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강 / 그 때에 (2:1-7)

그 때에 (눅2:1-7)

말벌의 생태를 연구하는 인도의 유명한 생물학자가 특별한 연구 업적을 남겼습니다. 이분의 관찰에 의하면 한 말벌 집단 개체군을 관찰했는데, 그중에 여왕벌이 될 만한 두 마리 벌이 보였습니다. 한 마리 벌은 강력하고 힘이 있었지만 포악해서 주변 벌들에게 마음을 잘 얻지 못했습니다. 또 한 마리 벌은 부드럽고 섬세하며 소통도 잘했지만, 처음 벌보다는 힘이 좀 약했습니다. 누가 여왕벌이 될까 흥미롭게 지켜봤더니, 그 개체군에서 부드러운 벌이 여왕벌이 되었습니다. 본인이 생각했던 상식과는 맞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적자생존의 세계에서 강한 리더가 있어야 이 개체군이 생존할 텐데, 왜 이 집단은 부드럽고 섬세한 벌을 여왕벌로 선택했을까 하는 의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개체군들도 그럴까 생각해서 또 다른 말벌 집단을 관찰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집단에서는 강한 벌이 여왕벌이 됩니다. 역시 그랬구나 싶었는데, 조금 더 살펴보자 해서 살펴봤더니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강한 벌이 여왕벌이 되었는데 다른 벌들이 일을 하지 않습니다. 태업을 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습니다. 심지어 여왕벌이 알을 낳으려고 하는데 재료도 갖다 주지 않습니다. 이건 전체 개체군의 생존과 관련된 일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벌들이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결국 그 여왕벌은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그 집단을 떠나고 맙니다. 그러자 부드러운 벌이 이제 여왕벌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누가 시키지 않아도 기계처럼 돌아갑니다. 열심히 일하고 알아서 자기 일을 잘해 줍니다. 누가 명령하거나 부탁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공동체가 재빠르게 회복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결국 벌 집단이나 사람 공동체나 이 부분에 있어서는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강한 것이 좋은 것처럼 보입니다. 강한 것이 결국은 이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 강함이 사람들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면, 겸손한 사람, 부드러운 사람, 어쩌면 더 연약해 보이는 사람이 공동체 리더로서 더 적합할지도 모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 말씀은 성경에 나오는 가장 기념비적이고 특별한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강한 군주로 오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 예수님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닙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을 보면 작고 연약한 예수님이 여관이 없어서 말구유에 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탄생의 모습을 통해서 세상의 군주들 이면에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계셨음을, 요셉과 마리아가 강인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갔음을, 또한 예수님의 겸손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함께 살피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요한을 출생했습니다. 그리고 6개월이 지났습니다. 이제는 마리아가 아기를 낳을 차례가 되었습니다. 이제 순탄하게 아기를 낳으면 되는데, 세상에 한번 요동치는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집니다.

본문 1절에서 3절입니다. "그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1. 숨어 계시는 하나님

1-1. 황제를 도구 삼으시는 하나님

가이사 아구스도가 천하에 호적령을 내렸습니다. 이 사람은 우리가 잘 아는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입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얼마나 위대한 업적을 많이 남겼습니까? 이분이 로마 본토뿐만 아니라 로마 지경에 있는 식민지 모든 백성들에게 호적하라고 천하에 호적령을 내립니다. 로마는 통치를 이렇게 합니다. 그들이 본토뿐만 아니라 넓은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식민지 백성들에게 의무를 두 가지 부여했습니다. 하나는 세금 납부의 의무, 두 번째는 징집에 응할 의무를 부여합니다. 그건 당연한 일입니다. 당연히 국민들, 백성들은 세금을 내야 되고, 로마가 또 다른 영토 확보를 위해서 전쟁하러 가면 젊은이들을 차출하면 그 징집에 응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려면 세금을 걷거나 징집을 하려면 가장 기초되는 자료가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것이 바로 인구 조사입니다. 그래서 지금 호적령을 내려서 인구 조사를 하는 장면입니다.

