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들어진 전통 (막 7:1-13)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쓴 "만들어진 전통"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원제를 직역하면 "전통의 발명"이라고 옮길 수 있습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유구한 전통이라고 생각했던 것, 천 년 혹은 그 이상 된 전통이라고 여겼던 것들 가운데 실상 들여다보면 최근에 만들어진 것이거나, 심지어 인간의 필요에 의해 조작된 전통인 것이 꽤 많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충격적인 말입니다. 우리는 의심하지 않고 이 전통이 아주 오랫동안 우리 민족에게 흘러온 전통이라고 여겼는데, 이것이 얼마 되지 않았다니, 게다가 사람들의 욕심과 필요에 의해서 조작된 것이라고 한다면 얼마나 충격적인 사실입니까?
저자는 책에서 여러 가지 예를 들고 있는데, 그중 한 가지가 스코틀랜드의 전통 복장입니다. 우리가 스코틀랜드라고 하면 남자들이 입는 킬트라고 하는 격자무늬 치마를 떠올리지 않습니까? 손에는 백파이프를 들고 있는 모습 말입니다. 누구나 스코틀랜드라고 하면 이런 복장을 떠올릴 것입니다. 실제로 13세기 후반을 배경으로 하는 멜 깁슨 주연의 영화 "브레이브 하트"를 보면, 배경이 13세기 후반임에도 불구하고 이 격자무늬 킬트를 입고 전쟁터에 나온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18세기 초에 스코틀랜드가 힘이 약해져서 잉글랜드에 합병되었습니다. 그런데 스코틀랜드의 민족주의자들은 나라는 합병되었지만 민족의 정체성을 계속 유지하고 싶어 했고 간직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방법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민족의 정체성과 전통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런데 때마침 18세기 후반에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났고, 영국 본토에 직물이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팔아 치워야 하는데 영국의 장사꾼들이 판매할 곳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스코틀랜드의 민족주의자들과 영국의 장사꾼들이 결탁해서 이것을 스코틀랜드의 전통 의상이라고 하자고 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따져 보지도 않고 그것을 닥치는 대로 사서 입었고, 그때부터 스코틀랜드의 전통 의상은 격자무늬 킬트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만들어진 전통입니다.
바다 건너 영국에만 이런 일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집에서 아이들에게 식사 예절을 가르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젓가락질입니다. 젓가락질을 잘하면 식사 예절이 올바르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가르칩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나라 고대 선조들은 젓가락 문화를 가지고 살았느냐 하면, 조선시대 그 이전 시대로 올라가 보면 젓가락보다는 숟가락 문화였습니다. 젓가락질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서 전래된 습관입니다. 일본인들이 젓가락 문화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잘 사용하는 것이 올바른 식사 예절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비판 의식 없이 따져 보지도 않고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며 지금도 아이들에게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우리의 전통과 문화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 삶의 전반에, 그리고 우리 신앙생활에도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전통이 본질을 가리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믿음의 본질은 하나님이시고, 믿음의 본질은 그리스도의 말씀이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가리는 전통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 전통이 본질을 가리고, 오히려 때로는 전통이 본질보다 더 거대해져서 본질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리는 귀한 역전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의 말씀에는 전통을 허파하고 부수고 걷어내야 본질이 드러난다는 것, 그때 하나님의 계명과 말씀이 드러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혹시 우리 안에 나는 본질을 잃어버리고 살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의 믿음도 함께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1. 전통에 얽매인 자들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게네사렛에서 치유 사역을 하고 계셨습니다. 병든 자를 열심히 고치고 행복한 사역을 하고 있는데 멀리서 손님이 오셨습니다. 지금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은 갈릴리 북서쪽 게네사렛에서 사역하는데, 멀리 예루살렘에서 손님들이 찾아오셨습니다. 누가 오셨을까요? 1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여들었더니." 이들이 예루살렘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방문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 받기 위해서 왔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사찰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블랙리스트에 올려 놓고 요주의 인물 대상으로 여기며 주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 당시 종교 권력의 정점에 있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 종교 지도자들은 백성들을 이용해 먹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무지하고 율법을 모르니까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짜깁기해서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배를 불리고 종교 권력을 오랜 시간 동안 향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명확히 드러내셨습니다. "너희들이 지금까지 속고 있었다. 이 말씀은 이것이 아니다." 하늘의 진리의 말씀을 하나부터 끝까지 차근차근 백성들에게 들려주시고 치유하시고 알게 하셨습니다. 백성들이 은혜를 받았을 것 아닙니까? 이제 백성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합니다. 종교 권력의 정점에 있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이들이 예수님과 손을 잡고 결탁해서 자기들을 내쫓으면 지금까지 쌓아왔던 철옹성이 한꺼번에 다 무너질 것 아닙니까?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사찰하는 것입니다. 어디 하나 꼬투리 잡을 것 없나, 어디 하나 걸리기만 해봐라. 그래서 예수님을 계속해서 쫓아다니며 사찰하고 있습니다.
