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강 / 목자없는 양들에게 (6:32-44)

목자 없는 양들에게 (막 6:32-44)

미국에는 59개의 국립공원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미국인뿐 아니라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국립공원은 그랜드캐니언, 요세미티, 그리고 옐로스톤 정도가 꼽힙니다. 그중에서 옐로스톤은 1872년에 가장 먼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습니다. 경관이 유려하고 아주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 옐로스톤에 1930년대 문제가 생겼습니다. 늑대 때문이었습니다. 늑대 개체 수가 많아지면서 관광객들의 안전을 위협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관광을 하려고 하는데 늑대가 갑자기 나타나서 위협을 하니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그래서 이 문제가 지속되자 사람들은 아주 단순하게 접근했습니다. 늑대를 없애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늑대를 포획하기 시작했고, 결국 늑대는 씨를 말리게 되었습니다. 이제 안전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문제가 더 커졌습니다. 나무가 자라지 않습니다. 숲은 황폐해지고 나무가 자라지 않으니 그렇게 울창하던 수풀이 이제는 더 이상 울창해지지 않습니다. 나무가 자라지 않으니 비버가 통나무로 댐을 만들지 못합니다. 수달이 살지 못하고 물고기 개체 수가 현저하게 줄어 갑니다. 수풀이 울창하지 않으니 뱀과 들쥐가 사라졌습니다. 뱀과 들쥐를 잡아먹고 살던 독수리도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심각하게 문제가 생기고 황폐해져 갔습니다.

그래서 옐로스톤을 사랑하던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생태계를 다시 복원할 수 있을까?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회복할 수 있을까? 오랜 기간 관찰한 끝에 답을 찾았습니다. 엘크 때문이었습니다. 엘크는 늑대와 상극 관계인데, 천적 늑대가 사라지자 엘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것입니다. 엘크가 나뭇잎을 무차별적으로 따 먹으니 나무가 스트레스를 받아서 자라지 못합니다. 풀을 무조건 먹어치우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황폐화의 주범이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또 의논했습니다. 엘크를 어떻게 할까? 엘크도 역시 늑대처럼 모두 포획해서 죽일까? 그런데 오랫동안 연구한 끝에 늑대를 다시 들여오기로 결정했습니다. 1995년의 일입니다. 캐나다에서 회색 늑대 30여 마리를 들여왔습니다. 그리고 풀어 놓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생태계가 회복됩니다. 엘크가 적절한 개체 수를 유지하게 되었고, 나무는 다시 자라고, 비버가 돌아오고, 수달과 물고기가 살고, 수풀이 우거지고, 들쥐와 뱀이 돌아오고, 독수리가 살아나는 놀라운 생태계 복원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생태계가,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과 배움은 어떤 것입니까? 아주 작은 것이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것 때문에 생태계가 파괴되기도 하고, 또 생태계를 회복하는 데는 사람들의 마음이 먼저 모아졌고, 그 작은 변화가, 늑대 30여 마리가 생태계 전체를 살렸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도 이런 식으로 접근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처음부터 위대한 일을 하라고 요구하신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우선 마음입니다. 우리 마음이 뜨거운 열정을 품고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사랑이 함께 하나님께 드려지기를 하나님은 요구하십니다. 마음이 먼저 모아지고,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것을 하나님께서는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 작은 것, 이게 뭐가 될까? 이것 가지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쓰실까? 우린 고민하지만, 그러나 그건 걱정하거나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손에 올려지기만 하면 우리가 생각하지도 않았고 상상하지도 않았던 놀랍고 위대한 일이 벌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이 바로 그런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1. 목자 없는 양

예수님께서 열심히 수고한 제자들에게 쉼을 명령하셨습니다.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라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주님의 명령을 받고 배를 탔습니다. 그리고 갈릴리 호수를 가로질러 저 반대편으로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극성이었습니다. 수많은 무리들이 제자들이 배 타는 것을 보고 배가 어디쯤 정박할 것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육지를 통해서 그 배가 정박할 만한 곳으로 사람들이 몰려갑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아마 제자들은 '우리 인기가 이만큼 높아졌는가' 속으로 기뻐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의 마음은 달랐습니다.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절박한 심정으로 주님을 따라오는, 간절한 심정으로 제자들을 뒤쫓아 온 무리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주님은 그들을 보고 불쌍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긍휼한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그 이유가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라고 기록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사실을 한번 확인해 봐야 됩니다. 과연 이들에게 목자가 없었는가? 눈에 보이는 목자는 너무너무 많았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 서기관, 바리새인, 사두개인, 대제사장, 율법학자, 저마다 목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넘쳐났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보실 때, 적어도 예수님이 판단하실 때, 이들은 단 한 사람도 이들의 목자가 될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1-1. 선한 목자의 자격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목자의 자격은 요한복음 10장 11절과 12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해치느니라."

