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강 / 불쌍히 여기노라 (8:1-10)

불쌍히 여기노라 (막 8:1-10)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가 1862년에 「레미제라블」을 출판했습니다. 그 책은 우리에게 '장발장'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굶주리는 일곱 명의 조카를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쳤다가 19년이나 옥살이를 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이제 추방당해 세상을 떠도는데, 그 장발장의 마음이 오죽하겠습니까? 얼음장같이 차갑게 얼어붙었습니다.

세상을 향한 기대도, 나라를 향한 소망도 하나도 없이 차가운 마음으로 세상에 내던져지고 팽개쳐진 채로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 힘들고 어려운 육체를 쉴 곳도 없고, 하룻밤 잠잘 곳조차 없었는데 한 성당에 들어갔습니다. 미리엘 신부가 그를 따뜻하게 맞아줍니다. 그런데 그는 그날 밤에 은으로 만든 식기를 훔쳐서 밖으로 나왔습니다. 남루한 차림의 거지 같은 사람이 반짝반짝 빛나는 식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이상하게 보였던 경찰이 그를 체포했습니다. 그리고 성당으로 가서 신부와 마주합니다. 신부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건 내가 선물로 준 것이라오." 그리고 은촛대까지 더 얹어줍니다. "왜 이건 가지고 가지 않았느냐"고 말입니다. 그 순간 장발장의 마음이 따뜻하게 녹아지는 것을 깨닫습니다.

'아, 지금도 세상에는 내 죄를 덮어주는 사람이 있구나. 내가 이렇게 살아도 나를 이해해주고 또 덮어주는 한 따뜻한 사람이 있구나.' 그때부터 그 사람은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이름도 바꾸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나중에는 훌륭한 시장까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마음속에 박애주의자로 살게 됩니다. 어려운 처지에 있었던 판틴이라는 여성이 죽으면서 맡겼던 딸 코제트를 그는 열심히 돌봐주었습니다. 평생을 책임집니다. 그녀가 자라서 시집갈 때까지 잘 돌봐주었습니다.

이 「레미제라블」 이야기는 결국 빅토르 위고의 평생에 걸친 자전적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20대 때에 「노트르담 드 파리」라는 소설을 써서 프랑스 낭만주의의 대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1848년 2월 혁명으로 그는 왕을 이용하는 것에 반대하는 공화주의자가 됩니다. 그때부터 그의 인생에 시련과 역경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그때부터 망명 생활을 해야 했고, 그 길고 긴 망명 생활 동안 딸의 죽음도 경험하고 극심한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투옥과 추방을 여러 번 반복하면서 말 그대로 '레미제라블', 비참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인생의 밑바닥에서 비참한 사람이 되고 나니 똑같은 비참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따뜻한 마음으로 그 소설을 집필했고, 그 책은 수많은 세계인들의 심금을 울리는 위대한 책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본문에서 예수님을 만나는데, 예수님 또한 우리에게 긍휼의 마음, 따뜻한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그 긍휼과 따뜻한 마음이 차갑게 식어버리고 얼어버린 우리의 마음을 녹여주고 위로하시고 열매 맺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1. 반복되는 기적의 의미

