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강 / 마음이 둔하여지다 (6:45-52)

마음이 둔하여지다 (막 6:45-52)

전도관으로 이단 행각을 벌였던 박태선은 원래 장로교 성도였습니다. 서울 남대문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고, 창동교회에서 장로 임직을 받았습니다. 1955년에 우연한 기회에 무학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하다가 강력한 성령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그 후로 그는 가는 곳마다 신유의 은사를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병자가 낫고 귀신이 떠나가고 생각하지 못했던 놀라운 일들이 연이어 벌어집니다. 사람들은 그를 따라다녔고, 그는 여기저기서 불려다녔습니다. 그때부터 이 사람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스스로를 가리켜 동방의 의인이라고 불렀고, 이사야서에 나오는 잣나무가 바로 자신이라고 칭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고 그 영광을 자신이 가로채고 도둑질했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손 씻은 물을 거룩한 성수라 하여 비싼 값에 팔기까지 했습니다. 전국 곳곳에 신앙촌을 세우고 나중에는 천부교를 만들어 이단의 괴수 노릇을 했습니다. 조금씩 경우는 다르지만 수많은 이단들이 이런 과정을 거쳐서 이단의 괴수가 됩니다. 이 사람들도 문제이지만 이들을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더 큰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통해 역사하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하나님이라, 중보자 예수님이라, 보혜사 성령님이라 일컬으며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들은 태양빛을 손바닥으로 가릴 수 있다고 믿고, 손바닥이 태양보다 크다고 여기며 손바닥을 숭배하는 자와 다름없는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미련한 사람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적 자체에 매몰되어 기적을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과 능력을 기억하지 못하는 미련한 자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성경을 통해서 기적 자체에 머물러 있는, 마음이 둔하여진 사람들을 만납니다. 이 제자들의 삶을 통해서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기적 이면에 계신 하나님의 역사와 예수님의 권능의 손길을 체험하고 느끼고 고백하며 살고 있습니까? 우리 자신의 믿음을 함께 돌아보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기적의 여운을 차단하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목자 없는 양 같은 백성들을 굉장히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차근차근 전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아침부터 시작해서 온종일 주의 말씀을 깨끗하고 정갈하게 전하셨습니다. 그들이 다시는 거짓 선지자들에게 속지 않기를 바라시며 주의 진리의 말씀을 증거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부담스러워하는, 목자 의식이 전혀 없는 제자들을 책망하십니다. 이들에게 어찌하든지 먹을 것을 주라, 한번 찾아보라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사람들 사이로 다니면서 가져온 것은 어린아이의 도시락이었습니다.

오병이어의 도시락, 이것밖에 없습니다. 내어놓았는데 주님께서 그것을 붙들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누어 주셨습니다. 남자만 오천 명,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합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먹었습니다. 열두 바구니가 남았습니다. 모두가 다 배불렀습니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기적 이후에 주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45절과 4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니라." 예수님께서 기적이 끝나자마자 제자들을 배에 태우셨습니다. 너희들은 여기 이 갈릴리 호수를 가로질러서 배 타고 저기 호수 건너편 벳새다로 가서 먼저 기다려라. 나는 산으로 가서 기도할 테니 나중에 만나자. 제자들을 배 태워서 호수 건너편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산으로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여기 45절과 46절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그 단어는 '즉시'라는 단어입니다. 주님께서 왜 즉시 이렇게 서둘러서 제자들을 기적의 현장에서 떼어내셨을까요? 왜 예수님은 즉시 자기가 산으로 기도하러 올라가셔야만 했을까요? 돌이켜 생각해 보면 우리 예수님은 오병이어 기적의 여운을 느끼고 싶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기적의 여운을 더 이상 느끼지 않으려고, 기적의 여운이 우리를 감싸는 것이 우리 영성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을 떼어내시고 자신도 산으로 기도하러 가신 것입니다.

