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렙다 과부와 나아만 장군 (눅 4:25-30)
전 세계 스마트폰 시장은 오늘날 애플의 아이폰과 삼성의 갤럭시가 양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2007년 이전까지는 상황이 전혀 달랐습니다. 핀란드의 노키아라는 회사가 만든 휴대폰이 전 세계 시장을 석권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휴대폰 점유율이 약 40퍼센트 이상이었고, 스마트폰 시장은 50퍼센트 이상을 차지할 정도였습니다. 2위부터 4위까지의 점유율을 모두 합쳐도 노키아를 따라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2007년에 애플이 아이폰을 출시합니다. 그때 노키아에서는 코웃음을 쳤습니다. 저건 절대 성공할 수 없다고 비웃었습니다.
이유는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 오래가지 못하는 배터리, 좋지 못한 통화 품질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애플의 아이폰은 전 세계 시장을 석권했고, 노키아는 그때부터 내리막길을 걷습니다. 훗날 노키아가 몰락한 후 노키아의 전직 간부가 언론 인터뷰를 한 일이 있습니다. 기자가 물었습니다. 노키아가 왜 몰락했다고 생각하느냐고. 그때 그분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애플보다 3년 일찍 터치스크린 방식의 스마트폰을 개발했습니다. 그런데 출시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때 우리는 14년째 1위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잘 나가고 있는데, 지금 우리가 1등인데 왜 굳이 위험을 감수해야 하느냐, 왜 굳이 변화를 줘야 하느냐 하는 의견이 주류였기 때문입니다. 그때 판단을 잘못한 것입니다. 결국 노키아의 몰락은 변화하지 않고 그대로 머물러 있었던 것이 원인임이 입증되고 맙니다. 이것은 기업의 세계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14년째 1등이라고 해서 15년째도 1등이라는 법이 없습니다. 영원한 1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계속 혁신하고 변화해야 하며, 겸손하게 시대의 흐름을 관망하고 관찰하며 따라가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기업이 망하는 것은 세상사의 이치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믿음의 백성들인데, 사실 이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도 있습니다.
1. 그릇된 선민의식
우리 믿음의 백성들은 내가 당연히 은혜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릇된 선민의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하나님 말씀을 보면, 예수님 시절에 나사렛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장 오래 알아왔던 분들이었습니다. 30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은혜가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오늘 두 사람의 이방인을 예로 들면서 은혜는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계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무엇인지, 우리는 과연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나사렛 마을 회당에 들어가서 설교하셨습니다. 사람들이 크게 놀랐습니다. 은혜를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거기까지였습니다. 이 설교한 사람을 보고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고 반응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요셉의 아들이다, 더 이상 우리는 예수에 대해서 알려고 수고하지도 노력하지도 않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더 알려고 노력하지 않으니 그들의 인생에는 변화가 일어날 일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들은 가버나움에서는 기적을 행하는데 왜 이곳에서는 능력을 베풀지 않느냐고, 의사야 네 병이나 고치라고 예수님을 향하여 빈정거렸습니다. 기적을 베풀어 봐라, 그러면 믿을 테니, 기적을 베풀면 우리가 너를 믿지 않겠느냐고 예수님을 향하여 적대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반응을 보고 두 사람의 예를 드십니다. 사렙다 과부와 나아만 장군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이방인이라는 것입니다. 사렙다 과부는 엘리야 시절에 살았던 사람이고, 나아만 장군은 엘리사 선지자 시절의 사람입니다. 엘리야 시절과 엘리사 시절, 그때 북이스라엘의 상황이 어땠습니까? 그들은 영적으로 완전한 암흑기였습니다. 바알 신앙이 득세했습니다. 그런데 경제적으로는 부강했습니다. 두로와 시돈과 조약을 맺은 이후에 지중해 무역을 독점합니다. 지중해 해상무역을 통해서 벌어들인 수입으로 그들은 배부르게 아주 잘 살았습니다.
성경이 아합 왕 시절이 얼마나 잘 살았는지를 설명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열왕기상 22장 39절입니다.
