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손을 내밀라 (막 3:1-6)
1. 협업과 동역의 하나님
도시는 언제부터 형성되었을까요? 고대부터 도시는 존재해 왔습니다. 사람들이 모여 살고 문명을 이루며 함께 삶을 영위하는 것을 도시라 한다면, 그런 의미에서 도시는 고대로부터 존재해 왔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적 의미에서의 도시는 20세기 미국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20세기 미국에서 도시가 본격적으로 탄생하기까지 19세기 한 세기 동안 수많은 기술의 발전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기술의 발전은 한꺼번에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단계적으로, 마치 모자이크처럼 하나하나 퍼즐을 맞추어 나중에는 도시라는 거대한 하나의 문명을 이루어내게 됩니다.
1-1. 문명을 만든 협업
그 첫 시작으로 밴더빌트라는 사람이 해운업으로 큰돈을 벌었습니다. 이 사람이 미국 대륙에 철도를 부설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자기 돈으로 철도를 놓겠다고 하니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정신 나간 짓이라고 말했지만, 그는 미국 대륙을 철도로 연결하고야 말았습니다. 그래서 철도가 놓이게 되었고, 그전까지 마차를 타고 다니던 시절에서 이제는 철도로 빠르게 원하는 목적지까지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역이 세워졌고, 그 역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밴더빌트는 록펠러와 손을 잡습니다. 그 당시 록펠러는 등유를 생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밴더빌트가 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생산한 등유를 나의 철도로 이동시키면 좋겠습니다." 록펠러가 거절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 등유가 철도를 타고 역마다 퍼지게 됩니다. 사람들은 밤에도 불을 끄지 않고 환하게 불을 밝힐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다음은 강철왕 카네기가 철강을 만들게 됩니다. 이전까지는 아주 단단한 강철이 아닌 주철뿐이었는데, 강철이 생기고 나서는 교량을 만드는 것이 훨씬 용이해졌습니다. 철도가 단단한 교량을 통해서 이제는 원하는 도시까지 아주 단시간에 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뉴욕에서는 오티스라는 사람이 엘리베이터를 발명합니다. 철공소에서 일하고 있었던 그가 무거운 물건을 용이하게 오르내리도록 하기 위해서 화물용 승강기를 발명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가 되어서 루이스 설리번이라는 사람이 1904년에 백화점을 설계하고 건축합니다. 만약에 카네기의 강철이 없었더라면 고층 백화점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만약에 오티스의 엘리베이터가 없었더라면 고층 건물은 꿈도 꿀 수 없었을 것입니다. 철도가 놓이지 않았더라면 사람들은 모여 살지 못했을 것이고, 등유가 밤에 불을 밝히지 못했더라면 도시도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노력이 집약되어 20층 이상의 초고층 건물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오늘 우리는 그 도시 문명의 혜택을 받아 누리고 있게 된 것입니다.
