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강 / 성령과 함께 (1:12-15)

성령과 함께 (막 1:12-15)

삶의 중심에 서 있는 사람들, 어떤 조직의 핵심에 있는 사람들은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잘 알지 못합니다. 잘 알지 못할 뿐더러, 중심에 있는 사람들은 변방에서 일어나는 일에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하찮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별볼일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사를 통해 살펴보면, 위대한 변혁과 역사적 대사건은 중심이 아니라 변방, 저 끄트머리에서부터 시작되어 중심으로 옮겨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 같았던 로마 제국의 몰락도 사실은 중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저 변방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감당하지 못해 일어났습니다. 로마는 기원전 27년부터 기원후 180년까지 약 2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팍스 로마나(Pax Romana), 곧 '로마의 평화'라는 시대를 구가했습니다. 위대했던 오현제 시대를 통해 그들은 영원한 제국의 영화를 꿈꾸었습니다. 영원히 지지 않을 것 같은 이 나라의 영광을 갈구하며 그렇게 살아갈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팍스 로마나가 끝나고 300년이 채 되지 못해 로마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395년에 로마는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열되었고, 476년에 서로마 제국은 역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어떻게 이토록 위대한 제국이 순식간에 무너지게 되었습니까? 그 당시 중국에는 한나라가 중심을 잡고 번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민족들이 한나라 영내에서 살 수 없었습니다. 우리 민족에게 잘 알려진 흉노족, 그들이 한나라 경내에 살 수 없으니 자꾸만 서쪽으로 살아남기 위해 말을 타고 서진했습니다. 우리에게는 흉노족으로 알려져 있는데, 유럽 사람들에게는 훈족으로 잘 알려진 민족입니다. 훈족이 그 당시 평화롭게 살고 있던 게르만족의 한 일파인 고트족을 압박합니다.

고트족은 자기들끼리 평화롭게 살고 있었는데, 동쪽에서 밀려온 훈족 때문에 압력을 받아 로마 영내로 진입합니다. 이른바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시작된 것입니다. 고트족뿐만 아니라 곳곳에 흩어져 있던 게르만족이 모두 로마로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로마는 그렇지 않아도 복잡했던 국내 정세 때문에 감당할 길이 없었고, 고트족의 침입과 게르만족의 이동을 감당해 낼 재간이 없었습니다. 476년에 고트족의 용병대장이자 게르만족의 지도자였던 오도아케르가 로물루스 대제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왕이 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로써 서로마 제국은 멸망했습니다. 복기해 보면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 작은 기마민족이었던 훈족이 고트족을 압박하고, 그들이 로마로 들어와서 로마가 우왕좌왕하다가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대제국이 이렇게 멸망할 수 있는가 하는 역사적 교훈을 우리는 이 흐름을 통해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의 흐름, 세계의 흐름은 이렇게 변방에서 시작된 아주 작은 변화들이 대제국까지 몰락시킨 경험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이것은 역사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이렇게 변혁되고 바뀌어 갑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이루어 가실 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저 갈대아 우르, 저 변방 끝에서 한 사람을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하란으로 부르셨고, 하란에서부터 팔레스타인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이미 노년이었습니다.

불면 꺼질 것 같은 한 노인을 통해서 하나님은 변방에서부터 믿음을 시작하셨고, 그 믿음은 오늘 우리에게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도 한번 보십시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 독생자 예수님을 그 당시 제국의 중심 로마에서 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로마의 식민지 팔레스타인, 그것도 시골이었던 갈릴리에서 자라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때가 되매 로마로 하여금 기독교를 공인하게 하시고, 예수의 복음은 로마의 판테온 신전을 딛고 일어나 세계 종교로 발돋움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역사입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혹시 우리가 변방에 있다고 두려워하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올해를 시작하면서 지금 내 위치가 불안정하다고 불안해하시는 분도 아마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변방, 저 끄트머리에 있든지, 나의 위치가 불안정하든지,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성령과 함께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것이 훨씬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과 함께 거하는 자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능력, 그 위대함을 우리에게 증거할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내가 누구와 함께 거해야 하는지, 그러면 승리하며 살 수 있음을 함께 확인하시고 은혜 받는 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1. 광야로 이끌린 예수

