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를 부르시는 예수님
마가복음 1:16-20
1. 현장에서 부르시다
1-1. 세종의 현장 리더십
세종대왕은 우리 민족의 가장 위대한 성군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한글 창제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위한 수많은 업적을 남긴 위대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런 업적을 남기기 위해서 얼마나 성실하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까요? 우리가 가히 상상해 보면 엄청난 시간과 공을 기울였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분은 늘 새벽 5시에 기상했습니다. 그리고 하루에 꼭 세 번의 만남을 가졌는데, 아주 중요한 만남들이었습니다. 오전 9시에서 11시 사이에는 윤대라고 이름하는 만남을 가집니다. 즉 돌아가며 독대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왕이 독대를 한다고 하면 정승이나 판서 정도를 만날 줄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왕은 그 부서의 실무 책임자들을 만났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4급 서기관, 5급 사무관 정도의 실무 책임자들을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듣습니다.
왕이 물어봅니다.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내가 임금으로서 이 일을 어떻게 도와주어야 합니까? 혹시 일하다가 어려운 일은 없습니까? 당신이 일하고 있는 부서에서 비리나 척결해야 될 일들은 없습니까? 이렇게 실무자들을 불러놓고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독대하고 묻기 시작하면 그 부서를 이끌어가는 정승이나 판서 입장에서는 굉장한 부담을 가질 것입니다. 비리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그 부서는 말하지 않아도 조직의 기강이 함께 서 갈 것입니다.
오후가 되어서 오후 1시에서 3시에는 주로 경연을 가졌습니다. 조선의 모든 왕들이 경연을 가졌지만 이 세종의 경연은 여느 왕의 그것과는 달랐습니다. 국가가 추진하고 있는 거대한 프로젝트나 아주 중요한 일들의 전문가 집단들을 다 모았습니다. 대신들이나 국가적으로 다 퍼져 있는 사람들 중에 그 일을 잘할 수 있는 사람들을 다 모아서 함께 의견을 듣고 지혜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일을 함께 열어놓고 대화합니다. 그러면 당연히 그 일이 잘 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물론 이 일을 진행함에 있어서 세종 자신도 전문적인 식견을 준비하고 나와야 되는 건 당연한 사실입니다.
저녁이 됩니다. 밤 10시부터 11시 사이에는 구언을 듣습니다. 구언이라고 하는 것은 국가의 재난이나 위기가 닥치면 백성들을 불러서 백성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한 백성이 나와서 자기 동네 농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임금님, 우리 동네 한 농부가 있는데 그분은 참 이상하게 농사를 잘 짓습니다. 가뭄이 드는 해가 있어도 그분의 논에는 경작이 아주 소출이 넘쳐나고 이상하리만큼 농사가 잘 됩니다. 그분을 한번 만나보십시오.
그분을 불러오라 하여 데려왔습니다. 임금이 묻습니다. 너희는 어떻게 그렇게 농사를 잘 짓느냐고 물어보니 그 농부가 이렇게 말합니다. 외람되지만 관아에서 나리들이 가르쳐주는 대로 저는 농사를 짓지 않습니다. 그보다 조금 더 일찍 파종하고 조금 더 일찍 물을 대고 그렇게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세종이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조선에 나와 있는 농사를 가르치는 책들은 모두가 중국의 책들을 그대로 베껴온 책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중국의 자연환경과 이 나라의 자연환경이 같을 리가 없는데 그걸 그대로 가져다가 백성들에게 농사를 가르치니 농사가 잘 될 리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때부터 관리들을 시켜서 전국 방방곡곡에 농사 잘 짓는 아주 농사의 전문가들을 찾아가라고 했습니다. 그분들을 다 만나서 하나하나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이 나라, 이 땅에 맞는 농법을 정리해서 내놓은 책이 농사직설이었습니다. 농사직설 그 책이 나오고 나서 모든 한반도 이 땅에 있는 농민들의 삶이 한층 더 윤택해지고 좋아졌음은 당연한 사실입니다.
