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막 5:21-43)
1. 시간과 공간의 주인
철학을 좋아하십니까? 이렇게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철학이 재미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철학자 중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십니까? 저는 철학자 중에 아주 좋아하는 분이 두 분 있는데, 고대에는 플라톤, 근대에는 칸트를 좋아합니다.
칸트 하면 예전 학창 시절에 배웠던 책 하나가 떠오를 것입니다. 순수이성비판, 굉장히 두꺼운 책입니다. 재미없는 책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순수이성비판 도입부에 보면 칸트가 자신의 철학적 기틀을 잡고 규정한 두 파트가 있습니다. 하나는 공간론이고 또 하나는 시간론입니다. 칸트는 자신의 철학을 정초하는 데 있어서 공간과 시간을 철학의 좌표로 삼았습니다. 그것도 틀린 것이 아닌 것이,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공간에 던져집니다. 공간에서 사람들은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시간의 흐름 가운데 던져져서 지금도 살고 있습니다. 공간과 시간은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치고 노력해도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칸트는 그런 측면에서 공간과 시간을 자기 철학의 기초로 삼았습니다.
칸트보다 한 세대 앞선 과학자 중에 아이작 뉴턴이 있었는데, 뉴턴도 자신의 물리학 기초를 공간과 시간으로 두고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바꿀 수 없는 두 가지 기준이 있는데 그것은 공간과 시간이다, 이 안에서 모든 운동이 일어나고 이 안에서 모든 법칙이 함께 활성화되고 있다, 그래서 공간과 시간을 삶의 기준이라고 뉴턴도 말했습니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 절대적이던 공간과 시간이 바뀌었습니다. 아인슈타인 때문입니다. 아인슈타인이 한 가지 실험을 했습니다. 똑같은 시계 두 개를 가지고 하나는 지상에 두고 하나는 비행기에 태웠습니다. 비행기에 탄 시계가 계속 비행을 했습니다.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 시계 두 개를 비교해 봤습니다. 시차가 났을까요, 똑같았을까요? 당연히 시차가 났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다녔더니 시계가 조금 더 빨리 갔습니다. 시간은 중력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중력이 좀 약해진 비행기를 타고 다닌 시계는 시간이 좀 더 빨리 갑니다. 그래서 시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차에 누구나 다 하나씩 가지고 다니는 GPS 장치, 그 GPS에서는 위성에서 주는 신호를 받아서 작동됩니다. 그런데 위성은 이 중력을 거의 받지 않기 때문에 시간이 지구보다 훨씬 더 빨리 움직입니다. 그래서 빨리 움직이는 시간은 거리를 더 벗어나게 만듭니다. 그래서 GPS가 출시될 때는 시간과 거리를 보정하는 장치를 꼭 넣어야 우리가 정확한 GPS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현대 과학은 아인슈타인 이후로 시간과 공간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으로 되었습니다. 영화도 그리고 여러 가지 과학 이론도 이것에 근거해서 지금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믿고 있는 대상, 내가 믿음으로 붙들고 있는 것은 혹시 시간과 공간을 아직도 여전히 절대적인 것이라고 여기고 그 시공의 한계에 매여 있지는 않으십니까?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말씀에 보면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하나님의 것이라고 인정해야 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시간의 주인 아니십니까? 하나님이 이 공간을 창조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시공의 주인이시라면 시간과 공간은 하나님 뜻대로 운행하고 움직여 갈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시간도 공간도 상대적인 것에 다름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2. 야이로의 두려움
2-1. 시간의 한계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말씀은 지난주의 말씀과 연결되는 말씀입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같은 하늘 아래 똑같은 시간 안에서 한 사람은 행복한 12년을 보냈고 한 사람은 불행한 12년을 보냈던 두 사람을 만났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삶의 쌍곡선이 교차했습니다. 야이로는 너무너무 행복한 시간을 보냈는데 딸이 이제 그만 죽게 되었고, 12년을 혈루증으로 앓았던 여인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주께서 여인의 아픔을 보시고 몸도 고쳐주시고 영혼도 고쳐주시고 그리고 사회적 죽음에서도 그를 이렇게 세워 주셨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고쳐주시고 야이로의 믿음을 확장시켜 주시는 말씀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야이로가 예수님을 먼저 잡았습니다. 우리 집에 가서 내 딸을 고쳐 주십시오 하고 예수님과 함께 집으로 가던 중에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예수님 그냥 가시면 될 텐데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뒤돌아보시고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여인이 부끄러워서 나오지 못하자 계속 찾으셨습니다. 그 심한 압박을 견디지 못해서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여인이 자신의 12년간의 고통의 세월들을 하나하나 풀어 놓기 시작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인이 준비해 온 간증문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정갈하게 자신의 인생을 A4 서너 장으로 정리해서 읽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12년 세월을 눈물 흘려가며 콧물을 훔치며 자신의 세월을 계속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앞뒤가 맞지 않고 때로는 순서가 엇갈리고 그러면서 계속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다 들어 봤습니다. 이 여인이 그렇게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구나, 이 여인의 삶을 보니까 나는 그나마 행복한 사람이구나. 주변 사람들은 모두가 은혜를 받았는데 유독 한 사람만 은혜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굴까요? 당연히 야이로입니다.