12절 말씀입니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시점이 중요합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이 시점이 언제입니까? 하나님의 칭찬을 듬뿍 받은 직후입니다. 예수님께서 겸손하게 세례 요한에게 가셔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세례는 죄인이 받는 것인데 예수님은 한 점 죄가 없으십니다. 그런데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이유는 겸손하셨기 때문입니다. 겸손하게 세례 받으셨을 때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셨습니다. 하늘 문이 열렸습니다.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칭찬하셨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나님이 이렇게 칭찬하셨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유일하게 동시에 등장하시는 장면까지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무척 기뻐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예수님을 칭찬하셨다면 예수님을 광야로 이끌어 가실 것이 아니라 궁전으로, 보다 더 안락하고 편안한 곳으로 모셔 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1-1. 삼중고의 훈련

그런데 성령을 통해 예수를 이끌고 간 곳은 광야였습니다. 그 광야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13절 말씀입니다.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광야에서 예수께서 사십 일을 계셨습니다. 사십 일 동안 무엇을 하셨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예수님은 사십 일 동안 금식하셨습니다. 광야에는 배고픔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배고픈 상태로 기도에 집중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기도만 하는 것도 힘든데 사십 일을 금식하면서 기도하는 것은 극한의 체험입니다. 그런데 사탄이 와서 시험합니다. 돌을 보여주며 떡덩이가 되게 하라, 나에게 절하라, 높은 데서 뛰어내려라. 사탄은 끊임없이 예수를 시험합니다.

가만히 있어도 힘겨운데 사탄의 시험이 닥쳐오면 영적인 싸움을 하는 것이 얼마나 힘에 겨운지 모릅니다. 하나 더 있습니다. 들짐승의 위협입니다. 곳곳에서 들짐승이 울어댑니다. 들짐승이 울부짖으며 예수를 집어삼키려 합니다. 눈을 희번덕거리며 울부짖는 짐승들이 예수님 주변의 광야에서 예수를 집어삼키려고 주위에 몰려들었습니다. 삼중고의 고통입니다. 성령께서 어떻게 예수에게 이렇게 하실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칭찬을 받은 예수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고 선언된 예수님을 어떻게 하나님이 이렇게 내버려 두실 수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로서는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런 일이 오늘 우리 인생에도 다반사로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칭찬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함께 해 드렸습니다.

말씀을 붙들고 부여잡고 살려고 발버둥 치고 애쓰고, 힘겨운 일이 있으면 기도하고, 나아가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돕고 섬기고, 주어진 일에는 누구보다도 더 성실하게 감당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이 나를 인도하고 이끌어 가는 곳은 바로 광야였습니다. 광야에 가 보니 배고픔이 있습니다. 물질의 고통이 있습니다. 풍성하지 않습니다. 항상 자원이 부족하고 물질 때문에 고통받고 힘들어합니다. 그것도 힘겨운데 사탄은 여러 가지 말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이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질지도 모르는 위협이 우리 인생 눈앞에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끝입니까? 밤낮으로 나를 집어삼키려는 들짐승 같은 사람들이 우리 주변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넘어지면 그들에게 집어삼켜져 형체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뜯어먹힐 지경의 삶이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악한 짐승들이 둘러싸고 있습니다. 우는 사자처럼 우리를 삼키려고 하는 삼중고의 고통으로 우리는 지금 힘겨운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습니까? 하나님 어떻게 저에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제가 하나님께 잘못한 것이 무엇입니까? 저는 하라는 대로 했고 성실하게 이 일을 감당했는데 왜 제가 이런 고통을 겪어야 됩니까?

1-2. 천사의 수종

그런데 오늘 이 13절 말씀을 보면 한 가지 희망을 발견합니다. 13절 말씀입니다.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하나님께서는 우리 예수님을 지키기 위해서, 돌보기 위해서 자신의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성령과 함께하는 예수님을 돌보기 위해서 천사를 보내어 배고픔도 견디게 하시고, 고통도 견디게 하시고, 사탄의 위협과 시험에도 철통같이 지키고 방어하게 하셨고, 들짐승이 예수를 삼키려고 할 때도 그들의 입을 막으시고 돌보시고 지켜주셨습니다. 예수님을 힘드실 때마다 수종들게 하시고 지키신 그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천사를 보내 예수를 지키신 하나님의 능력이 오늘 우리 인생도 함께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힘겹고 어려워하는 우리 인생들, 광야 길에서 서너 가지 위협에 둘러싸여 있는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서 돌보시고 수종들게 하시고 책임지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셨다는 사실은 "내가 너를 지키고 있다, 내가 너를 주목하고 있다, 두려워하지 마라, 염려하지 마라"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의 표시입니다. 하나님은 광야 끝에서 시험에 빠져 있고 어려워하고 있는 자를 눈여겨보십니다. 옛날 하나님의 관심은 광야 끝에 있는 예수에게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눈길과 관심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성경은 하나님의 관심과 하나님의 관점을 따라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 시절에 역사가들의 관심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들의 관심은 로마의 황제에게 있었습니다. 로마 황제가 어떤 음식을 먹는지, 누구를 만나는지, 오늘 어떤 말을 했는지, 그들의 정책은 어떠했는지, 주변 국가와의 관계는 어떤지, 모든 역사가들의 관심은 권력의 핵심, 정점, 그 중심, 세계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로마 황제 따위에는 일절 관심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령과 동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예수를 이끌어 광야로 가셨으니 하나님의 관심은 광야 끝자락에 있는 예수에게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광야에 산다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 인생을 눈여겨 지켜보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내가 광야에서 고통받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바로 나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 그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갈릴리로 돌아오신 예수

