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 (눅3:23-38)
명심보감 계선 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조상들의 적선은 후손들에게 여경이 되고, 조상들의 적악은 후손들의 여앙이 된다." 이 말은 조상들이 선을 쌓아두면 후손들에게 경사가 남고, 조상들이 악을 쌓아두면 후손들에게 재앙이 남는다는 뜻입니다. 결국 이 말은 세대와 세대가 단절되어 있지 않고 연결되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삶의 편안함과 풍요로움과 안정됨은 부모 세대와 그 윗세대에 빚지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어른들이 수고하고 땀 흘려서 오늘 이 땅의 안정과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지켜주셨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이렇게 마음껏 신앙생활하고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윗세대에 당연히 빚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꾸로 보면, 오늘 만약 우리가 제대로 살아내지 못하고, 악을 행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일을 매일 행한다면, 그 모든 영향력은 우리 대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후손들에게 계속해서 그 영향력이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들도 원뿌리를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내 조상이 어떤 분이셨는지, 또 나는 후손들에게 영향을 주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항상 고민하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믿는 사람들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우리의 원뿌리가, 나의 존재의 근거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실 때 나는 어떤 존재인가? 나의 존재의 뿌리와 근원이 하나님이시라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지점까지 고민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 말씀은 예수님의 족보입니다. 이 족보를 보면 예수님의 근원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우리의 존재 뿌리와 근원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도대체 우리에게 오늘 어떤 의미인지를 이 말씀을 통해서 함께 깨닫고 살피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상향식 족보의 의미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사복음서에는 예수님의 족보가 두 군데 나옵니다. 첫 번째는 마태복음에 나옵니다. 마태복음이 이렇게 시작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집안의 족보는 다 이런 식입니다. 하향식 족보입니다. 족보를 처음 넘기면 시조가 나옵니다. 제일 어른이 나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후손, 그 후손 이어지다가 나로까지 이어집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족보의 형태입니다. 마태복음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시조로 보고 예수님까지 42대를 하나하나 상세하게 기록해 두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의 족보 구성은 이와 다릅니다. 전혀 다르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른바 상향식 족보입니다. 23절과 2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 그 위는 맛닷이요 그 위는 레위요 그 위는 멜기요 그 위는 얀나요 그 위는 요셉이요"
상향식 족보의 특징이 나옵니다. "그 위는, 그 위는, 그 위는..." 계속해서 "그 위는"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족보도 이런 식으로 기록하는 족보는 없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의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부, 고조부... 계속 올라갑니다. 그런데 올라가다가 어디까지 올라가겠습니까? 도대체 누구에게까지 올라가야 이 상향식 족보가 끝이 나겠습니까?
38절을 보십시오. "그 위는 에노스요 그 위는 셋이요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 결국 마지막 끝자락에 가니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 하나님에게까지 무한 소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누가가 기록한 특별한 족보 기록의 방식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예수님과 하나님이 부자지간이라는 것,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것을 잘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족보 한 장으로 말미암아 정확하게 입증해 내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올라가고 올라가고 올라가니 결국 하나님을 만나니,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존재 뿌리가 된다는 사실을 이 족보가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대단히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뿐만 아니라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누구로부터 시작해도 올라가고 올라가면 하나님을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한번 해 보십시오. 나로부터 시작한 족보, 끝까지 올라가면 우리 가문의 시조를 만납니다. 거기까지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족보 책입니다. 그런데 그 위를 한번 상정해 보십시오. 책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 가문이 가지고 있는 족보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그 위는, 그 위는..." 무한 소급해서 올라가다 보면 인류 최초의 조상인 아담을 만납니다. 아담을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니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는 논리가 당연히 성립되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부채꼴 원뿔을 세워 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부채꼴 저 하단 어디에서부터 시작해도 꼭짓점, 제일 꼭대기 끝자락에 올라가면 그 끝에 하나님이 최상위의 존재의 근원으로 존재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누구로부터 시작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해도, 나로부터 시작해도, 너로부터 시작해도 모든 인류의 존재의 근원이 하나님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이 족보가 가지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됩니다.