"아합의 남은 행적과 그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건축한 상아궁과 그가 건축한 모든 성읍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아합 왕이 상아궁을 건축했다고 했습니다. 상아로 만든 궁전입니다. 감이 오십니까? 상아가 얼마나 값비싼 것입니까? 그런데 그것으로 궁전을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지중해에 여름 별장도 만들어 두었습니다. 그 정도로 이들은 굉장히 부강한 나라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해상무역을 통해서 벌어들인 돈이 일반 백성들에게 흘러가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만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권세 잡은 몇몇 사람들만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았지, 백성들 모두가 잘 사는 나라를 이루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종교적으로도 타락했습니다. 아합 시절에 그의 아내 이세벨은 두로의 공주입니다. 바알 신앙을 가지고 북이스라엘에 들어왔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온 천지가 바알의 신전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을 박해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믿음을 지키지 못하도록 만들었고, 제대로 믿음 생활을 하는 사람, 하나님이 여호와시다, 이 하나님을 우리가 믿고 섬겨야 된다고 외치는 사람은 엘리야 선지자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시절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 시절 이야기를 우리 예수님께서 나사렛 백성들에게 들려주고 계십니다.
2. 사렙다 과부의 순종
2-1. 기근 속의 만남
먼저 사렙다 과부 이야기입니다. 25절과 26절입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아합과 이세벨이 바알 신앙을 전파했고, 온 이스라엘은 바알로 도배된 천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합과 이세벨뿐만 아니라 그에 동조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벌하십니다. 하늘에서 3년 6개월 동안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습니다. 여호와 신앙을 가지지 않는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이었습니다. 3년 6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으니 그들이 먹고살기가 얼마나 힘겨웠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엘리야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을 전하는 선지자인데, 이 사람도 먹고살아야 될 것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엘리야를 먹이기 위해서 그릿 시냇가로 인도합니다. 그곳에는 마르지 않는 물이 있었습니다. 그 물을 먹게 하시고 마시게 하시며 엘리야를 살게 하십니다. 그리고 까마귀를 통해서 떡과 고기를 제공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먹고 삽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을 하나님은 책임져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한 가지 명령을 내립니다. 저 시돈 땅에 가면 이방 여인 중에 과부 한 사람이 살고 있을 텐데 그 여인에게 가서 밥을 해 달라고 하라, 먹을 것을 달라고 요청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야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합니다. 지금 3년 6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서 사람들이 먹고 살 길이 없는데, 과부가 아들 하나 데리고 사는데, 어떻게 이 과부가 먹을 것을 나에게 주겠는가, 그것도 한 번도 보지 못한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이런 의심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엘리야는 하나님이 하라고 하니까 시돈 땅에 가 봤습니다. 그래서 가서 과부를 만났습니다. 과부의 형편이 딱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과부의 반응이 이렇습니다. 열왕기상 17장 12절 말씀입니다.
"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2-2. 순종의 결단
있는 것이 이것밖에 없습니다. 통에 가루 한 움큼밖에 없고 병에는 기름이 조금밖에 없습니다. 이것으로 음식을 만들어서 먹고 내 아들과 함께 이제는 죽기를 기다려야 되지 않겠느냐, 이제는 우리가 먹고 살 길이 없다는 말입니다. 딱한 상황입니다. 그쯤 되면 우리 같으면 죄송합니다 하고 돌아올 텐데, 엘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으니까 이 여인을 강권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식을 만들어서 하나님 뜻대로 선지자에게 대접하면 너는 통의 가루가 마르지 않고 병의 기름이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전해 줍니다. 여인이 결단합니다. 정말 그렇게 합니다. 그리고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열왕기상 17장 14절과 16절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더라"
이런 놀라운 역사와 기적이 이 여인에게 일어납니다. 과부가 순종했더니, 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순종했더니, 하늘에서 비가 내려서 농사 지을 수 있게 될 그때까지 통의 가루가 그치지 않고 병의 기름이 마르지 아니한 놀라운 역사의 은총을 받게 됩니다.
3. 나아만 장군의 순종
3-1. 굴욕과 자존심
예수님은 이 여인 이야기를 먼저 나사렛 회당 사람들에게 들려주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나아만 장군 이야기를 말씀합니다. 27절입니다.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 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었느니라"
나아만 장군은 아람의 군대 장관이었습니다. 패배를 모르는 무적의 장수였습니다. 아람 왕 입장에서 볼 때는 든든한 장군 아닙니까? 전쟁터에 보내면 항상 승리를 가지고 오는 장군이니 얼마나 믿음직스럽겠습니까? 그런데 나아만 장군에게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나병 환자였습니다. 병세가 갈수록 깊어집니다. 장군 또한 문제일 뿐만 아니라 왕이 더 걱정스러웠습니다. 자기 나라에는 이 나병을 고칠 의사가 없습니다. 이웃 나라 북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사람 선지자 엘리사가 산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분이 병을 잘 고친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래서 아람 왕이 친서를 쓰고 선물을 줍니다. 이스라엘 왕에게 잘 부탁한다는 편지를 쓰고, 은과 금과 패물과 옷가지까지를 챙겨서 보냈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 선지자 앞에 왔습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문도 열어 주지를 않습니다. 방 안에 들어앉아 있으면서 문 밖에 있는 나아만에게 말합니다. 요단강 물에 가서 일곱 번 몸을 담그고 씻으면 나을 것이라고, 그대로 하라고 말합니다.
