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강 / 주님은 원하신다 (1:40-45)

주님은 원하신다

본문: 마가복음 1:40-45

서론: 공격자와의 동일시

1974년 2월, 미국의 언론 재벌 윌리엄 허스트의 손녀가 납치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녀는 당시 스무 살이었고 UC 버클리에서 예술사를 공부하던 대학생이었습니다. 그녀를 납치한 조직은 미국의 도시 게릴라 조직으로 SLA라는 단체였습니다. 그들은 부자들을 겨냥하고 있었고 사유재산 철폐를 외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수사는 오리무중이었습니다. 아무리 뒤지고 또 뒤져도 두 달 동안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두 달 후에 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은행 강도 사건이 벌어졌는데, 총으로 무장하고 침입한 사람 중에 그 당시 실종되었던 윌리엄 허스트의 손녀 패트리샤 허스트가 카빈 소총으로 무장하고 나타난 것입니다. 사람들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사건 후에 그녀가 언론사에 배포한 테이프에는 "나는 SLA의 자랑스러운 일원이고, 이 대의를 이루기 위해서 죽을 때까지 싸우겠다"라고 말한 것이 드러났습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평범한 대학생이었던 한 여자가 두 달 만에 테러리스트가 될 수 있는가에 주목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결국 이 조직은 모두 체포되었고 재판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37년 형을 받고 복역하다가 자신은 강압에 의해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하고 나서 7년 형으로 감형되고, 나중에는 지미 카터 대통령의 특별 사면으로 석방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은 그녀의 행동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너무 강하게 은행강도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보다 1년 전인 1973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도 은행강도 무장 괴한이 침입했습니다. 당시 은행에 있던 손님들을 인질로 잡았습니다. 남자 세 명, 여자 한 명, 모두 네 명을 인질로 잡고 경찰과 6일 동안 대치했습니다. 6일간의 대치 후에 인질들은 석방되고 납치범들은 체포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네 명의 인질들이 걸어갔던 행보가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법정에서 납치범들에게 불리한 진술을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납치범들의 석방을 위해서 모금 운동까지 벌였습니다.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현상을 스톡홀름 증후군, 스톡홀름 신드롬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저 멀리 미국이나 스웨덴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며느리가 어떤 한 집안에 시집을 왔습니다. 아주 못된 시어머니를 만납니다. 수십 년 동안 아주 고된 시집살이를 했습니다. 욕하면서 저희 시어머니 때문에 죽을 것 같다고 했는데, 수십 년이 지나고 나서 자기도 모르게 어느덧 그 시어머니처럼 닮아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회사에 신입사원으로 들어갔습니다. 직장상사가 그렇게 괴롭힙니다. 1초도 가만히 두질 않습니다. 그 상사 때문에 죽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자신도 그 자리에 가고 나니 똑같이 신입사원을 괴롭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심리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가리켜서 '공격자와의 동일시'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심리적으로 도피처를 찾기 위해서, 심리적으로 살기 위해서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즉 이렇게 치부하는 것입니다. 내가 시어머니가 되어 보니까 그때 우리 시어머니가 왜 그랬는지 알겠어, 며느리들은 처음부터 다 잡아야 된다. 내가 이제 상사가 되어 보니까 이 자리에 오니까 이 신입사원들이 이렇게 발이 빠릿빠릿하지 않아서 회사가 돌아가지를 않는다. 그래서 신입사원은 이렇게 잡아야 된다, 그래야 회사가 돌아간다. 이런 식으로 자기를 공격했던 공격자와 동일시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테러리스트를 잘 몰랐는데 막상 내가 납치되어서 테러리스트들과 함께 있어 보니까 그들이 말하는 것이 하나도 틀린 것이 없더라, 그래서 나도 그들과 이제는 동의하는 사람이 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공격자와의 동일시입니다.

사탄은 이런 점을 아주 악용합니다. 사회는 이렇게 해서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합니다. 죄의 관성에 사로잡히고 죄가 주는 그 굴레에 발목 잡혀서 자기도 자신도 모르게 죄의 굴레에 빠져 드는 현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1. 나병 환자의 위대한 결단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에 보면 아주 훌륭한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분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악과 죄와 관습의 관성을 깨뜨렸습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살려 달라고 외쳤습니다. 저는 살고 싶습니다. 손을 내밀어 주께 도움을 청했습니다. 한 나병 환자 이야기입니다.

