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강 / 1등이 아니어도 (7:24-30)

1등이 아니어도 (막 7:24-30)

조선시대에는 두 번에 걸친 국난이 있었습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그것입니다. 그중 병자호란은 1636년에 일어났는데, 이 병자호란의 원인을 살펴보면 당시 조선 조정 위정자들의 무사안일한 태도가 심각한 국난을 초래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600년대 초기 중국에서는 우리가 흔히 오랑캐라고 부르는 여진족이 득세했습니다. 여진족의 지도자 누르하치는 중국 대륙을 차례차례 정복해 나갔습니다. 결국 누르하치는 자신들이 금의 후손이라는 의미를 담아 후금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당시 중원의 지도력을 장악하고 있던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청나라를 세웠습니다. 청나라는 제국을 세운 이후 조선에 여러 가지 조건을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조선 왕실에서는 친명배금 정책을 고수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오직 따를 나라는 명나라밖에 없고, 지금 오랑캐 너희들이 제국의 주인이 되었다고 해서 우리는 따를 수가 없다는 정책이었습니다. 실제로 청나라에서 조선의 왕족을 요구했는데 가짜 왕족을 보내기도 했고, 청나라에서 사신이 왔는데 그 사신을 홀대해서 보내기도 했습니다. 이 일이 빌미가 되어 병자호란이 벌어진 것입니다.

사실 현실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당시 국제 정세와 청의 세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전혀 생각지 못하는 외교적 전략의 실패였습니다. 심지어 인조가 한양을 버리고 남한산성으로 피난 가 있을 때도 척화파가 득세했습니다. 우리 나라 조선은 태조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부터 명과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왔고, 임진왜란 때에도 명나라에서 원군을 보내 주어서 우리가 살아난 것이니, 이 나라가 다 망하고 백성이 죽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명과의 의리를 저버릴 수 없다는 논리였습니다.

사실 이것은 굉장히 무모한 발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대동단결하고 애국심에 불타는 것 같지만, 전혀 실리를 찾아볼 수 없는 정책이었습니다. 결국 당시 백성들은 위정자들의 무지한 태도 때문에 고생했고 힘겨워했으며, 전쟁을 온몸으로 맞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 나를 아는 것

옛말에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 했습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부딪혀도 패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적을 아는 것과 나를 아는 것 중에 더 어려운 것이 무엇일까요? 저는 나를 아는 것이 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가지 정보로 적에 대해서는 많은 것들을 수집할 수 있고 관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나를 제대로 아는 것이 상당히 어렵습니다. 지금 나의 현실이 어떤지, 지금 내 실력이 어떤지, 과연 내가 적과 부딪혀서 승리할 수 있는 승산은 몇 퍼센트나 되는지, 그리고 지금 돌아가는 세계 정세는 어떠한지를 제대로 분석하기란 상당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나를 아는 데 실패하기 때문에 모든 일에 패배의 단초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이것저것 많이 물어보는데, 그중 하나가 "너 커서 뭐가 되고 싶니?"입니다. 아이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지만 실제로 어른들이 듣기를 원하는 대답은 정해져 있습니다. 대통령, 장군, 대기업 회장님, 사장님, 뭐 그런 것을 어른들은 듣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자녀를 길러 갑니다. 그런데 그 자녀가 커가면서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제정신인 사람은 그 현실로 빨리 돌아와야 합니다. 그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끝없이 이상의 날개짓을 하다가 보면 결국 마지막에는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자기를 알고 현실을 인식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꼭 1등이 아니라도 우리는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습니다. 피라미드 꼭대기 정점의 단 한 사람만 올라가는데, 그 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내가 그 자리에 올라가지 않더라도 우리는 얼마든지 인간답게 살 수 있고, 우리는 얼마든지 행복을 누리고 자아를 실현하며 살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는 1등 아닌 분이 훨씬 더 많이 모여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통해서 1등이 아닌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1등이 아니라도 우리는 주의 은혜를 마음껏 누리며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2. 수로보니게 여인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계시다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들, 서기관들과 논쟁을 하셨습니다. 그 논쟁이 상당히 고되었습니다. 그들이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들과 논쟁을 그치고 주님은 다른 곳으로 좀 가서 쉬려고 하셨습니다. 영혼의 호흡과 영혼의 안식을 위해서 다른 곳으로 가려고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곳은 지중해 해상 무역의 중심 도시인 두로 지방이었습니다. 시돈과 함께 과거 이스라엘 시절부터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던 우상숭배 중심 도시였습니다. 이곳에는 예수님을 아는 사람이 없겠지 생각하고 주님과 제자들이 그곳으로 피해 가셨습니다.

