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강 / 다시 가버나움에 오시다 (2:1-5)

다시 가버나움에 오시다 (막 2:1-5)

고려 말 공민왕 10년, 1361년에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이 갑자기 사망합니다. 이자춘은 당시 47세였고, 그가 맡고 있던 관직은 고려 국경을 담당하는 동북면 병마사였습니다. 또한 호부상서를 겸직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갑자기 사망했을 때, 그의 관직은 중앙의 요직은 아니었지만 굉장히 중요한 자리였습니다. 원나라의 침입을 억제하는 동북면 병마사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죽고 난 후 공민왕은 걱정이 되었습니다. 누가 이 일을 앞으로 성실하게 맡아서 감당할 것인가. 아니나 다를까, 그의 사망 후 5개월이 지나자 국경에서는 반란 사건이 일어납니다. 공민왕은 형부상서 김진을 파견하여 토벌을 지시합니다. 하지만 토벌에 실패했습니다. 반란군이 불꽃처럼, 들불처럼 일어났습니다. 아무도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고민 끝에 꺼내 든 카드가 이성계였습니다.

이자춘의 아들 이성계는 당시 27세의 장년이었습니다. 주변에서는 반대가 많았습니다. 한 번도 검증해 보지 않았고, 한 번도 역량이 드러나지 않은 청년을 어떻게 그 위험한 시기에 등용하느냐 하는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사실 대안이 없었습니다. 이성계가 잘해 주기만을 기다릴 뿐이었습니다.

왕명을 받들고 나간 이성계가 반란군을 멋지게 토벌합니다.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위대한 탄생이었습니다. 그로부터 1년 후, 중국의 원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고려로 내려온 홍건적이 있었습니다. 원나라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중국 대륙을 휩쓸고 고려까지 내려왔습니다. 홍건적은 고려를 야금야금 침략하다가 개경을 그들의 손아귀에 넣게 됩니다. 나라가 통째로 홍건적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공민왕은 다시 이성계를 부릅니다. 이성계는 여러 장수들과 힘을 합쳐서 개경을 다시 탈환합니다. 이제 그는 28세 청년으로 전국적인 스타로 발돋움하게 되었습니다.

만약이라는 가정을 해 보겠습니다. 만약 이성계가 이자춘의 아들로서 철없이 어린 젊은 시절을 보내고 있었더라면, 응석받이 무인의 아들로 그냥 그렇게 살고 있었더라면, 그에게 기회가 왔을 때 그는 그 기회를 붙잡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성계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무예를 자기 것으로 만들었고, 열심히 글 공부를 했습니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하늘이 그에게 기회를 주면 반드시 그 기회를 잡겠다고 기대하고 열심히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기회는 이렇게 준비된 자의 몫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조선을 창건하게 되는 태조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1. 은혜 받을 준비

그리스도인에게 기회를 잡는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똑같이 은혜를 주십니다. 오늘 이 자리에 나온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부어 주고자 하시는 은혜는 동일합니다. 하나님은 공평하게 모든 자들에게 은혜를 부어 주고자 하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은혜를 받을 만한 준비가 되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열심히 준비한 만큼, 그릇을 가지고 은혜를 받아들일 만큼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부어 주십니다. 내가 준비되지 않으면, 간절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아무리 은혜를 주고 싶어도 부어 주실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이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열심히 기도하고 준비하며, 간절하게 은혜를 소망하는 자들이 되어서 하나님 주시는 은혜를 마음껏 받아 누리고, 인생의 문제도 해결받는 귀한 은총이 있기를 바랍니다.

1절 말씀입니다.

"수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셨습니다. 다시 가버나움에 가셨다는 이 말을 미루어 보면, 주님이 언젠가 한번 가버나움에 가신 적이 있다는 말입니다. 언제 가셨습니까? 1장 2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예수께서 이미 가버나움에 가신 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네 명의 제자들과 함께 안식일에 가버나움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 가르침이 서기관들과 같지 않아서 사람들이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아주 놀라운 일이 있었습니다. 귀신 들린 자에게서 귀신이 떠나간 것입니다. 귀신 들린 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주님은 회당에서 나오셨습니다. 역시 가버나움에서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었는데, 그의 병을 고쳐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집에 모여든 가버나움에 있던 각색 병자들의 병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고쳐 주셨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가버나움에서 있었던 사건입니다.