1-1. 손 씻기 전통
지금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을 따라다니면서 한 가지 꼬투리를 찾고 있습니다. 눈을 부릅뜨고 찾고 있습니다. 한 가지가 잡혔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 우리가 이런 광경을 보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위생상 옳지 못하니까 "손 씻고 식사하십시오" 이렇게 말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이들은 위생의 문제를 거론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의 문제, 전통의 문제를 가지고 문제 삼는 것입니다.
그 당시 모든 사람들은 음식을 먹을 때 손을 씻고 먹도록 전통이 그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심지어 바깥에 나가서 시장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고 돌아와도 몸에 물을 뿌리고 몸을 씻고 그다음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정결하게 되어 하나님 앞에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실 물이 귀한 나라 아닙니까? 먹고 마시는 물도 없는데, 가난하고 힘든 백성들이 이 물을 길러 오는 것이 참 힘든데, 어떻게 먹을 때마다 손을 씻고 먹겠습니까? 어떻게 외출하고 와서 몸에 물을 뿌리고 그다음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는 자를 정죄합니다. "너희들 율법을 어긴 것이다. 전통을 어긴 것이다. 그러니 벌받아 마땅하다." 사람들에게 죄책감을 심어 줍니다. 자꾸만 죄의식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아, 나는 죄지은 사람이구나. 이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떻게 행동해야 되나." 사람들에게 자꾸만 두려운 마음을 심어 줍니다. 이것이 종교 권력자들이 행했던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 이 문제를 가지고 항의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손 씻고 먹지 않으면 병에 걸리기 쉬우니 깨끗하게 먹으십시오" 이러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 말이 아닙니다. "전통을 어겼습니다. 벌받아 마땅합니다." 책망하는 말입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이들이 이렇게 책망받아, 이렇게 정죄받아 마땅할 만한 무서운 죄를 지은 것입니까? 내 입에 들어가는 음식을 내가 손 씻지 않고 먹었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율법에 그토록 저촉되는 것입니까? 율법을 펼쳐 봐야 됩니다. 요즘 흔히 하는 말로 팩트를 체크해 봐야 됩니다. 사실관계를 따져봐야 됩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손 씻지 않고 음식을 먹으면 죄라고 말씀하셨는지 출애굽기 30장 19절과 2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그 두멍에서 수족을 씻되 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 물로 씻어 죽기를 면할 것이요 제단에 가까이 가서 그 직분을 행하여 여호와 앞에 화제를 사를 때에도 그리할지니라."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즉 이 말은 제사장 집단을 한정해서 일컫는 말입니다. 제사장들이 회막 즉 성막에 들어갈 때, 거룩한 성물을 만져야 되니까, 그때 손과 발을 물두멍에서 깨끗하게 씻고 들어가서 정결한 몸과 정결한 마음으로 성물을 만져야 한다는 율법의 규정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제물을 가지고 화제로 삼기 위해서 나왔습니다. 제사 지내기 전에 제사를 집행해야 하는 제사장과 그 자손들이 손과 발을 깨끗하게 씻고 제물을 불살라 하나님께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율법이었습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누구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전통이 만들어졌습니다. 덧붙여졌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음식을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않고 먹으면 이건 죄다. 밖에 나가서 외출하고 돌아왔을 때도 물을 뿌리지 않으면 이건 죄다. 율법을 알 리 없는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모두가 다 죄의식 가운데 숨죽여 살아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기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만든 전통이 말씀을 뒤덮어 버린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당시 무지했기 때문에, 그것을 몰랐기 때문에, 말씀과 전통을 분리해낼 수 있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종교 집단들이 모두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정죄 의식 속에 세상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얼마나 불쌍한 일입니까?
