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의 주인은 누구인가? (막 2:23-28)
막 2:23-28
이솝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아버지와 아들이 당나귀를 팔기 위해 시장으로 길을 나섰습니다. 무더운 여름날이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당나귀와 함께 길을 가는데,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이 뒤에서 수군거립니다. "아니, 타고 가면 될 것을 왜 저렇게 당나귀를 몰고 가는가?" 들어보니 그럴듯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아들을 태웠습니다. 아들이 타고 열심히 길을 가는데, 뒤에서 또 사람들이 수군거립니다. "새파랗게 젊은 것은 타고 가고 나이 드신 아버지는 걸어가고, 참 말세로다." 듣고 보니 그랬습니다. 아들이 내리고 아버지가 탔습니다.
한참을 길을 가는데 아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가니까 사람들이 또 수군거립니다. "저러다가 아들 잡겠다. 아버지는 그렇게 멀쩡히 타고 가고 아들은 저렇게 땀을 흘리며 가니." 듣고 보니 그래서 이제는 아들과 아버지 둘 다 당나귀에 올라타고 길을 갔습니다. 사람들이 또 한참 가는데 뒤에서 수군거립니다. "아니 저분들은 당나귀를 시장에 내다 팔기 위해서 가는데, 도착하기도 전에 당나귀가 죽겠다." 듣고 보니 그럴듯해서 이제는 둘 다 내려 당나귀를 어깨에 메고 모시며 길을 가기 시작했습니다. 시장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배를 잡고 웃으며 넘어집니다. 당나귀가 왕도 아닌데 왕처럼 모시고 왔다고 사람들이 다 웃습니다. 이 이야기는 이솝이 풍자하기 위해서 한 이야기입니다.
자기 줏대 없이 소신 없이 주변 사람들의 말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사람을 풍자하기 위해 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사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듣고 또 보면서, 우리가 당연히 다스리고 지배해야 할 대상이 있는데 오히려 그 지배해야 할 대상에게 지배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것은 재미있는 이야기지만, 사실 우리나라에 내려오는 전설에는 무서운 이야기도 있습니다. 제주도에 가면 만장굴이 있는데, 만장굴에서 약 2km 더 들어가면 김녕사굴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그 굴에 내려오는 전설입니다. 그 굴에는 옛날에 큰 구렁이가 살았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 구렁이를 아주 무서워했습니다. 구렁이가 우리에게 생사와 화복을, 길흉을 다 주관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이 두려움을 이용한 마을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스스로 자처하기를 자신이 구렁이의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선동해서 제물을 받아옵니다. 그리고 구렁이에게 제물을 갖다 바칩니다. 물론 중간에서 자기가 먹고 착복하는 것도 많았습니다. 거기서 조금 더 진도를 나갔습니다. 매년마다 열여섯에서 열일곱 살 되는 처녀를 갖다 바쳐야 풍어를 기원할 수 있고, 출항하면 안전하게 돌아올 것이라고 사람들을 혹세무민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 마을에는 곡소리가 끊이지를 않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제주판관 서련이라는 사람이 새로 부임했는데, 보니까 가당치도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미신이라고, 이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두려워서 그치지를 않습니다. 서련 판관이 혼자 활과 칼을 가지고 나섰습니다. 그리고 굴에 들어갔습니다. 활을 쏘아서 구렁이를 죽였습니다. 칼로 구렁이를 토막 냅니다. 그리고 다 태워버렸습니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믿었습니다. 자기들이 속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지금도 제주도에 가면 서판관 공덕비가 서 있습니다.
한 가지 이야기는 재미있는 이야기이고, 한 가지 이야기는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 두 이야기의 공통점은 우리가 당연히 다스리고 지배하고 통제해야 할 대상에게 우리가 말도 안 되게 지배당하고 억압당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과연 이런 일이 이야기 속에만 존재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있었고, 오늘 21세기를 살아가는 이 나라, 이 땅에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주시는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자유하게 하시고 우리를 행복하게 하셨는데 도리어 이것이 억압이 되는 것을 끊어내고, 하나님 안에서 자유와 행복을 누려가는 주의 백성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 안식일 논쟁의 발단
예수님의 제자들은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이었습니다. 밥을 먹어도 돌아서면 배가 고프고 돌아서면 허기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길을 가다가 밀밭 사이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23절 말씀입니다.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그의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이삭을 잘라서 무엇에 쓰려고 했을까요?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이삭을 잘라서 먹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무 배가 고프니까 밀밭 사이로 지나가다가 이삭을 잘라서 손으로 비벼 껍질을 털어내고 입에 털어 넣은 것입니다. 너무 배가 고파서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들을 뒤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문제를 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입니다. 24절 말씀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이 어떤 일이었을까요? 만약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길을 가다가 주인이 있는 밀밭에 허락을 받지 않고 들어가서 밀을 서리해서 먹었으니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라고 말했으면, 이것은 우리가 받아들일 만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안식일 규정을 어긴다고 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1-1. 안식일 규정의 왜곡
출애굽기 20장 8절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고 기록합니다. 십계명의 네 번째 계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 안식일을 제정하실 때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고만 하셨습니다. 하지만 후대 사람들이 살다 보니까,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것이 안식일을 기억하는 것이고 어떻게 해야 거룩히 지키는 것인가 고민하다가 자기들이 유대인의 율법 해석서를 만들었습니다.
