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강 / 한적한 곳에 가서 쉬어라 (6:30-31)

한적한 곳에 가서 쉬어라 (막 6:30-31)

짧은 세 가지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이 이야기들에서 두 가지 공통점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아르키메데스 이야기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물리학자이자 수학자였던 아르키메데스는 왕으로부터 왕관에 불순물이 섞여 있는지를 알아내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아무리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연구실에서 아무리 연구해 봐도 알 길이 없었습니다. 너무 고민하고 힘겨워하다가 그만 연구를 던져놓고 목욕탕에 갔습니다. 목욕탕에 들어가서 자신의 몸이 탕 안에 들어가는 순간 물이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 "유레카!"라고 외쳤습니다. 벌거벗은 채로 온 거리를 뛰어다니면서 외쳤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1665년 온 유럽에 흑사병이 돌았습니다. 아이작 뉴턴은 그 당시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물리학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더 이상 학업을 지속할 수가 없었습니다. 역학과 물리 세계에 대해서 열심히 연구하고 공부했지만 더 이상 학업을 지속할 수 없어서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고향에 돌아와서 언덕에 올라가 쉼을 누립니다. 등을 붙이고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며 사색합니다. 그러다가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평소에 고민하고 해결할 수 없었던 문제의 실마리를 잡습니다. 만유인력의 법칙입니다.

세 번째 이야기입니다. 1950년대에 조너스 소크라는 박사가 소아마비 백신 연구를 하고 있었습니다. 연구 막바지에 도달했는데 난제가 풀리지 않습니다. 이리 보고 저리 보고, 연구팀들이 모여서 아무리 연구해도 답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포기할 생각을 하고 짐을 싸서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이탈리아의 한 작은 시골 마을 아시시라는 곳에 도착합니다. 그곳에서 한 성당에 들어갔습니다. '이제 나는 이 연구를 못 하고 나면 뭘 먹고 살까?' 걱정하며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반추하고 있는데, 갑자기 모든 것이 한순간에 정리되는 느낌을 받습니다. 고민하던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즉시 짐을 싸서 다시 돌아와서 소아마비 백신 연구를 완성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거저 받은 은혜라고 여겨서 백신 연구의 특허를 걸지 않았습니다. 전 세계에 무료로 배포했습니다.

1. 쉼의 자격

이 세 가지 이야기에서 두 가지 공통점을 찾으셨습니까? 생각해 보셨습니까? 단절과 쉼은 창조성에 대단히 도움이 된다는 것이 첫 번째 공통점이고, 두 번째는 세 분 다 원래 자기 일을 열심히 하던 분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노력하고 최선을 다하던 분들이 쉼을 얻게 되면, 그 쉼은 그다음을 위한 좋은 에너지를 얻게 되는 귀한 자원이 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놀고 있었는데 또 다른 쉼은 게으름과 노는 것의 연속일 뿐입니다. 그러나 열심히 일하고 조금의 쉼을 누리게 되면, 그 쉼은 그다음을 향한 훌륭한 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는 '워라밸'이라 해서 '워킹 라이프 밸런스', 곧 일과 삶의 균형을 강조하는 시절을 살고 있습니다. 일주일에 52시간을 넘어서 일하면 사용주가 처벌받는 시대입니다. 이토록 일과 여가, 쉼의 균형을 얘기하고 그 쉼을 특별히 강조하는 세대를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누리는 쉼이 진정한 쉼이 되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쉼을 요구하시는가? 이 쉼을 넘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자격을 우린 갖추고 있는가?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쉼을 주는 공동체인가? 쉼의 본질이 무엇인가? 우린 그 쉼에 대해서 생각하면 끊임없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서 그 해답을 하나하나 찾아보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서 파송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둘씩 둘씩 나가서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예수님은 아마 두 가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잘할까 염려도 되지만, 또 한편 기대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 제자들이 가서 예수님의 생각보다 훨씬 더 일을 잘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들이 가는 곳에 병자가 낫고 귀신이 떠나갔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권능으로 그들은 위대한 일을 행했습니다. 온 유대와 팔레스타인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얼마나 위대한 일을 행했던지 헤롯조차 자기가 죽인 세례 요한이 살아났나 여길 정도로, 그만큼 하나님의 일을 많이 이루어 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 큰일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돌아와서 그들이 예수님께 자신이 행한 일을 보고합니다. 30절을 보십시오.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행한 것, 가르친 것을 낱낱이 보고했습니다. 이렇게 상상하시면 됩니다. 우리 자녀들이 학교에 갔는데 시험을 잘 봤습니다. 선생님에게 칭찬을 굉장히 많이 받았습니다. 친구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큰 기쁨을 안고 집에 빨리 돌아옵니다. 엄마 아빠를 앉혀놓고 자신의 무용담을 들려줍니다. 내가 이렇게 어려운 시험을 100점 맞았다고, 그래서 친구들이 다 부러워했다고, 선생님이 나에게 대단한 칭찬을 해주었다고 낱낱이 자신의 무용담을 이야기합니다.

