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한이 차서 (누가복음 1:57-80)
곤충은 성장하기 위해 자신의 외골격을 벗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곤충의 탈피라고 부릅니다. 곤충이 탈피하기 위해서는 사실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껍질을 벗고 몸이 부드러워지면 외부의 포식자들에게 쉽게 발견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몸이 부드러워진 상태에서 숨어 지내며 몸이 딱딱해질 때까지 견뎌야만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이 과정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발견되어 잡혀 먹힐 수도 있고,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탈피가 성공적으로 끝나고 나면 곤충은 한층 더 성장합니다. 몸집이 커집니다. 천적으로부터도 조금 더 자유롭습니다. 번식 가능성도 높아집니다. 행동 반경도 넓어집니다. 그래서 생존의 기간도 훨씬 더 길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곤충은 생명을 걸고 목숨을 다해 탈피를 위해 노력하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도 역시 그렇지 않습니까? 그냥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성장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더 나은 사람이 될 수가 없습니다. 껍질을 깨는 과정, 성장하는 과정은 때로는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성장하고 발전해야 하나님도 기뻐하시고 우리도 보람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신앙 성장의 여정은 십자가를 지고 함께 그 길을 걸어가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 자기 부인을 해야 하는데, 여기서 자기 부인이라 함은 자기가 가지고 있던 평소의 경험과 지식과 상식을 뛰어넘는 것을 의미합니다. 때로는 힘이 들고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이 과정이 지나고 나면 우리는 보람과 기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의 말씀에 보면,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이 영적 탈피의 과정을 훌륭하게 이루어내어 신앙 성장을 이룬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도 영적 성장의 탈피가 반드시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사가랴는 성전에서 말을 못 하게 되었습니다. 그 안에서 엘리사벳은 남편에게 일어난 일을 보고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았습니다. 열 달 동안 우리는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 깊이 묵상하고 침묵하면서 기다리자고 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여섯째 달이 되던 날 마리아가 찾아옵니다. 수태고지를 받은 마리아가 와서 깊고 깊은 교제를 나눕니다. 두 사람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났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로서 하나님의 통로로 쓰임받는다는 데서 두 사람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1. 하나님의 때를 분별하라
이제 마리아가 석 달 동안 함께 있다가 떠나갑니다. 엘리사벳의 출산이 임박했습니다. 이제 아기가 태어납니다. 57절을 보십시오. "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해산할 기한이 찼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기한이 차다'라는 동사의 원형으로 플레토(πλήθω)라는 동사를 사용했습니다. 플레토라는 동사의 뜻은 '하나님께서 부으셔서 충만하게 되었다'라는 뜻입니다. 이 동사를 성경에서 또 어디에 쓰느냐 하면, 성령이 충만하다 할 때 이 동사를 씁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충만하게 부어 주셔서 흘러넘치게 된 상태, 이 충만하다 할 때 플레토라는 동사를 사용합니다. 성령은 내가 부을 수 없는 것 아닙니까? 내가 붓는다고 해서 성령이 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전능하신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부어 주실 때 그때 성령이 가득해서 차고 넘치는 것입니다.
그것처럼 사람들이 볼 때는 엘리사벳의 배가 점점 불러와서 열 달이 되어 이제는 기한이 차서 출산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겠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하나님께서 이 가정에게 주신 은혜가 가득 차고 넘쳐서 이제 충만하게 되어 출산할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은혜의 기한이 이 가정에 가득 차고 충만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보는 것과 하나님의 시각이 전혀 다릅니다. 이 지점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실패하고 실수하고 넘어지는 까닭이 때를 분별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이제 때가 되었다 생각하고 뚜껑을 열어보니 하나도 차 있지 않습니다. 내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내가 덤벼들었는데 사실 가득 차 있지 않습니다. 텅텅 비어 있습니다. 그때는 굉장히 당혹스럽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득 채워서 흘러넘치게 되었는데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분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언제인지, 언제 이때가 가득 찼는지 모르고 그냥 지나가 버립니다. 그것도 당황스럽습니다.
1-1. 내 때와 하나님의 때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요? 요한복음 7장 2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을 보십시오.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이 말은 예수님의 동생들이 우리 주님께 하는 말입니다. 당신이 여기서 이렇게 이 좁은 시골에서 이런 일을 하지 마시고 이제는 예루살렘에 가십시오. 서울에 가서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 가서 능력을 행하시면 사람들이 당신을 알아줄 것 아닙니까?
