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을 받으시더라-2 (눅4:1-13)
세계 최초의 증권 거래소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611년에 장이 열렸는데, 당시 네덜란드 사람들은 주식 투자를 통해 재산을 증식하는 데 열심이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암스테르담의 인구가 약 20만 명 정도 되었는데, 그중 주식 투자를 열심히 한 사람들이 10퍼센트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대단히 높은 수치입니다. 가히 17세기판 개미 열풍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들은 열심히 투자하고 돈을 벌려고 눈을 크게 뜨고 투자처를 찾았는데, 너무 열심히 투자하다 보니 주식의 가격이 오를 대로 올랐습니다. 서민들은 주식 한 주를 사기에도 버거운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적당한 투자처가 없을까 찾던 중에 이들이 튤립을 만납니다. 당시 튤립은 유럽 시장에 수입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튤립이라는 꽃은 작물을 가꾸는 데 수년간의 오랜 세월이 걸립니다. 그렇게 해서 탐스러운 꽃망울을 피웁니다. 그런데 꽃이 피기만 하면 아주 비싼 값에 거래가 되었습니다. 투자하기에는 아주 좋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튤립에 투자합니다. 그러다 보니 튤립에 너무 많이 투자해서 튤립 모종 하나의 가격이 암스테르담 시내의 집 한 채 가격을 넘어서는 이상한 현상까지 일어나게 됩니다. 그제야 사람들이 깨닫습니다. 너무 많이 올라왔구나, 지금 거품이 너무 많이 꼈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급속도로 투자 심리가 얼어붙습니다. 시장은 냉각되고 거품은 빠지고 파산하는 사람이 줄지어 나오기 시작합니다. 네덜란드 당국이 급히 개입해서 급한 불은 껐지만 상처는 오랫동안 남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미 파산했습니다. 누가 시킨 것이 아닙니다. 자기 손으로 자기 돈을 들여서 투자했습니다. 그걸 누가 책임지겠습니까? 그래서 17세기 네덜란드를 둘러싼 유럽의 상황은 좋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반성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된 것은 다 우리의 탐욕 때문이라고 반성합니다. 각계각층에서, 문화계에서, 미술계에서, 음악계에서 반성과 자성의 목소리가 터져 나옵니다.
이 즈음에 어떤 화가가 그림을 그렸습니다. "해골과 꽃다발이 있는 바니타스 정물화"라는 그림입니다. 1642년 작품인데 화면 가운데 해골이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옆으로 아름다운 튤립 꽃다발이 있는데 시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 시계가 놓여 있습니다. 시계와 해골, 시계와 시들어가는 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결국 사람은 유한하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일확천금을 꿈꾸고 돈을 벌어도 결국 사람은 죽어 해골이 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꽃도 마찬가지입니다. 미친 듯이 투자하고 돈을 퍼부었지만 그 꽃도 결국은 시들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반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실 17세기에 사람들은 이미 이렇게 반성했습니다. 역사적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교훈을 이미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그 이후로 인간의 역사는 어땠습니까? 여전히 일확천금을 꿈꾸고, 여전히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누리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21세기 지금도 여전히 똑같습니다. 우리도 지금 이런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예수님께서 사탄에게 시험받으신 내용입니다. 이 장면을 통해서 탐욕 가운데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강력한 경고의 말씀을 던져 주십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성령 충만하셨습니다. 보통 우리는 성령 충만하면 사탄이 떠나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성령 충만한 자에게 사탄도 함께 역사했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의 상태를 알고 있었습니다. 금식하여 40일 동안 주리신 예수님을 알고 음식으로 공격합니다. 사탄은 예수님의 신적 자존심에 상처를 내려고 했습니다.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사탄은 과정을 건너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첫 번째 시험을 당당하게 이겨내십니다.