1-2. 고르반 전통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과 전통을 착각하게 만드는 자들, 본질인 말씀을 인간이 만든 전통으로 가리는 자들, 그들에게 분노하시면서 명확하게 그들의 죄를 지적하셨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도다." 직접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구나, 겉을 꾸미는 자들아, 위선자들아."
그러면서 한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십니다. 십계명의 다섯 번째 계명이 무엇입니까?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것은 출애굽기 20장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십계명의 다섯 번째 계명입니다. 그런데 그 계명을 지키며 살아야 했는데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계명을 지키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느냐? 그 당시 유행하는 말이 "고르반(קָרְבָּן)"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고르반은 "헌물, 헌신"이라는 뜻입니다.
즉 우리 집에 재산이 있습니다. 돈이 있습니다. 먹거리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 돈과 재산과 먹거리를 "고르반"이라고 선언해 버리는 것입니다. "고르반!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 하나님께 드림이 된 이 돈을 어떻게 사람인 부모를 위해서 쓸 수 있느냐? 아무리 부모라 하더라도 고르반, 하나님께 드린 것이니 부모를 위해서 쓸 수 없다. 한 푼도 쓸 수 없다. 먹거리도 부모에게 나눌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고르반"이라고 하며 부모 봉양을 회피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그 돈으로, 그 재물로, 먹거리로 하나님께 바치느냐? 그렇지도 않습니다. 강제할 법 조항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전통으로 지키지 않으려고 하는 그들의 꼼수였고 그들의 비열한 행동이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 말씀이 인간의 전통에 의해서 가려지는 순간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2. 개혁의 본질
개혁이 무엇입니까? 개혁은 본질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질이 이것인데 그 본질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 이것이 개혁입니다. 개혁은 다른 이름이 아닙니다. 본질을 가리고 있는 것들을 다 제거하는 것입니다. 본질을 가리는 것이 사람이든지, 그것이 전통이든지, 역사든지, 우리의 습관이든지,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고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가리는 것이라면 이것을 뜯어내고 제거하는 것이 바로 개혁입니다.
2-1. 기드온의 에봇
이런 일이 신약시대 때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구약 시대로 올라가 보면 사사시대 기드온이 나옵니다. 기드온이 얼마나 위대한 사람입니까? 미디안의 압제에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주었습니다. 위대한 전쟁에서 승리를 했습니다. 백성들이 기드온을 찾아갔습니다. "당신과 당신의 후손들이 우리의 왕이 되어 다스려 주십시오. 우리는 당신의 백성이 되겠습니다." 기드온이 사양했습니다. "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끝까지 사양했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마음속에 슬그머니 욕심이 올라옵니다. "난 왕이 되고 싶지는 않은데, 이 전쟁을 기념하며 기념품을 하나 가지고 싶습니다. 여러분에게 있는 금붙이를 나에게 주십시오." 백성들이 금덩이를 가져다 줍니다. 귀고리를 떼어서 다 모아 주었습니다. 그때 모인 금이 자그마치 1,700세겔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의 무게로 환산하면 20킬로그램 정도 됩니다. 대단한 무게 아닙니까?
기드온이 이 금을 받아다가 녹여서 에봇(אֵפוֹד)을 만들었습니다. 제사장들이 입는 금 예복을 만들고 자기 고향집에다가 걸어두었습니다. 그때부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사람들이 성지순례를 하기 시작합니다. "여기가 기드온의 생가입니까? 이것이 그 유명한 금으로 만든 에봇입니까? 기드온이 이렇게 위대한 사람인데 우리가 이것을 만지면 병이 나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여기에 소원을 빌면 내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겠습니까?"