세종이 모든 사람들을 만나고 행한 일들을 보면 현장 중심의 실무형이었습니다. 절대로 현장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사실 현장은 복잡한 일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문제가 일어나고 사고가 터지고 사건이 일어나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 문제가 있는 곳에 반드시 해결의 실마리도 있습니다. 세종은 그 일을 늘 염두에 두고 현장에 있는 백성들을 만나고 문제를 해결하기에 골몰했던 위대한 성군이었습니다.
1-2. 예수님의 현장 사역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본 본문에도 예수님의 사역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3년 공생애 기간을 보면 예수님도 현장을 단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주의 백성들이 살아가는 삶의 자리, 주의 백성들이 함께하는 그 자리를 절대로 떠나지 않습니다. 그분들과 함께 호흡하고 그분들과 함께 먹고 함께 마십니다. 그리고 그분들의 문제를 직접 손수 해결해 주신 분이 바로 우리 예수님입니다.
오늘 이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찾는 장면이 나옵니다.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제자의 자격에 합한 자를 방을 붙여놓고 이 자격에 합한 자는 오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직접 찾아가셨습니다. 현장에 가서 예수님 마음에 합한 자를 직접 주님이 불러내셨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나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합당한 제자의 자격을 갖춘 사람인지, 혹 나에게 부족한 것은 무엇이 있는지 우리 자신을 함께 돌아보는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성실함의 자격
2-1. 그물을 던지는 자
먼저 오늘 말씀 16절을 보겠습니다.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9절도 보겠습니다.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예수님이 첫 번째 제자 4명을 부르셨습니다. 그 첫 번째 두 명, 즉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실 때 그들은 그물을 열심히 갈릴리 호숫가에 던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두 명, 즉 요한과 야고보를 부르실 때 그들은 찢어진 그물을 하나하나 한 땀 한 땀 깁고 있었습니다. 이 네 분은 성실하게 자기 삶의 현장에서 그물을 열심히 던지는 자들이었고, 그물을 열심히 깁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갈릴리 호숫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 않겠습니까? 그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었던 사람들, 그물을 던지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베드로와 안드레처럼 열심히 마음을 다해 던지는 사람도 있었을 테고, 던지기는 던지나 영혼 없이 할 수 없이 던지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그물은 가지고 있으나 던지기 귀찮아서 일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물을 깁는 사람들도 꼼꼼히 열심히 깁는 사람, 그리고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열심히 깁지 않고 있는 사람, 아예 찢어진 채로 그냥 방치하고 있는 사람, 수많은 사람들이 갈릴리 호숫가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눈에 발견되고 띄인 사람들은 이 네 분입니다. 이 네 분의 공통점은 삶을 성실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성실함이 가장 중요한 자격이요, 가장 중요한 요건입니다.
왜 성실함이 예수님의 제자로서 중요합니까? 이것은 주님이 성실하시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이 성실한데 제자가 게으르면 어떻게 따라다니겠습니까? 선생님이 성실하면 제자는 그 두 배 정도는 부지런해야 됩니다. 그래야 따라다닐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성실은 아버지 하나님을 닮아 있습니다. 하나님이 성실하셔서 이 땅을 다 창조하셨습니다. 창조하시고 주님은 그냥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주님은 창조하신 이후에 끝까지 붙들어 주시고 운행하십니다. 지금도 우주 만물을 운행하고 다스리고 계십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이 우주 만물의 운행을 가만히 두시고 하루라도 손을 떼버리는 날이 있다면 온 우주가 재앙으로 뒤덮일 것입니다. 상상도 하기 어려운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지금도 성실하게 돌보고 다듬어가고 계십니다. 창조했다고 그냥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사람을 만들어 가지 않습니까? 훈련하시고 다듬어가시고 하나님 쓰시기에 좋게 빚어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아주 공교하게, 아주 섬세하게 우리 인생을 깎아가고 돌보시는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성실입니다. 하나님의 성실을 닮아 예수님이 성실하고, 예수님의 성실을 닮아 사랑하는 그 제자들도 성실한 자들이 되어 닮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이십니까?"