성경을 가끔 보다 보면 복음서에 똑같은 이야기가, 혹은 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되어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왜 이렇게 똑같은 이야기를 두 번 세 번이나 반복할까? 한 번만 해도 충분히 납득하고 이해할 텐데.'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시각을 좀 바꾸어 생각해 보면, 중요하기 때문에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이라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을 읽어가다 보면 '이 본문 어디에서 읽었는데'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마가복음 6장에 거의 비슷한 본문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6장은 흔히 말하는 오병이어 본문이고, 오늘 읽은 본문은 칠병이어 본문입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본문이 6장에 나오고, 보리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사천 명을 먹이신 사건이 오늘 8장의 이야기입니다. 숫자만 조금 다를 뿐 내용은 거의 대동소이합니다. 그런데 더 자세히,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 안에는 대단히 큰 차이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6장 3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때가 저물어 감으로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곳은 빈 들이요 날도 저물어 가니."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6장에는 제자들이 먼저 주님께 나와서 빈들입니다, 날이 저물어갑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 이 수많은 사람들이 배고파하고 있는데, 주님 우리가 이들을 책임질 수가 없으니까 동네에 가서 마을에 가서 알아서 사 먹고 오게 합시다. 제자들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나무라셨습니다. "너희들은 목자 의식과 목자 정신이 없는 사람들이구나. 보내지 마라.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있는 걸 찾아보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찾았더니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가 한 아이의 도시락에서 나왔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나누어 주게 하셨고, 수많은 사람들이 먹고 많은 것들이 남았던 이야기가 6장의 이야기입니다. 거기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사랑 없음을, 목자의 의식 없음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8장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먼저 제자들을 불러서 상황을 설명합니다. 8장 1절을 보십시오. "그 무렵에 또 큰 무리가 있어 먹을 것이 없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시죠. "우리가 지금 여기서 하나님 말씀을 나눈 지가 사흘이 되었는데 먹을 것이 없구나. 이들을 지금 보내려고 하니까 가다가 기진해서 쓰러져 큰일이 날까 두렵다." 그리고 이 사람들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마 이방인들도 주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먼 곳에서 온 것 같습니다.

1-1. 학습 효과 없는 제자들

예수님은 "이걸 어떻게 하면 좋으냐"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그것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기회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한번 책망받았으니 비슷한 상황, 똑같은 상황에 왔을 때는 너희 어떻게 하려느냐, 이전에 학습 효과가 있지 않느냐, 이제는 이전에 배운 대로 한번 생각하고 어떻게 할지 대답해 보아라, 이런 말씀이었습니다.

아마 주님은 이렇게 질문하시면서 이런 기대를 가지셨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 우리가 배운 줄 아십니까? 이전에 이미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먹을 것이 있는지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찾아오면 주님 하늘을 우러러 축사해 주십시오. 기도해 주시면 나누어 주겠습니다. 그러면 여기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먹고도 남을 것입니다. 우리가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아마 예수님은 이런 기대감을 가지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돌아온 제자들의 대답은 싸늘한 한마디였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대답하되 이 광야에서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이렇게 차가운 대답이 되돌아왔습니다. 제자들은 학습의 효과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요즘 초등학생, 중학생만 하더라도 각자 모두가 오답노트를 가지고 있습니다. 시험지를 풀다가, 문제지를 풀다가 틀린 것이 있으면 노트에다가 꼼꼼하게 옮깁니다. 다음 번에 똑같은 문제나 비슷한 유형이 나오면 틀리지 않으려고 그렇게 합니다. 그래야 시험 성적을 잘 받고 성적이 올라갈 것 아닙니까? 그렇게 열심히 준비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 제자들은 영적인 오답노트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학습 효과가 하나도 없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요? 이들은 문제의식이 없었고, 자신들을 반추하고 돌아보고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책망은 받았는데, 내가 왜 책망받았는지, 내가 책망받은 것을 어떻게 고쳐야 될지, 내 인생의 문제가 무엇이었는지 자기 자신을 살피고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을 때 이런 식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이래서는 영적 성장이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1-2. 다시 기회를 주시는 주님

성장하려는 자, 문제가 있으면, 한 번의 실수가 있고 실패할 수 있는데, 그 실수와 실패를 딛고 일어서고 자신의 잘못을 반추하고 회개해야 그래야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한 번의 실수나 한 번의 실패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넌 그거 잘못했으니까 넌 원래 그런 존재야"라고 책망하고 완전히 낙인찍지 않으십니다. 비슷한 상황을 또 한번 만들어 주십니다. 똑같은 상황을 만들어 주시고, '이제는 좀 나아져 있겠지, 이젠 회개하고 돌아섰겠지' 주님은 그런 기대를 가지고 우리 인생을 다 알아보시고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주님께서 또 한번 기회를 주실 때, 한 번 더 해 주실 때, 그때 돌이켜서 "하나님, 이제는 제가 두 번 다시 넘어지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딛고 일어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회개 후에 달라진 제자들

