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배는 시몬의 배라
본문: 누가복음 5:1-11
조선은 1392년에 건국된 후 약 200년간 성장과 발전을 거듭했습니다. 그러나 정확히 200년이 되던 해인 1592년, 나라는 전례 없는 위기에 직면합니다. 바로 임진왜란이 발발했기 때문입니다. 임진왜란으로 전 국토가 초토화되고 백성의 삶은 극심한 고통 속으로 빠져들었으며, 국정은 마비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이 위기 상황을 건져낸 인물이 바로 이순신 장군이었습니다. 이순신은 임진왜란 당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597년에 모함을 받아 옥에 갇히는 수모를 겪습니다. 다행히 이순신을 아끼고 사랑하던 이들의 적극적인 탄원 덕분에 백의종군하게 됩니다.
감옥에서 나오기는 했으나 군사도 없고 관직도 없이 백의종군의 길을 나섰습니다. 그때 그에게 두 가지 비보가 전해집니다. 하나는 평생 동안 그를 아끼고 사랑하며 뒷바라지해 주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그의 뒤를 이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제 선조 임금과 조정에는 더 이상 대안이 없었습니다. 다시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는 교지를 내립니다. 이순신은 그 교지를 받아 들고 순종하며 전장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전장에서 그가 목격한 것은 처참한 광경이었습니다. 평생에 걸쳐 일구어 놓은 수군 가운데 남아 있는 배는 고작 열두 척뿐이었습니다. 반면 적의 규모는 133척에 달했습니다.
이 압도적인 열세 속에서 왜적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 결과는 명량에서의 대첩, 위대한 승리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 이순신의 심리 상태, 그 내면의 마음을 깊이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그는 빈손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평생을 바쳐 수고하며 일군 수군도 초토화되었고, 한평생 그를 뒷바라지하며 도와주던 어머니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군인으로서 명예를 가장 소중히 여기며 살아왔는데, 그 명예마저 모함으로 땅에 떨어졌습니다. 자신의 인생은 빈손이었고,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텅 빈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텅 빈 인생을 절망으로, 혹은 원망으로 채우지 않았습니다. 선조 임금에 대한 미움과 원한으로 채우려면 얼마든지 채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원망과 불평, 좌절과 낙심 속에 침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빈 마음을 애국심으로 채웠습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채우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채우고, 순종했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전과가 다시 혁혁하게 세워졌고, 조선은 마침내 전세를 뒤집는 역사를 만들어 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내 인생이 빈손이 될 때가 왜 없겠습니까? 길고 긴 인생을 살다 보면 텅 빈 인생을 맞이할 때가 있습니다. 나의 잘못으로, 혹은 주변 사람들의 이런저런 모함으로, 여러 가지 일에 엮이고 얽히고 설키는 관계 속에서 내 인생이 텅 빈 빈손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나의 빈손을 무엇으로 채우느냐가 중요합니다. 좌절하고 낙심하면 그 배는 침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 가득 채우면 우리의 인생은 새로워집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베드로는 만선의 꿈을 안고 출항했다가 텅 빈 배를 끌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의 빈 배에 예수님이 타셨습니다. 예수님이 그 배에 오르시고 나서 그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새로운 계기가 마련된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 인생에도 하나님께서 주신 예수님의 은혜와 능력이 삶을 변화시키는 출발과 시작이 되기를 바랍니다.