라는 질문은 "성실하십니까?"라는 질문과 함께 동일할 것입니다. 사실 그물을 던지면서 인생을 저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똑같은 일상, 똑같은 인생에서 내가 왜 이런 일을 계속 반복하고 살아야 되는지 우리는 생업의 현장에서 불편하고 짜증을 낼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이는 그물을 깁는 일이 너무 고되고 귀찮다고 생각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일확천금을 꿈꿉니다. 그런데 그런 게으른 인생에는 주님은 절대 찾아오지 않습니다. 주님이 찾아오셔서 "너는 나의 제자다" 하고 부르시는 그 자리는 성실한 인생에 주님은 찾아오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주님께서 그 옛날 하나님이 모세를 찾아오셨을 때도 일하고 있는 모세를 찾아오셨습니다. 놀고 있는 모세를 찾아오지 않으셨습니다. 모세는 80이 넘은 노인이 되어서도 광야에서 양을 치고 짐승의 분뇨를 묻혀가며 열심히 일하고 있었습니다. 일하고 있는 모세에게 주께서,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가운데 찾아오셔서 그를 부르시고 이스라엘을 이끄는 목자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서 다윗을 찾으실 때도 다윗은 일하고 있었습니다. 들판에서 아버지의 양 떼들을 치고 있었습니다. 놀고 있지 않았습니다. 열심히 자기 삶의 현장에서 그물을 던지는 자, 열심히 양을 치는 자, 그물을 깁고 있는 자, 그들을 주님은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일하고 있는 직업의 현장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열심히 일하시기 바랍니다. 최선 다해서 일하시면 주께서 분명히 찾아오시고, 주님이 우리를 불러서 주님의 일을 맡기는 제자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2-2. 기질을 사용하시는 하나님
이제 주님이 찾아오실 때 이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살펴봐야 됩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그물을 열심히 던지고 있었습니다. 요한과 야고보는 그물을 깁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이분들의 성품 그대로입니다. 베드로의 성품이 어떻습니까? 일단 지르고 보는 성품 아닙니까? 일단 말하고 행동하고, 그리고 말부터 앞서고 행동부터 앞서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물을 열심히 던지고 있습니다.
상상력을 좀 발휘해 보면 함께 있던 안드레가 베드로를 말렸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그물만 던지지 말고 우리도 그물이 찢어진 데가 있는지 살펴보고 한번 깁고 그리고 그물을 던지자. 아마 베드로가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한 번 더 던져야 한 마리라도 더 잡을 것 아니냐, 좀 더 던지자. 열심히 그물을 던지는 사람. 그런데 이 베드로의 성격은 자기 스스로도 싫을 수 있습니다. 욱하는 성격, 행동이 먼저 나가고 말이 먼저 앞서는 성격, 그는 그런 성격적인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요한을 보십시오. 요한을 보시면 요한은 꼼꼼히 그물을 깁고 있습니다. 함께 있는 야고보가 아마 화를 내고 짜증을 냈을 수도 있습니다. 그물만 깁고 앉아있지 말고 나가서 좀 던지자고, 한 번이라도 더 던져야 한 마리라도 더 잡을 것 아니냐? 그럼 요한이 이렇게 말할 겁니다. 찢어진 채로 그물을 던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우리가 조금 더 꼼꼼히 깁고 그러고 나서 그물을 던지자.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그런데 사실 요한도 자신의 성격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겁니다. 여성스럽고 지나치게 신중하고 지나치게 조심성이 많은 그 성격이 자신도 아마 싫었을 겁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마구 나가는 성격과 요한의 지나치게 신중한 성격, 두 분의 공통분모는 성실함입니다. 성실하니까 주께서 그를 붙들어 그 기질대로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사용하시니까 앞서 나가는 성격은 열두 명 제자의 리더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훌륭한 보좌관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성령받고 나니까 초대 교회, 예루살렘 교회의 훌륭한 리더가 되었습니다.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훌륭한 리더, 교회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요한의 이 성실하고 조용한 성격, 자신은 너무나 싫어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가장 오래 살게 하셨습니다. 사도들 중에 가장 오래 살았습니다. 오래 살면서 그가 남긴 업적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을 기록했습니다. 요한 서신, 요한1서, 2서, 3서를 기록합니다. 요한계시록을 남겼습니다. 그는 꼼꼼하고 성실했기 때문에 주님의 음성을 하나하나 다 새겨들었습니다. 나중에 그는 그 꼼꼼한 성격으로 복음서를 아주 상세하게 잘 기록해 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그를 기질대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에도 베드로처럼 내 성격이 욱하는 성격이 있고 말이 앞서고 행동이 앞서는 성격이 있어서 나를 너무 싫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 중에 나도 요한처럼 너무 여성스럽고 소심해서 나도 내 성격을 좋아하지 않고 달가워하지 않는 분도 아마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주님 앞에 성실하기만 하면, 주의 손에 붙잡힌 바 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들어 사용하셔서 나를 깎으시고 연단하셔서 하나님 쓰시기에 가장 좋은 재목으로 만들어 가시리라 확신합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바 되면 내가 가진 기질도 주께서 붙들어 주셔서 하나님 쓰시기에 가장 좋은 도구로 분명히 사용해 주실 것입니다.
