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강 /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4:38-44)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본문: 누가복음 4:38-44

조선을 건국한 인물은 태조 이성계입니다. 그러나 조선을 설계하고 그 기틀을 세운 사람은 정도전이었습니다. 각종 법령과 율령을 제정하고 조선 오백 년의 토대를 놓은 이가 바로 정도전입니다. 그가 가장 사랑했던 책은 『맹자』였는데, 그중에서도 한 구절을 늘 입에 달고 외우며 다녔습니다.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은 그다음이며 군주는 가장 가볍다. 그러므로 들판에 있는 백성들의 마음을 얻으면 천자가 되고, 군주의 마음을 얻으면 제후가 되며, 제후의 마음을 얻으면 대부가 된다."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백성이 근본이라는 것입니다. 정치를 할 때는 항상 백성을 중심에 두어야 하며, 민본이 바로 나라의 근간임을 가르치는 말입니다.

군주가 다스리는 나라, 인간이 다스리는 나라도 백성이 가장 중요함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아닙니까? 하나님 나라는 위로는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고,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이 중심이 되는 나라입니다.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는 의미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역하신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얼마나 사람을 사랑하셨는지, 그 사랑으로 어떻게 일하셨는지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 중심으로 함께 일하고 있는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섬세하신 주님의 부르심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말씀을 증거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권위가 있었습니다. 주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던 이유는 주님께서 겸손하셨고 순종하셨기 때문입니다. 주의 말씀에 담긴 권위가 능력으로 나타났습니다. 더러운 귀신 들린 자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 그 귀신이 쫓겨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권위와 능력을 보여 주신 후에 회당을 나오셨습니다.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을 앓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 (눅 4:38)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나와서 가신 곳이 시몬의 장모 집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장모가 중한 열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이 중한 열병은 목숨까지 위태롭게 할 수 있는 심각한 병이었습니다. 사람들이 회당에서 나온 예수님을 이끌고 와서 이 여인을 고쳐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의 장모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셨습니다.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눅 4:39)

예수님께서 열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병이 떠났고, 이 여인이 치유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살펴보아야 할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지금 이 시점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받기 전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로 정식으로 부름받는 장면은 누가복음에 따르면 바로 그다음 장, 누가복음 5장입니다. 5장에 가서야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로 처음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4장의 이 사건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직접 나서서 예수님께 자기 장모의 병을 고쳐 달라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주변 사람들이 이 여인의 병을 고쳐 달라고 예수님께 부탁한 것이지, 베드로가 그 자리에 있었는지조차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장모 열병을 고치신 것이 우연히 일어난 일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계획과 섭리 가운데 있었던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모든 일 중에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섭리하심이고, 주님의 손길과 계획 가운데 일어난 일들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만나기 전에 그 장모의 열병을 고치신 사건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가장 큰 일은 십자가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 승천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것만큼 중요한 주님의 사명이 있었습니다. 그 사명이 무엇입니까? 제자를 키우는 일입니다. 사람을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영원토록 이 땅에 계실 수 없었고, 주님께 허락된 이 땅의 시간은 공생애 삼 년뿐이었습니다. 그 삼 년 동안 주님은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셔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땅은 누가 일해야 합니까?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 세워 가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 세우는 일을 중요한 사명으로 감당하셨습니다.

