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강 /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4:20-24)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눅 4:20-24)

1. 익숙함이 주는 위험

1-1. 제멜바이스의 비극

탁월한 재능과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시대를 잘못 만나 그 재능을 꽃피워 보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제멜바이스라고 하는 헝가리 국적의 유대인도 그런 사람들 중 한 분입니다. 이 사람은 1846년, 28세의 나이로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종합병원 산부인과 의사로 부임합니다. 오스트리아 빈의 종합병원은 굉장히 큰 병원이었습니다. 산부인과 병동이 두 병동이나 되었습니다. 그래서 의료 인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제1병동은 의사들과 의과대학 학생들이 분만을 책임지고, 제2병동은 산파들이 분만을 책임지는 구조였습니다.

이분이 이 병원에 부임하고 나서 보니 믿을 수 없는 사실이 있었습니다. 제1병동 산모들의 사망률이 제2병동에 비해서 다섯 배 이상이나 높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의료 인력이 분만을 책임지고 있는데, 어떻게 산파들이 책임지는 병동보다 훨씬 더 많은 사망률을 기록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이 병원은 왜 이런 것이냐고,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아느냐고.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이 똑같았습니다. 원래 그렇다고. 원래 우리 병원은 그랬다고. 이전부터 그랬다는 대답만 돌아올 뿐 뾰족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결심했습니다. 내가 한번 왜 그런지 원인을 밝혀봐야 되겠다고. 탐구했습니다. 관찰하고 살펴보고 또 들여다봅니다. 그리고 나서 결국 답을 찾았습니다. 의사와 의과대학 학생들은 시체를 만지는데 산파들은 시체를 만지지 않습니다. 단순히 시체를 만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시체를 만지고 손을 씻지 않은 채로 분만을 도왔습니다. 그러니 그 병균이 면역력이 약해져 있는 산모들에게 그대로 옮아가고 산모는 죽음에 이르게 되는 구조였습니다. 그가 이런 상황을 파악하고 분만실 앞에 염소 석회 용액을 대야에 담았습니다. 들어가는 사람, 나오는 사람 모두가 다 여기에 손을 씻고 소독하고 들어가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놀라운 결과가 나타납니다. 사망률이 90% 이상 낮아졌습니다.

그리고 1년 동안 그렇게 했더니, 이제는 한 사람도 죽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병원에서 상을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것을 제대로 된 연구 과제로 논문을 쓰도록 해야 하는데, 오히려 이분이 병원에서 쫓겨났습니다. 의사들을 불결한 집단으로 취급했다는 이유였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와 자격 조건들을 달아서 이분을 쫓아내고 복직시키지 않았습니다. 다양한 방식으로 병원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결국은 돌아가지 못합니다. 제멜바이스는 그 때문에 병을 얻습니다. 결국 정신병에 걸려서 얼마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납니다. 제멜바이스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20년이 지난 이후에 파스퇴르가 세균에 대한 입증 실험을 성공했습니다. 세균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하고 난 이후에 드디어 그의 청결 실험도 검증됩니다.

시대를 잘못 만난 것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이 사건을 시대를 잘못 만난 것으로만 치부할 수 있겠습니까? 이 사건이 주는 교훈이 분명히 있습니다. 익숙함에 젖어 있으면 사람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시체를 만지고 손을 씻지 않는 것이 익숙했습니다. 원래 그렇게 살았습니다. 원래 이 병원은 그랬습니다. 원래 우리는 이런 식으로 살았다고 말하며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었습니다. 누군가가 문제 제기를 하는데 더 이상 따져 보려고 하고 연구하고 탐구해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원래 그랬다고 반복할 뿐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얼마나 많이 죽었습니까? 아까운 사람이 죽습니다. 생명을 잃었습니다. 다 살릴 수 있는 산모들이었고 어린아이들이었는데, 그만큼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습니다. 익숙함에 젖어 사는 것은 내가 편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편안함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1-2. 익숙함에 갇힌 나사렛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 말씀을 보면 예수님 시절에 나사렛 마을 사람들이 나옵니다. 이분들처럼 예수님에 대해서 익숙한 사람들이 없습니다. 30년 동안 예수님을 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익숙함이 그들의 신앙 성장을 가로막았습니다. 예수님에게 익숙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더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교회에 대해서 익숙하고 예수님에 대해서 익숙하고 성경에 대해서 익숙한데, 그것 때문에 믿음 생활이 방해받지는 않습니까?

