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강 /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8:27-38)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막 8:27-38)

1. 종교개혁의 정신

1-1. 말씀으로의 회귀

오늘은 종교개혁 기념주일입니다.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문에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하며 시작된 종교개혁이 오백여 년의 세월을 이어 내려왔습니다. 종교개혁은 본질로 돌아가자, 곧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귀한 외침이었습니다. 그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전횡은 극에 달했고, 아무리 말씀으로 살펴보아도 교회의 현실은 성경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연구하던 개혁가들은 그 말씀을 붙들고 투쟁할 수밖에 없었고, 그 투쟁은 종교개혁의 불길로 타올랐습니다. 그 이후 오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그 말씀을 실천하려는 많은 분들의 역사가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1-2. 본회퍼의 생애

그 대표적인 개혁가 중 한 분이 본회퍼 목사입니다. 그는 1906년 독일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정신과 의사였고 할아버지는 목사였습니다.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자란 그는 신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베를린 신학부에 입학합니다. 그는 신학에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했습니다. 21세에 '성도의 교제'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23세에는 '행위와 존재'라는 논문으로 교수 자격을 취득합니다. 그의 모든 업적과 삶과 글에서 탁월한 신학적 통찰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가 27세 되던 1933년, 히틀러가 나치를 통해 독일을 장악합니다. 당시 독일은 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으로서 전쟁배상금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히틀러가 급부상하면서 독일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는 정치적으로만 장악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리스도라 자처하며 모든 독일인의 우상처럼 받들어졌습니다.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1939년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합니다. 그 당시 본회퍼 목사는 미국 유니온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본국에서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교수들이 만류했습니다. 돌아가지 말라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외국에 있을 때 전쟁이 나면 귀국을 꺼리기 마련입니다. 가봐야 별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자신에게 유익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달랐습니다.

1-3. 신앙의 결단

본회퍼는 라인홀트 니버 교수에게 편지 한 장을 남기고 독일 본국으로 돌아갑니다.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저는 독일의 그리스도인들과 더불어 조국의 어려운 시기를 함께 살아야 합니다. 동포와 함께 시대의 시련을 나누지 않는다면, 전쟁이 끝난 후에 독일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재건하는 일에 참여할 권리가 없습니다."

그는 이 글 하나를 남기고 본국으로 돌아옵니다.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목회자, 신학자들과 함께 고백교회 운동을 주도합니다. 히틀러에 반기를 든 교회 목회자들의 모임이었습니다. 1943년에 히틀러 암살 가담 혐의로 체포당합니다. 감옥에서 2년여를 지내면서 주옥같은 글들을 많이 남깁니다. '옥중서신', '나를 따르라' 등 수많은 책과 글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안겨주었습니다.

1945년 4월, 그는 결국 교수형을 당하며 순교의 자리에 섭니다. 그가 순교하는 현장을 직접 목격한, 그 수용소에서 50여 년간 근무한 의사의 고백이 매우 놀랍습니다. 그 의사는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나는 본회퍼 목사가 죄수복을 벗기 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자신의 하나님께 진심으로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이 신비한 힘을 지닌 사람이 기도하는 방식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형장에서 다시 짤막한 기도를 드린 다음, 용감하고 침착하게 계단을 밟고 교수대로 올라갔다. 그는 몇 초 뒤에 죽었다. 나는 지난 50여 년 동안 의사로 일하면서 그토록 경건하게 죽음을 맞이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본회퍼 목사가 유별나서 이런 죽음을 당해야 했을까요? 그는 원래 타고나기를 강골이라서 저항하다가 생명을 마감해야 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이토록 저항하며 살고 하나님을 붙들고 평생을 살아간 이유는 그가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신학자였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전하고 글을 썼는데 어찌 자신이 전한 말과 다르게 살 수 있겠습니까? 진리로 붙들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다른 인생을 살 수 있겠습니까? 그는 자신의 말과 행위를 일치시키며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종교개혁가들도 그러했고, 본회퍼 목사도 역시 그러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말과 행위가 하나 되고 일치되는 삶입니다. 바로 그것이 종교개혁이고, 오늘 우리에게도 가장 필요한 신앙인의 덕목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삶과 행위가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하나님께서 우리의 말과 행위, 배운 것과 삶이 일치되기를 바라시고 원하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빌립보 가이사랴에서의 질문