씨 뿌리는 자의 수고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 회당에서 설교하시고 각색 병자를 고치시며, 또 다른 회당에 가서도 전도하셨습니다. 그 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눅 5:1)
이 1절의 시작이 의미심장합니다. 무리가 '몰려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리가 몰려온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전에 씨를 열심히 뿌리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장하신 나사렛 회당에서 설교하셨고, 가버나움에서도 말씀을 전하셨으며, 그 말씀에는 권위가 있었고, 그 권위는 능력으로 나타났습니다. 베드로의 장모가 앓던 열병도 고쳐주셨고, 찾아오는 각색 병자들을 일일이 손을 얹어 치유해 주셨습니다. 피곤하셨지만 새벽에 나가서 기도하셨고, 또 다른 마을로 가서도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열심히 전도하셨고,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복음의 씨앗을 뿌리셨습니다. 그 씨앗을 뿌린 수고가 이제 열매를 맺어 무리가 몰려온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법칙입니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습니다. 봄에 씨앗을 뿌리지 않는데 가을에 어떻게 추수할 수 있겠습니까? 수고하고 씨를 뿌려야 열매를 맺고 추수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창세기에서부터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하나님 나라의 법칙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창 2:15)
하나님께서 에덴을 창설하시고 태초의 사람을 에덴 동산에 두셨습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맡겨주신 사명은 에덴에서 경작하며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의아해할 수 있습니다. 에덴에도 노동이 있었단 말입니까? 우리는 흔히 에덴을 노동하지 않고 그냥 놀고먹는 곳으로 오해합니다. 그래서 에덴을 낙원이라 부르고, 파라다이스라 부릅니다. 수고하지 않고, 노동하지 않고, 땀 흘리지 않고, 평생 영원히 잘 먹고 잘 사는 곳이 에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에덴을 오해한 것입니다. 경작하며 지키는 수고가 에덴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을 창설하시고 사람에게 다스리며 지키는 청지기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 수고를 다하지 않고는 먹을 수 없습니다. 열매를 거두려면 씨 뿌리고 수고하며 경작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열매가 비로소 자기 것이 됩니다.
사도 바울도 이와 같은 말씀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살후 3:11-12)
초대교회에 임박한 재림 사상, 그릇된 종말론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곧 재림하시니 일하지 않아도 된다며, 오늘은 이 집에서 얻어먹고 내일은 저 집에서 얻어먹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도무지 일하지 않고 일만 만드는 자들을 경계하며,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고 명했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유명한 말씀을 남기지 않았습니까?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수고해야 먹을 것이 생기는 것이 이 땅의 법칙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법칙입니다.
예수님께서 씨를 뿌리셨기에 무리가 몰려왔습니다. 좋은 씨를 뿌렸기에 좋은 사람들이 몰려온 것입니다. 이 땅에 선교 140년의 역사가 있습니다. 140년 전에 이 땅에 초기 선교사들이 오셔서 복음의 좋은 씨앗을 뿌렸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이 초창기에 누구에게 복음의 씨앗을 뿌렸는가가 중요합니다. 구한말 조선 땅에 오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 오신 초기 선교사들은 여성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 당시 여성들은 돈이 없었습니다. 사회적 지위가 낮았습니다. 글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왜 여성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했을까요? 고관대작이 아니고, 그래도 헌금 정도 할 수 있는 남성이 아니라, 왜 여성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했겠습니까? 그 여성들이 어머니들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들이 복음을 받아들여야 자녀의 손을 잡고 교회에 나올 것이고, 그 아이를 자기 무릎에서 말씀을 먹이고 가르치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이가 바로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머니들에게 씨를 뿌렸습니다.
당장 열매가 나타나지 않아도 어린아이들을 전도했습니다. 어린이들이 교회마다 가득 차고 넘쳤습니다. 선교사들은 그 어린이들을 모아 놓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영어로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비록 열매가 없지만, 30년이 지나고 40년, 50년이 지나면 이들이 이 교회의 기둥 같은 일꾼이 되고 이 나라와 민족을 떠받치는 거목이 될 것을 믿고 씨를 뿌렸습니다. 그 열매를 우리가 한껏 누리지 않았습니까? 선교사들이 초기에 수고한 열매를, 이 땅의 교회들은 한국전쟁이 끝나고 1960년대, 70년대, 80년대에 마음껏 누렸습니다. 교회가 폭발적으로 성장했습니다. 그것은 그때 그 세대가 잘해서가 아닙니다. 이전 세대들이 열심히 좋은 씨앗을 뿌렸기에 그 열매를 거두어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열매를 거두는 데 취해서, 배가 너무 불러서, 그때는 씨 뿌리는 일에 수고하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씨를 뿌리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열매에만 취해 거두느라 바쁜 나머지 씨 뿌리는 일을 중단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 결과가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까? 황폐해졌습니다. 이제는 거두고 싶어도 열매가 없습니다. 30년 전, 40년 전에 씨를 뿌리지 않았기에, 옛날 구한말 선교사들이 씨 뿌리듯 우리 믿음의 이전 세대들이 수고하지 않았기에, 지금 우리는 거둘 열매가 하나도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시 원점으로, 초심으로 돌아가 열심히 씨를 뿌려야 합니다. 다시 씨 뿌리기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이 회당 저 회당을 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시고, 각색 병자를 일일이 찾아가 손을 얹어 기도해 주셨던 것처럼, 우리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씨 뿌리기부터 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3년 전에 비전센터에 입당했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교회와는 순서가 다릅니다. 보통 교회들은 본당부터 먼저 짓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비전센터, 곧 교회학교 아이들이 예배드릴 공간부터 먼저 지었습니다. 씨 뿌리기입니다. 본당은 비좁고 불편해도 우리 교회학교 아이들이 자라나고 성장할 비전센터 교육관이 중요하기에 그것부터 먼저 지은 것, 이것이 씨 뿌리기입니다. 열매가 금방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수고가 중요하기에 먼저 씨를 뿌렸습니다.
