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강 / 바람 같은 성령 (3:20-35)

바람 같은 성령

마가복음 3장 20-35절

영화 「빠삐용」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이 영화는 앙리 샤리에르라는 사람이 쓴 자서전을 원작으로 합니다. 그가 겪은 일이 너무나 놀랍고 대단해서 사람들은 크게 충격을 받았고, 1972년에 더스틴 호프만 주연의 영화로 먼저 제작되었습니다. 최근에는 같은 영화가 리메이크되어 상영되기도 했습니다. 영화의 내용은 대략 이러합니다. 프랑스 파리에서 건달처럼 살아가던 빠삐라는 한 남자가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살인 사건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누명을 씁니다. 그는 프랑스가 남미에서 식민지로 다스리던 영토에 있는 악명 높은 교도소로 보내집니다. 빠삐는 교도소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탈옥을 꿈꿉니다.

실제로 그는 두 번에 걸친 탈옥을 감행합니다. 첫 번째는 우발적인 탈옥이었고, 두 번째는 치밀하게 계획한 탈옥이었습니다. 그러나 두 번 다 실패하고 맙니다. 그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그는 배를 타고 '지옥섬'이라 불리는 곳으로 다시 이감됩니다. 그곳은 사방이 깎아지른 절벽이어서 탈옥은 꿈도 꾸지 못할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곳에 들어가서 며칠 후 친구에게 하는 말이 놀랍습니다. "여보게, 나는 이제 드디어 이곳을 나갈 수 있게 되었네. 이제는 진짜 탈옥을 할 수 있게 되었어." 친구는 어이가 없어서 그저 웃기만 합니다. 그런데 그가 한 말에는 일리가 있었습니다. "저 흐르는 바닷물에 내 몸을 던지면, 조류가 되어 나를 육지로 보내줄 것 같네."

실제로 그는 이를 실행에 옮깁니다. 한 사람이 겨우 탈 수 있는 물건을 만들어 먼저 바다에 던지고, 자신도 절벽에서 몸을 던져 그것을 붙잡습니다. 그리고 흘러가는 바닷물의 조류에 몸을 맡깁니다. 그렇게 흘러흘러 육지에 도착하여 마침내 탈옥에 성공합니다. 이 영화에서 크게 감동받은 것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앞선 두 번의 탈옥 시도는 자신의 계획과 노력에 의존했으나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 성공한 탈옥은 흘러가는 바다의 조류, 곧 자연에 자신의 몸을 맡겼을 때 이루어졌습니다.

신앙생활도 결국 이와 같지 않겠습니까? 내가 생각하는 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만 신앙을 유지한다면 한 치도 성장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가져왔던 삶의 방식들, 내가 계획했던 것들을 하나하나 이루어가는 것만으로는 신앙의 성장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신앙이 성장하고 믿음이 자라며 몸과 영혼의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바람같이 불어오시는 성령에게 흘러가는 대로 내 몸과 영혼을 맡길 때 비로소 가능한 일입니다. 오늘 읽은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이러한 진리를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들려주십니다.

신앙의 연수와 영적 깊이

예수님께서는 몰려드는 사람들을 피해 산으로 가셨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오니 잠시 피하시고, 그곳에서 열두 제자를 세우셨습니다. 그 제자들을 훈련시켜 사람들을 제자 삼아 교회다운 공동체를 만들어가기 원하셨습니다. 그곳에서 열심히 제자 훈련을 하고 계실 때, 두 부류의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사역과 일을 부정하는 사람들입니다.

첫 번째 부류는 예수님의 친족들입니다.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막 3:21)

