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본문: 누가복음 1장 5-8절
일본 사람들은 꽃 중의 최고를 벚꽃이라 하고, 사람 중의 최고를 무사라고 말합니다. 벚꽃과 무사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화려하게 피어나지만 그 화려함이 오래가지 않습니다. 피었다가 금세 사그라집니다. 벚꽃도 그렇고 무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때 시대를 풍미했던 무사도 늘 두려움에 떨며 가슴 속에 칼을 품고 다닙니다. 나보다 더 뛰어난 자, 나보다 실력 있는 자가 나를 죽이려 달려들면 맞서 싸우려고 칼을 품고 다니지만, 그 칼이 자신의 목숨을 지켜주지는 못합니다.
그처럼 불안한 인생을 살다가 생을 마감하는 무사들은 마치 벚꽃과 같은 인생을 사는 자들입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벚꽃을 무척 사랑했습니다.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4년, 그는 수천 명의 영주를 나라현 요시노산에 모아놓고 벚꽃 잔치를 벌였습니다. 엄청난 규모의 잔치였고, 사람들은 저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칭송했습니다. 그로부터 4년 후인 1598년, 늘그막에 얻은 아들의 탄생을 축하하며 그는 다시 한번 벚꽃 잔치를 엽니다. 그 잔치를 위해 벚나무 700그루를 심고 큰 행사를 준비하여 자신의 권위와 위세를 과시했습니다. 잔치는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잔치 이후 두 달 만에 그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0년이 채 지나지 않아 그의 가문도 멸문의 화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영원히 지지 않을 것 같았던 가문의 위세와 그의 세력이 잔치 이후 두 달 만에, 가문은 10년도 채 버티지 못하고 마치 벚꽃처럼 한순간 사라져 버렸습니다.
벚꽃만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도 무척 빠르게 변합니다. 무언가 생겨났다 싶으면 사라지는 것도 순식간입니다. 인간의 부귀영화와 권세에 대해 옛사람들은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습니다. 열흘 붉은 꽃이 없다는 뜻입니다. 권세가 영원할 것 같고, 부귀영화와 물질도 영원히 내 것일 것 같지만,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 변하고 빠르게 흘러가며 사라져 갑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 믿음의 백성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어떤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할까요? 오늘 읽은 말씀의 사가랴와 엘리사벳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야 할 바, 서 있어야 할 곳을 알려주십니다.
5절 말씀입니다.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한 가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남편의 이름은 사가랴, 아내의 이름은 엘리사벳입니다. 두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둘 다 제사장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그 당시 제사장은 총 24반열로 이루어져 있었고, 아비야 반열은 그중 여덟 번째 반열이었습니다. 1년에 두 번, 들어갈 때마다 일주일씩, 1년에 2주씩 각 반열의 제사장들이 성전에 들어가서 제반 업무를 수행했습니다. 그런 일을 감당하는 사가랴가 제사장 가문의 일원으로서 그 시대를 살고 있었습니다. 아내 엘리사벳의 족보를 올라가 보면, 그 조상이 대제사장 아론이었습니다. 모세의 형이었던 아론, 하나님께서 초대 대제사장으로 세우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부부는 뿌리 깊은 제사장 가문이었고, 당시로서는 대단한 지식인 집안의 자제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만나 혼인하고 가정을 이루어 살고 있었습니다.
이 두 분의 어린 시절을 생각해 보면, 부모로부터 유대인에게 속한 교육과 제사장으로서의 엄격한 신앙 훈련을 제대로 받았을 것입니다. 그들의 뿌리가 어디서부터 왔는지, 어떻게 지금 이 자리에 서게 되었는지, 수천 년 동안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하나도 빠짐없이 다 배웠을 것입니다. 이런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분이 살던 시절을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유대 왕 헤롯 때에"라고 말합니다.
1. 암울한 시대적 상황
사실 이 표현을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 당시 유대 땅을 다스리던 사람들은 로마 사람들이었습니다. 로마는 그 당시 세계 최고의 제국을 건설하고 있었고, 수많은 식민지를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식민지 정책은 이중적이었습니다. 첫째, 전략적 요충지는 직접 통치했습니다. 전략적으로 중요하다 싶으면 핵심 인물들을 파견하여 군대를 주둔시키고 직접 통치했습니다. 반면 전략적으로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되면 위탁 통치를 했습니다. 기원전 40년, 로마 동쪽 지역을 통치하던 안토니우스 장군은 에돔 사람 헤롯에게 팔레스타인 유대 땅의 지배권을 넘겨주었습니다.