그만큼 제자들은 마음이 벅찼습니다. 제자들이 둘씩 둘씩 흩어져서 동서남북으로 파송 갔기 때문에, 이 두 사람 저 두 사람은 서로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한 일을 바울로메가 모르고, 요한이 한 일을 야고보가 모릅니다. 그렇게 서로 무슨 일을 했는지 보고하며, '아니 당신이 그렇게 위대한 일을 했다고?' 서로 놀라고 있습니다. 서로 순서를 앞다투어 주님께 자신의 일을 간증하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그 보고를 들으실 때 얼마나 흐뭇하셨겠습니까? 얼마나 기뻐하셨겠습니까?

예수님이 열두 명의 보고를 다 듣고 나서 그들에게 쉼을 선물하십니다. 31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열심히 일한 제자들, 쉴 자격이 있습니다. 이건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천지를 6일 동안 창조하시고 7일째 안식하셨습니다. 쉬었다가 일하신 것이 아니고, 열심히 일하고 나서 그다음 쉼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들 열심히 일했으니까 이제는 쉬어도 좋다, 잠깐 쉬는 것이 좋겠다" 쉼을 선물하신 것입니다.

2. 영원한 안식을 향하여

우리는 이 여름에 잠깐 휴가를 가지기도 하고, 이 무더위를 피해서 쉼을 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 전체를 길게 볼 때, 이런 인생이 반복되고 또 반복되다가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떤 말을 하고 하나님 앞에 서겠습니까? 물론 우리가 예수 믿고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은 자명한 진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구원받은 그 구원의 감격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과 달란트를 가지고 얼마나 열심히 일했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안식이 훨씬 더 큰 의미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100세 시대라고들 말합니다. 그런데 이 100세라는 시간은 우리에게 건강한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시간이 100년이 아닐 것입니다. 산술적으로 한번 단순하게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철이 들고, 이제 주님이 맡겨주신 일을 감당해야 되겠다고 시작했던 것이 서른 즈음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몇 년 동안 열심히 일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무릎에 인공 관절이 아닌 내 관절을 가지고, 구부러진 허리가 아니라 곧게 편 허리를 가지고, 침침한 눈이 아니라 맑은 눈을 가지고, 흐릿한 정신이 아니라 깨끗한 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시간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중간에 병을 앓지 않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70 정도, 서른에 시작하면 40년 정도입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시간보다 훨씬 더 짧은 시간을 일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이 시간,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달란트 가지고 우린 얼마나 열심히 일하셨습니까?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어보실 것입니다. "내가 너에게 이런 달란트를 주었는데 얼마나 열심히 일했느냐?" "내 주님, 제가 다섯 개 받아서 다섯 개 남겼습니다." "내 주님, 저는 두 개 받아서 두 개 남겼습니다. 모두 놓치지 않았습니다. 여기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이렇게 말할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 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계시록 14장 13절에는 나중에 천국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실 말씀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이 복이 있다, 지금 이후로 이제는 수고를 그치고 쉬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 앞에 가서, "이제는 너희들이 수고했으니 이제 이 천국에서 영원토록 안식하라" 이런 하나님의 귀한 칭찬과 은혜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주의 백성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이제 하나님께서 영원한 안식을 주실 때 그 안식이 복된 안식이 되고 행복한 안식이 되기 위해서 열정적으로 사명을 감당하시고 달려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쉼을 주는 공동체