요한복음 6장에서 오병이어 사건이 있었습니다. 벳새다 들판, 갈릴리 호수 근처에 있는 벳새다 들판에서 수많은 무리들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부르게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지 않았습니까? 이런 위대하고 놀라운 일을 왜 이 시골 구석에서 하시는 겁니까? 이것을 예루살렘에 가서 하시면 당신이 일약 스타가 될 텐데, 그러면 형님이 스타가 되면 우리 동생들도 형님의 덕을 좀 보고 살 것 아닙니까? 이제 때가 찼습니다. 여기서 제발 이러지 마시고 예루살렘으로 가 주십시오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이런 동생들의 말을 듣고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너희 때는 항상 준비되어 있거니와 나는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도래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직까지 플레토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볼 때는 가득 찬 것처럼 보이나 아직 하나님의 때에 뚜껑을 열어보면 하나도 차 있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때는 예수님이 초막절에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유월절에 올라가셔서 유월절 어린 양으로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보는 것과 예수님이 보는 것이 이처럼 다릅니다.
1-2. 시각을 바꾸라
그러면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우리 스스로에게 듭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때를 어떻게 분별할 수 있다는 말인가? 언제가 하나님의 때인가? 내 때는 무엇이고 하나님의 때는 무엇인가? 나는 그토록 하나님의 때를 갈망하는데 하나님의 때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하는 질문입니다.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굉장히 어려운 것 같지만 의외로 어렵지 않습니다. 시각을 바꾸면 됩니다. 하나님의 시각에서 나의 시간을 들여다보시면 됩니다.
자, 우리의 일주일의 시간이 있습니다. 월화수목금토일, 일주일의 시간들. 우리는 항상 자기 시각에서 나의 시간을 봅니다. 그러면 내가 일주일을 사는 이 시간 가운데 가장 소중한 시간이 언제입니까? 내가 쓰는 시간 가운데 절대로 양보할 수 없고 타협할 수 없는 시간이 있습니다. 시간의 우선순위, 선후 좌우가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리스트업이 되고 우리는 그 시간의 순서에 따라서 내가 원하는 중요도에 따라서 움직이지 않습니까? 그것이 우리가 시간을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시각을 한번 바꿔서 하나님께서 내 시간의 월화수목금토일을 보시고, 하나님이 가장 소중하게 여길 만한 시간이 언제인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면 아마 하나님께서는 내가 내 취미 생활을 하는 것, 내 오락을 하는 것, 나의 육체적 쾌락과 내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시간을 쓰는 그 시간을 하나님이 우선순위로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최우선으로 생각하시는 시간은 하나님과 우리 인간이 만나는 영적 교제의 시간일 것입니다. 하루에 가장 중요한 시간을 하나님과 우리가 나누는 시간, 하나님이 그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주일날 하나님 앞에 나와서 친밀한 영적 교제와 예배 드리는 시간,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면서 나의 죄악과 나의 무능과 나의 탐욕을 바라보는 이 시간, 하나님은 그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시각으로 내 시간을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의 때가 보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 시간 가운데 하나님 앞에 드려야 될 시간이 언제인지, 내가 절제해야 될 시간이 언제인지가 분명히 보입니다. 그렇지 않고 항상 자기 기준으로 내 시간을 보면 이 시간 속에서 하나님의 때를 분별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부모 된 입장에서 자식들이 시간 쓰는 것을 우리가 보는 관점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부모가 자녀들 시간 쓰는 것을 보면 다 마음에 드십니까? 화가 나지 않습니까? 기분 나쁘지 않습니까? "너 이런 식으로 시간을 쓰다가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냐?" "너는 나이가 지금 몇 살인데 아직까지도 시간 관리를 이따위로 하느냐?" 부모가 보면 지금 이때 우리 아이가 이렇게 시간을 쓰면 안 되는 것이 뻔히 보입니다. 그런데 그런 잔소리를 듣는 아이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나 좀 내버려 둬라" "나도 나름대로 계획하고 내가 원하는 시간이 있다"고 얘기하지 않습니까? 싸우기 싫어서 갈등하기 싫어서 그냥 두는 것이지, 시간이 한참 더 지나면 분명히 우리 아이들은 후회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면, 우리가 사용하는 시간의 선후 우선순위를 보시면 얼마나 한심하겠습니까?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때를 분별하려면 하나님의 시각으로 우리의 시간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에베소서 5장 15절과 16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세월을 아끼라고 했습니다. 때가 악하다고 했습니다. '세월을 아끼다', 헬라 원문에 보면 '기회를 사라'라는 뜻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기회를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 하나님의 시각으로 나의 시간을 보면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는 시간이 딱 보입니다. 그러면 그 시간을 위해서 나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은 시간을 투자하라는 뜻입니다. 영적 각성의 시간을 위해서, 하나님과 만나는 개인 묵상의 시간을 위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적 교제의 시간을 위해서 쓸데없는 여타의 시간들을 거기에 투자하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기회를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하나님 기뻐하시는 기회를 사야 우리는 시간의 관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영적 탈피의 가장 중요한 시간의 관리입니다.