그 후에 주님은 가버나움을 떠나서 갈릴리 각 마을마다 다니면서 전도하셨습니다. 그런데 가버나움에 한 명의 병자가 더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중풍병자였습니다. 그 중풍병자에게는 네 명의 친구가 있었는데, 친구들은 중풍병자 친구를 너무나 사랑하는 친구들이었습니다.

1-1. 간절한 기다림

그들이 나중에 소식을 들었습니다. 어떤 한 청년이 나타나서 귀신 들린 자를 고쳐 주셨다는 이야기, 그리고 그가 절망적인 상황에 있었던 열병 환자를 고쳐 주셨다는 이야기, 각색 모든 병자들을 다 치료하셨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 친구가 생각났습니다. 친구에게 달려갔습니다. 이름을 불러가며 말합니다.

"예수라는 분이 와서 이런 일을 행하셨는데, 우리 마을에 한 번 더 오시지 않을까? 한 번 오시면 그때 너도 가서 주님께 네 몸을 보이자."

중풍병자는 그 이야기를 처음 들을 때는 아마 반신반의했을 것입니다.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너무 확신 있게 네 명의 친구들이 와서 똑같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열립니다. 귀가 열렸습니다. 친구의 마음이 열리는 것을 보고 네 명의 친구가 이제 결단합니다.

"예수께서 한 번 더 우리 마을에 오시면, 다시 가버나움에 오시면 우리가 이 기회는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친구를 데려다가 예수님 앞에 보이겠다."

소원이 생겼습니다. 중풍 환자도 소원이 생겼고, 친구들도 소원이 생겼습니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요. 그렇게 세월을 보내고 시간을 보내면서 간절함은 더 깊어졌고, 기다림은 더 절실해졌습니다.

1-2. 뜻밖의 장애물

그러다가 주께서 가버나움에 다시 오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마음이 분주해집니다. 친구를 위해서 침상을 준비합니다. 네 명의 친구가 이 친구를 들고 그리고 주님이 계시다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웬걸요, 의외의 장애물을 만납니다.

2절을 보시겠습니다.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수많은 사람들이 구름 떼같이 그 예수님 계신 곳에 운집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가서 단순하게 예수님 만나고 안수기도 받고, 말씀 듣고, 그리고 고침을 받고 돌아오면 되겠다."

그런데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인파들이 그곳에 모여 있었습니다. 굉장히 놀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너무 오래 기다려 왔기 때문에, 간절하게 기다렸고 소원했기 때문에 그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즉흥적인 마음이었다면, "예수라는 사람이 한 번 왔다 하는데 얼굴이나 보고 올까, 설교 한 번 듣고 올까" 하는 마음이었다면, 사람들이 그렇게 구름 떼같이 모여 있었으면 "약 때가 아닌가 보다, 돌아가자. 귀찮은데 이거 어떻게 다 기다려, 돌아가자" 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간절해 왔기 때문에, 주님이 다시 우리 마을에 오셨는데 세 번째 오실지 안 오실지 모르기 때문에,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나는 다시는 병 낫지 못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지금 이 기회를 흘려보내면 내 친구는 영원히 중풍병 환자로 살아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그들은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습니다.

1-3. 지붕을 뚫는 믿음

그래서 중풍병 환자는 자신이 들것에 실려 나온 이 모습이 남들에게 보이기 싫고, 부끄럽고, 수치스러워 봐도 그래도 주님 앞에 나아가려고 작정했습니다. 뒤돌아설 수가 없었습니다. 네 명의 친구들, 방법이 없었는데 그러나 돌아갈 수도 없었습니다. 누군가 외쳤을 것입니다.

"지붕으로 올라가자!"