3-1. 교회의 본질

또한 이 쉼과 관련해서 교회의 사명을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보셔야 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처럼 우리 교회도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 말씀대로 많은 무거운 짐 진 자들, 수고한 자들이 주님 앞에 가지고 나왔습니다. 인생의 상처와 고민을 가진 자,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가진 자, 가족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고민을 가진 자들 주님 앞에 가지고 나왔습니다. 무거운 죄짐을 가지고도 주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도 주님 앞에 나가서 쉼을 얻었습니다. 주님 앞에 모인 자마다 다 안식을 누리고 회복되어서 세상으로 다시 나갔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 교회 공동체의 본질이라고 한다면, 오늘 이 시대의 교회는 쉼을 제공하는 교회입니까?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면 우린 한 이 주 전에 교회에 대해서 배운 것이 생각날 것입니다. 교회는 부르시고 훈련하시고 보내시는 곳이라 했습니다. 이 교회의 모습과 쉼을 주는 교회의 모습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 생각해 보십시오. 상처 입은 사람들이 교회 공동체에 회복하기 위해서 나오셨습니다. 상처를 싸매어 주는 것이 우선 아니겠습니까? 고쳐야 되지 않습니까? 상처가 치유되어야 되지 않습니까?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다음에 훈련이 있고 그다음에 파송이 있습니다. 상처가 아직 그대로인데, 하나도 치유되지 않았는데, 아직 내 마음이 만신창이인데, 어떻게 훈련하고 어떻게 내보내겠습니까? 그래서 교회는 상처받은 분들을 끌어안고 회복하고 치유하고, 그래서 훈련하고, 그리고 내보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라고 한다면, 오늘 이 시대에 교회들은 그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는가?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쉼을 주는 공동체인가? 회복을 주는 공동체인가? 안타깝게도 오늘 이 시대 수많은 교회들이 쉼과 회복에 인색한 교회 모습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3-2. 교회가 쉼을 제공하지 못하는 이유

왜 그럴까요? 우선은 이 교회가 세상과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오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세상에서 얻지 못한 것을 얻기 위함 아닙니까? 세상과 구별되는 교회를 우리는 기대합니다. 세상은 경쟁이 심합니다. 내가 잡아먹지 않으면 내가 잡아 먹힙니다. 약육강식의 세상이고 적자생존의 세상입니다. 치열하게 경쟁하고 눈을 감을 수가 없습니다. 잠시잠깐 허리를 펴고 호흡을 가다듬고 다리를 뻗을 공간이 없습니다. 더욱 고통스럽고, 그 고통과 경쟁 때문에 살아남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쉬기 위해서 왔습니다. 영혼의 안식을 누리기 위해서, 새롭게 회복되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왔더니 더 아닥바닥하고 더 난리입니다. 이웃 교회와 경쟁합니다. 머릿수를 경쟁합니다. 교회의 규모를 경쟁합니다. 정말 먹고 살기 너무 빠듯하고 힘든데 헌금을 강요받습니다. 시간의 헌신을 강요받습니다. 견딜 수가 없습니다. 눈치 보여 견딜 수 없고, 여기에서 두 다리 뻗고 쉼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이런 곳이 어떻게 교회라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하셨는데, 그 말씀을 믿고 교회에 왔더니 쉴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견딜 수 없고 몸이 견딜 수 없고, 그래서 쉼을 도대체 누릴 수가 없습니다. 이건 교회가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혹 우리 교회가 이런 쉼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도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또 교회가 왜 이런 모습을 보이고 있을까요? 기존에 자리잡고 있는 성도들의 텃세가 알게 모르게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오늘 우리나라에는 가나안 교인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생각으로는 내가 예수의 길을 따라가고 있는데, 교회가 제대로 된 교회가 없습니다. 그래서 상처받았습니다. 그래서 교회와 발걸음을 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나는 나 혼자 성경 보고 나 혼자 은혜 받고 나 혼자 예배드리고 살겠다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데 불현듯 어느 날 내가 공동체를 찾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왔습니다. 교회에 발걸음을 하고, 이제 여기 뿌리를 내려볼까 하는데, 사람들의 시선이 차갑습니다. 지나가면서 한두 마디 하는 것이 내 마음의 상처를 후벼 파고 있습니다.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왜 오셨습니까? 무슨 문제가 있으십니까? 과거는 어떻습니까?" 이런저런 말들이 내 뒤통수와 내 마음을 아프게 하고 힘겹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교회에 정착하지 못하겠다고 떠나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내가 그냥 내뱉는 말들이, 내가 그냥 쳐다보는 내 눈빛이, 그리고 내 행동들이 수많은 사람들의 쉼을 방해하고 있진 않은지요? 교회는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시고, 우리는 주인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인으로 앉고 우리가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말하고 있는 이 완악한 모습을 하나님이 어떻게 보시겠습니까? 교회가 쉼을 주지 못하고 있는 이유 중에 나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 내가 그런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 이 사실 앞에 통렬하게 회개하시고, 하나님 앞에 온전한 모습으로 많은 분들에게 쉼을 제공하는 주의 백성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 쉼의 본질

