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강 / 사람을 취하리라 (5:1-11)

사람을 취하리라

본문: 누가복음 5:1-11

정약용(丁若鎔)은 1801년 신유박해로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가 마흔이었는데, 강진으로 유배를 떠나게 됩니다. 모든 것이 불확실했습니다. 언제 사약을 받아 죽을지 모르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 앞에서 낙심하거나 인생을 포기하거나 놓아버리지 않았습니다. 강진에 유배를 가자마자 한 주막집 방 한 칸을 빌려 서당을 열었습니다. 사람들은 의아해했습니다. 이 시골 어촌 마을에 글을 배우러 올 사람이 있겠느냐는 시선이었습니다. 그런데 몇 명의 학생들이 글공부를 하러 찾아왔고, 정약용은 온 힘을 다해 그들을 가르쳤습니다. 그중에 한 특별한 학생이 있었으니, 바로 황상(黃裳)이라는 인물이었습니다.

황상은 신분의 제약 때문에 벼슬길에 나갈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저 글공부가 좋아서 글을 배우러 온 사람이었습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글을 읽고 쓰며 공부했습니다. 그 제자에게 정약용은 항상 입버릇처럼 말했습니다.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항상 부지런하거라." 훗날 황상은 스승의 이 가르침을 삼근계(三勤戒)라 정리했습니다. 세 번의 부지런함을 가르치는 계율이라는 뜻입니다. 스승의 가르침대로 황상은 항상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자기 일을 감당하며 글을 읽고 썼습니다. 벼슬에 나가지는 못했지만, 그 당시 어떤 문인과 비교해도 손색없는 훌륭한 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당대 많은 문인들이 황상과 글을 주고받는 것을 소원할 정도로 그는 유명해졌습니다. 훗날 추사 김정희(金正喜)와 글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고, 김정희는 "내가 황상과 글을 함께 나누는 것이 내 인생의 유일한 즐거움이다"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만약 정약용이 신유박해 이후 낙심에 빠져 자신의 인생을 놓아버렸더라면, 술로 세월을 보내며 살았더라면, 황상이라는 위대한 문인은 탄생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한 사람이 바로 서기 때문에, 한 사람이 자신의 자리에 굳건히 서 있기 때문에 또 다른 사람이 그 기둥에 기대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이토록 중요합니다. 내가 믿음의 길을 바로 걸어가면 우리 가정이 바로 서고, 우리 일터가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설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고 믿음의 길을 걸어가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베드로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복을 받은 사건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복은 베드로에게만 머무르지 않고 주변 사람들에게 흘러갑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영적 각성을 경험하게 되고, 그 영적 각성을 받으신 예수님께서 그를 사명의 자리로 인도하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또 이웃 앞에서 어떠해야 하는지를 함께 살피겠습니다.

순종이 열어젖힌 만선의 축복

베드로는 순종하기 어려운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의 경험상, 상황상 이 말씀은 순종하기 대단히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말씀에 순종하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눅 5:5)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렸더니 물고기가 많이 잡혔습니다. 그물이 찢어질 정도였습니다.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어 옆에 있는 친구들을 부릅니다.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눅 5:7)

자기 배로는 이 많은 물고기를 감당할 수 없어 옆 배에 도움을 요청했더니, 두 배가 모두 물고기로 가득 찼습니다. 만선의 복이 베드로에게만 아니라 옆에 있는 배에게까지 흘러넘쳤고, 얼마나 많은 물고기를 잡았는지 두 배가 모두 물에 잠길 지경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대단히 중요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은혜를 받게 되는데, 그 은혜는 자신에게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는 나에게만 머무르지 않고 주변 사람들에게 흘러가며 영향을 끼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법칙입니다.

만약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제 경험상 이런 이른 아침에 저 깊은 곳에는 물고기가 없습니다. 저는 집에 들어가 쉬어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고 순종하지 않았다면 만선의 은혜는 없었을 것입니다. 자기가 은혜를 받지 못하면 주변 사람에게도 은혜를 나누어 줄 것이 없습니다. 내가 은혜를 받지 못해 메말라 있는데, 어떻게 곁에 있는 사람에게 받은 은혜를 나눠 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한 사람에게 국한되지 않습니다. 가정에서 누군가 은혜를 받으면 그 은혜는 온 식구에게 흘러갑니다. 한 사람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내 믿음, 내가 지키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성경은 이러한 이야기를 거듭 들려줍니다. 야곱이 하나님께 은혜를 받고 외삼촌 라반의 집에 가서 살았습니다. 야곱은 도망하던 중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그 받은 은혜를 가지고 라반의 집에서 지냈습니다. 라반은 거짓말쟁이에 사기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야곱이 받은 은혜 때문에 라반의 집에도 은혜를 흘려보내 주셨습니다. 요셉도 하나님께서 형통하게 하셨고, 요셉 때문에 보디발의 집에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라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로 말미암아 내게 복 주신 줄을 내가 깨달았노니" (창 30:27)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쳤더라" (창 39:5)

