 것입니다.

요한복음 18장 12절에서 14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권고하던 자라"(요 18:12-14)

지금 이 시대에 안나스와 가야바 두 사람이 다 대제사장으로 활동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실 예수님께서 재판받던 그 시절, 그때 예수를 체포해서 안나스에게로 끌고 왔습니다. 그 당시 대제사장은 가야바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 말은 대제사장 중에 대제사장, 권력 중에 최고의 종교 권력을 가진 사람이 안나스였다는 사실입니다.

3-2. 하나님께 무관심한 대제사장들

그런 권력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의미입니까? 사실 대제사장은 하나님께 줄서야 되는 존재입니다. 그들은 1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서 대속죄일에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의 죄를 하나님께 가지고 와서 회개해야 되는 사람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런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줄서고 하나님 앞에 백성들의 죄를 아뢰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총독 빌라도와 친하게 지내볼까? 어떻게 하면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정치 권력과 부귀영화와 권세를 끝까지 가져갈까? 우리 안나스 가문이 이것을 계속 가져갈 수 있을까? 거기에만 골몰합니다.

성전에 백성들이 옵니다. 사람들이 상한 심령을 가지고 옵니다. 위로받기 위해서 옵니다. 각종 제물을 가지고 옵니다. 그러면 그것을 가지고 상담도 하고 번제도 드리고 화목제도 드려 줘야 되는 역할이 제사장의 사명, 특별히 대제사장의 사명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것에는 일절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 바로 안나스와 가야바라는 인물들입니다.

4. 빈들에 임한 말씀

이런 상황에 하나님의 말씀이 어디에 임하는가가 중요합니다. 2절 말씀을 다시 봅니다.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눅 3:2)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 있는 요한에게 임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어떤 느낌을 가지십니까? 우리는 지금 성경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자를 가지고 있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 하나님이 두루마리를 주셨나, 혹은 하나님이 이들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나 이 정도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4-1. 말씀이신 하나님

여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요한에게 임했다는 말씀은 훨씬 더 강력하고 본질적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 말씀을 보십시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말씀이 곧 누구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요한에게 임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요한에게 직접 찾아오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요한과 함께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해야 됩니다. 왜 하나님은 성전에 임하지 않으셨는가? 성전이 있지 않습니까? 예루살렘에 멀쩡한 성전이 있습니다. 그 성전에는 대제사장들도 있습니다. 그것도 둘씩이나. 안나스와 가야바가 그 자리에서 대제사장직을 수행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왜 성전을 두고 빈들에 요한에게 찾아오셨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4-2. 빈들의 의미

그 답은 단순합니다. 여기 빈들이라고 표현된 것은 공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 요한의 심리 상태, 그분의 영적인 상태를 빈들이라고 표현합니다. 마음이 텅 비어 있다는 뜻입니다. 요한의 마음은 그 어떤 것으로도 가득 차 있지 않습니다. 세속적인 욕망이나 정욕이나 자기 욕심이나 걱정 근심으로 가득 차 있지 않습니다. 마음이 비어 있습니다. 빈 마음에 예수님이 오실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 말씀, 팔복 첫 번째 복이 뭡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을 비워내라는 뜻입니다. 내 마음을 텅 비워야 그곳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고 하나님의 존재가 임할 수 있지, 마음이 비어 있지 않은데 마음이 다른 여타의 것으로 가득한데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까?

안나스와 가야바를 보십시오. 그들이 비록 직책은 대제사장입니다. 그들이 비록 성전의 총 책임자로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마음은 부귀영화, 권세, 물질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가문이 더 많은 부귀영화를 누릴까? 그것으로 가득 차 있는데 그들에게 하나님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1mm의 틈도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들어갑니까?

예수님께서 문밖에 서서 두드립니다. 들어가고 싶다고. 그런데 열어 주지를 않습니다. 그 마음이 딴 것으로 가득 차 있으니까요. 관심이 하나님과는 다른 데 있으니까요. 하나님을 영접할 생각이 없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좌정하실 수가 없습니다.

4-3. 변하지 않는 신앙

신앙생활을 수십 년 동안을 해도, 몇 대째 이어지는 신앙생활을 해도 1mm도 변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단 1cm도 신앙이 성장하지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 마음을 비워낸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입니다. 좋은 설교를 듣고 성경을 읽고 교회를 다녀도, 교회만 다녔을 뿐이지 그것은 종교 생활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비워내지 않고 하나님을 내 마음의 중심에 모시지 않는데 어떻게 신앙이 자라고 성장하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너무너무 많습니다. 교회만 다녔을 뿐, 그저 종교인으로 성경 들고 가방 들고 교회만 출입했을 뿐, 내 마음속에 세속적 욕망과 걱정 근심들을 다 비워내고 하나님을 한 번도 모시고 초대해 본 적이 없으니 신앙 성장과 영적 성숙이 있을 리가 있겠습니까?

비록 대제사장으로 예배를 인도하고 1년에 한 번 지성소에도 들어가고, 사람들 앞에서 좋은 옷을 입고 "내가 대제사장입니다" 하고 살아도, 매일 설교하고 살아도, 이들의 삶은 전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을 비워내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초대할 때, 그때 우리 마음속에 임재하시는 분인 줄로 믿습니다.

5. 세상의 중심은 어디인가

또 한 가지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세상의 중심이 어디인가 하는 질문에 답을 해야 됩니다. 세상의 중심이 어딥니까? 이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물어본다면 누구나 이구동성으로 세상의 중심은 로마라고 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황제가 거기 살고 있으니까요. 범위를 좀 좁혀 보면, 유대인들에게 세상의 중심이 어디냐고 물으면 총독이 살고 있는, 총독 관저가 있는 가이사랴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정치적 중심지니까요. 경건한 유대인들에게 세상의 중심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예루살렘이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전이 거기에 있으니까요.

