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오빌로 각하에게 (눅 1:1-4)
알브레히트 뒤러라는 독일의 유명한 화가가 있습니다. 이분은 1471년에 태어나 1528년까지 살았던 분으로, 16세기 독일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입니다. 이분은 위대한 작품들을 여러 점 남겼는데, 그중에 우리가 잘 아는 작품도 있습니다. 1508년 작품인 "기도하는 손"이라는 제목의 작품입니다. 또한 1489년에 "방앗간"이라는 작품도 남겼는데, 이것은 일견 편안한 한 폭의 풍경화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풍경화가 맞습니다. 그런데 이분의 풍경화가 특별한 이유는 여기에 사람이 하나도 등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분 이전의 풍경화는 사람이 주인공이었습니다. 그런데 순수 풍경화, 즉 사람으로부터 독립된 풍경화는 뒤러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알브레히트 뒤러는 위대한 화가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화가로도 위대했지만, 사회 개혁가로도 특별했던 분입니다. 이분은 평생 동안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단 한 권의 책도 라틴어로 쓴 적이 없었습니다. 라틴어를 몰라서가 아니라 일부러 쓰지 않은 것입니다. 그 당시 예술가들과 건축가들은 자기들만의 조직이 있었습니다. 이른바 길드라고 하는 조직인데, 그 조직은 지식을 공유하면서도 자기들 공동체에 들어오지 않으면 세상 밖으로 지식을 흘려보내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철저한 도제 방식으로 가르쳤습니다. 예술, 미술, 수학, 건축 등의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그 자리에 모여서 함께 공부하고 함께 가르치되, 지식을 외부와는 공유하지 않았습니다.
알브레히트 뒤러는 이런 방식에 철저하게 반대했습니다. 그가 가진 미술의 기본과 건축의 이론 등을 라틴어가 아닌 모국어인 독일어를 사용해서 널리 알렸습니다.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배우려는 의지만 있으면 충분히 공부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특별한 사회 개혁가였습니다. 세상이 나로 인해서 조금 더 좋아지기를, 내가 가진 지식으로 세상을 섬기기를 꿈꿨던 사람이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보면 이분이 활동했던 시기와 마르틴 루터의 시기가 정확하게 겹칩니다. 종교 개혁이 1517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종교 개혁을 이끈 마르틴 루터와 그의 생애가 아주 겹칩니다. 마르틴 루터는 그 당시 사제들이 라틴어 성경을 읽는 것에 반대했습니다. 글을 모르는 농민들이 교회에 오는데 예배가 라틴어로 진행됩니다. 성경도 라틴어로 읽습니다.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읽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루터가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지 않았습니까?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성경을 읽고 배우고 암송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같은 맥락으로 뒤러 역시 그러했습니다. 두 사람은 만난 적은 없었지만, 알브레히트 뒤러는 루터의 재정적인 든든한 후원자였습니다. 마르틴 루터를 통해서 하나님의 복음이 세상으로 흘러나왔고, 뒤러를 통해서 지식이 세상으로 흘러나왔습니다.
여러분, 복음이 어떤 것입니까? 복음은 교회 안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됩니다. 복음은 흘러나와야 합니다. 몇몇 사람이 복음을 독점하고 몇몇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독점한다면, 그것은 건강한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말씀을 흘려보내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가 독점하고 그 말씀을 그들만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영혼 구원이 가능하겠습니까? 주변에 믿지 않는 사람들, 불신자들, 아직까지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 자들에게 십자가 복음을 전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 의미에서 오늘부터 우리가 살펴볼 누가복음의 저자인 누가는 아주 훌륭한 분입니다. 그분은 자신이 만난 그리스도를 상세하게 기록했습니다. 누가복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오심과 사역과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을 기록했고, 사도행전을 통해서 성령이 이 땅에 오신 것, 성령의 역사, 교회가 생겨난 것, 사도 바울을 통해서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된 것을 상세하게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흘려보내 주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한 사람 데오빌로에게 전했는데, 오늘 이 순간 수많은 사람들이 그가 전한 복음을 듣고 구원받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분의 사역을 통해서 나는 어떤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가, 이 시대 교회는 과연 어떠해야 하는지를 함께 살피고 묵상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복음은 사실입니다
1절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어떤 소설가가 자신의 소설을 쓴다면, 가장 고민하는 지점이 첫머리입니다. 어떤 주제를 전하려고 하는데 첫머리의 첫 단어를 무엇으로 쓸까? 어떤 주제를 담아내야 하는데 첫 문장을 어떻게 쓸까? 얼마나 고민되겠습니까? 첫 문장을 썼다가 지웠다가, 지웠다가 썼다가를 수백 번 수천 번 반복하는 소설가도 있습니다.
