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강 / 귀가 열리고 혀가 풀리다 (7:31-37)

귀가 열리고 혀가 풀리다 (막 7:31-37)

누군가에게 "클래식을 좋아하십니까?"라고 물으면 아마 대부분 난감해하실 것입니다. 속으로는 대중가요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대중가요는 비트도 빠르고 멜로디도 단순하며 가사도 서정적입니다. 결정적으로 대중가요는 한 곡이 길어야 5분을 채 넘지 않습니다. 짧고 강렬하며 부드럽기 때문에 대중가요가 쉽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클래식 교향곡만 하더라도 듣기가 쉽지 않습니다. 베토벤 3번 교향곡 '영웅'은 연주 시간만 50분이 넘습니다. 그 안에 기승전결의 서사 구조가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정말 귀를 기울이고 제대로 듣지 않으면 중간에 길을 잃고 잠들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이 대단한 교향곡을 들으려면 경청하는 마음도 필요하고 사전 지식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교향곡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는 훨씬 더 대단한 집단입니다. 대략 100명 내외의 연주자로 구성되는데, 그중에 현악기 연주자가 약 60여 명, 금관악기 연주자가 15명 내외, 목관악기를 다루는 분이 15명 내외, 타악기가 10명 내외로 약 100여 명 내외로 구성됩니다. 100명이 넘는 단원들을 이끌고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지휘자는 얼마나 더 대단해야 할까요? 그분은 어떤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하겠습니까? 음악적인 재능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인간적인 따뜻함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가장 중요한 것은 듣는 귀가 아주 중요합니다. 귀가 발달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쪽 파트에서 누가 다른 음색을 가지는지, 저쪽 파트에서 누가 지금 자기 소리를 내지 않는지, 강약과 흐름을 조절하고 있는데 어느 부분 어느 곳에서 그 흐름을 방해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듣고 구별하고 가려내고 지적해 주어야 좋은 음악을 만들어 갈 수가 있습니다.

연주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주자가 어떤 능력을 가져야 오케스트라 단원이 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음악적인 재능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 외에도 경청하는 능력이 아주 필요합니다. 나 혼자를 위해서, 내 실력을 뽐내기 위해서 연주한다면 오케스트라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분은 독주자로 길을 가는 것이 훨씬 더 좋을 것입니다. 전체적인 흐름을 인지하고 듣고 따라하며, 지금 이 부분에서 내 악기가 어떤 소리를 내야 하는가, 지금 여기서 나는 어떤 음색을 내는 것이 좋은가를 끊임없이 기억하고 마음에 새길 때 전체적인 조화와 하모니를 이룰 수 있습니다.

어찌 음악뿐이겠습니까? 우리 삶도 역시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공동체가 어떤 방향으로 가는지 함께 살피고, 그래서 나는 여기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되는지를 공동체와 타인과의 조화 속에서 이루어 가는 것,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서 아주 필요한 덕목입니다.

신앙생활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신앙생활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음성과 말씀을 먼저 듣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마음이 감동을 받고 은혜를 받아야 그다음 행동하는 방향이 생깁니다. 듣지 않으면 길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경청이 아주 중요한 이유입니다.

1. 한 사람을 위한 맞춤 치료

오늘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듣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임을 일깨워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두로 지방에 가서 수로보니게 여인을 만났습니다. 이 여인은 귀신 들린 딸을 두고 있었습니다. 가슴 아픈 여인이었습니다.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딸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두로를 떠나서 시돈으로, 시돈을 떠나서 데가볼리 이방인 지역을 다 거쳐서 다시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갈릴리에는 일단의 무리들이 주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환자 한 분을 데리고 나왔습니다. "이분을 고쳐 주십시오. 주님이 오시기만 하면 이분을 고칠 수 있을 텐데 주님 고쳐 주십시오." 하는 간절함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이 환자가 좀 특별합니다. 귀가 먹고 말을 더듬는 사람이었습니다. 원래 청각과 언어 능력은 함께 가는 것 아닙니까? 들어야 말할 수 있고, 듣지 못하면 말하는 것이 어눌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환자를 데리고 주님 앞에 나와서 주님께서 이분을 고쳐 주십니다.