성경에 보면 "음란하게 따랐다"고 기록합니다. 모두가 다 우상숭배하는 것처럼 그 금 에봇 앞에 무릎을 꿇고 예배드리고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이런 일이 왜 일어났겠습니까? 그 당시에 태어난 아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부모 손에 이끌려서 성지순례를 하고, 거기 가서 그 금 에봇을 한번 만지고 엎드리고 자기의 미래에 대한 소원을 빌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이 만든 금 에봇이 가려버린 것입니다. 이런 일이 비단 구약과 신약에만 일어나는 일일까요? 우리 시대에도 부지기수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2-2. 히스기야의 개혁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개혁 군주가 누구일까요? 구약 성경은 여러 명의 개혁 군주를 말하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가 가장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은 히스기야 왕입니다. 열왕기하 18장 3절과 4절에 그의 개혁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그가 여러 산당들을 제거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נְחֻשְׁתָּן)이라 일컬었더라."
히스기야가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사물을 살피고 역사를 보니 이스라엘 온 천지에, 유다 온 천지에 우상이 많았습니다. 산당을 제거하고 우상을 하나하나 제거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말미에 아주 독특한 말씀이 나오는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백성들이 지금까지 섬기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고 기록합니다.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은 민수기 21장으로 그 역사가 올라갑니다. 모세 시절, 출애굽 시절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면서 하나님께 원망을 굉장히 많이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원망을 듣다가 듣다가 참지 않으시고 광야에 불 뱀을 풀어 놓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불 뱀에 물려 독이 퍼져서 죽어갑니다. 하나님께 모세가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하나님이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놋뱀을 만들어서 장대 끝에 높이 매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본 자마다 다 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놋뱀을 매달았고 사람들은 보았고, 본 자는 다 살았습니다.
그때부터, 그 이후로 이 놋뱀이 성물이 되었습니다. "병든 자는 놋뱀을 바라보며 살 것이다. 인생의 문제가 있는 자는 놋뱀을 만지며 살 것이다." 그때부터 모세가 만든 놋뱀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또 다른 우상이 된 것입니다. 출애굽 시절이 기원전 1400년쯤 되니까, 그리고 지금 히스기야가 개혁했던 이 시대가 기원전 700년쯤 되니까, 약 700년의 시차가 있습니다. 이 700년의 유구한 역사의 흐름 동안 사람들은 이 놋뱀을 섬기며 살았습니다. 히스기야 이전에 어떤 왕도, 그 어떤 개혁 군주라고 자처하는 사람도 놋뱀을 부수거나 없애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모세라는 이름의 권위 때문입니다. 모세가 어떤 사람입니까? 출애굽의 영웅, 이스라엘 건국의 아버지, 430년 동안 고생하고 고통받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낸 출애굽의 아버지 아닙니까? 율법을 집대성한 율법의 창시자, 율법의 아버지입니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다 모세의 손을 통해서 하나님께 직접 받아서 기록한 책들입니다. 그러니 그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누가 감히 부술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모세가 만들었고 영험하고 신성하다고 여겼습니다. 백성들의 저항도 대단했을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먹었다면 백성들에게 맞아 죽기 십상입니다. "감히 모세가 만든 거예요. 당신이 왕이면 왕이지 왜 이러느냐고!" 백성들이 저항합니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그것을 부숴 버렸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요?
우리가 조금 전에 읽었지만 열왕기하 18장 3절에 보면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행하여…" 정직하게 사물을 바라보고, 정직하게 율법을 바라보고, 정직하게 역사를 보고, 정직하게 자신을 보면 이것이 잘못됐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섬기면 제아무리 모세가 만들었다고 해도 이건 우상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제거해야 될 대상인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이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했습니다. 느후스단이 무슨 뜻입니까? "놋조각"이라는 뜻입니다. 백성들에게 보여줍니다. "봐라, 너희들이 성물처럼 받들고 하나님보다 더 섬기던 이 놋뱀이 부수고 나니 놋조각에 불과하지 않느냐? 놋조각 따위에 너희들이 무릎 꿇고 지금까지 섬기고 있었지 않느냐? 이제 놋조각인 것을 직접 봤으니 갖다 버리자." 없애 버렸습니다.