2-1. 우상의 도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을 다니셨을 때의 일입니다. 빌립보 가이사랴는 매우 특별한 곳이었습니다. 갈릴리 북쪽 호수를 끼고 있는 아름다운 도시였습니다. 이곳에는 물이 풍부했습니다. 북쪽에 있는 헤르몬 산의 만년설이 녹아 내려오는 물과 요단강 상류가 만났습니다. 그래서 풍부한 수원으로 가나안 계곡을 적셨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의 수돗물 원류 역할을 하는 도시가 빌립보 가이사랴입니다.

당시 주변 모든 지역이 사막지대인데 물이 풍성하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신성함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구약시대부터 그 신비로운 신성함 때문에 그곳에는 우상이 들끓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의 신전이 있었습니다. 로마시대에는 판(Pan)을 섬기는 판 신전도 그곳에 있었습니다. 이곳 이름이 빌립보 가이사랴가 된 이유는 헤롯 빌립이 당시 로마 황제 디베료에게 헌상한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헤롯 빌립은 그 도시 곳곳에 황제의 동상을 세웠습니다. 황제의 흉상도 세웠습니다. 황제를 숭배하기 위한 신전을 도시 곳곳에 건립했습니다. 그래서 이리 보아도 황제의 동상이고, 저리 보아도 황제의 흉상이며, 곳곳에 신전이 가득했습니다.

2-2. 예수님의 질문

그 길을 걸어가시다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질문하십니다. 두 가지를 물어보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중에 굉장히 중요한 질문은 "오늘 여기 이 자리에서 나는 너희에게 누구냐?"라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양옆을 돌아보아도, 앞뒤를 돌아보아도 우상밖에 없습니다. 신전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물어보십니다. 오늘 이 우상이 가득 찬 도시, 이 자리에서 나는 너희에게 누구라는 말이냐, 이 질문을 던지고 계십니다.

이 예수님의 질문은 그 당시 제자들에게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굉장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예배당 밖을 나가 보십시오. 오늘 이 시대 하나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돈이 하나님 자리에 앉아 있지 않습니까? 세상은 물질을 맹신하며 따라갑니다. 돈이 된다고 하면 자신의 영혼까지 팔아치울 기세입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사람들은 어떤 수고도, 어떤 모욕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가족도, 자신이 지난날 살아왔던 모든 삶의 아름다운 모습도 물질 앞에서 다 무용지물입니다. 다 팔아치울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물질이 우상의 자리에, 하나님 자리에 앉아 있는 이 시대에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질문하십니다. "오늘 물질이 우상이 되는 이 시대에 나는 너희에게 누구냐?" 이 질문에 우리는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사람들은 이런 속마음을 들킬 수도 있습니다. "주님, 저는 사실 예수님을 디딤돌 삼아서 돈 벌기를 원했습니다. 주님을 밟고 올라서서 출세하기를 원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 역시 물질을 우상으로 섬기고 살아가는 사람일 것입니다.

3. 베드로의 고백

3-1. 그리스도 선언

모든 사람들이 다 입을 다물고 있을 그때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29절입니다.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처럼 "주님, 당신은 메시아(Μεσσίας), 기름 부음 받은 자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구약에서 기름을 부어 세우는 직책은 제사장, 선지자, 왕 이 세 직분입니다. 그중에 가장 강력한 고백은 "예수님, 당신은 나의 왕이십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주변을 둘러보아도 디베료 황제의 우상이 곳곳에 산재해 있지만, 그러나 나에게 왕이신 분은 예수님 당신밖에 없습니다. 이 고백을 베드로가 드린 것입니다. 대단히 아름답고 대단히 위대한 고백입니다.