야이로는 너무너무 마음이 분주했습니다. 급했습니다. 빨리 예수님을 모시고 자기 집으로 가야 됩니다. 아마 생각이 복잡했을 것입니다. 여인의 입을 틀어막을까? 아니면 "예수님 지금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예수님 붙들고 빨리 우리 집으로 모셔 갈까? 이런 복잡한 생각에 야이로는 마음이 복잡했을 것입니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못하고 있는 상황을 보내고 있는데 자신의 집에서 한 사람이 전갈을 가지고 왔습니다.
35절을 보십시오.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당신의 딸이 죽었습니다. 어찌하여 선생을 괴롭게 하십니까? 무슨 말입니까? 이제 예수님은 필요 없습니다. 얼른 집에 돌아오셔서 딸의 장례를 준비하십시오. 그 말씀 아닙니까?
야이로가 이 말을 듣는 순간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그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복잡한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여인에 대한 원망, 예수님에 대한 분노, 그리고 딸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신에 대한 자책, 사랑하는 딸을 내가 이렇게 보내야만 하는가 하는 허망함, 그러면서 절망하고 무너지는 마음으로 그는 몹시 괴로웠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 그를 더욱더 괴롭게 하는 것은 두려움입니다.
그가 한정적인 시간을 설정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딸이 죽기 전까지 예수님을 모시고 가야 되는데, 딸의 죽음이 끝나버리고 나면 딸의 호흡이 끊어지고 나면 이제 예수님 모시고 가는 것이 의미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한계의 시간을 정해 놓고 있었습니다. 딸의 죽음 전까지.
2-2. 비정한 시간
시간은 가치 중립적입니다. 시간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다 고통받습니다. 시간이 가치 중립적이라는 말은 누구에게는 자비를 베풀고 누구에게는 가혹하다는 말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다 비정하게 흐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시간은 아주 무서운 것입니다. 차갑고 냉정합니다. 감정 없이 그냥 흘러갑니다. 배운 사람이나 많이 가진 사람에게도 똑같이 1시간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도 똑같이 1시간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시간을 붙잡아 두려고 해도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비정하고 빨리 흐르고 있는지, 내가 한 상황에 시간을 설정하면 설정할수록 우리는 더 불안하고 초조하고 공포감과 두려움을 느낍니다. 예를 들어 어떤 분이 시험을 준비하는데 한 번 떨어졌습니다. 재수하면 또 떨어졌습니다. 이제 세 번째 시험을 앞두고 있습니다. 배수의 진을 칩니다. 내가 이번에 떨어지면 난 사람도 아니다, 그냥 차라리 죽고 싶다. 그래서 배수의 진을 치고 시험을 준비합니다. 그건 참 좋은 자세인데, 그런데 시험에 또 떨어졌습니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됩니까? 나는 이번 시험이 내 인생의 마지막이라고 설정하고 최선을 다해서 노력했는데 시험에 또 불합격했습니다.
노총각 노처녀들이 나는 올해까지 시집가고 장가가야 되겠다, 올해가 아니면 나는 그냥 늙어 죽고 말 테다, 결혼 안 하고. 이런 마음을 가지고 올해를 기도하고 열심히 버텼는데 12월 31일이 될 때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습니다. 아니야 아직까지 나에게는 금년이 남아 있어, 뭐 이러고 있어도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또 나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내가 정한 시간의 한계는 이렇게 속절없이 흘러갑니다.