지붕으로 올라가서 먼지를 날리며 지붕을 뚫습니다. 온몸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지붕을 뜯어냅니다. 사람들이 아마 수군거리고 욕하고 소리 질렀을 것입니다. 말씀 듣는데 무슨 짓이냐며. 들것에 줄을 달아 설교하고 계신 예수님 앞으로 환자를 달아 내렸습니다.

열심히 준비하고 간절한 마음을 가지면 어떤 장애물도 이렇게 극복할 수 있습니다. 장애물을 극복하지 못하는 이유는 간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절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 구경꾼과 간절한 자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저런 핑계를 댑니다.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자격지심이 있습니다. 내가 이런 모습으로 교회에 나와도 될까요. 나는 배우지도 못하고, 가진 것도 없고, 학벌도 없는데, 나는 외모도 이런데 교회 공동체 생활을 해도 될까요. 사람들이 이런저런 말로 나를 힘들게 합니다. 이렇게 입으면 뭐라 하고, 저렇게 입으면 뭐라 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 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의 상처가 심합니다. 교회에 나오기 힘듭니다.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절실하지 않아서, 간절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든 내가 어떤 모양이든 그것이 무엇이 중요합니까? 하나님 앞에서 간절한데, 내가 두 번 다시 기회를 놓치면 나는 영원히 주님을 만나지 못할지 모르는데, 그 절실함이 나에게 있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말하든, 내가 어떤 환경에 있든 그건 전혀 고려할 상황이 아니고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아직까지 우리가 그런 핑계처럼 핑계 대고,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발걸음을 더 과감하게 내딛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절실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간절하게 준비하고 기도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2-1. 마지막 예배처럼

오늘 이 중풍병자는 돌아설 수가 없었습니다. 언제 다시 이런 기회가 자신에게 찾아올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예배를 드립니다.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 항상 이 자리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다음 주도 똑같이 이 자리에 와서 예배드릴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여기에 누가 있는지요. 우리는 다음 주에 이 자리에 앉아 있을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주님만 아실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자리에서 드리는 이 예배가 내 인생의 마지막 예배인 것처럼 철저하게 준비하고, 간절하게 기도하고, 이 자리에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데, 이것이 내 것이 되기를 소망하는 절절한 마음으로 철저히 준비하고 이 자리에 나와야 합니다. 그런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고, 그런 자에게 성령의 역사가 충만하게 임할 것입니다.

2-2. 걸림돌이 되는 자

그렇다면 예수님 당시에 그 집에 모여든 수많은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단언컨대, 그들 중에 이 중풍병 환자 친구들보다 간절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단언할 수 있느냐고요? 이 중풍 환자보다 더 간절하고 친구들보다 더 절실한 사람이 있었다면 성경에 기록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의 이름이 나왔을 것입니다. 그의 사연도 소개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예수님을 구경하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지, 이전에 가버나움에 오셔서 그런 일을 하셨다 하는데 이번에는 어떤 일을 하실지 궁금해서 온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는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진실로 은혜 받고자 하는 자들, 진실로 준비된 중풍병자 같은 자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사람들이 됩니다. 걸림돌이 됩니다. 자기도 주님 앞에 들어가지 않고, 자신도 은혜를 받지 않고 구경만 하는 자리에 서서 인간의 장막을 치고 진실로 은혜를 받으려고 하는 자의 앞길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될 뿐입니다.

지붕을 뜯는 절실한 자들에게 고함지릅니다. 소리를 지릅니다. 왜 조용하게 예배 드리지 못하게 그렇게 지붕을 뜯고 있느냐고 소리 지르는 자, 걸림돌이 되는 것 아닙니까? 들것에 실려서 나온 중풍병 환자에게 이런저런 말을 합니다. 혀를 찹니다.

"뉘 집 아들이고 뉘 집 형제인데 저렇게 되었다고 저걸 보라고."