3-2. 고백의 진정성

이렇게 고백으로만 그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고백의 진심을 물어보십니다. 정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라"고, 예수님이 자신에게 왕이신 것을 고백하고 있는지, 그 본심을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묻고 계십니다. 31절입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림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고난받고, 버림받고, 죽고,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하신 고난 예고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진정한 왕, 참된 왕은 백성들을 위해서 죽는 왕이다"라는 것을 말씀하시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참된 왕은 죽으면 안 됩니다"라고 항변합니다. 32절을 보십시오.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항변했다는 이 말은 강하게 책망했다는 뜻입니다. 가로막았다는 뜻입니다. "안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꾸짖었다는 것입니다. 아주 목소리를 높였다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이해했던 예수님은 어떤 분이었습니까? 베드로는 정치적 메시아까지만 이해했던 것입니다.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주실 정치적 메시아. 그런 주님께서 돌아가시면 어떻게 된다는 뜻입니까?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면 우리를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주실 분은 한 분도 없습니다. "예수님, 당신은 죽은 자를 살리시고 오병이어와 칠병이어를 행하시는 주님이시니 우리를 이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해 주십시오." 그런데 예수님은 정치적 메시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시는 분이십니다.

3-3. 영혼 구원의 필연성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정치적으로 해방시켜 주셨다고 합시다. 그다음은 어떻게 됩니까? 그들이 정치적 자유를 누리며 행복하게 삽니다. 그러다가 만약 그들의 생명이 끝나고 죽어버리면 그 영혼은 누가 책임져 줍니까? 그들이 죄 가운데 있다가 죽어버리면, 그 죽고 난 후에 영혼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심판받아야 할 것인데, 그때 그 영혼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영원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너를 위하여 고난받고 죽어야, 그런 나를 믿어야 너의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더 질문할 수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어주셔야만 했는가, 이 질문입니다.

4. 사랑과 십자가

4-1. 사랑의 본질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 전체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 전체,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를 보면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 한마디가 바로 '사랑'입니다. 창세기에서부터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사랑이 드러납니다. 사람을 지으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라고 말씀하시고, 하나님이 하셨던 모든 행위와 말씀, 예수님의 모든 행위와 말씀은 다 사랑으로 수렴됩니다.

사랑하셨기 때문에 책임지시는 것입니다. 사랑은 책임과 행위를 전제하는 말입니다. "사랑한다" 해놓고 책임지지 않으면 그 사랑은 공중에 흩어지는 공허한 울림밖에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자녀를 사랑하지 않습니까? 그들을 사랑하면 어떻게 하십니까? 부모가 가슴이 찢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 사랑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누군가에게 "사랑해"라고 감미로운 언어로 말하고 그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그 사랑은 가짜입니다.

4-2. 하나님의 일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막아서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책망하십니다. 3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하나님의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일은 "사랑하신다"는 말에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사랑하셨기 때문에 이 말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십자가 지고 고난받고 죽으시겠다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구체적으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위해서 이 땅에 와서 십자가 지고 죽어 가거니, 이제는 너희도 나를 믿고 따라온다고 하면 십자가 지고 함께 그 길을 가야 하지 않겠느냐?" 34절입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책임을 져야 하는데, 그 책임을 십자가라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옆에 있는 분, 우리 형제자매들에게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데, 그 말에 대한 책임을 어떻게 지고 계십니까? 그 말의 무게가 내 어깨에 멘 십자가로서 온전히 나로 하여금 책임지도록 이끌고 가고 있는지, 아니면 나는 책임지지 않는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공허한 사람인지, 오늘 우리 자신에게 직접 질문해 보셔야 합니다.

4-3. 교회의 책임

교회가 "사랑한다"는 말을 얼마나 많이 하고 있습니까? 전도할 때마다 "사랑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전도지에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기록해서 나누어 드립니다. 그런데 교회는 과연 십자가를 지고 있는가? 교회는 "사랑한다"는 말에 책임을 지고 있는가? 이 질문을 교회의 본질에 가까운 말로 우리 스스로에게 자문해 보셔야 합니다.

