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강 / 짚산장수와 우산장수 (5:21-34)

짚신장수와 우산장수 (막 5:21-34)

어머니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첫째 아들은 짚신장수였고, 둘째 아들은 우산장수였습니다. 어머니는 항상 걱정이었습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짚신장수 아들이 신발 한 켤레도 팔지 못할 텐데 그것이 늘 염려가 되고 걱정이었습니다. 날이 맑은 날에는 우산장수 아들이 걱정이 됩니다. 이렇게 맑은 날에 누가 우산을 살 것인가, 염려로 끊일 날이 없었습니다. 이래도 걱정, 저래도 걱정을 하니까 동네 사람 중에 한 분이 말했습니다. "아니 어르신, 걱정하지 마십시오. 날이 맑으면 짚신장수 아들이 돈을 많이 벌어 올 것이고, 날이 궂으면 우산장수 아들이 돈을 벌어 올 것인데 뭣이 그리 걱정이십니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이 이야기는 보는 관점에 따라서 우리가 걱정할 수도 있고, 또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면 염려할 것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 이 이야기를 그런 긍정과 부정의 관점으로 볼 것이 아니라, 자식을 걱정하고 사랑하는 어머니의 마음, 연민하는 마음, 그 긍휼이라는 마음으로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세상의 모든 이치는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같은 날씨라도 모든 사람들이 다 행복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행복하면 누군가는 걱정하고 염려하게 되어 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온 세상이 다 하나로 연결되어 있지 않습니까? 환율의 등락에 따라서 어떤 기업은 웃고 있고, 어떤 기업은 도산 직전까지 가기도 합니다. 경제적으로도 이런 일이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만 행복하면 그뿐인가, 나만 행복하면 온 세상이 다 행복한 것인가, 나만 좋으면 그만이지 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 자녀답게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실 때는 이 자녀나 저 자녀나 다 동일하게 안타깝고,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하나님의 말씀은 그런 우리 주님의 따뜻한 마음, 긍휼하신 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1. 회당장 야이로의 간청

예수님께서 거라사 지방에 가셔서 한 광인을 고쳐 주셨습니다. 공동체에서 유리되었고 돌로 자신의 몸을 상하게 하고 있는 사람, 우리 주님이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 그를 고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다시 배를 타고 유대인들이 사는 지방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그 지방의 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수많은 인파들이 나와서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는 중에 한 특별한 사람이 눈에 띕니다. 그분은 바로 회당장 야이로였습니다.

오늘 말씀 22절을 보십시오. "회당장 중에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기 이후 성전 생활을 할 수 없었습니다. 성전이 무너져 내려앉았고, 불탔고, 다 훼파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이스라엘 백성, 유다 공동체는 회당을 중심으로 모였습니다. 회당에서 말씀을 배우고 성경을 공부했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배워 익혔습니다. 그래서 회당은 그들의 삶의 중심이었고, 전통의 중심지였고, 신앙이 전승되는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회당의 장이 바로 회당장 야이로였습니다. 회당에서 장쯤 되려고 하면 나이가 지긋해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유대인 전통에 능통한 사람으로 유대인 전통의 수호자 역할을 자임한 어떤 사람이었습니다. 나이가 지긋하고 전통의 수호자 역할을 감당했던 사람, 도대체 그가 어떤 이유로 예수 앞에 무릎을 꿇은 것입니까?

그 당시 예수님은 유대인들 입장에서 보면 전통을 파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안식일 규정을 가지고 논쟁을 일삼았고,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면서 그들이 지금까지 생명처럼 지켜왔던 율법과 법칙, 삶의 터전들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것도 이제 겨우 서른이 넘은 이였습니다. 그런데 전통의 수호자, 율법을 가르치고 전승하는 야이로는 회당장으로서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 사연이 23절에 있습니다.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이분에게는 한 어린 딸이 있었는데 그 어린 딸이 이제 사경을 헤매고 있습니다. 이 딸을 살리도록 하기 위해서 이 아버지가 얼마나 많은 일을 했을까요. 이 병원 저 병원, 좋은 의원을 다 찾아다녔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을 기세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제 마지막으로 많은 병자들을 고쳤다고 이야기하는 청년 예수 앞에 와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내가 전통을 수호하는 사람이고 회당장이고 나이가 많은 사람이지만 그런 것 아랑곳하지 않고 주님 앞에 고개를 숙이고 엎드립니다.