산업혁명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산업혁명 이전에는 한 사람이 생산에서 판매까지 모두 도맡아 했습니다. 하지만 산업혁명이 오고 나서는 분업이 가능해졌습니다. 내가 원하는 일, 내가 잘하는 한 가지 일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래서 대량 생산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1-2. 삼위일체의 동역
사람들은 어떻게 협업을 하고 분업을 해야 살 수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을까요? 언제부터일까요? 고대부터 사람들은 함께 협동하고 나누어 일하고, 그래서 생존해 왔고 지금까지 인류는 생명을 유지해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도 협동하고 함께 일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고." 여기서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창조 시에 성부 하나님만 계시지 않았습니다. 성자 예수님도 계셨고 성령 하나님도 함께 계셨습니다. 그래서 창조 시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함께 협업하시고 동역하셔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천지 창조 이후에 하나님은 인간과 동역하시며 동식물들의 이름을 사람에게 지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노아 홍수 시절에도 하나님이 직접 방주를 만드시면 금방, 아주 견고하게 멋지게 만드실 수 있었을 텐데, 사람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노아가 배 하나 만드는 데 120년이 걸렸습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배를 만들어야 했지만, 하나님은 인간과 함께 일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도 예수님의 제자들과 함께 다니셨습니다. 그들을 세워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그리고 그의 아들 예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우리 인간과 함께 일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을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동역이라고 해서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손을 내밀라" 하실 때 손을 내밀기만 하면, 여기서부터 동역이 시작되고, 하나님과 손잡고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동역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복된 동역자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회당의 두 부류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밀밭에서 논쟁을 하셨습니다. 밀밭 논쟁을 마치고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회당에는 어떤 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몸이 아픈 환자였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막 3:1)
2-1. 손 마른 자
한쪽 손이 말랐습니다. 그는 원래부터 그 회당에 출입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환자였습니다. 손이 말라 있으면 손이 뒤틀립니다. 비틀어집니다. 얼마나 부끄러웠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손을 아마 감쌌을 것이고, 손을 가슴에 품고 다녔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 저 구석 어디엔가 앉아서 주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내가 오늘 나을 수 있을까?' 기대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또 한 부류의 사람이 그 성전에는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감시하는 감시자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막 3:2)
예수님을 주목하고 주시하는, 도끼눈을 뜬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안식일에 예수님이 과연 이 사람을 고치시는가, 고치시면 고발하려고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는 오늘 처음 온 아픈 환자가 아닙니다. 이 회당에 늘 출입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만약에 안식일 논쟁을 피해 가시기를 원하셨다면, "내일 다시 만나자, 오늘은 안식일이니 내가 너를 고칠 수 없구나, 내일 다시 보자" 하고 아마 그를 돌려보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성품상 그렇게 하지 않으실 것을 이 사람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고발하기 위해서 도끼눈을 뜨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분노하셨습니다. 너무 화가 나셨습니다. 그래서 이 환자를 가운데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감시자들을 향해 주님께서 질책하십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막 3:4)
안식일에 선을 행해야 되겠느냐, 악을 행해야 되겠느냐? 생명을 살려야 되겠느냐, 생명을 죽여야 되겠느냐? 어떤 것이 옳으냐? 주님의 말씀이 틀린 것이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씀하시니 그들은 잠잠하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2-2. 영혼이 마른 자
지금 여기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한 부류는 몸이 아픈 사람입니다. 가운데 세웠습니다.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은 영혼이 아픈 사람들입니다. 영혼이 말라서 뒤틀려 있고 비틀려 있습니다. 마치 여름 가뭄에 논바닥이 쩍쩍 갈라지는 것처럼, 예수님을 감시하는 사람들, 바리새인들은 영혼의 촉촉함이 없습니다. 마음밭이 완전히 갈라져 있습니다. 그들은 영혼이 비틀려 있는 사람, 영혼이 뒤틀린 사람들입니다.
아마 이들이 정상적이라면 이렇게 했어야 옳습니다.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오시자, "주님, 여기 이 사람은 우리 회당에 늘 출입하는 환자인데, 지금 마침 주님을 만났으니까 이분 손을 좀 고쳐 주십시오. 우리가 어떻게 해도 낫게 할 방도가 없습니다. 이분 손을 고쳐 주십시오." 그렇게 해야 정상 아닙니까?
그런데 안식일에 주님께서 병을 고치시는지 고치지 않으시는지 보자, 고치기만 하시면 우리가 고발하고 말겠다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영혼의 촉촉함, 따뜻함, 인간에 대한 애정, 인간에 대한 긍휼, 인간에 대한 예의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손이 마른 사람이야 주님께서 고쳐 주시면 됩니다. 하지만 영혼이 말라서 비틀어져 버린 사람은 어디서, 어떻게, 언제부터 손을 대어야 하겠습니까? 심각한 문제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사람에 대한 애정, 사람을 바라볼 때 긍휼한 마음을 가지고 형제와 이웃을 바라보고 계십니까? 아니면 사람을 바라볼 때 딱딱하고 규정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는 마음, 그 마음으로 사람을 바라보고 계십니까?