복음서를 기록하는 누가에게 있어서 자신의 복음서 첫 장 첫 절입니다. 당연히 고심하지 않았겠습니까? 우리는 그냥 읽지만, 누가는 이 누가복음을 기록할 때 첫 장 첫 절을 상당히 고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기도하고 고심한 끝에 적어낸 이 말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우리는 여기서 '사실'이라는 말에 주목합니다.
무엇이 사실이라는 말입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 예수님이 이 땅에서 행하신 모든 일, 예수님께서 고난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모든 일이 하나도 거짓 없는 사실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복음서의 첫머리에 '사실'이라고 천명하면서, 내가 전한 이 복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거짓이 없다고 선언합니다. 나는 하나도 덧대거나 덧칠하거나 보태거나 한 것이 없다는 것을 누가가 선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통해서 아주 중요한 교훈을 얻습니다.
1-1. 복음에 덧칠할 필요 없습니다
복음이 사실이기 때문에 우리는 복음에 덧칠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꾸밀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스에 가보면 여러 신들을 섬기는 신전이 있습니다. 얼마나 화려한지 모릅니다. 얼마나 잘 지었는지 모릅니다. 어떻게 그 시절에 이렇게 거대하고 위대한 신전을 지었을까? 이 신전 공사에 동원된 사람들은 얼마나 많이 죽어 나갔을까? 세상의 금은보화가 다 거기에 모여 있습니다. 위대한 신전이 거기에 다 있습니다. 이방의 신전 치고 자그맣고 소박한 신전은 하나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가짜이기 때문입니다. 진짜라면 그렇게 화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짜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혹하게 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여기며 압도감을 느끼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엄청난 규모로 짓는 것입니다. 동남아시아에 가보십시오. 이방 신전이 얼마나 대단하게 지어져 있습니까? 그 규모에 있어서 압도적입니다.
사우디아라비아에 가면 두 곳의 성지가 있습니다. 메카와 메디나입니다. 메카는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가 태어난 곳입니다. 메디나는 무함마드가 죽어서 묻힌 무덤이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지 않습니까? 무덤이 대단히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습니다. 1년에 수백만 명의 순례자들이 그곳에 몰립니다. 그런데 그도 역시 한 사람의 인간이었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의 무덤이 그것을 입증하고 있지 않습니까? 가짜입니다. 가짜이기 때문에 그 무덤이 그렇게 화려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무덤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무덤이 없습니다. 빈 무덤입니다. 부활하셨기 때문에 무덤을 보여 주고 싶어도 보여 줄 무덤이 없습니다. 무덤이 텅 비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키실 때 성막을 짓게 하셨습니다. 성막은 한마디로 말하면 이동용 천막입니다. 텐트입니다. 화려하지 않습니다. 소박합니다. 여기에 폈다가 저쪽으로 옮길 때 다시 접어서 가야 하는 천막입니다. 전혀 화려하지 않은데, 그런데 성막이 위대하고 귀한 이유는 하나님이 그곳에 임재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진짜 아닙니까? 살아 계시고 위대하시고 온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성막에 거하시고 머무르시니, 성막이 하나님으로 인해서 아름다워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그 공간은 화려하게 지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미혹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없는 세상은 바로 그런 세상입니다. 복음이 사실이라는 뜻은, 우리는 복음을 위해서 덧대거나 덧칠하거나 치장하거나 없는 말을 덧붙이지 않아도 된다는 뜻입니다. 복음 그 자체가 힘이 있습니다. 복음 그 자체가 사실이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담백하게 전하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는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능력이 있고 그 자체로 힘이 있는 말씀입니다.