누가복음 8장 42절 말씀을 보면 이 딸에 대해서 조금 더 정보를 주고 있습니다. "이는 자기에게 열두 살 먹은 외딸이 있어 죽어감이러라 예수께서 가실 때에 무리가 밀어 들더라"

이 딸이 12살이라고 말하고 있고, 외동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2살 된 외동딸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아버지로서는 못할 일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주님 앞에 엎드린 것입니다.

2. 열두 해 혈루증 여인

예수님께서 앞장서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 집에 가서 네 딸을 고쳐 주마. 가보자." 예수님과 함께 야이로의 집에 급하게 발걸음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한 여인이 나타났습니다. 그 여인이 예수님과 야이로 앞에서 팔을 막아서고 "못 갑니다. 저를 고쳐 주십시오"라고 한 것이 아니고,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해서 뒤로 돌아서 갔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 옷자락을 손으로 살짝 잡았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에게 어떤 사연이 있었느냐 하면, 이 여인은 열두 해 동안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이었습니다. 12년이나 혈루증으로 고생하면서 이 의원 저 의원, 이 병원 저 병원을 다녀 보았고 여러 사람을 만나 보았지만 오히려 몸이 더 상했습니다. 병세가 더 위중해졌습니다. 돈만 다 허비해 버렸습니다. 이런 여인이 주님의 뒤에 가서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2-1. 대조되는 12년

우리는 오늘 이 여인과 야이로의 딸을 함께 같은 선상에 놓고 보고자 합니다. 어떤 공통점이 있습니까? 12년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야이로의 딸은 12살이 되었고, 이 여인은 열두 해 동안 혈루증으로 고생하고 있었던 여인입니다.

야이로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야이로가 12년 동안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그는 사실 가지지 못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전통의 수호자임을 자임하면서 명예를 가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은혜를 구하고, 예수님이 내리는 배에서 기다리고 소망했지만, 그러나 모든 사람들을 뒤로 물리고 자신이 주님 앞에 엎드릴 만큼 그는 권세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권력도 있었고 권세도 있었고 물질도 있었는데, 그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 부족한 것이 자녀였습니다. "우리 집에 자녀 하나만 있으면 참 좋을 텐데."

그런데 늘그막에 하나님이 그 가정에 자녀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것도 너무나 예쁜 딸을. 그 딸이 자라면서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걷기 시작하면서 그 재롱을 보면서 아주 즐거워 했을 것입니다. 말을 하면서 "아빠, 엄마" 부를 때는 세상을 다 준다 해도 이 딸을 바꿀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건강하게 성장하고 자라고 있는 딸을 보며 그는 마음이 행복했습니다. 인생의 가장 행복하고 즐거웠던 12년을 그는 보내고 있었습니다. 일생의 최고의 정점이었습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 그 모든 세월과 비교해 봐도 지금처럼 행복했던 시간이 없었습니다.

2-2. 고통의 12년

그런데 같은 하늘 아래, 똑같은 하늘 아래서 인생의 가장 비참하고 힘든 삶을 살고 있는 한 여인이 똑같은 12년의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상상력을 한번 발휘해 보십시오. 이 여인이 어떤 고통을 겪어야 했을까요.

여인은 가난했지만 행복한 결혼을 꿈꾸고 한 건실한 청년을 만나서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병이라는 불청객이 찾아옵니다. 그것도 몹쓸 병이었습니다. 혈루병이었습니다. 율법이 정한 유출병의 일종으로, 이것은 부정하다고 여겨지는 병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남편과 함께 마음을 모아서 한번 이 병을 고쳐 보자 하고 같은 마음으로 병 치료에 온갖 노력을 기울였을 것입니다. 돈이 많이 들어갑니다. 돈을 다 탕진합니다. 처음에 그렇게 사랑스러웠던 남편의 눈이 차츰차츰 싸늘하게 식어 갑니다. 그 당시에 전통적인 가부장 체제에서 남편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이혼할 수 있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아마 이 여인은 남편에게도 버림받았을지도 모릅니다. 물질도 잃고 건강도 잃고 가정도 잃고, 가진 것 하나 돋은 것 없이 살아갔던 이 여인의 고통, 이제는 어디에 마음 둘 곳, 몸 둘 곳 없어서 힘겹고 어려운 세월을 보내고 있는 이 여인의 12년.

어떻게 같은 하늘 아래 이런 희비의 쌍곡선이 있을 수 있을까요.

