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와 능력으로
본문: 누가복음 4:31-37
고려 중기 인종 임금 시절에 묘청이라는 승려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신비로움을 자아내는 말과 풍수지리설, 그리고 도참설로 왕의 마음을 빠르게 사로잡았습니다. 왕의 마음을 얻은 후 그는 천도를 주장합니다. 그 당시 고려의 수도가 개경이었는데, 개경은 하늘의 기운이 이미 다했으니 이제는 서경, 곧 지금의 평양으로 천도를 해야 고려의 기운이 계속해서 승승장구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서경 천도는 대신들의 반대로 무산되고 맙니다. 그러자 묘청이 난을 일으킵니다. 그 난은 크게 시작했으나 금방 진압되고 말았습니다. 내부의 분열이 일어났고, 그의 부하에 의해서 묘청이 암살되면서 허무하게 끝나 버립니다.
그런데 묘청은 왜 이렇게 어이없는 일을 벌였을까요? 그 당시로 돌아가서 들여다보면 그는 자기에게 권위가 있다고 착각한 것입니다. 적어도 왕이 그의 말을 들으니까, 신하들 중 절반 이상은 난을 일으키면 자기를 따라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백성들 중 상당수도 자신을 지지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 전혀 아니었습니다. 신하들 중에 그를 따르는 사람은 없었고 백성들 중에도 그를 지지하는 사람은 극소수였습니다. 자신에게 권위가 있다고 믿고 시작했는데, 그 권위가 가짜였음이 금방 입증되고 말았습니다. 권위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거짓 권위였고 진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실패했습니다.
사람들은 권위를 가지고 싶어합니다. 권위가 있으면 다른 사람들의 존경도 받을 수 있고 일을 쉽고 편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권위가 진짜 권위여야 의미가 있지 않겠습니까? 가짜 권위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나중에 탄로 날 것이고, 묘청처럼 심각한 위기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의 권위는 진짜였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을 보면, 우리 예수님의 권위가 진짜 권위였음을,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가 능력으로 나타났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오늘 말씀은 더러운 귀신이 어떤 형태로 우리에게 나타나는지,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에게 무엇을 책망하셨는지를 살펴보고, 우리가 정말 능력을 덧입기를 원하면 어떻게 믿음 생활해야 하는지를 함께 들여다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권위 있는 말씀
예수님께서 자신이 성장했던 갈릴리 나사렛 마을에서 설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나사렛 사람들은 은혜를 받습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습니다. "이는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하는 말로 일축해 버립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은혜받을 사람은 따로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사렙다 과부 이야기와 나아만 장군 이야기를 들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제 발걸음을 옮겨서 가버나움으로 갑니다.
31절을 보십시오. "갈릴리의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시매" 우리 예수님이 늘 하셨던 것처럼 나사렛에서도 그렇게 하셨고, 지금 가버나움에서도 우리 주님이 안식일에 말씀을 증거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말씀을 증거할 때 그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32절입니다. "그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위가 있음이러라." 그 말씀이 권위가 있다고 했습니다. 가버나움 사람들이 예수님 말씀의 권위를 느낀 것입니다.
사람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흙으로 인간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셔서 생령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영이 깨어 있으면 능력 있는 말씀을 들을 때 은혜받게 되어 있고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영혼이 영적이지 않으면, 깨어 있지 않으면 아무리 예수님이 설교하셔도 그 말씀을 듣고 은혜받지 못합니다.
예수님 시절에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 설교를 얼마나 많이 들었습니까? 예수님과 얼마나 많이 논쟁했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주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하거나 깨닫거나 은혜받지 못했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가버나움 사람들은 영적으로 예민하게 깨어 있는 존재임에 틀림없습니다. 주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권위를 느꼈다는 것이 그것을 입증하지 않습니까?