1. 사탄의 유혹
1-1. 집요한 유혹
이제 두 번째 시험입니다. 5절 말씀을 보십시오.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이며"
우리는 이 5절 말씀에서 두 가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첫 번째는 "또"라는 말씀입니다. 사탄은 한 번 실패했는데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사탄의 시험이 실패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을 유혹하지 못했습니다. 강력하게 유혹했지만 예수님은 이겨내셨습니다. 그렇다고 포기하는 사탄이 아닙니다.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집요하게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사탄이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시험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일에 도전했다가 실패하면 금방 포기해 버립니다. 이건 나와 적성이 맞지 않다, 혹은 이건 내 능력 밖의 일이다 하고 생각하면서 사람들은 금방 지치고 쉽게 포기합니다. 그러나 사탄 마귀는 그렇지 않습니다. 지속적이고 끊임없이 집요하게 유혹합니다. 예수님에게 그랬는데 우리에게는 오죽하겠습니까? 사탄은 포기하는 법이 없습니다.
지난주에 살펴보았던 요셉 이야기를 통해서도 그렇습니다. 사탄은 보디발의 아내를 통해서 요셉을 유혹했습니다. 하룻밤 잠자리를 청합니다. 하지만 요셉은 첫 번째 시험을 잘 이깁니다. 그렇다고 물러갈 사탄이 아닙니다. 자존심이 상할 법도 합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집요하게 공략합니다. 창세기 39장 9절과 10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도 아니하고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한 번 유혹을 이겼습니다. 그러면 끝나야 되는데 끊임없이 유혹합니다. 날마다 동침하기를 청했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이겠습니까? 일주일, 한 달, 혹은 그 이상 지속적으로 다가오는 이 유혹을 견디기가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사탄은 집요하고 동시에 성실합니다.
1-2. 선으로 악을 이기라
요셉에게도 예수님에게도 집요하게 성실하게 다가오는 이 사탄의 유혹을 이기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적어도 우리는 사탄 마귀보다는 성실해야 됩니다. 그들이 성실한 것 이상으로 우리는 하나님 말씀에 성실해야 됩니다. 매일같이 하나님 말씀을 붙잡고 영적으로 무장되어 있어야 됩니다. 내가 영적으로 무장되어서 말씀 앞에 매일같이 나를 복종시키고 서 있지 않는다면 우리는 지속적인 사탄의 유혹과 공격을 이겨내기가 어렵습니다. 그것을 극복하고 승리하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말씀으로 나를 무장하고 그 말씀 앞에 나를 세우지 않으면 우리는 그것을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렇게만 하면 수동적입니다. 견디고 버티고 이겨내는 것, 답답합니다. 이제 좀 우리가 공격할 수 없을까요? 사람들은 말합니다. 최선의 공격이 최선의 수비라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악한 사탄 마귀를 제압할 수 있을까요? 바울 선생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로마서 12장 21절 말씀을 보면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했습니다. 악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선을 적극적으로 행하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선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행동을 뜻하는 것일까요? 도덕적인 행동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 보실 때 좋은 행동,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행동을 적극적으로 선한 행동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참 귀하구나, 하나님께서 보실 때 인정받을 만한 선한 행동들, 그런 행동들을 적극적으로 해 나갈 때 우리는 악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모든 것에는 관성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선을 행하다 보면 그 적극적인 선이 또 다른 선을 낳습니다. 주의 일을 한번 해 보십시오. 이제 올해 한 해를 정리하고 내년을 준비합니다. 내년에 우리가 물밀듯이 다가오는 사탄의 유혹을 이기려면 선한 일로 악을 이겨야 되는데, 나에게 맡겨 주신 작은 일을 한번 해 보겠다, 어린 생명들을 양육하고 가르치는 교사의 일을 해 보겠다, 영혼을 돌보는 기도자의 일을 해 보겠다, 한 구역을 섬기는 일을 해 보겠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시작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혜를 주십니다. 선한 일을 하면 더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은 우리에게 열린 마음을 주시고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능력도 주시고 은혜도 주십니다. 이것이 선한 일의 연쇄 반응이고 관성입니다.
