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강 /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8:22-26)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막 8:22-26)

가을이 되면 사람들은 책을 많이 읽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 가운데도 왕년에 문학소년, 문학소녀였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실 것입니다. 책을 읽다 보면 감동이 될 때도 있고, 시를 읽으면 눈물이 흐를 때도 있고, 소설을 읽으면 주인공이 곧 나인 것 같은 생각을 가질 때도 있습니다. 문학소년이나 문학소녀였다면 반드시 읽게 되는 책이 여러 권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입니다.

데미안이 출판되었을 때 독일의 상황은 굉장히 엄중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독일은 패전국의 멍에를 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패전국의 젊은이들에게 희망이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엄청난 전쟁 부채를 갚아야 했고, 절망과 불안과 낙심이 그들을 가득 채우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때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 출판되었고, 그 책을 읽은 독일의 젊은이들은 새로운 희망과 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책의 내용은 아주 단순합니다. 주인공 싱클레어는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부잣집 자녀로 자라면서 그에게는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먹는 것, 입는 것, 그리고 살아가는 미래도 그에게는 장밋빛이었습니다. 그런데 청소년기에 그는 또 다른 세상을 발견합니다. 그의 친구는 자신과 전혀 다른 인생을 산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전쟁으로 아버지가 양팔과 다리를 잃고, 어머니는 집을 나가서, 한 어린아이가 소년 가장이 되어 집안의 경제를 책임져야 하는 친구의 삶을 보았습니다. 어두컴컴한 지하실에서 하루 종일 일을 해야만 먹고 살 수 있는 사람들의 눈물어린 고통을 보았습니다. 자신의 지금까지의 생활과는 전혀 다른 또 다른 세상을 본 것입니다. "아, 이런 세상도 있구나." 그러면서 그는 갈등합니다. 왜 이런 세상이 존재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러던 중에 전학생 친구 데미안을 만납니다. 데미안은 그를 데리고 다니면서 세상의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게 해줍니다. 성경을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하게 도와주었고, 사람을 만나고 또 여러 가지 경험을 하면서 지금까지 갇혀 있었던 세계에서 또 다른 세계로 진입하게 일깨워 주었습니다. 그는 데미안과 함께 아주 행복한 새로운 세계를 많이 경험했습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지나 친구와 떠나게 됩니다. 몇 년이 지나서 전쟁터 야전 병원에서 데미안을 다시 만납니다. 반가운 마음에 밤새도록 길게 대화한 이후, 친구가 떠나고 거울 앞에 선 싱클레어는 자신의 모습 속에서 데미안을 발견하게 됩니다. 헤르만 헤세가 이 글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싱클레어가 성장해서 데미안처럼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도 역시 다른 사람을 새로운 세계로 이끌고 인도해 줄 수 있는 훌륭하게 성장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싶은 것입니다.

데미안에는 우리가 잘 아는, 귀에 익숙한 구절이 있습니다. 유명한 구절입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몸부림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한 세계를 부숴야 한다." 많이 들어보셨지요? 사실 이것은 성장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장하지 않으면 우리는 도태될 수밖에 없습니다. 껍질을 부수고 성장하고 알을 깨야 새는 그곳에서 나올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장하고 성숙해야 이 세상에서도 뒤쳐지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세상살이에도 성장하는 것은 무척 중요합니다. 바뀌지 않으면, 껍질을 깨고 계속해서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도태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성장이 더 요구되고 필요한 자리는 신앙의 자리입니다. 영적 성장은 우리의 육체적 성장, 세상에서의 성장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성장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그 자리에 그냥 머물러 있기를 원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은 우리가 끊임없이 자라고 성장하기를 가장 원하십니다.

오늘 말씀은 성장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나는 어디쯤 가고 있는지, 나는 얼마나 성장했는지, 혹시 내가 성장하지 않고 그냥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의 현재 모습을 함께 살피고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1. 제자들의 영적 상태