그런데 주님이 이분을 고쳐 주시는 방식이 특별합니다. 오늘 말씀 3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먼저 주님이 이분을 따로 데리고 군중을 떠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과 이분이 독대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손가락 두 개를 양쪽 귀에 넣으셨습니다. 그 후에는 주께서 침을 뱉습니다. 손에다가 뱉고, 이 침 뱉은 손을 그 사람의 혀에다가 갖다 대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고 기도하시고 "에바다(Ἐφφαθά), 열리라" 하시니 이분의 병이 치유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분이 치료되는 과정을 보면서 "아, 특별하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치료하신 적이 있던가? 왜 이렇게 하셨을까?" 하는 질문을 갖습니다. 주님이신데 말씀 안 하셔도 가능하실 텐데 왜 굳이 이렇게 하셔야 됐을까? 말씀만 하시든지 아니면 안수라도 해 주시면 금방 나을 텐데 굳이 이렇게 하실 이유가 있었는가? 왜 이 사람에게만 이렇게 치료하셨을까?

1-1. 각양각색의 치유 방법

그런데 우리가 복음서 전체를 보면,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마가복음 전체를 보더라도 주님께서 환자들을 치료하실 때는 각양각색의 방법으로, 한 사람도 동일한 방식으로 치료하신 적이 없습니다. 이분에게는 주님께서 하지 않던 행동을 하셔서 그렇게 보일 뿐, 모든 사람은 각자의 맞춤 치료로 주께서 그들을 치료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장에 예수님께서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친 사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심방을 가셨습니다. 그분이 찾아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주님이 베드로 장모의 손을 잡아 이렇게 세워 주셨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2장에는 중풍병자를 고치시는데 주께서 중풍병자를 고칠 때 전혀 터치를 하지 않습니다. 말씀으로만 하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그래서 그는 고침 받았습니다.

어떤 이는 손잡아 이렇게 세워 주시고, 어떤 이는 전혀 터치하지 않으시고 말씀으로만 하십니다. 마가복음 3장에 보면 한쪽 손 마른 병자가 나옵니다. 그분을 주님께서는 회당 사람들 한가운데 세웠습니다. 수많은 군중들이 있는데 그 한가운데 세우고 "네 손을 내밀라" 하셨습니다. 이분은 손이 이상해서, 다쳐서 부끄러워서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 수가 없는데 주께서 손을 내밀라 하셨습니다. 부끄러운 손을 펼쳐서 사람들에게 보였습니다. 그때 그 손이 회복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분을 고칠 때는 주님께서 사람들을 떠나서 주님과 이분이 독대하는 자리를 만드셨습니다. 각자 다르게 치료하십니다. 어떤 여인은 주님이 길을 가는데 뒤에서 옷자락을 만졌는데도 병이 낫습니다. 마가복음 5장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을 치료하시는데 각양각색으로, 각자 다른 방식으로 회복하시고 치료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통해서 주님의 어떤 모습을 발견합니까? 우리 주님은 이 모든 분들에게 필요한 것을 가장 정확하게 알고 계시고, 나보다 나를 더 정확하게 아시고, 나에게 맞는 치유의 방법을 허락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상황과 우리의 믿음의 현실과 우리의 기질과 성격과 습관까지 다 알고 계시고, 거기에 꼭 필요한 치료의 방법을 허락하시는 분, 그분이 바로 우리 주님 예수님이라는 뜻입니다.

1-2. 형편을 헤아리시는 주님

나이가 들어가고 연륜이 쌓여 갈수록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어집니다. 어떤 분은 연세가 들어가고 경험이 많아질수록 사람들의 형편을 헤아리는 분이 있습니다. "그렇지, 나도 젊을 때 이랬지. 그러니 지금 이것이 얼마나 필요할까? 나도 어릴 때 부모 잔소리 듣기 싫었는데 나도 잔소리를 최대한 줄여야 되겠다." 어른들이 연세가 들어가고 연륜이 쌓일수록 그렇게 젊은이들의 형편과 상황을 고려하고 이해해 주는 분이 있는 반면에 또 한 부류는 정반대의 분들도 있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생각이 강화됩니다. "내가 살아보니 이건 아니고 이건 옳은 것이다. 내가 살아보니 넌 닥치고 나만 따라오면 된다." 이런 분도 계십니다. 우리는 이런 어른을 가리켜 아이들이 하는 말로 꼰대라고 부릅니다.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의지를 그냥 닥치는 대로 강요합니다. 이런 두 부류의 분들이 있습니다.