여기에는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이제 막달입니다. 언제 아기가 나올지 모릅니다. 그런데 마리아도 짐승을 타고 요셉과 함께 자기 고향으로 가서 호적하러 가야 되는 상황입니다. 자기 고향에 가서 나는 어디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 식구들은 이 정도입니다, 우리는 혼인한 사이입니다, 우리 자녀는 이렇습니다, 우리 재산 정도는 이러합니다 하고 호적 신고를 명확하게 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할 수 있는 불이익이 어마어마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외 없이 이 일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황제의 명령이기 때문에 어길 수 없는 강력하고 존엄한 명령입니다.

이런 상황을 보면 세상의 권력자들이 얼마나 기분이 좋겠습니까?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이 맛에 권력에 도취됩니다. 내가 던지는 한마디 말이라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일사불란하게 순종하고 복종하니 황제 할 만하지 않겠습니까? 권력의 맛을 보면 그 말에 사람들이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하는, 이것 때문에 권력을 놓지 못하는 것입니다. 작은 권력, 그 권력이 조금 더 큰 권력으로, 그 권력이 조금 더 큰 권력으로, 그렇게 권력의 상승의 욕구를 가지고 나는 천하의 어떤 사람보다도 더 강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로마 황제의 권력이 대단합니다. 이분의 한마디 말로 누구 하나 찍소리하지 못하고 움직여야 됩니다. 이런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황제가 세속에 거대하고 커다란 권력을 가지고 있지만 이 황제의 뒤에서 황제를 움직이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이것은 우리끼리 하는 신앙고백이 아닙니다. 역사가 하나님께서 이 모든 세상을 주관하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입증하고 있습니다.

미가서 5장 2절 말씀입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 있느니라"

미가 선지자 예언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메시아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미가 선지자는 이사야 선지자와 동시대 인물입니다. 기원전 8세기에서 기원전 7세기 어간에 예언했던 선지자입니다. 그분의 말씀이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아버지 요셉이 살았던 곳은 갈릴리 나사렛입니다. 갈릴리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는 약 150킬로미터에서 16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거리입니다.

만약 황제의 명령이 없었다면, 황제의 호적령이 없었다면 임신 막달에 언제 아이가 나올지 모르는 이 상황에 베들레헴까지 짐승 타고 갈 일이 있었겠습니까? 아무리 누가 떠밀어도 갈 수가 없는 상황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도구로 세속의 최고의 권력자 황제가 그 수단으로, 그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황제는 이것을 알 길이 없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내 말 한마디에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다 움직인다는 이 쾌감을 가지고 그가 정치하고 있는데, 그런데 그는 모르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도 역시 하나님 손 위에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있으면서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통해서 당신의 말씀의 역사를 성취하고 이루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알 길이 없습니다.

1-2.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이뿐만이 아닙니다. 남유다는 기원전 586년에 멸망당합니다. 유다가 망하고 나서 유다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로 잡혀갑니다. 그런데 그보다 훨씬 이전에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면 70년이 지나면 해방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포로로 살고 있었던 유다 백성들은 암담합니다. 누가 우리를 해방시켜 주나? 언제 이 바벨론이 망할 것인가? 누가 우리를 우리 고향으로 돌아가게 할 것인가? 그런데 정말 70년이 지나자 그 일이 현실이 됩니다. 철통 같았던 바벨론이 무너져 내립니다. 고레스 왕을 통해서 페르시아 제국이 부흥하고 그분이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또 다른 제국을 이루어 갑니다. 그분의 정치적인 판단에 의해서 유다 백성들은 자기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해방을 맞이한 것입니다. 그들이 자기 고향에 가서 이제 성전을 짓고 살게 되었습니다.

고레스는 하나님을 모르는 백성입니다. 이방 사람입니다. 그는 황제의 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이방 민족들 다 돌아가라고 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그의 정치적 판단이 어떠했든지 그것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이 고레스 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세속의 역사를 주관하고 계신다는 증거 아니겠습니까?

