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강 / 마리아 찬가 (1:46-56)

마리아 찬가 (눅 1:46-56)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농업학자를 한 분 꼽으라면 조지 워싱턴 카버를 제외하고는 논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1864년 미국 미주리주에서 흑인 노예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아버지가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본인과 어머니는 괴한에게 납치를 당합니다. 어머니는 끝내 돌아오지 못했고, 갓난아기인 그만 겨우 돌아왔습니다. 그 아이를 기를 사람이 없어서 농장주였던 백인 부부가 양자로 입양하게 됩니다. 농장주 부부는 참으로 좋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아이를 잘 기르고자 했는데, 아이가 선천적으로 몸이 약했습니다. 그래서 농장 일을 할 수가 없었고, 집안일을 돕고 정원 일을 돕는 정도로만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양부모가 한번은 크리스마스 때 성경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때 받은 성경을 카버는 열심히 읽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읽다가 믿음이 생겼습니다. 믿음이 생기니 이렇게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더 배워야 되겠다, 공부를 해야 되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어느 학교에서도 흑인 아이를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흑인을 받아주는 학교를 찾기가 매우 힘들었습니다. 이곳저곳 떠돌아다녔지만 학교에서는 번번이 거절당했습니다. 하지만 수십 번에 걸친 거절도 그의 배움의 열망을 막을 수가 없었고, 그는 독학으로 공부하고 어깨너머로 공부하며 이 학교 저 학교를 떠돌아다니다가 결국 아이오와 주립대학의 최초의 흑인 학생이 됩니다.

그는 농업을 전공했는데, 농학사로 학부 과정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해서 식물학을 공부했습니다. 워낙 성적이 뛰어나서 학교에서는 교수로 계속 키워보려고 했는데, 그는 교수직 제안을 거절합니다. 그리고 작은 실험실을 마련했습니다. 그곳에서 열심히 기도하고 연구에 매진합니다. 스스로 그 이름을 붙이기를 '하나님의 작은 실험실'이라고 하고, "하나님께서 커튼을 열어주시지 않으면 나는 무익한 존재입니다"라고 고백하며 열심히 기도하고 연구에 매진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릴 때부터 땅콩을 매우 좋아했습니다. 땅콩에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런 땅콩을 만드셨습니까? 도대체 무엇을 하시려고 이렇게 신비한 음식을 만드셨습니까?"

그리고 그는 땅콩 연구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 결과 땅콩으로 105가지에 이르는 식품을 개발합니다. 200여 가지나 되는 생필품을 만들었습니다. 거기서 연구를 확장해 나갔습니다. 고구마 연구까지 합니다. 고구마로 107가지의 제품을 만들어서 출원하게 됩니다. 그는 작은 실험실에서 이 일을 했지만, 이 일은 기념비적인 업적이 됩니다. 그 당시 미국 남부의 산업은 목화로 단일화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단일화된 목화 산업이 다양한 땅콩과 고구마 등의 산업으로 확대되면서 사람들이 잘 살게 되었습니다. 누구의 손에 사로잡히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성장하고 자라면서 누가 내 옆에 있는지, 어떤 사람과 함께 교제하는지가 아주 중요하지 않습니까?

사람과의 교제가 중요한데, 하나님의 손에 사로잡히면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실 카버는 비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흑인 노예였고, 그도 태어날 때부터 흑인 노예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손에 사로잡히니 그의 인생이 완벽하게 달라졌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 말씀을 보면 역시 비천한 한 여인의 노래가 나옵니다. 마리아는 스스로를 비천한 존재라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하나님의 손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리아를 통해서 크고 놀라운 일을 이루어 가셨습니다. 그 일을 마리아는 하나님께 찬양으로 올려드립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나는 하나님의 손에 사로잡힌 존재인가, 나와 하나님은 어떤 관계 속에 있는지를 살피고 돌아보며 은혜 받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비천한 자를 돌보시는 하나님