1-1. 겸손으로 얻은 권위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권위 있는 말씀을 전하는 자가 되었을까요?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당연합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당연히 권위가 있겠지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의 공생애 초창기입니다. 가버나움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지금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권위가 있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주님은 어떻게 이 권위를 얻게 되었을까요?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권위를 얻게 된 것을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는데, 먼저 예수님이 겸손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분에게 권위를 주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겸손이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 자리가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받으실 때였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삼위 가운데 한 분이기 때문에 죄가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스스로 요한에게 세례받으러 가셨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과 같은 눈높이를 가지기 위해서였습니다. 스스로 낮아지고 겸손하신 예수님을 하나님은 높이셔서 그에게 권위를 주신 것입니다.
가끔 우리는 권력과 권위를 혼동합니다. 권력은 쟁취하는 것입니다. 권력은 투쟁을 통해서 내 손에 내가 가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권위는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아무리 가지고 싶어도, 얻고 싶어도 권위는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셔야 그 권위를 가질 수가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권력자들 가운데 권위가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권력은 가지고 있고 그 권력을 행사하기는 하지만, 국민들이 그분들의 권력을 통해서 권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겸손하지 않으니까, 하나님께서 그분에게 권력은 주셨지만 권위는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권위가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겸손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분에게 권위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1-2. 순종으로 얻은 권위
또한 예수님이 어떻게 권위 있는 분이 되셨는가? 바로 순종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4장 1절을 보면 우리 예수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광야로 가서 40일 동안 금식 기도하시고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에게 순종해서 광야까지 갑니다. 그곳에서 40일 동안 금식 기도까지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인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은 성령에게 철저하게 순종하셨습니다. 결국 순종하신 분에게 하나님은 그 순종을 보시고 권위를 허락해 주십니다.
권위는 내가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아무에게도 순종하지 않을 때, 어깨에 힘주고 다닐 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그때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권위를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인생을 한번 살펴보십시오. 내 말에 과연 권위가 있습니까? 내 삶에 권위가 느껴지는가, 그것은 내가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와 함께하는 사람들이 나를 권위 있는 사람으로 인정하는가를 우리가 돌아봐야 됩니다. 나는 겸손한가? 나는 하나님 말씀 앞에 철저하게 순종하고 있는가? 내가 겸손하다면,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된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권위를 선물로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내 말이 먹히지 않고 내가 사람들에게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 겸손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다는 반증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진실로 예수님처럼 그 말에 권위가 있으려면,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겸손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더러운 귀신의 고백
이제 우리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시는데 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33절과 34절을 보십시오.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설교를 하시는데 거기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 한 사람이 와 있었습니다. 그 더러운 귀신 들린 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압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 아닙니까?"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놀라운 충격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설교를 딱 한 번 하셨을 뿐인데 더러운 귀신이 예수님을 정확하게 알아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입니다." 더러운 귀신조차도 예수님이 설교 한 번만 하셨는데 그분이 누구인지 분명히 알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갈릴리 나사렛 사람들과 완전히 다른 모습입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30년 동안이나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다 지켜봤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의 설교 듣고 뭐라고 반응합니까? "이는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육체로만 본 것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의 거룩한 자로 보지 않았는데, 귀신은, 더러운 귀신은 예수님의 설교 한 번만 듣고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거룩한 자임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우리가 귀신보다 못해서 되겠습니까? 그것도 더러운 귀신보다.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3년간 훈련받습니다. 예수님 따라다니면서 열심히 훈련받았고, 예수님의 고난도 보았고, 예수님의 기적도 경험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직전 40일을 함께 보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을 예루살렘에 불러 모았습니다. 그때도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제자들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사도행전 1장 6절과 7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그들은 뭐라고 묻습니까?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그들은 끝까지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아로만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정치적 메시아 아닙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신 까닭은 이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기 위한 것 아닙니까?"라고 묻고 있습니다. 3년을 예수님께 훈련받아도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조차도 몰랐습니다. 나중에 성령 받고 나서야 예수님에 대해서 조금씩 조금씩 깨달아 알아갑니다. 그런데 더러운 귀신은 예수님 설교 한 번만 듣고 예수님이 누구인지 금방 알았습니다. 이것이 귀신입니다.
3. 알면서도 거부하는 신앙
그런데 더러운 귀신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귀신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이 표현은 유대인들이 자주 쓰는 관용적 표현입니다. 의도적으로 거리두기를 하고 싶을 때, 의도적으로 이 사람과 관계를 맺고 싶지 않을 때 쓰는 말입니다. "당신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런 표현을 유대인들은 자주 씁니다.