지금까지 우리 어떻게 사셨습니까? 지금까지 우리는 내가 원하는 시간을 내 주장대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언제입니까? 하나님의 때를 알려 주십시오. 하나님의 때가 언제입니까?"라고 묻는데, 하나님도 답답하고 하나님도 한심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시간의 기준에 매여 있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때를 알겠습니까? 알려 준다고 그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시각을 바꿔야 합니다. 우리 영적 껍질을 깨뜨리고 탈피하고 다시 한번 하나님의 눈으로 우리의 시간을 재정돈하십시오. 다시 우리의 시간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살펴보시면 정리해야 될 것들이 보일 것입니다. 버려야 될 것, 정리해야 될 것, 우선순위를 재정렬해야 될 것들을 살피시고 하나님 기뻐하시는 시간의 관리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말씀으로 돌파하라
이제 사가랴와 엘리사벳 가정의 자녀가 태어났습니다. 율법에 따라서 팔 일 만에 할례받기 위해서 성전에 올라갑니다. 기쁜 일입니다. 이웃들이 매우 기뻐합니다. 친지들이 아이 얼굴 한번 보려고, 이 가정에 일어난 기쁘고 복된 일들을 함께 경험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2-1. 세계관의 충돌
친척들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아이의 이름을 자기들이 마음대로 막 짓습니다. 지어 달라고 말한 것도 아닌데 이 아이의 이름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사가랴라고 했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친족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사실 그 당시 풍습이고 그 당시 문화입니다. 그 당시에는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들의 이름을 짓거나, 할아버지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오거나, 친족들 가운데 잘 나가는 사람, 꽤 괜찮은 사람, 유명한 사람의 이름을 가져다가 지었습니다. 그것이 사회적 관념이고 사회적 통념이었습니다. 그것을 친척들이 얘기합니다.
그런데 지금 사가랴는 말을 못 하지 않습니까? 엘리사벳이 나서서 그것이 안 된다고 말합니다. 60절, 61절을 보십시오. "그 어머니가 대답하여 이르되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 하매 그들이 이르되 네 친족 중에 이 이름으로 이름한 이가 없다 하고" 이 분위기가 어떻습니까? 엘리사벳이 "아니라" 아주 단호하게 얘기했습니다. 이름을 가지고 왔습니다. 천사가 지어준 이름. "아니라 요한이다." 이렇게 얘기하니까 친족들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우리 친족 중에 이렇게 이름한 이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사회 분위기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무려 이천 년 전입니다. 여성들의 발언권이 어땠을까요? 가정에서, 가문에서, 지금 그것도 성전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여성들의 발언권이 높지 않습니다. 사회적 통념과 시대적 분위기와 가문의 질서를 깰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닙니다. 그런데 엘리사벳이 성전에서 단호하게 얘기합니다. "아니라 요한이라." 그러니 친족들도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우리 친족 중에 이런 이름을 가진 자가 없다"는 말은 "어디서 여자가 함부로 입을 놀리느냐"는 말입니다. "너는 가만히 있고 잠잠하라"는 뜻입니다. 지금 충돌하고 있습니다.