예수님과 제자들이 벳새다로 가셨습니다. 원래 주님은 오병이어 사건을 행하신 이후에 벳새다로 가기를 원하셨습니다. 벳새다는 베드로와 안드레와 빌립의 고향이기도 했고, "어부들의 집"이라는 뜻을 가진 어부들에게는 아주 편안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풍랑 때문에 가보니 벳새다가 아니라 게네사렛 지역이었습니다. 그래서 돌고 돌아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 그들은 벳새다에 도착합니다. 와보니 환자 한 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와서 "예수님, 고쳐 주십시오" 합니다. 그분은 맹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환자들을 고쳐 주신 것은 예수님의 방법으로 고쳐 주셨습니다. 아주 특이한 방법으로 고쳐 주십니다. 그런데 이 맹인에게는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손잡아 이끌어서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그리고 그의 눈에 침을 뱉습니다. 당황스럽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의 눈에 손을 대고 안수하셨습니다. 그리고 물으십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환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같이 보입니다." 어렴풋하게 보인다는 뜻입니다. 아직까지 완전히 낫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한 번 더 손을 대고 안수하셨습니다. 그리고 물으십니다. "이제 보이느냐?" "네, 보입니다."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한 가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의문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왜 두 번이나 안수하셨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 한 번 안수해서 낫지 않아서 다시 한 번 안수하신 것일까요? 우리가 아는 예수님은 결코 이런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말씀으로도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이시고, 이곳에서 말씀하시면 저곳에 있는 분의 병이 낫는 분이시고, 예수님의 옷자락만 잡아도 예수님에게서 능력이 나가서 환자가 낫는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이 왜 두 번이나 안수해야만 했을까요?

주님이 이렇게 두 번이나 안수하신 이유는 이 병자 때문이 아니라 제자들 때문입니다. 그것은 또 무슨 말일까요? 이 맹인과 제자들이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일까요? 그 당시 제자들은 영적으로 맹인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의 영적 상태가 무지했고, 어둠 속에 있었고, 어렴풋하게 보았기 때문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들의 믿음이 성장하기를 원한다"는 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무지에 잠들어 있는 제자들이 그 무지를 깨고 성장하고 성숙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병자를 이렇게 고쳐 주신 것입니다.

1-1. 희미한 눈의 상태

그렇다면 그 당시 제자들의 영적 상태가 어디쯤 있었을까요? 오늘 말씀 23절과 2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예수님은 이 맹인을 붙들고 마을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안수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는 아직까지 희미한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제자들의 모습이 이 사람과 꼭 같은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제자들을 만나지 않으셨습니까? 그들을 불러서 예수님의 제자 삼으셨습니다. 그들의 마을에 있게 하지 않으시고 마을 밖으로 제자들을 이끌어 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동행하십니다. 때로는 그들에게 능력도 보여주시고, 기적도 보여주시고, 하나님 나라의 비밀한 말씀도 알려 주시고, 그들의 손을 잡아 인도도 하시고, 그들에게 능력도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지금 제자들의 눈은 환하게 밝혀 보는 상태가 아니라 사람인지 나무인지 분별하지 못할 정도로 분별력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지금 이 맹인의 상태가 제자들과 똑같은 상태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제자들은 오병이어와 칠병이어를 이미 경험했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로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이 먹었습니다. 보리떡 일곱 개로도 수많은 사람들이 먹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여전히 먹거리를 걱정합니다. 예수님께서 누룩 이야기를 하시니까 떡이 없는 것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기만 하면 먹고 살 걱정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먹고 살 걱정을 하고 있는 미련한 영적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주님은 이것을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너희들이 지금 나를 만났지만, 나와 함께 걸어가고 동행하고 있으나, 너희들의 영적 상태는 아직까지 희미한 상태에 머물러 있구나."

1-2. 능력은 있으나

그런데 더 위험한 상태가 있습니다. 제자들이 능력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둘씩 둘씩 짝지어서 파송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가서 전도를 합니다. 말씀을 전합니다. 병든 자가 났습니다. 귀신이 떠나갔습니다.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이때가 가장 위험한 때입니다. 보는 것은 희미해서 잘 분별되지 않는데, 그런데 능력은 나타납니다. 아직까지 내가 희미한 상태로 있는데 나에게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때가 정말 위험한 때입니다.

스스로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남을 끌고 다니면서 그 사람도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있습니다. 공동체를 흔들어서 공동체 전체가 어려움을 겪도록 할 수도 있습니다. 너무나 위험할 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들의 영적 상태가 이런 상태라는 것을 분명히 깨닫게 하시고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능력을 받았다고 해서, 이제 좀 보인다고 해서, 이제 좀 신앙생활하는 것이 어떤지 안다고 해서 거기서 성장을 멈춰버린다면, "이제 저는 다 압니다" 하고 그냥 끝내 버린다면, 그때부터 우리는 영적 암흑기로 다시 돌아갈 것입니다.