제자는 아무나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제자를 세우실 때 각별히 신경을 쓰시고 마음을 쓰셨습니다. 그중에 첫 번째 제자, 예수님의 제자 중에 수제자, 그 제자는 나중에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세우실 때 각별히 마음을 쓰셨다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어떤 사람입니까? 강한 사람입니다. 인간성이 강합니다. 자기 중심적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제자를 예수님께서 부르실 때, 다짜고짜 아무런 설명도 없이, 예수님에 대한 정보도 없이 "너는 나를 따르라" 하셨다면 이 사람이 따라왔겠습니까? 우리가 아는 베드로의 인격과 인간성으로는 예수님을 그렇게 따라올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은 먼저 공을 들이신 것입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나는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쳐 주심으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먼저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님의 이 사역을 통해 마음을 열고, 그다음 베드로가 주님을 영접할 수 있도록 주께서 먼저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일은 이처럼 섬세합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세우실 때는 항상 이런 방식으로 일하셨습니다.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를 세우실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모세는 하나님께서 팔십 년 동안 공을 들여서 세운 인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백삼십 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탄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 보내셨는데, 믿음 좋은 히브리인의 가정에 남자아이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 집은 믿음이 좋았습니다. 바로의 명령을 따라 이 아이를 나일강에 던지지 않았습니다. 기를 수 있는 만큼 키웠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되어 더 이상 아이를 기를 수 없게 되자 이 아이를 갈대 상자에 담아서 나일강에 띄워 보냅니다. 마침 그때 바로의 딸 공주가 그 강에 목욕하러 나왔습니다. 그것이 우연입니까?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놀라운 타이밍과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겠습니까?

섭리 가운데 바로의 딸 공주가 갈대 상자에 있는 아기를 데려다가 자기의 양자로 삼았습니다. 이제 모세는 안전한 곳에서 사십 년 동안 양육받았습니다. 애굽 왕자가 되었습니다. 애굽 왕자로서 애굽 사람의 학문과 모든 것들을 습득하게 되었습니다. 나이 사십이 되었습니다. 훌륭한 청년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는 지도자 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는 아직까지 부족한 무엇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의 인간됨이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성격이 급했습니다. 여전히 혈기가 왕성했습니다. 사람을 한 주먹에 때려죽여서 모래에 감출 정도로 혈기가 있고 왕성한 인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교만을 빼시기 위해서 사십 년을 또 훈련시키셨습니다. 미디안 광야로 보내셔서 장인의 양 떼를 사십 년간 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잘 준비되셨다고 판단하시자, 나이 팔십의 모세를 애굽에 보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 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키우시는 방식이 이처럼 섬세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베드로를 키우실 때도 이런 방식으로 먼저 가서 그의 마음을 열고 그를 부르셨고, 모세를 준비시키실 때도 팔십 년 동안 이처럼 세심하게 준비시키셨습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준비시키셨습니까? 오늘 우리가 주일에 이 자리에서 예배드리고 앉아 있습니다. 우리 인생 동안 하나님께서 나를 준비시키시고 인도하시고 이끌어 오신 하나님의 손길을 한번 기억해 보십시오.

사람마다 하나님은 다르게 역사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세리 마태 같은 사람은 순종적인 인물입니다. 예수님께서 세관에 가서 "너는 나를 따르라" 하셨을 때 마태는 다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를 정도로 순종적이고 결단력 있는 인물입니다. 마태는 그렇게 불렸습니다. 우리 중에 하나님께서 마태처럼 부르시는 분도 있고, 모세처럼 오랜 기간 준비하셨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부르시는 분도 있고, 베드로처럼 이런 방식으로 부르시는 분도 있습니다.

각자가 하나님과의 사연들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 하나님께서 각자 만들어 놓으신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풀어 놓으면 오랜 시간 동안 나와 하나님이 함께하신 이야기를 우리 모두 나눌 수 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섬세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오늘 이 자리에 있는 것도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와 섭리와 계획 가운데 나와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우리 가운데 있다는 사실, 이것이 얼마나 힘이 되고 은혜가 되며 위로가 됩니까? 앞으로도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와 하나님과의 역사를 써 내려 가실 줄로 믿습니다.