4-1. 한적한 곳에서

우리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열심히 일하고 온 제자들에게 쉼을 말씀하시면서 쉼의 본질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31절을 한번 더 읽겠습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두 가지 말씀이 아주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한적한 곳에 가서 쉬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한적한 곳'은 그리스 말로 '에레모스'(ἔρημος)라는 단어입니다. 황폐한, 황량한, 광야의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이 말을 듣고 당황스러워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왔는데, 땀 흘리고 왔는데, 수고하고 왔는데, 황폐한 광야로 가라고? 아니, 저 지중해의 에메랄드빛 바다가 보이는 곳에 풀빌라를 제공해 주시고 그곳에서 편하게 두 다리 뻗고 손에 물도 묻히지 않고 쉬게 해 주셔야지, 이게 뭔가?' 아마 그렇게 불편했을 수도 있습니다. 황량한 광야, 햇볕을 가릴 수도 없는 그 뜨거운 곳으로 가라는 것이 벌입니까, 상입니까?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온 자들에게 에레모스(ἔρημος), 황폐한 곳으로 가라는 것이 어찌 보면 벌로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진심은 그것이 아닙니다. 이건 상이요 복입니다. 사람들이 없는 곳, 사람들을 만나지 않는 곳, 이곳에 가야 주님과 독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쉼을 말하면서 끊임없이 사람을 찾아다닙니다. 사람을 만나며, 사람과 대화하고, 사람과 이야기하다 보면 우리의 감정이 소비됩니다. 에너지가 소진됩니다. 우리의 감정과 에너지와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것 마지막 한 방울까지, 1퍼센트까지 다 소비해 버립니다. 그러나 진정한 쉼은 소비가 아니라 충전입니다. 광야, 황량한 곳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주와 함께 교제하며, 하나님과 독대하며, 위로부터 주시는 능력을 덧입는 것, 이것이 진정한 쉼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이 제자들은 굉장히 위험한 상태에 처해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면, '아니 목사님, 제자들이 위험한 상태에 있다뇨? 낭떠러지에 있는 것도 아니고, 열심히 능력 행하고 지금 예수님께 나와 있는데 왜 위험한 상태라고 말합니까?'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위험한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권능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권능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에게 능력을 베풀었습니다. 엄청난 능력을 행했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당신 선생님만 능력이 있는 줄 알았더니 당신들도 능력이 있군요.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떠나보내고, 이런 놀라운 능력을 행하시는군요."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제자들을 보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그때가 위기입니다. 그때가 위험할 때입니다. 사람들이 떠받들어 주고, 사람들이 칭찬해 주고, 당신이 대단하다고 말해 주고, 지금까지 이룬 업적과 능력이 굉장하다고 말해 줄 때, 그때가 위험한 때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람들을 만나서 에너지를 소진하지 마라, 거기서 걸려 넘어지지 마라, 거기가 교만해질 때이니 그 교만에 빠지지 말라, 오히려 단절하고 에레모스(ἔρημος), 광야, 황폐한 곳으로 떠나가라, 그곳에서 하나님과 독대하라, 그래야 진정한 충전과 회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린 어떻게 쉼을 누리십니까? 내 귀에 듣기 좋은 말을 하는 사람들과 가까이하는 것 좋아하지 않으십니까? 그들을 통해서 회복을 얻고 쉼을 누리고, 내 존재감을 인정받기를 원하지 않으십니까? 물론 한순간 충전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길게 가지 못합니다. 또다시 공허해집니다. 또다시 내 마음이 허해집니다. 우리가 진정 휴식을 원하고 충전을 원하시면, 하나님과 독대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사람 없는 곳에서 나와 단둘이 독대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독대하셔서, 우리 인생이 위로부터 주시는 주의 능력으로 충만한 인생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2. 멈춤의 능력

두 번째로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잠깐 쉬어라"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아나파우오'(ἀναπαύω)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데, 합성어입니다. '아나'(ἀνά)는 위로부터, '파우오'(παύω)는 그치다라는 뜻입니다. 말을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너희 하던 일을 멈춰라. 그리고 위로부터 주시는 권능을 덧입어라.'