제가 부목사 시절에 새가족을 맡아서 새가족 양육을 오래 했습니다. 한번 생각나는 새가족이 계십니다. 그분에게 제가 성경공부를 권했습니다. "우리 교회 성경공부 반이 이런 이런 반이 있으니 성경공부를 해보시면 어떻겠습니까?" 그랬더니 그분이 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저 다 알아요. 성경 다 압니다." 저는 더 이상 권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얼굴에 자신감이 넘쳐 흘렀기 때문입니다. 궁금했습니다. 물어보고 싶었는데 묻지 못했습니다. 도대체 "다 안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 성경을 한두 번 읽었다는 말일까? 아니면 성경에 나오는 사람 이름, 사건의 내용, 지명까지 다 제대로 안다는 말일까? 그렇지 않으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말씀과 행함이 완전하게 일치해서 더 이상 이 땅에서는 손댈 것이 하나도 없다는 말일까? 어떤 말인지 너무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물어볼 수가 없었습니다.

1-3. 끊임없이 성장하라

우리는 하나님 나라 가는 그날까지 끊임없이 성장하고 자라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구원에는 칭의 차원의 구원이 있고, 성화의 차원이 있고, 영화의 차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피로 값 주고 사신 칭의 차원의 구원에 멈춰버린다면 우리는 그다음 한 발짝도 성장할 수 없습니다.

출애굽 사건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집트에 열 가지 재앙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시무시한 재앙을 보았습니다. 마지막 재앙이 장자의 죽음입니다. 문설주와 좌우 인방에 피를 바르고 너희들은 그 안에 들어가 있으라 하셨습니다. 죽음의 사자가 지나갑니다. 피만 보고 지나갑니다. 그 안에 있는 사람이 어떤 죄인인지, 전과 몇 범인지 그것은 보지 않습니다. 피만 보고 지나갔습니다. 그들이 다 살아났습니다. 피를 바르지 않은 사람은 다 죽었지만, 이것이 바로 칭의 차원의 구원입니다. 내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그저 피로 값 주고 사신 너희들을 의롭다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완성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이것으로 구원이 완성되었다면 출애굽 사건은 더 이상 기록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칭의 차원의 구원이 있고 난 이후에는 성화가 필요합니다. 겉사람부터 속사람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생각하는 것부터 행동하는 것까지 다 하나님 닮은 사람으로 성화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 내어 광야 40년 여정을 걷게 하셨습니다. 하늘에서 만나를 먹고, 메추라기를 먹고, 목이 마를 때 기도해서 반석에서 나는 물을 마셔야 됩니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고단한 생활을 40년이나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온몸에 죄의 때가 벗겨집니다. 자신의 마음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욕심이 다 사라집니다. 그렇게 성화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요단강 건너가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 완전한 차원의 영화의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칭의 차원의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거기서 "나 다 압니다" 하고 멈춰 버리면, 우리는 거기서 한 걸음도, 한 발짝도 성장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디쯤 오고 계십니까? 오늘 여러분들은 어디에 서 계십니까? 내가 다 안다고 생각하고 혹시 성장을 멈춰 버리지는 않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부디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주님께서 가장 바라시는 것이 끝까지 끊임없이 자라고 성장하기를 바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2장 1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구원은 완성된 것이 아니라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칭의 차원의 구원을 받았다면 성화를 통해 훈련받고 성장하고 이루어 가셔서, 나중에 훗날 천국에 가서 영화롭게 변모되는 것, 그때야 구원의 완성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맹인과 제자들의 상태를 보시고 "너희들, 내가 완전히 알 때까지 끊임없이 안수하고 성장하도록 돕겠다" 말씀하십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예수님은 불완전한 맹인에게 한 번 더 안수하셨습니다. 이제 그가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맹인에게 두 번 안수하셨지만, 제자들에게는 "내가 너희에게 하루에도 열두 번이라도 더 안수하마. 너희들이 성장하기만 한다면 이것을 못하겠느냐? 나는 너희들의 성장을 가장 바라는 사람이다" 하고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찌 제자들뿐이겠습니까?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주님께서 성장하기를 바라십니다. 주께서 우리의 성장을 위해서 무엇인들 못하시겠습니까? 어떤 것이든 주님은 하실 준비가 되어 있는 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자신입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아무리 열정적으로 수업을 하고 가르친다 하더라도 학생의 자세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수업 시간에 졸기만 하고 딴생각하고 딴청 피운다면 성장할 수 없습니다. 선생님이 열심히 가르치고 학생은 열심히 따라가고, 그래야 성장하고 성숙하지 않겠습니까?