2-2. 열리고 풀리는 은혜
그래서 친족들이 말을 못 하고 있는 사가랴에게 손짓 발짓하면서 "너의 뜻은 어떠냐"고 묻습니다. 62절과 63절을 보십시오. "그의 아버지께 몸짓하여 무엇으로 이름을 지으려 하는가 물은즉 그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은 요한이라 쓰매 다 놀랍게 여기더라" 서판을 가져와서 사가랴가 요한이라고 썼습니다. 당연한 것 아닙니까? 요한이라는 이름을 자기가 직접 천사에게 받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요한이라고 사가랴도 썼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64절입니다. "이에 그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입이 열렸습니다. 혀가 풀렸습니다. 열 달 동안 꽉 묶여 있었던 혀가 풀리고 입이 열려서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열리고 풀리고'라는 말을 주목해 봐야 합니다. '열리고', 헬라어 에노이게(ἀνοίγω)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수동태입니다. '풀리고'라는 말도 수동태입니다. 그러면 내가 아무리 입을 열려고 해도, 내가 아무리 혀를 풀려고 해도 열리지 않았고 풀리지 않았는데, 누가 열어 줬단 말입니까? 하나님이 열어 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입이 내 입이 아닙니까? 이 혀가 내 혀가 아닙니까? 내 입이고 내 혀인데 내가 열 달 동안 열 수도 없었고 말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잡아 놓으시고 하나님이 닫아버리시고 하나님이 묶어 놓으시니 내 것이지만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언제 열렸습니까? 두 세계관이 충돌했습니다. 하나는 시대적 통념, 또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 관습과 하나님의 말씀이 충돌합니다. 아들의 이름을 짓는데 그 당시 관습, 여자는 잠잠하고 말하지 말라는 그 당시 관습과 하나님께서 사가랴와 엘리사벳에게 주신 '요한'이라는 그 이름이 충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관이 그 당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통념을 뚫고 깨부순 사건입니다. 거기에 주눅 들지 않았고 거기에 지지 않았습니다. 엘리사벳도 "아니라 요한이라" 당당하게 외쳤습니다. 사가랴도 "그것이 아니라"고 서판에 요한이라고 썼습니다. 그러자 닫혔던 입이 열리고 꼬였던 혀가 풀립니다.
여러분, 이것을 보면 우리 인생에 닫혀 있는 것, 우리 인생에 묶여 있던 것이 열리고 풀리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는지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 시대 가운데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다 보니 불행하게도 어쩔 수 없이 시대적 관습을 쫓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 분위기라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속한 곳에 분위기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따를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분위기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수직적으로 낙하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집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받은 자들입니다. 말씀과 이 세상의 관습과 사람들의 상식이 충돌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상식을 돌파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에게 막힌 것이 열리고 꼬인 것이 풀립니다. 우리 믿음의 백성들은 이런 저돌적인 도전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곤충의 탈피처럼 우리 믿음의 백성들의 껍질을 깨놓는 과정입니다.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엘리사벳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태어나서 지금까지 수십 년 동안 노인이 될 때까지 숨죽이고 살았습니다. 여인으로, 여성으로 집안 어른들 틈바구니 속에서, 집안사람들 속에서 자기 목소리 한 번도 내지 못하고 살았는데 "아니라 요한이라" 이렇게 말하는 것이 과연 쉽겠습니까?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사가랴는 사람 좋은 제사장입니다. 그런데 집안사람들의 요구를 다 뿌리치고 요한이라고 말하는 것, 쉬운 것 같지만 쉽지 않습니다. 이때 우리에게 막혔던 것들이 열립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디에 막혀 있습니까? 내 자식인데 내 마음대로 됩니까? 내 가정인데 내 마음대로 안 됩니다. 내 입인데 내가 함부로 열 수 없고, 혀가 꼬인 것처럼 내가 시작한 사업인데 내 뜻대로 잘 되지 않습니다. 막혀 있습니다. 꼬여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말씀으로 돌파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것을 뚫어내고 이겨내면 하나님이 풀어 주십니다. 풀어 주시는 것은 하나님이 풀어 주셔야 합니다. 열어 주시는 것도 하나님이 열어 주셔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는 말씀을 붙잡고 껍질을 깨고 탈피하고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놀라운 영적 성장이 우리에게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3. 자녀를 하나님 아래에 두라
이제 입이 열린 사가랴가 예언을 합니다. 67절을 보십시오.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하여 이르되" 성령 충만하여 예언을 했습니다. 이제 그 뒤에 나오는 모든 말씀은 사가랴의 입에서 나오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예언 중에 가장 핵심적인 말씀이 76절과 77절에 있습니다.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3-1. 요한의 사명
태어난 이 아기 요한이 앞으로 어떻게 살게 될 것을 사가랴가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보다 앞서 와서 주의 길을 준비할 자로 살게 될 것이라고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을 부모의 관점으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세상 어느 부모가, 그 세상 어떤 아버지 어머니가 내 자식이 남의 길을 준비해 주고, 다른 사람들의 뒤를 봐주고 뒤치다꺼리 하는 자로 평생을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내 자식이, 내가 낳은 금지옥엽, 내 아들이, 그것도 늦게 낳았는데 이 아들이 예수님의 길을 준비해 주고 그가 오실 길을 굳게 하는 주의 길을 준비하는 자로 살게 될 것이라고 이렇게 말할 부모가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이라면 내 자녀가 누군가의 앞길을 준비해 주는 사람으로 그렇게 살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은 그 당시에 선언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살아냅니다. 80절을 보십시오.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빈 들에 내버려 두었습니다. 금지옥엽 귀한 옥동자라면 자기 가정에서 제사장 가문을 이어받을 자로 길렀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대로 주의 길을 준비하라고 그냥 빈 들에 내버려 둡니다. 이것이 정말 귀한 일입니다.