레위기 2장 11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소제물에는 누룩을 넣지 말지니 너희가 누룩이나 꿀을 여호와께 화제로 드려 사르지 못할지니라." 구약 레위기에 보면 다섯 가지 제사가 나옵니다. 그중 하나가 소제입니다. 곡식을 곱게 빻아 가루로 만들어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런데 이 소제에 넣지 말아야 할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누룩이요, 두 번째는 꿀입니다. 누룩을 곡식 가루에 넣으면 부풀어 오르지 않습니까? 꿀은 달지 않은 것을 달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배 시에 있는 모습 그대로 나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덧칠하지 마라. 없는데 부풀리지 마라. 달지 않은데 단 것처럼 만들지 말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없으면 없는 대로 나오면 됩니다. 모르면 모르는 채로 나오면 됩니다. 없는데 있는 척하고, 모르는데 아는 척하고, 권세가 없는데 권세와 힘이 있는 척하는 것, 하나님께서는 그러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 그 자체가 사실이기 때문에 우리는 복음 앞에 있는 모습 그대로 나오면 됩니다.
오늘날 교회가 어떻습니까? 옛날 성막은 정말 소박하고 초라했습니다. 그런데도 문제가 되지 않았던 이유는 그 속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대 교회는 날이 갈수록 화려해집니다. 날이 갈수록 아주 거대해집니다. 마치 2천 년 전 과거의 신전처럼. 그럴수록 그 속에 하나님의 영광이 없다는 반증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곳에 머물면, 성전은 그렇게 화려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그곳에 함께 임재하고 있으면,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과 교제하면 되는데, 더 이상 무엇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믿음의 백성들에게 복음이 사실이라는 것은 얼마나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그런 척하지 않아도 됩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나오면 됩니다. 교회도 지나치게 꾸미지 않아도 됩니다. 복음이신 그리스도가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1-2. 하나님이 이루신 복음입니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 이것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있습니다. '이루어진 사실'은 무슨 뜻입니까? 수동태입니다. 우리가 이룬 사실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사도들이 이룬 복음이 아닙니다. 그러면 누가 이루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이 이루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이루셨고,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어서 이룬 것이 오늘 우리에게 복음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루셨기 때문에 완전합니다. 만약 우리가 만들었다면, 우리가 이루었다면 불완전합니다. 부족합니다. 여러분, 사람이 만든 것 중에 완벽하고 흠결 없는 것이 있습니까? 내가 누군가에게 선물을 주기 위해서 무언가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줄 때 항상 마음이 불안합니다. 혹시 이게 저분의 마음에 들까? 내가 드리는 선물이 얼마나 오랫동안 갈까? 불안합니다. 내가 만들었으니까요. 인간은 완전하지 못합니다. 항상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만드신 복음, 하나님께서 이루신 복음이기 때문에 그 복음 자체는 흠이 없고 완전합니다. 그러므로 이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당당해야 합니다. 내가 만든 복음을 전한다면 우리가 고개를 숙여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항상 불안해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이루신 복음, 완전한 복음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복음을 전할 때 어깨에 힘 주고 당당하게 어깨 펴고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흠없는 복음, 완전무결한 복음, 우리 인간의 연약함을 다 해결할 수 있는 복음, 그 복음을 전하는 우리는 적어도 복음 전하는 자부심과 자존감을 가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12절에서 14절 말씀을 보십시오.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우리 예수님께서 복음을 들고 나가는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복음을 열심히 전하되 결과에 연연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결과 때문에 너희가 의기소침하거나 어깨에 힘 빠지는 모습으로 살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 집에 들어가서 평안을 빌고, 그 평안을 받아들이면 너희는 기쁨으로 평안을 전하고 복음을 전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그것 때문에 죽어 있거나 기운 빠져하거나 힘빠져 살지 말라. 당당하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일꾼으로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어떤 자세로 복음을 전하십니까? 복음을 전하면서 마치 구걸하듯이 전하는 자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복음은 완전합니다. 내가 부족해서 그렇지, 복음을 전하는 우리 자신이 흠이 있고 문제가 있는 것이지,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은 완전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런 자신감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이 시대 교회가,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내가 들고 나가는 복음이 완벽하다는 것, 이 자부심이 오늘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능력으로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누가의 기술 방식
이제 누가는 자신의 복음서 기록 방식, 기술 방식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그가 기록하는 복음서 기술 방식이 세 가지입니다.