40일 작정 기도 하시는 분들이 가끔 있는데, 가장 중요한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기도하시겠죠. 참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20일이 지나가도 아무런 소식이 없습니다. 31일쯤 되면 초조합니다. 35일, 38일, 40일이 되었는데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많은 사람들은 거기서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가, 만약 계시다면 나에게 왜 이렇게 하시는가, 내가 이렇게 간절하게 엎드리고 기도하고 한계 상황을 정해 놓고 기도하는데도 왜 하나님은 나에게 아무런 응답도 내리지 않는 것인가, 내 기도가 어디서 무엇이 어떻게 잘못되어 있는가. 사람들은 거기서 쉽게 낙심합니다. 두렵습니다.
야이로가 느낀 두려움이 바로 그 두려움입니다. 내가 딸의 죽음 이전까지를 한계 시간으로 설정해 놓았는데 그 시간이 지나 버렸습니다. 이제는 내가 돌아가서 싸늘하게 식은 딸의 시신을 마주해야 됩니다. 이게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시간이 지나가 버렸습니다.
3. 두려워 말고 믿으라
3-1.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은 야이로의 두려움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무엇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입니까? 시간의 한계가 지나갔느냐, 두려워하지 마라. 무엇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입니까? 너 낙심하고 절망하고 쓰러져 있느냐, 두려워하지 마라. 무엇을 믿으란 말입니까? 시간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믿어라. 네가 정한 시간이 끝났다고 해서 세상이 끝난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끝장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시간의 주인이시다. 이것을 믿어라.
주께서 그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주께서 말씀을 던지셨습니다. 야이로에게 공이 넘어왔습니다. 이제 야이로는 둘 중 하나의 선택을 해야 됩니다. 첫째 선택은 예수님을 욕하고 돌아서는 것입니다. 나에게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저 여인의 병은 고쳐 달라고 하지 않아도 옷자락에 손만 대도 그렇게 고쳐 주시고 그 사연 다 듣고 계시면서, 내 딸은 촌각을 다투는 이 상황에 주님 나에게 왜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욕하고 원망하고 저주하고 돌아가서 딸의 장례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선택,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셨으니까 한 번 더 믿어 보는 것입니다. 두렵지만 딸의 죽음을 내가 마주하는 것이 무척 두렵지만 한번 믿어 보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야이로로 그 상태 그 자리에 계셨다면. 다행스럽게 야이로는 후자의 선택을 합니다.
3-2. 소녀야 일어나라
예수님과 세 명의 제자들과 야이로가 딸이 죽은 그 집으로 들어갑니다. 사람들이 장례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사람들이 비웃습니다. 시간의 한계를 인정하지 못하는 예수님 그리고 그 아버지를 사람들은 비웃고 조롱합니다. 그러나 그 말을 뒤로하고 예수님이 소녀에게로 다가가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41절과 42절을 보십시오.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Ταλιθα κου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십이 세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달리다굼(Ταλιθα κουμ), 소녀야 일어나라 하셨습니다. 소녀가 일어났습니다.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소녀를 아버지에게 돌려보내 주었습니다.
성경에 이런 일이 곳곳에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나사로가 병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와 그의 가정을 지극히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멀리 계셨는데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주님은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베다니로 가셨습니다. 가보니 이미 나사로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례 지낸 지 나흘이나 지났습니다.
나사로의 여동생 마리아가 예수님을 원망하며 울며 말합니다. 예수님 당신이 여기 계셨다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슬퍼하며 울며 원망하는 마리아에게 말씀합니다.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무엇을 믿으란 말입니까? 네가 정한 인간의 시간을 믿지 말고 하나님이 시간의 주인이심을 믿어라.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나사로의 무덤 앞에 섰습니다. 돌문을 옮겨 놓으라 하셨습니다. 그 앞에 서서 말씀하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말씀하셨습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장례 지낸 지 나흘이나 되었던 나사로가 걸어 나온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소녀야 일어나라" 달리다굼(Ταλιθα κουμ) 이 말씀과 "나사로야 나오라" 이 말씀을 우리에게도 하고 계십니다. 네가 정한 시간의 한계가 무너져 있느냐, 그래서 죽은 자처럼 엎드려 있느냐, 죽은 지 나흘 되고 장사 지낸 지 나흘 된 사람처럼 무덤에 들어가 있느냐, 그렇게 누워 있지 말고 일어나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시간 속으로 들어오라. 너의 인간적 시간의 한계에 갇혀 있지 말고 나의 시간으로 너를 초대하노니 일어나 들어오라. 주께서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4. 하나님의 시간 안으로
4-1. 공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