얼마 전 주일 오후에 어떤 한 불교 신자가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봉투를 하나 주셨습니다. 우리 교회 성도를 도와달라고요. 그 사연은 이렇습니다. 우리 교회 집사님 한 분이 교회 성도 중에 아주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 이야기를 자기 일터에 가서 나누셨습니다. 도와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우리 교회에 이런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이 있는데 마음이 너무 아프다고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같이 일하던 그 불교 신자가 내가 돕고 싶다고 하며 봉투를 준 것이죠. 그래서 우리 집사님이 "이것은 당신이 교회 목사님을 만나서 직접 전달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하고, 주일 오후에 저에게 모시고 온 것입니다.
저는 그분의 따뜻함, 사람을 향한 자비, 사람에 대한 긍휼에 크게 감동했습니다. 생면부지의 사람 아닙니까?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마음에 큰 감동이 된 것입니다. 제가 물어봤습니다. "자녀가 몇입니까?" "아이가 셋입니다." 아이 셋을 키우고 있는 가정입니다. 무엇이 넉넉해서, 무엇 내놓을 것이 있어서 그렇게 돕겠다 하셨겠습니까?
불교 신자도 이렇게 마음의 따뜻함과 긍휼을 가지고 베푸는 데 애쓰고 있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구원받은 주님의 자녀들 아닙니까? 우리 마음이 어떻습니까? 우리 영혼은 어떤 마음으로 이웃을 바라보고, 형제를 바라보고, 상황을 보고 계십니까?
얼마 전에 신문 기사를 보았습니다. 지금 국회에서 계류 중인 법안이 한두 건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 나라의 백성들과 국민들을 더 행복하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 법안이 제출되는데, 이 법안들이 국회 상임위도 통과하지 못하고 시간이 지나면 자동 폐기된다고 합니다. 정치인들, 국회의원들은 백성들을 사랑하고 국민들을 섬기도록 뽑고 세워두었는데, 그분들이 당리당략과 정파의 이익 때문에 그 일을 감당할 시간이 없습니다. 관심이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 나라 백성들은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시간들을 자꾸만 보내고 살아가야 합니다.
정치인들, 국회의원들이 가장 관심을 가져야 되는 것은 백성들의 마음, 국민들을 더 행복하게 만들기 위한 사람에 대한 애정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사람을 바라볼 때는 마음이 우선 따뜻하고 촉촉하고, 우리 마음이 은혜로 충만해야 됩니다. 그 어떤 것도 사람을 사랑하는 것, 그 이상이 될 수 없습니다. 어떤 절차나 어떤 규정이 있다 하더라도, 예수께서 그 형제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는데, 그 어떤 것도 우리가 형제를 향한 사랑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부디 오늘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사람을 보고 있는지, 이웃을 살피고 있는지, 우리 마음을 살펴보시고, 은혜 가운데 따뜻한 마음 가운데 거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손을 내밀라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가운데 세워놓고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막 3:5)
3-1. 부끄러움을 넘어
주님께서 이 환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손을 내밀어라." 내밀었습니다.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하셨을까? 주님이 왜 이 사람을 가운데 세우셨을까? 손이 말라 비틀어져 있으면 얼마나 부끄러울 텐데, 사람들 가운데 서서 이 손을 꺼내야 하고, 손을 붕대로 감고 있다면 풀어야 되고, 그리고 사람들에게 내놔야 되는데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차라리 주님께서 아무도 모르게 저 구석에 가서 남 모르게 기도해 주시고 그리고 치료해 주시지, 왜 한가운데 세우셨는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예배, 그리고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몰라서 하는 말씀입니다. 예배에 나오는 자, 회당에 나오는 자, 하나님의 성전에 나오는 자는 내 부끄러운 모습, 내 연약한 모습, 심지어 내 죄된 모습, 내 강팍한 내 모습까지 다 하나님께 그대로 나타내 보여야 됩니다. 그대로 다 하나님께 내 손을 보여야 됩니다.
