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강 / 겸손과 교만 (3:15-22)

겸손과 교만 (눅3:15-22)

조선 중기, 선조 임금에게 각별한 총애를 받았던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신립 장군이었습니다. 그가 선조의 총애를 받은 이유는 북방의 여진족을 토벌한 혁혁한 전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조련한 기병을 중심으로 여진족들이 국경을 더 이상 침범할 수 없도록 철통같이 방어했습니다. 그렇게 국방의 경계를 늦추지 않았기에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고, 임금에게는 총애를 받습니다.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합니다. 왜군들은 부산진과 동래를 점령하고 파죽지세로 한양을 향해 올라갑니다. 다급해진 선조 임금은 신립 장군을 불러들입니다. 적들이 한양으로 올라오지 못하도록 길목을 차단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신립의 참모들과 부관들은 조령 고개에 군사들을 매복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진언했습니다. 조총으로 무장한 적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험준한 산악 지대에 매복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장군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조령 고개가 아닌 넓은 벌판에서 적을 상대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충주 탄금대에 진영을 정비합니다. 넓은 벌판에서 왜군들과 조선 관군들이 일대 격전을 벌입니다. 하지만 잘못된 판단이었습니다. 왜군들의 조총을 무시한 결정이었습니다.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들에게 넓은 들판은 날개를 달아준 꼴이었습니다. 그 결과 조선군 8천 명이 전사하고, 신립 장군도 남한강에 몸을 던져 최후를 맞이하고 맙니다.

그렇다면 장군은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요? 돌이켜 보면 그는 기병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조련한 기마부대를 한번 써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교만이었습니다. 적들이 조총으로 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습니다. 먼 거리에서 총을 쏘아대는데 기병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교만은 이토록 무서운 것입니다. 자기가 잘하는 것만 생각하고, 적들이 어느 정도의 화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판단하지 못했기 때문에 본인뿐만 아니라 나라도 결국은 위태롭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결국 교만이라는 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공동체도, 주변 사람들도 위기에 빠뜨립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 말씀을 보면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겸손이 나옵니다. 반대편에는 헤롯의 교만도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를 높이시고 교만한 자의 목을 꺾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겸손을 기뻐하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정말 겸손한 존재들인지 스스로를 살피고 돌아보며, 겸손이 어떤 의미인지를 살피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세례 요한의 겸손

세례 요한이 활동하던 시절에 많은 사람들은 권력이 있는 곳으로 모여듭니다. 로마, 가이사랴,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은 빈들에 있었습니다. 빈들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 있는 세례 요한에게 임했고, 세례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선포합니다. 그는 물세례의 형식만 강조한 것이 아니라, 물세례를 받은 이후에 회개해야 하나님의 나라에 이를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탐심을 경계하라고 말했고, 강력한 회개의 메시지를 들었던 사람들이 큰 은혜를 받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빈들에서 세례 요한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몰려들고 또 몰려들었습니다.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 몰려든 사람들이 세례 요한을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생각하니" 사람들은 세례 요한을 보고 오랫동안 바라고 기다렸던 메시아, 그리스도가 아닌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로부터 거슬러 올라가면 약 700년 전부터 메시아의 예언이 있었습니다. 이사야 이후 100년, 예레미야 때도 메시아 예언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 선지자 이후에 나라가 망해 버립니다. 바벨론에 의해서 나라가 망하고 난 다음에 페르시아 시대, 그 이후에 알렉산더 제국의 시대, 알렉산더 제국의 분열의 시대를 거쳐서 지금 로마 시대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그들이 기다리고 고대했던 메시아는 임하지 않습니다. 이분이 메시아인가? 저분이 메시아인가? 그럴 만한 사람조차도 지금까지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의 설교를 듣고 메시지를 들어보니 마음에 울림이 있습니다. 감동이 됩니다. 은혜가 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권력이 있는 곳을 뒤로하고 빈들에 와서 말씀을 듣습니다.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이분이 과연 그리스도가 아닌가? 이분이야말로 메시아가 아닌가? 이구동성으로 외칩니다. 세례 요한에게도 그 이야기가 귀에 들려옵니다.