2. 성장을 위한 자세

예수님이 이런 간절한 마음을 가졌는데, 그러면 우리는 어떤 자세로 이 성장에 화답해야 할까요? 성경은 두 가지 정도의 모델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2-1. 도마처럼 도전하라

첫 번째 모델은 도마처럼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부활하신 후 예수님이 제자들을 찾아오신 일이 있습니다. 제자들을 찾아오셨을 때 그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평안을 선포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고 제자들을 만나 주시고 그들을 위로하셨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때 도마가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무슨 일로 없었는지 알지 못하지만 그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나중에 일을 다 보고 돌아와 보니 제자들이 모두 예수님을 만났다고 말합니다. 도마가 서운했습니다. 화도 났습니다. "왜 내가 없을 때 오시나." 불평이 넘쳐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한 마디 합니다. 요한복음 20장 25절 말씀입니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내가 손의 못 자국을 보기 전에는, 주님의 손을 만져 보기 전에는, 주님의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기 전에는 믿지 않겠다. 어떤 느낌으로 들리십니까? 불신을 전제한, 불신하는 도마처럼 느껴지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도마의 이 말은 "나 너무 믿고 싶습니다. 나 부활하신 주님 정말 만나고 싶습니다. 그런데 왜 제가 없을 때 오셨나요? 저 주님 진짜로 만나고 싶습니다. 저 주님 너무나 만나고 싶으니 오십시오. 오셔서 이 손에 못 자국 보여주시고, 두 손 내가 잡게 해 주시고, 주님 옆구리에 내 손 한번 대게 해 주십시오. 너무 믿고 싶어서, 너무 주님 만나고 싶어서..." 간절하게 주님을 부르는 도마의 강렬한 음성입니다.

여기서 도마의 훌륭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도마는 분위기를 따지지 않습니다. 도마는 체면을 차리지 않습니다. 지금 직접 내가 주님을 다 아는 척, 내가 주님을 보지 않고도 믿는 것이 더 큰 믿음인 척 그렇게 젠체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흔히 체면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분위기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내가 신앙생활 수십 년에 권사가 되고 안수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직분자가 되었는데, 그런데 내가 주님 모른다고 말하면 얼마나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일인가. 내가 성경의 이것도 모른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래서 뒷짐 지고 아는 척합니다. 그러면서 주님 만나고 싶다고 목소리는 여기까지 올라오는데 차마 말하지 못합니다. 체면의 함정에 빠져 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성장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껍질을 깨뜨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도마처럼 "나 주님 만나고 싶습니다. 나 주님 봐야 믿겠습니다" 간절하게 외치시기를 바랍니다. 도전하는 믿음, 주님 만나고 싶다고 있는 그대로 말하는 믿음, 이것이 더 확실하고 분명한 믿음입니다. 뒷짐 지고 젠체하고 체면 차리고 있어봐야 손해입니다. 믿음의 성장은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도마에게 찾아오십니다. 요한복음 20장 27절을 보십시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주님의 따뜻한 음성이 들리시지 않습니까? "손을 내밀어라. 내 손을 만져 보라. 네 손을 뻗어서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마라. 믿는 자가 되라. 너의 믿음을 위해서라면 나는 열두 번도 더 나타나겠다. 네 믿음의 성장을 위해서는 내 손 얼마든지 만져도 좋다." 우리 주님의 따뜻한 사랑의 선포입니다.

이런 주님께 우리가 주저할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모르는 것은 모른다 하시고, 주님 만나 달라고 간구하십시오. 주님 제게 알려 달라고 소리치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를 위로하시고 영적 성장을 도우실 것입니다.

2-2. 마리아처럼 경청하라

두 번째 모델입니다. 마리아와 마르다 모델입니다.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자매가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입니다. 예수님은 가끔 그들의 집에 가셔서 식사도 하시고 말씀도 나누셨습니다. 누가복음 10장 39절과 40절 말씀은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에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방문하신 이야기입니다.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마르다는 음식을 준비해서 마음이 몹시 분주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예수님 공생애 초기에 있었던 일입니다.