한 걸음도 더 나아가려 하지 않고 성경도 읽지 않고 교회 생활도 믿음 생활도 더 성숙하게 하지 않는 것이 오늘 우리의 현주소라면, 우리는 제멜바이스 시절에 그 병원 의사들과 다를 바 없고 예수님 시절에 나사렛 마을 사람들과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서 활동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활동하셨을 때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활동하시니 예수님은 칭송받았고 좋은 소문이 각처에 퍼져 갑니다. 주님은 늘 하셨던 것대로 좋은 습관으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서 성경을 읽고 말씀을 전하십니다. 이사야 61장 1절과 2절의 말씀을 출사표로 전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은혜를 받습니다. 원래 회당에서 성경을 읽고 나면 설교를 합니다. 성경을 풀어주는 과정입니다.

20절과 21절을 보십시오.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예수님께서 오늘 읽어 주고 설교한 이 말씀이 너희에게 그대로 응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사야 61장 1절과 2절을 읽어 주셨는데,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고 내가 보내심을 받으니 보내심을 받은 예수께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포로 된 자,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시고 눈먼 자를 다시 보게 할 것이다. 그것이 나를 통해서 이 말씀이 온전하게 이루어지고 성취될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을 듣고 난 이후에 나사렛 마을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22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사람들이 전부 다 이 말씀에 은혜를 받았습니다. 은혜로운 말씀을 증언하고 그리고 놀랍게 여겼다고 했습니다. 놀랍게 여겼다. 충격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이런 식으로 묵상하고 이런 식으로 설교한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냥 회당의 예배는 지루할 뿐이었습니다. 모세오경을 읽어 주고 예언서를 읽어 주는데 그것으로 그치니 지루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께서 이 말씀을 명확하게 자신에게 빗대어 증언하고 설교해 주시니 속이 시원해집니다.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거기까지입니다.

그리고 이분들이 하는 말을 보십시오.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고 말합니다. 부정적인 뉘앙스입니다. '어? 은혜를 받았어. 정말 이 말씀이 우리에게 와닿고 은혜가 되는데 자세히 보니 우리가 잘 아는 사람이었네. 그 아버지는 나사렛의 가난한 목수였고 이 사람은 그 사람의 아들이었고, 우리가 이 사람이 어릴 때부터 자기 아버지의 목수 연장통을 들고 다니면서 아버지를 돕는 것을 다 보았고, 그의 누이들이 누구네 집에 시집갔는지를 우리가 다 알고, 그 형제들이 지금 어떻게 사는지를 다 알고 있고, 심지어는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결혼도 하기 전에 배가 불렀던 사실을 우리가 다 알고 있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은혜는 받았습니다. 놀랍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우리가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30년 동안 익숙했습니다. 익숙한 자의 설교를 듣고 놀랍게 여기기는 했는데 더 이상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알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그분에 대해서 더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분을 통해서 은혜를 받으려고 엎드리고 기도하지도 않습니다. 이들이 나사렛 마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지방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가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거기에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습니다. 특별히 이방인 백부장도 은혜를 받았습니다. 백부장이 설교를 들으면서 생각합니다. '우리 집에 병든 종이 하나 있는데, 이런 정도로 탁월하게 말씀을 전하는 분이라면 내 종의 병도 고칠 수 있을 텐데' 그리고 그 문제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마태복음 8장 5절에서 7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이르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이르시되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이래야 정상 아닙니까? 예수님의 능력을 보고 은혜를 받고 놀랍게 여기면 그 놀라움을 자기와의 관계로 만들어 가야 합니다. 놀랍고 그쳐 버리면 거기에서 신앙 성장은 멈추는 것입니다. 놀라운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는 어떻게 적용되는지, 내 인생 문제를 가지고 꺼내놓고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고, 이것 해결해 달라고 풀어 달라고 엎드려야 정상입니다. 다른 지방에는 이런 일이 부지기수로 일어나는데 예수님을 가장 잘 알고 익숙해져 있었던 나사렛 마을에서는 놀라는 것으로 그칩니다.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2. 익숙함과 앎의 차이