이런 하나님을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사야 45장 15절 말씀입니다.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하나님을 숨어 계신다고 고백했습니다. 어떤 느낌이십니까? 하나님이 숨어 계신다. 내가 부를 때도 대답하지 않고 꼭 필요할 때 나타나지 않는 비겁한 하나님으로 느껴지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사야가 고백하는 숨어 계시는 하나님은 역사의 전면에 나타나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손으로 기능하시면서 역사를 주관하시고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을 고백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전면에 나타나서 역사를 끌고 가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킬 때 그랬습니다. 이집트 바로 왕에게 열 가지 재앙을 보내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건져내서 홍해를 가르시고,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고,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시는 그 하나님. 그때 하나님은 역사의 전면에서 나타나서 일하는 분입니다. 그런데 또 지금 이 하나님은 역사의 전면에 드러나지 않지만 숨어 계신 하나님으로 세상의 권력자들의 손을 빌어서 하나님의 역사를 만들어 가시고 말씀을 성취시켜 가시는 분입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하나님을 보고 어떤 마음을 가져야 됩니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보십시오. 세상의 권력 잡은 자들이 마구 말을 쏟아냅니다. 험한 말도 쏟아냅니다. 그들의 말과 행동에 따라서 전 세계 주가는 요동칩니다. 언론은 그 말들을 받아 적기에 바쁩니다. 모든 사람들이 업종에 따라서 이리저리 일희일비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기에서 보이지 않는 숨어 계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껴야 됩니다. 우리 믿음의 백성들은 내가 할 일만 열심히 감당하면 됩니다. 왔다 갔다 흔들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길을 굳게 걸어가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그들이 뜻도 모르고 떠드는 저 소리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일하실 것이라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으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께서 분명히 지금도 일하고 계심을 믿고 우리는 하나님의 손길을 기대고 의지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세계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내 인생도 주관하지 않겠습니까? 내 인생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숨어 계시는 손길이 지금도 하나님이 나를 붙들고 계시고, 여기까지 오게 하셨고, 앞으로도 미래도 장래도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시고 인도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 하나님 의지하고 믿음 생활 게을리하지 않고 나는 나의 할 일을 성실히 감당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강인한 믿음의 여정

본문 4절과 5절입니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우리는 이 본문 설교를 성탄절 인박해서 아주 많이 들었습니다. 교회학교 다니신 분들은 어릴 때 성탄절만 되면 성극을 이 본문을 가지고 많이 한 것을 봤습니다. 낭만적입니다. 배가 부른 마리아, 힘들어 하는 마리아를 나귀에 태우고 요셉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사랑스러운 얼굴로 짐승을 끌고 베들레헴까지 가는 그 낭만적인 성탄절. 그 성탄절의 정취와 크리스마스의 분위기에 취해서 우리가 이 본문을 읽으면 여기에서 우리가 중요한 사실을 놓칠 수밖에 없습니다.

성탄절의 분위기를 다 빼고 이 본문을 있는 그대로 보시면 어떤 느낌입니까? 차갑습니다. 두렵습니다. 무서운 현실입니다. 마리아가 임신 막달입니다. 무려 150킬로미터, 160킬로미터나 떨어진 베들레헴까지 가야 됩니다. 짐승을 타고 가는데 하루에 20킬로미터 내지 25킬로미터를 움직인다고 가정하면 빠르면 6일, 길면 8일 내지 9일이 걸립니다. 중간에 어떤 사건이 벌어지면 그보다 훨씬 더 길어질 수도 있습니다. 불안합니다. 이제 임신 막달에 아기가 언제 나올지 모르는데, 잘못하면 길에서 아기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상황이 지금 이 젊은 부부에게 바로 코앞에 닥친 상황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그 길을 가야 됩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보는 요셉의 눈, 요셉의 마음이 불안합니다. 신음 소리 조금만 내면 아기가 또 나오는가 보다. 초산인지라 경험도 없는데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때 이 젊은 부부의 마음에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성령께서 잉태하게 하신 아들 아닙니까? 마리아가 수태고지를 받았지 않습니까? 다윗의 자손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믿음으로 고백하고 받은 아들입니다. 요셉에게도 주의 사자가 현몽했습니다. 마리아 데려오기를 두려워하지 마라. 요셉이 그 길로 결단하고 온갖 비난을 감수해 가며 마리아를 데려왔습니다.