2-1. 모든 일을 기록했습니다
첫 번째로 모든 일을 기록했습니다. 실제로 누가복음을 읽어 보면, 예수님이 태어나기 전 사건, 예수님이 태어나신 사건, 예수님의 친족 세례 요한의 탄생 사건들이 다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공생애 때 행하신 모든 일이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을 기록하는 방식은 누가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의 기술 방식입니다. 여기서 '모든 일'이라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도, 숨기고 싶은 일도, 수치스러운 일도, 감추고 싶은 일도 다 빠짐없이 기록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창세기를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 유대인들이 가장 사랑하고 좋아하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그분의 완벽한 모습만 창세기에 기록되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창세기 말씀을 보면 그분의 약한 모습, 그분의 죄악상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은 사건이 얼마나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지 모릅니다.
그의 아들 이삭을 보십시오. 이삭이 나이가 들어서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고 고기만 찾습니다. 아들 둘을 분간하지 못하고 에서를 편애합니다. 그것도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곱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야곱은 말하자면 국부 아닙니까?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입니다. 그의 이름이 곧 국호입니다. 그런데 국부이고 국호인 야곱의 약한 모습을 얼마나 상세하게 기록했는지 모릅니다. 그 정도로 성경은 정직한 책입니다.
신약으로 넘어와서 복음서를 보십시오.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는 예루살렘 교회의 리더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사건이 복음서 도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과 함께 기도하러 겟세마네 동산에 갔습니다. 예수님이 "한 시도 나를 위해서 깨어 기도할 수 없더냐" 말씀하셨는데, 그들은 계속해서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 연약한 모습도, 기도하지 않고 계속 잠들어 있는 모습도 성경은 가감 없이 기록합니다.
더 나아가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 뭐라고 기도하십니까? "할 수 있거든 이 잔을 나에게서 지나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가장 연약한 모습, 예수님의 가장 인간적인 모습, 예수님의 가장 약하고 가장 연약한 모습을 성경은 외면하지 않고 다 기록해 두었습니다.
만약에 성경이 예수님을 신격화하는 책이라면 이것을 삭제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만약에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인 베드로의 위신을 위하는 책이 성경이라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것을 없애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성경은 다 기록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연약한 베드로를 통해서도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그를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죄 많은 인생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고 계시고, 교회를 세우시고, 성령을 통해서 함께 일하고 계심을 보여 주고자 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흠결까지도 그의 약함까지도 다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에 지우고 싶은 과거가 있습니다. 없애고 싶은 장면들이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보여 주고 싶지 않아도 하나님에게는 다 보여 드려도 됩니다. 과거의 내가 있으니까 지금의 내가 있는 것 아닙니까? 과거의 그 실패와 실수를 거울삼아서 다시는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결단하고 회개하고 돌이켜서,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 연약한 내가 없으면, 그 연약함을 통해서 쓰임받는 오늘의 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인생의 과거에 잘못된 것, 그 인생을 지워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하나님 나의 이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용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은 다 종합적으로, 통전적으로 하나님 앞에 쓰임받는 인생들입니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연약하면 연약한 대로 내 인생의 일대기를 기록한다면, 그 일대기 중에 약한 모습도 하나님은 사용하심을 기억하십시오. 우리 인생의 약한 모습이, 없애고 싶은 과거가 걸림돌이 아님을,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서도 새 역사를 이루어 가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2. 근원부터 살폈습니다
두 번째 누가의 역사 기술 방식은 근원부터 자세히 살핀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근본과 근원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이, 현재가 중요합니다. 세상에 믿지 않는 사람들은 지금 내가 얼마나 잘 사느냐, 지금 내가 얼마나 부자로 사느냐, 지금 내가 얼마나 건강한가, 그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다가 문제가 닥치면, 거기서 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 문제가 왜 일어났는지 근원을 자세히 살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누가복음을 상세하게 읽어 보십시오. 복음서를 보십시오.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의 근원을 뭐라고 말합니까? 첫째는 죄 문제요, 두 번째는 죽음의 문제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아무리 수고하고 발버둥치고 노력해도 해소할 수 없는 문제가 죄와 죽음의 문제입니다.
평소 때는 모릅니다. 문제가 닥치면 그 문제의 근원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국은 죄 문제입니다. 죄가 장성해서 사망이 되지 않습니까?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근원을 살펴야 합니다.