올해 우리가 해야 할 중요한 과제가 있습니다. 청년들이 그동안 성장하고 부흥하여 청년부 예배실이 협소해지고 비좁아졌습니다. 이제 비전센터를 증축하여 청년들의 예배 공간을 다시 마련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씨 뿌리기입니다. 본당은 비좁고 불편해도 젊은이들이 예배를 마음껏 드릴 수 있도록 씨를 뿌려 주어야 합니다. 당장은 그 결과가 나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어린아이들이 성장하고 청년들이 예배를 마음껏 드리며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면, 한 세대가 지나 무리가 몰려들지 않겠습니까? 그 일과 그 수고는 기성세대인 우리 어른들의 몫입니다. 우리가 그 수고를 감당해야 합니다. 하지 않으면 열매를 거둘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법칙이기에 반드시 그렇게 됩니다. 지금 눈물로 씨를 뿌리면, 때가 되어 기쁨으로 영광의 단을 거두게 될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사모하는 갈급함
1절 말씀을 다시 살펴봅니다.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눅 5:1)
무리가 몰려왔는데 왜 몰려왔는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온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이때는 평일이었습니다. 어부들이 물고기를 잡고 있는 평일 새벽에, 이 무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듣기 위해, 새벽부터 예수님께 몰려 나왔습니다. 안식일에 원래 다니던 회당에 가면 예수님께서 알아서 안식일 회당에 가셔서 말씀을 전하십니다. 가만히 일주일만 기다리면 주님께서 안식일 회당에서 권위 있는 말씀, 능력의 말씀을 전하십니다. 그런데 이들은 그 일주일을 기다리지 못하고, 주중에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이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이 현상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이 땅에 수많은 교회가 있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 교회처럼 예배가 많은 교회가 없습니다. 주일 예배가 있고, 수요 사경회가 있고, 금요일에 금요기도회가 있으며, 그것도 부족해서 매일 새벽마다 새벽기도회가 있습니다. 왜 이렇게 예배가 많아졌을까요? 성도들을 괴롭히려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이 주일 예배를 드리고 나면 목말라서 견딜 수 없어서, 일주일의 딱 절반이 되는 3일째에 교회에 와서 또 말씀을 듣기 위해 모여온 것입니다. 마음이 갈급하고 답답하여 견딜 수 없어서, 금요일 밤을 하나님 앞에 아뢰고 기도하기 위해 나오니 또 예배가 생긴 것이고, 그것도 모자라서 매일 새벽 일하러 가기 전에 하나님 앞에 와서 기도하고 말씀을 들어야 하루가 새롭게 시작되기에 새벽기도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더 큰 은혜를 갈망합니다.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은 한 번의 말씀으로 일주일을 견디기가 어려워서 3일 만에 또 나오고, 매일 새벽에 또 나오고, 주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그 말씀을 갈망하여 매 순간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별난 신앙처럼 보입니까? 지극히 자연스럽지 않습니까? 그런데 혹자는 별나게 예수를 믿는다고, 대한민국의 교회가 성도들에게 예배를 강요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믿음의 메커니즘을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믿음생활을 하다 보면, 은혜를 받다 보면 더 많은 은혜를 사모하게 되고, 오늘의 이 말씀으로 일주일을 견디기가 지루하고 길어서 또다시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고 말씀을 듣는 자리에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모이기를 기뻐하고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것을 더 사모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믿음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한 달에 한 번의 예배로 충분합니까? 절기 교인으로 일 년에 서너 번 나오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기십니까? 일주일에 한 번 예배드리고 말씀 듣는 것으로 정말 충분하십니까?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 예전 같지 않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신앙 어딘가에 문제가 생겨 있다는 의미입니다. 더 말씀을 사랑하고, 더 하나님의 은혜 아래 무리처럼 몰려 나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그 교회 공동체는 건강한 공동체입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사모하듯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모인 것이지, 다른 목적으로 모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온 사람들, 이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이러한 일이 우리 교회 공동체에도 매 순간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빈 배에 오르신 예수님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눅 5:2)