인간의 손으로 율법 해석서를 만들었는데, 그 책이 미쉬나(Mishnah)라는 책입니다. 미쉬나에 보면 출애굽기 20장 8절 이 말씀을 가지고 시행세칙을 만들었는데, 총 39가지 세칙이 있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말씀에 39가지 시행세칙이 붙어 있는 것입니다.
그중에 하나가 "안식일에 추수하지 말지니라"라는 세칙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의 행위를 추수로 본 것입니다. 밀을 꺾는 행위를 추수로 보았고, 손으로 밀 껍질을 까서 입에 털어 넣는 행위를 탈곡이라고 본 것입니다. "어찌하여 안식일에 추수와 탈곡을 하느냐" 하고 제자들과 예수님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1-2.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신앙
우리는 여기서 바리새인들의 믿음 없음과 사랑 없음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신앙의 태도를 발견합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신앙생활의 본질은 우리의 눈이 하나님을 향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을 향하고, 그다음 우리의 눈은 우리 내면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듣고 받고 깨닫고 읽고 느끼고 감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내가 깨닫고 감동하고, 그리고 그 말씀대로 살겠다고 결단했다면, 그다음 나 자신을 봐야 합니다. 나는 과연 이 말씀대로 살고 있는가? 나는 과연 말씀을 지켜 살아가고 있는가? 위로는 하나님을 보고 그리고는 나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나 자신을 살펴서 회개하고, 그 눈으로 사람을 보고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만약에 바리새인들이 그런 믿음의 눈을 가졌더라면, 그들의 눈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고 자신을 발견하고 예수님과 제자들을 보았더라면 긍휼한 마음이 생겼을 것입니다.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저렇게 젊은 청년들이 몰려다니는데, 얼마나 배고팠으면 남의 밀을 비벼서 저렇게 먹어야 했을까. 내가 있는 것 다 털어서 저들에게 좀 주자." 아마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사고 아닙니까?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의 눈을 뜨지 않으니 믿음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자신을 말씀의 거울에 비추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손에는 오로지 율법 해석서만 가지고 다니며, 그 해석서에 비추어서 상대방의 모습을 재단하고 정죄하고 판단하기만 했던 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 자신의 모습도 함께 비추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과연 위로는 하나님을 향하고, 우리 시선이 나 자신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만약 그렇지 못하면 우리도 율법만 가지고 상대방을 찾아다니며 그분을 정죄하고 오로지 그분의 삶에서 잘못된 것만 들추어내려고 하는 악한 사람으로 살 것입니다.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보고 말씀에 비추어서 나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참된 믿음의 길이 열릴 것입니다.
2. 다윗과 진설병 사건
우리 예수님께서 이제 이런 바리새인들에게 그다음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오늘 말씀 25절과 26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예수님은 이 바리새인들에게 다윗 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 다윗은 유대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고 가장 존경하는 왕 중의 왕 아닙니까?
2-1. 생명을 살린 결단
다윗에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서 경황없이 광야로 나와버렸습니다. 너무 경황없이 나와서 손에 아무것도 쥔 것 없이 나왔습니다. 돈도 가지지 못했고, 음식도 챙겨오지 못했고, 무기도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다윗과 함께하는 그의 군사들이 함께 광야로 나왔습니다. 너무 배가 고팠습니다. 하루 종일 굶었습니다. 그래서 다윗과 그의 일행은 놉에 있는 대제사장 아히멜렉을 찾아갔습니다. 먹을 것을 요청했습니다. "먹을 것이 있으면 좀 주십시오."