그런데 웬걸요. 그곳에도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주님을 따라다니면서 은혜를 받으려고 하는 사람, 말씀을 듣기 원하는 사람, 병 고침을 원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다 주님께 몰려왔습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한 여인의 이야기가 오늘 본문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여인이 어떤 여인인지 25절과 26절을 보십시오.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 엎드리니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 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여인의 혈통이 무엇입니까? 헬라인입니다. 이방인입니다. 그 헬라인 중에서도 소수민족입니다. 수로보니게 족속이었습니다.

여인의 삶의 자리와 현실은 어떻습니까? 사랑하는 어린 딸이 귀신 들렸습니다. 이 여인에게서 우리가 귀부인의 품격을 찾아볼 수 있습니까? 이 여인이 참 행복하고 지금 아주 복되게 살고 있다는 것을, 여인의 웃음을 찾아볼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유대인 입장에서 볼 때 이 여인은 이방 여인임에 틀림없습니다. 혈통상 이방인입니다. 그런데 삶의 현실도 아주 고단하고 어렵기 짝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어린 딸이 귀신 들렸습니다.

그 딸의 병 고침을 위해서 여인이 얼마나 노력을 했을까요? 재산이 조금 있었다면 그 재산을 탕진했을 것입니다. 여기저기 가서 사랑하는 딸을 고치도록 하기 위해서 수많은 노력을 기울였을 텐데 아직까지 진전이 없습니다. 그 때문에 여인은 마음의 상처가 굉장히 깊이 들어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입니다. 딸보다 어쩌면 더 큰 고통을 여인이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이 고통을 가지고 주님께 나왔습니다.

2-1. 충격적인 반응

보통 이런 사람을 만나면 우리 주님이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그대로 주님은 따뜻하게 손잡아 주시고 위로해 주시고 주님의 사랑을 마음껏 보여 주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 유독 이 여인에게는 주님이 낯선 사람, 다른 사람처럼 다가옵니다. 충격적인 주님의 반응입니다.

2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우리 주님은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인을 마치 개처럼 취급하신 것입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 너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 나는 불편하다, 이런 말씀이었습니다. 어떻게 너에게 내가 먼저 은혜를 풀어줄 수 있겠느냐? 우리가 아는 예수님이 과연 맞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아는 주님은 이런 주님이 결코 아닙니다. 주님은 따뜻한 분이고 마음이 넓은 분이고 먼저 다가가서 손잡아 주시는 분인데, 우리는 주님을 지금 굉장히 낯설게 여깁니다. 아마 이 여인도 그랬을 것입니다. 주님을 지금까지 본 적은 없지만 소문으로 들었고 많은 사람의 입을 통해서 전해 들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들었던 주님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시는데 당황하지 않겠습니까? 얼마나 마음이 불편하고 부끄럽고 민망하겠습니까?