우리 인간은 여전히 하루 24시간 그 시간의 한계 가운데 갇혀 있습니다. 하나님이 시간을 창조하셨고 하나님이 시간의 주인이신데 이것을 믿지 못하고 살아가는 불쌍하고 연약한 존재가 바로 우리 존재들 아닙니까? 인간은 시간에만 매여 있지 않습니다. 공간에도 묶여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공간을 극복한 위대한 인물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한 백부장이 나오는데 그 백부장에게는 사랑하는 종이 있었습니다.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백부장이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주님 내 종이 죽게 되었습니다. 고쳐 주십시오. 예수님이 가자 앞장서셨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백부장은 "예수님 우리 집에 갈 필요가 없습니다. 이 자리에서 말씀하십시오. 그러면 우리 집에 있는 종이 나을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무척 기뻐하시고 칭찬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중에 이만한 믿음을 내가 찾지 못하였도다. 그리고 말씀하시고 그 즉시 그 집에 있는 종의 병이 나았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이 세상의 중심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가야 환자가 낫는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이 이 자리에서 말씀하시면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에게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서 기도하면 태평양 건너 미국에서 역사가 일어나고, 우리가 이 자리에서 기도하면 저 북녘 땅에 있는 동포들에게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공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온 세상을 창조하신 우리 주님의 능력이 오늘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한계에 갇혀 있습니까? 현대 과학도 현대물리학도 이미 시공을 상대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오늘 우리가 이런 믿음으로 우리 주님께서 "나의 시간으로 들어오라, 일어나라" 이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4-2. 태양을 멈추신 하나님
그렇다면 "나의 시간으로 들어오라"는 의미가 무슨 말일까요? 이 말이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요? 여호수아 10장 12절과 13절 말씀을 보면 우리 하나님께서 당신의 시간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넘겨 주시던 날에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아뢰어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이르되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서 그리할지어다 하매 태양이 머물고 달이 멈추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기까지 하였느니라 야살의 책에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고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모리와 전쟁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모리를 철저하게 진멸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전쟁에 나와서 싸우고 있습니다. 열심히 싸우고 있는데 어느덧 해가 중천을 지나서 서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습니다. 마음이 급해집니다. 해가 지고 나면 그 당시 조명탄도 없던 시절이라 어떻게 전쟁합니까? 여호수아가 갑자기 하늘을 향해서 외칩니다.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지어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태양과 달을 멈춰 세웠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일을 하는 그들에게 하나님은 시간을 무한정 확대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면서 시간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왜 시간이 없다고 말합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시간, 하나님이 바라시는 그 자리, 내가 하나님 열심히 섬기고 봉사하고 하나님 기뻐하시는 그 자리에 있으면 나머지 시간들은 하나님이 태양을 멈추시고 달을 멈춰 세우신 것처럼 우리에게 무한정 시간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악한 사탄 마귀를 진멸할 때까지 태양이 내려오지 않을 것입니다. 공부하는 학생들 열심히 예배드리고 하나님 기뻐하시는 자리에 있으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시간을 압축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십니다. 하나를 배우면 열 가지를 깨닫는 지혜를 허락해 주십니다.
아무리 바쁜 직장인들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을 향하여 시간을 내고 그 시간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께 올려 드리고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고 나면 우리에게는 24시간이 아니라 48시간 그 이상의 시간도 하나님이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4-3. 히스기야의 시간
열왕기하 20장에 보면 히스기야 왕이 나옵니다. 그는 다윗 이후에 이스라엘 여러 왕들 중에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했던 왕이 없다 할 정도로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종교 개혁을 이루어 내었습니다. 성전을 청소했습니다. 산당을 헐파하고 우상을 다 부쉈습니다. 아주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병이 찾아왔습니다. 죽을 병입니다. 하나님께 엎드렸습니다. 수명을 연장시켜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15년의 시간을 연장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니까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시간 속으로 온전히 달려 들어가니 하나님이 그의 시간을 붙잡아 주시고 그의 태양을 중천에 내려오지 않도록 세워 주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시간 안으로 초대받은 존재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시간으로 불러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으로 달려가시기를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의 자리에 있으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자리에서 성실하게 섬기고 봉사하고 일하고 있으면 하나님은 우리의 시간을 당신의 시간으로 영원토록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시간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이제 앞으로의 삶을 믿음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지나온 시간을 살았는데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다고 낙심하거나 절망하거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시간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하나님은 많은 일들을, 위대한 일들을, 크고 비밀한 일들을 나를 통해 성취시키고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그런 놀라운 역사가 앞으로의 삶 가운데 놀랍게 우리 인생에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