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에 의지하여
본문: 누가복음 5:1-11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집현전 학자였던 강희안(姜希顔)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세종대왕의 처조카이기도 했던 이분은 시와 글씨, 그림에 두루 뛰어나 삼절(三絶)이라 불릴 만큼 탁월한 인물이었지만, 자신의 재능을 결코 자랑하거나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왕실과의 인연을 등에 업고 세력을 형성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저 학자로서의 본분에 충실하며 연구와 학문에 최선을 다할 뿐이었습니다. 이분에게는 한 가지 취미가 있었으니, 꽃과 나무를 가꾸는 일이었습니다. 그가 저술한 여러 책 가운데 『양화소록(養花小錄)』이라는 원예서가 있는데, 이 책에는 16가지 식물의 생태와 재배법, 그리고 각 식물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담겨 있습니다.
그 첫 번째로 다룬 식물이 늙은 소나무입니다. 여기에 한 가지 일화가 실려 있습니다. 어느 하인이 주인인 선비에게 칭찬을 받고자 늙은 소나무의 등걸에 붙은 마른 가지를 베어내고, 거친 껍질까지 벗겨낸 뒤 그것을 손에 들고 주인 앞을 어슬렁거렸습니다. 주인이 "네 손에 든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하인은 자랑스럽게 대답했습니다. "옛것을 잘라내고 새것을 준비하는 중입니다." 그러자 주인이 말했습니다. "네가 하는 짓이 마치 네모난 지팡이를 깎아 둥글게 만드는 것과 같고, 구리 화병 골동품을 깨끗이 닦아 하얗게 만드는 것과 같구나."
이것은 칭찬이 아니라 준엄한 책망이었습니다. 누군가가 자기 손에 맞게 네모나게 만든 지팡이를 물어보지도 않고 둥글게 깎아버렸다면, 그것은 자기 분수를 넘어서는 행위입니다. 구리 화병 골동품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물건인데, 이를 깨끗이 닦아 하얗게 만들어 버렸다면 골동품의 진가를 훼손하는 일입니다. 선비가 말하고자 한 것은 분명했습니다. 늙은 소나무는 손대지 않고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등걸에 붙은 마른 가지가 눈에 거슬릴 수 있고, 거친 껍질이 아름다워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소나무가 함께 해온 세월이 있으니, 그대로 두는 것이 훨씬 귀하고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이 책에는 또 다른 이야기도 실려 있습니다. 한 선비가 벼슬을 받아 신하가 되고, 그 신하가 성장하여 재상이 되면 많은 재상이 으레 하는 일이 한 가지 있으니, 바로 법을 바꾸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옛법을 고치고 새 법을 만들며, 그것이 지나치면 오전에 만든 법을 오후에 없애려 합니다. 이런 태도가 나라를 위태롭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금과옥조로 붙잡아야 할 말씀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오랫동안 금과옥조로 붙잡고 살아가야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다른 것은 다 없어도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금과옥조로 붙잡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역사는 헤아릴 수 없이 깊습니다. 소나무의 나뭇가지보다, 늙은 소나무의 껍데기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오래되었습니다. 구약의 말씀은 적어도 3천 년에서 4천 년 전의 말씀이고, 신약의 예수님 이야기도 2천 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21세기를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나와 맞지 않는다고 해서, 그 말씀을 함부로 자기에게 맞게 재단하고 잘라내고 바꾸어 버린다면, 그를 어찌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은 변함이 없습니다.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그리고 예수님께서 다시 재림하실 그 날까지, 영원한 진리의 말씀은 우리가 그대로 붙잡고 말씀대로 살아야 삶이 위태롭지 않습니다. 말씀을 함부로 바꾸고 꺾어버리며, 자기 마음의 입맛에 맞도록 변경시킨다면, 그때 우리의 인생이 위태로워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베드로의 위대한 고백이 등장합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이 고백의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지 모릅니다. 이 말씀을 통해 베드로의 고백이 지닌 무게를 살펴보고,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러한 고백을 하며 살 수 있는지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방방곡곡을 다니시며 복음의 씨를 뿌리셨습니다. 그 열매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무리가 몰려들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밀려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이자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몰려든 무리에게 설교하시기 위해 두 척의 배 가운데 시몬의 배에 오르셨습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계획하시고 준비하신 섭리였으며, 예수님의 필연에 속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배에서 충분히 설교를 마치셨습니다. 베드로는 만선의 기쁨으로 충만하지는 않았지만, 물고기 대신 예수님을 배에 모신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설교를 마치신 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눅 5:4)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려고 베드로의 배에 올라타신 것입니다. 