마리아는 수태고지를 받은 후에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즉각 행동했습니다. 일어나 빨리 엘리사벳을 만나러 갔습니다. 미적거리지 않았습니다. 행동하는 신앙인이었습니다. 엘리사벳과 마리아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났지만, 이 두 사람은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서로를 알아보게 되어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베푸신 비밀한 일을 말하지 않아도 서로 고백합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이 또 있었습니다.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하나님께 쓰임받는다는 기쁨, 하나님의 통로로 일꾼으로 도구로 쓰임받는다는 기쁨으로 두 사람은 가득한 기쁨을 누립니다. 이제 이 기쁨을 가지고 마리아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48절을 보십시오.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마리아는 스스로를 비천하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자기비하가 아닙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사실 마리아가 비천한 사람 아닙니까? 나라를 잃었습니다. 식민지 백성입니다. 배운 것도 얼마 없고, 가진 것도 없습니다. 아주 평범한 시골 처녀입니다. 약혼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과 결혼해서 그저 소박하게 살고자 하는 꿈을 가진 비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의 고백이 특이하지 않습니까? 주께서 비천한 자를 돌보셨다고 했습니다. 이 '돌보다'라는 말이 에피블레포(ἐπιβλέπω)라는 헬라어를 사용했습니다. 에피(ἐπί)는 '위에서'라는 뜻의 전치사 접두어입니다. 블레포(βλέπω)는 '보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에피블레포는 '위에서 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비천한 자를 위에서 살펴보고 계시다가 나를 택하셨다는 고백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여기서 오해하면 안 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조건 비천한 자를 편들어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공평하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아무래도 그 눈이 존귀한 자에게 쏠리게 되어 있습니다. 옷을 잘 입은 사람, 좋은 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 부자로 사는 사람, 그런 사람의 모습이 사람들 눈에 들어오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존귀한 사람이나 비천한 사람이나, 가진 자나 가지지 못한 자나 똑같이 놓고 하나님께서 에피블레포(ἐπιβλέπω), 높은 곳에서 살펴보고 계십니다.

1-1. 전심으로 향하는 자를 찾으심

하나님께서 왜 살피실까요? 하나님이 왜 높은 곳에서 여러 사람들을 살피고 계시는 것일까요? 역대하 16장 9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여호와의 눈이 온 땅을 두루 감찰한다고 했습니다. 살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눈이 온 땅을 살피는 이유는 전심으로 자기를 향하는 자들을 찾아내고 그들에게 능력을 베푸시려고 찾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복을 주시려고 하나님의 눈은 에피블레포(ἐπιβλέπω) 하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을 찾아서 나의 능력을 베풀어줄까, 어떤 사람이 복을 받을 만한 사람일까, 어떤 사람이 내가 주는 은혜를 받을 만한 사람일까, 하나님은 그렇게 에피블레포, 높은 곳에서 항상 사람을 살피고 계십니다. 그렇게 살피다가 마리아가 하나님의 눈에 띄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마리아에게 하나님의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그의 품에 선물로 주셨습니다. 마리아는 이것을 찬양하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1-2.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심

같은 맥락으로 우리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수가 성 여인을 만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 23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찾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당시는 모두가 다 예배드리는 자들입니다. 성전에 다 나가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이 드물기 때문입니다. 예배당에 나오는 사람은 많습니다. 예배드리러 몸은 오는 사람은 많은데, 정말 그 중심이 영으로 진리로 하나님 앞에 제대로 서 있는 자는 찾기가 매우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기서 찾는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왜 찾으실까요? 능력을 베푸시려고, 진실로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찾으시고, 그 눈에 띄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복에 복을 더하여 주시려고 찾고 또 찾으시는 것입니다. 사실 그렇게 하나님의 눈에 발견된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서 배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여러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기를 원합니다. 사람들이 나의 힘을 알아주기를 원하고, 나의 권세와 능력과 나의 부귀영화를 알아주기를 원합니다. 그냥 평범하게 있으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니까 돈도 열심히 벌고, 권세도 가지고, 좋은 옷도 입고, 좋은 차도 타고, 넓은 집에 살려고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를 향하여 알아주고 박수를 쳐주니까요. 그런데 하나님이 과연 그런 사람들을 알아주시겠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 만물을 지으시고 다 통치하시고 가지고 계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뭐가 아쉬워서 우리가 가진 물질 따위에 관심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뭐가 아쉬워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직위나 권력 따위에 눈길을 두고 관심을 두시겠습니까? 하나님이 관심을 두고 찾는 것은 전심입니다. 그 순전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오는 자, 영과 진리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자, 그런 자들이 귀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런 분들을 찾고 계십니다.