3. 본질을 드러내라
오늘 우리 시대에, 우리가 살아가는 이 공동체에도, 교회에도, 우리 마음속에도 본질인 하나님의 말씀 아닌 다른 것들이 집을 짓고 똬리를 틀고 그리고 하나님의 얼굴을 가리고 말씀을 가리는 일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을 하나하나 다 부수고 제거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그것을 몰라서, 무지해서, 가르쳐주고 듣는 대로 믿어서 그랬다지만, 오늘 우리는 다 말씀을 읽을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의 뜻을 분별하고 말씀을 깨달아서, 하나님의 말씀이 이것인데 잘못 가르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걷어내고 정리하고 허파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종교개혁가들은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종교개혁을 하면서 많은 것들을 개혁했습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들이 성물이었습니다.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프로테스탄트 개혁 교회가 탄생하면서 성모 마리아 상이 사라졌습니다. 성당에 있는 수많은 성물들이 하나도 없이 다 사라졌습니다. 벽화도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도 없이 다 사라졌습니다. 온전히 다 개혁하고 없애 버렸습니다. 하나님 자체를 가로막는 비본질적인 것들을 다 빼버린 것이었습니다.
한 가지만 남겨 놓았습니다.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 하나님의 말씀, 성경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 이것이 본질이니 이 말씀을 듣고 말씀대로 행하고 살아가야 된다. 말씀을 주도록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수백 년이 흘렀습니다. 지금은 어떤 현상이 벌어졌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메신저인 목사가 놋뱀의 자리에 올라서 있는 시대입니다. 메신저가 메시지보다 더 높아져 있는 이런 시대에 우리는 지금 이런 와중에, 이런 엄청나게 불행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사람들은 분별하려고 들지 않습니다. 강단에서 목회자가 하는 말은 백 퍼센트 옳다고 믿고 따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글을 읽을 수 있고 성경을 읽고 분별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해석하고 분별하는 것을 하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노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 스스로 목회자를 놋뱀으로 만들고 있고, 나 스스로 내가 만든 전통에 길들여져서 그렇게 지내오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목회자, 죽어 불태워지면 한 줌 흙에 불과합니다. 놋뱀이 부서져서 놋조각이 되어 버린 것처럼, 사람이 죽으면 한 줌 흙에 불과하지 않겠습니까? 목회자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운반하는 운반자, 메신저에 불과합니다. 메신저의 역할은 하나님의 뜻을 메시지에 담아서 전달하는 전달자의 사명입니다. 절대로 메신저가 메시지보다 높아질 수 없습니다. 카리스마적인 지도자가 하나님의 말씀 법 위에 군림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일입니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 우리가 영적으로 살아나기 위해서 전통을 철저하게 허물어뜨리시길 바랍니다. 물론 말씀을 드러내는 좋은 전통도 있습니다. 하지만 말씀을 가리는 전통, 악한 전통, 말씀을 가리고 말씀을 집어삼키는 전통, 이것이 사람이든, 이것이 제도이든, 이것이 우리가 철석같이 믿어 왔던 내가 버리기 힘들었던 놋뱀이라 할지라도 다 부수고 허물어서 다시 본질을 드러내는, 개혁하는 사람들이 되셔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것이 내가 사는 길이고, 공동체가 사는 길이고, 이 시대 교회가 사는 길입니다. 부디 오늘 주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깊이 깨닫고, 이 말씀의 진리 위에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주의 말씀 앞에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이 제대로 다시 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본질이신 하나님을 가리는 것, 본질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것, 어떤 것이라도 타파의 대상이 되지 않음이 없음을 깨닫게 하옵소서. 사람이라 하더라도, 700년 동안 내려온 놋뱀이라 하더라도, 모두가 부숴지면 놋조각에 불과하고 한 줌 흙에 불과한 인생들인데, 주여, 우리가 전통에 집착한 나머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했다면 주님 긍휼히 여겨 주시고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제는 돌이켜서 주의 말씀 앞에 진리 위에 굳게 서서 그 길을 걸어가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속에 있는 놋뱀들, 우리 속에 있는 우상들, 우리 교회 공동체 속에 있는 잘못된 전통들 온전히 걷어내고 정리하게 하여 주시고, 오직 하나님의 본질의 말씀만 드러내는 참된 주의 종들, 하나님의 백성으로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