여기서 '깊은 데로'라는 표현의 원어를 살펴보면 '토 바토스'(τὸ βάθος)라는 말이 나옵니다. '토'(εἰς τό)는 방향을 나타내는 전치사로 '어디어디로'라는 뜻이고, '바토스'(βάθος)는 '심연'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표현에는 이중적인 뜻이 담겨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보면 게네사렛 호수, 곧 갈릴리 호수의 가장 깊은 곳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물리적인 장소만을 지칭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고전 2:10)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신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 '깊은 것'에 '바토스'라는 단어가 쓰였습니다. 하나님의 깊고도 깊은 영적 세계를 '바토스'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것은, 네가 아직 가보지 못한 저 깊은 세계로 나아가면 그곳에서 하나님의 깊고도 깊은 영적 세계를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경험과 상황을 넘어서는 순종
이것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명령이기도 한데, 베드로의 입장에서 이 말씀에 순종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자신의 경험 때문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호숫가에서 나고 자란 노련한 어부였습니다. 그곳에서 태어나 성장했고, 성인이 되어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갈릴리 호수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시사철 물고기가 어디에서 노는지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아침, 점심, 저녁, 깊은 밤, 새벽녘에 물고기가 어디에 있는지 환히 꿰뚫고 있었습니다. 물고기의 포인트를 누구보다 잘 아는 전문가가 바로 베드로였습니다. 그런데 낯선 분이 와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말합니다. 이분이 이 호수를 아는지 모르는지 검증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베드로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지금 눈앞에서 말씀하시는 이분은 어업 전문가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경험의 범주에서 생각해 보면, 이 명령을 수용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둘째는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미 그물을 다 씻어놓았습니다. 예수님의 설교가 마칠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이제 그물을 개켜두고 배를 정리한 뒤 집에 들어가 쉬어야 합니다. 이미 시간이 한참 지나버렸습니다. 지금 집에 가서 쉬지 않으면 저녁에 다시 나와 물고기를 잡을 수 없습니다. 삶의 리듬이 완전히 뒤엉켜 버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정리해 놓은 마당에, 다시 그물을 싣고 배를 띄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면 똑같은 일을 두 번 반복해야 합니다. 상황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순간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경험에 비추어 볼 때 할 수 없는 일, 지금 내 상황에서는 순종하기 어려운 일을 주님께서 명령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한 가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 명령을 하시는 분이 주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망하게 하시려고 이런 명령을 하시겠습니까? 우리를 가장 선한 길, 가장 아름다운 길로 인도하기를 원하시는 주님,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나를 위해 이 말씀을 하신다는 확고한 믿음과 신뢰가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순종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갇혀 있는 자리가 어디입니까? 많은 사람이 자신의 경험의 범주에 갇혀 있습니다. 자신의 상황의 틀 안에 갇혀 있습니다. 내 경험상 안 되는 것이라 생각하고, 내 상황이 이러하니 못 하는 것이라 여깁니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새로움을 맛볼 수 없습니다. 내 경험상 안 되고, 상황도 안 되는데 어떻게 새로운 세계를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그 안에서 어떻게 성장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애 3:22-23)
아침마다 새로우려면 경험의 범주를 깨고, 상식을 넘어서고, 내 상황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그래야 아침마다 새로운 일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도전하지 않고 어떻게 새로움을 경험하겠습니까? 새로운 일에 직면하지 않고, 지금까지의 경험과 상황을 뛰어넘지 않고 어떻게 새로움을 맛볼 수 있겠습니까?
올해 연초, 교회에서 '하루 한 장 말씀 묵상 — 사무엘상하' 책이 나왔습니다. 그것을 준비하신 분도 계시고, '이게 뭐야?' 하며 흘려보낸 분도 계셨을 것입니다. 그때부터 꾸준히 하신 분들은 사무엘상 31장과 사무엘하 24장을 합하여 55장의 묵상을 1월 첫 주부터 시작했으면 2월 말쯤 마칠 수 있습니다. 이번 주에는 '출애굽기와 함께하는 사순절 40일 말씀 묵상' 책이 나왔습니다. 2월 18일부터 사순절이 시작되어 4월 4일에 끝납니다. 그 무렵 민수기 말씀 묵상 책이 3월 초에 이어질 것이고, 그때부터 36장을 시작하면 5월 중순쯤 마치게 됩니다. 그러면 또 다른 책이 이어질 것입니다.