그러나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악한 일이 우리에게 찾아오고, 악한 일을 하기 시작하면 악한 일도 관성이 있습니다. 악한 일을 하면 또 다른 악한 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악을 이기려면 적극적으로 선한 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매진해야 됩니다. 그렇게 해서 악을 이겨 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3. 보여주는 유혹
또한 이 5절 말씀에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사탄의 유혹 방식이 있습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데리고 천하만국을 보여 주었습니다. 사탄의 전형적인 유혹의 방식입니다. 보여 주는 것입니다. 서양 속담에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보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보는 것을 신뢰할 만큼 믿습니다. "한번 보여 줘 봐, 네가 말하는 것이 진짜 있는지 내 눈앞에 가져와 봐" 하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보면 사람들이 믿습니다.
그런데 보는 것이 다 믿을 것은 아닙니다. 셰익스피어는 "베니스의 상인"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반짝이는 것이 다 금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반짝여서 금인 줄 알고 가 보았더니 가짜였습니다. 우리의 시각이 얼마나 약한지 모릅니다. 우리의 눈은 우리의 감각을 속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천하만국을 보여줍니다. 그 권위와 권세와 영광을 보여주고 예수님을 유혹하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사탄이 보여줍니다. 보여주면서 유혹하려고 합니다. 뱀이 하와에게 찾아왔습니다. 선악과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하와가 선악과를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선악과 그 열매를 먹으면 죽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뱀의 유혹을 받고 선악과를 보니 보암직도 합니다. 먹음직도 합니다.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합니다. 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모릅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일서 2장 16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고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면 마귀가 이 세 가지로 우리를 유혹한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한번 깊이 있게 생각해 보십시오. 육신의 정욕은 우리 머리부터 발끝까지 육체 전체를 포괄하는 말입니다. 그 속에 우리 눈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굳이 왜 안목의 정욕을 한 번 더 반복하겠습니까? 육신의 정욕 속에 안목이 들어가 있는데 왜 반복합니까? 그만큼 안목의 정욕이 강렬하다는 뜻입니다. 보는 것은 우리를 대단히 많이 유혹합니다. 사람들이 유혹받는 것 대부분이 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1-4. 듣는 것의 중요성
그래서 우리는 이 보는 것 대신에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방법을 기억해야 됩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기독교 신앙은 듣는 것을 강조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창세기 1장 말씀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이 로고스(λόγος), 곧 말씀입니다. 예수님 자체가 말씀이시고 하나님이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믿음이 들음에서 나기 때문에 우리는 듣는 것이 신앙생활의 본질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보는 것은 우리를 속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우리를 속이지 않습니다. 말씀을 잘 경청하고 들어야 됩니다. 그런데 요즘 세상은 듣는 것보다 보는 것이 우선입니다. 보고 확실하다 싶으면 덤벼듭니다. 마음의 욕망이 꿈틀거립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백성들은 즐겨 들을 수 있어야 됩니다.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까? 구약에 나오는 독특한 표현 중에 하나가 청종입니다. 청종의 뜻이 무엇입니까? 듣고 따르라는 말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우리의 마음이 감동되면 그 말씀을 따라가야 됩니다. 보고 따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듣는 것에 조금 더 마음을 쓰고 귀를 기울이고 우리의 귀를 열고 마음을 열어야 우리는 사탄의 꾐에 빠지지 않습니다.