이분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도 혹시 지금 우리를 공격하는 사탄과 자기도 모르게 동일화시켜 버리고 그 굴레에 빠지고 갇혀서 살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 자신을 돌아보시고, 이 굴레가 있다면 깨뜨리는 축복의 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1-1. 복된 소식을 듣다

한 나병 환자에게 복된 소식이 들렸습니다. 예수님 소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회당에서 귀신을 쫓아내 주신 것과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신 일, 그리고 각색 병자들을 고쳐 주신 일이 그 나병 환자의 귀에 들렸습니다. 그분도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살려 달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사건입니다. 이 나병 환자는 굉장히 중요한 일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아마 어떤 분은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나병 환자가 살고 싶어서 주님 앞에 나와서 도움을 청하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입니까? 살려고 나왔는데 당연한 현상 아닙니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나병 환자의 삶의 현장을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 공동체가 어떤 집단들인지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1-2. 나병 환자의 삶

일단 나병 환자는 나병에 걸리면 제사장에게 가서 확진을 받았습니다. 자기 몸을 보이고 제 병이 나병이 맞습니까?라고 물어봅니다. 제사장이 당신의 병은 나병입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집에 와서 짐을 싸야 됩니다. 그리고 그 혼자 성 밖으로 내쳐집니다. 공동체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가정에서 쫓겨납니다. 직장에서도 쫓겨납니다. 성 밖으로 내던져집니다. 달랑 가방 하나 들고 성 밖에 나가보니 이미 먼저 나병 확진을 받은 사람들이 그곳에 모여 있습니다. 그들이 군집 생활을 합니다. 그들 나름의 공동체가 있습니다. 이제는 거기서 그들과 함께 부대끼며 살아갑니다. 생존을 배웁니다.

나병 환자는 죽을 때를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죽을 때까지는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죽을 때까지 살기 위해서 그들은 하루하루 함께 한 끼 구걸하고 동냥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일할 수도 없습니다. 경제생활 어떻게 합니까? 손이 다 짓물렀는데 몸이 그렇게 해서 어떻게 경제생활을 하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구걸을 하며 삽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구걸을 해주고 동냥을 해주고 먹을 것을 주는 사람들은 정상인들입니다. 정상적인 사람들은 나병 환자들을 싫어합니다. 그 당시 율법에는 나병 환자들이 가까이 오면 돌을 던져 죽여도 좋다고 기록돼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도 기술이 필요합니다. 동냥의 기술, 구걸의 기술을 선배 나병 환자에게 배웁니다. 어떻게 돌을 피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함께 식사를 해결할 수 있을지 배웁니다. 아침을 해결하고 나면 곧장 점심입니다. 점심을 해결하고 나면 저녁입니다. 그러면 그 다음 날은 어디서 구걸하지? 그들은 그 걱정밖에 없습니다.

처음에 가방 하나 들고 성 밖을 나설 때 그들도 희망을 가졌을 겁니다. 이제 나는 나아서 돌아오겠다, 회복되고 깨끗한 몸으로 돌아오겠다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하루 함께 벌어 먹고 구걸하고 살면서 그 희망은 온데간데없이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제 그들에게는 오로지 생존밖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죽기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 너무 아이러니하고 슬프지 않습니까? 그들은 그렇게 점차로 희망을 잃어가며 삶의 의지를 꺾어 가며 그저 먹기 위해서 사는 존재들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노숙인 사역을 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노숙자들이 처음에 노숙인들을 그 자리에 합류할 때 그들도 다 사연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가슴 아픈 사연, 가정과 일터에서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사연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도 노숙인이 됩니다. 한 달만 지나면 잘 적응한다고 합니다. 어떤 후원자가 나서서 옷을 주고 신발도 새 신발을 주고 일자리를 알선하고 이제 돌아가라고 하면 돌아갔다가도 다시 노숙인의 자리로 돌아옵니다. 왜냐하면 이미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생의 의지, 삶의 의지, 갱생의 의지가 그들에게는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나병 환자도 그 무서운 굴레 가운데 살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가 주님 앞에 나온 것이 위대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주님 앞에 살겠다고 손을 내민 것이 위대한 그의 결단이고 고백입니다.