마리아는 이것이 너무 감격스러웠습니다. 자기가 봐도 자기는 정말 평범한 사람입니다. 보잘것없고 비천한 사람입니다. 저기 나사렛 시골 마을에서 살고 있는 한 시골 처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의 이 순전한 마음을 어떻게 아셨을까? 나는 다른 것은 몰라도 하나님을 순전하게 사랑하는 것만은 자신 있는데, 하나님 그거 어떻게 아셨을까? 하나님의 눈이 나를 에피블레포(ἐπιβλέπω), 돌보시고 살펴보시다가 나를 찾아오시고 나에게 당신의 가장 귀한 독생자를 선물로 주셨다. 이 찬양을 마리아가 올려드리고 있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이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위로가 됩니까? 우리도 내세울 것이 별로 없습니다. 가진 것도 없고, 자랑할 것도 별로 없고, 지극히 평범한 분들 아닙니까? 평범하고 평범하다 못해서 모자라고 연약하고 부족한데, 그런데 우리가 남들보다 잘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깨끗한 마음, 전심입니다. 그 전심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능력으로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복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부디 하나님 앞에 우리의 전심과 마음을 보여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

51절에서 53절을 보십시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도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마리아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은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이시다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 이것은 마리아가 고백하는 하나님이기도 하지만, 마리아가 잉태하고 있는 태중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어 가야 할 사명이기도 합니다.

구약에서 특별히 이사야서에서 정의와 공의는 굉장히 중요한 개념입니다. 이사야 9장 7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으로 보존된다고 했습니까? 정의와 공의로 보존됩니다. 여호와의 열심이 이것을 이룬다고 하셨습니다. 정의는 미쉬파트(מִשְׁפָּט), 공의는 체다카(צְדָקָה)라는 말입니다. 이 정의는 변함없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율법, 진리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공의는 이 변함없는 진리의 말씀인 율법을 우리가 이루어 나가야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2-1. 정의와 공의의 의미

쉽게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하나님의 율법이고 진리의 말씀 아닙니까? 사랑의 말씀, 그것은 변함없는 타협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서로 사랑하라. 그런데 이 말씀을 정의라고 한다면, 이 말씀을 이루는 것은 공의에 해당합니다. 누가 이루어야 됩니까? 우리가 이루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내가 붙들고 사랑해야지라고 말씀을 가지고 살아보려고 하는데, 그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내 물질을 다 털어서 주는 것이 사랑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는 그렇게 하면 그것이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어떤 사람에게는 물질이 아니라 시간을 주는 것이 사랑일 수가 있습니다. 옆에 그냥 앉아있어 주는 것입니다. 같이 시간을 보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서로 사랑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따뜻한 한 끼 식사를 나누는 것이 사랑일 수도 있습니다. 정의는 변함없는 진리의 말씀이지만, 공의는 다양한 형태로 바뀌어질 수 있고 적용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인 정의를 공의로 이루어내려면 우리에게 지혜가 필요합니다.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지혜와 분별력을 가지고 기도해야 됩니다. "하나님, 이 말씀을 제가 어떻게 행할까요? 나는 하나님의 정의의 말씀을 이 세상에 공의로 이루어가는 사람인데, 하나님 어떻게 해야 이 정의의 말씀을 공의로 행할 수 있을까요?"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 아닙니까?

2-2. 안식일 논쟁의 교훈

그런데 예수님 시절 종교 지도자들, 배운 사람들은 정의의 말씀을 공의로 바꾸어 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삼 년의 공생애 삶을 사시면서 가장 많이 투쟁한 것이 안식일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셔서 한쪽 손 마른 자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큰 곤욕을 치릅니다. 안식일에 일했다고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베데스다 연못가에 가셔서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십니다. 그 병자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했습니다. 병자가 자기 자리를 챙겨서 걸어가야 됩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일 시켰다고 책망했습니다. 안식일에 왜 일을 시키느냐고, 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그들에게 부과하고 시키느냐고 예수님을 책잡았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말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이 말씀을 가지고 자신의 삶으로 공의로, 체다카(צְדָקָה)로 살아내지 못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이 말씀을 가지고 안식일에 죽어가는 영혼과 생명을 살리는 삶을 사셨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정의를 공의로 이루어가고 바꾸어내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말씀을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이 공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을 적용하고 그 말씀을 사람들에게 이루어 갈 수 있도록 기도하고 분별력을 가지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는 공의이고, 그것이 우리에게는 최적화가 되어야 됩니다.