가정에서 자녀가 두셋만 있어도 그들의 선택은 각양각색입니다. 중국집에 배달 음식을 시켜도 나는 짜장면, 나는 짬뽕, 나는 볶음밥, 다 다르지 않습니까? 교회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모두가 다 각양각색의 분들이 모여 있습니다. 목사를 좀 멀리 두고 싶어하는 분도 계십니다. "목사님 심방 자주 하시는 거 좀 불편하니까 우리 집에는 몇 년에 한 번만 오십시오." 이런 분도 계시고, "집에는 오지 마시고 그냥 찻집에서 차나 한잔 합시다." 이런 분도 계시고, 또 어떤 분은 아주 치밀하게 관계성을 맺고 싶어하는 분도 있습니다. 속에 있는 이야기를 다 털어놓기 원하시고, 인생길을 가면서 아주 작은 문제라도 목사와 함께 나누기를 원하는 분도 계십니다.

어떤 이는 말씀을 중심으로 살고, 어떤 분은 기도를 열심히 해야 내면이 충만하다 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교회에서 봉사를 열심히 해야 내가 살아 있는 존재임을 깨닫는다 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이것만 아니라면, 신앙의 잘못된 길로만 탈선하지만 않는다면 뭐 잘못된 게 무엇이겠습니까? 이런 모습이든 저런 모습이든 그 성향과 그 기질과 그분의 지금 믿음 상태에 따라서 우리가 다 용납하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사회도 그렇게 돌아가지 않습니까? 산업혁명 이전 시절에는 집에서 가내수공업으로 뭔가를 만들며 살았습니다. 가내수공업을 하니까 소품종 소량 생산만 가능했습니다.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나서 공장이 돌아가니까 소품종 대량생산이 가능했습니다. 공장 전체가 기계화되고 자동화되기 시작하니까 다품종 대량생산도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대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우리는 다양한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입고 있는 옷을 남이 입고 있으면 집에 가서 입지를 않습니다. 내 머리 모양 스타일과 같은 모양을 가지고 있으면 다시는 그 미용실에 가지 않습니다. 장신구, 가방, 신발, 모두가 다 내 취향대로입니다. 사회도 이렇게 흘러갑니다.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욕구가 교회 안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습니까? 2천 년 전 예수님은 각양각색의 성도들의 상황에 맞춰서 목양하셨습니다. 교회가 그렇게 하려면 지나치게 비대해져서는 곤란할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 그분의 형편과 성향과 믿음의 정도를 살피고, 그렇게 살펴서 목회하기에 교회가 지나치게 대형화되어서는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교회에서 세례 입교 교육을 실시합니다. 교육을 받고 문답을 해야 세례 입교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사회에서 주일날 출근하는 직장인들도 계십니다. 그런 분들이 이 교육 일정을 지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교회는 이 일정을 지키지 못하면 당신은 평생 세례받지 못합니다, 성찬식 때 떡도 포도주도 받지 못합니다, 영원히 세례교인 아닌 상태로 사십시오, 이런 교회는 정상적인 교회가 아닙니다.

성도들의 형편과 상황을 살펴서 "아, 그러시군요. 일정을 말씀해 주시면 목회자가 그 일정에 맞추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맞춰 드려야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방법이고, 그 옛날 2천 년 전 예수님께서 하셨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우리는 오늘 예수님을 통해서 무엇을 배웁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사람들의 형편과 처지를 이해하는 폭이 얼마 정도 되십니까? "아, 저분은 저런 형편에 살고 계시는구나. 저분이 저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겠구나." 사람들의 형편과 처지를 이해하는 폭이 보다 깊어지고 보다 넓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그분들의 형편에 맞춰 드릴 수 있는 우리 믿음의 넉넉함을 함께 주님을 통해서 배워 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귀가 열려야 혀가 풀린다

오늘 또한 이 예수님의 치료의 방법을 보면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순서입니다. 주께서 순서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시는데, 이 환자를 고치실 때 먼저 귀에 손을 넣으시고 그다음 혀에 손을 대셨습니다. 이것이 순서입니다. 귀가 열려야 입이 풀린다는 주님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이 순서대로 이분이 이렇게 치료를 받았습니다. 회복도 그 순서대로 이루어졌습니다.