아히멜렉이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여기 먹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고, 지금 막 성전에서 물려낸 떡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떡은 진설병이고 제사장만 먹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드시겠습니까?" 다윗이 먹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윗과 함께한 사람들이 다 먹고 배불렀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율법을 어기는 행위입니다. 레위기 율법에는 진설병은 제사장들만 먹도록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 아히멜렉이 보니까, 그 율법을 지키려고 이들을 먹이지 않으면 이들은 곧 생명이 끊어질 것 같았습니다. 하루 종일 먹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 여기서 내침을 당하면 이 한밤중에 광야로 나가서 어디에서 또 이 사람들이 먹을 것을 찾겠습니까? 아무도 이 많은 사람을 먹일 만한 떡이 없는데 어디 가서 먹겠습니까?
생명과 율법 가운데 무엇을 선택해야 되겠습니까? 대제사장 아히멜렉이 율법을 몰랐던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히멜렉 제사장은 율법의 근본 정신이 생명을 살리는 것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율법의 정신,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율법의 근본 정신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율법에 기록된 것을 어겨 가면서까지 다윗과 함께한 사람들을 먹이는 데 집중했던 것입니다. 사울은 그 뒤를 따라왔습니다. 다윗을 숨겨주고 다윗에게 먹을 것을 주고 무기를 제공해 주었다는 혐의를 씌워서 대제사장 아히멜렉의 목을 베었습니다. 살해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목숨을 버릴지언정 하나님께서 대제사장에게 주신 사명, 생명을 존중하고 생명을 살리는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고 붙들고 나간 사람이었습니다.
2-2. 생명 존중의 선택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지금 이런 선택의 문 앞에 서 있다면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그 시절보다 수천 년이 흘렀습니다. 그러면 세상이 더 나아졌어야 할 것 아닙니까?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삶의 현장은 정말로 생명을 존중하고 생명을 사랑하는 사회입니까? 예를 들어 어떤 분이 집에서 갑자기 심근경색이 왔습니다. 그러면 119에 전화를 하겠지요. 119 구급차가 올 것입니다. 응급구조사가 환자를 실어서 병원으로 이송합니다. 병원으로 이송하는 길에 가슴을 열어 젖히고 몸에 전극을 붙이고 사지에 전극을 열 개 이상 붙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나라 현행법상 불법이었습니다. 북미나 유럽에서는 당연히 그렇게 하도록 명시되어 있습니다. 전극을 붙여서 막힌 혈관을 확인하고 이 위급한 상황에 일분 일초 시각을 아껴서 지금 가고 있는 병원 의사에게 전송해야 합니다. 그러면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의사는 환자의 상태를 바로 알고 응급조치를 할 수 있고 사람을 살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오랫동안 현행법상 불법이었습니다. 무면허 의료행위라고 불법이었습니다. 119 구급차 안에서 여자가 아이를 낳아도 탯줄을 자르는 것도 불법이었습니다. 현행법상 불법이라고 명시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법 개정을 위해 많은 응급의료 전문가들이 공청회도 요구했고 국민청원도 했고 여러 가지 청원으로 발 벗고 나섰지만 쉽게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공청회도 열리고 시행령 개정을 위한 시범사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환자와 의사 가운데, 생명과 법 가운데 무엇이 더 우선시되는 사회인지, 우리 사회는 이렇게 21세기를 살아가는데 무엇이 더 우선되는 사회인지, 오늘 우리가 다시 경각심을 가지고 생각해 봐야 할 문제 아니겠습니까?
사회가 이렇다면, 그럼 교회는 어때야 되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교회에도 많은 법이 있습니다. 많은 절차와 규칙이 있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법과 수많은 절차보다 더 상위에, 가장 중요한 것에 있는 것이 사람의 영혼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많은 법이 있지만, 많은 절차가 있지만, 많은 형평성이 존재하지만,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고 그들을 위해서 교회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율법의 정신을 그대로 받는 것이요,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 정신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날 대제사장 아히멜렉은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내놓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3. 안식일의 본래 의미
예수님께서 이어서 안식일의 근본 정신을 말씀하십니다. 27절 말씀입니다.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라"
지금까지 유대인들과 그 당시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안식일의 39가지 규정에 그들은 꽉 짓눌려 있었습니다. 억압당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혁명적인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 말씀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원래 안식일을 제정하실 때 약속하신 것입니다.