마리아가 고백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공의와 정의를 이루신 것, 내가 잉태하고 있는 이 뱃속에 있는 그리스도가 하나님께서 이루신 정의와 공의를 이루어 가실 것이라고요. 그러면 오늘 이 자리에서 예배 드리는 우리 주의 백성들, 우리도 하나님의 정의를 공의로 이루어내고 바꾸어내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붙들고 사시되 그 말씀을 적용할 때는 지혜롭게 하셔야 됩니다. 분별력 있게 하시고, 기도하며 하셔서 그 말씀이 우리 삶에서 기쁨이 되고, 주변 사람들에게 영광이 되고 은혜가 되도록 만들어 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긍휼과 기억의 하나님

54절과 55절을 보십시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마리아가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어떤 분이라고 말합니까?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누구를 기억하십니까? 그 종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시고 그 종 이스라엘을 기억하시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질문을 해봐야 됩니다. 이스라엘은 누구인가? 유대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혈통상 유대인들을 이스라엘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아브라함의 자손들만 이스라엘인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앞에 '그 종'이라는 말이 함께 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3-1. 종으로 기능하는 자

하나님 앞에 종으로 기능하는 자, 그리스도의 종으로 일하는 자, 하나님은 그를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으로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증거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10장 3절과 4절, 데살로니가전서 1장 3절을 보십시오. "하루는 제구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여기 '기억한다'는 말이 사도행전에도 나오고 데살로니가전서에도 나옵니다. 그런데 기억함을 받는 분, 고넬료는 이방인입니다. 로마인입니다. 로마 군대 백부장입니다. 유대인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도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왜 이 사람을 기억하실까요? 그의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이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종 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를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데살로니가인의 교회, 그들은 이방인들의 교회입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하나님이 기억한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믿음, 소망, 사랑의 가치대로 살았습니다. 어쩌면 유대인들보다 훨씬 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고, 그 마음과 뜻을 다해서 하나님 앞에 제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3-2. 종 된 신앙의 필요성

여러분, 오늘 우리가 혈통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나의 직분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내가 어떤 직분을 가지고 살아가느냐, 내 부모님 나의 혈통에 믿음의 조상들이 누구누구가 있느냐, 이것이 절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긍휼하심을 받고 기억되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종 된 인생을 살아야 됩니다.

종은 하나님이 쓰시기에 좋은 사람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좋은 사람이 되어야지, 내가 종 된 의식이 없으면 하나님과 대치하려고 하고, 하나님 말씀에 반대하려고 하고, 하나님 말씀에 저항하려고 하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어떻게 쓰시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은 종 된 자가 아니면 긍휼히 여기지 않습니다. 그를 기억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과 기억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종 된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됩니다.

사도 바울은 신약성경 13권을 기록했습니다. 그의 서신서를 보시면 그는 서신서 가장 앞머리에 "예수 그리스도의 종, 사도인 나 바울은" 항상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인간됨을 자랑한 적이 없습니다. "나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베냐민 지파요, 내 아버지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 부잣집 사람으로 나는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운 능력의 사람입니다."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과거를 만물의 찌꺼기같이 여겼습니다.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그가 자랑한 것은 오직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가 종이라고 말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긍휼함을 입으려고, 하나님께 기억되려고입니다. 인간은 죄성이 있습니다. 죄 짓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실수가 많습니다. 주인 되신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지 않으면, 주인 되신 하나님께서 나를 긍휼히 여기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런 연약하고 부족한 존재로 살면서 우리가 종 된 신앙을 가져야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부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내 것으로 만들어 가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종 된 신앙을 꼭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쓰시기에 좋은 종, 하나님의 손에 꼭 붙잡힌 종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마리아 찬가를 통해서 우리는 여러 가지를 깨닫습니다. 우리는 비천하지만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하면 에피블레포(ἐπιβλέπω), 감찰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피고 계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정의의 말씀을 우리의 삶의 공의로 만들어 가시고 이루어 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기억이 되기 위하여 우리는 종 된 삶을 성실하게 살아가며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사실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