나아만 장군이 굴욕을 당한 것입니다. 견딜 수가 없습니다. 자존심이 몹시 상합니다. 왕의 친서를 가지고 왔으니 국빈 아닙니까? 국빈 대접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국빈 대접은커녕 이렇게 모욕을 당하고 있습니다. 굴욕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납니다.
3-2. 순종의 기적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만 장군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열왕기하 5장 13절과 14절 말씀입니다.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니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담그라는 말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랬더니 그의 살이 어린아이의 살과 같이 깨끗하게 되었다고 성경이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4. 은혜와 순종의 관계
4-1. 순종이 은혜를 부른다
우리 예수님께서 이 이야기를 나사렛 사람들에게 왜 하시는 것일까요? 그 옛날 북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생각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있었습니다. 그중에 가난한 사람들이 천지였습니다. 과부들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수많은 이스라엘의 과부들 중에 한 사람도 생활의 나음을 입은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시돈의 과부, 사렙다 과부 한 사람만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당시 나병 환자들이 이스라엘에도 굉장히 많았습니다. 나병뿐만 아니라 각색 병으로 고생하는 환자들이 부지기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한 사람도 병 고침을 받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유일하게 나병의 병 고침을 받은 사람이 나아만 장군인데, 이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닙니다. 이방인이었습니다.
이것이 나사렛 백성들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너희들의 그릇된 선민의식을 버려라. 너희들이 예수님을 30년 동안 알았다 하더라도 은혜받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다. 그 옛날 구약 시절에 이스라엘에 그토록 많은 과부가 있었고, 그토록 많은 환자가 있었는데, 은혜받은 사람은 단 두 사람뿐이었다. 사렙다 과부와 나아만 장군. 이것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우리는 이것을 잘 생각해 봐야 합니다. 혈통으로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니, 선민이니 은혜받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사렙다 과부와 나아만 장군의 공통점이 있을 것 아닙니까? 도대체 이 사람들이 은혜받은 이유와 근거가 무엇입니까?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순종입니다. 두 사람은 철저하게 순종했습니다.
사렙다 과부와 나아만 장군은 순종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순종했습니다. 사렙다 과부를 보십시오. 과부인데 아들 하나 데리고 있습니다. 가루 조금과 기름 조금을 가지고 한 끼 식사를 만들어 먹고, 이제 언제 다시 음식이 생길지 몰라서 죽으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생면부지의 사람이 와서 먹을 것을 달라고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을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라 하더라도 나부터 먼저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나부터 먼저 먹고사는 것이 순리인데 나는 그 말씀에 따르지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할 것 아닙니까? 일반적인 사람들은. 그런데 사렙다 과부는 순종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철저하게 순종했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어떻습니까? 장군은 자존심으로 사는 존재입니다. 어디에 가나 한 번도 적들에게 무릎을 꿇어 본 적이 없는 장군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존심을 내려놓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기를 만나 주지 않는 선지자에게도 굴욕스럽지만, 자존심을 내려놓고 말씀 그대로 요단강 물에 가서 다섯 번 몸을 씻어도 몸이 낫지 않고, 여섯 번 몸을 씻어도 몸이 낫지 않았으나, 일곱 번을 완전하게 다 채웠습니다. 그리고 그는 철저하게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해서 병 고침을 받은 것 아닙니까?
거꾸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엘리야 시절과 엘리사 시절에 그 많은 과부 중에 한 사람도 생업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 없고, 그 많은 병자 중에 한 사람도 병 고침 받은 사람이 없다는 것은 그들 중에 순종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한 사람 한 사람이라도 이스라엘 백성 중에 있었다면 그들은 생활의 은혜를 받았을 것이고, 그들의 병도 고침을 받았을 것인데, 그들 중에 순종한 사람이 없으니 은혜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결론에 도달합니다. 은혜와 순종은 함께 가는, 연동되는 개념입니다. 은혜는 순종으로 완성되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그 순종은 또 다른 큰 은혜를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은혜와 순종은 결단코 분리되는 개념이 아닙니다. 함께 가는 개념입니다.