똑같은 제자들인데 회개하지 않고 돌아서지 않았을 때는 이런 일에 다시 한번 넘어지지만, 회개한 이후에 제자들은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당하시던 밤에 베드로를 비롯해서 모든 제자들이 다 주님을 떠나버렸습니다. 베드로는 심지어 한 어린 여종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합니다. 맹세하고 저주하고 그리고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닭이 세 번 웁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눈물로 회개했습니다. '내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때 돌이켰어야 하는데' 눈물로 회개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 십자가상에 남은 제자들은 단 하나도 없었지만 그들은 돌이켜 주님 앞에 회개했습니다. 나중에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비슷한 상황이 그들에게 닥칩니다. 초대교회가 핍박과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요한의 형제 야고보가 잡혀가서 순교당했습니다. 그가 죽었습니다. 옛날 같았으면, 예수님 시절 같았으면 제자들은 다 도망가버렸을 것입니다. 아무도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다 달아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도망가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담대하게 자리를 지킵니다. 베드로도 역시 체포당했습니다. 베드로가 잡혀도 사람들은 도망가지 않습니다. 함께 모여서 베드로의 석방을 위해서 간구하고 기도했습니다. 그 결과 성령께서 함께하셔서 베드로가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서 감옥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회개했기 때문에, 그들이 돌이켰기 때문에 똑같은 상황, 비슷한 상황에서 넘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계속해서 똑같은 미끼를 던집니다. 한 번 던져서 물지 않으면, 한번 쳐서 넘어지지 않으면 똑같은 문제로 두 번 세 번, 혹은 그 이상 끊임없이 공략합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청을 거절했습니다. 동침하자고 하는 청을 거절했습니다. 한 번의 유혹을 물리쳤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놓게 내지 않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날마다 유혹합니다. 날마다 동침하기를 청했습니다. 이 유혹이 한 달 혹은 두 달 혹은 얼마나 지속되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끝없이 끊임없이 유혹하는 사탄의 공격에 요셉은 견디고 또 견뎠습니다.

우리가 정신차리지 않으면, 깨어있지 않으면, 정말 깨어서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 있지 않으면 우리는 끝간데 없이 사탄의 유혹에 속절없이 흘러들어가고 넘어가버릴 것입니다.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릅니다. 잠언 26장 11절에는 우리에게 이렇게 경고합니다.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

우리는 개가 그 토사물을 다시 먹는 것을 보고 "이 미련한 짐승"이라고 욕하고 비난합니다. 하지만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죄를 짓고 또 다시 똑같은 죄에 넘어지고 또 쓰러지는 이 미련함이 우리에게도 똑같이 동일하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개를 비난하지만, 짐승을 비난하지만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이 미련한 인생을 어찌해야 좋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절하게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으면 똑같은 기회를 주셨는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시 기회를 주시고 일어설 능력과 기회를 판을 깔아주시는데 그 판을 발로 걷어차버리는 어리석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부디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를 두 번 다시 걷어차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불쌍히 여기는 마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제자들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시면서까지 그들에게 바랐던 것이 있습니다. 무엇을 원하셨을까요? 2절을 보십시오.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도다."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이 말씀에 답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 사흘 지난 사람들을 보니 불쌍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긍휼이라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사흘째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말씀만 듣고 있는 이 사람들을 보니 예수님 마음이 뜨거워지고 간절해졌습니다. 무엇이라도 이 그들에게 먹이고 싶은 마음이 주님 마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마음을 제자들도 함께 가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오병이어 사건 때도 목자의 마음을 가지게 하셨고, 칠병이어 사건 때도 긍휼히 여기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기를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광야 어디에서 먹을 것을 찾아서 저들을 주겠습니까?" 차가운 대답만 돌아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제자들은 긍휼히 여기는 데 실패했을까요? 그들이 나빠서? 천성이 약해서? 아니면 환경이 그래서? 원래 그들이 그렇게 생겨먹어서? 그렇지 않습니다. 제자들 몇 명을 살펴보면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다 괜찮은 사람들입니다. 아니면 여기 가난한 사람들과 달리 제자들의 환경이 부유해서 그렇지 않습니다. 제자들도 다 가난한 집안 출신 사람들입니다.