예수께서 광야에서 훈련을 다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주님은 갈릴리로 돌아오십니다. 14절 말씀입니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요한이 잡혔습니다. 이 요한은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 요한이 체포됩니다. 왜 체포되었을까요? 세례 요한은 그 당시 갈릴리의 분봉왕이었던 헤롯의 악행을 고발했습니다. 헤롯은 자기 동생의 처를 빼앗아 자기 아내로 삼았습니다. 지도자가 이러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어떻게 지도자가 이럴 수 있습니까? 한 지역의 분봉왕께서 이러시면 되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회개하십시오. 세례 요한이 책망했습니다. 그 소리가 듣기 싫었던 헤롯은 당장 세례 요한을 체포해서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께서 그 헤롯이 다스리고 있는 갈릴리로 제 발로 들어가셨습니다. 사실 이제 헤롯의 레이더에는 예수님이 탐지됩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이 내 뒤에 오실 예수님을 굉장히 많이 광고해 두었기 때문입니다. 저 예수가 와서 똑같이 세례 요한처럼 나에 대해서 고발하면 예수도 가만두지 않겠다. 헤롯은 그런 마음으로 예수를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도대체 어떤 용기가 나서, 무슨 용기로 그 자리에 가셨겠습니까?

2-1. 훈련받은 자의 담대함

혹독한 훈련을 다 받고 나온 분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세상에 겁날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어떤 훈련도 어떤 인생의 어려움도 겁이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웬만큼 배가 고파서는, 웬만큼 육체적인 어려움을 겪어서는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 합니다. 옛날 훈련 시절에 겪었던 일에 비하면 이건 다 넘어갈 수 있는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강력한 훈련을 받고 나면, 사선을 넘나드는 훈련을 겪고 나면 이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광야에서 삼중고로 훈련시키신 이유가 바로 이때를 위함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산중 불교와는 다른 종교입니다. 불교는 산으로 산으로 들어가지 않습니까? 산에 들어가서 속세와의 인연을 끊어버리고 참선하고 도를 닦고 그곳에서 해탈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 애쓰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자꾸만 세속과 단절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 속으로 들어가라고 가르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가르칩니다. 세상 한가운데로 내려가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세상 한가운데에 헤롯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도 갈릴리에 오실 때 헤롯이 버젓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피하지 않으십니다. 훈련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천사가 수종드는 훈련을 받으셨고, 배고픔도, 사탄의 시험도, 들짐승의 위협도 예수님은 다 견뎌내셨습니다.

이제는 헤롯을 피하지 않으십니다. 인생의 헤롯들과 당당히 맞서 싸울 수 있는 능력, 그 힘을 예수님은 가지고 계시면서 헤롯과 당당히 맞서기 위해 갈릴리 그 자리에 오셔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우리 인생을 괴롭게 하는 헤롯들을 많이 만날 것입니다. 갑질하는 어른들도 만날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친한 친구인 줄 알았는데,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줄 친구인 줄 알았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나를 배신하고 뒤통수를 치는 헤롯도 만날 것입니다. 정말 좋은 목회자인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 양의 탈을 쓰고 있는 늑대인 그런 지도자도 헤롯의 모습으로 우리를 지배하려 들 것입니다.

악덕 기업주, 그들은 또 그들과 함께하는 사람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그 헤롯도 우리는 만날 것입니다. 우리가 만나야 할 수많은 헤롯들이 세상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그러나 피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 예수님처럼 당당하게 갈릴리로 가서 맞서 싸워 이겨내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을 두려워하지 마시고 세상과 맞서서, 이 세상에 수많은 헤롯들이 있다 할지라도 그 헤롯들과 맞서 싸워 이겨내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2. 헤롯과 맞선 예수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을 동행하시면서 많은 헤롯들을 만나셨습니다. 갈릴리의 분봉왕 헤롯도 만나셨을 것이고, 갈릴리를 지나서 빌라도라는 또 다른 이름의 헤롯도 만나셨고, 세상에 권세 잡은 엄청나게 많은 헤롯들도 예수님 시절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빌라도의 법정에 서서 "그렇다, 내가 네가 말하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고 당당히 말씀하시고 주님은 십자가로 가셨습니다. 결국 누가 승리하셨습니까? 세상의 권세는 지고 예수님이 승리하셨습니다. 결국 예수께서 모든 권세를 다 이겨내지 않으셨습니까? 이것이 예수님의 권능입니다.