1-1. 기적의 위험성

기적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기적은 양날의 검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직접적으로 임하는 자리입니다. 병자가 낫고 귀신이 떠나가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정말 보잘것없는 것을 가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누리지 않았습니까? 기적은 직접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터치합니다. 눈에 보이는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반면, 기적을 베푼 사람, 기적의 통로가 되고 도구가 된 사람, 그리고 직접 그 눈으로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위험한 일입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자신이 기적의 통로가 되었다가 바로 돌아서서 사탄의 도구로 전락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부추기지 않겠습니까?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이런 일을 행하셨습니까? 정말 대단하십니다. 칭찬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 주변에 있는 제자들에게도 그들을 칭찬했을 것입니다. 너희 선생님 예수가 왕이 되면 너희들은 곧 장관들이 되겠구나. 예수를 왕 삼으려고 사람들이 따라다닐 것입니다. 굉장히 위험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경험하시면서 이것이 예수님 당신의 영성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철저하게 여운을 차단하시고 산으로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제자들도 배 태워서 건너편으로 보내버리셨습니다. 기적은 이렇게 위험한 것입니다. 우리가 나를 통해서 역사하신 하나님 앞에 오히려 무릎 꿇고 "하나님, 나에게 이렇게 역사하셨군요. 정말 보잘것없는 나를 통해서 주님의 이렇게 크고 놀라운 역사를 보여주셨군요" 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무릎 꿇으면서 자신의 존재를 돌아보기 위해서 주님은 다시 하나님 앞에 기도하러 가신 것입니다.

1-2. 적극적 반응의 필요성

우리가 적극적으로 반응하지 않으면, 적극적으로 이 현장을 떠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위해 나아가지 않으면, 사탄은 부지불식간에 우리를 침범하고 우리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14장을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전도여행 때 루스드라라는 곳에 간 사건이 나옵니다. 그곳에서 한 병자를 만났습니다. 그는 날 때부터 앉은뱅이였습니다. 걸어본 적이 없습니다. 바울이 그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에게 말합니다. "일어나 걸어가라." 하나님께서 그 순간 그에게 임재하셨습니다.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자가 일어나서 걸어 다녔습니다. 주변에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야단이 났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를 신격화합니다. "당신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신들입니다." 그리고 추앙합니다. 박수를 치고 야단이 났습니다.

만약에 그 자리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이 여운을 조금이라도 만끽했다면, "조금 내가 누리지 뭐, 내가 여기서 내 칭찬하는 걸 좀 듣고 여기서 좀 머무르지" 했다면, 그들은 금방 타락한 영혼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적극적으로 반응합니다. 옷을 찢었습니다.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리고 뛰쳐나갔습니다.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나도 당신들과 똑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를 통해서 역사하셨을 뿐입니다. 제발 나를 신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적극적으로 반응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습니다.

믿음이 좋은 분이라고 해서 다 이렇게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올 수 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 여운을 나도 모르게 즐기고 누리려고 합니다. 여러 사람들이 칭찬하는 말을 듣고 내가 그 칭찬에 어깨가 올라가고 마음이 행복해집니다. 조금만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가는 내가 이단의 괴수 노릇을 할 수도 있습니다. 굉장히 위험한 일입니다.