교회에서 이것을 제공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소수의 성도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성도가 일주일 동안 성경을 거의 펴보지 않습니다. 일주일에 딱 한 번, 주일에 교회에 와서, 그것도 성경을 직접 펴보지 않고 큰 화면으로 성경을 읽는 것이 전부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상황이고, 경험의 범주입니다. 어릴 때부터 신앙생활을 하면서 일주일에 한 번 주일에만 성경을 읽었고, 하루 한 장 성경을 읽고 30분 묵상하는 것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상황의 틀에 매여 있으면, 하나님의 깊은 세계, '바토스'의 세계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아침마다 새롭고 또 새로울 수 없습니다. 매일 하나님 말씀의 깊은 세계에 도전하지 않으면, 그 깊은 세계로 노를 저어 나아가지 않으면, 일주일에 한 번 주일 예배 때만 성경을 읽고 말씀을 묵상하는 생활로는 하나님 말씀의 더 깊은 영적 세계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경험의 범주입니다. 그 틀에 계속 매여 사시겠습니까?
교회에서 한 번도 봉사를 해 보지 않은 분도 있습니다. 한번 해 보십시오. 교회학교의 어린 생명들을 품에 안고 가르쳐 보십시오. 얼마나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는지 모릅니다. 그 귀한 어린 생명들을 껴안고, 그들을 위해 말씀을 준비하고, 그 이름들을 불러가며 기도하는 세계, 새롭고 신비한 세계가 열립니다. 경험의 범주 안에서, 상황의 틀 안에서 못 한다, 안 한다며 주저하던 삶에서 더 깊은 세계로 나아가기만 하면, 하나님의 깊은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침마다 새롭고 또 새롭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경험의 범주를 깨뜨리고 나아가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놀라운 세계를 열어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의 경험도, 너의 상황도 내가 다 안다. 그러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보라. 이것이 예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주인의 자리를 내어드리는 결단
이 도전 앞에서 베드로는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눅 5:5)
베드로는 어젯밤의 실패를 먼저 말하고 있습니다. 밤이 새도록 수고했다고 했습니다. 이 수고 속에 깃든 베드로의 땀과 눈물을 기억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그물을 대충 던졌겠습니까? 그는 가장이었습니다. 가정이 있었습니다. 물고기를 잡아가야 그 가정이 먹고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혼신의 힘을 다해 그물을 던졌습니다. 깊은 곳에 가서도 던져보고, 얕은 곳에 가서도 던져보고, 여기서도 저기서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잡은 것이 없었습니다. 실패였습니다.
실패는 절망을 부릅니다. 절망은 영혼에 좌절을 각인시킵니다. 절망과 좌절에 각인된 경험은 영혼 깊이 새겨지기 때문에, 또다시 도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 지점을 지나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이라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왜 실패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어젯밤에 밤이 새도록 수고하며 그물을 던졌는데, 왜 실패했습니까? 어젯밤 그 배의 주인이 베드로 자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아니라, 어젯밤 그물을 던졌던 그 그물의 주인도 베드로 자신이었고, 그 배의 주인도 베드로였습니다. 물론 이전에도 물고기를 잡은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도 배의 주인은 베드로였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물고기를 많이 잡아 만선의 기쁨을 누리면 '내가 잘나서 그런 것'이 됩니다. 자기 경험에 비추어 '내가 갈릴리 호수를 가장 잘 안다, 내가 가장 탁월하고 특별하다, 나만큼의 전문가가 없다'며 자기에게 영광을 돌렸을 것입니다. 반대로 실패하면 그 실패가 좌절이 되고, 좌절이 절망이 됩니다. 모든 책임을 자기가 지는 구조입니다.
잘하면 내가 영광받고, 안 되면 내가 실패의 모든 책임을 짊어지고 가는 것, 이것이 세상 사람들의 삶이 아닙니까? 배의 주인이 나이니, 잘되어 내가 영광받거나 실패하여 내가 책임지거나, 세상의 구조가 그러합니다.
그런데 신앙생활도 이런 구조로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주인이 되어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기도생활, 말씀생활, 봉사생활, 예배생활에서 하나님이 배의 주인이 되지 않고, 자기 스스로가 주인이 되어 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해도 내가 주인이 되어 기도하고, 예배를 드려도 내가 주인이 되어 예배를 드립니다.