35절을 보십시오.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이 분명하여졌습니다. 혀가 풀리고 귀가 열린 것이 아닙니다. 귀가 열리고 그다음 혀가 풀렸습니다. 이것이 순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이렇게 창조하셨습니다. 사람을 창조하실 때 듣지 못하면 말하지 못하도록, 들어야 말할 수 있도록,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이며 창조의 신비입니다.

이분은, 오늘의 환자는 정직한 사람입니다. 적어도 육체는 정직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영적으로 정직한 사람인가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귀가 뚫리지 않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듣고 받고 이해하고 깨닫지 못하고 있는데, 나는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살지는 않는가 우리 자신을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정치인들이 가끔 실언을 하고 또 막말을 하는 이유가 뭘까요? 국민들의 말을 잘 경청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속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말하지 않은 다수는, 침묵하는 다수의 백성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발품을 팔아서 그들의 속에 있는 소리를 듣지 않습니다. 들으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말합니다. 그러니 실언이 잦을 수밖에 없고, 때로는 하지 말아야 될 막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믿음의 귀가 열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듣고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 실언과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막말을 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말을 실수하고 사람들에게 상처 주는 말도 자주 하는 그런 우리의 언어 습관이 바로 귀에 문제이지 입에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듣지 않고 말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배제하고 말하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생겨 나지 않겠습니까?

야고보서 1장 19절에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교훈합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속히 하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듣기는 속히 하라. 더디 하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말하기는 더디 하라. 성질을 부리는 것도, 분을 내는 것도 더디 하라. 그런데 우리는 듣는 건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입이 빠르고 행동이 빠릅니다.

야고보서는 행동에의 서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고보서 기자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교훈은 듣는 걸 속히 하라, 즐겨 듣고 최대로 들어라, 그래야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할까요? 사람의 말, 친한 사람의 말?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듣기를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 우리가 말씀을 들어야 할 이유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우리의 믿음 때문입니다. 들어야 믿음이 생기고, 들어야 믿음이 견고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요? 우리 마음속에 회개의 영이 생깁니다. 나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내가 잘못된 것을 바라보고 내가 회개하고, 회개에서 마음이 깨끗해지고 정화되면 그다음 나오는 말은 축복하는 말, 인자한 말, 친절한 말, 사랑의 말이 흘러나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가 깨끗하게 정화되지 않고 그다음 말을 내뱉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할 것입니다. 주의 말씀 듣고 말하는 하나님의 백성 되시기를 바랍니다.

2-1. 듣는 태도의 중요성

여기서 또 하나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될 문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태도입니다. 어떤 태도로 들어야 하는가? 많은 사람들은 듣고 싶은 말씀만 가려 듣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심판 말씀은 듣지 않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부자 청년이라는 한 청년이 나옵니다. 이분은 청년인데 부자였습니다. 복음서 곳곳에 이 청년이 나오는데 이분은 또 유대인의 관원이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 공회의 회원이었습니다. 지위도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젊고, 돈도 있고, 명예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분이 하루는 주님을 찾아갔습니다. 주님께 묻습니다. "주님, 저에게 무엇이 부족합니까? 제가 어떤 일을 더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요?" 그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그리고 너는 나를 따르라."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들어 버렸습니다. 그가 절대로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었습니다.

이 말씀이 적어도 주님께서 "너 있는 재산의 3분의 1 혹은 절반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러면 들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너 3개월만 나를 따라다녀라. 6개월이나 일 년만 나를 따라다니면 너에게 영생이 가능할 것이다." 그랬다면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듣고 싶지 않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됐을까요?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들었으니까 실천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고, 얼굴에 수심만 가득해서 그 근심 안고 결단하지 못하고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경을 보십시오. 성경도 차분히 살펴보십시오. 내가 듣고 싶은 말이 많은가, 듣고 싶지 않은 말이 많은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십자가, 듣고 싶은 말씀입니까? 나를 위해서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셨다는 사실은 내가 듣고 싶은 말이지만, "네 십자가, 네가 지고 나를 따르라", 이건 듣고 싶지 않습니다. 귀를 막고 싶습니다.