3. 우선순위의 선택
3-1. 그물을 버리다
이렇게 하나님은 성실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직접적으로 그들을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17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주님이 나를 따라오라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라고 하시니 그리고 나서 응답합니다.
먼저 베드로와 안드레의 응답입니다. 18절입니다. "곧 그물을 버려두고 따르니라." 그들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 다음 예수님의 부르심에 대한 야고보와 요한의 응답입니다. 20절입니다.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따라간 것은 다 공통점입니다. 그리고 버린 것도 공통점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안드레가 버린 것은 그물이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버린 것은 아버지였습니다. 그물은 생존을 위해서 가장 필수적인 도구입니다. 어부들에게서 그물은 먹고사는 가장 중요한 도구 아닙니까? 이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관계 중에 가장 중요한 관계가 부모님과의 관계 아닙니까? 모든 관계 가운데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어떻게 끊겠습니까? 그런데 야고보와 요한은 아버지를 배에 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오해하면 곤란합니다. 기독교 신앙이 생업도 버리게 하고, 기독교 신앙이 천륜도 버리게 하는 것인가? 이렇게 오해하면 곤란합니다. 성경을 보면 특별히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 임박한 종말론에 취해서 이제 곧 예수님이 오시니 일하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바울이 말했습니다. 열심히 일해라, 생업의 터전을 지켜라 말했습니다. 기독교는 생업의 터전을 지키는 종교입니다.
십계명의 다섯 번째 계명이 무엇입니까? 네 부모를 공경하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면서까지 제자인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셨지 않습니까? "보라 네 어머니라." 기독교는 천륜과 인륜, 부모 공경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종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 그물을 버렸다는 것과 아버지를 배에 두고 예수를 따랐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됩니까? 이것은 이해관계가 상충될 때 무엇을 선택해야 되는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먹고사는 생존의 문제와 주님의 부르심의 말씀이 서로 상충될 때 제자라면 무엇을 선택해야 되겠습니까? 생업의 문제, 돈 버는 문제와 하나님의 말씀이 서로 상충할 때 우리는 주의 말씀을 따라야 제자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관계들, 혈연관계로 대표되는 모든 인간관계들, 그 관계와 하나님의 말씀이 서로 상충할 때, 서로 부딪칠 때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되겠습니까? 그 선택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할 것입니다. 주의 말씀을 선택할 때,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제자라, 예수님의 제자라 인정함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3-2. 말씀을 앞세우다
오늘 우리는 이 시대에 복음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안타깝게도 오늘 이 시대 복음이 힘을 잃은 것을 발견합니다. 오늘 이 시대 많은 교회들이 복음의 힘을 잃고 능력을 잃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안타까워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옛날 한 세대 혹은 두 세대 전에 목사님들만 하더라도 그분들은 먹고 살 걱정을 그다지 하지 않았습니다. 그분들은 집에 찬거리가 없어도, 끼니가 없어도, 땔감이 없어도 복음 전하는 것을 사명으로 여기고 살았습니다. 오늘도 이곳, 내일은 저곳에 가서 복음 전도자로 열정적으로 복음을 외치며 살았습니다. 오로지 천국의 복음, 저 위에 있는 복음을 위해서 이 땅의 것은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때 복음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복음은 영향력 있게 이 땅에 퍼져가고 번져갔습니다.