가인과 아벨의 예배를 떠올려 봅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예배는 받으시고 가인의 예배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가인의 안색이 변했습니다. 동생 아벨을 살해했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책망하시고 제재를 가하셨지만, 가인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에덴 동편 놋 땅으로 떠나 거기서 성을 쌓고 살았습니다. 하나님과 완전히 단절하고 등을 돌려 버렸습니다. 아벨도 예배를 드렸고 가인도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가인의 예배에는 하나님이 주인이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주인이었습니다. 예배는 드렸지만 자기가 주인이니, 하나님이 그 예배를 받지 않으실 때 겸허하게 엎드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왜 내 예배를 받지 않느냐며 하나님께 따져 물었습니다.
봉사를 열심히 하면서도 자기가 주인이 되어 봉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아 실현에 다름 아닙니다. 교회가 자기의 무대와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열심히 기도하지만, 기도 응답이 되지 않으면 하나님을 가차 없이 버리고 떠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역시 자기가 주인이 되어 신앙생활하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똑같이 신앙생활한다고 해서 다 같은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어제도 그물을 던졌고 오늘도 그물을 던집니다. 그런데 오늘 던지는 그물과 어제 던진 그물이 다른 이유는 명확합니다. 내가 주인이 되어 그물을 던지느냐, 주님이 주인이 되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그물을 던지느냐, 이것이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주의 일을 섬기는데, 내가 주인이 되어 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인이 되시고, 내 인생의 배의 선장이 되셔야 우리의 인생이 평안합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의 배에 오르시고 하신 말씀,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것은, '이제 내가 너의 배의 주인이 되고 싶다'는 말씀입니다. 너, 주인의 자리에서 내려올 수 있겠느냐? 내가 너의 배에 올라타고 싶다. 내가 주인이 되고 싶다. 결단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이런 시기가 반드시 찾아옵니다. 내가 주인이 될 것인가, 주님께 주인의 자리를 내어드릴 것인가. 모른 척하고 눈 딱 감고 "예수님, 못하겠습니다. 제가 주인이 되어야 편안합니다"라고 말하면, 또 한 번 기회가 흘러가는 것입니다. 이런 기회가 찾아왔을 때 붙잡아야 합니다. "주님, 주인이 되어주옵소서. 내 인생의 배에 올라타셔서 내 인생을 주도하시고 이끌어 주옵소서." 그렇게 해야 우리 인생이 평안해집니다. 실패의 책임을 내가 지지 않아도 됩니다. 만선의 영광도 하나님께 올려드릴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어떤 선택을 했습니까?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눅 5:5)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이 고백은 이런 뜻입니다. "주님, 제가 이제 주인의 자리에서 내려옵니다. 저의 경험을 뒤로하고, 나의 상황을 뒤로하고, 불편하고 힘들고 피곤하지만 다시 그물을 들고 저 깊은 바다로 나아가겠습니다. 주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주께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 하시니, 그 말씀을 따라 가서 그물을 던지겠습니다."
이때부터 베드로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자기가 주인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인생의 주인이 되시니 그의 인생이 평안해졌습니다.
우리는 사울도 알고 바울도 압니다. 사울은 '큰 자'요, 바울은 '작은 자'입니다. 사울 시절에 그의 인생은 어떠했습니까?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학했습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으며,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고, 베냐민 지파 출신이었습니다. 유대인의 학문에 능통했고 외국어에도 뛰어났습니다. 그러나 사울 시절 그의 인생에는 열매가 없었습니다. 살인자였습니다. 동족을 잡아다가 감옥에 넘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슬슬 피해 다녔습니다. 십자가의 훼방자요, 교회를 박해하는 자였습니다. 열매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 시절, 그의 인생을 대표하는 결정적인 고백이 있습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 20:22-24)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에 간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삶의 모토였습니다. 성령에 매인 삶. 내 인생의 배의 주인은 성령이시다. 내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그리스도이시다. 이 고백을 바울이 하고 있습니다.
이 고백으로 살았던 그의 인생에는 어떤 열매가 맺혔습니까? 신약성경 27권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13권을 그가 기록했습니다. 1차, 2차, 3차 전도여행과 로마에 이르기까지, 그가 가는 곳마다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수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예수께로 돌아왔으며, 세례받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그가 가는 곳마다 귀신이 떠나고, 병든 자가 일어나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이런 인생을 살아보고 싶지 않습니까?