지금 사실 이 제자들이 사역의 물이 올랐습니다. 사역의 피크를 달리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가는 곳에 능력이 나타나니까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하던 일이 잘되면 멈추고 싶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물 들어올 때 열심히 노를 저어라, 그걸 멈추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고." 그렇게 말합니다. 지금 제자들도 예수님의 말씀에 속으로는 불만이었을 것입니다. '왜 멈추라고 하시지? 왜 사람도 만나지 못하는 광야로 나가라고 하실까? 왜 나에게 아나파우오(ἀναπαύω), 그치라고 하실까? 지금 나는 능력을 행하고 싶은데, 안수하고 싶고 능력을 드러내고 싶고 사람들을 살리고 싶은데 왜 못하게 하실까?'

그런데 멈춰 서 있던 사람이 일어나는 것보다, 잘 달리고 있는 사람이 멈추는 데 더 큰 에너지가 소모됩니다. 관성이 있는 물체를 멈추는 데 두 배 혹은 그 이상의 에너지가 소모된다는 사실입니다. 멈추는 것, 하나님께서 달리는 것 멈춰라 하실 때 그때 멈추는 것이 진정한 능력이고 진실한 믿음입니다.

우리는 다윗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다윗이 멈추었을 때, 그때 하나님의 능력이 배가 되었습니다. 사무엘하 7장 18절을 보시면 다윗의 위대한 능력이 나타납니다.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입니다.

우리는 다윗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물맷돌 돌리며 골리앗에게 달려가던 다윗, 전선을 휘저으며 칼을 들고 "나를 따르라" 했던 다윗, 많은 백성들의 영혼을 구원해 내던 다윗, 항상 전쟁에 제일 앞자리에 서 있었던 다윗, 들판에서 용맹하게 달려갔던 그 다윗만 기억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더 위대했던 다윗은 여호와 앞에 들어와 앉아 있었던 이 모습이었을 줄로 믿습니다.

이 모습은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났느냐?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나서 성전을 건축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찼습니다. 나단 선지자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 여쭈어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거절하셨습니다. "지금은 그때가 아니다. 너는 성전 건축을 할 사람이 아니다."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때 다윗은 하나님 제단 앞에 엎드렸습니다. 들어가 앉아서 기도했습니다. 힘이 있었고 돈이 있었고 권력이 있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먼지를 일으키며 백성들을 일으켜서 하나님의 성전 건축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다면, 이건 하나님 앞에 올바른 모습이 아닐 것입니다. 교만한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멈추게 하실 때, "너는 권력도 있고 돈도 있고 힘도 있는데, 가나 하지 마라, 멈춰라" 하실 때, 멈춰 놓은 모습이 훨씬 더 지혜로운 모습입니다.

나중에 다윗은 훗날 나이가 한참 들어서 그때를 기억하며 시편을 기록합니다. 시편 131편 1절과 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일을 하려고 애쓰지 않겠습니다. 내가 그때 그때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했던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모르겠습니다. 마치 젖 뗀 아이처럼,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하나님 품에서 안식을 누리는 아이가 누리는 행복처럼,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모든 일을 그치고 쉬어도 전혀 행복합니다." 이 고백을 다윗이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부디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진정한 안식과 쉼을 요구하시는데, 우리는 어떻게 쉬고 있으십니까? 이 여름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그 쉼을 잘 쉬어서, 위로부터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채우고 덧입는 시간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열심히 일하고 사명 감당한 자들에게 주님께서 쉼을 허락하셨습니다. 한적한 곳에 가라고 하셨고, 잠깐 쉬고 멈추라고 하셨습니다. 주님, 그러나 우리는 사람을 따라다니며 하던 일 잘되는 것을 멈추려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제는 멈추게 하시고, 한적한 곳에서 주님을 만나는 자들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교회 공동체가 백성들에게 쉼을 제공하는 곳이 되어야 하는데, 교회의 목회 방향과 철학이 그렇게 쉼을 제공하지 못했던 것 회개합니다. 주여,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진정으로 따뜻하게 맞이하고, 사랑의 눈빛과 사랑의 말로 맞이해야만 했건만, 우리의 말과 행동과 눈빛이 그들에게 쉼을 제공하지 못했던 것 회개합니다. 우리 교회가 쉼과 회복을 주는 교회가 되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