야곱이 라반의 집을 떠나려 하자 라반이 놀라서 야곱을 붙잡으며 한 말이 무엇이었습니까? "여호와께서 너로 말미암아 내게 복 주신 줄을 내가 안다." 하나님이 너 때문에 우리 집에 복을 주셨으니 제발 좀 더 머물러 달라는 간청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 때문에 보디발의 집에 복을 내리시고, 야곱 때문에 라반의 집에 복을 내리십니다.

이 원리는 한 가정에만 국한된 일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은혜를 받으면 한 나라가 변합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다윗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굳건히 바로 서니 하나님은 이스라엘 전체를 복주셨습니다. 그 당시 모든 백성이 다 하나님 앞에 바른 마음을 가지고 살았겠습니까?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있는 백성도, 신앙이 미지근한 사람도, 차가운 마음으로 사는 사람도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다윗 한 사람이 굳건히 서 있으므로 그 나라, 그 민족을 하나님의 은혜 아래 보호해 주셨습니다.

모세도 그러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선 사람이 되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원망하고 불평해도 하나님은 그 민족을 지켜주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 잘 서야 합니다. 나 한 사람이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인생의 풍파를 겪습니다. 어려운 일을 겪고, 환란도 겪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모함하고 힘들게 할 때도 있습니다. 내 진심은 그게 아닌데 사람들이 나의 진심을 몰라줄 때도 있습니다. 사업의 풍파를 겪을 때도, 가정의 어려움이 찾아올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우리가 분명하게 붙잡아야 할 것은, 내가 흔들리면 다 흔들린다는 사실입니다. 가정의 부모가 흔들리는데 자녀가 흔들리지 않고 버틸 수 있겠습니까? 공동체의 중심을 잡아야 할 리더가 흔들리는데 그 공동체가 흔들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인생은 우리를 흔들어도 우리는 믿음 안에서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붙잡고 계시고,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시다는 확신 위에, 내 인생에 어떤 풍파와 어려움이 있어도 기둥같이 굳건히 서 있을 때, 은혜를 받게 되고 그 은혜는 곁에 있는 사람에게 흘러가게 됩니다.

한국교회 초기 역사에 서상륜(徐相崙)이라는 인물이 자주 등장합니다. 원래 의주에서 홍삼을 가지고 만주에 가서 장사하며 생계를 이어가던 홍삼 장수였습니다. 어느 날 홍삼을 가지고 만주에 갔다가 열병에 걸렸습니다. 장티푸스였습니다. 사람들은 다 죽는 줄 알았습니다. 살아날 방법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당시 예수를 믿지도 않았던 서상륜이 매킨타이어(John MacIntyre)라는 선교사를 만나게 됩니다. 선교사가 보니 곧 죽을 것 같은 환자였습니다. 정성을 다해 간호했습니다. 서상륜이 살아났습니다. 병을 떨쳐낸 것입니다. 기력을 회복한 후 선교사가 복음을 전했고, 서상륜은 그 은혜에 감사하여 세례를 받았습니다.

매킨타이어 선교사가 서상륜을 오랫동안 지켜보니, 이 사람에게 언어적 재능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 당시 중국 심양에서 존 로스(John Ross)라는 선교사가 한글 성경을 번역하고 있었는데, 서상륜을 보내면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매킨타이어는 심양에 있는 존 로스에게 편지를 써서 서상륜을 보냅니다. 서상륜은 그곳에서 존 로스를 도와 초기 한글 성경 번역에 지대한 기여를 합니다.