로마가 판단할 때 팔레스타인 유대 땅은 전략적 요충지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아마 에돔 사람 헤롯은 그 지역의 지배권을 로마로부터 가져오면서 엄청난 금액을 바쳤을 것입니다. 거래 없이는 그 땅을 위탁받아 통치하고 세금을 징수하며 군대를 주둔시킬 권한을 함부로 주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지고 보면 지금 이 두 분이 살던 시절의 유대 땅은 정치적으로는 로마가 지배하고 있었고, 실질적인 지배권 행사는 에돔 사람 헤롯 가문이 붙잡고 통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이 유대인들에게는 굉장히 수치스럽고 굴욕적이었습니다.
1-1. 에돔과의 역사적 악연
차라리 로마가 직접 통치하면 덜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로마가 아닌 에돔 사람이 그들을 다스리고 있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역사적 악연 때문입니다. 에돔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이삭을 만납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쌍둥이 형제를 낳습니다. 장자권이 야곱에게 넘어갑니다. 그러자 화가 난 에서가 집을 박차고 나갑니다. 에서는 남쪽 세일 산에 가서 자기 가정을 형성하고 뿌리를 내려 가문을 넓혀 갑니다. 에서의 후손들이 세운 민족이 에돔 족속입니다. 그러므로 에돔 족속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사이가 좋을 리 없습니다. 그들은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 조상 에서가 장자권을 빼앗겼다, 만약 우리 조상 에서에게 장자권이 넘어왔더라면 우리는 이 황량한 산악 지역에 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들은 그런 피해의식을 품고 어떻게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넘어뜨릴까 수천 년 동안 벼르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한참 지나 수천 년이 흐른 후, 드디어 그들의 염원이 실현됩니다. 에돔 사람 헤롯이 유대인들을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 유대인들에게는 얼마나 수치스럽고 굴욕스럽고 분한 상황이었겠습니까? 그런데 힘은 없습니다. 돈도 없습니다. 능력도 없습니다. 그들의 실질적 지배를 막아낼 어떤 방법도 유대인들은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지식인들의 고민이 있었습니다.
1-2. 헤롯의 교활한 통치
그런데 일반 시민들, 평민들은 별 고민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헤롯은 굉장히 영악하고 교활한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종교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유대인들이 가장 좋아할 만한 일들을 해주었습니다. 환심을 사기 위해 그들이 좋아하는 성전을 지어줍니다. 볼품없는 성전이 아니라 대단하고 위대하고 화려한 성전을 지어줍니다. 이른바 헤롯 성전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속 모르고 헤롯 성전을 좋아했습니다. 그 헤롯 성전의 위엄이 어떠한지 사람들은 저마다 기뻐하고 자랑했습니다. 예수님께도 어떤 사람이 와서 헤롯 성전을 보라고 말했습니다.
누가복음 21장 5-6절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사람들은 헤롯 성전을 자랑했습니다. 얼마나 대단합니까, 얼마나 아름답게 지어졌습니까, 이 얼마나 아름다운 돌들과 헌물로 지어졌습니까 하고 예수님께조차 자랑했습니다.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이 성전이 AD 70년 로마 장군 티투스에 의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그 이전까지 이 성전은 유대인들에게 굉장히 좋은 곳이었습니다. 이 모습을 보는, 역사를 아는 사람들, 배운 사람들, 제사장 집단에 속한 사람들은 얼마나 무력했겠습니까?
정치적으로 힘이 없어서 로마의 식민지가 되어 있고, 종교적으로도 저 사악한 헤롯에게 길들여지고 있는 백성들을 보는 제사장 가문의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어떤 마음이었겠습니까? 사실 그들은 힘이 없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시대는 더욱더 악해져 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시절을 살고 있었습니다. 암울했습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2.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살다
그렇다면 이런 시절에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이었겠습니까? 무엇을 하며 버티고 어떻게 견뎌내야 했겠습니까? 6절을 보십시오.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하나님 앞에 의인이었다고 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풀어서 말하면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 없이 살았다고 했습니다. 즉 그들은 시대의 아픔 앞에서 낙심하거나 절망하거나 그것 때문에 자기 인생을 내던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하나님 앞에 계명과 규례를 지키며 흠 없이 사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들의 모습을 보시고 너는 의롭다고 말씀하십니다. 의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특별한 행위를 행해서 의인이 된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희생해서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서 의인이 된 것이 아닙니다. 이런 시대적 절망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그저 신앙생활을 잘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의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의인이라고 부르시는 방식입니다. 상황이나 환경에 휘둘리지 않고, 그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런 환경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지키며 사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의롭다 하십니다.