"오른 뺨을 맞으면 왼 뺨도 돌려 대라." 내가 왜, 내가 왜 그렇게 해야 되는가? "누가 오리를 가자면 십 리를 가 주라." 이것도 듣고 싶지 않습니다. "겉옷을 달라면 속옷까지 벗어 주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런 말들은 다 듣고 싶지 않습니다. 복 준다는 말, 잘될 것이라는 말, 창대하게 될 것이라는 말, 이런 말은 내가 듣고 싶은 말입니다. 그러나 헌신하고 십자가 지고 손해 보고 고난받고 좁은 길로 걸어가고, 이런 말은 다 듣고 싶지 않습니다. 귀를 막고 싶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지 않습니까?

2-2. 교회의 공적 기능

교단 총회에서 슬픈 결정이 내려진 적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표류하고 있었던 어느 교회의 세습 문제에 대해서 교단 총회에서 승인의 길을 열어 준 것입니다. 많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그동안 많은 말들이 있었습니다. 국내의 많은 언론들에서 이 일을 조명하고 취재하고 분석했습니다.

문제는 교회의 공적 기능입니다. 교회가 사유물이 되어도 좋으냐, 교회가 개인의 소유냐, 교회의 공공성이 있느냐, 교회는 공적 기능을 가진 공동체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하나님이시고, 교회의 주인은 누가 뭐래도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사람이 주인 노릇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공적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서 적어도 사람들의 입에, 사람들의 귀에 오르내리는 대형 교회, 적어도 지명도 있는 교회는 세습을 하면 곤란하지 않겠느냐 하는 문제였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찬반 양론이 격렬하게 부딪혔습니다.

그런데 결론은 듣고 싶은 말만 듣고 결론을 내려 버렸습니다.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걱정하고, 세상의 수많은 믿는 사람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 공적 기능을 말하고, 말씀을 통해서 많은 분들이 메시지를 던지고 했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공적 기능은 반대 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듣고 싶은 말만 들으면 이런 결정이 내려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더 큰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귀가 열리지 않으면 혀가 풀리지 않습니다. 앞으로 목회자들이 어떤 식으로 설교를 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예언자적 목소리,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어떻게 설교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교회가 공적 기능을 상실하고 교회가 사적 집단으로 전락하고 있는데 어떻게 예언자적 목소리를 낼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라. 다 나누어 주라. 네 소유에 욕심을 내지 말고 모든 것 다 털어서 남들에게 나누어 주라." 이런 말을 교회가 과감히 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우리의 혀는 사탄의 권세 아래 놓이게 된 것입니다. 지옥을 향한 문이 열려 버린 것입니다. 불행한 일이, 불행한 결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이 내 심장과 폐부를 찔러서 내가 괴롭고, 내가 듣기 싫은 말을 들어야 할지라도 그 말씀이 내 영혼의 양식이 된다면 우리가 들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선포하는 입술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예수 믿으십시오. 교회 나와야 합니다." 전도하고 "예수 믿으면 우리에게 이런 변화가 생깁니다" 이런 역사를 전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내 입에 능력을 가지고 선포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혀를 위해서는 귀가 열려야 합니다.

부디 귀를 닫는 어떤 결정도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접할 때마다 나를 찌르는 말씀이 오늘도 우리에게 선포될 수도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이웃들이 나에게 어떤 말을 할 때도 자존심이 상하고 마음이 상하는 말들이 내 귀에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순종하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그럼 우리의 혀가 풀릴 것입니다. 그럼 우리의 모든 문제가 사탄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영혼의 자유이고, 이것이 예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려고 십자가에서 죄의 권세를 속량하신 이유입니다. 부디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몸 된 성전 된 우리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의 성전 된 삶을 거룩하게, 듣고 혀가 풀리는 인생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3. 에바다, 열리라

예수님께서 이 탄식할 현실을 보시고 하늘을 향하여 "에바다(Ἐφφαθά), 열리라" 하셨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예수님께서 이 환자 한 분만 보고 탄식하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 그 당시 듣고 싶은 말만 듣고 아예 귀를 막고 살아가는 수많은 종교 집단의 지도자들, 그들을 향하여 가슴을 치며 탄식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하여 "열리라, 에바다(Ἐφφαθά)" 하셨습니다.

부디 제발 귀를 열고 혀가 풀리라고 간청하셨던 주님의 목소리가 오늘 우리에게 임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