2.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
그렇다면 이 세상 모든 존재하는 자의 근원의 뿌리가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2-1.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나의 뿌리가 하나님이라면, 내 존재의 근원이 하나님 아버지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물어봐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 하나님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시는지, 예수님이 이 땅에서 공생애 생활을 하시면서 매 순간 새벽 미명마다 기도하셨습니다. 새벽마다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십니까? 오늘 나는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나를 통해서 하나님 이루기를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예수님은 매 순간 물었습니다. 결정적인 순간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두고서도 우리 주님은 계속 물었습니다. 하나님께 여쭈고 또 기도했습니다. 그래야 존재의 근원인 하나님의 생각을 벗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죄라고 하는 것은 존재의 뿌리인 하나님의 생각과 반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다르게 행동할 때 우리는 그것을 죄라고 부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내 존재의 근원과 뿌리가 되시는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살면 그것이 바로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디 나의 뿌리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이제 우리가 안 이상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또 묻고 거기에서 벗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2-2. 형제자매 된 가족
두 번째, 모든 사람들이 올라가고 올라가서 그 뿌리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만난다면, 그렇다면 우리의 관계는 어떻게 됩니까? 우리 관계는 형제요, 자매요,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나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너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내 존재의 뿌리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의 관계는 형제, 자매, 가족, 공동체가 됩니다.
이것이 주는 의미는 미워해도 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 모두가 가족인데 누가 누구를 미워하고 증오하고 적대시해서 되겠습니까? 살다 보면 미움 받을 만한 짓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얄미운 존재가 있습니다. 악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내 가족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는 내 가족이 그런 행동을 한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미워하기보다 안타까워해야 합니다. 불쌍히 여겨 주고, 기도해 주고, 내가 혹시 그를 도와줄 일이 없는지를 먼저 따져보고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가 한 분 아버지를 둔 가족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마음에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부모 된 마음에 자녀들이 많다면, 그 자녀들에게 바라는 것 별로 없습니다. 부귀영화, 출세하는 것보다 서로 화목하게 행복하게 지내는 것, 그것을 가장 바랍니다. 하나님도 똑같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들, 공동체가 서로 아끼고 사랑하고, 미워하지 않고 반목하지 않고 시기 질투하지 않고 사는 것, 하나님이 가장 바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들은 그런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알지 못하고 항상 전쟁하고 살았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한번 보십시오. 이 길고 긴 인간의 역사 가운데 전쟁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길고 긴 역사 가운데 인간들은 항상 서로를 죽이고, 서로를 없애야만 내가 산다고 생각했습니다.
1095년부터 1291년까지 약 200여 년 동안 십자군 원정이 여러 차례에 걸쳐 이루어집니다. 십자군 원정이 왜 시작되었습니까? 이슬람 세력이 성지를 가져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교황청에서 성지를 회복하고 수복하자는 뜻으로 십자군을 일으켰습니다. 초기에는 좋은 뜻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을 다시 되찾아오자. 그래서 군대를 일으켰습니다. 좋은 의도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약 200여 년 동안 이 십자군 전쟁이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지면서 약탈과 살인과 방화와 사람을 죽고 또 죽이는 일들이 계속해서 끊임없이 반복되었습니다. 초기의 거룩한 뜻은 다 사라져 버리고 결국은 사람을 죽이는 살육 전쟁으로 변질됩니다. 십자군 원정을 떠나는 군인들도 거룩한 사명감이 아니라 돈 벌기 위해서 떠났습니다. 이것이 십자군 원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200년 기간 동안에 가장 가슴 아픈 사건이 있습니다. 어린이 십자군입니다. 1212년 독일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어린이 십자군을 모집합니다. 순전하고 순수하고 깨끗한 어린이들을 십자군으로 보내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시고 성지를 되찾아 주실 것이라는 거짓되고 허황된 믿음으로 어린이 십자군을 모집했습니다. 수천 명의 어린이들이 모였습니다. 성지 회복이 쉽지 않으니 어린이들을 모아서 성지로 보냅니다. 무장 없이 순례 행렬로 그들을 보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훈련받지 않은 어린이, 청소년들입니다. 무장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청소년, 어린이들입니다. 그들이 가다가 고된 행군에 지쳐서 쓰러져 죽습니다. 도적떼들을 만나서 약탈당하고 죽습니다. 남아 있는 아이들은 끌려가서 노예가 됩니다. 지중해 바다에 도착해서 배 타기 전까지 살아남은 아이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전쟁이 주는 비참한 사건들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고 죽이다 보니 이런 일까지 벌어집니다.
