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강 / 주님을 중심에 모시고 (2:18-22)

주님을 중심에 모시고 (막 2:18-22)

신앙생활을 처음 하시는 분들은 주변에서 성경을 꼭 읽어보라는 권면을 많이 받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처음 읽으면 적지 않은 어려움에 부딪힙니다. 성경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에게도 성경을 처음 읽는 분들이 이런저런 어려움을 호소하시며 질문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중에 공통적인 질문 하나가 있습니다. 복음서는 왜 네 권이나 되어서 똑같은 사건이 여기에도 저기에도 기록되어 있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도 비슷비슷하고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도 거의 대동소이한데 왜 똑같은 내용들이 여기저기 기록되어 있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그 질문을 받으면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복음서가 네 권인 것이 우리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라고 말입니다.

1. 관점의 차이와 하나님의 관점

1-1. 복음서의 다양한 관점

예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복음서에 똑같이 기록되어 있는 것 중 하나가 오병이어 사건입니다. 마태와 마가와 누가는 오병이어 사건을 거의 같은 관점으로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조금 다르게 보았습니다. 요한은 그 사건 중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한 어린아이의 믿음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아이가 가지고 나온 도시락을 부각시켜서 기록했습니다. 한 아이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다가 주님께 드렸습니다. 마태나 마가나 누가는 그것을 별로 중요하게 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주님이 축사하신 것이 훨씬 더 크게 보였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만약 그 어린아이의 믿음과 헌신이 없었더라면 과연 오병이어가 가능했겠는가 하는 눈으로 그 사건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이 기록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오병이어 사건의 입체적인 전말을 아마 지금도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네 복음서가 다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입체적으로 그 사건을 이곳저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한 가지 사건을 열두 명의 제자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보는 입장에 따라서 어떤 이는 이것을 더 강조하고 어떤 이는 저것을 더 강조하는 것이 사람의 입장과 관점입니다. 우리 일상에서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어느 한 부부가 드라마를 보고 있다고 합시다. 드라마에서 여자 주인공이 화가 나서 남자 주인공 뺨을 때렸습니다. 남편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 여자가 때릴 일도 아닌데 뭐 저런 거 가지고 저렇게까지 화를 내나. 그런데 아내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왜 한 대밖에 안 때리지. 한 대로는 안 되는데, 두 대 세 대를 더 때려야 되는데. 분이 풀리지 않습니다. 똑같은 드라마를 보는데 남편과 아내가 보는 관점이 이토록 다른 것입니다.

교회 생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한 가지 사건 한 가지 일을 보는데 목사가 보는 관점이 다르고 성도들이 보는 관점이 다릅니다. 직분에 따라서도 장로님들, 집사님들, 권사님들이 보는 관점이 저마다 다릅니다. 이건 우리가 인정하고 당연히 그렇게 된다고 생각해야 하는 관점의 차이입니다.

1-2. 하나님의 마음 품기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꼭 기억하고 붙들어야 할 사실은 우리가 언제든지 내가 가진 생각과 관점을 내려놓아야 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관점,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시각과 관점이 어떠하든지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다 내려놓고 지금 이 상황에서 하나님이 가장 바라고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것을 기억하고 붙드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 말씀에는 주님을 중심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고귀하고 값진 것인지 우리에게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의 집에서 잔치를 하고 계십니다. 세관에 앉아 있던 세리 마태를 주님이 부르셨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마태가 응답했습니다. 그와 함께 지냈던 세리들, 그와 함께 어울렸던 창기들이 함께 모여서 잔치를 벌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찬물을 끼얹는 말을 합니다. 아주 날선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18절 말씀을 보십시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2. 금식의 참된 의미