2-1. 아브라함의 믿음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약속하신 것이 있습니다.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고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을 믿고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왔습니다. 10년이 지났습니다. 자식 하나 없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포기 선언을 합니다. 하나님, 우리 집에서 기른 다메섹 엘리에셀을 세워서 내 후사로 삼겠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그를 데리고 들판에 나가 하늘의 별을 보여주십니다. 저 하늘의 별들처럼 너의 자손을 많게 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말씀을 믿었고, 하나님은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상황은 엉망이었습니다. 조카 롯도 떠나버렸습니다. 10년이 지나면서 사라의 나이는 더 늙어 갑니다. 자기도 힘이 빠져 갑니다. 상황은 최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상황을 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2-2. 노아의 믿음
하나님은 노아에게도 똑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6장 9절입니다. "이것이 노아의 족보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노아가 의인이라고 했습니다. 당대에 완전한 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노아를 의인이요 완전한 자라고 인정하신 배경이 있습니다. 그 시대가 어떠했습니까? 창세기 6장 2절과 5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에 빠져 예배 공동체가 파괴되었습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세속화의 물결에 자기 몸을 맡겼다는 뜻입니다. 예배당이 텅 비어 갔습니다. 하나님을 부르고 예배드리는 사람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들이 다 악을 행했습니다. 얼마나 악이 관영했던지 하나님이 사람 지으신 것을 후회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세상에 악이 충만하고 관영하던 시절, 하나님을 믿고 예배드리는 사람은 노아와 노아의 가족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노아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방주를 지으라고. 1년 2년 지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120년 동안 지어야 합니다. 주변 사람들이 다 손가락질합니다. 하늘에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데 방주를 짓는다고 사람들이 그를 미쳤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노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경을 보지 않았습니다. 주변 사람을 보지 않았습니다. 상황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저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 그것 하나만 붙잡고 살아갔습니다. 사가랴처럼, 엘리사벳처럼, 상황은 암울하고 시대는 역설적입니다. 그런데 그 상황과 그 시대에 매여 살지 않습니다. 그는 그저 할 일을 할 뿐입니다.
3. 흔들리지 않는 믿음
역사적으로 보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과거부터 현대까지, 이 시대는 하나님 백성들에게 호의적이었던 적이 단 한 순간도 없었습니다. 노아 시절이 그랬고, 선지자들이 예언하던 시절 그들은 괴로웠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설교하실 때도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듣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고 병든 자를 고치셨는데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잡아서 십자가에 못 박았던 악한 시절이었습니다. 복음에 대해 호의적인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우리나라 선교 140년 역사도 보십시오. 일제강점기 시절에 예수 믿는다고 사람을 끌어다가 총칼로 죽였습니다. 이념 전쟁이 횡행하던 시절에는 예수 믿는 사람들, 하나님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 죽이고 총으로 위협했습니다. 복음에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 시절에 신앙생활 하는 것, 교회 다니는 것을 사람들은 비웃습니다. 21세기 최첨단 과학문명 시대에 무슨 교회냐고 말합니다. 교회를 이상한 집단처럼 보며 세속화의 거센 물결이 교회를 휘감아 가고 있습니다.
이런 시절을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 환경이 만만하지 않습니다. 녹록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시절을 좇아 살아야 합니까? 이 시절의 악함에 우리도 편승해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지 않으려고 욕먹지 않으려고 그냥 되는 대로 살아야 합니까? 우리가 진정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되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계명과 규례를 지키며 하나님 앞에 그저 믿음으로 살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바꿀 힘이 없습니다. 세상의 강대국들 사이 전쟁을 멈추게 할 능력도 없습니다. 지금 이 시절에 악한 사람들을 막아 세울 능력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딱 한 가지 있습니다. 그저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말씀 붙들고, 오늘 하루도 하나님 말씀 읽고 기도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한 사람 있으면, 또 그런 사람 한 사람 만나 두 사람이 되고, 그런 가정이 열 가정이 되고 스무 가정이 되면, 그분들이 하나님의 희망이 되지 않겠습니까? 소돔과 고모라가 왜 망했습니까? 의인 열 명이 없어서 망해버렸습니다.