3-1. 관리자의 마음

그런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그것은 자기도 모르게 제자들이 관리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관리자 모드가 작동해버린 것입니다. 관리자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관리자는 조직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것을 최상의 가치로 생각합니다. 적은 것을 투자해서 많은 것을 얻어내는 것, 이것이 관리자의 최고의 가치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적절한 통제가 들어갑니다. 그 일을 위해서 통제하고 규정을 만들고 규칙을 만들고 관리합니다. 그 일을 위해서 사람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합니다. 관리자가 최고로 생각하는 것, 꿈에도 깨어도 생각하는 것은 효율성입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관리하는 것이 당연히 필요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관리가 선을 넘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그 선이 무엇입니까? 불쌍히 여기는 것,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것, 백성들에 대한 열정과 뜨거운 마음을 가지는 것. 이 선을 넘어버려서 관리하고자 하는 마음이 긍휼의 마음을 잠식해갈 때 우리는 죄의 길로 들어서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경계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누구에게 배우지 않았는데도 그들의 마음은 이미 관리자가 되어서 이들을 통제하고 관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릅니다. 관리자가 되면 사람들은 통제하려고 하고 관리하려고 하고, 그 사람들에 대한 긍휼의 마음보다는 또 다른 마음이 생기기 때문에 주님은 이런 것들을 절대로 가지지 말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3-2. 사람이 변하는 이유

우리는 흔히 "사람이 변했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저 사람 옛날에는 괜찮았는데 왜 이렇게 변했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떤 정치인이 초선의원일 때는 꽤 괜찮은 사람이었습니다. 지역구를 위해서 열심히 일도 하고 인품도 아주 좋아 보였습니다. 재선, 삼선 그 이상을 거듭하다가 당 대표가 되고, 그 당을 책임지는 자리에 오르고, 유력한 대권 주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사람이 변했다고 손가락질을 받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그 사람이 탁월한 관리자로 변신해버렸기 때문입니다. 당의 입장을 대변하는 사람, 진영의 논리를 대변하는 사람이 되어버리고, 나라와 백성을 향한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리고, 사람을 향한 긍휼의 마음은 없어져버렸기 때문입니다.

젊은 목회자, 부목사일 때는 훌륭한 목회자였습니다. 담임목사 초창기에도 그 사람은 믿을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서 사람들은 변했다고 말합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질까요? 교회를 경영하고 운영하는 CEO 자리에 본인이 올라버렸기 때문입니다. 통제하고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어떻게 이 교회를 효율적으로 관리할까? 들어오는 것 나가는 것을 어떻게 통제할까?' 통제하는 마음과 관리하는 마음이 목회자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옛날 한 영혼 한 영혼을 붙들고 기도하고 그 영혼을 위해서 애쓰고 무릎 꿇었던 그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리고, 이제는 거대한 조직을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운영할 수 있을까, 그 생각으로만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니 그 긍휼한 마음이 관리하는 마음에 잠식당해버린 것입니다.

"집사 때는 참 좋은 사람이었는데 장로가 되고 나서 사람이 변했다." 그런 이야기도 많이 하지 않습니까? 왜 그런 일이 벌어질까요? 관리자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장로가 되고 교회를 통제하고 관리하고, '어떻게 하면 이 거대한 조직을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사람의 생각으로 관리하고 통제하려고 할까?' 이런 마음이 사람들 마음속에 들어온 이 직분이 사람을 변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런 일은 다반사로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3-3. 관리자의 눈 vs 긍휼의 눈

오늘 이 상황을 관리자 모드로, 관리자의 눈으로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관리자의 눈으로 보면 책임질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나 제자들이나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서 신문에 광고 낸 적도 없고 TV에 방송한 적도 없습니다. 자기들이 알아서 나왔습니다. 알아서 나와서 사흘 동안 알아서 하나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면 나올 때 도시락을 싸갖고 오든지, 먹을 것을 가지고 나오든지, 그것은 그들의 몫인 것이지 제자들이나 예수님이 해결해야 될 일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광야이고 제자들은 재정도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책임질 일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 끝내고 돌아가라 하면, 가다가 길에서 쓰러져 죽어도 우리가 책임질 일이 없습니다. 법적인 책임은 우리가 져야 됩니까?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도 우리는 아무런 책임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이들은 여기서 손을 씻고 돌아가게 합시다. 우리는 책임질 일이 없습니다. 괜히 먹거리 하나 가지고 왔다가 사람들이 그 목걸이 때문에 아귀다툼하다가 다치고 사고 나면 책임져야 하니까 다 돌려보냅시다. 사람들은 관리자의 눈으로 이들을 바라봅니다.