은혜가 낳은 섬김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눅 4:39)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에서 나았습니다. 열병에서 나은 이 여인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수종들었다고 했습니다. 수종들었다는 것은 섬겼다는 뜻입니다. 이 여인이 어떻게 섬겼을까요? 어떻게 섬겼는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열병에서 일어난 이 여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마 식사 대접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그와 함께한 사람들이 회당에서 곧장 이 집으로 왔습니다. 배가 고픕니다. 아직 식사를 못 하셨습니다. 여인이 일어나자마자 섬겼습니다. 식사를 준비해서 예수님과 함께 동행한 사람들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섬김이 귀합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 치료받고 은혜 입었던 사람 중에 이렇게 수종들고 섬겼던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열 명의 나병 환자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와서 감사를 표현한 사람은 단 한 사람, 사마리아 사람밖에 없습니다. 모두가 은혜는 입었지만 섬기지 않습니다. 수종들지 않습니다. 감사를 표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은혜를 은혜로 알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최선을 다해 예수님을 섬기고 수종들었습니다. 이것이 놀라운 여인의 믿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순서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순서가 매우 중요한데, 수종들기 전에 먼저 선행하는 은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물 붓듯이 부어지고, 그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 수종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이비 이단들, 이 땅의 거짓 선지자들은 뭐라고 말합니까? 구원받기 위해서는 수종들어야 한다, 섬김이 필요하다, 너의 물질의 수종과 너의 물질의 헌신과 시간과 몸의 헌신과 수고가 필요하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정성을 보시고 그 섬김의 수고를 보시고 너를 구원하시고 너에게 복 주실 것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가르칩니다. 순서가 틀렸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먼저 주어집니다. 그것이 순서입니다. 그 은혜를 깨닫고 기억한 자가 감사해서 하나님께 수종들고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8)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했는데 그때가 언제입니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을 때, 여전히 죄의 종노릇하고 있을 때, 그때 하나님께서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은혜가 먼저라는 뜻입니다. 선행하는 은혜가 있고, 그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지고, 그 은혜를 깨닫고 기억한 자가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베드로의 장모는 열병으로 정신이 없었습니다. 내가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께서 우리 집 문을 열고 내 집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열병을 꾸짖어 나가라 하시고 나를 고쳐 주셨습니다. 이것이 은혜가 아닙니까?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 집에 그냥 임한 것입니다. 이 은혜에 감사해서 수종들었습니다. 감사는 또 큰 은혜를 불러옵니다. 이것을 우리는 은혜의 선순환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를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부어 주셨던 은혜를 기억하고, 그 은혜 가운데 살며, 그 은혜에 대해서 우리가 수종들고, 또 더 큰 은혜를 받고, 그 은혜에 감사해서 또 섬기고, 평생 동안 은혜와 섬김이 반복되고, 그 은혜와 섬김이 점점 확장되고 커져가는 주의 백성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혼을 만지신 손길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눅 4:40)

해 질 무렵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안식일입니다. 이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설교하셨고 더러운 귀신 들린 자를 고쳐 주셨고, 또 예수님께서 베드로 장모의 집에 가서 열병도 고치시고 식사까지 하셨습니다. 그런데 온 가버나움 동네에 소문이 났습니다. 예수께서 오셔서 귀신 들린 자도 고치시고 열병도 고치신다더라. 병자들이 다 몰려왔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해 질 무렵이니 이제는 쉬어야 하는데,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지만 완전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기 때문에 피곤하실 텐데, 이제는 좀 쉬셔야 하는데, 주님 앞에 수많은 병자들이 몰려옵니다. 그런데 이 환자들을 주님께서 어떻게 치료해 주셨습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일일이라고 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오는 사람 모두에게 그 몸에 손을 얹고 기도하시고 안수하셔서 그들을 고치셨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가진 능력이라면 사람들이 몰려올 때 마당에다 다 앉힐 수 있습니다. 그 수많은 사람을 다 앉혀 놓고 "자기가 아픈 부위에 자기 손을 얹으세요. 머리 아픈 사람은 머리에 얹고 다리 아픈 사람은 다리에 얹고 이제 제가 기도하겠습니다" 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그 병이 나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예수님의 능력이라면 얼마든지 그렇게 해서도 한 번에 치료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만 명이건 십만 명이건 얼마든지 주님은 그렇게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왜 그렇게 하지 않으셨을까요? 왜 일일이 한 사람 한 사람 그 위에 손을 얹고 안수하여 그들을 고치신 것일까요? 이것은 병 낫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오는 사람이 감기 환자가 왔겠습니까? 별다른 문제가 없는 환자들이 예수님께 오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올 정도가 되면 난치병, 불치병, 그 병이 오래된 사람들, 여러 의사들에게도 가보았지만 안 되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옵니다. 귀신 들린 자도 오고 여러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옵니다.