이 시대에, 이 암울한 시절에도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고 신앙생활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으면 하나님은 그들을 보시고 희망을 두실 줄로 믿습니다. 그 악한 시절에 사가랴와 엘리사벳,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힘없고 나이 든 분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하나님 말씀 지키고 신실하게 예배 생활하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에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런 힘과 능력이 오늘 우리에게도 나타나고 부어지게 될 줄로 믿습니다.
3-1. 기독교 신앙의 본질
그렇다면 우리 생각에 이런 상황에서도 신앙생활 잘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뭔가 잘 되게 해주셔야 할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들의 가정이 어떤 문제를 겪고 있습니까? 7절을 보십시오. "엘리사벳이 잉태를 못하므로 그들에게 자식이 없고 두 사람의 나이가 많더라." 절망적입니다. 하나님은 늘 이런 식입니다. 이래서 우리가 답답해집니다. 그냥 좀 잘 되게 해주시면 얼마나 좋습니까? 자식도 많이 낳고, 부자로 살고, 하는 일마다 다 잘 되면, "저 두 분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 잘 섬겼더니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 이루어 주시고 복 주시더라" 하고 사람들에게 영광이 되고 은혜가 되고 전도가 될 텐데,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본으로 삼고 따라갈 텐데, 왜 이 가정에 이렇게 희망을 앗아가는 것입니까? 잉태하지 못했습니다. 자식이 없습니다. 게다가 두 사람은 나이가 많습니다. 희망조차 전혀 보이지 않게 몰아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과 이방 신앙의 본질적인 차이가 무엇입니까? 이방 신앙, 무속종교를 믿는 사람들, 그 외 다른 모든 신앙은 자기가 믿는 신을 자신의 욕망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내 소원이 있습니다. 그러면 자기가 믿는 신에게 가서 빕니다. 돈도 많이 냅니다. 열심히 봉사하고 섬깁니다. 그리고 내 목적을 이루어 달라고 빕니다. 그런데 그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가차 없이 버리고 돌아섭니다. 그것이 이방 신앙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도 살다 보면 마음의 소원이 있습니다. 흙으로 빚어진 존재가 이 세상 살다 보면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물질도 필요하고 건강도 필요하고 가정의 복도 다 필요합니다. 그것을 달라고 말씀드립니다. 그런데 내가 원하는 시기에,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내가 원하는 만큼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신앙을 버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가장 중요한 것, 정말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구원을 우리는 이미 선물로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이 아무리 노력하고 힘쓰고 애써도 이룰 수 없는 영혼의 구원, 지금 내가 이 자리에서 죽어도 세상을 떠나도 천국에서 눈 뜰 수 있다는 확신의 영혼의 구원, 우리는 이미 그 구원을 받은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그 외 나머지 것들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시간에, 혹은 내가 정말 간절히 원하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그것도 수용하겠다고 하는 것, 우리는 그것을 믿음이라고 부릅니다.