2-1. 착각에 빠진 믿음

사람의 인지 구조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안다고 생각하면 더 이상 노력하지 않습니다. 내가 잘 안다고 생각하면 배우려고 하지 않고 애쓰지 않습니다. 이미 다 알고 있는데, 내가 왜 수고해야 되는가? 그것으로 끝입니다. 우리 중에는 교회학교를 어릴 때부터 다닌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주일학교 출신들이 있습니다. 어릴 때 교회학교 주일학교에 가면 우리 선생님들이 성경을 가르쳐 줍니다. 교회학교 전도사님들이 성경을 읽어 줍니다. 요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마치 동화처럼 물고기 뱃속 이야기 잘 듣습니다. 다윗의 용감한 이야기도 듣고 다니엘 이야기도 듣고 솔로몬의 성전 이야기도 듣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이야기, 예수님 기적 이야기도 다 듣습니다. 익숙해졌습니다. 성경 이야기를 동화처럼 참 재미있게 들었습니다. 그런데 거기까지입니다. 기독교 문화에서 자랐습니다. 어린 시절 모태신앙이었습니다. 그렇게 성장하고 자랐는데 마치 내 기억에는 내가 성경을 다 아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성경 이야기만 들었는데 성경 공부 다 한 것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 이야기를 듣고 익숙해진 것이지, 어릴 때부터 기독교 문화에서 성장하고 자라서 크리스천 문화인으로 산 것이지, 내가 예수님을 알고 하나님을 알고 성령을 아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익숙한 것과 아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에베소서 4장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러야 된다고 말합니다. 성장하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에게까지 성장하고 자라려면 열심히 배워서 많은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 이야기를 어릴 때 들었던 것으로 다 안다고 착각하고 하루에 성경 한 장도 읽지 않는데, 1년이 가도 성경 공부 한 번도 하지 않는데, 주일날 교회 와서 예배드리고 가는 것이 고작, 일주일에 성경 펴는 것은 한 번인데,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감히 우리가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안다고 착각할 뿐이지. 나사렛 마을 사람들처럼 성경 공부하지 않는데 성경을 펴고 읽지 않고 묵상하지 않는데 그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 보지도 않는데 어떻게 우리가 그리스도를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옛날에 들었던 요나 이야기 아닌가? 옛날에 들었던 오병이어 기적 이야기 아닌가? 그 정도로 끝입니다. 그래 가지고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안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2-2. 교회와 가정의 익숙함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교회 40년, 50년 다니면 교회를 잘 알지요. 교회를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말 잘 아는 것인가? 이 교회가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어떤 철학을 가지고 교회가 지금 나아가고 있는지 과연 알고 있는가?

1년에 단 한 번 금요 기도회에 한 번도 나오지 않는데, 교회가 어떤 기도 제목을 올려놓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이 기도 소리를 들어 주십시오. 우리 교회가 기도하는 것은 이런 이런 기도 제목입니다.'라고 기도하지 않는데, 교회의 방향성을 알 턱이 있습니까? 알 수 있습니까? 그냥 교회 40년, 50년 다닌 것이지, 이 교회에 오래 출석한 것이지, 달랑 일주일에 한 번 예배드리고 주보를 통해서 교회를 보는 것이 전부이지, 교회가 어떤 고민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 무엇을 가지고 기도하는지 기도해 보지 않는데 어떻게 알겠습니까?

교회 크고 작은 섬김의 자리에서 봉사를 해 봐야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거룩한 사명을 감당해 봐야 교회의 약점도 알고 교회의 강점도 알고 그럴 텐데, 섬기는 것 하지 않고 봉사하지 않고 수고하지 않고 어떻게 교회를 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넌센스입니다.

우리 가정도 그렇습니다. 가정의 남편, 아내, 가족들 오래 살았습니다. 수십 년 살았습니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나도 한 번 진지하게 대화해 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인생 문제를 가지고 대화하고 어떤 기도 제목을 가지고 있는지 대화하고 당신의 일주일의 삶은 어떠했는지 함께 대화하지 않는데, 정말 내 남편을 내 아내를 내 자녀를 잘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익숙한 것이지. 한 공간에 있으니까 같이 사니까 같이 밥 먹고 있으니까 익숙한 것이지, 그 사람을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 존재가 지금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어떤 인생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 정말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것을 우리가 자신할 수 없습니다.

성경도, 교회도, 사랑하는 사람들도 정말 우리가 익숙한 것과 아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신년을 맞이했습니다. 익숙한 것을 넘어서야 합니다. 익숙함에 빠져서 다 안다고 착각하는 순간 거기서 우리는 성장이 멈춥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을 스스로 죽이는 행위입니다.