지금 이 시기는 로마 압제 시절입니다. 식민지입니다. 이 동네 사람들은 예루살렘 사람들처럼 부자도 아닙니다. 갈릴리 사람들입니다. 한 가정에 환자가 있습니다. 자녀가 아프거나 부모 중에 누가 아프면 그 가정이 어떻게 될까요? 가정이 피폐해집니다. 처음에는 내 자식 한번 고쳐 보겠다고, 내 부모님 한번 살려 보겠다고 이 의원 저 의원 다 따라다니면서 돈을 씁니다. 그런데 낫지를 않습니다. 가정 경제는 무너집니다. 일을 하지 못하니까. 자녀 데리고 병 고치러 다니다가 살림이 엉망이 됩니다. 친척들에게 돈을 빌립니다. 처음에 한두 번이지, 그다음부터는 다 외면합니다. 일가친척도, 이웃들도, 동네 사람들도.

그래서 이들이 병도 병이지만 마음의 상처가 겹겹이 쌓여서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영혼이 무너져 있는 자들입니다. 사람들이 다 피하니까, 아무도 그들의 손을 잡아 주는 이들이 없으니까. 병든 자를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힘들어하는 자를 누가 기뻐하겠습니까? 그런 자들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의 병만 고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만져 주신 것입니다. 상처 입은 마음, 누구도 손잡아 주지 않고, 누구도 위로해 주지 않고, 누구도 껴안아 주지 않는 그들의 마음을 주님께서 손대어 주시고 위로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이 아닙니까?

한 영혼 한 영혼 병만 고치고 "이제 나았으니 가시오"가 아니고,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주님께서 그 앞에 앉혀 놓고 사연도 들어 주시고 기도해 주시고 안수해 주시고 손잡아 주시고, 그러면서 꾀나무도 주시고, 우는 자들 눈물도 닦아 주시고, 주님께서 그렇게 그 사람들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놀라운 사랑의 손길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어떻게 대합니까? 우리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을 한번 보십시오. 그 사람의 영혼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의 내면을 볼 수 있어야 하고, 그 사람의 사연을 우리가 함께 들어 줄 수 있어야 하고, 그분이 어떤 이유를 가지고 주 앞에 나왔는지, 오늘 나와 함께 이 자리에 있는지, 그분의 배경을 우리가 함께 볼 수 있는 넓은 마음과 깊은 눈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사람을 사랑하셨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피곤하신데도 불구하고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어 고쳐 주셨습니다. 우리 마음속에도 그런 영혼 사랑하는 마음, 사람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이렇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귀찮아하지 말고 버거워하지 말고 피곤해하지 말고, 나에게 맡겨 주신 영혼들, 나와 함께하는 영혼들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섬기고 사랑하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기뻐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기도에서 길을 찾다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 (눅 4:42)

날이 밝아 버렸습니다. 저녁 해 질 때에 주님을 찾아온 환자들을 일일이 손을 얹고 고쳐 주시다가 날이 밝아 버렸습니다. 어느덧 밤을 꼬박 새워 버린 것입니다. 새벽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날이 밝고 나서 예수님께서 한적한 곳으로 가셨습니다.

어디로 가셨을까요? 우리가 생각할 때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면 밤새도록 안수 기도하시고 피곤하셨으니 한적한 곳에 가서 조용히 눈을 좀 붙이시겠거니 하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마가복음에 따르면 한적한 곳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막 1:35-36)