부디 오늘 우리가 지금까지 받았던 훈련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물질의 훈련도 받았고, 사탄의 시험에 대한 훈련도 받았고, 들짐승이 우리를 집어삼키려고 하는 훈련도 받았습니다. 이제는 부디 도망가지 마시고, 헤롯들 때문에 피해서 등 보이지 마시고, 맞서 싸워 이기셔서 인생의 끝자락에 가면 최후의 승리가 나의 것이라고 찬양하며 노래하는 하나님의 백성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복음 선포의 능력

예수께서 갈릴리를 지나가시고 이제는 그곳에서 하나님 나라의 첫 설교, 복음을 증거하십니다. 15절 말씀입니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예수님께서 하신 첫 번째 설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성, 그 첫 번째 설교가 어디에서 이루어졌습니까? 갈릴리 시골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이 설교를 들으면서 아쉬움을 느낍니다. 예수님의 이 설교가 갈릴리 시골에서 몇십 명 앉혀 놓고 하는 설교가 아니었으면 좋았을 텐데, 세상의 중심 로마에서 엄청나게 많은 군중을 응집시켜 놓고 "내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다" 말씀하시고 그때 저 천국의 복음을 멋있게 선포하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것이 여의치 않았더라면 예루살렘에서 수많은 군중들 앞에서 첫 설교를 하셨더라면 좋았을 텐데 라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도 불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이 저 변방 끝자락에서부터 시작하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세례 요한을 광야에서 말씀을 전하게 하셨던 것처럼, 예수님도 갈릴리 어느 한적한 시골에서부터 말씀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말씀을 전할 때 몇 명이나 들었을까요? 한두 명 혹은 서너 명.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능력이 있었습니다. 말씀은 살아 있는 위대한 능력이었습니다. 마음이 주리고 갈급한 자들, 복음의 진리에 갈급한 자들이 엄청나게 많이 세례 요한에게 몰려들었습니다.

죄 사함을 얻게 하는 천국의 세례를 받기 위해서 그들이 몰려왔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증거를 보십시오. 갈릴리 저 시골에서 말씀을 증거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이 사마리아를 지나 온 유대를 뒤덮고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그 예수님의 사랑이 로마 본토를 타고 넘어서 수많은 선지자들에 의해서, 수많은 복음 전파하는 선교사들에 의해서 오늘 우리 심장까지 들어와 있지 않습니까?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의 복음의 능력, 저 변방 끝자락에서부터 시작한 갈릴리의 한적한 시골에서 시작한 예수님의 선포, 이 선포 한 가지가 오늘 온 세계를 지배하는 위대한 사랑의 능력, 말씀의 능력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능력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살아 있는 복음의 능력이 어디까지 뻗어나갈지 우리는 도무지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변방 끝자락 광야에 있다 해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은 성령과 함께라면 우리는 이겨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헤롯들에게 둘러싸여 있어서 낙심되고 절망된다 할지라도 성령과 함께라면 그들을 당당히 물리치고 이겨낼 수 있습니다. 갈릴리 시골에서 몇 명 되지 않는 자들에게 말씀을 전한다고 해서 우리는 낙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성령과 함께라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이 온 세계를 지배하는 말씀의 능력으로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새해 우리 시작이 저 끝자락이라고 해서 절대 낙심하지 마십시오.

내가 있는 위치나 지위가 문제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하느냐가 훨씬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성령과 함께 광야도 이겨내시고, 성령과 함께 헤롯도 이겨내시고, 성령과 함께, 주님과 함께 동행하셔서 우리 인생 끝날 때쯤 하나님이 칭찬하시고 하나님의 복음의 중심에 서는 주의 백성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복음의 위대한 능력을 찬양합니다. 우리가 광야에 산다 할지라도 성령과 함께라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수많은 헤롯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성령과 함께라면 능히 싸워 이길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갈릴리 시골에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초조하지 않습니다. 성령과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주여, 오늘 우리를 성령과 함께하는 위대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하시사 결국 우리 인생 끝날 때 승리하는 개가의 나팔을 부르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