말씀에 대해서도 교회에 대해서도 내 신앙에 대해서도 한 번 더 도약하고 껍질을 깨고 성경도 다시 펴서 처음부터 원점에서 읽어 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헌신하고 수고하고 봉사하는 이 모든 일이 우리의 성장의 마중물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3. 은혜 독점의 위험

3-1. 나사렛의 요구

2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예수님이 지금 나사렛 회당에 있는 동네 사람들의 생각을 읽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고 있는데, 이 동네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합니까? '의사야 네 병을 고치라' 이 말입니다. 이것은 그 당시 꽤 유명했던 말입니다. 바깥일은 열심히 잘하는데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주는데 그런데 자기 일은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자기 가정은 돌보지 않는 사람을 비꼬는 말입니다. 의사들이 남의 병은 고치지만 자기 병은 고치지 못하는 것을 빗대어서 하는 말입니다. 왜 이 말을 예수님에게 하려고 하는가? 나사렛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이 가버나움에서 기적 행하시고 다른 동네에서 능력을 행하신 것이 못마땅했습니다.

예수님이 자라셨던, 30년 동안 사셨던 나사렛에서 능력을 행하셔야지, 하려면 여기서 해야지, 여기서 기적을 베풀고 여기서 죽은 사람을 살리고 여기서 병든 사람을 일으키고 귀신 들린 사람을 쫓아내야지 왜 옆 동네에 가서 그런 일을 하고 다니느냐고, 하려면 여기서 하라고, 그러면 우리가 너를 믿어 주겠다고, 그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릅니다. 이들은 은혜를 독점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은혜를 당연시 여기고 있습니다. 30년 동안 예수님을 알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 마을에서 30년 동안 자랐기 때문에 당연히 여기에서 은혜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독선적인지, 은혜를 독점하려고 하는 생각이 얼마나 무서운지. 이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알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더 이상 나아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그리고 멈춰 버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받을 자격 있습니까? 자격이 없는 자들 아닙니까? 이것은 스스로를 영적으로 죽이는 일입니다.

3-2. 웃사의 교훈

구약 시절, 엘리 제사장 시절에 그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블레셋과의 전쟁 때 언약궤를 가지고 나간 일이 있었습니다. 전쟁에는 지고 언약궤는 빼앗깁니다. 언약궤가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블레셋에 온갖 역병이 창궐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언약궤를 더 이상 가지고 있을 수가 없어서 돌려보냅니다. 이스라엘도 부담스러웠습니다. 결국 언약궤가 방치됩니다. 시골 구석, 기럇여아림이라는 곳, 아비나답이라는 사람의 집에 언약궤가 20년 동안 머물러 있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었습니다. 다윗 성에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셔 오고 싶었습니다. 다윗이 좋은 수레를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셔 오려고 그 수레를 아비나답의 집에 보냅니다. 아비나답은 생각합니다. 드디어 때가 왔구나. 자기 아들 웃사를 출세시키고 싶었습니다. 언약궤를 수레에 실었습니다. 자기 아들 웃사도 수레에 태웠습니다. 연도에 사람들이 늘어서 있습니다. 환영하는 사람들이 박수를 칩니다. 그런데 가던 길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사무엘하 6장 6절과 7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 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우리가 그냥 액면 그대로 보면 웃사가 잘못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소가 가다가 뜁니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흔들립니다. 웃사가 언약궤를 붙잡았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해서 그를 치셨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가 죽습니다. 그런데 웃사가 잘못한 것이 있습니까? 액면 그대로 보면 잘못한 것이 없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보면 그가 잘못한 것이 맞습니다. 민수기 4장 15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의 성물을 만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손대면 죽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지난 20년 동안 하나님의 언약궤를 자기 집에 모셨습니다. 아비나답도 언약궤가 자기 집에 있었습니다. 웃사는 어릴 때부터 마치 자기 집에 늘 있었던 가구처럼 20년 동안 언약궤를 보고 자랐습니다. 언약궤는 있었지만 언약궤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어떻게 다루는지는 배운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에게도 배운 적이 없고 아버지도 가르친 적이 없고 누구도 배우거나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웃사가 죽은 것입니다.