4-2. 반쪽짜리 은혜를 넘어
우리 예수님께서 나사렛 회당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하실 때 그들은 회당에 있었습니다. 지금 이곳은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회당에서 나사렛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은혜를 받았습니다. 놀랍게 여겼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거기까지였습니다. 그 말씀을 붙들고 살아내려고 발버둥 치고 애쓰지 않습니다. 순종할 생각이 없습니다. 회당에서 나가기 전에 예수님에게 은혜를 구하고 기적을 구합니다. 말씀은 듣는데 그 말씀을 들고 살아갈 삶은 그들에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설교를 듣고 말씀을 듣습니다. 집에 돌아갈 때 우리 스스로 생각합니다. 오늘 은혜 많이 받았다고. 찬양의 은혜를 받고, 기도의 은혜를 받고, 말씀의 은혜를 받고, 예배를 통해서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성경 공부를 하고 예배당 문을 나서서 돌아갈 때 오늘 말씀의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때 내가 받았다고 하는 은혜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내가 받았다고 말하는 은혜의 실체가 무엇입니까? 무엇에 은혜를 받았다는 말입니까?
그때 우리가 받았다는 은혜는 반쪽짜리 은혜에 불과합니다. 그것이 은혜의 전부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말씀을 통해서, 예배를 통해서 받은 은혜를 가지고 내 삶에서 순종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은혜를 받고 순종하면 그 순종은 말할 수 없는 은혜를 우리에게 다시 돌려줍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사렙다에 있는 과부를 찾아갔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람을 그 과부에게 보낸 것 자체가 은혜 아닙니까?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받고 내가 순종하지 않으면 내 삶의 획기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것을 받고 순종하니까 말할 수 없는 은혜가 그의 삶에 일어납니다. 병의 기름이 마르지 않고 통의 가루가 끊이지 않는 놀라운 경험. 이 더 큰 은혜를 우리는 앞에 두고 있는데, 순종하지 않으니까 이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배드렸습니다. 은혜를 받았습니다. 교회 곳곳에 우리가 섬길 곳이 차고 넘칩니다. 그곳에서 내 작은 손길이라도 섬겨야 합니다. 그곳에서 내가 받은 은혜를 나누고 베풀어야 합니다. 그러면 숨어 있었던 놀라운 은혜가 하늘로부터 우리 가정에, 내 삶에 임할 줄로 믿습니다. 그것은 해 본 사람만 아는 축복입니다.
우리 일터에 갑니다. 주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 말씀을 받고 나서 내 삶의 자리에서 적용하고 살아가고 실천해 보지 않으면, 그러면 그 말씀이 정말 은혜가 되는지 우리는 경험할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셨습니다. 야고보도 부르셨습니다. 요한도 부르시고 안드레도 부르셨습니다. 부른 것 자체가 은혜 아닙니까?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배와 그물과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갑니다. 세리 마태를 예수님이 부르셨습니다. 세관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갑니다. 그러니 은혜가 더 차고 넘치는 것 아닙니까? 따르지 않으면, 순종하지 않으면, 그 말씀대로 온전히 따라가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더 큰 은혜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큰 은혜를 사모할수록 우리에게는 순종이 더욱더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깨닫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5. 지금이 순종의 때
5-1. 은혜의 시대는 지났는가
그런데 은혜에 걸림돌이 되는 생각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조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요즘은 은혜의 시대가 아닙니다. 과거에는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구약 시대 아브라함이 그랬고, 모세가 그랬고, 엘리야 엘리사가 그랬고, 예수님 시절이 그랬고, 과거 우리 믿음의 부모님들 시절에 은혜받은 사람들이 차고 넘쳤는데, 요즘은 은혜가 사라져 버린 시대가 되었는데 은혜가 있기는 한 걸까요?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착각한 것입니다. 은혜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순종이 사라진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아브라함 시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부르셨을 때 갈대아 우르, 하란을 떠나서 본토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났습니다. 순종 아닙니까?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내라 하셨을 때 내보냈습니다. 이삭을 바치라 하셨을 때 바쳤습니다. 전적인 순종이 있을 때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됩니다. 모세에게 이 백성들을 출애굽시켜라, 이 백성들 이끌고 가라,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러니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 엘리사 시절 말할 것 없고, 예수님 시절 제자들 말할 것 없고, 우리 시대의 부모님들, 우리 신앙의 윗세대들, 순전한 믿음으로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을 힘들게 한다 하더라도 그 말씀 붙잡고 순종하기를 즐겨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의 삶에 간증이 넘치고 은혜가 넘쳤습니다.