그렇게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실패했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너 그렇게 살아서 실패했다"고 말하지만, 하나님 보실 때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은 사람을 실패한 인생이라고 단 한 번도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3-2. 실패 없는 믿음의 삶
이사야 선지자를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이런 명령을 내리십니다. 3년 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는 미친 사람입니다. 3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예언하고 다니기 위해 그는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행했습니다. 미친 사람 아닙니까? 사람들은 그를 미쳤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성공한 선지자로 여기십니다. 왜냐하면 말씀 그대로 행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남유다가 망할 때 예언했습니다.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바뀌지 않았습니다. 나라가 망해버렸습니다. 왕은 두 눈이 뽑혔고 유대인들은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러면 그 선지자가 실패한 선지자입니까? 그는 실패한 선지자가 아닙니다. 그의 설교를 듣고 변화된 사람이 없었지만, 그를 실패했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부잣집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에게 재산이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자녀 교육에 열정이 있었습니다. 가말리엘 문하에서 사도 바울이 배웠습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 재산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이후로 복음 전하느라 그는 비천한 삶을 살았습니다. 어려운 인생을 살았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는 "저 사람이 왜 저렇게 사는가" 했겠지만, 하나님은 그를 성공한 인생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를 망한 인생, 실패했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빌립보서 4장 12-13절입니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풍부와 비천, 배부름과 배고픔 가운데서 그가 살아낼 수 있었던 까닭은, 바울의 고백대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것은 실패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볼 때는 우리의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너 예수 믿어서 실패한 거야"라고 말하지만, 우리가 예수 안에 있어서 영혼의 구원을 받은 자에게는 실패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가랴와 엘리사벳, 이들은 실패한 인생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그들에게 어떻게 수군거릴지 몰라도,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당당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행할새." 제사장의 직무를 행했습니다.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지금 이 지경이 되었는데, 지금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하나님 앞에 계명과 규례를 지키며 흠 없이 살아 의인으로 살았는데, 이런 소박한 소원 하나 이루어지지 않는데, 무슨 하나님의 일이냐, 무슨 제사장의 직무냐, 나는 때려치우겠다고 하는 사람도 왜 없었겠습니까?
상황을 보면 하나님 일을 하지 않을 이유가 굉장히 많습니다. 환경을 보면 자기가 맡은 직무를 성실하게 수행하지 않을 이유가 너무 많습니다. 우리 자신을 보십시오. 환경을 보십시오. 일이 안 돼서 못합니다. 세상에서 실패해서 주의 직무를 감당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일이 너무 잘 돼서 바빠서 주의 일을 섬기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몸이 아파서 못 하고, 너무 건강해서 다른 일 한다고 못 하고, 자녀가 어려서 못 하고, 자녀가 나이 많아서 못 하고, 그렇게 따지면 우리가 태어나서 하나님 나라 갈 때까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직무를 감당할 수 있는 시간이 단 하루라도 있겠습니까? 단 하루도 없습니다.
상황에 의지하다 보면, 환경을 따라가다 보면, 누가 나를 비난해서 기분 나빠서, 상처 입어서, 마음이 좋지 않아서 주의 직무를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그 일을 접어버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의 일을 영원토록 감당하지 못합니다. 지금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그런 것을 따지지 않습니다. 자신의 처지와 환경과 상황을 보지 않습니다. 나에게 맡겨준 일이니까, 제사장의 직무는 내가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니까, 그 반열의 순서가 돌아오니 그는 성전에 나가서 그곳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을 감당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것이 참 믿음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 가운데 상황과 환경과 여건에 따라서 마음이 흔들리는 자세가 없기를 바랍니다. 세상은 벚꽃이 화려하게 피었다가 한순간 사라지는 것처럼, 우리 인생의 부귀영화도 그렇게 왔다가 가고 다시 갔다가 오는 법입니다. 그런 것과 상관없이 우리는 진실되게 하나님 앞에서 계명과 규례를 지키며 흠 없이 의인으로 살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일이 있다면 그 일을 기쁨으로 성실하게 믿음으로 살아내고 감당해 나가서, 주님께 인정받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헤롯 왕 때에 지식인으로서 무력감과 시대적 암울함 속에 살아야만 했습니다. 끝간데없는 마음으로 낙심하고 절망하며,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몽매한 민중들을 보면서도 가슴 아파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 힘이 없었지만 오직 한 가지 할 수 있는 일을 붙잡았습니다. 그들은 그저 하나님 앞에서 계명과 규례대로 흠 없이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분들을 의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상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여전히 실패와 낙심과 좌절할 일만 생겼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상황을 보지 않고 다시 한번 제사장의 직무의 길로 나아갑니다.
주여, 우리에게 이런 믿음 허락하여 주옵소서. 상황을 따라 환경을 따라 시간을 따라 흔들리지 않도록 도우시고, 오직 한 길 걸어갈 수 있는 순전한 믿음 붙들어 주옵소서. 그 믿음 안에 거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붙드시고 살피시는 놀라운 능력을 붙잡고 의지하게 하여 주옵소서. 이 복잡한 세상, 흔들리는 세상 가운데 우리의 믿음은 복잡해지지 않고 우리의 신앙은 흔들리지 않도록 붙잡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