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라사 광인을 만나다 (막 5:1-20)
영국의 소설가 오스카 와일드가 쓴 동화 가운데 「이기적인 거인」이라는 아름다운 글이 있습니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 소개될 때 「거인의 정원」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습니다. 아마 아이를 키우는 가정에 이 책 한 권쯤은 있을 것입니다.
거인이 오랜 기간 친구네 집에 머물다가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와 보니 자신의 정원이 엉망이 되어 있었습니다. 동네 아이들이 들어와서 어지럽히고 뛰어놀아서 거인이 화가 머리끝까지 났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다 내쫓습니다. 그리고 울타리를 높이 칩니다. 표지판도 세웠습니다. 출입 금지.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그 정원 바깥에는 봄이 왔고 아름다운 꽃이 피고 새들이 지저귀는데, 거인의 정원에는 봄이 오지 않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거인은 궁금했지만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어느 날 거인이 정원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듣습니다. 반가워서 뛰어나가 보았습니다. 조그마한 틈으로 아이들이 기어 들어왔고, 아이들이 그 정원에서 뛰어놀고 있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새들이 따라 들어왔고, 새들이 앉는 곳마다 아이들이 손대는 나무마다 꽃이 피고 새들이 지저귀고 봄이 찾아온 것입니다. 놀랍게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 정원 저 구석에 있는 한 그루 나무에는 아직 봄이 오지 않았습니다. 꽃이 피지 않았고 새들이 거기에 앉지 않습니다. 거인이 가까이 가보았더니 어린아이 하나가 그 나무 아래에서 울고 있습니다. "너는 여기서 왜 울고 있니?" 하고 물어보니까 아이가 대답합니다. "제가 키가 작아서 나무에 손이 닿지 않습니다." 그래서 거인이 아이를 번쩍 안아서 나무 위에 올려주었습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나무에 꽃이 피고 새들이 찾아왔습니다. 그 나무에도 봄이 온 것입니다. 그 아이는 거인의 뺨에 입을 맞추어 주며 고맙다고 인사했습니다.
그때부터 거인은 울타리를 다 치워버렸습니다. 담장을 다 부숩니다. 표지판도 뽑아냅니다. 아이들이 와서 마음껏 뛰어놀라고 허락해 주었습니다. 얼마나 행복한지 거인은 그 광경을 지켜보며 즐거워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거인이 안아서 올려주었던 그 아이가 보이지 않습니다. 친구들에게 묻습니다. "얘들아, 그 어린아이 보지 못했니?" 아이들은 모르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시간이 지났습니다. 거인은 늙었고 병이 들었고 한겨울이 찾아왔습니다. 그 겨울에 거인은 봄을 기다리며 자기 방에 누워 있습니다. 새소리가 납니다. 나가보니까 한 그루 나무에 하얀 꽃이 피었습니다. 반가워서 가까이 가보니 그때 그 어린아이가 반갑게 웃고 있습니다. 너무 반가워서 어디 갔다 왔느냐고 물어봅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상처투성이였습니다. 손에도 상처, 발에도 상처가 났습니다. 거인이 화가 났습니다. "누가 너를 이렇게 만들었느냐. 내가 가서 혼내주마." 그때 그 아이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닙니다. 이것은 사랑의 상처입니다. 아저씨가 나를 당신의 정원으로 인도해 주셨으니, 이제 제가 당신을 나의 정원으로 인도해 드리겠습니다. 나의 정원은 바로 천국입니다." 그리고 그 거인은 자신의 정원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 어린아이는 그리스도임에 틀림없습니다. 오스카 와일드는 아마 그 어린아이를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형상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동화에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교훈은 고립과 단절은 결코 우리 마음에 봄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소통하고 서로 사랑을 나누고 마음을 열고 생각을 나눌 때, 우리 영혼에도 하나님이 준비하시는 아름다운 봄이 곧 찾아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에 이렇게 마음을 열고 서로 소통하라고 말씀하시고, 사람도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우리 인생에는 찬란한 꽃이 피고 새들이 속삭이고 아름답게 변화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 이야기는 바로 그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광풍 이는 바다를 지나오셨습니다. 얼마나 두려웠을까요? 제자들이 그곳에서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깨닫고 고백하고, 이제 이방인들이 사는 지역으로 건너왔습니다. 광풍을 지나니 제자들과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광인이었습니다. 미치광이였습니다. 광풍을 지나서 이제 좀 편안하게 육지에 도달했나 했더니, 무서운 사람이 제자들과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1. 고립된 삶의 비극
성경은 그 광인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3절입니다.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도 그를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무덤 사이에 거처한다고 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마을에 거처하지 않습니까? 주변에 집도 있고 공동체도 이루는 그곳에 거처하는데, 이 사람은 마을에 거처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살지 않는 무덤 사이에 거처하고 있었습니다. 고립된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공동체와 유리되고 격리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결국 자기를 해치는 사람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 말할 것도 없이 이 사람은 미치광이, 광인입니다. 돌로 자기를 자해하고 있는 사람을 정상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분명히 미치광이지만, 우리와 정말 다른 사람입니까? 오늘 이 시대에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이런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자신도 이런 사람의 한 부류일 수 있습니다. 공동체와 하나 되지 못하는 사람, 하나님께서 우리를 공동체로 함께 살게 하셨는데 스스로 고립의 길을 걷는 사람, 스스로 분리의 길을 걷는 사람이 바로 이런 인생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며 결국 그 마지막은 자신을 해치게 하고, 스스로 고립되어서 절망하고 낙심하다가 자기 자신이 자신의 발목을 찍는 어리석은 삶을 사는 사람일 것입니다.