3. 주님 앞에 만난 두 사람

그런데 우리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앞에서 인생의 최고의 정점을 보내고 있었던 야이로와, 이 생에 가장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밑바닥 인생을 살고 있었던 이 여인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야이로 입장에서 보면 "아니, 내가 행복한 것이 이 여인의 불행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행복해서 이 여인이 불행하라고 내가 저주했습니까? 내가 행복한 만큼 이 여인이 불행하도록 하나님은 그렇게 인생을 설계하셨습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이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우리가 주변을 살펴보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인생의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같은 하늘 아래에서 정말 힘겹고 어려운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는 사실을 살펴보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공동체성의 가장 중요한 한 부분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3-1. 공동체의 책임

만약 야이로가 목회하고 있었던 이 회당 공동체에 이 여인이 성도였다면, 야이로는 이 회당의 회당장 아닙니까? 회당장으로서 그는 인생의 가장 행복하고 복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저 구석에 와서, 한 그늘에 와서 죄인이라서 고개도 들지 못하는 모습으로 12년을 왔다 갔다 했다면, 이것은 야이로에게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여인의 안색이 좋지 못하면 "자네, 도대체 무슨 고민이 있습니까? 가정에 어떤 어려움이 있습니까? 한번 속 시원히 털어놔 보십시오. 혹시 제가 이 문제를 함께 짐을 지고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르니 한번 말씀해 보십시오." 손 내미는 은혜가 필요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12년 동안 이 여인은 어떤 곳에서도 돌봄을 받지 못하고 인생의 저점으로 끊임없이 내려가고 있었다는 사실이 야이로의 곁에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야이로와 이 여인을 주님 앞에 만나게 하셨습니다. 희비의 쌍곡선을 주님 앞에서 만나게 하시고, 야이로 눈을 떠서 이 여인의 고통을 직접 보라고, 당신이 가장 행복하고 즐거웠던 시간에 이 여인은 이런 고통을 당하고 있었노라고 만나게 하셨습니다.

3-2. 서로 돌보는 공동체

건강한 공동체는 나만 잘 먹고 잘사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2장 4절 말씀에서 하나님의 공동체가 어떠해야 함을 말씀합니다. "각각 자기 일을 돌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자기의 일을 돌보는 것은 기본에 속하는 것입니다. 내가 내 일 잘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당연히 해야 될 일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어디쯤 오고 있는지, 혹시 저 뒤에 뒤쳐져서 넘어져서 울고 있지는 않은지, 무릎팍이 깨어져서 피가 철철 나고 있지는 않은지, 함께 일으켜 세워서 같이 업고라도 모시고 같이 와야 하는 것이 공동체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면 건강한 공동체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돌아보는 것은 기본이고 주변을 살펴보라. 우리 교회 공동체가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공동체라면, 주변 이웃들과 주변 성도들, 나와 함께 지금 예배 드리고 있는 옆사람의 안색까지도, 그분의 모습까지도 살펴보는 지혜가 우리에게 필요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나라는 전쟁 이후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해 왔습니다. 경제적으로 발전하고 성장했습니다. 정치적으로도 민주화를 이루어 내었습니다. 하지만 저 북녘 땅의 동포는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저 북녘 땅에 있는 동포들이 지금도 고난 가운데 힘겹고 어려운 눈물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면, 이것은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만 잘 먹고 잘살고, 우리만 번영을 이루고, 우리만 행복하게 사는 것이 능사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같은 민족으로서 같은 동일한 책임을 우리에게 부여하셨습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너만 잘하면 된다고, 너 하나만 잘 먹고 잘살면 되지, 주변을 왜 돌아봐야 하냐고." 그런데 그렇게 살면 결국 거라사의 광인과 다를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자기만 잘 먹고 잘사는데, 하나님께서는 더불어 잘사는 사회, 함께 걱정하고 함께 염려하고 같이 기도하고 손잡아 이끌어 주는 사회를, 그런 교회 공동체를 하나님은 지금도 원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야이로 앞에 여인을 세워 놓으신 것입니다. 내가 이 여인을 어떻게 치료하고 고쳐주는지 똑똑히 보라고, 이것은 네가 해야 될 일이었다. 회당장이 어찌, 너의 책임이었고 너의 의무였는데, 12년 동안 넌 너의 행복을 쫓아 사느라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 내가 이 여인을 고쳐주는 것을 직접 살펴보라고 야이로 앞에서 여인을 고쳐 주십니다.

4. 주님의 전인적 치유

29절을 보십시오.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은지라"

여인이 예수님의 몸에 손을 대는 순간, 옷자락을 잡는 순간 여인의 혈루 근원이 말랐습니다. 병이 치유되었습니다. 원천이 회복이 된 것입니다.