2. 사탄의 권세
2-1. 세상의 권위와 영광
6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이 6절 말씀에서 우리는 사탄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를 발견합니다. 이 모든 권위와 영광을 내가 너에게 주겠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사탄이 이 정도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생각합니다. 정말 사탄이 권위와 영광을 줄 수 있을까요? 줄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죄 짓고 쫓겨났습니다. 그때부터 세상은 악한 사탄 마귀가 공중의 권세 잡은 자가 되었습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가 되었다는 말은 그가 가지고 있는 권위와 영광을 줄 수 있는 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 주변을 보십시오. 저 사람이 정말 악한데, 하나님의 사람이 아닌데, 정말 악질인데, 진실로 악한데 그들이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광을 가지고 있습니다.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누가 준 것입니까? 그것을 하나님이 주셨겠습니까? 사탄 마귀가 그런 자들에게도 권위와 영광을 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괴테가 "파우스트"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파우스트 박사가 나옵니다. 이분은 권태로웠습니다. 나이가 많습니다. 젊을 때는 꽤 괜찮았는데 나이가 많아지면서 지겨움과 권태에 빠집니다. 연구도 시원치 않습니다. 머리도 이전 같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이전처럼 존경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그를 찾아옵니다. 그에게 거래를 제안합니다. 당신의 영혼을 나에게 저당잡히면 당신에게 젊음을 주겠습니다, 쾌락을 주겠습니다. 파우스트 박사가 그것을 그대로 수용해 버립니다. 자신의 영혼을 악마에게 주고 자신은 젊음과 쾌락을 가져옵니다. 그런데 사탄이 그것만 준 것이 아닙니다. 부귀영화 권세까지 덤으로 주었습니다. 악마와 거래합니다. 악마는, 사탄은 우리에게 권위와 권세와 영광을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2-2. 사탄이 원하는 자
그런데 어떤 자에게 줄까요? 6절 말씀 다시 한번 읽습니다.
"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사탄이 원하는 자에게 준다고 했습니다. 곧 이 말은 사탄이 마음에 드는 자, 사탄과 우리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자, 사탄이 사랑할 만한 자에게 권위와 권세와 영광을 준다는 뜻입니다. 나의 이해관계와 사탄의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자입니다.
우리가 6절 말씀을 보면 사탄이 얼마나 무섭고 교활한지 깨달아야 됩니다. 사탄은 강요하지 않습니다. 억지로 권위와 권세를 그에게 안겨 주지 않습니다. 파멸로 나아가는 권위와 권세와 영광을 억지로 안겨 주는 법이 없습니다. 모두가 자기 손으로 선택하게끔 만듭니다.
다윗은 왕궁 옥상에서 산책했습니다. 길 건너의 어떤 여인이 목욕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먼저 보여 줍니다. 안목의 정욕입니다. 보고 말았습니다. 마음속에 욕망이 불일듯 일어납니다. 사람을 시켜서 이 여인이 누군지 알아보게끔 합니다. 남편이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그 남편은 전쟁터에 갔습니다. 그 여인을 데려오라고 합니다. 이 여인과 하룻밤을 지냅니다. 이제는 남편이 거추장스럽습니다. 이 남편을 죽여야 됩니다. 우리아를 전쟁터 가장 앞선에 보내서 그를 죽이고 맙니다.
거기에 마귀가 강요한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탄은 그냥 보여 줬을 뿐입니다. 사탄은 그냥 그의 욕망을 자극하는 것을 보여 줬을 뿐입니다. 선택은 모두 다윗이 하고 말았습니다. 그가 선택했습니다.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한 것도, 그녀를 데려온 것도, 그녀와 하룻밤을 보낸 것도, 그 남편을 죽이라고 편지를 써서 보낸 것도 모두가 다윗의 선택이었습니다.
이런 자를 마귀가 기뻐합니다.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겠다"고 했습니다. 파우스트 박사도 자기가 원했습니다. 나는 젊음을 받고 쾌락을 받고 나의 영혼을 팔겠다고 자기가 선택한 것입니다. 거기에 마귀는 일절 개입하지 않습니다. 그냥 던져 줬습니다. 이런 거래가 있는데 해 볼 테냐고. 누가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억지로 그를 협박한 적이 없습니다. 파우스트 박사도 자기가 선택한 것입니다. 이것이 사탄이 교활하고 무서운 점입니다. 사탄이 원하는 것, 바로 이런 자를 사탄이 원합니다.