1-1. 공동체를 위한 창조
하나님께서는 원래 사람을 지으실 때 공동체 안에 살도록 하셨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가정을 이루어 주셨지 않습니까? 아담을 창조하시고 아담 혼자 사는 것을 보고 하나님은 마음이 아팠습니다.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돕는 배필 하와를 지으셨습니다. 서로 만나게 하시고 사랑하게 하시고 가정을 이루어 그 가정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가정을 주셨습니다.
가정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교회 공동체도 허락해 주셨습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서로가 사랑을 나누고, 서로의 마음을 토로하고, 힘든 것을 위로받고 살도록 하나님이 교회를 주셨습니다. 시편 133편 1절에 보면 교회 공동체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연합과 동거, 교회는 스펙트럼이 굉장히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학벌이 다르고, 지역이 다르고, 지향하는 정치적 색깔과 목적이 다른 사람들, 성별이 다르고 나이가 천차만별인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그런데 이런 분들이 모여서 함께 연합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가 되고, 함께 동역하고 동거합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원하셨습니다.
1-2. 분리를 꾀하는 사탄
그런데 반대로 사탄은 이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사탄은 가급적이면 분리시키려고 하고, 가급적이면 떨어뜨려 놓으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성도들이 모이면 하는 것이 단순하지 않습니까? 둘 이상의 성도들이 모이면 어떤 일을 합니까? 당신의 기도 제목을 듣고 내 기도 제목을 나누고 서로 함께 기도합니다. 성도들이 모이면 함께 찬양합니다. 모이면 찬양하고, 모이면 기도하고, 함께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기 원하고 성경을 공부합니다. 삶을 나누고, 우리가 살면서 겪는 어려움과 고민과 갈등들을 성도들이 함께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에서 답을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사탄이 좋아하겠습니까? 절대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성도들이 하나가 되고 연합하고 동거하는 것을 가급적이면 깨뜨리려고 합니다.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라도 말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보도를 보면 1인 가구가 많아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물리적으로, 공간적으로 1인 가구가 많아지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영적인 1인 가구가 많아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혼자서도 나는 신앙생활 아무렇지도 않게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나는 교제 없이도 나눔 없이도 혼자서 하나님 앞에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그랬습니다. 아브라함과 조카 롯이 함께 하나님이 주신 가나안 땅에 잘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 사이에 갈등이 있었습니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탄은 그렇게 사소한 문제를 파고듭니다. 아브라함과 조카 롯이 서로 떠나갑니다. 롯은 소돔과 고모라로 자신의 거주지를 옮겼습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지 않는 악한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가서도 나는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불행하게도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마지막 결과가 어떻게 됩니까? 그의 마지막 결과는 사망이요, 멸망이요, 패망이었습니다. 공동체를 떠나 살아가는 사람들의 그 마지막이 얼마나 비참한 결말인지 성경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 여기 이 거라사의 광인도 사람들이 사는 곳을 떠나서 무덤 사이에 거처하고 있고, 결국 스스로 자기의 몸을 해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1-3. 예수님을 거부함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도 거부하고 있습니다. 6절과 7절을 보십시오.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하니."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왔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해서, 자신의 인생에 받아들이기 위해서 이렇게 반갑게 달려온 것이 아닙니다. 자신과 거리를 두기 위해서입니다. "주님, 나에게 상관하지 마십시오. 나는 이렇게 사는 것이 좋으니 나를 멀리 떠나가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이 내 인생 깊숙이 들어오는 것을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부담스럽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내 인생에 깊이 개입하시면 내가 주의 말씀에 이끌려서 살아가는 것이 너무 부담스럽고 힘겹기 때문에, 그냥 이 정도 거리를 두고 사는 것이 좋겠다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불행으로 가는 그 시작임을 사람들은 모른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오늘 여기 이 거라사의 광인도 혼자 살아가고, 스스로 자신을 해롭게 하고, 찾아오신 예수님과 거리를 두려고 하는 이 불행한 모습, 혹시 이 모습 속에 우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내 인생을 파고들어서 내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주장하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너무 부담스럽고 힘겹기 때문에, "하나님, 이제 조금만 거리 두고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혹시 그렇게 삶을 구하고 사는 분들은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모습을 원치 않으십니다. "나는 네 속에 들어가서 거하고 싶다. 내가 너 안에, 너희들이 내 안에, 우리가 하나 되는 삶을 살아가자꾸나." 우리 주님이 그렇게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요청하시고 초대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한 영혼의 가치
우리 주님께서 이 거라사의 광인을 하나하나 고쳐가십니다. 9절을 보십시오.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르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주께서 이 사람의 이름을 물으십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 사람의 이름을 물은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을 지배하고 있는 악한 영의 정체를 물어보신 것입니다.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군대입니다. 우리가 많습니다.