내가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인생에서는 이런 열매가 나타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쳐 봐야 인간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에 매여 살아가면, 나라는 인생에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면, 말할 수 없는 기쁨과 말할 수 없는 영광으로 주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만선으로 채워주십니다. 그런 인생을 살고 싶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이 그물을 던집니다. 베드로처럼 밤이 새도록 수고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자신의 경험으로 그물을 던집니다. 물고기가 걸려 올라올 때도 있고, 걸리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걸려 올라오면 자기 공으로 돌리고, 걸리지 않으면 자괴감에 빠집니다. 내가 영광을 받거나, 내가 실패하거나. 계속해서 그물에 아무것도 걸려오지 않으면 파산합니다. 결국 자기가 책임진다고 생각하며 막다른 길에서 잘못된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자기 인생을 책임지는 것이 아닙니다. 비극적인 결말일 뿐입니다.
자신의 기분에 따라 그물을 던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기분이 좋으면 신나게 던지고, 기분이 나쁘면 던지지 않습니다. 그런 분과 함께하는 가족은 피곤하고 힘이 듭니다. 항상 그 사람의 눈치를 봐야 하고, 비위를 맞춰야 합니다. 함께 살면서 겪는 고단함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지속성이 없습니다. 자신의 기분에 따라 그물을 던지는 사람, 경험에 따라 그물을 던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유행에 따라 그물을 던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유행에 따라 그물을 던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기에 물고기가 있다 하면 여기로 가서 그물을 던지고, 저기에 있다 하면 저기로 가서 그물을 던집니다. 교회는 유행을 따르지 않을 것 같습니까? 사람들은 교회가 보수적이니 유행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교회만큼 유행을 따르는 집단도 없습니다. 세속화된 교회가 특히 그러합니다. 총동원 전도집회, 열린 예배, 치유 집회, 소그룹, 셀(cell) 등등, 가정사역까지 한국 교회에서 한때 휘몰아치며 유행이 되었던 것들입니다. 옆 교회가 그것으로 부흥했다 하니, 이웃 교회가 숫자가 늘었다 하니, 너도나도 그 유행을 따라 덮어놓고 뛰어들었습니다. 유행을 따라 그물을 던져 물고기가 잡히면, 그 영광은 누구에게 돌아갑니까? 말씀에 의지해서 그물을 내린 것이 아니라 유행에 의지해서 던진 것이니, 그 영광은 사람에게 돌아가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는 말씀에 의지해서 그물을 내리는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도 다르지 않습니다. 내 경험, 내 신념, 나의 상황, 유행을 다 배제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 그 하나면 충분합니다. 그 말씀을 따라 그물을 내리면 놀라운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눅 5:6)
"그렇게 하니"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했다는 것입니까? 말씀에 의지해서 그물을 내렸더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졌습니다. 이 물고기를 누가 잡은 것입니까? 베드로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잡으신 것입니다. 모든 영광은 주님이 받으셔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그 영광을 베드로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그 영광을 베드로가 누리게 해주십니다. 참으로 좋으신 우리 주님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인생의 선장으로 모시고 순종하여,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 하시니 내렸을 뿐인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니 하나님은 도리어 우리를 존귀하게 하시고 영화롭게 해주십니다. 그 물고기를 우리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너도 먹으라고, 가정에 나누어 주라고 하십니다.
결론
이것이 우리 신앙인의 삶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 생활이 이 법칙대로 이루어지면 힘들지 않습니다. 피곤하지 않습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부디 주님을 내 인생의 선장으로 모시기 바랍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 하시면, 내 상식에 어긋나더라도 그 말씀을 따라,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면, 놀라운 역사가 우리의 인생에 함께할 줄 믿습니다.
기도
은혜가 풍성하신 아버지 하나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말씀하시지만, 우리의 경험과 상황이 발목을 잡습니다. 실패와 좌절의 기억도 우리를 붙잡습니다. 그러나 돌아보면, 내가 주인 되었을 때 실패했습니다. 이제 내 인생의 주인을 주님으로 모시고, 주인을 바꾸려 합니다. 주님, 내 배의 선장이 되어주옵소서. 내 인생을 지휘하시고 이끌어 주시옵소서. 깊은 데로 가라 하시는 그 말씀에 의지하여 더 깊은 곳으로 그물을 내리오니,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주님께서 물고기를 채워주시고, 모든 영광을 주님이 받으시며, 그 영광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만선의 기쁨을 주님과 함께 누리는 믿음의 백성으로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