예수님의 친족들이 어디선가 무슨 이야기를 듣고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나와 그를 붙들러 왔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들었을까요? 아마 사람들이 이렇게 전했을 것입니다. "당신의 친척 예수가 우리 유대인들의 율법을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어렵게 쌓아놓은 우리의 질서와 기존의 율법 체계를 다 허물어뜨리고 있으니, 어서 와서 그를 잡아가십시오. 그 사람은 귀신 들린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의 규정을 하나님의 뜻대로 해석하셨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라 하셨고, 안식일에 사람을 고쳐주시며 사람을 세우는 일을 하셨습니다. 이 일을 사람들이 친척들에게 전했고, 이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러 온 것입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은 주님과 적어도 30년 이상을 함께 알고 동행했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날 때부터 주님을 깊이 알았고, 어떤 분인지를 잘 알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이 방금 제자로 부르신 사람들, 그들은 주님을 안 지 얼마 되지 않은 분들입니다. 주님을 알았다 해봐야 1년이 채 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의 연수가, 주님을 알았던 시간이 믿음의 넓이와 폭과 깊이를 과연 결정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3대째 믿고 있다, 4대째 믿고 있다, 신앙생활을 30년, 40년 하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과연 신앙의 깊이와 믿음의 질을 결정하는 것일까요? 이 질문 앞에 우리는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은 30년 이상 예수님을 알았던 사람들인데, 어떻게 이토록 예수님의 본심과 진심,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이렇게 몰랐을까요? 이것은 예수님과 깊이 있는 영적 교제와 대화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오늘 우리도 신앙생활을 수십 년 해왔거나 몇 대째 내려오는 믿음의 가문을 자랑한다 하더라도, 주님과 깊이 있는 영적 교제를 나누지 않는다면, 주님과 깊은 대화를 함께 나누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들처럼 무례한 일을 범할 것입니다. 오히려 신앙의 길고 긴 시간이 주님의 사역을 방해하고,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하며,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는 죄짓는 일로 이어질 것입니다.

신앙생활 오래 하셨으나 주님과 깊이 있는 교제 없이 그저 가방만 들고 교회를 출입하셨던 분들이 오히려 성령의 사역을 방해하는 일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교회에 하나님께서 주인 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신데, 그런 분들이 오히려 교회의 머리가 되려 하고 교회 공동체를 좌지우지하려는 일들을 비일비재하게 보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과 깊이 있는 교제 없이,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과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일이 없기 때문에 일어난 불행입니다. 신앙생활에 길고 긴 세월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과 얼마나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느냐, 얼마나 주님과 대화하고 있느냐, 얼마나 영으로 주님과 가까우냐를 고민하고 여기에 집중하시는 하나님의 백성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해석의 능력

두 번째로 주님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그가 바알세불이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막 3:22)

예루살렘에서 서기관들이 내려왔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하는 말이 가관입니다.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시며 엄청난 사역을 하시는 것이 귀신 들려서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모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이 말을 들으시고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만약 내가 사탄의 왕인 바알세불을 힘입어 이런 일을 한다면, 같은 편끼리 싸우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항변하셨습니다.

서기관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말 그대로 율법을 필사하고 적어서 책으로 엮어내는 사람들입니다. 인쇄기가 없었던 시절에 구약의 율법을 하나하나 베껴 적는 일을 했던 분들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말씀이 많이 입력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제사장들이 서기관들을 데리고 다니며, 어떤 상황이 닥치면 제사장이 묻습니다. "이 상황에 꼭 맞는 말씀이 무엇인가?" 그러면 서기관이 펼쳐서 읽어줍니다. 서기관들은 말씀을 거의 다 외다시피 하는 사람들, 구약의 율법에 정통하고 박식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왜 이런 어이없는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일까요? 문제는 이들에게 해석의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왜 주셨는지, 정말 이 말씀을 통해 하시고자 하는 의도와 뜻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 이것이 해석입니다. 해석하지 않고 말씀을 자꾸 그대로 들이대면, 이것은 사람을 옥죄는 올무만 될 것입니다.

요즘 신문 지상을 보면 우리 땅의 많은 기업인들이 이 땅을 떠난다는 보도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요? 규제가 너무 많아서, 공무원들이 규제 철폐에 앞장서지 않아서, 사업을 해보려 해도 좋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일하려 해도 규제가 너무 많아 일할 수 없어서 보따리 싸서 외국으로 떠난다고 합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요? 나라의 일을 맡으신 분들이 규정과 법을 자꾸 그대로 들이대기 때문입니다. 법의 정신, 법의 이상, 사람을 사랑하고 공평과 정의와 사람을 위하는 것을 가지고 법을 해석하지 않는 분들이 문제입니다. 이렇게 자꾸 그대로 들이대면 사람들에게 상처만 줄 뿐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안식일에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불도 피우지 말지니라" (출 35:3)