1-1. 자기 한계의 인식

백성들의 이 말을 듣고 난 이후에 세례 요한의 반응이 이러했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세례 요한은 스스로의 한계를 분명히 압니다. 나는 물세례를 전하는 사람일 뿐이다. 나보다 그 뒤에 오시는 분은 내가 그분의 신발끈을 풀기에도 합당하지 못할 정도인데, 그분은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성령과 불은 세례 요한이 함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 요한은 인간 아닙니까? 인간이 어떻게 성령을 보낼 수 있겠습니까? 성령의 불을 내려보낼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야 성령을 보낼 수 있고, 또 불을 그들에게 내려서 회개시킬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저 한 인간일 뿐입니다. 그는 스스로의 한계를 이렇게 분명히 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원래 사람이라는 존재가 옆에서 부추기기 시작하면 진짜 그런 줄 압니다. 나는 정말 연약하고 부족하고 아무것도 못하는 존재인데, 옆에서 사람들이 "당신이 참 대단하십니다. 그리스도인 것 같습니다. 메시아인 것 같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한두 사람에게 듣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에게 그런 이야기를 듣다 보면 "내가 정말 그리스도인가?" 자기 스스로도 그런 착각과 오만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달랐습니다. 나는 물세례를 베푸는 사람일 뿐이다. 나는 더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면 그분이야말로 성령을 보낼 수 있는 분이라고 자신의 한계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1-2. 소리로서의 사명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복음 3장 4절 말씀을 보십시오.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그는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인용해서 말했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이 말씀이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인생 전체를 소리라고 규정했습니다.

소리는 두 가지 의미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소리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첫 번째는 의미의 전달입니다. 의미가 분명하게 전달되어야 그 소리가 소리로서 기능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하나님의 뜻을 세례 요한은 전하는 소리로서 역할을 감당하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러한데, 그 말씀을 왜곡시키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변의 권력자들의 눈이 그들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마음을 말씀에 담아서 전하는데 사람들이 힘들어합니다. "회개하라. 도끼가 나뭇뿌리에 놓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이런 말을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겠습니까? 특별히 권력자들이 그를 잡아서 옥에 넣기도 하고, 그를 잡아 죽이려고 하고, 협박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사명과 정체성이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소리는 굽어가지 않습니다. 소리는 왜곡되면 곤란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타인들에게 전달하는데 왜곡되어 전달하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 당시에 소리로서 역할을 해야 되는 사람들도 굉장히 많았습니다. 대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 사두개인, 율법학자들. 그들 모두가 소리로서 기능해야 되는 사람들 아닙니까? 그런데 그들은 소리로서의 역할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대로 그들은 전달하지 않습니다. 소리를 다 왜곡시켰습니다. 들리지 않습니다. 그들의 목소리를 아무리 들어도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이,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지지 않고 들리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은 달랐습니다. 소리로서 사명을 성실하게 감당한 인물이 바로 요한이었습니다.

그런데 소리로서 두 번째 기능이 더 중요합니다. 소리는 분명한 의사 전달을 하고는 사라져 버려야 됩니다. 없어져 버려야 됩니다. 동굴 안에서 의사소통이 원활하지를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소리가 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냥 그대로 소리가 머물러 있으면 도대체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명확한 소리는 전달하고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다"라고 말한 것은 나는 하나님의 마음을 전달하고 사라지겠다는 결단을 내포한 말입니다. 영광받지 않겠다. 사람들이 나를 그리스도라고 한다 한들, 나를 메시아라고 한다 한들, 나는 그렇지 않다고, 나는 사라지는 존재가 될 뿐이라고 그는 그렇게 자기를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1-3. 겸손의 참된 의미