누가복음 5장 전체의 맥락을 살펴보면, 전날 밤 만선의 꿈을 안고 출항했지만 물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이제 어부들이 그물을 씻고 있습니다. 그물을 씻는다는 것은 오늘 장사가 끝났다는 뜻입니다. 그물을 씻고 정리해서 접어서 배에 넣고 집에 돌아가는 것입니다. 만선의 꿈을 안고 출항했는데 물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상황에서, 분위기가 좋을 리 없었습니다. 집에 돌아갈 때 주머니에 돈이라도 몇 푼 있어야 가장의 위신이 서는데, 한 푼도 벌지 못하고 물고기 한 마리도 가져가지 못하는 처지입니다. 침묵이 흐릅니다. 밤새도록 그물을 던지느라 고단한 데다 고단함은 몇 배로 불어났습니다. 모두가 서로의 눈치만 보고, 한숨 짓는 사람들의 얼굴입니다.
그런 상황에 예수님께서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눅 5:3)
예수님께서 배 두 척 가운데 한 배에 올라타셨는데, 그 배가 시몬 베드로의 배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즐겨 사용하시던 전형적인 설교 방식입니다. 해변가에 사람들이 모이면 예수님은 배에 앉으시고, 사람들은 해변가에 자리를 잡고, 주께서 설교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여기서 깊이 생각해 볼 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 배가 두 척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르신 배가 하필 시몬 베드로의 배였습니다. 이것은 어쩌다가 베드로의 배에 오르신 것입니까? 우연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섬세하고 치밀한 계획 가운데 일어난 일입니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에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세계 만물을 운행하시고, 예수님께서 사람을 세우시는 일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는 경우는 결코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알지 못하기에 미련한 인간의 눈에 우연처럼 보이는 것이지, 하나님은 우연으로 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룻기 2장을 보면 룻과 보아스의 첫 만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룻 2:3)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룻 2:4)
'우연히', '마침'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 우연처럼 보이고, 마침 그 일이 일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가운데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오늘 주일 이 자리, 이 예배의 자리에 있는 것이 어쩌다가 된 일이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의 백성이 신앙생활 가운데 겪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손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은혜가 되고, 하나님의 개입이 되고, 능력이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 일생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손길과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는 믿음의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배에 허락을 받고 올라가신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그물을 씻고 있는데, 주님이 갑자기 베드로의 배에 올라타 버리셨습니다. 기습을 당한 것입니다. 그때 베드로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짜증이 나고 화가 나지 않았겠습니까? 예수님은 허락도 맡지 않고 배 위에 올라서서 설교를 시작하십니다. 예수님의 설교는 요즘 설교처럼 20분, 30분에 끝나는 설교가 아닙니다. 배에 앉아서 가르치셨다고 했으니, 작정하고 시작하신 것입니다. 한나절이 갈지 온종일이 갈지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빨리 그물을 씻고 집에 가서 쉬어야 했습니다.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는데 물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한 피로감이 온몸에 퍼져 있었습니다. 물고기를 잡지 못했으니 두 배, 세 배 더 피곤했습니다. 화가 나고 짜증이 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화를 낼 수도 없었고, 끌어내릴 수도 없었습니다. 한 번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시지 않았습니까?