그런 말로 사람에게 상처를 줍니다. 자신은 절실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은혜 받고자 하는 자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어떤 부류이십니까?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와서 지붕을 뜯고자 하는 열정으로 주님 앞에 나오는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나도 들어가지 않고 은혜 받고자 하는 자를 가로막고 방해하는 걸림돌입니까? 부디 우리가 중풍병자와 친구들 같은 간절하고 절실하고 준비된 자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믿음을 보시는 주님

이렇게 나온 자들에게 우리 주님은 은혜를 주십니다. 5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주님이 보신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보시는 것은 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외모를 봅니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봅니다. 얼마나 이쁜지, 얼마나 잘생겼는지, 얼마나 키가 큰지, 얼마나 좋은 옷을 입었는지, 얼마나 좋은 학교를 나왔는지 사람들은 외모를 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믿음을 보십니다. 그 중심을 보시고, 그 생각을 보시고, 얼마나 이 자리에 나올 때까지 간절함을 가지고 준비하고, 설레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나왔는지 믿음을 보십니다.

3-1. 외모가 아닌 믿음

중풍병자의 몰골과 외모를 생각해 보십시오.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 있었기 때문에 냄새가 저 멀리서부터 풍겨 왔을 것입니다. 피골이 상접하여 눈 뜨고는 보지 못할 외모였을 것입니다.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이는 빠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몰골로 주님 앞에 들것에 들려서 나왔습니다. 사람들이 위에서 이렇게 다 내려다봅니다. 사람들은 그의 외모를 보고 혀를 차고 "불쌍한 인생"이라 말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의 외모에 상관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보시지 않습니다. 오직 그 자리에 나올 때까지 소원을 얼마나 가지고 왔느냐, 얼마나 간절히 했느냐, 얼마나 뜨거웠느냐, 그 마음만 주님은 보고 계십니다.

친구들이 지붕을 뜯느라 하얀 먼지가 온몸을 다 뒤집어썼습니다. 몰골이 말이 아닙니다. 주님은 그들의 몰골을 보시지 않습니다. 먼지를 뒤집어 쓴 모습을 보지 않습니다. 그들의 손에 지붕 뜯다가 난 상처도 보지 않습니다. 주님은 오직 그 친구 하나를 살리기 위해서 나온 그들의 믿음만 보고 계십니다.

3-2. 믿음을 내어놓는 자

믿음을 보시는 주님 앞에 자신 있으십니까? 오늘 이 자리에 예배드리기 위해서 나온 우리의 믿음을 주님은 하나하나, 한 사람 한 사람을 꿰뚫어 보고 계십니다. 얼마나 자신 있으십니까? 차라리 주님이 믿음을 보지 않고 외모를 보신다고 했으면 얼마든지 꾸밀 수 있는데, 화장 예쁘게 하고 좋은 옷도 입고, 그런 척 그렇지 않은 척 할 수 있는데, 믿음을 보신다고 하니 숨길 길이 없습니다. 가릴 것이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믿음을 보시는데, 그 주님의 시선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있으십니까? 믿음을 보시는 주님 앞에 당당하고 자신 있게 주님 앞에 나와서 "제 믿음을 보십시오" 하고 꺼내 놓기 위해서는 잘 준비하셔야 됩니다. 이 중풍 환자와 친구들처럼 오랫동안 기다리고 철저하게 준비하고 그리고 나오셔야 됩니다. 믿음을 보시는 주님께 우리가 보여 드릴 수 있는 건 믿음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4. 영혼의 중풍병

믿음을 보시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사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이 말씀은 이 중풍 환자에게는 기대했던 말씀은 아닐 것입니다. 중풍 환자가 주님 앞에 나올 때 왜 나왔습니까? 낫고 싶어 나온 것 아닙니까? 중병에서 낫고, 뛰어다니고, 일어나고, 이제는 지긋지긋한 병상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주님 앞에 나온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일어나라"라고 말씀해 주셔야 되는데, 그건 주님의 첫 번째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첫 번째 주님의 관심사는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영혼의 중풍병에서 그를 해방시켜 주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육체만 보기 때문에 육체만 회복되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더 심각한 병은 영혼의 중풍병입니다. 사탄이 우리 영혼을 꼼짝 못하게 영혼의 사지를 결박해서 놓고, 죄가 우리를 묶어놓고 꼼짝도 하지 못하게 하고, 사탄이 우리 영혼의 혈관을 막아 놓고 살아 숨 쉬지 못하게 하고 있는데, 우리 예수님은 믿음을 보십니까? 그의 영혼을 뚫어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걱정하지 마라, 작은 자야. 이제 내가 선포하노니 사탄이 너의 영혼을 이제는 결박하지 못할 것이다. 너는 자유한 자가 되었다."