3-2. 믿음의 우선순위
여러분, 세상에 많은 성공한 사람들, 정치, 경제, 모든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걸려 넘어지는 아주 공통적인 부분이 자기 자식 문제입니다. 자기 자식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해서 더 이상 뻗어나가지 못하고 거기서 걸려 넘어지고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까, 여러분? 그런데 그것은 지금 이 시대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과거 성경에도 그랬습니다.
엘리 제사장에게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불량배들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그것을 몰랐겠습니까? 다 압니다. 성전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하기를 밥 먹듯 했습니다. 성도들이 제물을 가지고 나오면 그 예물을 하나님께 드리기 전에 가져와서 고기를 구워 먹는 악한 자들이었습니다. 예배드리지 않는 불량배들이었습니다. 자기 자식이 어떤지 아버지 엘리가 누구보다도 잘 압니다. 그런데 블레셋과의 전쟁에 내보냅니다. 전쟁에서 밀리니까 두 아들이 하나님의 언약궤, 법궤를 가지러 옵니다. 그것을 그냥 내줘 버렸습니다. 뭘 믿고 내줬겠습니까? 도대체 뭘 믿고? 자기 자식들의 됨됨이를 아버지가 가장 잘 아는데 그것을 왜 내어 줍니까? 전쟁에 지고 두 아들 죽고 언약궤 빼앗기고, 그래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 엘리 제사장이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우리 자녀들을 하나님보다 더 높은 데 두면 안 됩니다. 우리 자녀들이 예수님을 섬기는 자가 되도록 그렇게 도와야 합니다. 우리 자녀들이 예수님을 예배하는 자가 되도록, 우리 자녀들이 주의 길을 준비하는 자가 되도록 도와야지, 부모가 자녀들을 떠받드는 나머지 주님보다, 말씀보다, 하나님의 은혜보다 자녀를 떠받들면 그 자식이 뭐가 되겠습니까? 그 껍질을 우리가 깨야 합니다. 그것을 깨지 않으면 우리는 영적 성장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4장 26절을 보십시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혈연과 단절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최고의 우선순위가 되도록 하라는 말입니다. 내 우선순위의 최고의 이 자리, 그 일등의 자리는 하나님이 계시고 그다음 내 혈연들이 그다음, 그다음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정리하지 못하면 우리의 영적 성장, 우리의 영적 탈피는 불가능합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 성장하고 성장하고 또 성장했습니다. 하나님의 때를 알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고, 그 당시 문화와 관습을 과감하게 믿음으로 돌파하고 깨뜨리고, 자식 문제까지 예수님 아래에 두어 주의 길을 준비하도록 한 이들의 믿음을 본받아 우리도 그렇게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영적인 탈피를 원합니다. 항상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서 내 껍데기를 깨지 못해서 그 자리에 머물러 살았던 우리의 연약함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곤충도 성장하기 위해서 목숨을 거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사람으로서 성장을 위해서 깨뜨리고 깨뜨리고 또 깨지 못한 우리의 악함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제 하나님의 시각으로 나의 시간을 보겠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의 가치관이 충돌할 때 말씀으로 살아내겠습니다. 주여, 우리의 막힌 것을 열어 주시옵소서. 이제는 우리의 자녀를 하나님보다 위에 세우지 않겠습니다. 주여, 우리 자녀들이 주의 길을 준비하는 세례 요한처럼 살아가도록 우리가 그렇게 기도하고 양육하겠습니다. 주여, 우리도 성장하는 믿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