이 규정이 성경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는 안식일 규정입니다. 아마 서기관들은 이 율법책을 들고 다니며 집집마다 방문했을 것입니다. 안식일에 불을 피우는지 아닌지 확인하고, 불 피우는 집이 있으면 벌금을 매기거나 행정조치를 취하며 벌을 주었을 것입니다. 자꾸 그대로 들이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서기관들이 해야 할 일은 이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를 찾아내고 그것을 가지고 가르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안식일에 불 피우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 안식일에는 하나님께 나와서 예배드리는 것이 가장 급선무라는 뜻입니다. 안식일에 불을 피우지 않고 예배를 잘 드리면, 먹고 살 걱정 위해 불 피우는 것보다 하나님이 너희 먹고 살 것을 책임지신다는 말씀입니다. 서기관들은 이것을 해석해서 가르쳐 주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해석입니다. "하나님은 너희들 먹고 살 걱정 없이 다 책임지실 것이다. 안식일에 불 피워서 밥 해 먹을 걱정하지 마라. 먼저 예배드려라. 그러면 하나님이 모든 것 다 돌보시고 책임지신다." 이 말씀을 하나님은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르쳐야 합니다.

또 하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구약의 율법에서 만나는 하나님을 두렵게 느낍니다. 심판하시고 벌 주시는 하나님, 사람을 죽이시며 가만 두지 않으시는 하나님, 피를 보셔야 끝장나는 하나님. 이런 하나님과 신약의 예수님이 어떻게 일치될 수 있느냐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을 잘못 해석한 결과이며 오해입니다.

노아 홍수 사건 하나만 보더라도 하나님이 얼마나 자비로우신지 잘 드러납니다. 노아 시대 때 믿음 생활을 하는 사람은 노아 한 사람, 노아의 가정 한 가정뿐이었습니다. 세상에 악이 관영하고 다 썩어져 가며 모든 사람이 부패했습니다. 당장 세상을 심판해도 이상하지 않으리만큼 세상은 썩어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를 짓게 하십니다. 자그마치 120년 동안이나. 120년의 시간을 하나님이 기다리고 유예하신 것입니다. "이 시간 동안 한 사람이라도 돌아오면 내가 너희들을 맞아주겠다." 120년의 기간을 하나님은 참고 참고 또 참고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은 하나님 인내의 시간이요, 사랑의 시간이요, 긍휼의 시간이십니다.

120년 동안 방주가 다 지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홍수를 내려야 하는데 일주일만 더 기다려보자 하셨습니다. 7일만 더 기다려보자, 돌아오는 사람이 있는지. 하나님은 120년 하고도 7일을 더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심판하셨습니다. 문제는 세상을 심판하시게 된 이유입니다. 사람들이 악에 관영하고 아무도 120년 하고 7일 동안 기다려도 돌아오는 사람이 없었기에, 사람의 마음의 강퍅함과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을 듣기를 거부하는 인간의 완악함이 문제인 것이지, 그것을 심판하는 하나님이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그렇게 해석하고 그렇게 바라봐야 합니다.

여기 서기관들은 말씀을 해석해 주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많이 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해석의 능력입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이해하며, 어떻게 받아들이고, 내 인생이 말씀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인가. 말씀이 나에게 들어와서 내 인생이 어떻게 변화되어 가는가. 이것이 더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까? 오늘 우리는 그것에 집중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영적 예민함

주님께서는 자기들 신앙의 연수만 자랑하는 자들, 말씀을 자꾸 그대로만 이해하고 해석하지 못하는 자들을 책망하십니다.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 (막 3:29)

이런 자들을 주님은 성령을 모독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섭지 않습니까?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영원히 죄가 된다,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성령이 무엇입니까? 성령은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영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루아흐, 하나님의 영. 성령은 숨결, 하나님의 호흡, 바람입니다. 불어오는 바람이 어디에서 오는지 눈에 보이십니까? 흘러가는 바람을 손으로 잡을 수 있습니까?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으로 잡을 수도 없는 성령. 이 성령을 우리가 느끼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예민해야 합니다. 민감해야 합니다.

눈을 감고 가만히 있을 때, 바람이 어디에서 불어오는지, 내 코끝을 간지럽히고 내 뺨을 타고 어디로 흘러가는지 집중하고 오감을 곤두세울 때 그때 바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령도 우리에게 바람처럼 임하시고 바람처럼 흘러가는 영입니다. 성령의 역사를 느끼고 성령의 역사에 발맞추어 살아가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하고 예민해야 합니다.