이 선포입니다. 이것은 이 환자에게, 이 중풍병자에게 대단히 위대한 선포요 가장 필요한 선포입니다.

그 당시에 예수님 집 앞에 몰려와서 주의 말씀을 듣고자 했던 수많은 사람들 중에 사지 육신 멀쩡하나 그의 영혼이 사탄에게 사로잡히고 발목 잡혀서 결박당한 영혼의 중풍병으로 고생하는 자가 한둘이었겠습니까?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런 자들을 향한 주님의 일갈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멀쩡한 육체를 가지고 나왔으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물어보십니다.

"너는 나에게 보일 믿음이 있느냐?"

있다면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믿음을 보여라."

믿음을 보이면 우리 영혼을 붙들고 있는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시켜 주실 것입니다.

5. 친구를 주님 앞에

사랑하는 친구를 예수님께 데리고 나와서 주님의 은혜를 받고, 그의 영혼의 중병이 먼저 치유되도록 도운 것은 이 친구들의 역할이 절대적입니다. 이 친구들은 그 뜨거운 마음을 가졌습니다. 얼마나 그 뜨거운 마음을 가졌는지, 아마 이들은 어릴 때부터 가버나움이라는 동네에서 같이 뛰고 같이 놀았던 동네 친구들이었을 것입니다. 미래를 향한 꿈을 키우고, 우리는 커서 이런 사람이 되자, 우리는 커서 이런 꿈을 가지자, 아마 그렇게 큰 꿈을 가졌던 친구들일 것입니다.

그중에 하나가 중풍병에 걸렸습니다. 네 명의 친구는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이 친구를 생각할 때마다, 이 친구를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파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소문이 들렸습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치유하는 은혜를 가졌다고. 그 이전에 온갖 일을 다 해 봤지 않겠습니까? 좋은 의원을 만나게 하고, 좋다는 약은 다 가져다줬을 텐데 별반 효험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예수를 전하고, 예수의 소식을 그 친구에게 전달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마음이 열리자 그 친구를 데려다가 주님 앞에 데려다 놓았습니다. 어떤 장애도 극복하고 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다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사랑하는 가족, 자녀, 형제, 일가친지, 일가친지 형제보다 더 가까운 친구들도 다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육체는 멀쩡한데 영혼이 중풍병에 걸려서 꼼짝도 못하고, 사탄에게 결박당한 채 살아가는 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향한 절박함을 가지고 계십니까? 그들을 향한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계십니까? 그들에게 예수의 사랑과 예수의 은혜를 전하고 계십니까?

그 절박함과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고 전하셔야 됩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주의 제단에 함께 모시고 나오고, 그래서 "주님, 제가 이 친구를 데려왔으니 나머지는 주님이 하십시오" 하고 주님의 제단에 사랑하는 자를 함께 드리는 그런 내가 있기를 바랍니다.

6. 다시 오시는 기회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한 번 가버나움에 오신 주님은 다시 반드시 오십니다. 첫 번째는 내가 미련해서, 첫 번째는 내가 무지하고 잘 몰라서 그 은혜를 흘려버리고 말았다면, 두 번째는 절대로 놓치시면 안 됩니다. 주님 다시 찾아오실 때는, 주께서 나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실 때는 절대로 놓치지 말고 그걸 꼭 붙들어야 됩니다. 간절하게 기대하고 기다렸다가 그걸 꼭 붙드시고, 그걸 붙들려 하는데 어떤 장애나 어려움과 고난이 있어도 극복하여야 됩니다.

지붕을 뚫는 믿음으로 극복하시면 그 믿음을 주님은 보십니다. 믿음을 보시면 우리에게 꼭 필요한 하나님의 선물을, 하늘의 선물을, 은총을 부어 주실 것입니다. 그 귀한 은혜를 인생 가운데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