2-1. 혼인잔치의 기쁨

이 사람이 와서 던진 것은 금식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금식에 대한 규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함께 금식하는 날은 일 년에 한 번 대속죄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경건하다고 자부하는 유대인들, 신앙생활을 좀 한다 하는 유대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을 금식했습니다. 그것은 월요일과 목요일이었습니다. 그중 한 날, 유대인들이 다 금식하는 날에 왜 당신은 잔칫집에서 이렇게 먹고 마시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을 받은 주님에게 이것은 매우 곤란한 질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경건하게 금식하는데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은 잔칫자리에서 먹고 있으니 당신은 경건하지 않다는 지적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어떻게 주님께서 해명하시겠습니까? 또한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던 세례 요한의 제자는 예수님과 사실 같은 편입니다. 같은 비전과 같은 마음을 공유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까지 금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문제 삼은 사람이 당신은 지금도 금식하고 있지 않으니 경건하지 않은 사람임에 틀림없다고 몰아붙이는 것입니다.

19절과 20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주님은 두 가지를 규정하셨습니다. 첫째, 지금이 잔칫집 곧 혼인잔칫집이다. 둘째, 내가 이 잔칫집의 신랑이다. 이렇게 규정하신 이 말씀은 정말 옳은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이 잔치는 누구를 위한 잔치입니까? 마태를 위한 잔치 아닙니까? 세리 마태가 지금까지 세관에 앉아서 죽은 자의 상태로 있었습니다. 그는 돈의 맛을 알았고 권력을 좇아다녔고 돈이 주는 쾌락과 육체적 쾌락에 탐닉하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을 섬기던 사람이었습니다. 맘몬(μαμωνᾶς)을 숭배하고 돈을 섬기던 사람이었습니다. 권력을 숭배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의 부름에 응답했습니다. 이제 나는 세상을 따르지 않겠습니다. 주님을 따라가겠습니다. 결단했습니다. 영적으로 신랑되신 예수님과 혼인하는 혼인 서약을 한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천국에서 가장 기뻐하실 일입니다. 이 땅에 죽어가던 한 죄인이 하나님을 믿겠다 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하늘에서도 천국 잔치가 열리고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지금 죽은 자의 상태에 앉아 있던 레위 마태가 나를 따르고 하나님의 진정한 자녀가 되겠다고 결단했다. 그래서 이 자리가 혼인잔치처럼 잔치를 벌이고 있는데 이것이 뭐가 문제가 되느냐. 이날이 대속죄일이든 이날이 월요일이든 이날이 목요일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냐. 죽어가는 영혼이 구원받는 자리, 이 복되고 행복한 자리에 포도주를 함께 마시고 식사를 나누는 것이 무엇이 문제라는 말이냐. 왜 이런 것을 가지고 문제 삼느냐 하시는 말씀입니다.

지금은 금식해야 될 때가 아니라 죽어가는 영혼이 구원받았으니 함께 먹고 즐기고 잔치하고 노래 불러야 할 때다. 정말 금식할 때가 오는데, 그때는 신랑 된 내가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길을 올라가고 너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 날이 올 텐데, 그때가 금식해야 될 때다.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2-2. 자기만족과 자기과시

사실 이들은 그렇다면 왜 금식하는 것입니까? 이들이 금식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금식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자기 종교적 내적 만족입니다. 금식을 하면서 나는 참 괜찮은 교인이구나, 나는 참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겠구나 하는 자기 만족을 가지고 금식을 합니다. 두 번째는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함입니다. 자기 과시입니다. 금식을 하면서 머리를 다 풀어헤칩니다. 얼굴을 초췌하게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볼 때 아, 저분은 금식하시는구나, 믿음이 참 좋아 보이는구나 하는 말을 듣고 즐깁니다. 자기 과시를 위해서 금식하는 것입니다.

자기 내적 만족, 외적인 자기 과시. 이것이 그들의 금식입니다.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금식입니다. 그리스도와 아무런 관계 없는 금식입니다. 그렇다면 이 금식은 오늘 우리가 하는 다이어트와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하나님 없는 금식,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금식은 다이어트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다이어트 하시는 분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거울을 보며 자기 만족을 합니다. 볼살이 조금 빠졌구나. 사람들이 볼 때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해도 스스로 만족감을 느낍니다. 다이어트 하시는 분들, 누군가가 칭찬해 주고 살이 많이 빠지셨네요 한 마디 해 주면 얼마나 자기 만족이 되는지 모릅니다. 스스로 과시합니다. 옷맵시를 냅니다.