귀신의 이 말은 "나는 당신을 잘 압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 아닙니까? 그런데 나는 당신과 관계는 맺기 싫습니다. 저 멀리 좀 가십시오. 나와 당신이 거리를 두고 싶습니다"라고 더러운 귀신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더러운 귀신의 말을 보면서 오늘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봐야 됩니다. 예배드리는 많은 분들 중에도, 오늘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예수님에 대해서 아는 분들은 굉장히 많습니다. 어려서부터 신앙생활 했고, 성경 공부 많이 했고, 설교 많이 들었고, 성경 열심히 읽었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해서는 잘 압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도 알고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이신 것도 압니다. 누구에게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설명하라고 하면 유창하게 설명할 수 있는 능력도 가지고 있습니다. 지식적으로 풍부합니다. 많이 배웠기 때문에 굉장히 많이 압니다.
그런데 우리의 믿음의 현주소는 어떻습니까?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관계 맺기를 거부합니다. 알고는 있는데, 더러운 귀신처럼 알고는 있는데 관계는 맺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 신앙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더러운 귀신의 신앙과 다를 바가 없지 않습니까? 알고는 있는데 관계는 맺고 싶지 않다. 알고는 있는데 예수님과 더 가까이 하고 싶지는 않다. 이것은 더러운 귀신의 신앙과 한치도 차이가 없이 똑같은 신앙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봐야 됩니다.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 무엇인가? 도대체 예수님과,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이 무엇이길래 이 더러운 귀신은 그토록 상관 말라고 하는가? 관계를 맺고 싶어 하지 않고 있는가? 우리가 깊이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3-1. 하나님의 질서 속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그 첫 번째 의미는 하나님의 질서 속으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관계 맺음은 질서 안으로 깊숙이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의 천지 창조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에덴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에덴 동산에 두셨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뭐라고 명령하십니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땅을 다스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경작하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지배자가 되라고, 청지기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관리의 사명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에덴에 있는 모든 것을 너는 다 누리고 살되 한 가지는 하지 말라 금지 명령을 내린 것이 있습니다. 창세기 2장 16절과 17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질서 아닙니까? 내가 만든 에덴 동산에 네가 살려면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동시에, 내가 금지한 선악과는 먹지 말라. 이것이 하나님의 질서입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통치 질서 안으로 깊숙이 깊숙이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의 질서 가운데 살았습니까? 그 질서를 깨지 않았습니까? 선악과 명령을 어깁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통치 안에 살 수가 없어서 에덴에서 쫓겨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 영역 안으로 들어간다는 뜻이고, 하나님의 질서 속에 내가 온전히 내 몸을 담근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크리스천입니다. 믿음의 백성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법으로 우리가 살아야 하는데, 과연 나의 삶은 그리스도의 법으로 살고 있는가 질문해 보셔야 됩니다.
일주일에 한 번 가방 들고 교회는 옵니다. 일주일에 한 시간 이 자리에 앉아서 예배는 드립니다. 하지만 나는 어떤 질서 가운데 살고 있는가? 세속적 질서 가운데 살고 있는가? 세상의 질서 가운데 내가 여전히 거기에 발을 담그고 몸을 담고 살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상관이 없는 인생입니다. 하나님과 관계 있는 인생이 되어야지, 하나님과 관계 없이 거리두기 하고 살면서 내 입으로는 하나님에 대해서 이렇쿵저렇쿵 말하고 있는, 입만 있는 인생. 이런 인생이 더러운 귀신의 신앙과 다를 바가 무엇이 있습니까? 똑같지 않습니까?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레미야 11장 4절을 보십시오. "이 언약은 내가 너희 조상들을 쇠 풀무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던 날에 그들에게 명령한 것이라 곧 내가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순종하고 모든 명령을 따라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
"너희는 내 목소리를 순종하고 나의 모든 명령을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나의 통치 질서 안으로 들어오라, 나와 관계를 맺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겠다는 말씀입니다. 남유다가 망하기 직전까지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유다 백성들에게 주셨던 메시지였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과연 관계 안에 있는가?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질서 가운데 산다는 뜻인데, 나는 정말 하나님의 언약의 질서 가운데, 하나님의 법대로 살고 있는가를 다시 한번 제대로 생각해 보셔야 됩니다.