1-3. 굴레를 깨고 나오다

그가 찾아와서 주님께 어떻게 말합니까? 40절 말씀입니다.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와서 꿇어 엎드리어 예수께 간구합니다. 예수님은 그가 어떤 사연을 통해서 여기까지 온 것인지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가 여기까지 올 때까지 넘어야 할 장벽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첫 번째는 그가 나병 환자 공동체라는 이 장벽을 넘어야 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구약부터 신약까지 나병 환자는 혼자 다니지 않습니다. 항상 무리를 이루어서 다닙니다. 열 명 단위 혹은 그 이상 단위로 같이 다닙니다. 왜냐하면 혼자 다니다가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돌을 던져서 돌에 맞아 죽어 버리면 나머지 나병 환자는 그날 구걸을 포기해야 됩니다. 사람들이 싸늘해져서 구걸과 동냥에 응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마 그날도 예수님에게 오는 날도 함께 열 명 혹은 그 이상이 동냥하기 위해서 나섰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너무 주님 앞에 가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자기 몸을 보이고 싶었습니다. 아마 함께하는 나병 환자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주님 앞에 왔을지도 모릅니다. 잠깐 내가 어디 다녀 오겠다 하고 주님 앞에 왔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그는 주님 앞에 와서 그 나병 환자 공동체의 관성을 끊고 깨고 주님 앞에 나와서 살아보겠다고 발버둥 치는 것입니다.

또한 그가 여기까지 올 때까지 넘어야 했던 장벽은 정상인들의 적개심 아닙니까? 정상인들이 손에 돌을 들고 그가 가까이 오면 돌을 던져 치겠다는 적개심이 있습니다. 들키면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위험과 어려움을 뚫고 주님 앞에 왔습니다. 이제 다시 나병 환자 조직에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이제 다시는 내가 가다가 돌에 맞아 죽어도 그렇게 죽으나 나병으로 죽으나 같은 것이니 주님 앞에 한번은 나와서 말해보고 알려 보고 싶습니다. 이 간절함으로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에게 생의 의지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살아보겠다는 의지입니다. 그런 불안감도 왜 없었겠습니까? 주님 앞에 왔는데 나는 너를 치유할 수 없으니 돌아가라, 이런 절망적인 말을 들으면 어떡하나 그 두려움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그런 두려움도 다 접어두고 뒤로하고 주님 앞에 나와 엎드렸습니다. 이것이 이 나병 환자의 위대한 점입니다.

2. 나병과 죄의 유비

성경은 전통적으로 나병과 죄를 유비적으로 동일한 선상에 놓고 있습니다. 나병과 죄가 왜 동일한가, 왜 비슷한가 한 세 가지 정도를 들 수 있습니다.

2-1. 시간이 지나야 드러남

첫 번째는 나병이나 죄나 시간이 한참 지나야 드러난다는 사실입니다. 처음에 나병에 걸리면 자기도 모릅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조금 지나면 내가 인식을 합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가장 가까운 가족들이 알아챕니다. 좀 더 시간이 지나면 동네 사람, 이웃들이 다 알아챕니다.

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죄인 줄 모르고 짓다가 나중에는 혼자 죄의 은밀한 낙을 즐기며 죄를 짓습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조금 더 이 죄가 진행되면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알게 됩니다. 그러나 멈추지 않습니다. 그러면 차츰차츰 이 죄의 관성은 모든 사람들이 다 알 때까지 죄를 짓습니다. 죄와 나병은 이렇게 일치되는 점이 있습니다.

2-2. 감각의 무감각

두 번째, 죄나 나병이나 영적 감각, 육체적 감각이 무감각해집니다. 나병은 눈썹이 빠집니다. 손톱이 빠집니다. 뜨거운 것을 잡아도 뜨겁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손마디가 떨어져 나가도 아픔을 느끼지 않습니다. 나병균이 들어가면 그렇게 몸이 망가지고 부서지고 그렇게 죽어가는 것입니다.

죄도 역시 마찬가지 아닙니까? 처음에 죄를 지을 때는 떨립니다. 손발이 떨리고 얼마나 무서운지 모릅니다. 그런데 차츰 죄를 지으면 양심이 화인 맞은 양심이 됩니다. 두려움을 상실합니다. 하나도 무섭지 않습니다. 담대하게 죄를 짓습니다. 대범해집니다. 영적으로 무감각해지기 때문입니다.