새벽 아직도 밝기 전, 한자로 미명입니다. 밝기 전이니 새벽 미명에 예수님께서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무엇 하셨습니까?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밤을, 온 밤을 꼬박 환자들에게 손을 얹고 기도하시느라 밤을 세우시고, 그다음 예수님께서 새벽에 하신 일이 한적한 곳에 가서 다시 새벽 기도하신 것입니다. 다시 주님께서 기도하러 가셨다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기도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의 삶의 에너지와 동력과 근본, 원인, 예수님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바로 기도였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피곤해도, 아무리 잠을 자지 못해도, 주님께서 하나님과 만나서 독대하는 그 시간이 가장 귀하고 가장 존귀하고 가장 소중하기 때문에 주님은 새벽 그 시간에 한적한 곳에 가서 다시 하나님을 만나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의 삶의 동력, 엔진이 바로 기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기도하셨기 때문에 분별력이 있습니다. 선택의 순간에 기도함으로써 주님은 분별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기도하셨기 때문에 피곤치 않으셨습니다. 기도하면 하늘로부터 주시는 놀라운 에너지와 능력을 덧입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셨기 때문에 다시 한번 힘을 얻고 그다음 방향을 정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 삶의 모든 근원은 바로 기도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아닙니까? 삼위일체 중에 한 분이 아니십니까? 예수님 그 자체가 로고스, 말씀이 아닙니까? 그런데 주님은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예수님보다 더 나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도 아니고, 우리는 로고스도 아니고, 우리는 삼위일체 중에 한 분도 아닙니다. 그저 우리는 피조물일 뿐입니다. 그런데 왜 기도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조차 이처럼 기도하시는데, 예수님조차 새벽 미명에 기도하시는데, 왜 우리는 기도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니 내 삶의 근원의 동력의 에너지가 움직이지를 않습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니 끌어오는 힘을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 (눅 4:43-44)

예수님께서 그다음 갈릴리 여러 회당에 가셔서 다시 전도하셨습니다.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보내심을 받았노라." 기도하고 나니 예수님의 방향과 목적이 분명해집니다. 기도하고 나니 내가 그다음 해야 할 일이 다시 한번 새로워집니다.

우리가 무력한 까닭이 무엇입니까? 내가 그리스도인인데, 내가 크리스천인데, 내가 명색이 하나님의 사람인데 계속해서 무기력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들여다보십시오. 내 인생을, 내 삶의 동력이 끊어져 있지는 않은지, 내 삶의 에너지가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닌지, 우리 삶의 에너지와 동력이 끊어져 버리고 전력이 차단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기도하지 않으면 동력이 끊어집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에너지가 차단됩니다. 기도해서 다시 한번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기도해서 우리의 동력이 다시 한번 불길처럼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방향과 목적이 분명해집니다. 내가 왜 사는지, 내가 무엇을 위해서 다시 행동하고 살아가야 하는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방향을 분명하게 해 주십니다. 기도하지 않을 이유가 백 가지는 될 것입니다. 피곤해서, 귀찮아서, 기도해도 응답되지 않아서, 기도는 나와 체질이 맞지 않아서. 그런데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하루 종일 사역하시고, 하루 종일 일하시고, 그렇게 피곤하신데도 날밤 새고 다시 새벽에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방향을 잡기 위해서, 새로운 동력과 은혜를 덧입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입니다. 기도를 쉬면 안 됩니다. 기도하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방향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고 새 힘과 능력을 더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우리 하나님께서, 또 예수님께서 사람을 부르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베드로에게 가장 적합하게 주님께서 섬세하게 그를 먼저 찾으시고, 베드로의 장모의 병을 고치시면서 그의 마음을 열어 주시고,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도 팔십 년 동안 그를 섬세하게 준비시켰음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를 이렇게 세우시고 준비시켜서 이 자리에 있게 하신 줄로 믿습니다. 주여, 우리가 그 은혜를 기억하고 깨닫고, 그 은혜에 감사하며 섬기고 수종드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병만 고친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의 병을 고치시고 그들을 온전히 치유하신 주님, 오늘 우리의 마음을 고치시고 만지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여, 우리도 영혼을 예수님처럼 바라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내 인생의 기도의 동력이 끊어졌습니다. 내 인생에 이제는 기도를 잘하지 않습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고 예수님처럼 우리도 기도하게 하여 주옵소서. 이제는 다시 기도를 회복하겠습니다. 이제는 다시 기도하는 자가 되겠습니다. 기도의 자리로 나오겠습니다. 엎드리겠습니다. 눈물 흘리겠습니다. 주여, 우리가 기도하여 방향을 찾게 하시고, 내 인생의 새로운 엔진과 동력이 생겨나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 기뻐하시는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