하나님 없이 밥을 굶는 것, 하나님 없이 금식하는 것은 금식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스스로 하는 다이어트입니다. 그런데 참된 금식은 하나님과 함께, 그리스도의 스케줄을 따라, 주께서 원하시는 방법을 따라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금식해야 될 때가 아니라 지금은 잔치하고 먹고 마시고 마태를 마음껏 축복해 줘야 될 자리라는 것입니다. 정말 금식해야 될 때는 신랑을 빼앗길 때가 올 것인데, 그때 우리가 함께 금식하고 슬퍼하며 아파하고 주님의 고난에 동참해야 될 그때가 금식해야 될 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범위를 좀 확장시켜 보겠습니다. 금식의 범위를 확장시켜 우리 신앙생활 전반으로 한번 가져가 봅시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왜 하십니까? 사실 신앙생활을 자기 만족과 자기 과시로 하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저는 모태 신앙이었습니다. 어려서 초등학교 때까지 교회를 다닐 때는 정말 좋아서 다녔습니다. 뭐라고 설명할 수 없이 좋았습니다. 교회 가는 것이 너무 기쁘고 좋았습니다. 그래서 교회 갔습니다. 중학교가 되어서는 누나들 보느라 교회 갔습니다. 고등학교가 되어서는 학생회 임원이 되어서 그 일을 하느라 교회 갔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없이, 철이 없을 때,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기 전에 그렇게 신앙생활과 교회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어린 시절의 신앙생활이 철들고 성인이 되어서도 그대로 이어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노래가 좋아서 찬양대에, 아이들이 좋아서 교회학교 교사로, 그냥 내 몸을 움직이는 것이 좋아서 봉사의 자리에, 남들 보기 민망해서 직분을 받아야 되겠다 해서 직분 받는 자리에. 사람들은 그렇게 봉사하고 섬기고 일합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런 분들을 더 깊이 들여다보면 하나님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내가 찬양대 자리에 앉아서 찬양하는 것이 하나님과 무슨 상관이 있고 그리스도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교회학교 교사가 되어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자기 만족이고 자기 과시라면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항상 자기 자신에게 질문해야 됩니다. 너는 왜 신앙생활 하고 있느냐. 항상 자기 자신에게 물어봐야 됩니다. 저는 저에게 항상 물어봐야 합니다. 너는 왜 목회하고 있느냐. 왜라는 질문을 던져야 됩니다. 그리고 물어봐야 됩니다. 자기 만족으로 목회하는 것이냐, 사람들에게 과시하려고 목회하는 것이냐. 그 질문 앞에 아닙니다. 주님, 저는 제 만족도 아니고 자기 과시도 아니고 오직 주님의 제자 되어서 예수님처럼 목회하고 예수님처럼 성도를 사랑하고 예수님처럼 교회를 세워가기 위해 목회합니다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어야 됩니다.

직분자들도 스스로 질문해 보셔야 됩니다. 너는 왜 직분을 받았느냐. 너의 만족을 위해서 받았느냐. 과시하기 위해서 받았느냐. 스스로 질문하셔야 됩니다. 그리고 대답하셔야 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 저는 내 만족도 아니고 보여주기 위해서 직분 받은 것도 아닙니다. 주님 따르는 제자가 되어서 열심히 섬기고 열심히 신앙생활 하다 보니 하나님께서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거룩한 부담감으로 지금도 이 직분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대답할 수 있어야 됩니다.