2. 여호수아의 실패

우리 믿음의 조상 중에 여호수아가 이 일에 실패한 사람입니다. 여호수아 6장과 7장을 보면 굉장히 상반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6장 2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주었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니 하나님이 주어가 되십니다. 하나님이 주어가 되신 이 6장에서 7장으로 넘어가자마자 여호수아가 주어가 됩니다.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도대체 이 6장과 7장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기에 하나님이 주인이셨다가 여호수아가 주어가 됩니까?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왔습니다. 가나안 땅의 여러 성 가운데 강력한 성이 여리고였습니다. 이 성 앞에서 무력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우리의 인원으로, 내가 가진 병력으로, 우리의 무기로는 이 성을 정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 꿇었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하면 이 성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요? 방법을 알려주십시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까지 엎드려 구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말씀하십니다. "하루에 한 바퀴씩 성을 돌라. 마지막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돌아라." 그 말씀을 붙들고 일어나서 그대로 행했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강력했던 여리고 성이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한 명의 인명 손해도 없이 성을 차지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부추깁니다.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셨습니까?" 자신은 아니라고 말하지만 사람들이 그에게 자꾸만 칭찬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그 칭찬에 중독되어 갑니다. 여리고 성을 정복했습니다. 그다음 성, 가장 작은 성입니다. 살짝 지나가면서 살짝만 터치해도 무너질 만한 작은 성 아이입니다. 그 아이 성 전투를 앞두고 이제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하는 과정을 생략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작전 명령을 듣지 않습니다. 자신이 주어가 됩니다.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결과는 처참하고 참담한 실패였습니다. 백성들이 죽어나갔습니다. 철저하게 실패하고 쫓겨 내려왔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거기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어나서 "내가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도구로 삼아서 하신 일이라"고 그렇게 말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과 죄가 마음속에 뿌리를 내린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 12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우리 일생에 단 한 번이라도 나 스스로 설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 우리가 영원히 하나님 나라 가는 그날까지 말씀 붙들고 서지 않으면 우리는 홀로 설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이 예배당을 나가서 그다음 있을 일을 누가 알겠습니까? 한 치 앞의 일을, 내일 일을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당장 다음 달, 내년의 일은 우리가 예측할 수도 없습니다. 워낙 복잡한 사회이고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어떻게 이끌어 가실지 우리는 그 일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섰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때 교만이 우리를 찾아옵니다. 우리는 말씀을 지팡이 삼아 일어서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그 말씀에 기대어 살아가야 하는 연약하고 불쌍한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의 막대기와 지팡이만 붙들고 일어서고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작은 성공, 정말 보잘것없는 성공에 도취되어서 "이건 내가 한 일이라"고 스스로 뻐기며 살아가면 그때 우리는 바로 넘어짐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부디 하나님의 백성들, 우리가 작은 성공에 도취되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그 귀한 말씀 하나 붙들고, 주의 막대기와 지팡이 의지해서 살아가시는 믿음의 백성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풍랑 속에 찾아오신 주님

제자들은 예수님이 보내셔서 갈릴리 호수를 건너갑니다. 밤이 되었습니다. 밤 사경입니다. 밤 사경은 우리 시간으로 새벽 3시에서 6시 사이입니다. 캄캄한 어둠, 칠흑 같은 밤입니다. 그런데 배를 저어서 나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풍랑이 일었기 때문입니다. 바람이 몹시 불었습니다. 내가 내 힘으로 아무리 노를 저어봐도 내 힘으로 이 풍랑을 헤쳐나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예수님도 그 배에 타고 계시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저 멀리 산에서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저 멀리서 하얀 옷을 입으신 분이, 허연 물체가 걸어옵니다. 예수님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이렇게 반응합니다. 49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 지르니." 제자들은 예수님인 줄 꿈에도 몰랐기 때문에 그가 유령인가 보다 소리 지르고 야단이 났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제자들의 문제를 발견합니다. 예수님이 자기에게로 오시지 않을 것 같다는 확신이었습니다. 절대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실 일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마가복음 4장에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 비슷한 일을 당했습니다. 풍랑이 일었습니다. 그 풍랑에 배가 깨어질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웁니다. "일어나 우리를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게 되었나이다." 예수님께서 일어나서 바람과 풍랑을 잠잠케 하시고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두려워하느냐? 믿음이 없는 자들아." 그때는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찾아오지 않을 거라고, 절대로 오시지 않을 거라고, 우리가 어쨌든 내 힘으로 이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가야 된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열심히 노 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오셨습니다.

3-1. 보시는 주님

어찌된 일일까요? 어떻게 예수님이 오셨을까요? 48절을 보십시오. "바람이 거스름으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 하시매."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보셨기 때문입니다. 보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산에서 기도하시면서도 주님의 관심은 항상 양들에게 있었습니다. 양들 중에 가장 사랑하시는 양들, 제자들의 삶에 주님의 관심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늘 살피고 계셨습니다. 내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 "주님이 함께 계시지 않으니 내가 이 험한 바다를 배 저어서, 노 저어서 건너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뿐, 하지만 주님은 다 보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얼마나 바쁘셨던지, 얼마나 급하셨던지 물 위를 달려서 걸어서 오셨습니다.