언약궤 안에는 십계명의 두 돌판이 들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이 그의 집에 20년 동안 있었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십계명의 두 돌판이 그의 집에 20년이 있었는데, 그 말씀을 어떻게 내가 보아야 하는지, 그 말씀을 어떻게 내가 따라가야 되는지에 대해서는 한 번도 들은 적이 없고 배운 적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오늘 우리에게 한번 가져와서 생각해 보십시오. 믿음의 3대, 4대 가정, 집에 성경책이 가득가득 쌓여 있을 것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유품도 있고 부모님이 보시던 것도 있고 내 것도 있고 성경책은 집에 가득가득 있는데, 읽지를 않습니다. 한 번도 펴지를 않습니다. 교회에 와도 화면으로 다 보여주고, 성경 들고 교회 다니는 것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아무도 집에 성경이 있는데 보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집에 있는데도 읽지를 않으니 어떻게 하면 내가 복을 받는지, 어떻게 하면 화를 입는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성경에 다 나와 있는데, 20년 동안 성경은 집에 있지만 먼지만 쌓여 있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습니다. 아무도 읽지 않습니다. 그러니 20년 동안 언약궤를 모셨다고 복을 달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30년 동안 예수님이 우리 마을 사람이었다고 우리가 무조건 복받아야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에 대해서 공부도 하지 않는데,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더 이상 궁금해하지도 않는데. 복은 받을 만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4. 복받을 만한 사람

4-1. 오벳에돔의 축복

그런데 다윗이 이 사건을 보고 두려워서 언약궤를 다윗 성으로 모셔 가지를 못합니다. 가드 사람 오벳에돔의 집에 언약궤를 다시 둡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사무엘하 6장 10절과 11절을 보십시오. "다윗이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 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치우쳐 가드 사람 오벳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벳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벳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단 석 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가드 사람 오벳에돔의 온 집에 복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가드는 블레셋의 한 도시입니다. 가드 사람 오벳에돔은 블레셋 사람입니다. 이방인입니다. 이방인 집에 하나님의 궤가 석 달 있었는데, 20년 있었던 아비나답의 집에는 복이 아니라 저주가 내려지고 석 달 있었던 그의 집에 하나님의 은혜가 내려옵니다. 말씀대로 살았다는 뜻입니다. 이방인이지만 복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신앙의 연수가 결코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우리가 예수님을 믿었던 것, 그것이 뭐가 중요합니까? 기독교 문화를 가진 것이지. 성경책을 쌓아두고 한 번도 펼쳐 보지 않는 그 기독교의 문화가 뭐가 우리 자녀들에게 영향력이 있겠습니까? 가방 들고 교회는 다녔는데 교회에 대해서 전혀 궁금하지도 않은 믿음 생활이 어떤 교회에 영향력이 있겠습니까? 은혜는 받을 만한 사람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4-2. 안디옥 교회의 본

교회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초대 교회라고 하면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를 이야기합니다. 예루살렘 교회, 위대한 사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한 번 설교하면 3천 명, 또 한 번 설교하면 5천 명, 대형 교회가 됩니다.

하지만 그 교회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았습니다. 권능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머물러 있습니다. 나가서 복음 전하지 않습니다. 온 유대로 사마리아로 땅끝까지 나가지 않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 교회에 핍박을 허락하십니다. 그러자 흩어집니다.

흩어져서 세운 교회가 안디옥 교회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개척 교회였습니다. 개척 교회 담임 목사인 바나바, 일등 성경 교사였던 바울. 그 교회는 두 사람을 따로 세워서 선교사로 보냅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땅끝 선교를 위해서 보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연약하고 약한 교회고 개척 교회였지만 바울과 바나바, 특히 바울의 1차, 2차, 3차 선교여행을 후원하고 책임졌습니다.

어느 교회가 진짜 교회입니까? 어느 교회가 복받은 교회입니까?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지도자를 보고 교회의 크기와 사이즈와 면면을 보고 예루살렘 교회가 큰일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진짜 큰일은 안디옥 교회가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흘러갑니다. 복을 받을 만한 사람에게로 은혜가 흘러갑니다.

나사렛 마을 사람들은 복을 받을 만한 자격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리로 은혜가 흘러가지 않습니다. 부디 새해 우리가 복받을 만한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통해서 흘러가고 나에게 흘러오기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독점하는 사람이 되지 않고 그 은혜 가운데 살아서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흘러오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은혜 받는 것, 복 받는 것 당연히 여기지 않게 하옵소서. 나사렛 마을 사람들, 30년간 예수님을 알았다고 그들이 복 받을 자격이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오랫동안 예수 믿은 것 자랑하지 않도록 도우시고 진실로 우리도 가드 사람 오벳에돔처럼 복을 받을 만한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가 익숙함에 머물러 있지 않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을 30년간 알았지만 그것은 익숙한 것이지 진짜 아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여, 우리가 성경을 더 깊이 알기를 원합니다. 성경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을 경험하고 알기를 원합니다. 이제 새해부터 성경을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그 뒤를 따라가려고 합니다. 주여, 교회의 목회 방향과 교회의 봉사와 수고로움이 오늘 우리의 수고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기뻐하시는 이 길을 온전히 걸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