2-2. 놀라운 신앙고백

그런데 더 충격적인 사실은 예수님의 반응을 받아내는 여인의 반응입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우리를 이 자리에 한번 대입시켜 보십시오. 만약 내가 이 역사적 현장에 들어가 있었다면, 나에게 귀신 들린,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이 있고 간절한 심정으로 주님 앞에 나온 여인이라면,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을 듣고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주님 서운합니다.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습니까? 내가 소문으로 들은 주님은 이런 분이 아니신데 어떻게 나에게 개 취급을 할 수 있습니까? 나는 주님께 실망했습니다." 그리고 뒤돌아서 나오지 않겠습니까? 이건 점잖은 부류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마음의 울화통이 치밀면 주님 얼굴 면전에다가 한마디 던지고 나올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반응은 가히 충격적입니다. 많은 신학자들과 많은 설교자들, 많은 분들이 이 여인의 이 고백을 역사상 찾아볼 수 없는 가장 아름다운 신앙고백이라고 말합니다. 저도 역시 그 말에 동의합니다. 이 여인의 말을 옮기면 이렇게 옮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 맞습니다. 저는 이방 여인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한 번도 알아보지도 못하고 그 말씀대로 산 적이 없는 이방 여인입니다. 저는 토라도 모릅니다. 모세오경도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제 딸의 병 낫기를 위해서 굿도 했습니다. 저는 내 딸의 병 낫기를 위해서 율법에서 금하는 일도 많이 하며 지냈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님 앞에 나올 자격이 없는 죄인입니다. 그런데 주님, 제가 주님 곁에 서서 내 딸을 1등으로 고쳐 주시지 않아도 좋으니, 내 딸이 주님께 처음이 아니어도 좋으니, 나를 떠나가라고만 말씀하지 말아 주십시오. 제가 주님 곁에 서서 언제까지라도 기다릴 테니, 모든 사람 다 고쳐 주시고 그 은혜 부스러기라도 남으면 그 부스러기 치우지 마시고 그냥 상 아래에 두시면 제가 그것이라도 먹고 제 딸과 함께 행복하면 안 될까요? 제 딸을 고쳐 주시는 데 처음은 바라지도 않습니다. 다만 내치지만 마십시오. 저는 죄인임이 분명하고 저는 이 자리에 설 수 없는 이방 여인임이 분명합니다. 제가 이방 여인이니까 제 딸도 한 번도 하나님을 찾지 않은 제 딸임에 분명합니다. 그래도 쫓아내지 마십시오. 그냥 곁에 서서 은혜의 부스러기라도 얻어 먹고 은혜받고 싶습니다."

놀라운 고백이 아닙니까?

3. 믿음의 본질

믿음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믿음은 현실을 정확하게 바라보는 것, 거기서부터 믿음이 출발합니다. 우리는 흔히 믿음을 잘못 생각하고 오해해서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따는 것, 하늘에 떠 있는 별을 따오는 것, 이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공허하고 황당하고 현실성 없는 생각들입니다. 내 현실이 어떤지, 내 삶의 자리가 어떤지, 내가 서 있는 자리가 분명히 어느 자리인지를 분명히 깨닫고 이해하는 것, 여기서부터 믿음이 출발하는 것입니다.

여인은 자신의 삶의 현실을 직시했습니다. 냉정하지만, 소름 끼칠 만큼 냉정하게 자신을 바라보았습니다. 여인의 삶의 현장은 누가 뭐라 해도 이방인입니다. 한 번도 주님을 찾지 않은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병 낫기를 위해서 주님께 나왔습니다. 염치가 없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이런 모욕을 주셔도 저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당연합니다. 제가 어찌 1등을 바라겠습니까? 먼저 와서 엎드리기는 했으나 그러나 주께서 쫓아내지만 않으시면 부스러기라도 좋습니다.

우리는 믿음을 공중에 띄워 놓고 그것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믿음의 현실, 밑바닥을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3-1. 죄인 됨을 직시함

믿음의 현실로 나를 살피는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나의 죄인 됨을 보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죄에서 구원받아서 지금 여기까지 와 있는지, 하나님은 나를 어떤 죄악에서 건져 주셨는지, 내 죄인 됨을 정직하게 직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떤 죄에서 구원받으셨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믿기 전에 나는 어떤 인생을 살았습니까? 만약 내가 하나님 만난 그날 밤에 그 놀라운 은혜의 자리가 없었더라면, 만약 나에게 하나님께서 그날 그 시각에 말씀으로 역사하지 않으셨더라면, 나는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요? 그냥 그대로 살다가 죽어서 저 지옥불에 불쏘시개로 던져질 만한 그런 인생이지 않습니까?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인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를 그 무서운 죄악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입으로 차마 말하기도 부끄러운 죄악의 현장에서 하나님이 나를 건져 주시고 하나님의 친 백성 삼아 주셨습니다. 이것이 놀라운 은혜입니다. 우리는 이 놀라운 은혜를, 내가 죄인이었다는 것, 내가 용서받을 수 없는 죄 자리에 있다가 지금 구원받았다는 이 사실을 지금도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내게서 사라지면, 이것이 내게서 희미해지면 상처받는 일이 생깁니다.