"하나님, 저는 이런 상태입니다. 저는 이런 악한 자입니다. 지난 한 주간 내 삶을 돌아보면, 저는 사람들에게도 용납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던 사람입니다. 저는 생각하는 것도, 과거도, 현재도, 그리고 내 내면도 이렇게 추악합니다." 하고 주께 손을 내밀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에 나오는 우리에게 꽁꽁 싸매고 감추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을 열고, 너의 손을 가슴에서 꺼내라, 붕대를 감고 있다면 붕대를 풀어라, 네 손이 뒤틀려져 있다 할지라도, 말라 있다 할지라도, 내가 고치겠다 말씀하십니다.
그 옛날 에스겔 골짜기에서 마른 뼈들도 하나님께서 다 살리셔서 하나님의 군대 되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이 오늘 내가 부끄럽다고 감추고 있는 내 모습, 사람에게가 아니라 하나님께 내놓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고치시고 역사하시고 함께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와서 사람에게가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예배 전에 10분 일찍 와서 앉아 있으면 우리 마음이 하나님께 어떻게 향하고 있습니까? 한 주 동안 있었던 이야기들, 사람에게는 말할 수 없었던 은밀한 이야기들, 주께 손을 내밀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주께서 이 손 잡으시고, 그때부터 동역이 시작됩니다.
내가 손을 내밀어야 주님이 내민 손 붙잡을 수 있습니다. 내가 손을 내밀면 주님께서 이 손 붙잡고 하나님과 동역의 길을 함께 걸어가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과 함께 일하기를 원하시고 동역하시는 은혜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3-2. 기도의 은혜
기도도 역시 그렇습니다. 기도할 때 많은 분들이 이런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신다면 왜 기도해야 됩니까?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시고, 내 형편도 아시고, 내 마음도 아시고, 내가 바라는 것 다 알고 계신데, 그럼 알아서 다 이루어 주시면 되지, 내가 왜 기도해야 됩니까?" 하고 질문합니다.
이건 기도를 해보지 않은 분들이 하시는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기도를 하면 훨씬 더 많은 은혜를 받습니다. 예를 들어 물질의 문제가 있습니다. 물질 때문에 힘이 들어서 "주님, 물질 좀 채워 주십시오" 하며 이 물질 때문에 붙들고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기도하다 보면 물질 문제는 온데간데없고, 하나님이 나에게 주셨던 은혜가 감격스러워서 그 은혜에 흠뻑 빠져서 기도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나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해서 감사의 기도를 하고, 나 같은 못난 죄인을 구원해 주신 그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해서 감사만 나옵니다. 내 연약함 하나님께 올려드리고, 감사 기도하다가 처음에는 물질로 시작했는데 끝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찬양하는 것으로 기도가 끝맺습니다.
원수 때문에, 나를 압제하고 핍박하는 원수 때문에 "하나님, 저 원수 좀 어떻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를 시작했다면, 기도하다 보면 내가 기도하다가 원수를 축복하고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요. 한 가지 문제를 가지고 기도했는데 열 가지, 스무 가지 은혜를 우리는 덧입게 됩니다.
그래서 주께서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기도하라, 훨씬 더 큰 은혜가 너희에게 임할 것이다. 원하는 것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네가 몰랐던 것까지 기도를 통해서 깨닫고 은총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간증도 마찬가지입니다. 간증을 듣는 분은 듣고, 그리고 나서는 잊어버립니다. 내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간증을 하는 분들은 준비하다가 내가 은혜받습니다. '내 일생이 이랬구나. 내가 이렇게 형편없는 사람이었구나. 그런데 하나님이 나를 사람 되게 하시고 살게 하시는구나.' 준비하다 은혜받습니다. 간증하면서 은혜받습니다. 내가 입으로 내 삶을 나누면서 은혜받고, 간증하고 난 이후에 조심하며 은혜받습니다. 그러면서 성장하고 성숙해 가는 것입니다.