1618년부터 1648년까지 30년 전쟁이 유럽 전체를 불태워 버렸습니다. 30년 전쟁, 종교 전쟁입니다. 신교와 구교, 구교와 신교, 가톨릭 세력과 개신교 세력들이 서로 싸웠습니다. 서로 옳다고 생각하고 싸웠습니다. 그런데 그 전쟁으로 약 800만 명이 목숨을 잃습니다. 그 당시 유럽 인구의 약 15% 정도 되는 인명 피해가 났습니다. 유럽 역사상 가장 큰 인명 피해가 바로 종교 전쟁이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줍니까? 종교 개혁, 잘 믿어보려고 종교 개혁했습니다. 하나님 뜻대로 살아보고 믿어보려고 개혁을 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종교 개혁한 사람들이 서로 싸움을 벌입니다. 저 세력이 없어져야 정의가 세워진다고 생각하고 서로를 완전히 죽여 버리고 없애 버리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역사입니다.
여러분, 이 역사 가운데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그들이 싸우고 서로 죽고 죽이는 동안 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모두가 정말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라면 어떻게 내 이웃을 그렇게 죽일 수가 있습니까? 우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역하실 때 이방인을 차별한 적이 없습니다. 가난한 자, 병든 자, 연약한 자, 귀신 들린 자, 여자, 노인, 어린아이 모두를 다 우리 예수님이 품 안에 주셨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우리 예수님은 병 고침도 해 주셨습니다. 먹을 것도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 예수님 앞에는 그저 사람만 있을 뿐이지, 그들의 피부색이나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이념이나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들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다 한 하나님을 뿌리로 두고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마음속에는 분노와 증오와 차별이 없습니까? 우리 마음속에 상대가 분명히 없어져 버려야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한 뿌리로 두는 사람들의 생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적어도 나의 존재의 근원이 하나님이라면 우리는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지 못하더라도 노력하고 수고하고, 사랑으로 보듬으려고 노력하고 기도하고 애써야 합니다. 이것이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자의 자세인 줄로 믿습니다.
3. 족보 속 인물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족보에 보면 많은 예수님의 조상들이 등장합니다. 본받아야 될 사람도 있고, 반면교사 삼아야 될 분들도 있습니다. 그중에 두 분 정도만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3-1. 스룹바벨의 열정
27절을 보십시오. "그 위는 요아난이요 그 위는 레사요 그 위는 스룹바벨이요 그 위는 스알디엘이요 그 위는 네리요" 스룹바벨이라는 인물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스룹바벨이 어떤 사람입니까?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북왕국과 남왕국으로 분열되었고, 남유다는 기원전 586년 망하고 맙니다.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서 나라가 망하고 많은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때 여러 선지자들이 예언했습니다. 70년이 지나면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70년이 지났습니다. 바벨론이 망했습니다. 페르시아 제국의 황제 고레스 왕이 칙령을 내립니다. "너희는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도 좋다." 그때 그들을 이끌고 돌아온 총독이 바로 스룹바벨이었습니다. 1차 포로 귀환자들을 이끌고 대제사장 예수아와 함께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람이 스룹바벨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스룹바벨에게 위대한 한 가지 사명을 주셨습니다. 성전 재건의 사명이었습니다. 성전이 불타 없어졌지 않습니까? 나라가 망할 때 성전이 다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제 너희가 돌아가서 예배부터 드려야 하니 성전을 재건하라, 이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스룹바벨에게는 이 사명이 대단히 무거웠습니다. 왜냐하면 70년이 지났습니다. 사람들은 돌아와서 무엇부터 하려고 하겠습니까? 옛날에 살았던 집이 없습니다. 다 무너져 버리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성전 공사를 해야 될 사람들이 가장 먼저 자기 집부터 지으려고 합니다. 비를 피할 집이 필요하니까요.