손해보는 일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세상에서 장사하시는 분들은 절대로 손해보지 않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역설로 가고, 거꾸로 가야 하고, 손해보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조금 손해보고, 그다음에는 더 많이 손해 보고, 그다음에는 완전히 나누어 주고, 교회 오시는 분들에게 식사 한 끼 제대로 대접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돈 받지 않고 다 나누어 주는 교회, 모든 것 "사랑한다"고 했으면 그 사랑에 대한 말의 책임을 우리가 십자가로 지는 교회, 그 교회가 하나님 기뻐하시는 거룩한 교회이지 않겠습니까?

이 연습을 끊임없이 하셔야 합니다. 손해보는 연습을 하지 않으면, 자꾸 나누어 주면서 손해보고 더 기뻐하는 연습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십자가를 감히 질 수 없습니다. 연습하고 또 연습하고, 그러면서 작은 기쁨이 큰 기쁨이 되어가는 이 훈련을 통해서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4-4. 사탄의 방해

그런데 십자가를 지지 못하게 막는 자가 있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너 바보냐? 왜 십자가 지려고 하느냐? 아무도 십자가 지지 않는데, 아무도 손해 보지 않는데, 조금이라도 손해 보려 하지 않는데, 왜 너만 십자가 지고 손해 보려고 하느냐? 그러다가 너 바보 된다고."

사탄은 끊임없이 말만 아름답게 하게 하고, 행동은 하지 않게끔 우리의 삶을 십자가로부터 분리시킵니다. 그것이 사람의 일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 길을 따라갑니다. 그래서 수많은 성도들이 교회 와서 예배드려도 세상이 바뀌지 않는 이유는, 십자가 지고 손해 보는 사람들이 극히 드물기 때문입니다. 말하고 행동하고, 말과 십자가가 함께 간다면 세상은 이렇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 공동체는 이렇게 병들고 썩지 않을 것입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십자가를 방해합니다. 예수님의 앞길을 가로막았던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단호한 어조로, 그토록 사랑하셨던 제자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말씀하셨던 이유는 십자가를 예수님에게서 분리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부디 우리가 주님 앞에 사탄 취급받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랑한다"고 말했으면 책임지고 십자가의 삶을 지고 걸어가시는 믿음의 백성 되셔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제대로 인정받는 그리스도의 종들, 그리스도의 백성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5. 말과 행위의 일치

종교개혁가들, 본회퍼 목사, 그들은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였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 강단에서 말씀 전하는 목사가 말만 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어떻게 존경받겠습니까? 교회 항존직들, 장로님들, 집사님들이 가르치기만 하고, 지시만 하고, 일하지 않고, 고생하지 않으면 누가 그분들을 마음속 깊이 따르고 존중하겠습니까? 가정의 부모가 자녀에게 본을 보이지 않으면 어떻게 따름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종교개혁가들, 본회퍼 목사, 수많은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목회자였고 행동하는 실천가들이었습니다. 말과 행동의 분리가 일어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말과 행동의 분리가 일어나면 인격이 분리되는 것입니다. 인격의 분리는 정신의 장애로 가는 첫걸음입니다. 한 인격 안에서 말과 행동의 일치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본회퍼 목사가 1945년 4월에 순교하기 전 해인 1944년, 차디찬 감방에서 시 한 편을 지었습니다. '선한 능력으로'라는 시였습니다. 그 시의 가사가 눈물겹습니다. 그 시에 곡을 붙여 찬양이 되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찬양의 가사를 깊이 음미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종교개혁 기념주일입니다. 우리의 말과 행위가 하나로 일치되게 하여 주옵소서. "사랑하신다"는 그 한마디 말씀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 이 땅에 내려오시고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따라가기 원합니다. 우리도 한없이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한 사람으로서 사랑에 책임을 지게 하여 주시고, 교회도 그 책임을 감당하는 믿음의 공동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시대의 아픔과 함께하게 하시고, 주변 이웃들과 함께 사랑을 나누게 하시고, 손해보며 기뻐하며 나누며 행복한 역설의 진리가 우리 교회 공동체의 진리 되게 하여 주옵소서. 종교개혁은 말과 행위의 일치였음을 깨닫게 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앞으로 우리의 삶이 행위와 말의 분리가 일어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며, 말과 행위를 하나로 담아내는 믿음의 백성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