2-3. 소원과 욕망의 분별
이 유혹에서 우리가 견디고 이겨내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우리는 모두가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내년에 반드시 이것만은 이루고 싶다는 소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소원을 한번 걸러 봐야 됩니다. 필터링하셔야 됩니다. 이 소원을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이 소원은 마귀가 기뻐하는 것일까. 내가 원하는 이 젊음과 쾌락을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면 아름답게 늙어가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일까, 나이가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고 젊은 시절의 쾌락과 젊음을 가지고 사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마귀가 기뻐하는 것일까. 남편 있는 여인을 데려와서 내 아내로 삼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인가, 마귀가 기뻐하는 것인가.
내 안에 있는 소원이라고 포장된 것이 과연 욕망인지 소원인지, 하나님 앞에 기도 제목이라고 내어 놓는 것이 진실로 기도 제목인지 욕망인지를 우리는 분별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것을 걸러내지 못하면, 그것을 분리하지 못하면 우리는 매번 마귀가 원하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평생 신앙생활을 수십 년 했는데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이 되어야지, 사탄 마귀가 원하는 사람이 되어서 사탄 마귀에게 권위와 영광을 수여받고 그것도 기도 응답을 이루었다고 기뻐하며 살아서 되겠습니까? 그건 거짓이고 위선이고 그런 믿음은 가짜 믿음입니다.
또는 우리는 그런 사람을 보고 부러워합니다. 전혀 부러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진짜 내가 원하는 소원들을 하나님 앞에 물어보십시오. 하나님, 이것을 기뻐하십니까? 하나님께서 보실 때 어떻습니까? 그것을 묻지 않고 그저 기도하러 하나님 앞에 나와서 이것을 이루어 주십시오, 저것을 이루어 주십시오 해 봐야 하나님은 절대 이루어 주지 않으십니다.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건 기도가 아니라 욕망이기 때문에 절대 들어 주지 않으십니다.
시편 20편 2절에서 4절 말씀을 보십시오.
"성소에서 너를 도와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아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내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전제가 있습니다. 성소에서, 시온에서, 소제와 번제를 드리면서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드리면서 기도하면서 너의 소원을 검증받으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이 소원이 하나님 기뻐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마귀가 기뻐하는 것입니까 하고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하며 이것을 올려 드려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시면 버릴 수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당연히 이루어 주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어디로 갑니까? 마귀가 말합니다. "야, 그거 백날 기도해 봐, 안 돼. 내가 이루어 줄게. 나한테 가지고 와 봐."
3. 승리의 길
3-1. 사탄 앞에 무릎 꿇지 말라
마귀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 줄까요? 7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내게 절하면"이라고 했습니다. 절하다라는 동사 프로스퀴네오(προσκυνέω)라는 동사를 썼습니다. 프로스(πρός)는 전치사입니다. 어디어디를 향하다라는 뜻입니다. 퀴네오(κυνέω)는 엎드려서 발에 입맞추다라는 뜻입니다. 사탄을 향하여 엎드려서 사탄의 발에 입맞추면 모든 것을 다 이루어 주겠다고 했습니다.
고대 앗시리아나 바벨론의 부조를 보면 이런 그림들이 많습니다. 제국의 황제에게 공물을 바치기 위해서 조공을 바치는 속국의 왕들이 거대한 곡식 꾸러미를 가지고 옵니다. 그것을 앞에 놓습니다. 그리고 엎드립니다. 제국의 황제 발에 입을 맞춥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프로스퀴네오(προσκυνέω)가 당신의 지배 아래 제가 들어갑니다, 나는 내 나라가 있지만 사실은 당신의 왕국의 지배 아래 살고 싶습니다, 나를 보호해 주십시오, 내 왕권을 지켜 주십시오, 이 나라를 보호해 주십시오라는 항복의 표시 아닙니까?