그런데 여기 '군대'라고 표현된 것은 레기온(λεγιών), 즉 로마의 1개 군단 규모의 병력을 말합니다. 로마의 1개 군단 레기온은 오천 명을 정원으로 하는 대규모 군대입니다. 무섭지 않습니까? 두렵지 않습니까? 사탄이 이렇게 집요합니다.
2-1. 사탄의 집요함
사탄이 한 영혼을 파괴하기 위해서, 한 영혼을 인격적으로 완전히 파괴하고 자기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1개 군단 오천 명의 마귀 졸개들을 보냈습니다. 대장 사탄 마귀가 자신의 휘하에 있는 오천 마리의 마귀를 한 영혼을 파괴하기 위해서 보냈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모습을 보며 전율을 느껴야 됩니다. 두려워하셔야 됩니다.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너무나 비효율적인 일입니다. 한 사람을 파괴하기 위해서 오천 마리의 마귀를 보낸다는 사실, 비효율적이지 않습니까? 군대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고지를 장악하고 쟁탈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목적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 위해서 오천 마리의 휘하에 있는 마귀를 보냅니다.
이것은 마귀가 하나님을 모방하고 따라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의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보잘것없는 나를 위해서, 이 한 영혼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늘의 높고 높은 보좌에 계신 당신의 가장 귀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말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진 그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나를 위해 보내신 것입니다. 사탄이 그 하나님을 모방하고 따라 합니다. 한 영혼을 파괴하기 위해서 한 군대를 보내는 이 사탄의 무모함, 그런데 오늘 우리는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계십니까? 교회는 한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 어떤 수고를 아끼지 않고 있습니까?
2-2. 영혼 구원의 헌신
물질을 쏟아부어야 하고, 시간을 쏟아야 하고, 열정을 쏟아야 하고, 우리의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쏟아야 그 한 영혼을 구원하고 제대로 하나님 앞에 세워 갈 텐데, 교회가 효율성을 따지고 있습니다. 투입과 산출을 계산하고 있습니다. 이만큼 투자했으니 이만큼 뽑아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합니다. 세상의 경제 논리가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 한탄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사람 하나를 세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세상에 공중에 권세 잡은 사탄이 붙잡고 있는 이 한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물질이 문제가 아닙니다. 가능하면 얼마나 많은 물질을 투자해서라도 이 사람을 건져 올리려 하지만, 돈으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을 투자해야 되고, 마음을 다해야 되고, 애쓰고 힘쓰고, 수십 명, 수백 명이 달라붙어도 한 영혼을 구원할까 말까 합니다.