3-2. 은혜의 감격

교회에는 상처받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저마다 상처받았다고 합니다. 아무개에게 상처받았습니다. 아무개의 눈빛에 상처받았습니다. 아무개의 행동에 상처받았습니다. 상처받았다는 이야기를 다 들어보면 나를 인정해 주지 않았다는 서운함입니다. 그런 일에 상처받을 것 같으면 오늘 이 여인은 예수님의 뺨을 때려도 시원찮을 상처를 받은 여인입니다. 얼마나 모욕적인 언사입니까?

그런데 이 여인은 자신의 현실을 직시했습니다. 내가 이방인이라는 것, 나는 지금 이 자리에 나오기에도 부족한 존재라는 사실을 그대로 깨닫고 주님 앞에 나온 것입니다. 부디 오늘 우리가 나는 어디에서 구원받은, 용서받은 죄인이었는지 우리 과거의 삶의 현장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내가 오늘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은혜가 아닙니까?

지금 오늘 내가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 듣고 예배 드리고 구원받은 백성으로 산다는 것 자체가 이미 우리는 은혜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은혜에 겨워서, 그 은혜에 감격해서 살아가면 작은 상처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별것 아닌 것으로 넘어갈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4. 경고의 인물들

자신의 삶의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해서 망해 버린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런 사람들을 여럿 기록하고 있습니다.

4-1. 가인

그중에 대표적인 사람은 가인입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과 함께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하나님께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인의 예배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예배만 받으셨습니다.

그때 가인이 느끼는 감정입니다. 창세기 4장 5절에 그의 감정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했습니다. 누구에게 분을 품었을까요? 우선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왜 내 제물은 받지 않습니까? 그리고 두 번째는 동생 아벨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시기합니다. 마음속에 동생을 죽이고 싶은 살인의 충동이 일어납니다. 표정 관리가 되지 않습니다. 안색이 변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살인의 충동을 행동으로 옮깁니다. 동생을 살해했습니다. 하나님이 말리시는데도 불구하고 동생을 죽입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을 떠나 에덴 동쪽 놋 땅에 가서 성을 짓고 살았고 하나님에게서 완전히 떠난 백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내가 드린 예물이 왜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을까? 자신의 예물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예배 드렸을 당시에 그의 마음 상태를 반추해 보지 않습니다. 끄집어내 보지 않습니다. 나의 예배의 부족한 부분이 무엇이었을까? 왜 하나님은 내 예배를 받지 않으셨을까? 나를 살피지 않고 하나님께만, 동생에게만 화풀이와 분풀이를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믿음의 현실, 나의 삶의 자리를 살피지 않은 자, 결국 그 마지막은 비극적인 결과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4-2. 에서

이 사람뿐만이 아닙니다. 에서를 보십시오. 에서는 야곱과 쌍둥이 형제입니다. 어머니 리브가가 태중에서 쌍둥이를 임신했습니다. 원래 족장들의 전통에 의하면 장자가 축복권을 가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선택은 달랐습니다. 에서가 아닌 야곱이 하나님의 선택이었습니다.

훗날 야곱이 아버지의 축복을 받는 날에 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다 죽여버리겠다고 난리였습니다. 그리고 집을 박차고 나갑니다. 그리고 남쪽으로 남쪽으로 내려가서 세일산에 거주했습니다. 세일산을 자신의 삶의 터전 삼아 그곳에 거주합니다. 거기서 결혼하고 자식을 낳아서 에돔 족속, 민족을 이루었습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후손들까지 하나님께서 배제하시는 삶을 살다가 불행한 인생을 마친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잘못을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고발합니다. 히브리서 12장 16절을 보십시오.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그에게는 이런 과거가 있었습니다. 사냥하고 집에 돌아왔는데 배가 고픕니다. 동생이 팥죽을 맛있게 쑤어 두었습니다. 그것 나에게 달라, 그리고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렸습니다.