2-3. 고립됨

세 번째, 나병과 죄의 공통점은 고립된다는 사실입니다. 나병에 걸리면 공동체에서 살 수 없어 성 밖으로 내쳐집니다. 나병 환자들끼리 살아갑니다. 자기들끼리 군집을 이루고 삽니다. 죄가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죄도 역시 사람을 소외시킵니다. 죄는 아무도 자기를 소외시키지 않는데 스스로 죄의 굴레에 갇혀 버립니다. 스스로 그 굴레를 깨치고 나올 수가 없습니다.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우리는 가인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가인은 인류 최초의 살인자입니다. 자기 동생을 돌로 때려 죽인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에게 묻습니다. 네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 딴청을 피웁니다. 제가 제 동생을 지키는 자니까? 그러다가 그 죄가 백일하에 드러났습니다. 이제는 두려워합니다. 하나님, 나를 만나는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봐 두렵습니다. 저 살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표를 줄 테니까 이 표를 가지고 다니면 사람들이 너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 너는 내 앞을 떠나지 말고 이 자리를 지켜라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 앞을 떠나 버립니다.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하나님 앞에 있기 싫어서 결국 하나님을 떠납니다.

창세기 4장 16-17절 말씀입니다.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 성을 쌓았습니다. 성을 쌓았다는 것은 이제 하나님 보기 싫습니다, 내 눈을 가립니다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 말씀 듣기 싫습니다, 내 귀를 막습니다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향하여 내 마음을 열고 싶지 않습니다, 마음을 다 닫습니다라는 그 표현입니다. 가인은 이렇게 해서 영원한 멸망의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죄는 이렇게 자기를 공격한 사탄과의 동일시를 가집니다. 그래서 그 굴레를 깨치고 벗고 나오기가 상당히 힘이 듭니다.

그런데 다윗은 달랐습니다. 다윗이 얼마나 무서운 죄를 지었습니까? 간음 죄를 지었죠. 살인을 했죠. 이웃의 아내를 탐했습니다. 십계명 열 개 중에 세 개나 동시에 범했습니다. 나단이 찾아갔습니다. 다윗에게 당신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이 책망을 들을 때 그는 그 순간 그 자리에 엎드렸습니다. 회개했습니다. 그 회개하는 순간 자신을 둘러싸고 있었던 죄의 굴레에서 그 성을 허물고 거기서 기어 나와서 살려 달라고 손을 내미는 다윗이 된 것입니다.

가인과 다윗을 비교해 보십시오. 누가 더 큰 죄인입니까? 가인은 사람을 죽인 살인자입니다. 다윗도 사람을 죽인 살인자입니다. 가인은 여기서 그쳤습니다. 다윗은 간음을 했습니다. 이웃의 아내를 탐했습니다. 가정적인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가인은 영원히 하나님께 버림받았고 왜 다윗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었습니까? 그 성을 깨뜨리고 기어 나와서 살겠다고 하나님 앞에 눈물로 호소했기 때문 아닙니까? 이것이 위대한 다윗을 만든 지름길이 된 것입니다.

나병 환자, 그 당시 집단을 이루고 살았습니다. 수많은 나병 환자들이 살았는데 주님 앞에 나온 사람은 단 한 사람, 이 사람이었습니다. 이분 혼자 주님 앞에 나와서 살겠다고 살려 달라고 손을 내밀었을 때 그는 은혜를 덧입게 된 것입니다.

3. 주일 예배의 의미

우리가 주일날 주님 전에 예배드리러 나오는 것, 이것이 우습게 보이지만 결코 그 소홀한 일이 아닙니다. 아주 중요한 사건입니다. 한 주 동안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을 한번 돌이켜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죄악이 우리의 발목을 붙잡습니까? 죄의 진흙탕 가운데 뒹굴며 살지 않습니까? 그 죄의 관성이 붙잡아서 우리를 힘들게 만들지 않습니까?