차갑지 않습니까? 냉정하지 않습니까? 여기에 사랑이 어디 있고, 여기에 사람을 향한 긍휼의 마음과 긍휼의 눈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요? "어떻게 이들을 그냥 보내느냐? 사흘 동안이나 와서 함께 말씀 듣고 함께 웃고 함께 울고 그랬는데, 가다가 쓰러져 기진해서 죽기라도 하면 그 가슴 아픈 것은 누가 감당해야 되겠느냐?" 주님은 긍휼의 눈으로 이 영혼들을 바라보셨습니다. 그 긍휼의 눈으로 보면 그 다음 문이 열리는 법입니다.

4. 긍휼이 여는 문

예수님은 그 긍휼의 눈으로 보시고 그 다음 문을 여십니다. 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이르되 일곱이로소이다 하거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긍휼의 눈으로 보니까 일단 있는 것을 찾습니다. "떡이 몇 개나 있느냐? 다 뒤져봐라, 다 털어보고 다 찾아보라." 다 찾았는데 떡이 일곱 개밖에 없습니다. 이것 가지고 이 사람들을 어떻게 먹입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하나님의 권능을 기대하고 기도해야 됩니다. 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여 땅에 앉게 하시고 떡 일곱 개를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나누어 주게 하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나누어 주더라."

두 가지 키워드가 나옵니다. '축사하시고', 축복 기도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 우리에게는 이것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들을 먹여야 되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권능을 주십시오, 능력을 주십시오, 은혜를 주십시오" 간구하고 기도한 것입니다. 기도하니 또 다른 문이 열렸습니다. 이제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일곱 개밖에 없는데 나누고 나누고 또 나누어도 끊이지 않습니다. 남아있는 사람들이 다 먹었습니다.

물고기도 그래야 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또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는지라 이에 축복하시고 명하사 이것도 나누어 주게 하시니." 생선도 역시 축복 기도하시고 나누어 주게 하셨습니다.

긍휼의 마음을 가지면 그 다음 문이 열리는데, 찾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고, 찾고 나면 기도의 문이 열리고, 기도는 나눔의 문을 열고, 그 나눔의 문은 사천 명이나 먹고 일곱 광주리나 남는 위대한 기적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바로 이런 기적과 역사의 현장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차갑게 관리자의 마음으로 이제는 나는 책임질 필요가 없다, 문 닫고 이제는 눈 감고 생각하지 말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처럼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사람을 보고 상황을 보고 환경을 보고 이 나라와 민족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긍휼의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그 긍휼한 마음을 내가 가지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충분히 역사하십니다. 기적이 일어나고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긍휼의 마음을 가지면 그 다음에 문이 열립니다. 계속해서 문을 열고 나가면 우리가 마지막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결론에 도달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런 위대한 결과를 함께 보고 함께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한 번의 실패와 한 번의 실수로 인간을 판단하지 않으시고, 여러 번 기회를 주시고 다시 일어설 힘을 주시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가 깨닫지 못하고 뉘우치지 않고 회개하지 않아서 여러 번 잘못을 반복하는 일을 벌이지 않도록 주여, 우리에게 회개의 영을 부어주옵소서. 돌이키고 회개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하여 주시고, 주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긍휼임을 분명히 보고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긍휼의 마음으로 사람과 이웃과 이 나라와 민족과 열방을 바라보게 하여 주시고, 그 긍휼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이오니 그 다음, 또 그 다음 문을 열어가서 결국에는 주께서 원하시는 위대한 결과를 함께 맛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에게 긍휼이 없습니다. 주님 불쌍히 여겨 주시고 관리자의 마음을 거두게 하시고, 사명자의 마음으로 긍휼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