그런데 하나님은 로마에도, 가이사랴에도, 성전에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시고 하나님이 계신 곳은 빈들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러면 세상의 중심이 지금 어디인 것입니까? 누가복음 3장에 의하면 이 당시 세상의 중심은 빈들입니다. 세례 요한이 있는 그곳이 바로 세상의 중심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자리에 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지금까지 오랫동안 읽어 왔습니다. 성경의 흐름을 한번 보십시오. 하나님의 렌즈가 누구를 따라 움직이는지,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주목하고 계시는지를 보십시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별볼일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습니다. 하란을 거쳐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을 받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갑니다. 말씀과 함께하니 하나님의 렌즈가 아브라함을 따라다닙니다. 그 당시 초기 사대강 문명의 황제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그 황제들에게는 일절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말씀을 따라가는 아브라함에게만 관심이 있습니다.

모세와 바로를 보십시오. 파라오는 이집트의 황제입니다. 그 당시 세계 최고의 군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관심은 바로에게 있지 않습니다. 모세에게 있습니다. 모세는 정치적으로 실각한 사람 아닙니까? 미디안 광야에서 장인의 양떼들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항상 모세를 따라다닙니다. 바로는 모세의 성장을 돕는 교보로만 쓰일 뿐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을 모시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시내산 꼭대기에서 말씀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시내산 꼭대기에 모세를 따라갑니다. 광야에서 말씀대로 백성들을 지도합니다. 아무도 관심 갖지 않은 광야가 하나님의 관심이 됩니다.

요셉과 바로를 보십시오. 요셉은 보디발 집에 노예로 살았습니다. 감옥에서 죄수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하나님의 말씀을 모시고 살았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의 관심이 요셉을 따라갑니다. 세상의 중심이 요셉이었다는 말입니다. 그 당시에는 요셉이 중심이고, 모세가 중심이고, 지금 이 예수님 당시에는 세상의 중심이 세례 요한입니다. 말씀을 모시는 자가 바로 세상의 중심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사람도 그것을 압니다.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4장 13절과 14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따라간지라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마 14:13-14)

이때는 유월절 명절 기간입니다. 유월절 명절에 사람들은 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성전에서 예배드려야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월절에 그곳에 가지 않고 벳세다 들녘에 계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벳세다 들녘으로 몰려듭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그곳에서 남자만 오천 명, 여자, 노인, 어린아이까지 수만 명을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먹이셨습니다.

사람들은 왜 유월절에 성전에 가지 않고 예수님을 찾아옵니까? 그곳에 말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전에는 말씀이 없고 예수님에게는 말씀이 있었으니까요. 그곳이 세상의 중심이니까요. 말씀이 없는 빈껍데기 성전에 사람들은 찾아가지 않습니다. 말씀이 있는 벳세다 들녘에 계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올라온 것입니다. 사람들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당연히 말씀이 있는 곳을 찾아갑니다.

6. 세상의 중심에 서는 법

여러분,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자녀들을 교육 잘해야 됩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어떻게 가르칩니까? 열심히 공부해라, 돈 많이 벌어라, 출세해라, 성공해라, 세상의 중심에 서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그 의미가 진짜 무엇인지 우리는 제대로 알고 가르쳐야 됩니다. 세상의 중심에 선다 한들, 로마 황제의 측근이 된다 한들,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 중심에 없다면 그것 자체가 헛된 외침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어디에 있건, 내가 어떤 형편과 처지에 있건, 내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만한 빈들이 내 속에 있다면, 그곳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다면, 그곳이 바로 세상의 중심이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 그가 있는 그 자리가 바로 세상의 중심이었고, 세례 요한은 그 당당한 자신감을 가지고 세상의 중심에서 복음을 외쳤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리에 대한 콤플렉스. 내가 로마 황제 측근이 되지 못한 박탈감. 내가 조금 더 돈이 있었다면, 조금 더 성공했다면, 내가 조금 더 잘 배웠다면 출세해서 저곳 저 자리에 내가 설 수 있었을 텐데 하는 것은 헛된 일입니다. 불나방같이 권력을 향하여, 물질을 향하여 달려가다가 다 타 죽는 것밖에는 마지막이 없습니다.

결국 우리는 내가 서 있는 이 자리를 세상의 중심으로 만들어야 됩니다. 그러려면 내 마음을 비워내고 하나님의 말씀을 모셔야 됩니다. 하나님이 내 속에 친히 임재하셔서 우리가 있는 그곳이 세상의 중심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로마 황제가 있는 그곳이 세상의 중심이 아니었고, 유대 총독이 있는 가이사랴도 세상의 중심이 아니었으며, 대제사장이 둘이나 있는 예루살렘 성전도 세상의 중심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비워내고 하나님을 모신 세례 요한이 있는 빈들이야말로 세상의 중심이었습니다.

주여, 오늘 우리에게도 세상의 중심에 서는 법을 알려 주셨사오니, 우리 마음을 비워내고 그곳에 예수님을 모시기를 원합니다. 말씀 따라 살게 하여 주옵소서. 말씀의 진리를 따라 흔들리지 않고 걸어가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그 길 끝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도록 도우시고, 우리가 서 있는 자리가 세상의 중심임을 깨닫고, 헛되고 헛된 일에 관심을 갖거나 거기에 마음을 쓰거나 열등감 가지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자녀들로 진실로 세상의 중심에 서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부모들이 진실로 그들을 말씀으로 잘 양육하고 가르쳐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 중심에 서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