찬양대로 섬기고 봉사하느냐고 질문하신다면, 주의 이름과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 제가 시간을 아끼고 헌신하고 수고하며 이 찬양을 오로지 주님께 영광 돌려드립니다. 이렇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묻는 말에, 왜라는 질문 앞에, 자기에게 이 질문을 던지시고 떳떳하게 주님 앞에 대답할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도행전 8장에 보면 시몬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때 빌립 집사님이 아무도 가지 않는 사마리아 땅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람들이 교회로 많이 모여들었습니다.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고 커졌습니다. 시몬은 원래 직업이 마술사였는데, 그곳에서 자기도 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평생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깜짝 놀랄 일을 보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베드로가 사람들에게 기도해 주는데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방언이 터지고 병든 자가 일어나고 사람들이 다 성령받는 놀라운 역사를 보았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그 어느 마술사도 그런 일을 행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시몬이 베드로를 찾아갑니다. 베드로에게 부탁합니다. 제가 돈을 많이 드릴 테니 당신이 좀 전에 행하신 능력을 저도 행할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십시오. 베드로가 화가 머리끝까지 났습니다. 저주했습니다.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저주해 버렸습니다. 그는 교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교회를, 신앙을,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가 아니라 자신의 사업을 확장하는 자리로, 비즈니스의 터전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저주받았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지금 신앙생활하고 있고 우리가 하나님을 잘 섬긴다 하는데,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없이 금식하고 있는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 예수님께 질문한 이 사람처럼 살고 있지는 않은지. 혹시 오늘 우리도 시몬처럼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없이 자기 비즈니스의 확장을 위해서 이 자리에 나와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질문하셔야 됩니다. 내적 만족입니까? 자기 과시입니까? 이도 저도 아니라면 우리는 참된 제자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스케줄을 따라가는 믿음의 백성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3. 새 옷과 새 가죽부대

3-1. 급진적인 복음

우리 예수님께서 계속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이 금식하고 있는 자들, 그들은 낡은 옷을 입은 자들이고 낡은 가죽 부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1절과 22절을 보십시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지금까지 하나님과 상관없이 신앙생활하고 있는 자들은 낡은 옷이고 낡은 가죽 부대였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생베 조각이고 새 포도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베 조각은 당기는 힘이 굉장히 큽니다. 낡은 옷에 붙여놓으면 그 당기는 힘 때문에 낡은 옷이 해어짐과 찢어짐이 더 크게 됩니다. 입을 수가 없게 됩니다. 새 포도주는 발효됩니다. 부글부글 끓습니다. 낡은 가죽 부대에 새 포도주를 부어 놓으면 낡은 가죽 부대가 견디지를 못하고 터져 버립니다. 포도주도 다 버리고 가죽 부대도 다 버리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베 조각이고 예수님은 새 포도주이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 자체가 당기는 힘이 굉장히 크고 예수님의 말씀 자체가 발효하는 힘이 굉장히 크지 않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주님께서 타협을 하시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주님이 세관에 앉아 있던 레위 마태를 찾아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밑도 끝도 없이 앞뒤 좌우도 없이 나를 따르라. 네가 지금 앉아 있던 자리, 이 일을 하던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서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3년 정도 깊이 생각해 보고, 이렇게도 생각해 보고 저렇게도 생각해 보고, 오늘은 조금 내일은 조금 이렇게 따라오라 말씀하지 않으시고 주님은 당장 버리고 따라오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부자 청년에게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 주님의 말씀은 급진적입니다. 이웃을 돕는 것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네 오른뺨을 때리거든 왼뺨도 돌려대라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오 리를 가자 하면 십 리를 가주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이렇게 하시는 모든 행동과 말씀이 급진적이어서 부담스러워서 주님을 담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낡은 옷인데, 나는 낡은 가죽 부대인데, 아직까지 낡은 옷을 입고 낡은 가죽 부대를 가지고는 주님의 말씀을 담을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됩니까? 갈아입어야 됩니다. 옷을 갈아입고 새 가죽 부대를 준비해야 됩니다. 내 마음부터 내 생각까지 내 행동까지 새 가죽 부대가 되고 새옷을 갈아입어야 됩니다.