성경의 첫 장 창세기 1장 1절이 어떻게 시작합니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우리는 이렇게 성경의 문을 열고 시작합니다. 이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의 창조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하고 들어갑니다. 그런데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지금 내가 얼마나 잘 먹고 잘 사느냐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기니까 이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근원을 알고 있는 우리는 내 인생에 문제가 생기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나아가서 묻습니다. 하나님, 내 인생에 왜 이런 문제가 생깁니까? 해결해 주십시오. 풀어 주십시오. 해소해 달라고 하나님께 엎드립니다. 그것이 다른 것입니다.
여러분, 부디 우리도 근원을 깊이 자세히 살펴야 합니다. 지금 내가 누리는 복의 근원이 어디서부터인지, 하나님으로부터 복의 근원이 온 것 아닙니까? 그러면 내가 자랑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지금 내 인생의 문제의 근원이 죄 문제라면, 이 죄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하나님께 엎드려야 합니다. 기뻐도 즐거워도 교만하지 않고, 문제가 생겨도 낙심하지 않는 이유는 근원을 들여다볼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이 이 근원을 살피는 인생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3. 한 사람을 위해 썼습니다
세 번째 누가가 기록한 역사 기술의 방식은 데오빌로 각하에게 쓴 것입니다. 그는 누가복음 24장을 한 사람을 위해서 썼습니다. 사도행전 28장까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행전 1장 1절과 2절을 보십시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누가복음 총 24장, 사도행전 총 28장, 합이 52장입니다. 이 어마어마하고 방대한 양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누가가 한 사람 데오빌로를 위해서 썼습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데오빌로가 누구인지, 그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주석과 연구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누가가 한 사람을 위해서 이것을 썼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을 위해서 이렇게 우리가 수고할 수 있습니까? 그 한 사람을 위해서 이렇게 눈물 흘리고 수고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누가는 아마 그때 이 복음서를 쓰면서 2천 년 뒤에 우리가 이것을 읽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한 사람을 위한 복음서가 온 세상 인류를 구원하는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탈바꿈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한 영혼을 섬기는 것은 곧 세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셨습니다. 한 영혼을 얻는 것이 곧 천하를 얻는 것입니다. 한 영혼을 제대로 섬기면 그것은 온 우주를 섬기는 것입니다.
내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내 아내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내 자녀, 여전히 그 자녀 때문에 내가 속상하고 화가 납니다. 그런데 마음에 들지 않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내가 섬기고 사랑하면, 그것은 그 사람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얻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내가 여러 사람, 수많은 사람을 얻겠다고, 수많은 사람을 섬기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한 사람부터 제대로 섬겨야 합니다. 한 사람을 제대로 섬기고, 한 사람을 위해서 눈물 흘리고 얻으면, 그것이 곧 온 우주를 얻는 것입니다.
누가가 데오빌로 한 사람을 위해서 누가복음을 쓰고 사도행전을 썼기 때문에, 이 기록은 한 사람 데오빌로만 변화시키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온 세상 구원에 누가복음이, 사도행전이 쓰임받지 않습니까?
사도행전 1장과 2장을 보면 초대 교회가 베드로의 한 번의 설교로 3천 명이 회개한 사건이 나옵니다. 베드로가 단 한 번에 3천 명 교회의 담임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성도가 3천 명이나 모여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제구시 기도 시간에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다가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는 앉은뱅이 장애인을 보았습니다.
사도행전 3장 4절을 보면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그를 주목하여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외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명하고 그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3천 명 교회 목회자가 보잘것없는 한 불쌍한 장애인을 주목하여 보았습니다.
그것이 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한 영혼이 곧 온 세상이라는 말입니다. 그 한 사람이 곧 교회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한 사람을 제대로 얻어야 합니다. 내 곁에 있는 한 사람, 내가 사랑하기 힘든 한 사람, 그 한 사람을 내가 제대로 섬기고 그분을 얻으면, 우리는 온 세상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 복음의 능력과 지혜가 우리 모든 주의 백성들에게 함께 임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은혜가 풍성하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복음이 사실이라는 말에 힘을 얻습니다. 복음이 사실이므로 우리는 꾸며낼 이유가 없습니다. 덧칠할 필요도 없습니다. 당당하게 자신감을 가지고 이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되겠습니다. 부끄러운 것, 수치스러운 것 숨기지 않겠습니다. 근원부터 자세히 살펴서 내 문제의 근원을 제대로 알겠습니다. 이제 한 사람을 제대로 섬기는 자가 되겠습니다. 복음에 사로잡혀 살겠습니다. 주님 우리와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