우리 주님은 스스로를 가리켜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목자와 삯꾼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진짜 목자와 가짜 목자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단순하게 접근해 보면, 선한 목자는 양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살아가는 목자입니다. 그러나 삯꾼, 가짜 목자는 자기 중심적인 사람입니다.

이 당시 예수님 시절에 많은 목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가 자기 유익을 중심에 놓고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율법을 읽어줍니다.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 주는데, 백성들이 모두 까막눈 아닙니까? 글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앉혀놓고 자신들에게 불리한 말씀은 낭독하지 않습니다. 순종하라, 복종하라, 가져오라, 이 말씀만 낭독해 줍니다. 백성들은 그 말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하니까, 무지하고 몽매하고 잘 모르기 때문에 자신들의 고혈이 빨리는 줄도 모르고 모든 것을 다 갖다 바쳤습니다. 그래서 이 악한 목자, 거짓 목자, 삯꾼 목자들은 자신의 배를 불렸습니다. 경제적으로 자기중심적으로 살았고, 사회적 지위가 높아져 가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양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들을 목자 없는 양이라고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1-2. 다윗의 목자 심정

그런데 이들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제자들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진리의 말씀을 잘 아는데, 단 한 번도 듣도 보도 못한 말씀입니다. 태어나서 그런 말씀을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얼마나 놀랍고 신기했겠습니까? 제자들이 가는 곳에, 예수님이 가는 곳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셔서 인간 목자를 세웠는데, 그중에 아주 훌륭한 대표적인 목자가 다윗이었습니다. 원래 다윗은 자기 아버지 이새의 양을 치는 목동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때부터 다윗의 능력을 보셨습니다. 수많은 양 떼를 치고 있는데 갑자기 맹수가 나타나서 양을 물어 갑니다. 그럼 다윗이 어떻게 합니까? 끝까지 쫓아가서 맹수의 입에서 양을 구출해 옵니다. 그때 연마한 것이 물맷돌 돌리는 기술이었습니다. 멀리서 물매를 돌려서 맹수를 맞추고 입에 물려 있었던 양을 다시 건져 왔습니다. 자신의 건강과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오직 양 떼를 위해서 목숨을 바쳤던 다윗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모습을 귀하게 보셨습니다. 훗날 다윗이 시편에서 기록하기를 내가 사자의 입과 곰의 발톱에서 양들을 가져왔다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런 다윗을 보시고, "너는 이제 들판이 아니라 왕궁으로 들어와라. 내 백성, 양 떼들을 내가 너에게 맡기니 너는 목자가 되어서 이 양 떼를 돌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평생토록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정체성이 왕이 아니었습니다. 목자였습니다. 그는 왕이었지만 자기 마음대로 양 떼를 유린하지 않습니다. 오직 목자장이신 하나님께 여쭈어 보았습니다. "하나님,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이 전쟁을 할까요, 말까요? 내가 왕으로서 내 이름을 드높이고 사람들에게 칭송받는 왕이 되기 위해서는 영토를 넓히고 싶은데, 그러나 이건 제 생각이고, 하나님의 양들이니, 이 양들을 위해서 이 전쟁을 해야 됩니까, 말아야 합니까?"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면 그다음 작전을 묻습니다. "저도 전술과 계획이 있지만, 양들을 하나도 다치지 않게 하는 전술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면 이 양들을 상하지 않게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 여쭤 봤습니다. 시시때때로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또 묻고 또 물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고 오는 모든 왕들 중에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윗이 단 한 번 양을 자기 마음대로 유린한 적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성적 욕망을 위해서 밧세바를 유린했습니다. 그의 남편 우리아를 전쟁터 제일 선에 세워서 그를 살해했습니다. 하나님은 분노하시고 진노하셨습니다. "어떻게 내 양을 네가 이렇게 할 수 있느냐? 내가 너에게 맡긴 양을 너의 욕망을 따라 어찌 이렇게 할 수 있느냐?" 하나님은 분노하셨습니다.