주님과 아무런 상관없이 금식하는 자들,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없이 섬기고 봉사하는 자들은 낡은 옷을 입은 자들입니다. 갈아입어야 됩니다. 그런데 주님이 너무 부담스러운 나머지, 급진적으로 양자택일을 요구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부담스러워서 어떤 사람들은 생베 조각을 붙였다가 슬그머니 떼 버립니다. 새 포도주를 부었다가 끓어오르는 힘이 너무 커서 갖다 부어 버립니다. 버립니다. 그리고 나서 짐짓 아닌 척합니다. 가짜입니다. 거짓입니다. 가짜 성도이고 거짓말하는 성도들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위선이 있지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3-2. 참된 변화의 결단

사실 생베 조각이신 예수님을 내가 영접한 적이 없는데, 너무 부담스러워서 주님 영접하기가 힘든데, 새 포도주이신 주님이 나에게 오시는 것이 부담스러운데, 마치 그렇게 살아가는 것처럼 우리는 위선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잘못된 위선자의 태도입니다.

수년 전에 어떤 성도님이 저에게 기도 부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분이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새로운 직장을 찾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놀라서 물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돈을 잘 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는 일이 잘되고 물질의 축복도 많이 받아 돈을 많이 벌고 있었습니다. 왜 갑자기 직장을 옮기려고 합니까라고 물었더니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제가 최근에 주님을 영접하고 만났는데, 그 이전에 제가 하던 일은 돈을 싸들고 다니며 뇌물을 주는 일이었습니다. 뇌물을 주고 돈을 뿌리고 그렇게 해서 제가 돈을 버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진짜 주님 만나고 나니 이 일을 제가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 만나기 전에는 아무런 죄책감 없었는데 주님 만나고 나니 주님을 버릴 수는 없고, 이제 어떻게 만난 주님인데 이 주님을 내가 버릴 수는 없고, 직업을 바꿔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주님께서 저와 저의 가족 굶기지는 않을 테니 좋은 일자리 찾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 부탁을 했습니다.

이분은 생베 조각이신 예수님을 자신에게 영접하고 나니 헌옷을 입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옷을 벗어 버려야죠. 새 포도주이신 주님을 영접하고 나니 그 변화되는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기 위해서는 자신이 새 포도주를 품는 새 가죽 부대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앙에는 회색 지대가 없습니다. 옷을 반만 벗으면 안 됩니다. 벗으려면 완전히 벗고 입으려면 완전히 입어야죠. 그래서 그분은 주님이 원하시는 새옷으로 갈아입고 새 가죽 부대가 되어서 믿음의 길을 잘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오늘부터 사순절 첫 번째 주일이 시작됩니다. 매년 돌아오는 사순절은 봄의 시작을 알립니다. 봄은 우리에게 아름다운 계절 아닙니까? 우리가 우리의 시간표대로 살아간다면 이 봄에 꽃구경 많이 다니고 움츠렸던 것들을 다 펼치고 이곳저곳 많이 놀러 다닐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시간표대로 따라간다면 우리는 이 사순절 기간은 겸비하고 겸손하고 절제하고 경건하게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지금이 그때이고 지금이 금식할 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고 생각하며 우리는 지금 겸비하고 겸손하고 절제하는 사순절의 시간을 보내야 할 것입니다.

부디 오늘 주신 말씀처럼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없이, 주님과 아무런 상관없이 금식하는 낡은 옷, 낡은 가죽 부대를 버리시고, 오직 주님을 중심에 모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스케줄과 그 시간표를 따라가는 하나님의 백성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사모합니다. 주님, 우리는 신앙생활 잘하는 줄 알았습니다. 주님, 우리는 경건한 사람인 줄 착각하고 지냈습니다. 내적인 만족과 외적인 자기 과시를 위해서 살았다고 생각해 보니 우리는 낡은 옷을 입고 있었고 낡은 가죽 부대를 가지고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 이제 주님 따라가기를 원합니다. 주께서 바라시는 대로 그 스케줄과 그 시간과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아가는 참으로 복된 주의 백성으로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정말 주님의 사랑받는 모두가 주님의 길에 동참하는 복된 주의 성도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