여러분, 이것은 결단코 쉬운 일만은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이 세례 요한의 모습을 통해서 겸손의 진수를 봅니다. 겸손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겸손을 오해합니다. 타인들 앞에서 허리를 숙이고 고개를 숙이고, 예의 바르게 말하고 행동하고, 깍듯하고 친절하게 대화하는 것을 겸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회적으로 습득된 겸손에 불과합니다. 나이가 이만큼 먹고 나면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해야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 대접받는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겸손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은 하나님의 마음을 정확하게 사명자로서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내가 하나님 자리에 서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 자리에 서지 않고, 나는 사라져 버려야 됩니다. 사명을 열심히 감당했는데, 수십 년 동안 주의 일을 하고 섬겼는데, 여전히 내가 그 자리에 남아서 대접받고 있으려고 하고, 군림하려고 하고, 영광받으려고 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겸손이 되겠습니까? 그것은 겸손한 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소리가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웅웅거리면 의사소통이 되지 않고 오히려 우리의 귀를 어지럽히는 것처럼, 우리라는 존재는, 사람이라는 존재는 내가 맡은 자리에서 사명 다하고 나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려야 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영광이 나를 통해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세상이 혼란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영적 공동체가 여전히 복잡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자리에 군림하려고 하고, 그 자리에서 자기 영광을 자꾸 보려고 하고, 그리스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그리스도인 척하려고 하니까, 사라지지 않으니까, 그래서 혼란스러운 것입니다. 겸손은 자기 일을 성실하게 감당하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그 겸손의 모습을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2. 헤롯의 교만

2-1. 근친혼의 죄악

반면 헤롯은 어떻습니까? 19절과 20절을 보십시오. "분봉왕 헤롯은 그의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자기가 행한 모든 악한 일로 말미암아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그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

헤로디아라는 여인이 나옵니다. 헤로디아는 대헤롯의 직계 손녀였습니다. 대헤롯은 누구입니까? 예수님 탄생 시절에 동방박사의 이야기를 듣고 두 살 이하의 영아를 살해했던 인물이 대헤롯입니다. 헤로디아는 자기 할아버지 대헤롯처럼 권력 지향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여성이었지만 권력에 대한 욕망이 대단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나도 할아버지처럼 권력을 향유할 수 있을까? 그 결과 그녀는 자신의 삼촌과 결혼하기로 작정합니다. 자신의 삼촌 헤롯 빌립과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헤롯 빌립은 헤로디아의 권력 욕망을 충족시켜 주지 못했습니다. 또 다른 삼촌을 택합니다. 헤롯 안티파스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헤롯이 바로 그 헤롯입니다.

그러면 헤롯 안티파스 입장에서는 자기 형제의 아내와 결혼한 것입니다. 조카와 결혼한 것입니다. 근친혼을 했습니다. 레위기 18장 말씀에 보면 근친혼을 강력하게 하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율법에 말씀해 두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 지점을 지적한 것입니다. 백성의 지도자인 헤롯이, 분봉왕 헤롯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근친혼을 할 수 있는가, 회개하라고,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지적했습니다.

2-2. 말씀 위에 선 교만

그런데 헤롯이 어떻게 합니까? 이 모든 것 위에 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세례 요한을 옥에 가두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천명한 것이 무엇입니까? 헤롯은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위에 있다는 것을 스스로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분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장 1절 말씀을 보십시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이 누구라고 했습니까? 말씀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곧 말씀이시고, 말씀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부모들이 자녀를 훈계하고 책망할 때 자녀가 부모의 말을 잘 듣는 것은 그 말씀만 듣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인격을 존중하고 받아주는 것입니다. 반면에 자녀가 부모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은 그 말씀만 듣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인격을 받아들여 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곧 말씀이고,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 하나님보다 높은 분이 없고, 하나님보다 큰 분이 없다는 것은 곧 말씀보다 높은 것이 없다는 뜻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최고의 권위인데, 헤롯이, 팔레스타인을 4분의 1로 나누어서 통치하는 분봉왕 헤롯이 감히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가 위에 있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교만 아닙니까, 여러분? 교만이 무엇입니까? 남들 앞에서 자기가 잘난 것을 좀 자랑하고 거들먹거리고 그런 정도는 귀여운 수준입니다. 진짜 교만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내가 더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 자체가 심각한 교만입니다.