그런데 오늘 안타깝게도 이 시대 수많은 목회자들이 먹고 살기 위해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생계형 목회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더 잘 먹고 더 잘 살기 위해서 목양을 하고 있는 아주 심각하고 불행한 현실 가운데 우리가 처해 있습니다. 이러니 어떻게 주의 복음이 능력을 덧입겠습니까? 더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먹고 살기 위해서 목양을 하고 있는 것, 잘 살기 위해서는 목회하지 않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더 잘 살기 위해서는 이 길을 걸어가지 않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비단 목회자뿐만이 아닙니다. 오늘 성도들도 이런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시대에 경제가 어렵다고 말합니다. 먹고사는 것이 너무 힘들다고 말합니다. 그 한마디 말 속에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사명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직분도, 하나님이 나에게 하라고 하신 일도 다 파묻혀 갑니다. 제가 너무 먹고 살기 힘들어서요. 경제가 힘들어서 이렇게 섬기기가 힘들겠습니다. 교회 봉사하기 힘들겠습니다. 주일 성수도 어렵겠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 속 내면을 하나하나 살펴보십시오. 그러나 우리는 남이 하는 것 다 하고 살지 않습니까? 갈 것 다 가고 해외여행 갈 것 다 가고, 일할 것 다 하고 내 집은, 내가 먹는 것, 내가 입는 것은 남부럽지 않게 하고 살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먹고 살기 힘들다는 핑계로 사명을 묻어놓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현주소입니다. 그러니 능력이 나타날 수 있겠습니까?
오늘 그물과 주의 말씀이 부딪칠 때, 생존과 주의 말씀이 충돌할 때 제자라면 주의 말씀을 먼저 선택하는 믿음의 백성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교회 안에는 수많은 관계들이 있습니다. 얽히고설킨 관계들, 수많은 관계들이 있지 않습니까? 혈연관계가 있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수십 년간 서로 알아왔던 관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관계들 때문에 복음이 짓밟히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저 사람에게, 내가 저분을 수십 년 알아왔는데 이 말을 어떻게 하고 살아갈 것인가? 그러나 이것이 정말 복음이라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말씀이라면 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한국교회를 수년간 힘들게 한 것이 세습 문제 아닙니까? 세습 문제도 결국 관계의 문제 아니겠습니까?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관계를 주의 말씀보다 아래에 두어야 하는데, 그 관계가 주의 복음을 집어삼켜서 오늘 교회의 거룩함을 상실하게 하는 잘못된 길을 교회들이 걷고 있지 않습니까? 이래서야 복음의 거룩함과 주의 말씀의 권능이 어떻게 나타나겠습니까? 우리 주변에 있는 수많은 관계들, 복음 아래에 복종시키기를 바랍니다. 모든 인간관계들, 모든 혈연관계도 주의 진리의 말씀 앞에 복종시키고 나아가는 주의 백성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결론
제자라면 성실하셔야 됩니다. 제자라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직업, 일터에서 열심히 그 일을 감당하시고, 내가 가진 기질 때문에 속상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내 성품과 내 기질을 붙들고 인도해 주셔서 하나님이 꼭 필요한 대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부디 그물보다 말씀을 더 위에 놓으시고, 우리의 생업을 위해서 말씀을 묻어두는 불행한 존재가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모든 관계들에 앞서서 주의 말씀을 먼저 놓으시는 하나님의 백성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