3년이 거의 지나갑니다. 예수님께서 이 집에 마지막 방문을 하셨습니다. 이 집 방문이 끝나고 나면 그다음 주님은 십자가 지러 골고다 언덕으로 가셔야 되는 바로 그 전이었습니다. 이때 이들의 믿음이 어떻게 변화되었을까요? 요한복음 12장 2절과 3절입니다. "마르다는 일을 하고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마르다는 여전히 일하고 있습니다. 성장하지 못했습니다. 3년 전 그날도 일하느라고 마음이 분주했던 이,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까지도 그녀는 여전히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자신이 시집가려고 모아 놓았던 지참금, 순전한 나드 한 근 향유 옥합을 탁 깨뜨려서 주의 발에 붓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리고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우리 집에 왔다가 떠나시면 다시는 육체로서는 우리 집에 다시 올 수 없음을 깨닫고, 예수님 마지막 가시는 그 길에,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기 위해서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온전히 다 쏟아부어 드리고 있는 이 여인의 아름다운 믿음의 성장을 봅니다.

어떻게 알았을까요? 예수께서 이제 마지막 가시는 길이라는 것을 마리아는 도대체 어떻게 알았을까요? 예수님 발에 앉아서 말씀을 열심히 들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교제하고 주님의 말씀을 들었으면 주님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주님의 스케줄을 알게 되고, 주님의 계획을 알게 되고, 주님의 뜻을 발견할 수밖에 없습니다. 열심히 듣다 보면 믿음이 성장합니다. 들으면서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주님께 드리려고 하는 마음의 결단까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성장은 그냥 일어나지 않습니다. 열심히 들어야 됩니다. 마리아처럼. 성장은 그냥 일어나지 않습니다. 체면 불구하고, 염치 불구하고 도마처럼 외쳐야 됩니다. 만나고 싶다고, 주님 만지고 싶다고. 그러면 우리는 성장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이 성장이라면, 우리는 도마처럼, 우리는 마리아처럼 이렇게 살아가셔야 할 줄로 믿습니다. 부디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장성한 분량에까지 성장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뒤로 돌아가지 말라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맹인에게 그다음 지침을 주셨습니다. 2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이르시되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 왜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다시는 믿음의 미끄럼을 타지 말라, 뒤로 돌아가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키실 때 홍해 바다를 건너게 하셨습니다. 왜 바다를 건너게 하셨을까요? 퇴로를 차단하기 위함입니다. 광야를 향하여 갈 때는 바닷길이 열렸지만, 다시 이집트로 돌아오려 할 때는 바닷길이 더 이상 열리지 않습니다. 너희는 이 바다를 건너갔으니 이제는 믿음의 성장을 위해서 온전히 광야 길을 걸어가라, 다시는 뒤돌아서지 마라, 다시는 되돌아오지 마라. 이것이 우리 하나님의 간곡하신 마음이었습니다.

믿음의 성장, 하루하루 성장하시면 퇴보하시면 안 됩니다. 뒷걸음질 치시면 안 됩니다. 끊임없이 도마처럼 도전하고 또 도전하고, 마리아처럼 주의 발 앞에서 말씀을 듣고 또 말씀을 깨쳐서 성장하는 믿음의 백성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귀한 말씀,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의 닫혀 있는 문을 열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도 맹인처럼 모든 것을 환히 보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혹시 지금 제자들처럼 아직까지 사람인지 나무인지 분별하지 못하고, 아직까지 영적 무지와 어둠의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 자신을 돌아봅니다. 주님, 우리도 이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도마처럼 모르는 것은 모른다 하고, 주님 만나고 싶다 하고, 주의 손 잡아보고 싶다고 외치기를 원합니다. 체면 차리지 않도록 도우시고, 주변의 분위기 살피지 않도록 도우시고, 오직 내가 성장하기 위해서 내 성장을 가장 바라시는 주님 앞에 목소리 높여 나아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주여, 성장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마리아처럼 주님 발 앞에 앉아서 주의 말씀 듣고 싶습니다. 주의 말씀 듣고, 주의 말씀이 우리의 심령을 깨뜨려서 그 말씀 이끄시는 대로 우리도 실천하며 우리의 가장 소중한 것까지 주께 드릴 수 있는 믿음의 장성한 분량이 되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