2. 말씀을 먼저 가르치심

우리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을 가장 사랑하시고 이 백성들을 인도할 목동, 목자를 찾고 계십니다. 그런 관점에서 목회하는 저 자신을 비추어 봅니다. 목회 계획, 그리고 목회 방향이라고 하면서 혹시나 성도들을 이용하고 있는 건 아닌지, 성도들을 이용해서 자신의 목회적 비전을 달성하려고 하는 건 아닌지. 그런데 이건 생각해 보면 정말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이 경계를 지키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항상 하나님 앞에서 나 중심인지, 양들 중심인지 깨어 있고 기도하고 살피는 주의 종이 되겠다고 지금도 결단하고, 항상 조심해야 되겠다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이 수많은 무리들을 보시고 이 무리들이 목자 없는 양 같으므로 인해서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주님께서 하신 첫 번째 일이 바로 말씀을 가르치는 일이었습니다.

34절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우리는 이 본문을 읽으면 누구나 오병이어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아무에게나 이 본문의 제목이 무엇입니까 하고 묻는다면, 누구나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인 사건이라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을 먹인 오병이어 사건 이전에 우리 주님이 가장 먼저 하신 일은 가르치는 일이었습니다.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진리의 말씀을 제대로 가르쳐 놓아야 분별력이 생길 것 아닙니까? 더 이상 이 가짜 목자들에게, 삯꾼 목자들에게 이용당하지 말라. 하나님의 말씀은 이런 말씀이니 진리의 말씀을 제대로 배워서 진리 위에 굳게 서서 더 이상 유린당하지 말라. 자신의 잇속을 채우는 가짜 목자들에게 더 이상 속지 말라.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다. 한 끼 밥을 주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제대로 분별력 있게 가르쳐 주는 것. 그래서 우리 예수님은 이들의 고통을 보시고 하나님의 말씀은 그런 것이 아니다, 제대로 배워라 하면서 하나하나 여러 가지로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2-1. 순서의 중요성

우리 예수님은 순서를 무척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영이 우선이고 그다음 육체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소중하게 여기시고 그것부터 먼저 세우시고 그다음 육체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가복음 2장에서도 이미 살펴본 것처럼 중풍병자 사건이 있습니다. 중풍병자가 친구들의 들것에 실려서 주님 앞에 왔습니다. 수많은 무리들이 있었기 때문에 들어갈 수 없어서 친구들이 지붕을 뜯었습니다. 들것을 달아서 위에서 내렸습니다. 중풍병자에게 간절한 소원이 무엇이었을까요? 병 낫는 것 아닙니까? 빨리 일어나서 걷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 예수님이 첫 번째 선포하신 말씀,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죄 사함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다음 하신 말씀, "일어나 네 상을 들고 걸어가라" 말씀하셨습니다. 영혼의 구원이 우선이고 그리고 그다음 육체적 회복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순서입니다. 이건 예수님뿐만 아니라 하나님도 역시 절차와 순서를 중요하게 여기시는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창조의 순서를 보십시오. 창조 이전이 어떤 상태였습니까? 혼돈, 공허, 흑암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첫날 빛을 만드셨습니다. 일단은 밝혀 놓으셨습니다. 환하게 밝힙니다. 천지를 환하게 밝히고 그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공중에 나는 새를 지으시고, 땅에 식물을 지으시고, 바다의 물고기를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짐승, 사람이었습니다.

순서가 뭐가 그리 중요하냐 생각하시는 분들, 그냥 다 창조하면 그만이지. 만약 이 순서가 뒤죽박죽 되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땅이 생기기 전 식물이 먼저 생기고, 바다가 생기기 전 물고기가 먼저 생기고, 인간이 창조의 영광이니까 인간을 나는 너를 1번으로 세우겠다 하며 첫째 날에 인간을 창조하셨다면, 빛도 없는데 먹을 것도 없는데 사람이 그곳에서 어떻게 먹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천지창조는 질서 그 자체입니다.