아마 야이로 입장에서 보면 좀 아쉬울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야속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 내가 먼저 예수님께 청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내 딸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집에 가서 딸을 고쳐 준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이 여인은 새치기 한 여인입니다. 순서가 있지 않습니까? 나부터 먼저 고쳐주시고, 우리 가장의 문제부터 해결해 주시고, 그리고 이 여인을 고쳐 주셔야지, 예수님 이렇게 하시면 곤란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주님은 그렇게 하는 분이 아닙니다. "12년 동안 너는 행복했잖니. 12년 동안 네가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이 여인은 가장 힘들고 어려운 세월을 보냈는데, 이제 내가 이 여인을 먼저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내가 무엇보다 이 여인의 고통을 즉시 고쳐 주겠다." 여인이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는 순간 여인의 몸이 나았습니다.

이런 주님이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짚신장수 아들과 우산장수 아들을 둔 어머니의 마음, 두 아들을 향한 그 절절한 어머니의 연민하는 마음과 그 긍휼한 마음이 우리 주님의 마음이십니다. 잘된 아들도 소중하고, 지금 고통받고 있는 자녀도 주님 보시기에는 소중한 자녀입니다. 그래서 12년에 그 세월의 보상을 우리 주님이 지금 즉시 당장 고쳐 주시는 것입니다.

4-1. 사회적 회복

이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주님은 더 나아가서 이 여인을 사회적 죽음에서 붙들어 다시 일으켜 세워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에서 능력이 나간 줄 아시고 발걸음을 멈춥니다. "누가 내 몸에 손을 댔느냐. 즉시 나오라" 하셨습니다. 사실 여인은 이 말을 들을 때만 하더라도, 예수님이 내가 몸에 손대는 것을 알게 하겠어, 그냥 숨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나오라고."

사람들이 답답해졌습니다. 야이로의 마음이 급해집니다. 지금 내 딸이 촌각을 다투는 위기 상황에 있는데, 주님 왜 이렇게 하시나. 두렵습니다. 제자들이 야이로의 눈치를 봅니다.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지금 주님 등을 떠밀어 난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수십 명의 사람이 예수님의 몸에 손을 대지 않습니까? 주님, 사람들이 많이 무리가 밀려 들어서 주님 몸에 손을 대고 있으니까 그런 사람 찾지 마시고 빨리 가십시다."

그러나 주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나오라고, 계속 찾습니다. 여인이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오늘 말씀 32절과 3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시니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여인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아니면 예수님이 이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주님께서 이렇게 하신 이유는 여인을 사회적 죽음에서 살리기 위함입니다. 사실 혈루병이라고 하는 것은 은밀한 병 아닙니까? 은밀한 병이지만 끔찍하다는 소문이 퍼져 갑니다. 좁은 유대 공동체 안에서 병에 걸려서 의사를 찾아갑니다. 의사가 고치지 못했습니다. 또 다른 병원을 찾아갑니다. 이 병원에도 고치지 못했습니다. 가정이 풍비박산 났습니다. 소문이 납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다 알고 있습니다. 쉬쉬할 뿐. 그래서 여인은 어느 공동체에도 끼지 못합니다. 혈루증 앓는 여인이 앉았던 그 자리도 율법에 의하면 부정하다고 했기 때문에, 여인은 항상 부정한 여인으로 낙인찍혀 살아가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고 병이 나았습니다. 그때 병 나은 것을 어디 가서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말한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믿어주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 입증하고 어떻게 증명해 보입니까?

예수님께서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이 여인을 불러내는 것입니다. 너의 과거를 간증해 보라, 네 지난날의 고통을 다 아뢰고 말해 보라. 여인의 입으로 지난날의 고통을 말하면서 자신의 병 났음을 간증하게 하셔서, 더 이상 사회에서 차별받지 않도록, 더 이상 이 공동체에서 외롭지 않도록, 더 이상 여기서 소외되지 않도록, 주님께서 여인을 사회적 죽음에서 건져 올리신 것입니다. 몸만 고쳐주신 것이 아닙니다. 사회적 죽음에서도 여인을 살게 하셨습니다.

4-2. 영혼의 치유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영혼까지 보듬어 주셨습니다. 34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고대 사람들은 병의 근원이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 여겼습니다. 몹쓸 병에 걸린 사람은, 도대체 저 여자가 무슨 죄를 지어서 저런 무서운 병에 걸렸을까? 혹시 저 여인의 조상 적부터 내려오는 죄가 여인을 더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아닌가, 사람들은 그렇게 여겼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라." 여기서 이 평안은 에이레네(εἰρήνη)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구약의 히브리어로는 샬롬(שָׁלוֹם)입니다. 영원한 평안,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 세상에 그 어떤 사람도 흔들 수 없는 온전한 평안. 이것이 바로 샬롬이요, 에이레네의 평안입니다.