두 번째 그가 당한 어려움은 백성들의 무력감과 패배 의식입니다. 무려 70년 동안 포로로 살았습니다. 때리면 맞고, 일하라면 일하는 포로로 살았습니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패배 의식과 무력감이 깊게 뿌리박혀 있습니다. 이들을 데리고 주도적으로 성전 재건 공사를 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이미 그곳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 같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전 재건 공사를 방해합니다.
매우 어려웠습니다. 기원전 586년에 나라가 망하고 기원전 538년에 그들이 돌아왔지만, 성전 재건을 곧 시작했으나 오랫동안 중단됩니다. 16년 동안이나 중단되었습니다. 기원전 520년까지 중단됩니다.
그때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학개와 스가랴 두 분의 선지자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에스라 5장 1절과 2절 말씀을 보십시오. "선지자들 곧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유다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다 사람들에게 예언하였더니 이에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가 일어나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건축하기 시작하매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함께 있어 그들을 도우니라"
이제 이렇게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의 도움을 받아서 그들이 기원전 520년에 성전 재건 공사를 시작해서 결국 기원전 516년 성전을 완성합니다. 사람들은 이 성전의 이름을 스룹바벨 성전이라고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스룹바벨이 가장 고생한 것을 알았으니까요.
여러분, 우리가 이 스룹바벨을 통해서 배울 점이 무엇입니까? 그의 끈기와 인내와 열정입니다. 사명을 하나님께 받았습니다. 성전 재건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그 땅은 황무지입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포로들을 데리고 와서 일해야 합니다. 그들이 자기 집부터 지으려고 합니다. 방해하는 세력들이 많습니다. 그런데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약 23년 동안 스룹바벨은 그 일을 위해서 전심전력했습니다. 결국 이루어냅니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좌우를 살피지 않고, 오직 한 가지 이 사명만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살았던 스룹바벨의 이 열정과 끈기와 인내가 그 후손이신 예수님에게 고스란히 내려와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이 땅에 어떤 사명 가지고 오셨습니까? 십자가 사명입니다.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십자가 사명을 가지고 주님이 오셨습니다. 방해하는 사람 많았습니다.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실 때 사탄이 방해합니다. 세 가지 시험으로 방해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예수님의 십자가 길 가는 것을 가로막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 땅에 왕으로 삼으려고 했지, 죄를 구속하시는 구원자로 삼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끝까지 그 사명을 이루어내십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무덤에서 사흘 만에 살아나셔서 부활의 주가 되시고, 모든 인류를 하나님 앞에 인도하는 구원의 주가 되셨습니다. 그 조상 스룹바벨처럼 인내와 끈기와 열정으로 우리 주님은 이 땅에서 온전하게 그렇게 살아내셨던 분입니다.
3-2. 에녹의 동행
37절을 보십시오. "그 위는 므두셀라요 그 위는 에녹이요 그 위는 야렛이요 그 위는 마할랄렐이요 그 위는 가이난이요" 우리는 이제 또 여기서 에녹이라는 사람을 만납니다.
에녹이 어떤 인물입니까? 성경에 보면 단 두 명만이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분이 있습니다. 그 첫 번째 분이 에녹이고, 두 번째가 엘리야입니다. 엘리야는 불말과 불병거로 하늘로 올라갑니다. 에녹이 어떻게 해서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를 인도하셨을까요?
창세기 5장 23절과 24절을 보십시오.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그가 65세에 그의 아들 므두셀라를 낳습니다. 그리고 300년 동안이나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여러분, 동행이라는 단어가 어떤 의미를 가집니까? 두 사람의 친구가 길을 떠났습니다. 먼 길을 함께 가기로 결정하고 떠납니다. 그런데 한 며칠 가다가 서로 의견 다툼이 있어서 싸웠습니다. 화해가 되지 않습니다. 의견이 모아지지 않습니다. 한 사람은 동쪽으로 가고 한 사람은 서쪽으로 갑니다. 우리는 그것을 동행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서로 분열된 것입니다. 이처럼 두 사람이 함께 한 길을 처음부터 끝까지 걸어가는 것,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정말 어렵습니다.