신앙의 연수가 바람 같은 성령을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많이 알고 외우고 있다고 해서 성령의 능력, 바람 같은 성령을 내가 경험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문제는 영적으로 예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영적 예민함은 언제 어떤 방식으로 나타날까요? 이것은 우리 인생에 위기가 닥칠 때 나타납니다. 평소에는 잘 알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 보면 갈릴리 가나 혼인잔치 사건이 나옵니다. 혼인잔치집에서 이틀이 지나고 사흘째 되던 날에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비상입니다. 유대인의 혼인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다면 이제 잔치를 접어야 하는 형국입니다. 일주일 동안 잔치를 해야 하는데 포도주가 떨어졌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먼저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하인들을 불러모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시든지 그대로 행하라"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영적으로 민감하지 못하고 이 위기 상황에 성령의, 흘러오는 바람에 예민하게 반응하지 못했다면, 마리아나 하인들이나 허둥지둥대었을 것입니다. 평소에 자기들이 알던 방식대로 행동했을 것입니다. 포도주가 떨어지면 양동이를 하나씩 다 들려서 하인들에게 온 동네 방방곡곡 가서 포도주를 구해오라고 했을 것입니다. 포도주를 구해온들 그 포도주가 남은 5일간의 잔치를 다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혹시 한 이틀 지나다가 다시 포도주가 떨어지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집 저 집에서 빌려온 포도주는 섞여서 맛도 이상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힘으로는, 내 인간의 계획과 노력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빠삐가 감옥에 갇혀서 자기 방식대로 탈옥하려 했다가 실패한 것처럼, 인생의 위기가 닥치면 이때는 눈을 감고 예민하게 성령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바람 같은 성령에게 기대고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하게 구하면 주께서 우리에게 길을 알려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돌항아리 여섯이 있는데 여기에 물을 가득 채워라." 가득 채웠습니다.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주라." 연회장이 그것을 먹는 순간 물이 아니라 포도주였습니다. "이렇게 놀라운 포도주를, 이렇게 맛있는 포도주를 지금까지 두었구나. 어디다 두었다가 지금 가져왔느냐!" 극찬을 했습니다.

우리 인생에도 어려운 일이 닥치면, 인생의 위기와 어려운 일이 다가오면, 내가 하던 방식대로 행동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주님을 30년, 40년 알아온들 주님과 깊이 있는 대화가 없으면 내 방식대로, 내가 원하는 길대로 걸어갈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리 많이 알고 있어도 해석하는 능력이 없으면 나는 성령을 모독하는 씻을 수 없는 죄를 범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너희들은 성령을 모독하는 자들이 되지 말라. 성령은 바람같이 임하는 것이니 집중하고 예민하게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고 계실 때, 마침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 동생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들을 가리켜 보시고 주님께서 결정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막 3:33-35)

혈육의 어머니, 혈육의 친척 가족들이 문제가 아닙니다. 수십 년 동안 혈연 관계로 있었다고 해서 내 가족이 아닙니다. 어려울 때 깨어서 성령의 음성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바람 같은 성령을 의지하는 자, 그런 자들이 하나님의 가족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결론

오늘 우리는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짓지 않기를 바랍니다.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첫째는 신앙의 연수가 아닌 영적 깊이가 중요합니다. 수십 년 동안 신앙생활 했다고, 말씀을 많이 외우고 알고 있다고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얼마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깊이 있는 영적 대화를 나누고 있느냐입니다.

둘째는 말씀을 해석하는 능력을 길러야 합니다. 말씀을 글자 그대로만 적용하면 사람을 옥죄는 올무가 됩니다. 말씀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와 마음을 깊이 읽어내고, 그 정신을 삶에 적용하는 해석의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셋째는 성령의 음성에 영적으로 예민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영적인 예민함을 세워 살아가는 자가 하나님의 가족이 될 것입니다.

바람같이 임하시는 성령님이 어디에서 불어오시고 어디로 가시는지, 정말 예민하게 깨어 있지 않으면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주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그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영적 예민함을 세우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영적인 안테나를 곧게 세우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시는 말씀을 귀를 열고 마음을 열어 듣게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