교회에서 다음 세대를 세우는 사역이 있습니다. 한 명의 어린아이를 믿음의 어른으로 성장시키기 위해서 교회는 수고를 아끼지 않아야 됩니다. 머릿수대로 돈을 계산하고 예산을 계산하는 그런 관습에서 탈피해야 됩니다.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 아이를 하나님의 그리스도의 성숙한 인격에까지 성장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다 쏟아부어야 됩니다. 적어도 사탄보다는 나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사탄 마귀가 한 영혼 파괴하기 위해서 오천 마리를 보내는데, 우리는 그보다는 더 나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데,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말입니다. 창세기 14장에 보면 소돔 왕이 아브라함을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과 롯의 가정이 전쟁에 휩싸여서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소식을 듣고 가서 조카 롯과 그의 가족과 사람들을 구출해 옵니다. 소돔 왕과 조우했습니다. 세상에 소돔 왕이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내게 보내라. 그러나 전리품과 물건과 돈은 네가 가져라." 세상에 권세 잡은 왕들도 사람 귀한 줄 압니다. 사람은 나에게 보내고, 이 전쟁을 통해서 네가 얻은 모든 물질은 하나도 나에게 가져오지 않아도 좋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도 영혼 귀한 줄 알고 사람 귀한 줄 압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들은, 교회는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까? 우리 가정의 자녀들, 우리 교회에서 성장하고 있는 귀한 어린 생명들, 우리 옆사람, 옆자리에 앉으신 하나님의 백성들, 그들을 위해서 우리는 적어도 사탄보다는 더 나은 수고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래 원하시는,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간절하게 애쓰고 노력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2-3. 돼지보다 귀한 영혼
우리 주님께서 이 사탄의 궤계에 반응해서 이렇게 이 영혼을 구원하십니다. 11절에서 13절을 보십시오. "마침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는지라 이에 간구하여 이르되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하니 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매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돼지 이천 마리가 돈이 얼마나 될까? 한 마리에 이 정도 돈인데 이천 마리면 어마어마한 돈인데, 예수님이 이 주인에게 돈을 물어주셨을까? 예수님이 주인에게 배상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천 마리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천 마리만 바다에 몰살시키셨습니다. 만약 여기 오천 마리가 있었다면, 만 마리, 이만 마리가 있었다면 그 수많은 돼지를 다 바다에 몰살시켜서라도 한 영혼을 구원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을 것입니다.
한 영혼이 어찌 돼지 이천 마리와 비길 수 있겠습니까? 한 영혼이 어찌 돼지 따위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9장 25절에서 한 영혼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온 천하와 한 영혼,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한 영혼을 세상 전부보다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 하셨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주님, 굳이 이 돼지 이천 마리를 이렇게 희생하고서 한 영혼을 구원하셔야 되겠습니까? 주님의 능력이라면 그렇지 않아도 되셨을 텐데요." 당연히 그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돼지 한 마리도 손대지 않고 그들에게서 군대 귀신을 내쫓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왜 이렇게 하셨느냐? 이 당시에 있는 사람들, 오고 오는 모든 인류, 오늘 우리에게도 교훈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한 영혼이 이렇게 귀하다는 사실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너희들, 사람을 돈과 비교하지 마라. 사람을 살리는 데 물질 따위와 절대로 비교하지 마라. 사람을 돈의 가치로 환원시키지 마라." 이것이 우리 주님의 마음이었습니다.
부디 오늘 우리가 살아가시면서, 영혼 구원하는 데 그 어떤 가치보다 한 영혼이 정말 귀하다는 사실을 우리 주님처럼 마음에 새기고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내 사랑하는 아내도, 내 남편도, 우리 자녀도 세상보다 더 귀한 사람들이고, 나도 하나님께서 정말 사랑하시고 귀하게 여기시는 뜨거운 한 사람의 존재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변화된 삶과 사명
이렇게 해서 주께서는 이 영혼을 구원하셨습니다. 변화된 이 사람의 모습을 봅시다. 18절입니다.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변화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뭐라고 말합니까? "예수님, 배 타고 가지 마십시오. 저도 주님과 함께 있고 싶습니다. 저도 주님 따라가면 안 될까요?"
원래 이 사람은 공동체를 싫어했던 사람입니다. 사람들을 떠나서 무덤에 거했던 사람이고, 자신의 몸을 자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도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며 멀찍이 떨어지기를 원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제 변화되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거하기를 원했고, 공동체 안에 함께 살기를 원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놀라운 변화입니다.
주께서는 이런 자에게 은혜를 허락해 주시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 집으로 돌아가서, 너와 비슷한 삶을 살아가는 자들을 해방시켜 주어라. 그들에게도 이 놀라운 사실을 전파하라. 사명을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이 말씀에 비추어 보면, 우리는 혹시 스스로 영적인 1인 가구를 자처하고 살지는 않으십니까? 하나님은 그 모습을 원치 않습니다. 공동체로 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말씀을 향하여 생각의 모든 세포까지 개방할 때, 우리의 영혼에 꽃이 피고 새들이 찾아올 것입니다. 닫혀졌던 우리 영혼에 봄날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 귀한 은혜를 함께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한 영혼이 온 세상, 그 어떤 가치보다 소중하고 귀하다는 사실, 그 사실을 마음에 깊이 새기고 영혼을 다른 세상의 물질과 비교하지 마시고 환원시키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한 주간 승리하며 살아가는 주의 백성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