3-1. 창조 때의 안식일 의미
창세기 2장 3절에 보면 하나님의 안식일 제정 목적이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하나님이 다 마치시고 그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습니다. "안식하셨다", "그치셨다", "마치셨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샤바트(שַׁבָּת)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샤바트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안식일은 "멈추다", "그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왜 멈추고 왜 그치셨을까요? 하나님이 피곤하셔서,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온몸에 진이 다 빠지셔서 그래서 멈추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지치거나 피곤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안식일에 그치고 샤바트 하시고 멈춘 이유는 인간 때문입니다. 사람 때문입니다. 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흙으로 지어진 육체는 하루는 쉬어야 합니다. 쉬지 않고 계속 사용하고 계속 달려가면 당연히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안식일을 창조하신 가장 근본된 이유는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멈추어서 이 안식일을 제정해 놓아야 그다음 사람들이 안식일에 멈추고 쉴 것 아닌가? 그래서 하나님이 안식일을 제정하신 것입니다.
3-2.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여기 "복되게 하다"라는 말은 바라크(בָּרַךְ)라는 단어를 씁니다. 바라크라는 말은 "무릎을 꿇다"라는 뜻입니다. "무릎을 꿇다", 멈춘 그다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릎을 꿇는 행위입니다. 누구에게?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기만 하면 하나님이 복을 주시려고 두 손 가득 한 아름 복을 안고 계십니다. 멈추기만 하면, 내 앞에 와서 무릎을 꿇기만 하면! 그러므로 안식일은 사람을 위한 날입니다. 멈추고 무릎을 꿇는 자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제정하신 날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카도쉬(קָדוֹשׁ)입니다. "구별하시다", "따로 떼어놓으시다"라는 뜻입니다. 누구를 위해서요? 우리 인간을 위해서 하나님이 따로 구별하고 떼어놓으셨습니다. 멈추고 무릎 꿇기 위해서 따로 구별하신 날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하나님이 처음 제정하실 때 하나님 자기를 위하여 제정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하여, 사람을 위하여 제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이 말씀은 창조의 본질로 우리 주님이 돌아가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3-3. 자유와 해방의 신앙
거꾸로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유대인들은 안식일 규정, 세부 항목을 만들어서 사람을 억압했습니다. 안식일만 사람을 억압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수많은 종교적인 행위들이, 수많은 율법적인 행위들이 사람을 압제하고 억압하고 있습니다. 꽁꽁 조여서 숨을 쉬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된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하나님 자체가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이미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자유의지의 본뜻이 무엇입니까? 그 자유의지 속에는 하나님을 거부할 수 있는 가능성까지, 아주 위험한 가능성까지 하나님은 함께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을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로봇처럼 프로그램을 하셔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1%의 반역도 없이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셨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우리는 가끔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 세상에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 아무도 없을 것인데.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가치 없는 복종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가치 있는 순종은 내 안에 하나님을 거부하고 싶은 마음까지도 내가 복종시키고 누르고 주님 앞에 나와서 엎드리는 것, 이것이 가치 있는 순종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자유롭게 하시고 자유하게 하시고 행복하게 하시기를 원하는 분입니다. 혹 우리가 신앙생활 하시다가 말할 수 없는 마음의 답답함과 눌림과 억압을 경험하신다면 그것은 교회가 잘못한 것입니다. 그것은 목회자가 잘못한 것입니다. 목회자가 성경을 오해했기 때문에, 교회가 잘못 가르쳤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오늘 여기 바리새인들처럼 말입니다.
참된 신앙생활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억압이 아니라 자유입니다. 눌림이 아니라 해방입니다. 하나님 믿으면 믿을수록, 신앙생활 하면 할수록 내 속에 있는 짐들은 다 사라지고,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나를 위하여 창조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를 위하여 보내어 주시고 죄의 굴레와 짐을 벗게 하신 것처럼, 참된 믿음생활은 자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 가운데서 참된 자유를 누리고 마음껏 자유하시기를 바랍니다. 주 안에 있으면 자유와 기쁨과 행복이 우리 안에 차고 넘칠 줄로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 우리는 주 안에서 자유하는 백성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제정하실 때도 우리를 위하여 거룩하게 하시고 복되게 하시고 멈추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안식일 규정이 사람에 의해서 변질되었습니다. 얼마나 사람을 압제하고 얼마나 사람을 짓눌렀는지요. 그러나 이제는 자유하기를 원합니다.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는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안식일에도 자유하며, 신앙생활이 눌림이 아니라 기쁨이 되고 행복이 되고 찬양이 되고 자유하는 인생 되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