2-2. 질서와 화평

그래서 우리 하나님의 이런 놀라운 질서를 보고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 3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무질서의 반대는 질서 아닙니까? 그런데 왜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말하지 않고 화평의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했을까요? 질서가 곧 화평이기 때문입니다. 법 체제가 무너지고 온통 세상이 뒤죽박죽 되면, 그런 아노미 상태가 오면 우리는 화평이란 건 기대할 수 없습니다. 질서가 잡혀 있고 법을 준수하고 모든 백성들이 일사분란하게 법 아래서 움직일 때 그때 우리는 화평을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인 화평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 우리의 영혼을 붙들고 계실 때입니다. 말씀이 먼저 뿌리가 내려지고, 말씀이 먼저 그 뿌리가 깊게 내려질 때, 그 위에 집을 지어야 질서가 생기고 그 질서가 우리의 삶에 화평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교회는 어떨까요? 교회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공동체 아닙니까? 100명이 있다면 100명이 말하는 우선순위가 다를 것입니다. 어떤 분은 "목사님이 이것부터 먼저 해야 됩니다." 또 다른 분은 "아닙니다. 이것이 더 중요합니다." 모두가 다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 다 다릅니다. 각양각색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영혼의 문제입니다. 진리의 말씀이 먼저 선포되고 그 말씀 위에 집을 짓는 것이 가장 중요한 줄로 믿습니다. 그래야 화평이 생기고, 그래야 질서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그리스도께서 어떤 걸 원하시는지, 성령께서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걸 알아야 그 위에 집을 짓지 않겠습니까? 그런 것 없이 내가 원하는 대로 멋진 집을 지어 놓으면 비바람이 불고 창수가 나고 조금만 흔들려도 금방 무너질 것입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지으면, 말씀의 반석 위에 집을 지으면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내가 너희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말씀을 전하겠다" 하며 여러 가지 말씀으로 가르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깊이 알고 우리 교회도 어린 생명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주의 말씀을 가르치고 또 배우는 일에 전력 다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이런 예수님의 사역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제자들은 조급해졌습니다. 걱정이 되었습니다. 해가 서산으로 비스듬히 넘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점심도 거르고 배고플 텐데. 그런데 제자들은 이 수많은 무리들 어떻게 먹일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책임지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 가서 말합니다. "주님, 이 사람들을 빨리 마을로 보내서 해 떨어지기 전에 가서 먹거리를 해결하고 다시 오게 합시다."

틀린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지극히 정상적이고 지극히 이성적이고 당연히 해야 되는 말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 중심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어떤 마음입니까? 책임지고 싶어 하지 않는 마음, 부담스러운 마음. 제자들의 인기가 높아져서 쫓아오는 사람들을 통해서 존재감을 확인하고 그들의 인기의 영화를 즐기긴 했으나, 그러나 그들을 책임지고 싶어 하지는 않는 마음. 오히려 일이 이쯤 되니까 귀찮아하는 마음. 그 마음을 주님께서 보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37절을 보십시오.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야 먹이리이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엉뚱한 말씀입니다. 어떻게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있을까요? 제자들이 아무것도 없는 줄 아시면서. 이 말씀은 "너희들 그렇게 살지 마라. 책임지고 사는 목자의 심정을 가져라. 내가 이들을 긍휼히 여겨서 이들에게 어찌하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려고 애쓰고 노력하는 것처럼, 너희들도 이 무리들의 수를 보지 마라. 어쨌든 한 영혼이라도 책임지고자 하는 목자의 마음을 가져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선포되자 제자들은 이미 계산해 둔 이야기를 합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말합니다. "이백 데나리온 어치의 떡이 부족합니다." 1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라고 할 때, 오늘날 가치로 환산해 보면 단순히 10만 원으로만 생각해도 2천만 원 어치의 돈이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2천만 원이 어디 있습니까? 제자들이 한 푼도 없는데. 얼마나 가난했던지 안식일에 남의 밀밭 사이를 지나다가 이삭을 훑어서 그걸 비벼서 입에 털어 넣는 가난한 제자들인데 2천만 원이 어디에 있습니까? 제자들은 이래서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3-1. 책임지고자 하는 마음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우리보다 한 세대 이전에 우리 어머니들을 한번 생각해 봅니다. 찢어지게 가난했는데, 너무 가난해서 자신은 굶기를 예사로 하는데 자식들은 먹이고 싶어서, 자식들을 내가 책임지고 싶은 어머니의 간절한 심정으로 멀건 죽이라도 끓여서 자식들을 먹입니다. 그런데 그 죽은 아무런 영양가가 없어 보이지만, 그 안에 어머니의 책임지고자 하는 사랑과 마음이 들어 있는 한 끼 따뜻한 식사였습니다. 그 죽을 먹고 우리 아이들은 잘 자랐고 또 성장해서 이 나라의 경제 개발을 이루어 냈지 않습니까? 훌륭하게 성장했지 않습니까? 어머니의 사랑을 먹고. 책임지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정말 쌀 한 톨 없어도 어쨌든지 자식들은 먹이고 공부시키고 입혔던 것이 우리 부모님들 아닙니까?