그런데 에녹은 하나님과 함께 300년을 동행했습니다. 300년 동안 자기 의지가 하나도 없었다는 뜻입니다. 자기 생각과 하나님 생각이 매 순간 일치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뜻과 에녹의 뜻이 매 순간 동일하겠습니까? 하나님이 가시고 싶어 하는 곳과 에녹이 가고 싶어 하는 곳이 항상 같겠습니까? 다르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녹은 하나님의 뜻과 자기 뜻이 다를 때마다 자기 뜻을 접었습니다. 포기하고 하나님 뜻에 순종하고 300년을 살았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번도 이탈하지 않고,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동행을 귀하게 보시고 "너는 이제 이 땅에 있을 이유가 없다" 하시고 그를 죽음을 보지 않고 천국으로 인도해 가신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믿음의 위인들을 보십시오. 그들 중에 평생을 단 한 번도 궤도를 이탈하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으로, 가나안 땅으로 들어왔지만 그는 기근 때문에 이집트로 내려갑니다. 궤도를 이탈했습니다. 갔다가 돌아왔습니다. 내 몸에서 날 자라야 내 자손이 될 것이라고 하나님이 분명히 말씀하셨지만 그는 기다리지 못하고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궤도를 이탈했다가 다시 돌아옵니다. 다윗은 밧세바 사건, 우리아 사건으로 궤도를 이탈했다가 회개하고 다시 돌아옵니다. 솔로몬은 우상숭배자가 되어서 너무 멀리 가 버렸습니다. 단 한 번도 내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궤도를 이탈한 적이 없는 사람이 성경에 나온 적이 없습니다. 에녹 이외에는요.
우리 예수님이 자기 조상 에녹의 동행을 그대로 계승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사역하시는 동안 단 한 번도 한눈 판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딴짓한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다른 데 갔다가 다시 돌아온 적이 있습니까? 우리 예수님은 그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이 행하신 일입니다. 조상들의 영적인 힘이, 그들이 살아냈던 그 놀라운 능력이 후손 되는 예수님 속에서 발현되고 있습니다. 스룹바벨의 인내와 끈기와 열정이,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던 그 일관된 동행이 예수님에게 그대로 계승되어 있습니다.
4. 세대를 넘어 이어지는 믿음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내가 오늘 살아가는 믿음의 여정이 세대와 세대를 넘어서 자녀와 자손들에게 그대로 이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세대는 단절되지 않습니다. 세대는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계승됩니다. 만약 우리가 믿음생활을 대충대충 한다면, 한쪽 발은 세상에 두고 한쪽 발은 하나님에게 두고 그렇게 산다면, 나의 양다리 신앙이 자녀들에게 계승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중적인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나의 이중적인 모습을 우리 자녀들의 영적 DNA 속에 그대로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잘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한 점 부끄러움 없이 믿음생활 잘해야 합니다. 스룹바벨처럼, 에녹처럼. 스룹바벨처럼 어떤 일이 있어도 사명을 완수하는 인내와 열정과 끈기를 가지고 살아야 하고,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고 궤도를 이탈하지 않고 살아야 우리 자녀들, 우리 자녀의 자손들, 우리 후손들 삶 속에서 내가 그렇게 치열하게 살아갔던 영적인 투쟁이 그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지고 계승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족보를 통해서 그런 것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 족보가 오늘 우리에게 주는 귀한 영적 가치를 기억하시고, 우리의 믿음의 여정이 흔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존재의 근원이자 뿌리가 되심을 확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뿌리 되신 하나님 앞에 부끄러울 것이 없도록 하나님의 뜻을 묻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여, 또한 모두가 형제요 자매요 가족이라고 알았사오니, 우리 모두가 서로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반목하고 질시하고 미워하고 서로가 서로를 없애려고 하는 이 악한 세상에서,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우리 모든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자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스룹바벨의 열정과 끈기와 인내가,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한 이 동행의 여정이 그 후손 예수님에게 그대로 나타났던 것처럼, 오늘 우리의 삶의 귀한 믿음의 발걸음이 우리 자녀들에게, 자손들에게 흘러흘러 가기를 원합니다. 주여, 우리가 잘못된 것 고치겠습니다.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것 회개하겠습니다. 주여, 다시 고치고 또 고쳐서 주를 보고 한 걸음 나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