3-2. 안심하라 내니라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50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고." "안심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안심하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첫째는 "나 유령이 아니야. 너희 선생이야. 걱정하지 마." 두 번째는 "이제 너희들이 힘겹게 노 저을 필요가 없다. 내가 왔으니 바람과 바다를 잠잠하게 해주마. 내가 노 저을 테니 그 노를 나에게 건네주렴"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눈은 저 멀리 계셔도 항상 양들을 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 주님의 눈은 우리가 지금 기도할 수 없어서, 내 목소리로 기도 소리 한 번도 내지 못해도, 내가 내는 신음소리에도 응답하고 한달음에 달려오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제자들이 기도하지 않았고 예수님을 깨우지 않았고 예수님께 부르짖지 않았는데도, 그들이 노 저으면서 힘겹다고 말하는 그 소리를 들으시고 우리 주님은 직접 달려오셨습니다. 이 사랑의 주님이 오늘도 나와 함께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의 삶의 현장을 보고 계십니다. 칠흑같이 캄캄한 어둠, 사방이 캄캄해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그 캄캄한 밤 사경에, 내 인생의 배를 그 풍랑 휩쓸리는 가운데 노 젓고 있는 우리 자신을 주님께서는 불쌍히 보고 계십니다. 가만히 보시지 않습니다. 주께서 달려오십니다. 달려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너 왜 나한테 기도하지 않았니? 이제 걱정하지 마라. 나 유령 아니야. 내가 너를 도와서 이 험한 바다 내가 대신 노 저어서 건너가게 해줄 테니 이제 그 노를 나에게 건네다오."

한 번도 기도하지 않았는데 신음소리만 듣고 찾아오시는 주님께서, 우리가 입을 열고 기도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주님은 한달음에 찾아오실 것입니다.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목청껏 소리 높여서 주님께 외치시기 바랍니다. "지금 너무 힘들다고, 이 험한 바다 내 힘으로 노 저어 가는 것이 힘겨워 죽을 것 같다고, 주님 찾아와 주십시오." 목소리 높여 말씀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께서 오셔서 대신 노 저어 주시고 위로하시고, 배에 올라타시고 바람과 풍랑, 바다를 잠잠하게 하실 것입니다.

4. 마음이 둔하여진 제자들

여기서 제자들은 또 다른 문제점을 보입니다. 그들은 바로 열두 시간도 채 되기 전에 일어났던 주님의 오병이어 기적을 깡그리 잊어버리고 살았습니다. 52절을 보십시오.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바로 얼마 전에, 바로 그 전날에 주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떡을 떼어서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신 그 기적의 현장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살았습니다. 그 기적은 그 기적이고, 지금 이 현장에서 주님은 찾아오지 않을 것 같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마음이 둔하여졌다"는 말은 마음이 단단하게 굳어졌다는 뜻입니다. 마음이 굳어져서 어떤 것도 바늘 하나 들어올 틈이 없습니다. 영적인 마비 상태가 온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인생의 고난 때문입니다. 큰 기적이 있어도 그 기적을 넘어서 일하시는 주님의 권능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주님이 기적을 행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병이어를 행하신 기적이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것만이 아닙니다. 백성들을 사랑하셔서 그렇습니다. 지극히 사랑하셔서 말씀으로 먹이시고, 지극히 사랑하셔서 주께서 떡으로 물고기로 먹이신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또 다른 이름은 주님의 사랑입니다. 사랑하신 주님께서 풍랑 때문에 고난 가운데 힘들어하는 제자들을 찾아와서 돕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는 한 가지 기적을 보면 기적 너머에 역사하시는 주님의 본질과 사랑을 깨달아야 됩니다. 오병이어의 사랑을 보여주신 하나님, 이 풍랑 가운데도 나에게 오셔서 나를 도우실 것이다. 이 믿음이 우리의 믿음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5. 기적 너머의 사랑

그러면 우리가 여기 서서 과연 기적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 이 질문을 한번 해봐야 합니다. 과연 기적이 사람을 변화시킬까요? 기적 그 자체는 사람을 결코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요한복음 11장 53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합니다.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이 날이 언제일까요? 죽은 나사로가 살아난 날입니다. 나사로가 장례 지낸 지 나흘이 지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로 오셨습니다. 무덤을 막고 있던 큰 돌을 굴려내라고 하셨습니다. 그 앞에 예수님이 서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나사로가 썩어서 물이 뚝뚝 흐르는 상태로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걸어서 사람들 앞에 섰습니다.