그런데 여기 이 제자들은 이 수많은 무리들을 책임지고자 하는 생각이 추호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 것이고, 주님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십니다.

38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이르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예수님이 가만히 있는 제자들에게 "가서 살펴보라" 하셨습니다. 책임지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어쨌든 떡이 몇 개나 있는지 가서 살펴보라. 제자들은 싫은 듯해서 예수님께 혼나서 12명이 터덜터덜 찾아 나섰습니다. 먹거리가 있는지. 그 모습을 보고 한 아이가 도시락을 건네줍니다. 요한복음 6장 9절에 보면 한 아이가 가지고 온 도시락, 거기에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가 들어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아마 이랬을 것입니다. 그 아이가 오늘 예수님 말씀 들으러 간다 하니까 어머니가 "너 출출하면 이거 먹으라"고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 개를 넣어 준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도 예수님 말씀 듣다가 시간이 이만큼 지났는지 몰랐습니다. 고기는 말라비틀어져 있을 것이고, 아마 떡은 쉰 냄새가 났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정신 차리고 보니 제자들이 먹을 것을 찾습니다. "아, 나는 굶어도 하루 종일 말씀하신 예수님이 얼마나 배가 고프실까?" 아이가 그걸 제자들의 손에 올려 드렸습니다.

3-2. 작은 것의 기적

"자, 이걸 가지고 왔습니다. 예수님 다 뒤져봤는데 이것밖에 없습니다. 이것 가지고 어떻게 2천만 원 어치 음식을 준비하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주님께 당당하게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 한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습니다. 어떻게 기도하셨는지 모르지만 간절하게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떼어 주셨습니다.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지 않습니까?

결과는 우리가 다 아는 것입니다. 5천 명이 먹었습니다. 열두 바구니가 남았습니다. 충분히 먹고 배불렀습니다.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처음부터 5천 명을 다 먹여라,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수많은 무리들을 보고 가졌던 그 긍휼한 마음, 불쌍한 마음, 내가 이들을 어찌하든지 책임지고자 하는 그 마음, 그 마음 위에다가 한 아이의 도시락이 더해질 때, 이것이 예수님 손에 올려질 때, 그때는 상상하지 않았던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수많은 사람들을 책임지고자 하십니까? 우리는 책임질 수도 없고 그런 능력도 갖추지 못했습니다. 주님과 함께 동역하시기 바랍니다.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것, 내가 생기기를 보리떡처럼 여겼고 나는 비쩍 마른 생선처럼 여겨졌다 하더라도, 그러나 그것이 주님 손에 올려지면 역사가 나타납니다. 상상하지 못했던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옐로스톤 생태계를 회복시킨 것은 사람들의 간절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작은 변화였습니다. 우리 가정을 회복시키는 것도, 이 나라를 변화시키는 것도, 우리 공동체의 역사를 일으키는 것도, 바로 그런 작은 변화, 거기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이 놀라운 역사의 첫 시작, 마중물이 되시고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간절한 마음, 목자의 심정을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거기에다가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아이의 작은 도시락 같은 연약한 헌신도 요구하셨습니다. "주님, 이것이 주님 나라에 보탬이 될까요? 이렇게 부족한 것이 어떻게 주님 나라에 귀하게 쓰일까요?" 우리는 두려워서 쭈뼛쭈뼛하며 그것을 주님께 가져다 드리지만, 주님 손에 올려질 때 놀랍게 역사되어서 많은 변화가 일어나는 걸 기억합니다.

주님, 오늘 우리가 이런 변화의 현장에 주역들이 되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순서를 중요하게 여기시는 주님, 영혼을 중요하게 여기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 세워져서 그 위에 집을 지으라고 하시는 주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교회 공동체가 말씀을 전하고 듣는 공동체로 축복해 주시며,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그 위에 탄탄하고 안전하고 행복한 집을 짓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