죄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은 다 그렇게 사는 거라고,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사니까 너도 별수 없지 않냐고, 그렇게 살아야지 우리가 발을 공중에 띄우고 살 수 있는 사람도 아니고 일반인들인데 어떻게 성경이 말하는 대로 다 살겠냐고, 그렇게 자기를 합리화시킵니다. 그러면 또 나아가서 말합니다. 교회에 나가서 말씀 들어봐야 너에게 유익 된 것이 뭐가 있겠느냐고, 성경은 이상적인 것을 말하지만 우리는 일반적으로 사는 사람이니까 이렇게 살자고, 이렇게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고 자식들 교육시키고 살고 내 몸뚱아리 하나 지탱하며 살다가 시간이 되면 죽으면 그때 그다음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겠냐고, 세상은 그렇게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럴듯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에게 동조해 버립니다. 나를 공격하는 사탄과 동일화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 그 굴레를 깨고 주님 앞에 나오신 것입니다. 사탄의 그런 속삭임을 깨고 주님 앞에 나와 엎드렸습니다. 이렇게 나와서 주님, 내가 일주일 동안 이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살기 위해서 주님 앞에 나왔으니까 한량없는 은혜를 제게 베풀어 주십시오, 저로 살려 주십시오, 나병 환자처럼 내 몸이 썩어 가는 줄도 모르고 죄악으로 내가 죽어 가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살았는데 주님 살고 싶습니다라고 오늘 이렇게 예배의 자리에서 외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그런 주의 백성들에게 한량없는 은혜를 부어 주시리라 믿습니다.

4. 주님의 응답

찾아온 나병 환자에게 주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41절입니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4-1. 불쌍히 여기심

주님은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왜 불쌍히 여기셨을까요? 그 사람 온 과정을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가 여기까지 온 과정에서 넘어야 될 장벽들, 그 고통을 주님은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4-2. 손을 내밀어 만지심

주님은 불쌍히 여기신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손을 내밀어 그를 어루만져 주십니다. 그 당시 율법에 의하면 불가촉 대상들이 있습니다. 손을 대면 안 되는 사람들, 시체 그리고 나병 환자입니다. 나병 환자는 시체와 동급입니다. 이미 죽으나 다름없다고 여겼습니다. 시체나 나병 환자에게 손을 대면 그 부정함이 손대는 사람에게 전염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손을 대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정결 그 자체 아닙니까? 주님은 정결하시고 주님은 거룩하셔서 주님은 절대 오염되거나 전염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시체도 손을 대시고 죽은 자도 만지시고 나병 환자도 만지셔서 그의 병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손길이 그의 몸을 만질 때 예수님의 정결함이 그에게 옮겨져 갔습니다. 예수님의 따뜻한 손길이 그의 몸을 치유했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어떻게 만들었을까요? 손가락 끝만 댔겠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주님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 나병 환자의 환부를 하나하나 어루만지고 주께서 쓰다듬어 주셨을 것입니다. 함께 울어 주셨을 겁니다. 불쌍히 여기셔서 네가 여기까지 오면서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다 알고 있다 만지시고 어루만지시고 치유해 주십니다.

몸만 치유된 것이 아닙니다. 처음 나병 확진 받을 때 가방 하나 들고 가정에서 내쳐질 때 그 상처도 치유되고, 사람들에게 돌팔매질을 당했던 그 상처도 치유되고, 공동체에서 소외되었던 모든 상처가 그 순간 깨끗이 치유되었습니다.

4-3. 내가 원하노니

이어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예수님의 말씀은 라임이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나병 환자가 주께 나와서 한 말과 정확하게 운율이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나병 환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나병 환자의 말과 예수님의 말이 하나도 틀림없이 다 일치합니다. 주여 원하시면, 내가 원하노니.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그렇게 깨끗함을 받으라. 우리 주님은 나병 환자 말 한마디 한마디도 허투루 흘려 버리지 않으시고 다 일치하시고 그대로 이루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위대하신 사랑입니다.

결론: 깨끗함을 받으라

오늘 예배 드리기 위해서 죄악의 관성을 깨뜨리고 주님 앞에 나오신 우리들에게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기도한 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하나님께서 그 말 한마디 한마디마다 다 운율을 갖추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하게 되라. 그 깨끗함 가지고 이 세상에서 가감 없이 승리하며 당당하게 살아라. 어깨 펴고 살아라. 주께서 우리에게 그런 귀한 은혜를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 귀한 은혜를 매주마다 누리며 살아가는 주의 백성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악의 관성에 갇혀 살지 않고 주님 앞에 나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탄에게 지금까지 속아 왔습니다. 가도 안 될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살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이렇게 우리를 가두는 악의 관성에 갇혀 살았습니다. 주님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주님 앞에 나오는 이 나병 환자 같은 위대한 믿음이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가인같이 하나님 앞을 떠나 성을 짓고 살아가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오히려 다윗같이 주님 앞에 나와 엎드리며 회개하며 눈물로 주님 앞에 나오는 믿음의 백성으로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