이들이 바라는 것은 큰 게 아닙니다. 부잣집에서 아기를 낳게 달라고 바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내 아내가 안전하게, 태어나는 아기가 안전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것밖에 없습니다. 그런 소박한 소원도 하나님이 들어 주지 않습니다. 하필이면 지금 이 상황에서 호적령이 내려서 언제 출산할지 모르는 아내를 데리고 짐승에 태워서 먼 길을 가야 되는 이 심정, 하나님 앞에 원망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결단하고 믿음의 길을 가는데, 하나님 앞에서 결단하고 믿음의 길을 가고 있는데 나에게 닥치는 현실은 장밋빛 꽃길이 아닙니다. 고난의 현장이 이 두 사람 앞에 눈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불신, 과연 이 길이 맞나? 그런 마음이 왜 들지 않겠습니까? 돌아갈까? 베들레헴을 향하여 계속 가야 되나? 이런 부담이 그 두 사람에게 왜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대단한 상징을 우리가 봐야 됩니다. 베들레헴은 '떡집'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생명의 떡집을 향하여 가는 발걸음을 이 젊은 부부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도 원망 불평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원망하지 않았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사라와 롯처럼 가나안 땅에 기근이 있다고 해서 이집트로 내려가 버리지도 않았습니다. 도망가지 않습니다. 피하지 않습니다.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냥 가는 그 길을 꾸준하게 걸어갔습니다. 생명의 떡집 베들레헴을 향하여.

여러분, 우리가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데 고난이 왜 없겠습니까? 예수 믿으면 다 부자 되고 다 복받고 다 잘 산다는 말,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그것이야말로 기복 신앙입니다.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데 여러 가지 험준한 산맥이 우리 앞에 찾아옵니다. 고난이 왜 없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에게 고난이 왜 없습니까? 어려운 일, 힘든 일 닥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생명의 떡집 베들레헴을 향하여 멈추지 말아야 됩니다. 그 길을 계속 계속 걸어가야 됩니다. 마음속에 수십 가지, 오만 가지 생각이 든다 할지라도 돌아가거나 멈추면 광야에서 쓰러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아버지 요셉은 비록 어렵고 비록 가난했지만 이런 강인한 믿음, 강인한 신앙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도 이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영적 체력이 있기를 바랍니다.

3. 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님

3-1. 배척받으신 예수님

본문 6절과 7절입니다. "거기 있을 그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첫아들을 낳아 강보에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여관이 없습니다. 우리도 이 장면을 연극을 통해서, 극을 통해서, 설교를 통해서 성탄절에 수없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 여관을 번역한 카탈루마(κατάλυμα)라는 단어를 잘 생각해야 됩니다. 카탈루마라는 의미의 여관은 우리가 생각하는 손님들을 돈을 받고 방을 내어 주는 현대적인 의미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의미에서 접객 업소가 아닙니다. 여기 카탈루마는 친지나 지인을 위한 일반인 집의 게스트룸을 의미합니다. 손님을 위한 객실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정상적인 집이면 먼 데서 손님이 오면 그분들이 거기서 쉴 수 있도록 방을 준비했다는 뜻입니다. 돈 받고 방을 내어 주는 집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한번 우리가 더듬어서 정리해 보시면, 지금 요셉은 호적하러 자기 고향에 왔습니다. 베들레헴이 고향 아닙니까? 고향에 친척들이 있습니다. 인척들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사촌, 팔촌, 친인척들이 다 있습니다. 자기 친척들도 있습니다. 지인들도 있습니다. 그분들의 집에 객실을 두드렸다는 뜻입니다. 내 아내의 배를 보십시오. 우리가 호적하러 왔는데 곧 출산이 임박했습니다. 방을 좀 내어 주십시오. 삼촌, 고모, 인척들에게 다 부탁했는데 거절당한 것입니다. 배척당하고 거절당했습니다. 돈이 없어서 혹은 손님이 많아서 어쩔 수 없이 여관의 방을 구하지 못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 아는 사람들 아닙니까? 혈육들 아닙니까? 친인척들 아닙니까? 지인들 아닙니까? 그런데 이들이 강력하게 거부했습니다. 못 들어오게 한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유대인들의 결혼 잔치는 대개 일주일 정도 합니다. 7일 정도 하는 이유는 어디에서 결혼 잔치를 해도 친인척들이 다 올 수 있는 기간이 그 정도 됩니다. 그런데 지금 요셉과 마리아는 결혼식을 한 적이 없습니다. 결혼 잔치했다는 기록이 없지 않습니까? 친인척들인데 결혼식에 참석해서 이 두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배가 불러서 나타났습니다. 알 만하지 않습니까? 뻔한 스토리 아닙니까? 요셉은 마리아를 수용하고 받아들였지만, 그 당시 율법에 의하면 이 친척들은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율법의 기준에 의해서 너희들은 죄 지은 자들이니 여기에 들어올 자격이 없다.