성경 번역이 끝난 후 성경 몇 권을 얻어 외가가 있는 황해도 소래마을로 돌아왔습니다. 동생 서경조(徐景祚)와 함께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 나라를 전파했습니다. 그 당시 소래마을에는 58가구가 있었는데 아무도 예수를 믿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모두가 불신 마을이었습니다. 그런데 서경조와 서상륜이 열심히 복음을 전한 결과, 몇 년 지나지 않아 58가구 가운데 50가구가 예수 믿는 가정이 되었습니다. 마을 전체가 복음화된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서울에서 사역하고 있던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선교사가 소래마을을 방문하여 크게 감동을 받았습니다. "내가 본국에 편지를 써서 자금을 받아다가 교회를 지어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러자 서상륜이 간곡하게 만류합니다. "안 됩니다. 조선인이 자기 손으로 예배당을 지어야 그 예배당을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돈이 없어서 초가집으로 예배당을 짓더라도 조선인이 예배당을 지어야 그 예배당을 아끼고 사랑하고 그곳에서 기도하지, 외국의 돈으로 기와집 같은 교회를 지어봐야 사랑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손으로 교회를 짓겠습니다. 교회를 위해 기도만 해 주십시오." 언더우드가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동생 서경조는 평양으로 가서 평양 신학교에 입학하여 목사가 되었고, 서상륜은 언더우드를 따라 서울로 올라옵니다. 그곳에서 새문안교회를 개척하는데, 놀라운 사실은 새문안교회 개척 멤버 14명 가운데 13명이 서상륜이 전도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면 일어나는 놀라운 역사를 보지 않습니까? 서상륜 한 사람이 서니 동생이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 집안이 복음화되었습니다. 온 마을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를 도와 또 다른 교회를 세우는 중추적 역할까지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 한 사람이 바로 나 자신입니다. 어떤 흔들리는 상황에서도 내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그 순종이 가져오는 은혜는 나에게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흘러가고 또 흘러가서 주변 사람들을 복되게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말고, 믿음의 길을 올곧게 걸어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복의 부산물이 아닌 복의 근원을 바라보라

만선의 복을 누린 베드로가 예수님께 드린 고백은 뜻밖의 것이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눅 5:8)

이 말은 참으로 어색합니다. 일반적이라면 베드로가 이렇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나를 떠나소서"가 아니라 "나와 함께해 주십시오." 신이 나서 춤이라도 추면서 "제가 잠시 당신을 의심했습니다, 미안합니다. 당신이 어떻게 이 갈릴리 호수의 포인트를 이토록 정확히 아십니까? 나와 함께 1년만이라도 머물러 주시면 부자가 될 것 같습니다. 내일은 또 어디에 가서 그물을 던질까요? 이 물고기 팔아서 수익의 일부를 드리겠습니다. 당신이 여기 머물러 계시면 여기 있는 사람들이 모두 부자가 될 것 같습니다. 제발 다른 데 가지 마시고 여기 계셔 주십시오." 이것이 상식적인 반응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반응을 보십시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붙잡아도 부족할 판에 오히려 떠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나는 죄인이라 고백합니다. 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까?

사람들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은혜를 받고 다양한 형태의 복을 받습니다. 어떤 이는 물질의 복을 받고, 어떤 이는 자녀의 복을 받고, 어떤 이는 건강의 복을 받습니다. 그런데 다양한 복을 받으면 많은 사람들이 그 복에 취해 버립니다. 복만 바라봅니다. 물질만 보고, 사람만 보고, 자식이 잘 되는 것만 봅니다. 그래서 더 많이, 더 풍성하게를 끊임없이 요구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를 보십시오. 베드로는 자기 배에 가득 쌓여 있는 물고기를 보지 않습니다. 그 복을 만들어주신 주님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영적 각성이라고 부릅니다. 영적으로 각성한 사람은 복의 결과물을 보지 않습니다. 기적을 행하신 주님을 바라보고, 그 주님 앞에 자신을 비추어 봅니다. 베드로는 주님 앞에 엎드려 고백합니다. "주여, 나는 당신을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제가 주님을 의심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믿으려 하지 않았고 내 경험에 의지해서 그물을 던졌던 인물입니다. 잘못했습니다. 나를 떠나소서,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믿음의 백성은 복의 근원이신 주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인생을 이끌어 세워주시고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우리 주님을 바라보아야지, 주님이 주신 은혜의 부산물만 바라본다면 그것은 복을 복되게 만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셨는데 그 복에 취해 버린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안타까워하시겠습니까? 복을 받으면 그 복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베풀고 나눌 수 있어야 하며, 무엇보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참된 길입니다. 우리는 욥을 알고 있습니다. 욥의 초창기 고난을 알고 있습니다. 그가 얼마나 어려운 시절을 보냈는지도 잘 압니다. 그런데 욥은 믿음을 잘 지켰습니다. 어리석게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몇 배의 복을 받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처음보다 나중을 더 복되게 하시고, 모든 것을 넘치도록 부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욥은 하나님이 부어주신 복에 취해 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욥 42:5-6)