사탄 앞에 우리가 절하고 그의 발에 입맞춘다는 뜻은 나는 당신의 방식대로 살겠다는 뜻입니다. 사탄의 방법대로 내가 살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아서는 내 소원을 이루지 못하니 사탄의 방법대로 살아서 내 소원을 이루고 싶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와서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이 그것은 너의 욕망이니 이루어 주지 않겠다고 하시니 사탄의 방법대로 와서 엎드려서 부귀영화 권세 누리고 부자 되고 잘 먹고 잘 살겠다는 뜻입니다. 사탄이 이런 자를 원합니다. 마음에 기뻐합니다. "내가 원하는 자에게 모든 것을 다 주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1990년대에 우리는 냉전이 끝난 줄 알았습니다. 구소련이 붕괴했습니다. 동유럽이 다 민주화되었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습니다. 핵무기가 감축됩니다. 그때 우리는 기대했습니다. 이제 우리도 통일이 멀지 않았구나, 이제는 냉전의 시대가 끝나고 전 세계가 화합하고 하나 되는 시대가 되었구나. 그런데 지금 도로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시 분리 장벽이 높다랗게 쌓여집니다. 자기 나라 국익을 위해서 약한 나라를 침공합니다. 그 나라를 짓밟습니다. 자기가 더 잘 살기 위해서 하나님의 방법대로가 아니라 사탄의 방법대로 합니다.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그 방식대로 우리가 살겠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그런 지도자에 열광합니다. 이것이 지금 이 세상 돌아가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아서 너무 힘드니까, 하나님의 방식대로 사는 것이 좁은 길이고 가시밭길이니까, 우리는 사탄의 발에 입맞추고 사탄의 방식대로 살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래야 떵떵거리고 잘 살 수 있으니까. 그런데 그 길 끝은 파멸입니다. 그 길 끝에는 영광이 없고 그 길 끝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 길 끝에는 죽음이 기다릴 뿐입니다. 사탄이 파우스트 박사의 영혼을 저당잡은 것처럼 사탄에게 무릎 꿇고 그의 방식대로 살겠다고 결정한 순간 우리의 영혼은 끝입니다.
3-2. 하나님께 경배하라
그래서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경배하고 섬기라고 하셨습니다. 경배하다, 프로스퀴네오(προσκυνέω). 사탄의 방식대로 살지 말고 하나님 앞에 와서 엎드리고 하나님의 발에 입맞추고 하나님의 방식대로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라고 했습니다. 라트류오(λατρεύω). 그저 한 번만 이례적으로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평생 동안 하나님을 섬기는 말씀의 종으로 살라는 뜻입니다.
좁은 길입니다. 평탄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협곡도 만납니다. 때로는 큰 강도 건너야 됩니다. 하지만 그 길을 주께서 동행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 끝에는 영광의 면류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탄의 유혹을 이기는 방법을 예수님이 분명히 보여 주셨습니다. 보는 것 붙잡지 말고 말씀을 들어야 됩니다. 내 소원을 하나님 앞에 올려놓고 소원과 욕망을 분리할 수 있어야 됩니다. 사탄 앞에 무릎 꿇어서 사탄의 방식대로 살지 말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하나님의 발에 입맞추고 하나님의 방식대로 살려고 결단하고 그 길을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습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주님의 은혜와 사랑과 긍휼이 오늘 우리에게 임하고 계신 줄로 믿습니다. 사탄은 집요하게 우리를 유혹합니다. 포기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깨어서 더 성실하게 선으로 악을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 사탄은 보는 것으로 유혹합니다. 주여,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즐겨 듣게 하옵시고 그 말씀 붙들고 살아가서 보는 유혹을 극복하게 하여 주옵소서. 내 마음의 소원을 하나님 앞에 검증합니다. 이것이 소원인지 욕망인지 욕심인지, 사탄이 원하는 것인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인지 우리의 욕망을 다시 한번 걷어내게 하여 주옵소서. 사탄의 방식대로 엎드리고 그의 방식대로 조종당하는 자가 되지 않도록 도우시고, 오직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고 하나님의 방식대로 십자가의 길을 걷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