자기가 소중히 여기지 않는 장자의 명분을 하나님도 지켜 주지 않습니다. 자신이 팥죽 한 그릇에 축복의 명분,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렸는데 하나님이 왜 지켜 주셔야 합니까? 그 명분을 팔아버린 그 에서를 하나님은 망령된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명분을 경홀히 여긴 자, 직분을 경홀히 여긴 자, 하나님은 그를 축복의 순서에서 제외시켜 놓으셨습니다.

자신의 삶을 돌아봐야만 했습니다. 축복이 내가 아닌 야곱에게 흘러갔을 때, 아, 내가 과거에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렸구나, 그럼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회개해야 옳았습니다.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돌아보니 다 제 잘못입니다. 제가 죄인입니다. 제가 자존심 상하고 부끄럽지만 저는 야곱의 장막에 거하겠습니다. 동생이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은혜의 부스러기라도 내가 거기서 먹고 은혜 아래에 거하겠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겠습니다. 자존심 상하지만 괜찮습니다.

그는 그렇게 하고 그 은혜의 장막에 머물러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떠나갔습니다. 결국 그는 마지막을 하나님의 자녀로 살지 못한 불행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5. 1등이 아니어도

무엇이 이런 문제를 만들까요? 결국 자존심 문제 아니겠습니까? 오늘 이 여인은 무엇을 주장합니까? 자존심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자존심을 주장해서 얻는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자존심을 주장하고 여인이 그냥 길을 떠나 버렸다면 결국 딸의 병 고침을 얻지 못합니다. 여인의 충심, 그 마음속에는 딸의 병 고침만 가득 차 있었습니다. 딸이 병 고침을 얻기만 한다면 나는 어떻게 해도 상관없다, 나는 개 취급을 당해도 나는 이런 모욕을 당해도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내가 죄인이고 내가 이 자리에 설 수 없는 죄인임을 그녀는 깨닫고 주님 앞에 엎드렸던 것입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은 우리를 나오라고 하십니다. 너 있는 그대로 가지고 와라. 꾸미지 마라. 죄인이면 죄인의 상태로, 가지지 못했으면 가지지 못한 상태로, 배우지 못했으면 배우지 못한 상태로 그대로 나와라. 너의 있는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라. 이것이 믿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믿음을 보인 여인에게 주님은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2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여인의 이 말은 단순한 한마디 말이 아니었습니다. 여인의 속 깊은 신앙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녀의 간절함의 고백이었고 자신의 죄인 됨을 주님께 아뢰는 고백이었습니다.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면 그때부터 위로부터 하늘의 능력과 구원의 역사가 임하는 것입니다.

부디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등이 아니면 어떻습니까? 수석으로 합격하는 것이나 꼴찌로 합격하는 것이나 합격하면 다 행복한 것 아닙니까? 은혜를 1등으로 받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부스러기 하나라도 받으면 얼마나 행복합니까? 그 은혜가 나를 구원한다면, 그 은혜로 내가 하나님 안에서 행복할 수 있다면, 우리는 현실적인 선택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디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의 자녀로, 1등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는 복된 인생을 살아가시는 주의 백성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는 믿음을 하늘의 달을 따고 별을 따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믿음의 시작은 나의 인생 밑바닥을 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어떤 죄인이었는지, 내가 어떤 죄의 자리에서 구원받았는지, 나의 삶의 현실은 얼마나 비참했는지,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믿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곳에서부터 출발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는 주의 백성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크고 놀라운 은혜에 구원받아 늘 감격하고, 내가 어떤 죄인이었는지를 꼭 기억하고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그곳에서 출발해서 우리 오늘의 현실에서 속상한 감정, 섭섭한 감정도 다 내려놓고, 오직 주께서 주시는 귀하고 값진 은혜의 보좌 앞으로 매일매일 한 걸음씩 걸어가도록 주께서 우리의 믿음을 연단시키고 붙잡아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