쌓인 복이 엄청나게 많은데도 욥이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쌓인 복을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 같은 죄인에게, 자신 같은 보잘것없는 인생에게 복을 내려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니, 경외와 두려움이 밀려올 뿐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십시오. 내가 수고하고 노력한 것 이외에도 하나님이 얼마나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지, 이것저것 헤아려 보면 하나님의 은혜 아래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고백이 저절로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의 백성은 복에 취해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부디 내 인생을 이끌어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베드로처럼, 욥처럼 주님을 바라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불같이, 물같이 임하셔도 우리는 복 때문에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 가운데 나를 지켜가는 길은 바로 복의 근원 되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죽은 것을 잡던 손에서 살아있는 생명을 붙드는 손으로

베드로의 이 고백을 받으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눅 5:10)

널리 알려진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취하다"라는 동사의 헬라어 원어는 '조그레오'(ζωγρέω)입니다. 이 동사는 합성어로, '조에'(ζωή)라는 명사와 '아그레오'(ἀγρέω)라는 동사가 합쳐진 것입니다. '조에'는 헬라어로 생명이라는 뜻이고, '아그레오'는 취하다, 붙잡다라는 뜻입니다. 합치면 '생명을 취하다', '생명을 붙잡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이것을 풀어서 해석해 보면, 앞으로 네가 나를 따라다니면 생명을 살리는 자, 생명을 붙잡고 생명을 세우는 자가 되리라는 선언입니다.

지금까지 베드로의 인생은 어떠했습니까? 물고기를 잡아서 연명하는 삶이었습니다. 물고기는 잡히는 순간 죽어 버립니다. 죽은 물고기의 생명 위에서 베드로의 삶이 지탱되어 왔습니다. 죽은 물고기가 자신의 생명을 지탱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그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죽어가는 영혼을 살려서 하나님 앞으로 산 채로 붙잡아 오는 삶으로 전환됩니다.

죽어가는 영혼들이 베드로를 만나면 그 영혼이 소생하고, 살아나고, 새롭게 회복되는 역사를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통해 이루시겠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베드로의 삶이 그렇게 됩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이끌며 한 번 설교하면 사람들이 마음에 찔림을 받고 "우리가 어찌할꼬" 하며 회개하고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삼천 명이 하나님 앞에 돌아왔습니다. 그 삼천 명은 베드로를 만나기 전에는 죽어 있는 영혼들이었습니다. 마치 죽은 물고기처럼. 그러나 베드로를 만나 설교를 듣고 위로받고 힘을 얻으니, 그들의 영혼이 살아나 산 채로 하나님 앞에 사로잡혀 오는 역사가 베드로를 통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제구시 기도 시간에 성전에 올라갈 때,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던 걸인을 만납니다. 베드로가 그에게 선포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행 3:6)

그의 손을 붙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에 힘이 솟았고, 그는 기뻐 뛰며 하나님을 찬송하며 성전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베드로를 만나기 전에 미문에서 구걸하던 이 사람은 죽은 물고기 같은 인생이었습니다. 베드로를 만난 후 그의 인생이 펄쩍펄쩍 뛰는 살아있는 영혼으로 변했습니다. 그의 인생이 의미 있게 바뀌는 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베드로가 쓰임받아 이룬 교회의 모습이 어떠했습니까?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행 2:41-42)

이처럼 생명력 넘치는 교회가 베드로를 통해 탄생했습니다. 우리도 이런 인생을 살고 싶지 않습니까?

결론

누가복음 5장 1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호수에서 잔뼈가 굵은 어부였습니다. 만선의 꿈을 가지고 출항했으나 빈 배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저주가 아니었습니다. 낙심의 밤이 아니라, 오히려 기쁘고 행복한 순간이었습니다. 그 배에 예수님께서 올라타셨기 때문입니다. 배에 오르신 예수님께서 경험과 상황을 넘어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 명하셨고, 베드로는 경험도 상황도 힘들었지만 주님의 말씀에 의지했습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자신의 배만 만선이 된 것이 아니라, 옆에 있는 친구의 배까지 만선의 복이 흘러가는 은혜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또한 베드로는 은혜의 부산물을 보지 않았습니다. 은혜의 주인 되시는 주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결과 그는 죽은 물고기를 잡던 인생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복된 인생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우리도 이런 인생을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우리에게 사명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어떤 어려움과 흔들리는 상황 속에서도 기둥같이 굳건히 서 있기를 원합니다. 내가 내 믿음을 지키고 바로 살아갈 때, 주변 사람들도 함께 복을 받고 믿음 생활을 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옵소서. 주여, 우리도 베드로처럼 영적으로 각성하는 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복의 부산물을 보지 않게 하시고, 복의 근원이신 주님만 바라보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베드로를 죽은 물고기 잡는 인생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인생으로 바꾸어 주신 것처럼, 우리도 이처럼 가치 있는 인생의 주인공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