여러분, 자녀들이 부모와 함께 살지 않습니까? 부모와 함께 사는 자녀들이 부모의 통치 질서 가운데 살지 않고 자기 멋대로 산다면 어떻게 그 자식을 자녀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자녀가 부모에게 해서는 안 되는 말이 몇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 한 가지, 철든 자식이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말 중에 하나가 "상관하지 마십시오.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이제는 상관하지 마십시오"입니다. 여러분, 부모 입장에서 자식이 그런 얘기하는 것을 들으면 어떻습니까? 인연을 끊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나의 창조주이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상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거리두기 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과 나는 이제는 서로 신경 쓰는 처지가 아니니 상관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한다면, 심판날 그날에 하나님께서 "나는 너를 모르겠다"고 말하실 텐데, 그때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감당하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심판대 앞에 섰는데, "너의 평생 동안 네가 상관하지 말라 그래서 내가 상관하지 않았으니, 너는 지금 이 자리에 와서 왜 나에게 천국 문을 열어 달라고 말하느냐"라고 말하신다면, 그때 우리가 그 후회를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하나님과 우리는 서로 관계 맺는 존재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질서 안으로 깊숙이 깊숙이 들어가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통치 질서, 창조 질서 안으로 들어갈 수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통치 질서, 창조 질서는 성경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안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 맺는 존재가 되고,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로서 특권도 누리고 특권도 요구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3-2. 불편함을 감수함
두 번째로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다는 뜻은 무엇인가?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한다는 뜻입니다. 신앙생활의 초창기에는 불편한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다가 더 깊이 더 깊이 들어가다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불편함을 요구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 불편함을 내가 믿음으로 받아내고, 그 불편함이 나에게 기쁨이 될 때 그때 우리는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3장 8절과 9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예수님이 "내가 너와 상관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배경이 무엇인가요? 예수님이 십자가 달리기 며칠 전 제자들을 불러놓고 제자들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한 사람 한 사람 발을 씻어 줍니다. 그때 베드로가 완강히 거부합니다. "주여 이렇게 하지 마십시오. 내 발을 씻지 마십시오." 그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너의 발을 씻어 주지 않으면 너와 나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너와 나는 관계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왜 거절했을까요? 단지 미안해서, 죄송해서가 아닙니다. 선생님께서 제자된 내 무릎 앞에 무릎을 꿇고 내 더러운 발을 씻기는 것을 보니, 나도 나중에 그렇게 해야 되나? 나도 나중에 예루살렘 교회를 맡아서 나도 누군가의 발을 씻어 주고, 나도 누군가를 평생 동안 섬겨야 하나? 그것이 불편해서 그런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의 발을 씻어 주고 누군가를 섬기는 것이 베드로에게는 불편함이니까. 그래서 나는 아예 처음부터 발 씻음도 필요 없으니 불편함을 거절하겠습니다라는 말 아닙니까?
여러분, 교회는 처음 신앙생활 하시는 분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목사가 제정신이라면 진짜 그렇습니다. 새 가족들에게, 교회 처음 나오는 분에게 무엇을 그리 요구하겠습니까? "그냥 교회만 나와 주시면 너무너무 고맙습니다. 그냥 주일 성수만 잘하시면 정말 고맙습니다." 그렇게 말하지요. 그런데 믿음이 깊어지고 신앙의 연륜이 쌓인 분들에게는 요구하는 것이 꽤 많습니다.
우리 장로님들에게 제가 요구하는 것이 많습니다. 우리 장로님들은 교회에 차 가지고 못 들어옵니다. 목회자들도 차 가지고 근처에 오지도 못합니다. 주일날 장로님들은 알아서 옵니다. 어떻게 오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도보로 오시는지, 택시 타고 오시는지, 어디에 차 숨겨 놓고 오시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불편하지요. 그런데 그 불편함이 신앙의 성장이 되고 기쁨이 됩니다.