여러분, 생명 앞에서 그들은 율법의 기준으로 그 생명을, 출산을 앞둔 자들을 내쫓고 있습니다. 그들의 기준이 세속의 율법의 기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공생애 생활을 하시면서 배척을 많이 당했습니다. 율법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주님은 버림받았습니다. 율법학자, 서기관, 종교 지도자들, 율법을 많이 아는 사람들이 온갖 율법의 기준으로 예수님을 괴롭혔습니다. 결국은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도 율법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생명보다 죽은 율법을 숭배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배척당하셨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오실 줄 알았다면, 하나님께서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서 과거부터 수백 년 전부터 말씀하신 하나님의 독생자 메시아가 이런 상태로 오실 줄로 알았다면 그들이 과연 배척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정말 메시아가 이렇게 연약한 모습으로 오실 줄 꿈에도 몰랐습니다. 로마 황제의 집에 부드러운 침대 위에서 오실 줄 알았지 이렇게 나타날 줄 꿈에도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렇게 오실 줄 알았다면 그들은 영접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될 게 있습니다. 예수님의 초림이 이런 식으로 불현듯 부지불식간에 찾아왔다면, 예수님의 재림도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찾아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별력을 가지고 깨어 있어야 됩니다. 자기 욕심의 틀에 살아서는 안 됩니다. 자기 율법의 기준을 가지고 사람을 가려서는 안 됩니다. 자기 기준을 가지고 살다 보면, 그것이 말씀의 기준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의 기준이 아니면 우리는 번번이 실수하고 실패합니다. 예수님의 초림을 사람들은 이렇게 놓치고 맙니다.

3-2. 구유의 의미

그런데 예수님이 구유에 오셨습니다. 구유 파트네(φάτνη)라는 헬라어를 사용합니다. 짐승의 여물통이라는 뜻입니다. 이것도 대단한 상징이 있습니다. 짐승의 여물통, 가장 낮고 연약한 자리 아닙니까? 그런데 짐승들이 그 여물통에 있는 밥을 먹고 그들이 생명을 얻고 자랍니다. 우리 예수님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습니다. 나를 먹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피를 마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 53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우리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생명을 살리는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곧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먹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구유에 나셨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먹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가 먹고 살아야 됩니다. 그 말씀을 먹어서 그 말씀이 우리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가 되고, 내 근육이 되어서, 그 말씀을 통해서 내 손과 발과 내 육체가 움직여 주는 능력이 되어야 됩니다. 예수님의 피가 참된 음료가 되어서 내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능력으로 나타나야 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우리에게 자신의 전부를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 구유 탄생의 비밀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서 세상의 권력자들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이 하는 모든 언행, 그 이면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우리는 우리의 길을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베들레헴 떡집으로 가는 길, 멀고 험한 길이라 하더라도 흔들리지 말고 강인한 믿음의 체력을 가지고 요셉과 마리아처럼 걸어갈 수 있기 바랍니다. 깨어 있어서 예수님을 배척하지 않는 믿음의 백성들이 되시고, 예수님의 몸을 먹고 예수님의 피를 마시며 주님의 살과 피가 우리를 살리는 능력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세속 권력의 덧없음을 봅니다. 권력 이면에 숨어 계시는 하나님, 모든 일을 하나님의 섭리대로 이끌어 가시는 그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손길을 봅니다. 주여, 오늘 우리는 우리가 할 일을 감당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만삭의 몸으로 베들레헴 생명의 떡집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불안해하거나 불평하거나 불만을 내뱉지 않았던 마리아와 요셉처럼 우리도 믿음의 길을 옳게 걸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을 배척한 어리석은 예수님의 친인척들처럼 되지 않도록 도우시고, 우리가 깨어 있어서 생명이 가장 귀한 것임을 깨닫고 영접하는 자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이 구유에 오셨습니다. 우리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구유에 오신 예수님, 우리가 그 말씀을 먹고 그 피를 마심으로 우리의 영혼이 구원 얻는 놀라운 은혜의 자리에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