역사상 이런 기적이 또 어디에 있었습니까? 죽은 자가 살아나는 이 놀라운 기적. 그 역사의 현장을 본 사람들은 모두가 주님 앞에 엎드려 살아계신 하나님의 권능을 찬양하고, 죽음을 이기시고 사망 문을 깨신 주님 앞에 엎드려 경배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 날부터 유대인들, 종교 지도자들은 오히려 마음이 강퍅해졌습니다.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했습니다. 아이러니하지 않습니까? 그들은 이런 놀라운 현장을 보고서도 왜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했을까요? 기적 너머에 계신 주님의 본질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열왕기상 18장을 보면 아합과 이세벨을 따르던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들과 엘리야가 대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서 불로 응답하시는 신이 참 신이시다.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제사장들이 열심히 뛰었습니다. 자신의 몸을 칼로 찔렀습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불이 내리지 않습니다. 그들의 신은 죽은 신이기 때문입니다.

엘리야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하늘에서 불을 내려주옵소서. 이들이 여호와가 참 신이심을 깨닫게 해주시옵소서." 이 말에 하나님이 응답하셨습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렸습니다. 제물을 다 태웠습니다.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바알과 아세라의 제사장들을 다 처단했습니다. 이쯤 되면 아합과 이세벨이 하나님의 크신 영광 앞에 무릎을 꿇어야 정상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들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강퍅해졌습니다. 오히려 더 세어졌습니다. "내가 반드시 엘리야를 죽이고야 말겠다." 더 강퍅하게 결심합니다.

기적은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기적 너머에 계신 주님을 만나야 우리가 변화됩니다. 주님이 오병이어를 왜 행하셨습니까?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왜 물 위를 걸어서 오셔서 바람과 바다를 잠잠하게 해주십니까? 제자들이 홀로 노 젓고 있는 걸 보시면서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에, 사랑하셨기 때문에 달려오신 것 아닙니까? 하늘에서 왜 불이 내렸습니까? 백성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왜 죽은 자를 살리십니까? 그들이 죄악의 권세에, 죽음의 권세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너무 불쌍했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열 가지 재앙으로 이집트를 망하게 하십니까? 거기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쌍했기 때문에,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기적 자체는 우리를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하지만 기적 너머에 계신 하나님의 능력, 주님의 사랑이 나를 변화시킬 것입니다. 한 가지 현상만 보면 미련한 사람입니다. 작열하는 태양, 뜨거운 무더위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손길을 봅니다. 하나님이 이 태양을 통해서 곡식을 익게 하시는구나. 과일을 맛있게 만들어 가시는구나. 우리의 인생을 풍성하게 만들어 가시는구나. 이래야 우리는 믿음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더워 죽겠다. 힘들다"고 말하면 일차원적인 사람들입니다. 태풍이 불어옵니다. 그 태풍이 바다를 깨끗하게 청소해 줍니다. 하나님, 이 태풍 통해서 바다를 깨끗하게 정화해 가시는구나. 태풍을 그저 두려워하는 사람은 단순한 사람들입니다.

자연의 현상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인생에 역사하시는 주님의 권능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여전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은혜로 이번 한 주도 승리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주님의 권능과 주님의 은혜를 깨닫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보잘것없고 미련하고 연약한데, 나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그 여운을 느끼면서 우리가 교만하게 되고, 그 교만으로 인해 내가 선 줄로 알고 오히려 걸려 넘어지는 미련한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주님, 기적의 현장을 떠나서 주님 앞에 무릎 꿇고 말씀을 의지해서 오로지 서게 하시며, 말씀의 지팡이를 붙들고 살아가는 믿음의 백성 되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기적 너머에 계신 우리 주님의 사랑을 깨닫기를 원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힘겹게 노 젓고 있는 백성들을 보시고 찾아오시는 그 주님의 사랑, 이 인생길 험하고 험한 이 험산 준령 넘어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의 사랑, 캄캄한 밤을 홀로 걸어가는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며, 그 사랑으로 인하여 변화되는 놀라운 기적의 현장을 경험케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