지난 연말에 교회에 방이 붙었습니다. 클린 사역 신청서입니다. 청소 구역을 정합니다. 그런데 본당에 청소를 할 사람이 몇 명 없었습니다. 넓으니까 몇 명만으로는 신청이 부족했습니다. 장로님들에게 부탁했습니다. 시무 장로님들에게 토요일 날 와서 청소 좀 하시라고. 장로님들이 불편하지요. 토요일 날 일도 많고, 갈 데도 많고, 할 일도 많은데 불편한데, 그 불편함을 기꺼이 수용하고 받아들여서 토요일 날 와서 청소하시고, 그럼으로써 그 기쁨이 나에게는 신앙의 성장에 디딤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경제 활동을 해서 돈을 법니다. 그 돈 누구 것입니까? 그 경제 활동을 해서 벌어들인 그 물질 누구 것입니까? 믿음이 어릴 때는 다 내 것입니다. 전부 다 내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성장하고 성장할수록 우리는 물질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합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됩니다. 불편합니다. 마음이 쓰입니다. 내가 쓰기도 부족하고 적은데 하나님께 드려야 되는 것이 불편합니다. 하지만 그 불편함을 하나님은 요구하십니다. 그 불편함을 내가 믿음으로 승리하고 이겨낼 때 그것은 나에게 기쁨이 되고 신앙 성장에 디딤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지, 불편함을 감수하려 하지 않고, 누리기만 하려고 하고, 교회 생활에서도, 신앙생활에서도, 내 삶의 모든 전반에서도 나는 안락함을 누리려고만 하는 신앙생활이 어떻게 더러운 귀신의 신앙생활과 차별화가 되겠습니까? 우리는 더러운 귀신과 다르다고 과연 말할 수 있습니까?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하지 않는데, 기분 나쁜 것을 감수하지 않는데, 그래서야 우리의 신앙이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 생활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습니까? 말할 수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불편함을 기꺼이 수용하고, 처음은 불편했는데 이것을 받아들여 보니 그 속에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샘솟듯 일어나서 그를 통해서 성장하고 발전하고 성숙하는 것, 이것이 우리와 하나님과 관계 맺는 자들이 누리는 영원한 기쁨인 줄로 믿습니다.
4. 능력으로 나타난 권위
이제 우리 주님은 그 더러운 귀신을 쫓아냅니다. 35절과 3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 다 놀라 서로 말하여 이르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위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하더라"
예수님의 말씀이 권위가 있다고 했습니다. 진짜 권위는 이렇게 능력으로 나타나는 법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권위가 있으니 주께서 한번 말씀하시니 더러운 귀신이 나가고 그 사람이 낫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권위가 있어서 그 권위가 능력으로 나타난 까닭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과 가장 깊은 관계를 맺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철저하게 하나님의 질서 속에 순종하신 분이고,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하셨던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셔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질서 속에 순종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에게 가장 불편한 것이 무엇입니까? 십자가 아닙니까? 예수님에게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이 십자가였습니다. 하지만 그 십자가, 그 불편한 것을 우리 주님은 기꺼이 지셨습니다. 그래서 능력이 생긴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능력은 하나님과 깊은 관계 속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능력을 원합니다. "하나님, 나에게도 능력이 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나에게도 능력을 좀 주십시오. 하나님, 내 인생에도 불이 떨어지는 능력이 있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기도합니다. 그런데 내 인생에 권위가 있고 능력이 있으려면 하나님과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야 됩니다. 통치 질서 속으로 들어가고, 그 질서 가운데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당신의 능력을 보여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 놀라운 능력을 한 주간 경험하고 발휘하고 실천하고 살아가는 복된 인생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예수님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던 것은 겸손과 순종이었음을 봅니다. 주여, 우리도 권위 있는 자들이 되고 싶습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권위를 받아 누리게 하여 주옵소서.
귀신처럼 예수님을 알고도 상관하지 말라고 하는 미련한 자 되지 않도록 도우시고, 더러운 귀신보다는 더 나은 자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과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어서 하나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게 하시고, 불편한 것을 기꺼이 감수하며 그 불편함을 내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의 백성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