여러분, 인류 최초의 죄악이 에덴에서부터 발현됩니다. 에덴에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선악과 먹지 말라고. 선악과 먹지 말라는 명령 자체가 하나님입니다. 그 말씀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뱀은, 사탄은 뱀을 통해서 뭐라고 유혹합니까? "그거 먹어도 안 죽는다고.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될 거라고" 말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밟고 올라서겠다는 의지를 보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가만히 둘 수가 없습니다. 에덴에서 내보내지 않습니까? 교만한 자는 하나님이 이렇게 다스리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겸손한 존재인가 교만한 존재인가? 그 경계선을 가늠해 보는 자리는 말씀 앞에서 내가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살펴보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면 우리는 겸손한 자들입니다. 태도가 아무리 겸손하다 한들, 사람들 앞에서 아무리 고개를 숙인다 한들, 말씀대로 행동하지 않고 말씀대로 살지 않는데 어떻게 우리가 겸손한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철저하게 하나님 말씀 앞에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자들이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3. 예수님의 겸손

3-1. 사람과 눈높이를 맞추심

예수님의 겸손을 봅시다. 21절과 22절입니다.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세례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 시절에 요단강에서 베풀었습니다. 요단강은 흐르는 강물 아닙니까? 흐르는 강물에서 세례를 받는다는 의미는 과거에 나의 기억들, 죄악들을 다 흘려보내고 떠나보낸다는 뜻입니다. 세례를 베푸는 요한은 세례를 받는 사람의 머리에 손을 얹고 물속에 집어넣습니다. 한참 있다가 끌어올립니다. 물속에 넣는다는 의미는 옛사람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옛사람, 죄로 인해서 점철된 나의 옛사람을 떠나보내고 죽이겠다는 뜻입니다. 즉 죄인이 세례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가 없지 않습니까? 죄 없는 예수님이 왜 흐르는 강물의 세례를 받고 물속에 들어가야 됩니까? 이 이야기를 빌립보서 말씀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빌립보서 2장 6절에서 8절을 보십시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사람들과 같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죄가 있어서가 아니라, 이 땅에 사람을 위해서 오셨는데 사람의 형상으로만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눈높이를 완벽하게 맞추기 위해서 우리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겸손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보좌에, 하늘 보좌에 앉아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해본들 그 사랑이 입증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고, 죄가 없지만 죄 있는 사람처럼 똑같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것이 우리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보여준, 하나님 앞에서 보여준 겸손함의 극치입니다.

3-2.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겸손

이렇게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21절과 22절 말씀 다시 한 번 보십시오.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하늘이 열렸습니다. 하늘에서 소리가 납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누구의 음성입니까? 하나님 아버지, 성부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했습니다. 성령께서 강림하셨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고 올라오시고, 그의 머리 위에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시고,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시고. 성경에서 유일하게 나오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동시에 출현하시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기쁘셨으면 삼위일체 하나님이 동시에 출현하셨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기뻐하신 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은 기뻐하셨습니다. "너는 내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나님이 기뻐하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겸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헌금을 얼마나 드려야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억만금을 드린들 하나님이 이만큼 기뻐하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온 세상 천하 만물이 다 하나님의 것인데,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가지고 온다 한들 하나님이 기쁘시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시간을 드리고 몸을 들여서 헌신하고 봉사한다 한들 하나님이 이만큼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을 이렇게 기뻐하셨습니다. 아들의 겸손을 기뻐하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 앞에 겸손하면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나의 창조주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세례 요한의 겸손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례 요한의 겸손처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겸손하게 내 사명 감당하고 사라지는 소리의 존재가 되십시오. 헤롯의 교만을 반면교사 삼아서 말씀보다 앞서지 않고, 철저하게 말씀 앞에 고개 숙이고 무릎 꿇는다면 우리도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겸손한 자로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이 되는 주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세례 요한의 겸손을 배웁니다. 소리로서 기능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키지 않으며 그 말씀을 그대로 전했던 세례 요한처럼 우리도 사명 감당하는 자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열심히 사명 감당한 이후에 그 자리에 서서 내 영광을 취하는 자 되지 않도록 도우시고, 사라지고 없어져서 소리처럼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겸손한 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헤롯처럼 말씀 위에 군림하지 않겠습니다. 헤롯은 말씀 위에 자기를 세우고 군림해서 하나님께 책망받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주여, 우리는 철저하게 말씀 앞에 무릎 꿇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를 책망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엎드리게 하여 주시고, 그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처럼 겸손한 자가 되어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이 말씀처럼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영광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