베드로는 마냥 기다려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설교가 끝나고, 사람들이 은혜를 받아 다 집에 돌아가고, 예수님이 배에서 내려오실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만약 베드로가 전날 밤 만선의 꿈을 안고 출항하여, 기대와 소망대로 물고기를 잔뜩 잡아 배에 가득 채워 돌아왔다면, 그날 아침 풍경은 어떠했을까요? 완전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물고기를 크기별로 분류했을 것입니다. 큰 물고기, 중간 물고기, 작은 물고기, 버려도 될 물고기, 다시 돌려보내야 할 물고기, 집에 가져갈 물고기, 어시장에 팔아 경매에 부칠 물고기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을 것입니다. 물고기를 팔아 돈을 챙기고, 기분이 넘쳐나고, 행복에 젖어 있었을 것입니다. 이 돈을 가지고 집에 돌아갈 생각에 즐겁고, 수고한 사람들과 돈을 나누고, 배고픈 아침에 따뜻한 식사를 함께 나누며, 서로의 수고를 격려하고 다음 만선을 기약하며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 아침 시간에 예수님이 이 배에 타서 설교할 겨를이 없었을 것입니다. 지나가다가 예수님께서 무리를 모아 설교하시는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며, '어, 저분 내가 아는 분인데, 우리 집에 오셔서 장모님의 열병을 고쳐주신 분인데, 저분도 참 바쁘게 사시는구나' 하고 그냥 지나갔을 것입니다. 자기 배에 만선의 복이 충만했다면, 예수님이 그 배에 올라타실 일이 없습니다. 내 배에 물고기가 가득한데, 예수님이 어떻게 올라타시겠습니까? 올라타실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만선의 기쁨은커녕 배가 텅 비어 있습니다. 그 빈 배에 예수님이 타셨습니다. 이것이 축복입니까? 이것이 불행하고 짜증낼 일입니까? 시간이 한참 지나서 베드로가 자기 인생을 정리할 때쯤 되어 삶을 회고할 때, 내 인생의 새로운 반전의 계기는 내 배가 텅 비었던 그날 새벽, 그 아침에 예수께서 내 배에 타신 그날부터 시작되었다고 고백하지 않았겠습니까? 만약 그날 내 배가 만선의 기쁨으로 충만했다면, 나는 예수님을 만날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배에 올라오실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거기서 돈 몇 푼 더 챙겼겠지만, 예수님이 내 배에 타시는 은혜만큼은 경험하고 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결론
우리 인생에도 텅 빈 배와 같은 시간이 왜 없겠습니까? 길고 긴 삶을 살다 보면 그런 순간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좌절하고 낙심하면 내 배는 그대로 침몰하고 맙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내 인생에 허락도 맡지 않고 올라타십니다. 예배드리자고 말씀하시고, 함께 신앙생활하자고 말씀하시고, 예수님께서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실 때, 그때 손 내미시는 예수님의 손을 붙잡아야 합니다.
모세가 애굽 왕자로 살 때 그의 인생에 하나님이 들어올 여지가 없었습니다. 파라오의 왕위 계승 서열에 있던 사람으로서 분주하고 바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살인자가 되고 도망자가 되어 광야로 달아났을 때, 그의 마음은 텅 빈 배가 되었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 하나님이 들어오셨습니다. 요셉이 아버지 집에서 채색 옷을 입고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살 때, 그의 마음은 아버지의 사랑으로 충분했습니다. 하나님이 들어오실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노예로 팔려가고, 억울하게 모함받아 죄수가 되었을 때, 그의 마음은 텅 빈 배와 같아졌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 하나님이 들어오신 것입니다.
빈 배라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아무것도 없다고 절망하지 마십시오. 그 자리를 세상 사람들처럼 술로 채우거나 사람으로 채우지 마십시오. 내 인생의 텅 빈 배, 그 자리는 예수님의 자리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빈 배에 올라타시면, 그때부터 우리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새로운 인생이 될 줄로 믿습니다. 그 은혜가 우리 인생에 가득 차고 넘치기를 바랍니다.
기도
은혜가 풍성하신 아버지 하나님, 뿌린 대로 거둔다고 하셨습니다. 좋은 씨를 많이 뿌리게 하옵소서. 예수님도 열심히 전도하시고 복음을 전하셨고, 그 열매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주여,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같이 사모하는 자리에 서게 하여 주옵소서. 일주일에 한 번 말씀 듣는 것으로 그치지 않도록 도우시고, 매일 말씀을 읽어도 영적인 갈망이 우리에게 가득 차고 넘치는 인생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여, 내 인생에 일어나는 일에 우연이란 없다 하셨습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게 하시고, 그 안에서 의미를 찾게 하여 주옵소서. 텅 빈 배와 같은 내 인생이 절망하고 좌절하여 침몰하지 않도록 도우시고, 이때가 예수님을 모실 수 있는 기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께서 내 인생의 배에 타시고 나에게 손을 내미실 때, 그 손 붙잡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