"여인아,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이 너에게 입을 대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의 손가락질이 너의 마음을 헤아려 놓지 못할 것이다. 영혼의 평안이 안식을 거하고 이제 용기 내어서 힘차게 세상 가운데 나아가라." 주님께서 그의 영혼까지 보듬어 주시고 만져 주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전형적인 치료입니다. 몸만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관계도 회복시켜 주시고, 영혼까지 치유해 주셨습니다. 이 놀라운 일을 우리 주님께서는 회당장 야이로 앞에서 보이신 것입니다. 야이로가 해야 했습니다. 그가 자신의 행복에 눈이 멀어서 주변 이웃의 고통에 마음 쓰지 못하고 있었던 그 시간을, 주님께서 그의 눈앞에서 치유하시고 고쳐주신 것입니다.

5. 주변을 살피는 신앙

우리는 어떤 크리스천으로 살고 계십니까?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주변 사람들의 고통과 그들의 삶에 무관심한 사람이라면, 우리는 이기적인 사람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해마다 입시철이 되면 자녀를 위해서 기도하는 부모들이 넘쳐납니다. 우리 자녀가 좋은 대학에 합격하고 좋은 직장에 취직하고 돈을 많이 벌고 평생토록 행복한 삶을 살도록 해 달라고 부모들이 기도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내 자녀를 위해서 기도하면서 이 땅의 18, 19살의 어린아이들 중에 대학 입시는 꿈도 꾸지 못하고 직업 전선으로 내몰리는 아이들이 많다는 사실도 우리는 기억해야 됩니다. 그들을 위해 소리 높여 함께 기도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기적인 크리스천에 다름 아닌 모습입니다.

또한 저 북녘 땅에는 지금도 10대들, 19살에 그 태어난 손으로 총을 들고 칼을 들고 전쟁 준비에 여념이 없는 그런 청년들이, 우리 자식 같은 자녀들입니다. 우리 자녀만 위해서 기도하시겠습니까? 북녘 땅에 있는 그 어린아이들, 지금도 일터로 나가야 되는 아이들을 위해서도 함께 기도하는 마음 넉넉한 크리스천이 되셔야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살피라고, 이웃을 돌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경영하는 일터가 잘된다고 사람들에게 자랑삼아 말합니다. "나는 돈도 많이 벌고 사업이 잘된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듣는 어떤 한 성도의 마음에, 나는 하는 것마다 안 되고 너무너무 힘들어서 인생의 벼랑 끝에 서 있는 사람이라면, 나의 무심코 한 자랑 한 마디가 그들의 마음에는 대못을 박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살펴야 합니다. 끊임없이 살피고 돌보고 함께 손잡고 나가는 아름다운 공동체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동체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주님 가르치신 기도에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의 범위가 어디까지입니까? 나와 내 가족? 그렇다면 우리는 이기적인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의 범위가 넓어져야 됩니다. 교회 공동체, 공동체를 넘어서 이 나라 백성, 저 북녘 땅에 있는 동포, 세계 열방까지, 우리의 범위가 확장되면 확장될수록 우리의 믿음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의 깊이도 더 넓어지고 깊어질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 하나님께서는 짚신장수와 우산장수 아들을 두신 부모의 심정으로 지금도 우리 모든 백성들을 살피고 돌본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우리의 눈도 우리의 이웃을 향한 열린 눈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이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하시고 은혜 주시니 감사합니다. 12년간의 인생의 가장 행복한 세월을 보내었던 야이로에게 같은 공동체에 살고 있으면서도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인생의 가장 밑바닥의 세월을 보냈던 여인을 만나게 하시고, 그 여인을 치료하시는 주님을 보게 하셨습니다.

주님,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나만 행복하면 그뿐이라고 생각하는 이기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회개하며 주님께 나아갑니다. 우리 자녀만 잘 되기를 원했던 그런 기도를 주님께 드렸다면, 주여 오늘 우리의 기도의 지평이 넓어지기를 원합니다. 깊어지게 하시고 넓어지게 하시고, 온 세상 만물과 주변의 모든 이웃들을 함께 끌어안고 품어 안는 넉넉한 크리스천들이 되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