그 옛날 예수님 시절에 예수님이 사람들이 많이 몰려가는 곳으로 길을 가셨는데, 어떤 한 여인이 예수님의 뒤에 와서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예수님에게서 능력이 나갔습니다. 주님이 그걸 느꼈습니다. 그 여인은 12년을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었습니다. 여인에게서 혈루증은 부끄러운 병입니다. 예수님에게 말하지도 못하고 뒤에 와서 옷자락이라도 만지면 은혜를 덧입을까 싶어 주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나았습니다.
주님은 자신에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아셨습니다. 그럼 주님은 가시던 길 가고, 그 여인은 삶으로 돌아가서 행복하게 살면 될 것 아닙니까?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길을 멈추십니다. "누가 내 몸에 손을 대었느냐? 나에게서 능력이 나갔다. 누구냐? 나오라." 하십니다.
처음에 여인은 숨었습니다.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끝까지 찾으십니다. 심한 심리적 압박을 느낀 여인이 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 "너의 형편을 여기 있는 사람에게 말하라" 하셨습니다. 여인이 지난 12년 동안의 고통스러웠던 시간들, 그 과거를 울며불며 자신의 이야기를 다 쏟아냅니다.
여인은 몸도 치료받았지만, 그 시간들을 통해서 자신의 억눌렸던 시간, 서러움 받았던 시간, 고통스러웠던 순간들을 다 함께 치료받았던 것입니다. 주님은 손을 내밀라 하십니다. 너의 형편을 나에게 말하라 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과 동역하는 그 시작은 우리의 형편을 주께 아뢰는 데부터 시작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손 내밀어, 손 좀 잡아보자" 하시면, 주님께 손 내미시고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하나님의 백성 되시기를 바랍니다.
4. 동역의 길로
환자의 병이 나았습니다. 회당에서 잔치가 일어나야 되지 않겠습니까? 매일같이 우리 회당에 출입하는 자가 손을 싸매고 살았는데, 이분이 손의 나음을 받았습니다. 잔치가 일어나고 사람들이 축하하고 축복하고 야단이 나야 되는데, 현실은 정반대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막 3:6)
바리새인들은 이때부터 예수를 죽이려고 마음에 결단했습니다. 자기들이 짜놓은 견고한 믿음의 틀, 견고한 율법의 틀이 예수님의 두 번의 안식일 논쟁으로 급격하게 흔들린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자신들의 틀이 흔들리는 걸 느끼고 자신들의 존재가 불안해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불의한 정치 권력 헤롯당을 찾아갑니다.
헤롯당에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사람들에게 인기몰이를 하고 있습니다. 굉장히 위험한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다니지만, 저들이 언제 적대 세력이 되어서 정치적 적대감을 헤롯 당신에게 드러낼지 모르는 일입니다. 저들을 없애십시오."
바리새인이라는 말은 원래 '분리된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거룩해지고 구별되기 위해서, 스스로 율법을 잘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 거하기 위해서 떨어져 나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이제는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합니다. 이들은 하늘에서 내리는 은혜의 단비를 거부하며 그릇을 엎어 놓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러면 아무리 많은 비가 내려도 한 방울도 자신의 마음의 그릇에는 은혜를 담을 수가 없습니다. 그릇을 똑바로 해놓아야 됩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고, 예수님이 이 땅에서 은혜의 단비를 마음껏 부어 주시는데, 그릇을 뒤집어 놓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불행한 사람들입니까? 이러니 이들의 마음이 말라 비틀어지고, 이들의 마음에는 사람과 영혼을 향한 긍휼이 생길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의 은혜를 주시고, 찬양으로 은혜를 주시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시고, 손 내밀라고 말씀하시면, 이때가 은혜가 부어지는 때인 줄로 믿습니다. 이때 하나님을 향하여, 주님을 향하여 우리 손을 내미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은혜가 시작되고 역사가 시작됩니다.
주님과 함께 손잡고 동행하며 아름다운 동역의 길을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