요즘 우리 시대를 보십시오. 우리는 많은 부분 순종을 골라서 합니다. 선별적으로 순종합니다. 내 마음에 드는 것은 순종하고 들지 않는 것은 순종하지 않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내 머릿속에는 거를 것을 거르는 습관이 우리 속에 다 남아 있습니다. 받고 싶은 것은 받고 받기 싫은 것은 받지 않습니다. 순종하고 싶은 것은 순종하고 하기 싫은 것은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엄밀하게 따져 보십시오. 그것이 순종입니까? 하고 싶은 것은 하고 하기 싫은 것은 하지 않는 것은 선택이지 순종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은 내 자아를 거슬러서, 내 욕심과 부딪칠 때 그래도 나를 부인하고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을 순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렙다 과부가 순종하기 어려운데 이것을 수용하는 것이 순종이고, 나아만 장군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순종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순종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더 차고 넘칠 줄로 믿습니다.
5-2. 지금이 바로 그때
바울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고린도후서 6장 2절입니다.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은혜와 구원, 은혜와 순종이 하나의 개념으로 엮여 있습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바꾸어 읽으면 보라 지금은 순종의 때라는 말입니다. 보라 지금 순종할 만한 때다. 그때 바로 너희의 인생에 구원의 역사가 임할 것이다. 이 말씀입니다.
순종은 미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은혜는 즉각 받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순종은 즉각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보라 지금이 은혜받을 만한 때라는 말씀은 보라 지금 순종하라, 그러면 하나님이 더 큰 은혜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5-3. 상황은 핑계가 아니다
또한 사람들은 말합니다. 우리의 형편이 되지 않아서, 내 상황이 되지 않아서 우리는 순종하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렙다 과부를 보십시오. 이 사람처럼 최악의 상황이 있습니까? 이 사람은 과부였고 먹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나병 환자였습니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순종했습니다. 그러므로 상황을 핑계하는 것은 다 거짓말입니다. 어떤 상황에도 순종하지 않을 수 있는 상황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순종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없어서 그렇지, 내가 뜻하지 않아서 그렇지, 뜻하고 순종하려고 결단하면 얼마든지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가 이방 여인 사렙다 과부와 이방의 군대 장관 나아만에게 임한 것처럼 우리에게도 임할 것입니다.
6. 찔림과 회개의 기회
우리 예수님께서 갈릴리 나사렛 회당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하시면 이제 이들이 찔림을 받아야 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들의 반응을 보십시오. 28절과 29절입니다.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예수님을 쫓아냅니다. 산꼭대기 낭떠러지에 가서 예수님을 밀어서 죽이려고 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자신의 마을을 사랑하셨습니다. 30년 동안 성장한 이 마을, 주님의 어린 시절의 추억이 고스란히 있는 이 나사렛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곳에서 공생애 첫 설교를 하신 것 아닙니까? 이사야 61장 1절과 2절을 읽으시고 이곳에서 출사표를 던지십니다. 그런데 이 마을 사람들은 행동하지 않습니다.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릇된 선민의식으로 일관합니다. 은혜는 받고 싶어 합니다. 기적은 경험하고 싶어 합니다. 옆 마을 가버나움과 자기들을 비교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순종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이들을 향하여 책망하자 예수를 쫓아냅니다. 두 번 다시 이들에게 기회가 오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찔림이 있을 때 그릇된 선민의식을 버리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순종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삶 가운데 더 깊은 은혜를 경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번 한 주가 그런 한 주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갈릴리 나사렛 마을 사람들처럼 우리도 완악했습니다. 순종은 하지 않으면서 말씀의 은혜는 받았다 하고, 더 큰 은혜와 기적을 경험하기를 원했던 그릇된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자들에게 우리 주님이 사렙다 과부와 나아만 장군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그 당시 수많은 이스라엘의 과부가 있었고 나병 환자가 있었지만, 인생 문제 해결받은 사람은 단 두 사람밖에 없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여, 오늘 우리가 오래 신앙생활을 했다는 것 하나만으로, 오랫동안 하나님을 알아왔다는 것만으로 하나님 앞에 떼쓰고 있다면 용서하여 주옵소서. 은혜는 순종을, 순종은 더 큰 은혜를 부른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여 주시고, 은혜의 좋은 순환 가운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